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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장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장례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19:28-23:56까지 이어져 온 일련기사, 즉 구속사역의 최종 성취를 위하여 주께서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신 후 마침내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까지의 소위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의 여러 사건을 보도하는 일련기사의 종결 부분이다.
본장은 성 고난 주간의 제 6일인 금요일의 새벽부터 시작되어 그날 오후 3시 경의 예수의 죽음과 그 후의 주의 장례에 이르기까지 구속사역의 결정적 성취인 예수의 십자가 수난 전 ․후 사건을 집중 보도하고 있는 장이다. 이런 본장은 1-25절의 전반부가 예수에 대한사형 선언까지의 과정을 26-49절의 중반부가 예수의 처형 사건 자체를, 50-56절이 운명하신 예수의 장례 기사를 보여준다.
전반부 1-25절의 예수에 대한 사형 선언 과정은 먼저 로마 식민 통치 체제하에서 처형권이 없던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를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이첩시킴으로 이루어진 빌라도의 1차 심문보도(1-5절), 빌라도가 다시 예수를 예수의 출신 지역인 갈릴리 지방의 통치자였던 헤롯 안디바에게 이첩시켜 이루어진 헤롯의 예수 심문(6-12절), 헤롯이 다시 예수를 빌라도에게 이첩하여 이루어진 빌라도의 예수 2차 심문과 사형 언도(13-25절)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런 예수에 대한 사형 언도의 일련 과정의 구속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주의 구속사역은 근본적으로는 죄로 물든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한 우주적 사역이었으나 그것이 직접적으로는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현실적 이해타산에 의한 결탁과 무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실로 예수의 처형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뿐아니라 당시 로마 식민 체제하의 정치 실권자들인 로마 총독과 헤롯가문의 분봉황이 모두 가세하였었다. 이들은 결국 영적으로 이 세상 권력을 잡은 자들의 대표였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 수난은 1차적으로는 땅에 속한 자들이 하늘에 속한 구주를 배반하고 죽여 하나님의 자리를 취하여 영원히 스스로 왕 노릇하려는 시도로서 근본적으로 이 모든 것이 사탄에 의해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한다.
둘째로 우리는 당시 유대의 로마 총독이던 빌라도(Pilate)가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고 소극적으로나마 예수를 풀어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부득이 예수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한 기사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구속사의 실체를 바로 깨달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진리 위에 바로 서지 않는 자는 이 세상의 권세자(엡 2:2)인 사탄의 갖은 유흑과 슬수에 말려 자의든 타의든 결과적으로는 주님을 반역하는 자의 무리에 가담하게 되고 마침내 저주받는 자리에 동참할 수밖에 없음을 단적으로 보석 준다 하겠다.
끝으로 우리 는 이 사실을 그것 자체로만이 아니라 죄 많은 인간이 거짓으로 죄 없으신 인자 예수를 죄인으로 선고하고 죽였으나 주님은 이를 다만 당신의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한 통로로 이용하시고 먼저는 당신이 부활 승천하셨으며 마침내는 다시 세상에 오사 이제는 구속주요 메시야로서 의와 공평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여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실 사실과도 연결시켜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만 현재 즉각 주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이제 이미 성취된 주의 구속사역을 믿고 택한 자의 충만한 수가 회개하여 구원을 얻을 충분한 시간을 주시기 위해서이며 그를 위하여 주의 부활로부터 재림까지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는 구속사적 중간기가 진행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는 지금도 마치 이 땅과 이 하늘이 영원할 것처럼 극성하며 악이 범람하는이 모순된 세상의 실체와 그것의 미래에 대해서 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이런 세상을 이기시고 다만 택한 성도의 죄값을 치르신 후에 마침내 훈날 이런 모순된 세상을 종결시키실 주님에 대한
원대한 구속사적 신뢰를 가지고 종말론적 희망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기사 자체를 보도하는 중반부 26-49절은 다음처럼 세분할 수 있다. 즉 십자가 처형을 위한 골고다로의 행진(26-32절), 십자가 처형(33-38절), 예수와 함께 처형된 두 강도가 예수께 대하여 각각 상반된 자세를 가져서 결국 상반된 운명을 맞은 사실을 보도하는 예수 좌우편의 두 강도 기사(39-43절), 예수의 임종 장면(44-49절) 등으로 보다 세분된다.
골고다(Golgotha) 행진 도중에 있었던 여인들과의 대화에서 지금 당장 말할 수 없는 수모와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오히려 세상 종말을 당할 인간들을 염려하시는 구속주로서의 주님의 사랑의 순수성과 열정이 새삼 확인된다. 실로 태초부터 종말까지 계속되는 구속사는 타락한 죄인의 죄 값은 반드시 치러져야 한다는 냉철한 공의의 원리 및 준엄한 법과 아울러 죄인을 위하여 그 죄 값을 대신 치러 주시는 놀라우신 성부, 성자, 성령의 뜨거운 사랑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33-38절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처형과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모독한 범죄를 보도하고 있다. 처형자들은 예수의 죄패(罪牌)에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하였다. 그들은 모르고 이렇게 하였지만 참으로 주님은 참 유대인 곧 하나님이 택한 영적 선민(選民)에게 구속을 주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바로 주님께서 이를 주장하시는 것을 독선이요 반란으로 몰아서 주님을 처형했지만 사실 주님은 훗날 부활승천하선서 자신이 참 유대인의 왕(王)이심을 입증하셨을 뿐 아니라 세상 끝날 자신의 왕권을 전 우주적으로 발휘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의 십자가 위에 매달은 죄패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무지와 모독 그리고 사탄의 갖은 책략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을 관철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주권을 보여 준다.
