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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빌라도의 예수 심문과 사형선고 및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장례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제 11-16장까지 이어지는 주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 승천에 대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또한 좁게는 제 11-15장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따라 본래 제 2위 성자이셨으나 죄인의 구속을 위하여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주님의 구속 사역의 결정적 성취인 십자가 수난 사건을 다루는 수난 주간 일련 기사의 종결 부분이다. 이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은 제 11장 개관을 보라.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메시야요 구속주로서 택한 성도 만인의 구원을 위한 구속사역을 성취하러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신 예수의 구속사역의 결정적 성취요,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 수난사건(the Crucifixion)을 보도하고 있다. 하나님이 태초 아담의 범죄 이후 세워주신 구속의 법이 보도된 예수의 사역으로 성취되어 이제 우리 죄인들이 구원 받기 위한 법적 요구가 충족되었음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서 구속사(救贖史)의 절정인 십자가 수난사건 전·후를 보여 주는 본장의 기사를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5절은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당시에 처형권이 없던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로마 총독인 빌라도(the Pilate)에게 이첩시킨 사실을 보도한다. 그리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처형에는 타락한 구약 선민인 종교 지도자들과 당시의 세계의 제패자였던 로마 정부가 동참하게 되었다. 이는 사단(the Satan)이 그야말로 모든 동원 수단을 가동시켜 예수를 죽이도록 획책하였음을 보여 준다.
6-15절은 당시 유대의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확인하고 소극적으로나마 주 예수를 풀어 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부득이 예수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한 기사가 보도된다. 구속사의 실체를 바로 깨달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진리 위에 바로 서지 않는 자는 이 세상의 권세자(엡 2:2)인 사단의 갖은 유혹과 술수에 말려 자의든 타의든 결과적으로는 주님을 반역하는 자의 무리에 가담하게 되고 마침내 저주 받는 자리에 동참할 수밖에 없음을 빌라도의 경우가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하겠다.
16-20절은 만왕의 왕이신 주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기 전에 로마의 포악한 병정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시는 장면이다. 이는 우리 추악한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전 우주의 창조자요 왕이시요 궁극적으로도 제 2위 성자(聖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가지신 겸손과 인내가 그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반증해 주는 장면이다. 실로 구속사는 냉철한 원리와 준엄한 법과 아울러 놀라운 성부, 성자, 성령의 뜨거운 사랑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21-32절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처형과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모독한 범죄를 보도하고 있다. 처형자들은 예수의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하였다. 그들은 모르고 이렇게 하였지만 참으로 주님은 참 유대인 곧 하나님이 참으로 택한 모든 영적 선민에게 구속을 주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바로 주님께서 이를 주장하시는 것은 신성 모독이요. 정치적 반란이라고 규정하여서 주님을 처형했지만 사실 주님은 훗날 부활 승천하셔서 자신이 참 유대인의 왕이심을 입증하셨을 뿐 아니라 세상 끝날 자신의 왕권을 전 우주적으로 발휘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의 십자가 위에 매달은 죄패(罪牌)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무지와 모독 그리고 사단의 갖은 책략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을 관철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주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한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의 옷을 나누며 그를 조롱하던 자들의 형태는 주의 죽음이 실제로 죄가 있거나 힘이 없어 이 수난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당하시는 구속 수난임을 모르는 어리석은 행위인 동시에 무고한 죽음을 당하는 의인의 죽음을 조롱하는 악한 행위이기도 하였다. 나아가 영적으로는 그 옛날 스스로 타락한 후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멀어지게 한 사단(the Satan)이 이제는 아예 하나님의 아들 자체를 죽이려고 하는 범죄에 동참한 구속사적 범죄이기도 하였다. 이들의 이처럼 어리석고 악한 행동은 잠시 후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그야말로 구속사적 범죄요, 어리석은 도전에 불과하였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사단은 겨우 여자의 후손 곧 성육신한 예수의 발뒤꿈치를 문 것에 불과했지만 예수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머리를 쳐서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할 것이라던 태초의 예언(창 3:15)이 결정적으로 성취되었으며 세상 끝날 마침내 최종 실현될 것이다. 한편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救贖事役)과 그 결과 도래할 천국 구원을 믿지 않으며 오히려 조롱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이들도 그 옛날 예수를 못 박은 유대인들의 행동이 곧바로 악한 범죄요, 어리석은 소행임이 판명되었듯이 세상 끝날 그 어리석음과 악함에 대하여 구속사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다음 33-41절은 마침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구속사역을 위한 수난을 마치시고 마침내 운명하신 사건을 보도한다. 그리고 이에 동반하여 주의 수난이 메시야의 구속사역으로서 구속사적 사건임을 입증하기 위한 여러 징조들이 동원되어서, 심지어 예수 처형의 책임자였던 로마 백부장까지도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방금 처형한 예수가 메시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음이 보도된다. 특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성전의 지성소(the Most Holy Place) 앞에 위치하여 죄로 오염된 인간과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관계의 단절을 상징하던 지성소 휘장(the Curtain)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차단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예수의 능동적인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그 죄가 해결됨으로써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결과로 창조 당시의 원래 관계로 회복되었음을 보여 주신 구속사적 증표(救贖史的 證票)였다. 또한 역으로 그 수많은 양의 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괴리가 우리 주 예수의 죽음으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제거된 것은 우리 주 예수의 죽음이 전 시대의 모든 택한 자들의 구속을 위한 유일하고 영원한 어린 양으로서의 수난이었음을 증거해 준다. 그리고 주의 임종 장면을 훗날 예수의 부활 목격한 당사자들이기도 한 여러 여인들이 생생히 목격하였음을 부기하고 있다. 이는 결국 다음 단락의 예수의 장례 기사와 더불어 주의 죽음이 분명한 죽음이었음을 강조함으로써 잠시 뒤의 주의 부활은 참으로 죽음을 이기고 스스로 부활한 놀라운 사건으로서 구주 예수의 능력과 그분의 복음의 신실성을 입증하신 것임을 강조하려는 저자 마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이 임종 기사의 보도는 실로 예수의 죽음이 한 자연인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예비되고 성취된 메시야 예수의 구속사역의 성취로서의 죽음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마지막 단락인 42-47절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자기 소유의 무덤에 장사 지낸 사실에 대한 보도이다. 이를 병행 기사인 마 27:57-66의 기사와 연결시켜 종합적으로 이해할 때에 먼저 이는 우리 주 예수의 죽음이 임종하여 묻히기까지 하신 완전한 죽음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일부 주의 부활을 반대하는 자들이 주장하듯이 주의 부활이 주님의 시신을 다른 곳에 숨겨 두고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 아니라는 증거 구절이 된다. 어쨌든 예수의 죽음을 영원한 죽음으로 만들려는 사단의 사주를 받은 지도자들의 최후의 발악은 무위로 돌아가고 십자가상에서 택한 죄인의 죄값을 온전히 치루기 위해 하나님께 완전한 버림을 받고 죽어 묻히기까지 하신 주님은 마침내 부활하셨으며 이를 경비까지 했던 그들의 소행은 역으로 부활(復活)의 진정성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이상의 본장을 결론적으로 요약할 때 주의 십자가 수난(the Crucifixion)은 사단의 사주(엡 2:2)를 받는 세상 권력의 대표인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정부의 결탁에 의한 무고하고 처절한 수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처형 과정은 이미 구약의 말씀대로 완성된 것으로서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패배자의 종말처럼 보였으나 실은 택한 죄인을 구하시기 위한 구속사역의 성취로서 오히려 이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참되고 영원한 메시야가 되기 위한 구속주로서의 잠시의 희생을 치룸으로써 영원한 승리와 평화가 시작되었음이 강조되고 있다.
마가는 이를 강조함으로써 결국 예수가 세상의 배척은 받았으나 이를 오히려 당신의 구속사역 성취의 기회로 삼으시고 또 이를 이기고 부활 승리 하셨듯이 자신의 복음서의 1차 수신자인 그 시대의 성도들로서 로마 제국의 박해에 직면해 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박해는 받겠으나 그것은 잠시이며 오히려 구원을 얻는 지름길에 불과하고 곧 구원 승리를 얻을 것을 확신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외울 말씀
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4)
빌라도의 예수 심문과 사형 선고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6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13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매맞고 희롱당하시는 예수
16 ○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18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의 십자가 수난
21 ○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 (번역하면 해골의 곳) 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 삼 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예수의 임종
33 ○ 제 육 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예수의 장례
42 ○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 주제-15:1-22 예수의 성육신과 수난의 필연성
본권 막 10장 자료노트 참조
난제해설-15:1-15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자세와 책임 문제
눅 23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15:1,3 사람들에 의한 예수의 고통
1. 동족에게 경멸당하심(마 27:25)
2. 군중들에게 비웃음을 당하심(마 27:39,40)
3. 장로들와 서기관들에게 결박당하심(막 15:1)
4. 대제사장들에게 거짓 고소당하심(막 15:3)
5. 가룟 유다에게 배반당하심(눅 22:47,48)
6. 헤롯과 그 군병들에게 희롱당하심(눅 23:11)
7. 관원에게 조롱당하심(눅 23:35)
8. 십자가상이 한 강도에게 비방들으심(눅 23:39)
9. 빌라도에게 능욕 당하심(요 19:1-10)
10. 군병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심(요 19:23)
삽화-15:15, 로마 채찍
로마 채찍은 범죄자의 신분에 따라 달랐는데, 노예나 타국인, 사형 언도를 받은 자에 대한 채찍은 막대의 한 끝에 몇 개의 가죽 끈을 매고, 그 가죽 끈에 금속 고리를 끼운 것이었다.
도표-15:33-41 버림받으신 주님
예수는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으나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그분의 신성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죄인을 위한 구속주로 오셔서 죄인을 위해 고난 받으시고 배척 받으신 것을 나타내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버림받으심으로 인해 그분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받아드려지게 되었다. 다음 도표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누구로부터 버림받으셨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1. 세상으로부터(요 1:10)
2. 동족으로부터(마 27:1,2,22)
3. 고향, 나사렛에서(눅 4:16-30)
4. 형제들로부터(요 7:5)
5. 제자들로부터(막 14:50)
6. 십자가상에서 성부에 의해(막 15:34)
지리배경-15:22, 골고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께서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골고다'라는 곳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이에 골고다가 과연 어떠한 곳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성경의 사실들을 보다 현장감 있게 이해해 보고자 한다.