한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의 옷을 나누며 주를 조롱하던 자들의 행태는 주의 죽음이 실제로 죄가 있거나 힘이 없어 수난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당하시는 구속 수난임을 모르는 어리석은 행위인 동시에 무고한 죽음을 당하는 의인의 죽음을 조롱하는 악한 행 위 이 기 도 하였다. 나아가 영 적 으로는 그 옛 날 스스로 타락한 후 인간을 유흑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멀어지게 한 사탄이 이제는 아예 하나님의 아들 자체를 죽이려고 하는 범죄에 동참한 구속사적 범죄이기도 하였다. 이들의 이처럼 어리석고 악한 행동은 잠시후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그야말로 구속사적 범죄요 어리석은 도전에 불과하였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사탄은 겨우 여자의 후손 곧 성육신한 예수의 발뒤꿈치를 문 것에 불과했지만 예수는 궁극적으로 사탄의 머리를 쳐서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할 것이라던 태초의 예언(창 3:15)이 결정적으로 성취되었으며 세상 끝날 마침내 최종 실현될 것이다. 한편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구속사억과 그 결과 도래한 그리고 세상 끝날 완전히 도래할 천국(天國) 구원을 믿지 않으며 오히려 조롱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이들도 그 옛날 예수를 못 박은 유대인들의 행동이 범죄요 어리석은 소행임이 곧 판명되었듯이 세상 끝날 그 어리석음과 악함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39-43절의 예수 좌우편의 두 강도의 사건은 실로 종말까지 진행될 구속사의 전개 양상에 대한 오묘한 예표를 담고 있다. 먼저 두 강도가 한 분 예수 곧 죄로부터 순결한 유일한 인자(人子)로서 우리의 구속자이기도 한 예수에 대하여 전혀 상반되는 자세를 보인 것은 세계 만민이 모두 똑같은 죄인이면서도 한 분 구속주 예수에 대하여 전혀 상반된 자세를 가질 것을 보여 준다. 둘째 두 강도가 각각 주께 상반된 자세를 가진 결과 한 사람은 낙원으로 인도된 반면 한 사람은 그대로 멸망된 사실은 주님에 대한 상반된 자세 여하에 따라 그야말로 영생과 영벌이 각각 다르게 주어질 것을 보여 준다. 즉 죄로부터 순결한 유일한 인자로서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신 주께 대한 자세는 곧 우리의 전 존재의 영생과 영벌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엄숙한 구속사적 원칙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강도질을 하다가 죽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주께 회 개하고 구원얻은 우편 강도의 모습은 실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그 어떤 공로가 아니라 구속주 주님을 믿는 믿음에만 근거한 것이며 그 어떤 죄인도, 또한 그 어떤 죄도, 아울러 그 어떤 순간에도 회개하기만 하면 구원얻을 수 있다는 구속사적 은총의 무궁하심을 반영하고 있다.
다음 44-49절은 마침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구속사역을 위한 수난을 마치시고 운명하신 사건을 보도한다. 그리고 이에 동반하여 주의 수난이 메시야로서의 구속사역의 성취였음을 입중하기 위한 여러 징조들이 동원되어서, 심지어 예수 처형의 책임자였던 로마 백부장까지도 자신도 모르게 방금 처형된 예수가 신성(神性)을 가진 존재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음이 보도된다. 특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성전의 지성소(the Most Hely Place) 앞에 위치하여 죄로 오염된 인간과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관계의 단절을 상징하던 지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차단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예수의 능동적인 구속사역으로 그 죄가 해결됨으로써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결과로 창조 당시의 원래의 관계로 회복되었음을 보여 주신 구속사적 증표였다. 또한 역으로 그 수많은 양의 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괴리가 우리 주 예수의 죽음으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제거된 것은 우리 주 예수의 죽음이 전 시대의 모든 택한 자들의 구속을 위한 유일하고 영원한 어린 양으로서의 수난이었음을 증거해 준다. 결국 이 임종기사의 보도는 실로 예수의 죽음이 한 자연인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예비되고 성취된 메시야로서의 구속사역의 성취로서의 죽음임을 입중해 주고 있다.
마지막 단락인 50-56절은 예수의 장례기사와 아울러 예수의 운명 직후 안식일이 개시되었 으므로 안식일에 시체와의 접촉을 금하는 유대 율법에 따라 예수께 대한 완전한 장례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아 안식 후 첫날 곧 일요일 새벽에 주를 따르던 여성들이 주의 무덤을 찾게 된 배경을 암시하면서 본장을 마감하는 부분이다. 이는 우리 주 예수의 죽음이 임종하여 묻히기까지 하신 완전한 죽음임을 보여 준다. 동시에 본장에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으나 마 27:62-66의 언급에서 보듯이 로마의 병정들이 예수의 무덤을 경비까지 한 것은 다음 장에 나타나듯이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일부 주의 부활을 반대하는 자들의 거짓 소문처럼 주의 부활이 주님의 시신을 다른 곳에 숨겨두고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 아니라는 증거 구절이 된다. 어쨌든 본문은 예수의 죽음의 완전성을 보여 주는 것인 동시에 예수의 죽음을 영원한 죽음으로 만들려는 사탄의 사주를 받은 지도자들의 최후의 발악도 무위로 돌아가고 주님은 부활하셨다는 예수 부활의 진정성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의 하나가 되었다.
이상의 본장을 결론적으로 요약할 때 우리는 주의 십자가 처형(the Crucifixion)은 유대 지도 자들과 로마 정부의 결탁에 의한 무고하고 처절한 수난이었으며 그 처형의 과정은 이미 예언된 말씀대로 진행된 것으로서 당시의 사람들의 눈에는 패배자의 종말처럼 보였으나 실은 택한 죄인을 구하시기 위한 구속사역의 성취로서 오히려 이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참되고 영원한 구주가 되기 위한 구속주로서의 잠시의 희생으로서 오히려 영원한 승리와 평화의 시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상의 개관 이외에도 우리는 실로 구속사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주의 십자가 수난을 통한 구속 성취 자체에 대한 보다 길은 이해가 요청되는 바 이는 마 27장 자료노트를 보라.
빌라도의 예수 심문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과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헤롯의 예수 심문
6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빌라도의 예수 무죄 판결
13 〇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매려서 놓겠노라
17 (없음)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얼이 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27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21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의 예수 사형 언도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23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
26 ○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며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 또 다른 두 헹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예수의 십자가 처형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 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 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牌)가 있더라
예수와 함께 처형된 두 강도
39 ○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의 죽음
44 ○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49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예수의 장사
50 ○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저희의 결의에 행하가 가(可)타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52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 계명(誠命)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 -23:1-49 인간의 구원을 위한 3위(位)의 공동 사역
인간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은 피 목적을 같이 하시면서도 그 세부 맡은 사역의 부분은 서로 다르시다. 한편 이는 정도의 문제를 말함이며, 모든 부분에서 삼위는 같이 사역하셨다. 그러나 이를 굳이 구분해 봄은 삼위께서 각 위의 속성과 지위에 따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애쓰셨으며, 또 이를 보도하는 성경의 구원 진리는 얼마나 심오 절대한 것인지를 새삼 깨우치기 위해서 이다.
사역의 내용 및 특징 | |
성부 하나님 |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심(엡 1:7-10) |
성자 하나님 |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성육신하여 오셔서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수행 성취하심 (마 26:38-42) |
성령 하나님 | 하나님의 구속 진리와 예수의 구속 공로를 구체적으로 계시하고 적용, 이루어 가심(요 14:17; 16:13) |
난제해설-23:1-25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자세와 책임 문제
사복음서는 다 같이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재판 사건을 기록한다(마 27:1-76; 막 15:1-15; 눅 23:1-25; 요 18:28-19:16). 그러나 빌라도(Poinus Pilate)가 예수를 십자가형에 선고한 것이 분명함에도 각 복음서 마다 빌라도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하게 기록하고 있는 듯하다. 더욱이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함을 알고 그를 풀어주기 위해 무척 노력했으나 유대 군중들의 성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준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면 과연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또한 당시 사법권(司法權)을 쥐고 있던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태도는 과연 정당했는가? 이에 대해 생자해 보도록 하겠다.