1. 명칭
'골고다'(Golgotha)란 '해골', '두개골'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굴갈타'의 헬라어 음역으로 '해골의 곳'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그곳이 공개적인 처형장소로서 주변에 해골이 널려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제롬)과 그곳의 모습이 사람의 해골과 같은 형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고든)이 있으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Vulgata)는 '해골'이라는 뜻의 헬라어 '크라니온'( )을 '갈바리아'로 번역했다. 그래서 이에서 영어 '갈보리'(calvary)가 유래하였다(KJV, 눅 23:33). 한글 개혁 성경에는 '갈보리'라는 명칭이 나타나지 않고, 마 27:33; 막 15:22; 요 19:17 모두 '골고다'로 나타나 있다.
2. 위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수난의 언덕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城)부근의 공개적 형장이라는 것 외에 오늘날 그 정확한 위치가 규명되지 않고 있다. 골고다의 위치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견해가 다양한데. 그 중 다음 두 장소가 유력 하다.
①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 견해로, 현재 예루살렘 시 성벽 내부에 있는 '성묘지의 교회'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의 자리이다. 이 교회는 A.D.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에 의해 확정된 이래, 전통적인 골고다의 위치로 알려져 왔다. 이 교회 내부에는 약 3m 높이의 바위더미가 있다. ② 예루살렘 시 성벽 밖, 현재 다메섹문의 북동쪽 약 230m 지점, 소위 '예레미야의 동굴' 위쪽의 언덕인 통칭 '고든의 갈보리'라는 곳이다. 한편 성경의 기록에 의거하면,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밖(히 13:12) 가까운 곳으로(요 19:20), 큰길 부근에 있었으며(마 27:39), 먼 곳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언덕(막 15:40; 눅 23:49) 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로 볼 때 '고든의 갈보리'(Gordon's Calvary)를 성경 기록에 좀 더 부합되는 골고다의 위치로 추정할 수 있다.
3. 유적
오늘날 골고다로 유력시되는 '고든의 갈보리'는 1849년 성서 고고학자 고든(Gordon)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고, 탐사 결과 많은 면에서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였다. 즉 그리스도께서 성문 밖에서 죽었다는 암시대로(히 13:12) 예루살렘 제 2성벽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약 20m 가량의 등근 구릉과 그 아래 있는 두 굴의 모습은 마치 인간의 두개골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아울러 먼 곳에서도 뚜렷이 돋보이는 지점과 바위를 뚫고 만든 무덤들이 있다. 그리고 유대 전승은 그곳에 형장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4. 영적 교훈
골고다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치욕과 죽음의 언덕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사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구원의 언덕이요 소망의 언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이 괴롭고 지칠 때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의 대속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새 소망을 얻어야 하겠다. 아울러 예수께서 이 시련의 골고다 언덕을 통과하신 후 영광의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듯 우리도 '십자가 후 면류관'이라는 진리를 깨달아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나의십자가를 지고, 또 나의 죄를 골고다 십자가에 부단히 못 박아야 하겠다(마 16:24; 갈 5:24).
원어연구-15:43, 당돌히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을 보면 '톨메사스'( )로 나와 있다. 이것은 동사 '톨마오'( )의 부정과거 분사형 이다. 여기서 동사 '톨마오'는 '용감하다'(롬 5:7), 또는 '담대하다'(빌 1:14; 고후 10:2) 및 '감히 ~하다'(마 22:46; 눅 20:40)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동사가 본문에서는 부정과거 분사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주동사를 수식하는 부사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문자적인 의미는 '용감하게'(boldly) 또는 '담대함을 가지고'(took courage)라는 뜻이 된다.
한편, '톨마오'는 한계로서의 '도달점'(히 3:6; 벧전 1:9) 내지는 '목적'(딤전 1:5)을 뜻하는 '텔로스'( )의 어간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이는 자신의 한계나 담대함을 드러내는 것을 뜻하며 특별히 객관적이거나 행동상에 있어서의 담대함을 가리킨다. 주관적이거나 각정적인 면에서의 '담대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는 '달래오'( )가 있다(고후 5:6 ; 히 13:6).
결론적으로 본절에 나타난 바 '당돌히'라는 의미는 아리마대 요셉이 행동으로써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의 시체를 구했다는 뜻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는 한글 개역 성경의 '당돌히'라는 표현이 '무례하게'라는 의미를 줄 수 있는 약점이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이 같은 번역은 원어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는 당시 요셉이 한낱 주관적인 잠정에만 머무르지 아니하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도 아랑곳없이 겉으로 드러난 실천적인 담대한 행위로 이방인 총독에게 나아가 자신의 구할 바를 구했다는 데서, 예수에 대한 그의 평소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보감-15:38, 찢어진 성전 휘장
예수께서 운명하신 그 순간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지닌다. 즉 일 년에 단 한번 속죄일에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레 16:1,2) 지성소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것이다. 즉 성전 휘장이 상징하는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제 성전 휘장의 찢어짐이 보여주듯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것이다. 이는 또한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으나, 친히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의(히 3:1) 죽으심으로 신약 시대 의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의 자격으로 직접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벧전 2:9).
1. 그리스도를 통해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벧전 2:5,9)
2.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구원을 얻음(히 10:19-22)
3. 그리스도의 단번의 죽으심으로 더 이상 희생제사가 필요치 않음(벧전 3:18)
4. 인간의 죄 때문에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엡 2:14-16)
5. 성도의 몸이 곧 성전으로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게 됨(고전 3:17)
6. 휘장으로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모습이 그리스도로 인해 드러남(요 14:6,7)
도표-15:33-41 십자가 수난의 시각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참조
주요 주제-15:21-41 십자가 수난을 통한 구속 성취의 이해
마 27장 자료 노트 참조.
15:1-15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본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즉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미리 결심한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가야바의 집에서 비공개적으로 소집된 산헤드린의 결정을 통하여 예수님에게 신성 모독죄를 적용시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는 밤에 열릴 수 없었기 때문에 날이 밝은 후 공식적으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는데(1절) 이는 누가가보다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눅 22:66-71).
한편 이에 이어 그들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이송시켜 사형의 집행을 요구하였다. 아마 이러한 그들의 조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첫째는 당시의 유대가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서 비록 산헤드린이라 할지라도 사형 집행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며, 둘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추종하는 백성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가급적 정치적인 사건으로 위장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빌라도에게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십자가형에 처해지도록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본서에서는 많이 생략되어 있다. 즉 산헤드린에서 빌라도에게 예수의 신병이 넘어간 이후 배반자 가룟 유다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자살했으며(마 27:1-10, 그 이후 빌라도의 1차 심문이 있었고(마 27:11-14; 눅 23:1-5; 요 18:28-38) 이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빌라도가 예수를 갈릴리 통치자인 분봉왕 헤롯 안디바에게 보내어 심문받게 하며(눅 23:6-12) 그 후 다시 빌라도의 2차 심문이 있었고(마 27:16-26; 눅 23:13-25; 요 18:39-19:16) 여기서 예수의 사형이 확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가룟 유다의 자살 및 헤롯 안디바의 심문이 완전히 생략되었고 빌라도의 1차와 2차 심문의 구분이 명백하지 않으나 6절을 2차 심문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던 빌라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자신의 정치적 인기와 지위를 유지시키려는 인간적 욕망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① 성도들은 반드시 다수의 의견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공연히 군중심리에 휘말려서 판단을 그르치기보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진리인지 지혜롭게 분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빌라도가 범한 잘못은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동원한 군중들의 선동적인 구호에 굴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② 세상적 이익과 권세를 잃지 않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수치와 파멸을 자초하는 지름길이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빌라도의 이름이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생명과 자신의 정치적 인기를 맞바꾸었기 때문이다.
15:1 새벽에. - 이 말은 14장의 사건들이 발생된 때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흘렀음을 나타낸다. 즉 공회가 공식적인 모임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날이 밝았을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금요일 새벽이다(눅 22:66). 바로 이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내신다.