1.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자세
먼저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재판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전에 당시 빌라도의 입장에 대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 하에 있던 유대는 죄인에 대한 사형 집행권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가 유대교의 혼란을 가져온, 혹은 신성 모독죄(blasphemy)를 범한 종교적 죄인으로 이미 산헤드린 공회에서 선고되었음에도(마 26:57-68) 그를 정치범으로 몰아 사형 집행권을 가지고 있는 로마 총독에 넘겨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예수에 대한 사형 집행권을 위임받은 빌라도 자신도 예수가 로마 제국에 대한 정치범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될 수 있는 대로 예수 사건을 유대인들 자신의 문제로 국한시켜 버리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의 계속된 고소로 인해 빌라도는 할 수 없이 예수 사건을 맡게 되었다.
빌라도가 처한 당시의 입장이 이러했던 만큼 그는 예수를 재판함에 있어 예수에 대한 정당한 재판보다는 유대 군중들의 반응만을 살피는 재판관으로서 있을 수 없는 우유부단함을 가졌다.
그리고 유대 군중들의 반란이 두려워 유대인들의 뜻대로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고 말았다(25절). 그리고 더욱 가증한 것은 예수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떠넘기기 위해 그들 앞에서 자신은 죄가 없다는 뜻으로 손을 씻었다는 점이다(마 27:24,25).
2. 빌라도의 책임
빌라도는 예수 사건에 대해 스스로 아무 죄가 없다 하여 책임을 회피했으나 당시 사형 집행권을 가진 그가 예수에 대해 부당한 판결을 내린 책임은 결코 회피할 수 없다. 즉 재판관으로서 의당피고(被告)의 죄의 여부를 정당히 가려내야 하는 책임, 또한 스스로 예수가 무죄하였음을 인정하고도 그를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써 재판관으로서의 직무유기 및 예수 살해에 유대인들과 함께 동참한 죄에 대한 책임은 마땅히 빌라도 자신이 져야할 것이다. 이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을 통해 역사적으로 길이 길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정죄됨은 마땅하다 할 것이다.
3. 의의
이상에서 본고는 단지 예수에 대한 빌라도 한 사람의 개인적인 죄를 캐내는 데만 의의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책임을 본고에서 확실히 규명하는 이유는 복음서에서 빌라도는 분명 세상 최고 권려의 상징적 존재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빌라도는 악한 세상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끝까지 훼방코자 에덴동산에서부터 계속해 온 사탄의 궤계에 따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말세지말(末世之末)에 이르러 예수 당시보다 더욱 흉폭하게 날뛰는 사탄의 궤계에 성도들은 더욱 경각심을 갖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사탄의 궤계도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임을 기억해야 하겠다.
풍습 -23:26-38 로마 시대의 십자가형(+字架刑)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갖은 고초와 모욕을 당하시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렇듯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는 십자가형(+字架刑)은 당시 로마에서 각각의 속주를 다스리던 총독들에 의해 널리 행해지던 처형방식이었다. 이에 당시 로마 시대의 십자가형 풍습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기원
십자가형은 로마 시대에만 독특하게 행해지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예수 시대 수세기 전부터 고대 근동의 여러 국가들, 즉 앗시리아 ․ 메대제국 ․ 페르시아 등에서 행해지던 죄수들의 처 형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습이 그리이스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도 노예에 대한 처형방식으로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또한 점차 이 방식이 법 질서를 유지하는 데 유용하다고 인식한, 로마의 속국을 다스리던 총독들에 의해 십자가형이 확산되어져 갔다.
2. 대상
십자가형이 앗시리아에서 탈주자 ․ 적관포로 ․ 반역자 등을 처형할 때 쓰인 방식이었듯이. 그리이스 ․ 로마 시대에도 십자가형은 거의 예외 없이 자유인이나 로마 시민의 처형방식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노예에 대한 처형방식으로 십자가형이 이용되었다. 이때 처형당한 노예들은 주로 반역자들이었는데, 후에는 외국인과 강도범에게까지 이 형벌이 적용되었다(마 27:44). 또한 속주의 총독들은 이러한 십자가형이 전시적 효과가 크기 때문에 식민지 백성들의 범죄와 소요를 방지하고 경고할 목적으로 가장 사람의 왕래가 많은 교차로에서 형을 집행하곤 했다.
한편, 로마의 시민에게도 적용되던 것으로 '불모의 나무'에 교수형으로 처형하는 오래된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대역죄나 중대한 범죄시에 집행되었다.
3. 절차 및 방법
십자가형을 당하기 전에 보통 매질을 당하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였다(마 27:26). 그밖에도 다른 벌을 미리 가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피가 날 때까지 매질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는 십자가에 매달린 처형자로 하여금 빨리 죽게 하여 그만큼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다음 절차는 처형장까지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의 나무를 메고 가는 것이었다. 예수는 소요죄라는 중죄인으로 고소되었기 때문에 심한 매질을 당해 십자가의 나무를 메고 처형장까지 가실 기력도 없어 다른 사람이 도와야 했을 정도었다(마 27:32). 또한 이 때문에 빌라도가 놀랄 정도로 그처럼 빨리 운명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막 15:44).
한편, 십자가의 수직 말뚝 중간에 엉덩이를 받칠만한 작은 나무를 대어, 체중으로 인해 손이 찢어져 손에 박힌 못이 빠져 나오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렇게 사지(四肢)를 꼼짝할 수없이 묶인 채 매달리게 됨으로써 처형자는 모진 날씨나 곤충들 그리고 구경꾼들의 욕설과 조롱에 그대로 노출되어 육신의 아픔과 함께 처절한 고통을 당하며 죽어갔던 것이다. 더욱이 경우에 따라서는 매장을 허락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죽은 후에도 시체를 그대로 매달아 두어 새들로 하여금 뜯어먹게 함으로써 철저히 모욕하기도 했다.
4. 의의
이상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십자가형은 로마 시대에서 화형이나 참수형 같은 다른 처형방식보다 더 잔인한 극형이었다. 탈주 비밀폭로 ․ 내란선동 ․ 살인 등의 중죄에만 적용되어진 이 십자가형을 아무 죄도 없으시고 흠 없으신 예수께서 당하셨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다시 한 번 비장감을 맛보게 한다. 또한 당시 로마 시대의 처형 방식 중의 하나였던 십자가형으로 예수가 돌아가신 것은 오늘날 예수의 대속 죽음과 성경의 진정성을 부인하며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고 있는 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사실이 아닌가 한다.
신학용어-23:43 낙원(Paradise)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당신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던 오른편의 강도가 진실한 믿음을 보였을 때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니'라는 축복의 약속을 주신 사실이 나은다. 여기서 '낙원'은 사후 곧바로 가는 장소로서 세상 종말에 부활한 모든 성도들이 가게될 천국(天國)과는 다른 곳임을 암시해 주는 바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용어의 정의
'낙원'에 해당하는 신약의 헬라어는 '파라데이소스'이다. 이 단어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땅','수목이 우거진 공원'이라는 뜻의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공원'(park), '정원'(garden)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서 유래한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가 모두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 었으며 70인역 헬라어 성경(LⅩⅩ)에서도 창 2-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을 '파라데이소스'로 번역하였다.