즉시…온 공회로 더불어. - '즉시'(유뒤스)란 '지체없이', '속히'란 뜻으로서 예수를 빨리 재판에 넘겨 죽이려는 의도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예수를 죽이는 일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방문한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을 방지키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처형하려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한편 이들은 밤에 재판을 할 수 없다는 전통적인 규례로 인해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날이 새자마자 공회를 소집하고 예수를 재판했다. 그런데 중요한 사건의 경우에 정죄 선고는 법적으로 재판하는 당일에 내릴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당일에 재판을 받고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이것은 저들이 이미 예수를 죽일 의도를 갖고 모든 절차를 빨리 행한 불법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의논하고. - 당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의논한 것은 어떻게 하면 빌라도 총독을 설득시켜 예수의 사형을 확정시키는가 하는 방법론의 문제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규례에 따라 신성 모독죄를 예수에게 적용시켜 사형을 구형했으나 빌라도에게는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고소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로마법이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했으나 체제 도전적인 일에는 민감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의 의논이 바로 예수를 반역죄로 고발하는데 대한 심의였을 것이다. 결박하여 끌고 가서. - 겟세마네동산에서 체포되어 결박당하신 이후 재판받는 동안에는 잠시 결박이 풀렸으나 다시 빌라도에게 압송되어 가기 위해 결박당하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철저히 죄인 취급받으셨음을 보여 준다.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 유대의 최고 의결·재판 기구인 산헤드린은 사형 결정권은 있어도 집행권은 당시의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있었으므로 그에게 예수를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요 18:31). 한편 당시 지방 총독들은 로마 정부의 재가를 받지 않더라도 관할 구역 내에서 재판권과 사형집행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한편 예수를 재판하였던 빌라도는 A.D. 26년에 황제 디베료 가이사(Tiberius Caesar)에 의해 제 6대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A.D. 36년까지 재직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소유한 사법적 권한을 매우 악하게 사용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등 폭정을 행하여(눅 13:1) 부임 10년 만에 파면되어 유배되었으며 그 이후에 자살했거나 황제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보여진다(Philo, Josephus). 그에 대해서는 마 27장 연구자료, '빌라도'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당시 총독은 가이사랴(Caesarea Maritima)에서 집무하였으나 유월절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예루살렘에 임시로 거처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때는 손쉽게 예수를 고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당시 총독은 성전에 붙어 있었던 안토니아 요새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2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요 18:28-31에 의하면 예수에 대한 산헤드린의 고소를 빌라도는 심의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눅 23:2에 의하면 산헤드린은 예수를 로마에 대하여 납세를 거부하며 스스로 왕이라 선언하는 반란자로 묘사하여 고발하고 있다. 이는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에 대해 신성 모독죄를 억지로 적용시켜 사형을 구형했었으나(막 14:64), 빌라도에게는 정치적 반란자로 고소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 정책이 종교에 대하여는 자유를 허락하였지만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한 처벌을 가하였던 사실에 근거한다. 그래서 이들은 종교적인 문제로는 예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정치범으로 그 죄목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들의 고소가 정당한지의 여부를 알기 위하여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을 한 것이다. 즉 이것은 '네가 로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느냐'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네 말이 옳도다. - 예수께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시면서 말씀하신 유일한 답변으로서 이후 다른 심문에 대하여는 일체 침묵을 지키셨다. 그러나 이 대답이 요 18:33-38에 의하면 상당히 길게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수는 자신이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 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은 아님을 밝히신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빌라도의 심문 대상이 아님이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빌라도는 예수께 일차적으로 무죄를 선언하게 된다(눅 23:4).
15: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 빌라도가 예수의 답변에서 범죄라고 규정할 만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자, 대제사장들의 또 다른 고소가 즉시 이어졌다. 여기서 '고소하다'(카테고룬)는 '비방하다', '모함하다'의 뜻이다. 즉 이들은 일차적인 시도가 실패하여 예수를 죽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집요하게 갖가지 비방과 모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종교가 타락하게 되면 세속적인 정치가들조차 하지 않는 악랄한 방법으로 사람을 파멸에 빠뜨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4 아무 대답도 없느냐. -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의 빗발치는 비방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침묵을 지키시자 빌라도는 예수에게 변호의 기회를 가지라고 권고한다. 한편 빌라도의 이러한 호의적인 행동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① 성낸 고소자들의 소리를 잠잠케 하는 것이 로마 법관의 임무다. 즉 혼란을 진정시켜 예수에 대해 몇 가지 더 심문하기 위한 예비 조치이다. ② 평소에 빌라도는 산헤드린에 대해 불만이 많았으므로 이들에 대한 반발심으로 예수를 놓아 줄 구실을 찾기 위해서이다. ③ 온갖 비방과 모략에도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 그는 예수가 죄를 저지를 자가 아니라는 의구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5:5 예수께서 …대답지 아니하시니…기이히 여기더라. - 빌라도는 생명이 위험에 직면하여 있으면서도 계속 침묵을 지키고 계시는 예수의 태도에 놀랐다. 즉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이 죽음의 상황에서도 인내와 평온함을 잃지 않고 계시는 예수의 모습이 빌라도의 눈에는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다. 여기서 '기이히 여기다'(다우마조)는 단순히 이상하거나 색다른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능력을 체험했을 때 느끼는 신비롭고 경건한 감정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예수의 침묵하시는 모습에서 어떤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한편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예수의 일차 심문에서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요 18:38), 그래서 그는 이러한 곤혹스런 재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던 갈릴리 분봉왕 헤롯에게 예수를 보내어 재심문할 것을 요구하는데(눅 23:6-12), 마가는 이를 기록치 않았다.
15:6 명절을 당하면…전례가 있더니. -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빌라도는 예수를 분봉왕 헤롯에게 넘겼으나 헤롯이 다시 예수를 빌라도에게 이송한 이후에 있은 빌라도의 2차 심문에서의 사건이다.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의 총독은 죄가 확정되지 않은 피고인이나, 죄가 정해진 죄인이라도 풀어 줄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그러나 본문의 전례는 로마 총독의 사면권 차원에서 보다는 유월절과 관련된 유대 지방 특유의 풍속에서 비롯된 것 같다. 즉 이 풍속에 대하여 고대 문서인 '엠페사임'(M. Pesahim)에는 '그들이 감옥에서 석방해 주고자 하는 자를 대신하여 유월절 양을 죽일 수 있었다'라는 내용이 있어 유대 지방에서 매년 유월절에 죄인의 사면이 이루어졌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풍속이 진짜 있었는가에 약간의 다른 견해가 있다. ① 유월절에 총독이 죄인 한 명을 석방할 수 있었으나 백성들이 죄인을 지명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Breanscomb). ② 이 풍속에 대하여는 복음서에 전부 기록되어 있으며(마 27:15; 눅 23:17,18; 요 18:39), 또한 고대의 문서에도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죄인이 풀려난 기록이 있으므로 역사성을 지닌다는 것이다(The Papyrus Florentinus, 61,59). 그러므로 전자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있었으며 더욱이 본문의 '놓아주는'이라는 말이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죄인을 놓아 주는 풍속이 해마다 시행되어 정례화 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15:7 바라바라 하는 자. - '바라바'의 어원에 대해서는 '압바의 아들'(Bar-Abba), 즉 '아버지의 아들'이란 견해와 '랍바의 아들'(Bar Rabba), 즉 '선생의 아들'이란 견해가 있다. 혹자는 후자의 입장을 취하여 실제로 바라바는 랍비의 아들이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Lane, Gnilka). 그러나 또 다른 학자에 의하면 바라바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과 함께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된 인물로 열심당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눅 23:19; 요 18:40, Wessel). 그렇다면 바라바는 유대인들에게 이민족의 압제에서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한 영웅으로 여겨졌을 것이고, 이들이 바라바를 선호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마 27:16). 한편 이러한 시점에서 빌라도가 바라바를 생각하여 낸 것은 저들의 선택을 바라바와 예수로 제한시켜 예수를 구해내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확실치는 않다.
15:8 무리가…전례대로…구한대. - 본절에 등장하는 '무리'는 자연적으로 모인 자들만이 아니라 예수의 처형을 민중의 뜻인 것처럼 호도하기 위해서 산헤드린에 의해 동원된 자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한편 본문의 '나아가서'(아나바이노)는 직역하면 '올라가다'란 뜻으로서(10:32,33), '빌라도의 법정으로 무리들이 올라간다'는 뜻이 된다. 즉 평지보다 높게 설치되어 있는 빌라도의 법정까지 올라가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행위는 유약했던 빌라도로 하여금 그릇된 판단을 하게 하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5:9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 영리한 빌라도는 교권주의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처형하려는 흑심을 가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는 의도에서 예수의 사면을 제의하였다. 병행구절인 마 27:17에 의하면 이때 빌라도는 폭동자인 바라바와 예수 가운데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란 질문을 하였던 것으로 나오는 반면, 여기서는 예수만 언급된 것은 빌라도가 예수를 더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를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렇게 초라한 자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유대인은 경멸받을 수밖에 없다는 조롱의 뜻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마가가 유대의 교권주의자들과는 달리 빌라도를 예수의 석방을 위해 애쓰는 인물로 긍정적인 묘사를 하는 까닭에 대해서는 본서의 일차적 독자로 생각하는 로마의 기독교인에게 원래부터 로마와 기독교 간에는 적대적인 감정이 없음을 밝히기 위함이란 이해가 가능하다.
15:10 이는 저가…앎이러라. - 빌라도가 예수 석방을 서두르는 이유이다. 즉 진실의 규명이란 차원보다는 유대의 교권주의자들이 로마 권력의 대리자인 자기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부담이 되었던 예수를 처형하려는 생각에 대한 저항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이방인인 빌라도에게까지 불순한 동기를 들키어 버린 유대의 종교인들은 선민 집단의 권위 있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추악한 협잡꾼의 면모만을 보이고 있다. 한편 마 27:19에는 본절의 사건에 이어서 총독의 아내가 총독에게 예수가 옳은 사람임을 알리는 내용이 나온다.
15:11 무리를 충동하여. - 마태는 단지 '무리를 권하여'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태가 장로들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마가는 '대제사장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뜻과는 달리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죽이려는 계교를 달성키 위하여 '무리를 충동하여' 다시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여기서 '충동하여'(아네세이산)란 '~위에'란 전치사 '아나'( )와 '떨리게 하다'란 동사 '세이오'( )의 합성어로서 마치 지진과 같이 '뒤흔들다', 어떤 자극을 주어 '소동케 하다'(눅 23:15)란 뜻을 가진다. 이것은 이들이 매우 극렬하게 예수에 대하여 비방하며 바라바를 상대적으로 추켜세워 여론을 호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여기서 '무리'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들 가운데는 예루살렘 입성 당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자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으나, 대부분은 산헤드린에 의해 동원된 무리였을 것이다(8절).
15:12 빌라도가… 가로되…내가 어떻게 하랴. - 예수를 풀어 주려고 했던 빌라도의 의도는 무리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처리 문제에 대하여 무리들에게 묻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한편 빌라도는 무리들이 예수에 대하여 산헤드린의 요구하는 사형보다는 낮은 형벌을 요구할 것이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이 자리에 있었던 무리들이 산헤드린의 하수인들이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군중 심리는 개인의 결정보다 항상 더 강경해지기 쉽다는 사실을 모른 또 하나의 착각에 불과할 뿐이었다. 여기서 빌라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판결의 권한을 진실과 소신에 따라 과감하게 행사하지 않고 오히려 무리들에게 판결을 유보시키는데 이는 재판관의 기본 직무조차 망각한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빌라도가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하려는 재판관으로서의 양심보다는 단지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데 연연하는 자로서 시류에 편승하는 약삭빠른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15:13 저희가 다시 소리 지르되. - '소리 지르다'(에크락산)는 예수께서 지난 일요일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백성들이 소리 질러 환호함을 묘사한 것과 동일한 말이다(막 11:9). 이처럼 얼마의 시차도 두지 않고 동일한 단어가 전혀 반대 상황에서 사용된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 입으로 하나님을 저주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선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막 14:3),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할 가능성도 항상 지니고 있는 것이다(막 14:10,43).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깨어 경성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 의지(free will)를 바로 사용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 당시의 십자가 형은 노예들이나 포로 또는 일반 백성 가운데서도 중 죄인을 다스리기 위한 수치스러운 형벌로서, 예수에게는 이러한 형벌을 당할 범죄 사실이 없다. 십자가 형에 대해서는 눅 23장 자료 노트, '로마 시대의 십자가 형'을 보다 참조하라. 또한 예수께서는 지금 십자가 형을 요구하는 일반 백성들에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악한 감정을 갖도록 행동한 적도 없다. 단지 이러한 백성들이 유대를 정치적으로 회복시킬 정치적인 왕을 요구할 때 예수께서 자신이 영적인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지시킴으로 이들이 실망한 것 뿐이었다(요6:15).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행동이 십자가 형을 요구할 만큼 큰 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일이 이처럼 급속히 악화된 배후에는 산헤드린이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에 대해 적의를 품은 사람들은 기득권 상실을 염려한 이들을 포함한 소수의 지배 계층이기 때문이다.
15:14 빌라도가 가로되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빌라도는 백성들의 십자가 처형 요구에 대해 도대체 예수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라고 반문하고 있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또 죽일 일이 없다고 하여 단지 예수에게 태형만을 가하여 석방시키겠다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예수의 무죄성을 확정함과 동시에 백성들의 요구도 어느 정도 수용하려 하였다(눅 23:22). 여기서 우리는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석방 노력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죄가 없는 자를 벌함이 로마의 영광인 공정을 저버리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네 번이나 예수 석방을 유대인에게 말했던 것이다. 즉 ① 종교문제이니 유대인끼리 해결하라(요 18:31; 19:6, 7)고 했다. ② 사건을 헤롯에게 넘기려 했다(눅 23:6-12). ③ 예수를 유월절 특사로 내보내자고 유대인들에게 제안했다(6절). ④ 예수에게 단지 태형만을 가해 석방하겠다고 하였다(눅 23:16). 이처럼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재판 과정을 기록하면서 빌라도보다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죽음에 더 큰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면서도 백성들의 동요에 굴복하여 예수를 처형토록 허가한 것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치 못한 것으로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15:15 빌라도가 만족을 주고자 하여. - 마가는 단순히 빌라도가 무리를 만족케 하는 일을 하고자 했다고 간략히 말하나 누가와 요한은 이것을 보다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즉 빌라도는 바라바를 예수님과 대조시킴으로써(마 27:17) 예수를 구하려고 한 그의 시도가 실패한 것을 알고, 다음에는 채찍질하는 무서운 형벌을 가함으로써 무리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하였다(눅 23:16,22; 요 19:1). 뿐만 아니라 예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혀 모욕을 가함으로써(요 19:2) 군중에게 심리적인 만족감을 주어 십자가 처형을 면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노력이 성공하지 못하자 그는 예수를 죽는 자리에 내어 주고 만다. 이것은 빌라도의 정치적인 생리를 자세히 나타내주는 것이다. 즉 만에 하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백성들의 민란은 그의 정치적 생명을 끝나게 할지도 모르므로 미리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줌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려하였다. 이것은 그의 교활한 면과 함께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라면 어떤 무죄한 자라도 죄의 올무를 씌워 죽일 수 있다는 잔혹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빌라도의 행위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며 합리화될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이다.
채찍질하고. - 로마 군인들이 사용한 채찍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끈에 납덩이를 매달거나 혹은 날카로운 뼈나 못을 박아 만든 것으로, 이는 한번 칠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며 혈관이 터지는 극심한 고통을 주었다. 이 채찍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 삽화, 로마 채찍을 참조하라. 한편 유대 율법에 의하면 매질은 40대로 제한되어 있었으나(신 25:3; 고후 11:24), 로마인들에게는 이러한 법이 없고 힘이 있을 때까지 때렸다. 이러한 매질은 십자가에 처형하기에 앞서 죄수의 힘을 빼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었는데 어떤 때는 매질만으로 사람이 죽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 여론에 의해 십자가형이 확정되는 순간이다. 한편 여기서 '넘겨주다'(파라디도미)는 '내어주다'(마 5:25), '방임하다'(엡 4:19), '버리다'(엡 5:2)란 뜻으로 자기의 책임 하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내어줌을 의미한다. 이와 동일한 말이 메시야 고난이 예언된 사 53:6의 '담당시키다'란 말의 헬라어 70인역(LXX)에서 발견된다. 이로 보아 본절의 죄인의 손에 넘기우는 것은 구약 예언의 자구적인 성취로 볼 수 있다.
15:16-32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십자가 형이 결정되자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마음껏 조롱하고 온갖 모욕을 다 가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비웃음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됨으로써 모든 인류 죄악의 대속을 위해 성자의 지위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시되 처절히 낮아지시는 경험을 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런 후에 그들은 예루살렘 성 밖에 위치한 골고다 언덕으로 예수님을 끌고 가서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오전 9시 경이었다. 한편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어찌하여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자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겠느냐고 모욕하면서, 진정 메시야라면 즉시 십자가에서 내려옴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멸시와 고통을 묵묵히 견디셨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정녕 주님께서 멸시와 조롱을 당하신 것은 온 인류의 죄악 때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마치 주님께서 스스로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고통을 겪는 것처럼 생각했다(사 53:3,4).
한편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병행 구절을 살펴보면 이때 예수님은 가상칠언(架上七言) 가운데 3가지의 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한 기도(눅 23:34) ② 회개한 강도에 대한 천국 보장 약속(눅 23:43) ③ 사랑하는 제자를 향한 어머니 마리야의 봉양 명령(요 19:26,27)이 그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이 엄습하는 십자가 상에서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구원과 행복을 간구하는 메시야로서의 면모를 보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영원한 왕이시다.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 붙여 놓은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각각 쓰여져 있었는데, 결국 이것은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요 19:21).
② 성도들은 과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고난과 수치를 감수하셨는지 명심하여, 이제 자신도 주님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겠다는 각오를 지녀야 마땅하다. 만약 우리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한다면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지극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롬 8:17,18).
15:16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 - '브라이도리온'(프라이토리온)은 총독의 저택을 가리키는데 마 27:27에는 '관정'으로 해석되어 있다. 이곳은 안토니아 요새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는데, 유대 총독은 특별히 예루살렘으로 출장을 때마다 이곳에 머물렀다.
온 군대. - 헬라어 '스페이라'( )로서 이 말은 600명으로 구성된 보병 부대를 가리키는 말이긴 하나(행 10:1) 때로는 그보다 하급 부대로서 200여 명으로 구성된 소대 병력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이 군대는 빌라도가 유월절 기간 동안 예루살렘의 치안확보를 위해 가이샤라에서 데려온 군대들로, 여기서는 예수를 처형하기 위한 임무로 소집되었으며 처형에 앞서 예수를 희롱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들은 당시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비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5:17 자색 옷을 입히고. - 본절에 대해 마태는 '홍포를 입히며'(마 27:28)라고 하였다. 이러한 홍포는 당시 왕족들만이 입을 수 있는 옷으로, 아마도 헤롯이나 빌라도가 입다가 버린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옷을 예수에게 입혔다는 것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조롱하기 위함이다.
가시 면류관. - 당시 황제를 비롯한 로마 세계의 통치자들은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면류관을 썼다. 따라서 로마 군인들은 왕권을 상징하는 면류관을 만들어 씌움으로써 예수를 희롱하였다. 이들은 이 가시 면류관을 예수에게 씌움으로 조롱만 줄 의도였겠지만 예수에게는 크나큰 육체적 고통이 되었다. 한편 이 가시 면류관에 쓰인 나무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나 총독 관저의 뜰 안에서 자라는 가시나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병행 구절인 마 27:29에 의하면 이때 그들은 예수의 오른 손에 왕권을 상징하는 지휘봉, 즉 왕홀(王笏) 대신에 갈대를 들게 만듦으로써 예수의 모습을 더욱 희극적으로 만들었다.
15:18 예하여 가로되. - 예수를 왕으로 분장시킨 이후 이제 자신들이 행동을 취함으로써 더 깊은 모멸을 가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예하여'(아스파제스다이)란 '존경하다', '인사하다'란 뜻으로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에게 조롱하듯이 일부러 경배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태는 이때 로마 군인들이 예수에게 무릎까지 꿇었다고 기록한다(마 27:29).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 이것은 로마 황제에게 신하가 행하던 문안 인사를 흉내낸 말투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를 왕을 칭명하는 거짓말장이로 매도하여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말임과 동시에 엉터리 왕을 모셨다는 측면에서 유대인 전체까지 모독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평안할지어다'(카이레) 역시 원래 일반적인 인사말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극심한 고난을 겪으며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예수를 빈정거리는 말로서 사용되었다. 결국 이러한 모든 행위는 진짜 왕으로 오신 예수를 가짜로 만들어 조롱하는 것이긴 하여도 은연중에 왕으로 오신 예수를 인정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15: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 마 27:29,30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이 갈대는 왕권을 상징하는 왕홀을 대신하여 로마 군인이 오른 손에 들리우게 한 것으로, 이는 예수를 우스꽝스러운 왕으로 분장하여 조롱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병사들은 이 갈대를 빼앗아 예수의 머리를 때렸는데 이미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는 상태에서 이러한 타격은 예수에게는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치며'라는 말은 미완료로서 계속적으로 여러 차례 때리고 있음을 나타낸다.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존경의 표시로 입맞춤을 행하는 것은 큰 영예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존경의 입맞춤 대신에 경멸의 침 뱉음으로써 모욕을 가하였다. 또한 앞에 나온 '치다'란 동사와 마찬가지로 '침을 뱉다' 역시 미완료로서 이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절하더라' 역시 미완료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에 대한 모독이 상당히 오랫동안 반복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계속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15:20 희롱을 다한 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 군인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예수를 괴롭히고 더 이상 조롱하는 데 흥이 없어지자 처형을 위해서 조롱하기 위하여 입혔던 자색옷을 벗기고 원래 입던 옷을 입혔다. 이 과정에서 예수의 등에는 피와 옷이 엉켜 붙어 있었을 터인데 이 옷을 아무렇게나 벗김으로 예수는 또 한 번 고통을 당해야 했을 것이다. 한편 당시에는 십자가처형 자가 옷을 벗은 채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며 또 이때 군인들은 죄수에게 채찍을 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예수께는 이미 많은 채찍질과 심문으로 피곤한 상태였으므로 십자가 처형 이전에 죽을 것을 염려하여 옷을 입혔던 것이다.