2. 신학적 의미
'낙원'이라는 용어가 종교적 의미로 사용된 것은 헬라인들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악인(惡人)의 사후 거처를 '하데스'라 하고 의인(義人)의 사후 거처를 '낙원'이라 했다. 이러한 헬라 사상에 영향을 받은 B.C. 3-1세기경의 유대인들은 종전에 인간의 사후 처소로서 '음부'(陰府) 하나로만 생각하고 있던 것을 악인의 사후 거처는 '게헨나', 의인의 사후 거처는 '낙원'으로 둘로 나누어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신약 성경에는 '낙원'이라는 말이 단 3회 나오는데(눅 23:43; 고후 12:4; 계 2:7) 모두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바와 동일하게 '의인' 또는 '성도'의 사후 거처로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장소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신약 성경 전체에서 볼 때 성도들이 개별적으로 사후에 가는 처소인 '낙원'이나 불신자가 가는 '음부'는 분명 전 우주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의 최종 심판 후에 부활하여 영육을 다 가진 존재로서 가는 천국(天國)이나 지옥과 는 구별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이에 신학에서는 최후 심판이 있기 전에 인간들이 개별적으로 사후에 머무르는 '낙원'과 '음부'를 가리켜 '중간기 처소'라 명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간기 처소의 위치 및 기타 관련 사항들에 관해서는 신학자들 간에 견해가 분분하다. 이에 관하여, 그리고 낙원과 음부와 천국과 지옥의 차이에 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의 종말론을 참조하라.
3. 의의
구약 성경에서는 신약에서와는 달리 사후 중간기 처소에 대해 의인과 악인의 처소를 구분하지 않고 '음부'로만 칭하고 있다. 그것은 구약 시대에는 인간의 사후 세계에 대한 계시가 신약시 대보다 훨씬 미흡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계시의 점진성에 의해 구약에서는 불분명했던 개념이 신약에서는 명료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종말론과 관련된 전반적인 개념들이 그러하다. 구약 시대의 '음부' 개념에 대해서는 욥 14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도표-23:39-43 십자가상의 두 강도 비교
한 강도 | 다른 강도 | |
예수께 대한 태도 | 비방하며 조롱함(39절) | 예수의 무죄를 인정(41절) |
회개 여부 | 자기 죄를 회개 안함(39절) | 자신의 죄를 참회함(41절) |
예수께 대한 요구 | 현세의 구원을 바람(39절) | 내세의 구원을 바람(42절) |
결과 | 영원한 죽음에 이름 |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에 거함 |
도표-23:50-54 아리마대 요셉의 7대 특징
1 |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 자(마 27:57) |
2 | 재물을 선용한 자(마 27:57) |
3 | 선하고 의로운 자(눅 23:50) |
4 | 심지(心地)가 굳은 자(눅 23:51) |
5 | 불의에 동조하지 않은 자(눅 23:51) |
6 |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 자(눅 23;51) |
7 | 담대하고 용기 있는 자(눅 23:52) |
23:1-5 빌라도의 예수 심문
지난 장(눅 22장)에는 마지막 수난 주간 중 예수께서 유월절을 준뢰하신 수요일부터 무리들에게 잡혀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은 금요일 새벽까지의 일정을 소개했다. 이어 본장에는 예수님의 수난이 절정을 이루어 빌라도의 재판을 통하여 십자가 사형을 언도받으신 예수님께서 죽임 당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었다. 본문에는 그중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음 심문하는 장면이 소개된다(마 27:1-2,11-14; 막 15:1-51; 요 18:27-37).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을 통해 예수님을 신성 모독을 범한 죄인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었으므로 산헤드린 공회에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다. 따라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산헤드린 종교 재판을 통해서는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기에 당시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정치적인 재판을 이용하여 사형을 집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의 죄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신성 모독죄라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인들이 보기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인들이 심각하게 여길 만한 죄목을 만들어 예수를 고소했다. 이들이 고소한 죄목은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백성을 미혹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았기에 나온 막연한 죄목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에게 바른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셨을 뿐이며, 그들을 유혹하거나 선동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죄목은 분명한 모함이었다.
둘째는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납세에 관한 논쟁을 생각하고 말한 것이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가인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눅 20:25)고 말씀하셨으므로 이 또한 허위로 날조된 죄목이었다. 셋째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칭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두 가지 죄목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빌라도도 이것만을 문제 삼고 심문하였다. 여기서 왕에 대한 개념의 차이가 나타나는데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빌라도는 정치적인 왕의 의미로서 질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의미하므로 이들이 고소한 죄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정치적 왕이 되시길 바라던 자들의 청을 물리치셨던 일이 있었다(마 20:20錫). 따라서 이 세 가지 죄목은 예수님을 무고하게 해치기 위한 간악한 자들의 음모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간파한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한다(4절).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의 바른 판단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소요를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에 내어주게 된다(25절).
이러한 본문은 ① 악한 자들은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이라도 사용한다는 것과 ② 악한 자들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녀답게 거짓의 모습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행 13:10).
23: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 여기서 '무리가 다'(하판 토 플레도스)라는 말은 일반적인 백성의 무리가 아니라 산헤드린 공회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산헤드린 공의회(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참조)는 예수의 처형을 사전에 계획하긴 했지만 그들이 직접 예수를 죽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비록 같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한 합법적인 조치를 마련하고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리고 갔던 것이다. 한편 빌라도는 그 당시 로마에서 파견한 사마리아와 유대 지방의 제 6대 총독으로. 그는 이스라엘에서 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최고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빌라도'에 대해선 마 27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23:2 고소하여 가로되. - '고소하여'(에르크산토 데 카테고레인)라는 말을 직역하면 '그들이 고소하기를 시작했다'라는 뜻으로서 이는 예수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공회원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간 이후 서로 계속해서 예수의 죄를 고소하는 데 열을 올렸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누가는 복음서 가운데서 유일하게 저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죄의 항목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살펴보면 ① 예수가 백성을 미혹하고 있다는 것, ②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것, ③ 예수가 자기를 자칭 왕이라고 했다는 것 등이다. 따라서 그들의 이러한 고소 내용들은 예수님의 사역의 영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한 것으로서 그들은 예수가 로마 정부에 대한 반란을 조장하는 중죄를 범했다는 증거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고소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정죄한 그들의 판결과는 매우 상이한 것으로서(눅 22:70,71) 결국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는 어 떠한 거짓 증거들이라도 쉽게 꾸며낼 수 있는 교활한 무리들이었던 것이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 이것은 예수님을 따른 백성들의 의도를 고의적으로 왜곡한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백성을 결코 미혹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예수님은 항상 어디서든지 그들을 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르치셨다. 한편 여기서 '미혹하다'(디아스트레포)는 말은 '이리저리 길을 바꾸다', '어지럽히다'라는 뜻으로서 이는 누가만이 사용하는 단어이다(행 13:10).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 이 말 또한 완전히 거짓말이다. 그 증거는 그들이 얼마 전에 예수님에게 세금 납부의 문제를 물었을 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눅 20:25), 또한 친히 세금을 납부하셨기 때문이다(마 17:27). 결국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고소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꾸며낸 거짓말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 사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야로서 자신의 신적 사역은 완전하게 수행했지만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메시야로서 자신의 왕됨은 결코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허락지 않으셨고 도리어 그때마다 예수님이 장차 감당해야할 신적 사역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마20:21-23; 요 6:24-27).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산헤드린 공회원들, 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이 모를리 없었으나 예수를 로마 정 부에 정치적인 이유로 고소하지 않으면 예수를 죽일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은 이러한 거짓말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23: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이제 빌라도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고소에 따라 재판관으로서 예수님에게 질문을 한다. 특히 빌라도는 그들의 고소 내용 가운데서 세 번째 사항을 갖고 질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로마의 총독으로서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빌라도는 예수를 고소한 그들의 의도가 예수에 대한 종교적 시기심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요 18:31) 그들의 고소
내용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래서 그 고소 내용 중 총독의 직분을 갖고 있는 자신이 당연히 조사해야 할 사실만을 질문했던 것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명확한 것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그리스도로서 왕의 직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 18:33-37).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답변은 빌라도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죄가 없도다. - 당시 이스라엘에 파견된 로마 관리들은 가능한 한 유대인들의 복잡한 종교적 논쟁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행 23:28,29). 예수를 직접 심문했던 빌라도도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고소와는 달리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것이 그들의 종교적 문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들에게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무리'(투스 오클루스)라는 말은 산헤드린 공회원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정죄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에 의해 동원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로 보아 예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빨리 자기들을 따르는 백성들을 매수하여 동원하는 계략을 진행시켰을 것으로 여겨진다(Robertson).