끌고 나가 나니라. - 예수를 성 밖으로 내 모는 것은 성전이 있어 거룩하게 여겨졌던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도록 규정한 율법이나 성 밖에서 처형하는 로마의 관례 때문이다(레 24:14; 민 15:35,36; 행 7:58; 히 13:12). 한편 이러한 모습은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에 수록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사 53:7)이라고 하는 예언을 성취시킨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대우, 즉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침묵을 지키신 것은 자신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피에 굶주린 그들의 눈으로는 이것을 미쳐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다.
15:21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 - '구레네'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북아프리카 동북쪽의 중요한 도시인데 오늘날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Tri-poli)이다. 이곳은 당시 많은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이 살았던 곳이었다(행 2:10; 6:9; 13:1). 구레네의 위치에 대해서는 마 27장 자료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시몬은 이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던가 아니면 아예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시몬을 소개하면서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를 거명한 것은 본서가 쓰여질 당시 이 둘이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시몬이 예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난 후 그와 그의 가족들은 예수를 믿는 교인이 되었던 것 같다. 한편 바울이 로마서에서(롬 16:13) 루포와 그 어머니의 이름을 높였는데 본절의 루포를 그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만약 동일인이라면 로마에서 본서를 기록한 마가와 루포 사이에는 면식이 있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시몬을 소개하면서 그 아들을 거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시골에서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과정으로 보여 진다.
억지로…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 일반적으로 사형수가 자신이 달려 죽을 십자가를 처형 장소까지 운반해야 했다. 즉 세로로 세우는 나무는 이미 처형 장소에 비치되어 있었고 양팔을 고정시킬 가로로 대는 나무만을 운반하는데 그 무게는 약 20kg으로 장정 한 사람이 들기에는 충분한 무게였다. 그러나 이미 처형 전에 예수님께서 기력이 쇠해졌음이 분명하다. 즉 그 전날 밤의 고뇌에 찬 철야 기도와 체포된 이후 계속된 장소를 옮기며 비인격적으로 진행된 심문, 그리고 심한 채찍질로 인해 십자가를 운반할 힘이 소진한 것이다. 그러자 군병들은 주위에 있던 시몬에게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게 하였다. 여기서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란 페르시아 시대로부터 왕의 특명을 받은 전령이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인력이나 말 등을 차출할 때 이를 거절할 수 없는 관습에 따른 말이다. 이와 같이 시몬 역시 예기치 않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를 억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관저에서 십자가 처형 장소인 골고다까지 끌려가시는데 이 길을 '고난의 길'(Via dolorossa, 비아 돌로롯사)이라 부른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께서 이 길을 가시면서 14번 멈추셨는데 5번째 멈춘 곳에서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다고 한다.
15:22 골고다. - '골고다'( )란 말은 아람어 '길갈타'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서 '해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곳을 지칭하는 말로 흔히 사용되는 '갈보리'(Calvary) 역시 '해골'을 의미하는 라틴어 '칼바'(Calva)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러한 이름이 붙어진 이유는 이곳에 많은 시체가 버려짐으로 자연히 해골이 많이 쌓이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Jerome, Hieronymus)와 이곳의 지형이 해골 모양의 언덕이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으나(Calvin, Cyril, De Wette, Plummer, Bengel, Gould) 후자의 견해가 더 유력하다. 어쨌든 이 골고다 언덕의 위치는 예루살렘 성에서 가깝고(요 19:20), 길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북쪽 성 밖의 지역 곧 지금의 '성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근처일 것으로 추정된다. 골고다의 지리적 배경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마가는 이방인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골고다'를 해석하여 '번역하면 해골의 곳'이라는 해설을 붙였다. 또한 본서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눅 23:27-32에는 이때 여자의 큰 무리가 예수를 따라 왔으며 예수는 이들을 위하여 종말에 관한 교훈을 베푸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 '몰약'은 복숭아 과(科)에 속하는 나무의 껍질에서 추출해 낸 마취 성분을 지닌 약재이다. 마태는 이것을 '쓸개 탄 포도주'(마 27:34) 라고 하였는데, 이 몰약과 쓸개는 모두 쓴맛이 나며 성분이 비슷하였기 때문에 마태는 '쓸개'라고 기록하였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주다'(에디둔)는 3인칭 복수 미완료형으로서 한 사람이 아닌 복수의 사람이 여러 번 계속 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사는 경건한 부인들이 십자가의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약재나 혹은 아편을 넣은 포도주를 제공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받지 아니하시니라. - 예수께서는 자기를 무감각하게 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마취약을 복용함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덜어 보려고 하지 않으셨다. 이는 인간의 고통을 끝까지 맛보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남김없이 마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요 18:11). 한편 예수께서 이 마취 음료를 들지 않음은 다음과 같은 여러 의미도 담겨 있다. ①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하신 약속, 즉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세상에서는 더 이상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막 14:25)의 말씀을 이루려 하신 것이다. ② 온전히 죽음의 고통을 맛봄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극복하시기를 원하셨던 죽음을 직시하겠다는 신적인 결단을 나타낸다(막 14:36). ③ 인류의 죄악을 자신의 죽음으로 대속하려는 거룩한 뜻에 따라 죽음의 고통이 감소됨을 원치 않으셨다. ④ 잠 31:6에 의하면 죽는 자에게 이 마취 음료를 주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영원한 죽음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여 주고자 한 것이다.
15:24 십자가에 못 박고. - 마가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는 사건이 구속사의 정점인데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된 고통스러운 상황을 자세히 말하지 않고 간단하게 한 마디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로마 통치하에 살았던 교인들이 이미 십자가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참혹한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십자가 처형에 대하여 혹자는 '인간이 고안한 형벌 중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이라고 말한다(Cicero). 한편 당시 십자가 처형에 쓰인 십자가의 형태는 보통 세 가지였다. 즉 십자가에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 자형(Crux immissa)과 베드로가 달린 것으로 전해오는 T자형(Crux Commisa), 그리고 안드레가 달린 것으로 전해오는 X자형(Crux decussata)이 있었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명패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자형이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하는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양손과 포개어진 두 발에 못을 박아 큰 고통을 주므로 빨리 죽게하는 방법과 밧줄로 묶어서 빨리 죽지는 않으나 오랜 시간 고통에 시달리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예수께서는 전자의 방법으로 처형되셨는데, 이미 빌라도의 재판 때 당하였던 극심한 매질로 인해 기력이 쇠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상당히 일찍 돌아가셨을 것이다(눅 23장 자료노트, '로마시대의 십자가 형' 참조).
제비를 뽑더라. - 당시 로마 군병들은 죄수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처형하거나 아랫도리를 가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그 죄수의 옷을 제비뽑아 사형 집행자들이 나누어 가지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옷도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는데 이는 시 22:18의 예언과 일치한다. 아마도 마가는 이 예언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기록한 것 같다. 한편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요한은 겉옷은 네 사람이 나누어 가지고 속옷은 제비뽑았다고 보다 상세히 묘사하였다(요 19:23,24).
15:25 제 삼 시가 되어. - '제 삼 시'는 오전 6시를 시간의 기점으로 잡는 유대시간법에 의하면 오전 9시를 말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시간이 제 육 시경으로 되어 있어 본문에 나오는 삼 시보다 이후로 보여진다(요 19:14). 이렇게 되는 경우 재판을 받기도 전에 사형을 당했다는 결론이 나오므로 시간의 순서에 있어서 모순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난제는 마가가 유대 시간 계산법을 사용한 반면에, 요한은 로마 시간 계산법을 사용했다고 생각하면 별 어려움이 없이 해결된다. 즉 로마 시간 계산법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과 동일하게 제 육시는 유대 시간의 제 0시와 같은 시간으로 오전 6시를 말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오전 6시에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해답이 나온다.
15: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 당시 죄를 지은 범죄자들은 자신의 죄를 적은 명패를 목이나 가슴에 걸고 처형장으로 가는 관례가 있었다. 그래서 빌라도 역시 이 관례대로 십자가 윗부분에 죄명을 쓴 명패를 달아 죄명을 공개하였는데 그 내용은 복음서 마다 약간씩 다르다. 즉 마태는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마 27:37), 누가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눅 23:38), 요한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요 19:19)이라고 기록했다. 이 중에 요한의 기록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 추정되며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축약된 형태로 서술했을 것이다. 한편 요한은 이 죄패가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씌어 있었음을 밝히는데 이것은 로마어와 헬라어가 사용되는 지역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외국인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요 19:20). 한편 이 죄패의 내용에 대해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란 말로서 거부했다. 빌라도가 왜 이런 글귀의 죄패를 고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유대인을 조롱하기 위하여 썼을 가능성이 있다(요 19:21,22). 여하튼 예수님은 전혀 정치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죄목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묘사된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나 이는 비록 빌라도가 확실한 자각 없이 행한 일이라 할지라도 예수가 이 땅에서 왕의 사역을 행하신 것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15:27 강도 둘을…함께. - 본절의 '강도'(레스타스)는 일반적인 강력범을 뜻하는 '강도'(클레프테스)와는 구별이 되는 말로 반란 음모자 등 정치범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 강도는 사형에 처하는 일이 드물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Bergen). 따라서 이 강도들은 바라바와 함께 로마의 유대 통치에 대해 저항하다 붙잡힌 반란자들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반로마 운동에 가담한 자들은 '열심당원들'(the Zealots)이 많이 있었는데 요세푸스(Josephus)는 이들을 '강도'라고 표현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와 함께 처형된 이들의 이름은 '조아마' (Zoatham)과 '캄마'(Camma)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집단적인 사형은 기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로마 통치자들은 로마법에 따라 반역자들과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을 집단 처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한편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회개를 하였고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죄로 죽었다고 나타나고 있다(눅 23:39-43). 한편 예수께서 강도들과 함께 죽은 것은 사 53:12의 메시야 고난 예언에 나오는 '범죄자 중 하나도 헤아림을 입었음이라'를 성취시키는 것이다.