23:5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 이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의해서 동원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무죄 선포를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그리고 예수에게 죄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예수를 죽여야 된다고 결정한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 특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를 고소하도록 하기 위해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한편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란 말의 정확한 표현은 '무리가 계속해서 강압적으로 말하여'라는 뜻인데. 이것은 예수의 무죄를 선포하는 빌라도의 결정에 반대하는 무리들의 움직임이 점점 소요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가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을 소동케 한다'는 이유만을 들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하는 백성들의 태도는 무분별하고 억지스러운 행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23:6-12 헤롯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본문은 빌라도 앞에서 심문받으신 예수께서(1-5절)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이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에게 넘겨져 심문받으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고소 사건이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들 내부의 민족적 문제임을 인식하고는 이번 사건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출신지가 갈릴리라는 사실을 알고는 당시 갈릴리의 통치자였던 분봉왕 헤롯의 통치권을 존중하는 척하면서 이 골치 아픈 사건을 떠넘긴 것이다.
마침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기심을 갖고 있던 헤롯(눅 9:9)은 예수와의 상면을 매우 기뻐하며 여러 가지를 예수님에게 질문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진실치 않은 심문에 대하여 침묵하심으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다(사 53:7). 마태와 마가는 이러한 침묵이 빌라도의 심문에서도 계속되었다고 기록한다(마 27:12-14; 막 15:4,5). 예수님께서는 대적자나 빌라도, 헤롯 앞에서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이셨는데 이들의 언행과 대적하는 간악한 모습에 대해서는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신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헤롯이 있는 곳까지 따라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격렬한 비난과 고소를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구속 사역을 묵묵히 이루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한편 본문은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 는 원수였으나 당일에는 친구가 되었다(12절)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를 죽일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 그들이 서로 그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임을 전가하면서 서로를 인정해 주는 것처럼 가증되게 행동한 것을 묘사한 비유적 표현이다. 헤롯과 빌라도가 왜 원수 사이가 되었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다만 본문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일치된 행동을 보이는 악한 세력들의 조직적인 모습을 잘 보여 준다(잠 1:11-19).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을 구경꾼으로서 바라보는 신앙인이 아니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세상의 권세자들이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기 위해서 힘쓰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신 16:20; 잠 21:3; 암 5:24).
23:6,7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 모여든 무리들의 반발로 인해 예수의 신변 처리 문제를 갖고 고민하던 빌라도는 마침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를 헤롯에게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갈릴리 지역은 분봉왕 헤롯이 통치하였기 때문이다. 이 헤롯은 구체적으로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를 가리키며, 그는 세례 요한을 죽인 장본인이다. 하여튼 로마법에 의하면 총독이 재판권을
행사하기 전에 먼저 분봉왕이 그 지역에 관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빌라도는 이것을 이용하여 예수에 관한 문제를 헤롯에게 일임함으로써 자신은 그 곤경에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음에 분명하다. 더구나 때마침 헤롯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예수의 일을 헤롯에게 일임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헤롯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헤롯 안디바에 대해서는 마 14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23:8 헤룻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 그 당시 갈릴리 지역을 통치하였던 헤롯에 관한 기록은 복음서의 여러 곳에 잘 나타나 있다(마 14:3-11 ; 막 6:21-28; 눅 3:1). 그리고 그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헤롯은 비윤리적이고 매우 난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자기 동생의 부인이었던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여 세례요한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는데. 후에는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고 세례인 요한을 참수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성들이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던 세례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헤롯은 갈릴리 지역에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놀라운 기적들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죽었다가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마 14:1,2). 그래서 헤롯은 오래 전부터 예수를 만나는 것을 원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재판을 넘겨받고 자신이 직접 예수를 대면하게 되자 크게 기뻐했던 것이다. 또한 헤롯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권능들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번 기회를 통해 그것을 직접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만할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3:9,10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힘써 고소하더라. -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을 기뻐했던 헤롯이지만 누구보다도 헤롯의 그러한 의도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예수님은 그의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그리고 사실 예수님께서 헤롯에게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이미 완고하고 패역한 마음으로 굳어진 헤롯이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거나 받아 들일리는 만무했다. 만일 헤롯이 유연한 심성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는 이전에 세례인 요한의 경고에도 당연히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뿐만 하니라 단순히 그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만을 갖고 예수님을 만난 헤롯에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거나 이적들을 행한다는 것은 그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헤롯에게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것이다. 반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제 헤롯 앞에서 예수님을 고소하는 데 더욱 힘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패역한 무리들 앞에서 아무 말씀도 않고 침묵하시는 예수님과 빌라도보다는 헤롯 앞에서 예수를 고소하는 것이 유리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여러이유를 갖고 예수님을 고소하는데 주력함으로써 도리어 자신들의 음모를 드러내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들의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23:11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 자기 앞에서 아무런 대답도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예수님에게 헤롯은 모멸감을 느졌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가 바라던 대로 이적을 행하지 않자 헤롯은 예수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안심했던 것 같다. 물론 그도 예수님에게서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의 고소와 같이 죄를 인정할만한 그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헤롯은 그의 악한 성격을 반영하듯이 예수님을 회롱하고 괴롭혔다. 특히 그는 예수님에게 '빛난 옷'을 입히고 조롱했는데, 이 '빛난 옷'(에스테타 람프란)은 당시 고위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이 입던 은실로 짠 흰옷을 가리킨다. 따라서 헤롯은 '예수가 자신을 왕이라고 했다'는 사람들의 고소를 이용하여 예수님에게 이러한 옷을 입히고는 '네가 과연 왕이냐'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던 것이다. 그리고 난 후 헤롯은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이것은 헤롯이 빌라도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한 조치라기보다는 예수님에게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고소와 같이 그를 죽일만한 아무런 증거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처리할 수 없는 곤란한 문제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었던 것이다.
23: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헤롯과 빌라도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을 죽일만한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한 그들이 서로 그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책임을 전가하는, 그들의 일치된 행동을 묘사한 비유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비록 적대 관계에 있었던 헤롯과 빌라도이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서로 심문하고 처형하는 데 있어서는
이와 같이 일치된 협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활동하는 사탄의 세력들의 조직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Ryle).
23:13-25 빌라도의 판결
본문은 앞단락(6-12절)에서 헤롯에게 예수님의 재판 결과에 대한 책임을 넘기려 했던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의 강요에 의해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마 27:15-26; 막 15:6-15; 요 18:399:6). 빌라도는 첫 심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심문에서도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었고(14,15절). 어떻게든 예수를 놓아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무리들은 더욱 거세게 예수를 죽이도록 요구하고 나선다. 이에 빌라도는 궁여지책으로 유대인의 명절 때 죄수를 특별 사면하는 전례를 따라 예수를 놓아 주고자 했다(마 27:16).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은 오히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질렀다(18-23절). 이러한 예수에 대한 무죄 선언과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는 빌라도의 노력은 세 차례에 걸쳐 이어지지만 무리들의 반응은 더욱 거세어졌다. 따라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 없으심을 알면서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선동된 무리들이 일으킬지도 모르는 폭동을 우려하여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한다(24,25절). 즉,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만다.
이러한 본문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먼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다. 이들은 사회적, 종교적 기득권층으로서 자신의 이익에 집착한 나머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무리들을 선동하는 주동자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하나님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패역한 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둘째, 유대인 무리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호하던 모습과는(눅 19:37-38) 대조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르고 있다. 이는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정치적 해방을 가져다 줄 메시야로 인식하고 추종하다가 그의 사역의 목적이 그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무리로 급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유대 무리들의 돌변한 모습은 변절하기 쉬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셋째, 빌라도이다. 그는 비록 예수님을 무죄 방면하려고 노력했고 불가피하게 사형을 언도한 것 이라 볼지 모르나 그가 내린 불의한 판결에 대한 책임과 죄책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이방인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고 입증하여 석방하기 위해서 애썼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22절) 이는 누가복음의 수신자인 이방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유대인들의 패역함과 완악함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임을 일깨워서 유대인처럼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고 영접하여 구원의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누가는 마태나 마가보다는 빌라도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약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 예수님은 아무런 홈이 없는 분(벧전 1:19)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라바보다도 더한 죄인으로 취급당하셨다. 이렇게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죄인이라 여김을 감당하심은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대속자이심을 알려주는 것이다(고후 5:21).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받게 된다. ① 불의와 거짓에 대해서는 단호히 배격하고 진리에 대해서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② 세상의 지도자는 자신의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③ 불의한 자는 불의의 값을 반드시 받게 된다는 것이다.
23: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 본절은 헤롯에 의해 다시 자기에게로 보내진 예수님을 빌라도가 최종적으로 판결하기 위해 그 증인들을 불러 모았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말씀이다. 사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고소한 내용과는 달리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여 고민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 줄 사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를 고소한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또한 그들과 자기와의 지속적인 유대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예수에 대한 최종적 판결을 내리기 전에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을 증인으로 불러 모으고 그들 앞에서 예수의 무죄를 입중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자신도 로마 정부나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그 어떤 책임 추궁을 당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대책이 마련되는 것이었다.
23:14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 빌라도는 증인으로 불러 모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무죄를 말하기에 앞서 그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내용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세 가지 죄목으로 고소한 무리들과는 달리 빌라도는 본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단지 첫째 내용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그들이 예수님에게 정치적인 혐의를 쐬우기 위해 꾸며낸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고소 내용(2절)은 특히,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죄를 찾지 못하였고. -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라는 말의 정확한 원어적 의미는 '내가 너희 눈앞에서 그를 자세하게 조사하였다'는 뜻으로서 이는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공개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예수님을 직접 심문한 빌라도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 본 맡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죄 없음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한편 여기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란 표현은 '내가 도무지 예수에게서 그 어떤 죄도 발견치 못하겠다'는 빌라도의 공개적인 고백이다.
23: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죽일 일이 없느니라. - 예수님의 무죄를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빌라도는 이제 헤롯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여기서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알르 우데 헤로데스)라는 말을 직역하면 '그러나 헤롯조차도 죄를 찾지 못하여'라는 뜻으로서 이는 빌라도 자신뿐만 아니라 헤롯도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이는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사람들의 고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Robertson).