15:28 유수한 성경 사본(시내산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에브라임 사본)들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보다 저등한 사본(모스코 사본, 데기우스 사본)들에는 사 53:12의 인용문으로서 '이는 성경을 이루려함이니 일렀으되 저가 범죄자와 같이 헤아림을 받았느니라'란 내용이 나온다. 이방인을 독자로 한 본서에는 구약의 인용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문구를 빼는 것이 정당하나 그 내용을 살린다 하더라도 그 의미에는 별 문제가 없다.
15: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모욕하여 가로되. -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골고다는 예루살렘성과 인접한 장소였고(요 19:20) 그 근처는 많은 행인들이 지나가는 대로변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가는 자들'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를 보고 조롱하였던 것이다. 한편 '머리를 흔들며'라는 표현은 매우 강한 조롱과 멸시의 행위이다. 따라서 이는 비록 예언에 대한 성취이기는 하나, 예수에게는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통과 슬픔을 주었을 것이다.
아하. - 이 말 역시 예수에 대한 모독과 조롱을 나타내는 감탄사였다. 한편 이러한 조롱은 시 22:6-8, 즉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의 문자적인 예언의 성취이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 이 말은 산헤드린에서 예수를 신성 모독죄로 고발키 위해 거짓 증인들이 말과 동일하다(막 14:58). 따라서 예수의 처형장까지 따라와서 이 말을 한 자는 역시 그들이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는 그들의 뜻대로 예수를 처형하게 됨을 기쁘게 여기며 '신적 권능을 가졌다는 너도 별 것 아니구나'란 뜻으로 이 말을 하였을 것이다.
15: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 '만일 네가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는 자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옴으로 너의 능력을 보이라'란 의미이다. 이것은 그들이 생각한 메시야관의 단면을 보게 해준다. 즉 그들은 초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초월적인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신적 능력의 소유자로 메시야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실 때 철저히 자기를 죽여 인류를 살리는 구원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기를 괴롭히던 적대자들을 제압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길은 세상 만민을 죄에서 구원하는 성령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선택한 죽음의 길이었으므로 포기할 수 없었다. 한편 예수께 영웅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이 말은 예수를 조롱하는 사단의 유혹이라 볼 수 있다. 즉 이는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지 말고 신적인 능력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말로서 성자의 구속 사역을 중지시키려는 사단의 최후적인 발악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시험은 예수께서 과거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실 때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들임을 드러내기 위해 성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던 것과 유사하다(마 4:6).
15:31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 예수에 대한 큰 모독은 첫째 군병들이 하였고(16-20절), 둘째 지나가는 자들이 (29절), 세째는 본절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하고 있다. 한편 마태는 이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 장로들도 언급하나(마 27:41), 마가는 단지 두 그룹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독에서 대제사장들이 주동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에는 마태와 마가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여기서 이들은 예수를 처형하는 데 있어서 처음부터 계획을 세웠으며(막 14:1) 끝까지 저주로서 마귀의 하수인 역할을 한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 감수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자신들의 권좌만 지키려는 영적 무지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 이들은 비록 예수를 조롱하는 말을 한 것이나 그 가운데는 부인할 수 없는 진리가 담겨져 있다. 즉 예수는 만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은 죽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들의 말은 진정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의 이적(막 4:39; 5:41)은 인정하지만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찌 남을 구원하겠느냐 라는 조롱 섞인 저주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예수의 이적을 메시야성과 연관지어 생각했다면 그의 죽음도 만인 구원을 위한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알았어야 했을 것이다.
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 -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인증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이 말 역시 예수님에 대한 조롱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나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조롱은 실제적으로는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을 전제로 하고 빈정대는 조롱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들의 말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것은 영적인 구원자로 오신 메시야로서의 순수성을 지키시려는 것과, 또한 저들에게는 어떠한 이적을 보이신들 믿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바른 신앙이란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지 이적의 경이로움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못박힌 자들도 …욕하더라. - 드디어 예수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강도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과 유대인, 이방인, 제자, 심지어 강도들에게까지 배척을 당하셨다. 이것은 온 세상 모두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당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바로 이 시점, 즉 모두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그 순간부터 인류의 대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마태와 마가는 예수를 욕하는 데 있어 두 강도가 함께 동참했다고 기록하였으나 눅 23:39-43에 의하면 이 둘 중 하나는 회개하여 구원을 요청하고 그리스도께서 낙원으로 인도하는 사건이 있어 양자 간에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두 강도가 처음에는 예수를 비방하였으나 예수의 기도를 들은 후(눅 23:34) 한 강도가 죄를 뉘우쳤다고 이해한다면 양자 간의 조화가 가능하다.
15:33-41 예수님의 죽음
인류의 구원의 문을 여는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 묘사되고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약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는 최후의 말씀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인류의 대속을 위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전후하여 두 가지 표적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첫째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이하시기 약 3시간 전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이었으며, 둘째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이하시는 순간에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누어진 것이었다. 결국 여기서 첫 번째 표적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전 우주가 슬픔을 표시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두 번째 표적은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히 10:19,20). 이에 대해서는 본장의 자료노트 '찢어진 성전 휘장'을 참조하라. 한편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총 집행하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을 한 것은 수치와 멸시의 상징이던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에 대한 상징으로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고전 1:18).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본문에서 깨달을 수 있다.
①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상 칠언(架上七言) 가운데서 유일하게 본문에 언급되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34절)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악을 홀로 감당하시기 위해 철저히 하나님께로부터 외면당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사 53:8).
②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에 찢어진 성소 휘장은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겨우 일 년에 단 한번만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가로막고 있던 것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들 사이의 분리를 상징했다(창 3:24; 사 59:1,2).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인해 서로 화목케 만드셨다(엡 2:14-16).
15:33 육 시가 되매…구 시까지. - 이 시각은 유대인의 시간을 나타낸 말인데 오늘날의 시간과 6시간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6시는 오늘날의 낮 12시를 말하고 구시는 오후 3시를 가리킨다. 결국 예수께서는 제 3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25절) 제 9시(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고통과 멸시를 당하시다가 운명하셨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어두움은 태양이 가장 강한 빛을 발하는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즉 3시간 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 '온 땅'이란 '온 세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 (the whole land), 곧 팔레스틴 지역이라는 제한적 의미가 있다. 한편 본절의 초자연적인 어두움은 낮의 가장 밝은 때에 임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현상을 달이 햇빛을 차단함으로써 생기는 일식(日蝕)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음력 14일로서 만월(滿月)에 가까워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쪽으로 불어오는 검은 열풍(black sirocco)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나(Schmid) 누가의 '해가 빛을 잃고'(눅 23:44)라는 말에 의하면 이 역시 타당하지 않다. 결국 이 어두움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어두움이 의미하는 바는 ①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우주적인 슬픔(롬 8:22), ② '그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란 주의 날에 임할 현상에 대한 예언처럼(암 8:9) 종말에 임할 세상의 심판을 암시(벧후 3:10-12)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5:3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동일한 말이 마 27:46에도 나와 있으나 원문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즉 마태는 히브리인의 독자를 위해 히브리어 음역으로 '엘리'('나의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 의 음역)라 한 반면, 마가는 실제 당시 예수님이 말하였던 아람어의 음역으로 '엘로이'('나의 하나님을 뜻하는 아람어 * 의 음역)라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둘 다 시 22:1의 인용으로 그 뜻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마가가 본절을 기록한 것은 아람어에 생소한 이방인들을 위한 번역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 절규는 자신의 죄가 아니라 온 인류가 범한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고통의 궁극적 깊이를 나타내 주는 말이다. 이처럼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을 겪음으로써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예수님은 성부의 아들 성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 왔으나, 여기서는 온 세상의 죄인을 대표하는 의미에서 공적인 명칭인 '하나님'으로 불렀다. 한편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가상 칠언(架上七言)에 대한 본서의 유일한 기술이다. 가상 칠언의 전반적인 것에 대하여는 요 17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15:35 어떤 이들이 듣고…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 초자연적인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적대자들의 악함이 얼마나 극렬한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가 말한 '엘로이'(나의 하나님)를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 두 말은 유대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용어로서 혼동되는 말이 아니므로, 혹자는 히브리어나 아람어에 아주 미숙한 헬라계 유대인이 이 말을 하였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Bruce). 그러나 이는 단지 예수를 조롱하기 위한 의도에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초자연적인 변화를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예수를 조롱하는 이들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들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한 까닭은 엘리야가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소개할 뿐더러 메시아와 동시대에 살면서 메시아를 증거할 것이라는 유대인의 신앙 때문이다. 또한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자로서(왕하 2:9-12) 고난에 처한 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다(Talmud). 왕상 18장 자료 노트, '엘리야' 참조.