23: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는 빌라도의 판단은 올바른 것이었지만, '예수님을 때리고 난 후 풀어주겠다'는 그의 대안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그가 인정한다면 당연히 그는 예수님을 무조건 석방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때리고 나서 풀어주겠다는 빌라도의 결정은 그가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 정치적인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이로 볼 때 무엇보다도 빌라도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에 의해 매수된 백성들이 자신이 예수를 죄가 없다 하여 그냥 풀어주고 나면 자신에게 어떠한 해를 입힐 수 있다는 점을 상당히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때려서'(파이듀사스)라는 말은 '아이를 훈련하다'라는 뜻인 헬라어 '파이듀오' 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이는 흔히 채찍으로 매질하는 것을 가리킨다(bobbin). 따라서 '예수를 때리고 나서 놓아 주겠다'는 빌라도의 말 속에는 '내가 예수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것이 교훈이 되어서 앞으로 예수는 너희를 불쾌하게 하는 어떤 행동이나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Ryle),
23:17 일부 사본에는 본절에 '명절을 당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 주더라'는 말이 있는데(시내 사본). 이는 아마도 마 27:15과 막 15:16의 영향을 받아 다음절 이하를 설명하기 위해 후대 필사자들이 삽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23:18,19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 하고‥‥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 빌라도는 비록 예수에게 죄가 없지만 '그를 때리고 난 후 풀어주겠다'고 말하면 증인으로 불려온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동원된 백성들이 자기의 판결을 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왜냐하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번 기회야 말로 지금까지 자기들을 괴롭혀 온 예수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시기라고 생각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빌라도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이러한 음모를 숨기기 위해 그들이 동원한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를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더욱 압력을 가하는 교활한 행동까지 취한다(막 15:11). 일이 이렇게 되자 빌라도는 명절을 맞이하면 백성들의 요청하는 바에 따라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전례를 이용하여 예수님과 바라바를 놓고 백성들에게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한다(마 27:15-17; 막 15:6-9; 요 18:39-40). 물론 빌라도의 이러한 요구는 무리들이 폭도였던 바라바 보다는 예수를 놓아 줄 것을 요구하리라 기대한 까닭이다. 그러나 예수와 바라바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택하라는 빌라도의 요구에 증인으로 불려온 백성들이 어이없게도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행한 바라바를 놓아 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빌라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23:20,21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 사실 예수를 죽이고 그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는 빌라도에게도 납득이 안가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예수는 죄가 없는 반면 바라바는 마땅히 처형해야 하는 무거운 죄를 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에게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선택하는 그들의 결정이 올바른 것인가를 다시 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예수를 꼭 죽여야만 한다는 목표만을 갖고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에 의해 매수당한 백성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빌라도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를 죽이라고 더욱 소리 지르면서 그들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소동까지 일으키고 있다. 또한 이제 그들의 요구는 더욱 과격해져서 당시 가장 극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 처형을 예수에게 행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저희는 소리 질러'(호이 데 에페포눈)라는 말은 미완료 형으로서 '저희가 계속하여 소리를 지르다'라는 뜻인데, 이는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백성들의 움직임이 마치 소요의 상태로 변해 간다는 것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또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스타우루)라는 말은 현재 명령법으로 이는 '지금 당장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뜻이다. 이로 볼 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백성의 두령들과 그들에 의해 동원된 백성들은 소동을 일으켜, 빌라도를 협박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계속해서 소리치면서 소란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23: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한 것은 본절이 네 번째이다(4,15,20절). 그러므로 어떤 주석가들은 이 '세 번째'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세 번째'라는 표현은 처음부터가 아니라 헤롯이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낸 이후 연속해서 '세 번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Hendriksen).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때려서 놓으리라. -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도 특히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하고 또한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빌라도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누가복음서의 특징을 통해 우리는 누가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는 무서운 죄를 범했던 1차적 책임이 이방인보다는 선민이라 자처하던 유대인과 또한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3:23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빌라도의 설득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예수의 무죄를 밝히고 그를 놓아 주겠다는 빌라도의 결정을 바꾸기 위해서 더욱 소동을 부렸고 마침내는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야 말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비록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하고 풀어주려고 했던 빌라도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요구하는 무리들의 움직임이 점점 심상치 않게 되고 또 그 상황이 자기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결국 겁에 질려 자기의 결정을 취소하고 무리들의 요구에 순응하였던 것이다.
23:24,25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 빌라도가 무리들의 요구에 따라서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준 것은 결코 정당한 결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백성들의 인기를 끌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인 술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한 빌라도가 백성들 앞에서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하고 풀어주려고 했지만 백성들의 소동이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이 같은 조치를 취했다 해도 예수님을 죽인 책임이 그에게서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빌라도가 정말로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했다면 그는 사전에 충분히 자기 지위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풀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고소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매수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 앞에서 예수님의 무죄를 밝혀 오히려 사람들의 소동을 일으키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빌라도 자신이야기시킨 일이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재판권을 직접행사해야 했던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을 요구하는 무리들에게 넘겨주어 예수님으로 하여금 온갖 조롱과 고통을 받게 한 것도 그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결국 그는 예수를 죽인데 대한 그 자신의 무죄 선언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하나님 앞에 단죄되어 오늘날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의 입에 회자되며 저주를 받아야만 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23:26-31 십자가를 지신 예수
본문은 빌라도의 사형 구형에 따라(25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소개된다. 누가는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묘사하면서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와 함께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의 예언을 첨가하여 기록하고 있다. 하여튼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두 가지 모습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십자가를 질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신 인간적인 모습이다. 즉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힘이 부쳐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된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밤새껏 심문당하고 고문당하심으로 인하여 도저히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약해지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하나님되신 메시야께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죄악을 대신 담당해 주시는 사랑의 모습인 것이다(사 53:3,4). 둘째는 예수님의 수난을 애통하는 자들을 향해서 오히려 고통에 찬 그들의 미래를 염려하시는 지극한 사랑을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해 애곡하는 백성과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에게 현재 사형장으로 가는 자신보다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위해 애곡하라고 하신 것이다. 즉,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A.D. 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최후 심판의 때를 예언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은 죽음의 길처럼 보이나 궁극적으로는 승리의 길이요 영원한 영광의 길이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자들이 가야할 길은 하나님의 교훈을 듣지 아니하고 메시야까지 죽이는 죄악의 길로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길이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의 격언으로 이러한 말씀을 확증하시는데, 이는 푸른 나무와 같이 무죄하신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다면 마른 나무와 같이 죄 많은 유대인들은 더욱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비유이다(31절). 진정 주님의 고난은 패역한 죄인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의 표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절망적이고 영원한 최후가 오기 전에 우리는 마땅히 지금의 죄악에서 돌이켜야 하지 않겠는가?(고후 6:2; 히 3:12).
23: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 당시 관습에 의하면 십자가형을 언도받은 죄수는 자기가 못 박혀 죽을 십자가를 그 처형 장소까지 지고 가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따라서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는데,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전에 로마 군병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에 의해 몹시 괴롭힘을 당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갈만한 아무런 힘도 없었다(마 26:67; 27:27-31). 그 결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로마 군병들은 일반적으로 점령지 백성들을 임의로 징발할 수 있는 자신들의 권리를 이용하여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던 것이다. 여기서 '구레네'는 아프리카 북쪽 해안 지방에 위치한 성읍으로, 시몬은 아마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기서 '좇게 하더라'
(페레인 오피스덴)는 말은 '뒤에서 지고 가게 하다'는 뜻으로서 이는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앞세우고 그 뒤에서 시몬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가게 했다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23: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 본절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매수되었던 백성의 무리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무죄한 죽음을 몹시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누가는 '백성'과 '여자의 큰 무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고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많은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Spence), 한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그것을 슬퍼하는 많은 여인들의 무리가 있었다는 것은 누가만이 언급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복음은 복음과 연관된 예수님과 여 인들과의 관계를 자주 다루고 있기 때문에(눅 1:39-56; 2:36-38; 7:11-15; 8:1-3) 흔히 '여인의 복음'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Robertson).
23:28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 '예루살렘의 딸'이란 명칭은 구약 시대 때부터 선지자들이 자주 사용하였던 명칭으로, 이는 흔히 예루살렘의 거민 전체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었다(사 10:32; 미 4:13; 슥 9:9).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루살렘의 딸'이란 명칭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무죄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왔던 '여자의 큰 무리'를 말하며, 더 나아가서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가리키는 문자적 표현이다. 사실 예루살렘의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처형을 동정하고 슬퍼했지만 그들은 이제 엄청난 재앙이 자기들에게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멀지 않은 때에 패역한 예루살렘이 비참하게 멸망할 것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도리어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닥칠 임박한 재앙을 경고하셨던 것 이다.