15:36 한 사람이…해융에 신 포도주. - '해융'이란 일종의 스폰지(RSV, sporge)로서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께 직접 마시우게 할 수 없으므로 신포도주를 적셔 예수의 입에 대주어 빨아먹게 한 것이다. 또한 '신포도주'는 마취성 약술이 아니라 물이 귀한 팔레스틴에서 물의 대용으로 마시는 신포도주에 계란과 물을 섞어 만든 로마 병사들이 일상적인 음료로 마시던 '포스카'(posca)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절의 '한사람'은 로마 병사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본절의 말에 대해 마태와 마가는 약간씩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즉 마가는 신포도주를 마시우게 한 사람이 '가만 두어라'라고 말한 것처럼 기록한 반면, 마태는 '그 남은 사람이 가로되'라고(마 27:49) 기록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따르면(요 19:28) 이 음료수를 마시우게 한 것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란 외침이 아니라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직후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생긴 것은 태양이 빛을 잃은 어두움 속에서 예수의 외침이 있었고 이에 대해 여러 사람이 동일한 말로 떠드는 혼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그들에게 정말 엘리야가 등장하는가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이 있었고, 또 가상 칠언 가운데 4번째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란 외침과 5번째인 '내가 목마르다'란 말이 있은 다음에 이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15: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 일반적으로 십자가 형을 받는 사람은 서서히 기운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져 죽어가는 것이 보통이나, 예수께서는 혼미한 정신 가운데서 죽어 가신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가지신 채 큰 소리를 지르시고 갑자기 죽으셨다. 한편 여기서 '소리'(포넨)는 단순한 '고함'이란 뜻이라기보다는 어떠한 대상을 부르는(행 7:60) '말'(행 13:27)이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서에 나오는 '큰 소리'는 신음이나 비명이 아니라, 눅 23:46에 나오는 바와 같이 분명한 뜻을 갖는 하나님을 향한 마지막 간구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란 기도를 나타낸다. 한편 '운명하시다'(εξέπνευσεν 엑세프뉴센)는 '숨을 거두다', '숨을 내어 쉬셨다' 의 뜻이 있다. 그런데 이 장면에 있어서 복음서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즉 마 27: 50에는 '영혼이 떠나시다'( 아페케 토 프뉴마 - 영혼을 내어 놓으셨다)로, 요 19:30에는 '영혼이 돌아가시다'(파레도켄 토 프뉴마 - 영혼을 주셨다)로, 그리고 눅 23:46에는 '운명하시다'로 표현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본서와 누가복음에는 동일한 원어가 사용된다. 한편 이러한 표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능동태로 되어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이 어떤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미 예정하신 대로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의 길을 가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5:38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찢어져. - 성막 시대로부터 당시 성전에 이르기까지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안쪽 휘장과 성소로부터 안뜰을 구분하는 바깥쪽 휘장 등 두 가지가 있었다. 본문에서 말하는 '휘장'(카타페타스마)은 용어상 '외부 휘장'(칼웜마)과 구별되나 여기서는 특별히 양쪽 휘장을 다 가리키는 것 같다(히 4:16; 6:19; 9:11-28). 왜냐하면 만약 제사장들만이 출입이 가능한 성소와 대제사장이 1번에 한 번씩만 들어가는 지성소 사이에 있는 안쪽 휘장만 찢어졌다면 이를 눈으로 확인키 어려웠을 뿐 아니라 대제사장 무리들이 이 사실을 극비에 부쳤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이 이 사건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볼 때 바깥쪽 휘장도 함께 찢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안쪽, 즉 지성소 휘장은 24가닥의 실로 엮은 끈 82개로 정교히 짜여져서 그 두께가 손바닥 두께 만큼 되었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순식간에 찢어진다는 것은 이적 중의 이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① 이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성전 파괴 예언의(막 13:2) 전조임과 동시에 동물 희생을 통해 성립되는 구약의 성전 제사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그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② 지성소에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이곳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는 자는 대제사장뿐이었으나 지성소의 경계가 없어졌으므로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③ 지성소의 휘장이 상징하는바 그리스도의 육체의 찢기심으로 할례와 성전을 중심한 혈통적 이스라엘, 즉 선민의식은 이제 끝나고 영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세계가 새롭게 열렸음을 나타낸다. ④ 위선에 가득찼던 성전이 파괴되어 이제는 더 이상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지 못하고 멸망 받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찢어진 성전 휘장의 의미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마태는 이 일 이외에도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일어나는 사건을 묘사했다(마 27:52,53).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가로되. - '향하여 섰던'이란 '바라보고 있었던'의 뜻으로 백부장이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마태는 이것을 '예수를 지키던'(마 27:54) 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이 백부장은 예수의 처형을 지휘 감독한 로마 장교였을 것이다. 한편 그의 이름이 빌라도행전에 의하면 '롱기누스'(Longinus), 베드로복음서에 의하면 '페트로니우스'(Petronius)로 나온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 예수의 죽음 앞에서도 메시야의 증거로 이적을 요구했던 유대인과는(30-32절) 달리,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의연히 죽음을 맞이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애를 보이신(눅 23:34,43; 요 19:26) 예수의 모습에서 하나님 아들로서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게 된다. 그러나 학자들 가운데는 백부장의 이 고백이 당시 황제, 사제, 군사적 영웅 등을 신의 아들로 부른 것과 같은 정도의 고백으로, 예수를 단순히 영웅적 인물로 평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Meyer, Bruce).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다'고 기록한 눅 23:47의 기록은 이 주장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물론 마가는 백부장의 말을 인용해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증거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여튼 전승에 의하면 이 백부장은 후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갑바도기아(Cappadocia)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15: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인들. - 예수를 따라 다니던 제자들이 이미 주님을 버린 채 달아났고(마 26:56), 어떤 이는 예수를 팔아 버리는 상황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죽음의 형장까지 따라옴으로써 버리지 않은 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연약한 여인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예수의 죽음에 대한 생생한 증인이자 목격자가 되었다. 그러나 병행 구절인 눅 23:49에는 이를 '예수를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로 표현함으로써 이 여자들이 대부분 갈릴리 여자였다는 사실과 당시 이곳에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밝힌다. 그 가운데 알려진 자로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요한'이 있다(요 19:26). 한편 이때 형장에 있었던 여인들의 명단에 대해서는 복음서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즉 마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언급되어 있고(마 27:56), 누가복음에는 '예수의 아는 자들, 여자들'(눅 23:49)이, 요한복음에는 '예수 모친 마리아,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가 언급되어 있다(요 19:25). 이것은 예수의 처형 장소에 실제로 많은 수의 남자와 여인들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 세 복음서 모두에 이 여자의 이름이 선두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가장 열성적인 예수의 여제자였던 것 같다. 한때 일곱 귀신들린 적이 있었으나 예수에 의해 고침을 받고 지속적으로 예수를 봉양하여 왔다(눅 8:1-3). 이러한 열성으로 인하여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보는 영예를 누렸다(요 20:11-12).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 마 27:56에는 '요세'가 '요셉'으로 나와 있으나 이는 전자가 헬라식 표기이고 후자가 히브리식 표기란 점 외에는 차이가 없다. 한편 야보고의 이름 앞에 '작은'이란 말이 붙은 것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함이다. 한편 본절의 야고보는 예수 제자 가운데 한명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로 보여진다(막 3:18). 그렇다면 이 부분에 나오는 '마리아'가 요 19:25에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로 나온 것으로 보아 글로바와 알패오는 동일 인물이 된다. 아마 글로바는 알패오란 본명의 별명일 것이다.
살로메. - 마 27:56에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로 나와 있고, 요 19:25에는 '예수의 이모'로 나타난다. 따라서 살로메는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며 동시에 예수의 이모이다. 그렇다면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와 이종 사촌간이 된다. 그녀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15:41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외에도. - '좇아 섬기던'이란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예수를 섬겨 왔던 것 같다. 즉 예수를 통해 구원받음을 감사하여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눅 8:2,3). 한편 이 부분에 구체적으로 이름이 열거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여자들이 예수를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스스로를 감추고 봉사하는 한 알의 밀알인 것이다.
15:42-47 예수님의 장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금요일 즉 안식일 전날이었으며 유월절 행사가 시작되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루의 시작을 일출로부터가 아니라 일몰로부터 계산하기 때문에, 이제 그날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의 시체는 서둘러서 장사(葬事) 되어야만 했다. 다시 말해서 시체를 십자가 위에 방치된 채 거룩한 안식일과 유월절을 맞는 것을 막기 위하여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총독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정결법으로 볼 때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던 시체를 치워 주도록 요구한 것이다(요 19:31). 따라서 예수님의 시체는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신속히 장사되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던 그가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 정죄되었던 예수께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누리던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를 무릅쓰고 이와 같은 일을 행하였다는 사실은 진실된 성도의 충성이란 어떠한 희생조차 불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이와 더불어 본문에는 나오지 않으나 니고데모 역시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료를 가지고 와서 예수 시체의 장사를 도왔다(요 19:30).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겠노라고 호언장담하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쳐 버린 상태와 지금까지 전혀 드러나지 않게 예수님을 따르던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만이 담대히 자신의 신앙을 드러낸 것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가장 낮아진 죄인의 상태에서 평소 따르던 제자들이나 환호성 지르던 군중들의 외면을 당한 채 쓸쓸히 장사되신 것이다.
한편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병행 구절인 눅 23:56을 보면 이때 예수의 장사지냄을 목격한 여인들이 예수를 위하여 미리 안식일 지난 후에 바를 향품을 예비하였다는 사실과, 마 27:62-66을 보면 예수의 시체 없어짐을 우려하여 대제사장 무리들이 무덤들을 인봉하며 파수꾼을 세운 사실이 나와 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애도하며 장사를 지내는 자와 두려워하며 부활을 저지하려는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이 있는 바와 같이 역사상 예수에 대한 평가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태도도 두 가지로 갈라진다.
이러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의 신앙은 평안과 축복을 누릴 때보다는 역경과 고난에 직면하게 될 때 입증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과 평안을 베풀어 주시면 자신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겠노라고 맹세하지만, 정작 시련과 핍박이 닥치면 너무나 쉽게 신앙을 포기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는 잘못마저 범한다.
② 예수님의 탄생과 지상 사역, 그리고 죽음과 장례가 철저히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역시 성경의 예언대로 틀림없이 성취될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예수님께서 장사(葬事) 되신 사건은 메시야에 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결과였다(사 53:9).
15:42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 - 히브리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토요일 저녁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본절의 안식일 전날은 금요일 저녁이 되지 않은 시간을 의미한다. 이날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다. 저물었을 때에.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사람의 시체는 죽은 당일에 장사 지내야 했다(신 21:22, 23). 그런데 본절에 의하면 다음날이 안식일이며 동시에 유월절 만찬을 시작해야 하는 때였으므로 이 일은 매우 급했다. 만약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된다면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되고, 한편 시체를 접촉한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게 되므로(레 22:4) 유월절 만찬을 먹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시체는 서둘러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요 19:31-37에 보다 상세히 나와 있다. 즉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기 위해 두 강도는 다리를 꺾었으며 예수에게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죽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한편 유대인들은 '저녁'을 두 가지로 분류하였다. 즉 이른 저녁(오후 3시- 오후 6시)과 늦은 저녁(오후 6시-오후 9시)인데 본절은 하루의 막바지인 '이른 저녁'이라 할 수 있다.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 -히브리인에게 있어 흔한 이름인 요셉을 다른 사람과 구분키 위해 그의 출신 지역을 밝혔다. 한편 '아리마대'는 히브리어 '라마다임' 앞에 관사 '헤'( )를 붙인 것을 헬라어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곳은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다임 소빔'과 동일한 곳일 가능성이 많다. 실로 서쪽 약 26km, 벧엘 서북쪽 약 26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렌티스'로 추정된다.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신분으로 볼 때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즉 예수는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 신성 모독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자였다. 따라서 동일하게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요셉이 예수를 장사 지낸다면 이는 공회의 입장을 반대하는 배반자로 취급될 수 있었으며 더군다나 악의를 가지고 그를 해하려 한다면 동일하게 신성 모독죄를 덮어 씌울 수도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로마의 입장에서는 반역죄로 처단된 사람이므로 시체의 인도가 허용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역시 반역자로 몰릴 위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의 가족과 제자들도 망설인이 일을 요셉이 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 일반적으로 '시체'는 '프토마'( )란 말이 쓰이나(마 14:2; 계 11:8), 여기서는 '육체'를 의미하는 '소마'( )가 쓰였다. 이는 요셉이 예수의 육체에 대해서 애착심을 가졌으며 부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 요셉에 대한 칭찬은 사복음서 모두에 나온다. 마태는 그가 부자이며 예수의 제자임을(마 27:57), 누가는 선하고 의로우며 공회의 악한 결의에 찬성치 아니한 자로(눅 23:50,51), 요한은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는 자로 묘사한다(요 19:38). 이로 보아 요셉은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를 남용치 않고 오히려 공회의 월권을 반대하며 예수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는 자였다. 그럼에도 예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못했던 것은 사회의 시각 때문이었으나 이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예수를 따르는 자임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15:44 이상히 여겨. - 빌라도는 예수께서 이미 죽었다는 말을 요셉으로부터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람들은 보통 2,3일을 경과한 후에 죽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의 '이상히 여겨'(다우마조)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해 의문점을 가졌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적을 보고 난 뒤의 충격적인 놀라움을 뜻한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이 빌라도에게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적적인 사건으로 받아 들여 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5: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 - 예수가 이미 죽었다는 말에 놀란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요셉이 한 말의 진위를 물은 후에 요셉에게 예수의 시체를 내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초대 교회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키 위한 시도로 가사설(假死說) 즉, 기절설이 주장되어 왔으나, 이는 본절에 의해 부인됨을 보여 준다.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 여기서 시체는 43절에서 요셉이 말한 '시체'(소마)와는 달리 프토마( )가 쓰여 요셉에게서 찾을 수 있던 경건함과 신앙심이 빌라도에게는 없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별다른 이의 없이 순순히 예수의 시체를 빌라도가 내어 놓은 것에 대해서는 요셉이 부자이며 공회원이라는 지위가 큰 작용을 했을 것이며 또한 예수에 대해 큰 불만이 없던 빌라도의 마음이 이 일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15:46 세마포를 사고… 이것으로 싸서. - 세마포가 수의로서 쓰이고 있다는 것은 예수의 장례가 유대 전통적인 장례법에 의해 수행됨을 뜻하고 있다(요 19:40). 즉 죄인된 몸으로 사형당한 시체는 노천(露天)에 버려지거나 로마의 규례에 따라 십자가에 방치되는 일조차 있었으나, 예수는 비록 죄인된 몸으로 죽었으나 예언에 따라 부자의 묘실에 묻힌 것이다(사 53:9). 그런데 본절만을 보아서는 요셉이 왜 세마포만 사고 장례에 필요한 향료는 사지 않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료를 가지고 왔음이 나타난다(요 19:39). 결국 이 같은 일이 우연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미리 두 사람이 서로 분담해서 구입해야 할 것을 상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내려다가. - 요셉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시체를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의 죽음 현장에 있었던 제자 요한과 니고데모 그밖에 여자들이나 로마 군병이었을지도 모른다.
바위 속에 판 무덤. - 당시 유대인들의 무덤은 평민의 무덤과 부자의 무덤 두 종류가 있었다. 평민의 무덤은 얕게 판 바위 구덩이로서 그 입구가 쐐기 형식의 둥근 돌로 봉해져 있는 형태였다. 이에 비해 부자의 무덤은 통로를 통해서 내려가는 계단과 석실로 되어 있었고 그 입구는 바위를 깎아 홈을 파고 바퀴 모양의 돌문을 굴려 닫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이 홈은 경사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 문을 열려면 최소한 장정 5,6명이 있어야 가능했다. 한편 마태에 의하면 이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 자신이 쓸려고 준비해 둔 새 무덤이었다(마 27:60).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 무덤 입구를 돌로 막은 것은 시체에 대해 모욕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또한 짐승이나 도굴꾼으로부터 시체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여 서로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나타난다(마 27:62-66).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다가 부활했다고 말할 것을 염려하여 무덤 앞에 병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는 일을 하게 한다.
15:47 막달라 마리아와…예수 둔 곳을 보더라. - 이들은 예수의 처형을 지켜보던 여인들로서 이제 무덤까지 따라와 그 위치를 확인하고 있다. 이들은 평소 흠모하였던 예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 드리고 또한 추후에 무덤을 관리하기 위하여 위치를 확인하고자 온 것일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일요일 아침에 여자들이 빈 무덤을 본 것은 무덤을 잘못 찾았기 때문이라 하나, 본절의 기록에서 보여지듯이 여자들이 예수의 장례에 대해서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렸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연구자료
살로메-헌신적으로 주를 따른 여제자
1. 인적 사항
① 살로메는 '평화'라는 뜻,
②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마 20:20,21).
③ 세베대의 아내(마 27:56).
④ 갈릴리에서 예수의 처형장인 골고다까지 좇아간 여인(막 15:40,41).
2. 시대적 배경
예수께서 공생애를 막 시작하던 A.D. 27년경부터 예수를 따랐던 인물. 그 당시는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다.
3. 주요 생애
예수 영접 이전 | ||
출생 | - | - |
세베대 결혼 | - | 마 27:56 |
야고보와 요한 출생 | - | - |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함 | AD. 27년 | 막 15:40,41 |
예수 영접 이후 | ||
두 아들을 예수께 드림 | AD. 27년 | 막 1:19,20 |
예수께 두 아들의 영광을 구함 | AD. 30년 | 마 20:20,21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옳음 | 〃 | 막15:41 |
십자가 상의 예수님을 지컥봄 | 〃 | 막 16:1 |
천사로부터 예수 부활의 소식 들음 | 〃 | 눅 24:1-8 |
사도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중거 | 〃 | 눅 24:9,10 |
죽음 | - | - |
4. 성품
① 예수님의 초기 사역지인 갈릴리에서부터 주가 운명하는 순간까지 동행한 것으로 보아 꾸준하고 인내로운 신앙을 갖출 자(막 15:40,41).
② 로마 군병들이 지키고 있던 예수의 무덤에 향유를 들고 찾아간 것으로 보아 담대하고 주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자(막 16:1).
③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께 드리고, 자신도 끝까지 예수를 따른 것으로 보아 예수께 전적으로 헌신한 자(막 1:19,20; 15:41).
④ 두 아들을 주의 보좌 좌우에 앉게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한 것으로 보아 자녀의 출세와 성공을 갈망한 자(마 20:20,21).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수의 공생애 초기부터 운명의 순간까지 꾸준히 예수를 섬긴 자.
② 예수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로서 사도들에게 예수 부활을 증거. 이로써 부활의 증인된 성도의 첫 번째 사명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 자(눅 24:1-10).
6. 주요 공적
① 두 아들을 예수께 드려 사도의 역할을 감당케 함(막 1:19,20).
② 예수와 끝까지 동행함(막 15:40,41).
③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증거함(눅 24:1-10).
7. 주요 실수
① 예수에 두 아들의 세속적 영광을 구함(마 20:20,21).
8. 평가 및 교훈
① 살로메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터 운명, 부활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을 변치 않고 주님을 섬기며 열정적으로 주님을 좇았다(막 15:40,41). 이는 성도들이 어떠한 태도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는 좋은 예이다. 우리 성도들도 살로메처럼 어떠한 환난과 역경이 닥쳐오든지 변절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열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겠다.
② 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살로메는 즉시 나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눅 24:1-10). 이처럼 성도들의 첫째 되는 사명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땅 끝까지 이르러내 증인이 되리라'고 부탁하신 예수님의 지상 명령(행 1:8)을 기억하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 전파에 힘쓰는 자들이 되자(딤후 4:2).
③ 두 아들의 현세적 영광을 청탁한 살로메에게 주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고 말씀하심으로써 먼저 섬기는 모습이 선행되어야 함을 일러주셨다. 또 예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삶을 통하여 섬김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요 13:4,5). 이에 우리 성도들은 살로메처럼 영광의 자리를 구하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겸손히 섬기는 모습을 갖추어야겠다(마 11:29).
9. 핵심 성구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도 많이 있더라"(막 15: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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