23:29 보라 날이 이르면. - 여기서 '날'은 이스라엘과 로마가 벌였던 마지막 전쟁 기간. 특히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포위당하던 때를 가리킨다. 이 날은 바로 이스라엘의 멸망의 날이요. 심판의 날이었다.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복이 있다 하리라. - 일반적으로 잉태치 못하여 자녀가 없었던 이스라엘 여인들은 사회에서 많은 부끄러움을 당하기 마련이었다(삼상 1:6; 눅 1:25). 그러나 도리어 수태하지 못한 여인들에게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표현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그 거민들이 당하게 될 비참한 결과를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완전히 멸절시킬 것이기 때문에 그중에서 수태치 못했던 여인들은 자기들에게 오히려 자녀가 없다는 것을 그래도 복으로 여길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 임신한 여인이나 젖먹이를 둔 여인 보다 멸망 때에 도망하기 쉽다는 면에서 복이 있다 말씀하신 것이다.
23:30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이 구절의 말씀은 전반적으로 비유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서, 인간이 당하게 될 절망과 고통의 비참한 상태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호 10:8에 예언된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이 말씀은 패역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경고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두렵고 또한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그 재앙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자기들 위에 산들이 무너져 죽기를 바란다는 것을 뜻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매우 비참한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심으로써 그것이 패역한 성읍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밝히시는 것이다.
23: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 여기서 '푸른 나무'(휘그로 크쉬로)는 '물이 오른 나무' 또는 '생명력 있는 나무'를 의미하는데, 이는 흔히 '의인'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또한 '마른 나무'(크세로)는 '쉽게 불이 붙는 나무'라는 뜻으로서 이는 일반적으로 '죄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를 비교하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그리고 '마른 나무'는 패역한 유대인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Schneider).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패역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또한 이렇게 십자가 처형까지 이행하고 있는데, 하물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패역하고 방탕한 유대인들을 심판하실 때, 그것이 매우 무섭고 비참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교훈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어떻게 되리요' (티 게네타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23:32-4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사형 구형을 받으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신 장면을 언급한 앞 단락(26-31절)에 이어 본문은 마침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마 27:33-44; 막 15:22-32). 예수께서는 다른 두 행악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32,33절). 이는 만왕의 왕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히려 불의한 자들의 손에 의해 행악자와 같이 취급받으신 것으로, 사 53:12의 성취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의 죄악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들이 저지르는 일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엄청난 죄악임을 알지 못하고 행하는 저들의 죄 사함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셨다(34절) 그런데 저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저들은 예수님을 비웃으며 희롱하였다. 즉 백성들 뿐 아니라 군인들도 예수를 조롱했으며,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행악자까지 비웃었다.
이러한 십자가 상에서의 조롱은 이미 다윗을 통하여 예시된 것으로(시 22:7,8) 인류가 당할 죄악에 대한 보응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리고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며 그에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는데, 이는 시 69:21과 시 22:18 예언의 성취이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구원하심을 경멸의 의미로 인정하고 예수 십자가상에 유대인의 왕이란 패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불의한 자들의 손에 의해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이 선포되어 지는 것으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더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다(35,38절).
한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들은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즉 한 행악자는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렸다. 이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멸망 받을 심령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다른 한 행악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구원을 구함으로써 마지막으로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붙잡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 이 행악자의 고백은 누가만이 기록하는 것으로 예수
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고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가장 명확한 사실을 나타낸다. 석기서 회개하는 행악자는 구원받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데 실로 회개와 겸손만이 주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임을 보여 준다.
23:32,33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 누가는 본절에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 사람을 '행악자'라고만 언급하고 있는데,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을 구체적으로 강도였다고 밝히고 있다(마 27:44; 막 15:27). 그리고 그들이 당시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 형벌을 받게 되었던 것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살인을 행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큰 범죄를 행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할수 있다. 또한 이러한 강도들 사이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강도와 똑같은 부류로 취급하여 그의 처형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유도하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긍국적으로 '그리스도가 범죄자 중의 하나로 여김을 받으리라'는 예언의 성취를 이루었던 것이다(사 53:12). 한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를 왜 '해골'이라고 불렀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아마도 그 언덕의 모양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Bengel, Godet). 특히 누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를 '해골이라는 곳'이라고 명시함으로써 히브리명으로 '골고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표현을 달리 하고 있다(마 27:33; 막 15:22; 요 19:17). 이는 아마도 다른 저자들과 달리 이방인으로서 이방인에게 이 복음의 소식을 알리고자 했던 누가가 굳이 '골고다'라는 히브리식 표현을 피하고 이방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후에 제롬(Jerome)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 '해골'을 가리키는 헬라어 '크라니온'( )을 '갈바리움'(Calvarium)으로 음역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흔히 '갈보리'(Calvary)라고 불리어진다.
아울러 이 장소가 정확히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전승에 의해 현재 예루살렘 성내 '성묘 교회'가 위치한 곳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복음서의 기록(요 19:20,41)에 따른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따라 그곳은 예루살렘 북쪽 성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든 갈보리'(Cordon's Calvary)라 불리는 곳이라는 견해가 유력시되고 있다(Hendriksen, Spence). 한편, '로마 시대의 십자가 형'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무리들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 주고 있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 중에서 첫 번째로 행하신 말씀이다. 예수의 가상 칠언(架上七言)에 대해서는 요 19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아울러 이 말씀은 사 53:12절에 기록된 말씀의 궁극적인 성취를 이루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저희'는 문자적으로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군병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또한 그것을 실행한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Farrar).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죄에 대한 무지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물론 우리는 성경에서 무지로 인해 범한 죄가 알고도 범한 죄보다 그 책임이 가볍고, 아울러 하나님에 대해 고의적으로 대항하여 범죄하는 사람처럼 절망적인 결과는 없다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시 19:13). 그러나 본절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을 계획하고 또한 그것을 실행한 사람들의 죄가 고범죄를 범한 사람들보다 용서의 여지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죽이면서도 그것에 대한 무서운 결과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저희'들이 불쌍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다(Ryle).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 새. - 당시 십자가 처형은 죄수의 옷을 벗긴 후에 집행되었는데. 그 죄수의 옷을 사형 집행자들이 나누어 갖는 것은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요 19:23을 보면 네명의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갖기 위해 서로 제비뽑았다는 것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시 22:18에 기록된 말씀의 성취였다.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 여기서 '서서 구경하며'(헤이스테케이 데오론)라는 말은 미완료형으로서 이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현혹된 백성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흥미를 가지고 계속해서 관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묘사한다. 하여튼 십자가 상에서 고통을 당하시면서 그들무리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있는 예수님과 자기들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 의 고통스러 운 죽음을 흥미 있게 지켜보고 있는 백성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결국 심판당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강팍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자기도 구원할지어다. - 본절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몹시 즐거워하고 또한 이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입중된 것을 만족해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백성의 두령들을 포함한 유대 관원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모욕하던 그들이 이제는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야 사역을 조롱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한 가지 알 수 있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비록 유대인 지도자들이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메시야 사역의 영적 의미와 또한 그분이 당할 고난을 예언하고 있는 구약 성경의 수많은 말씀들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던가 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소경이면서 소경을 인도하는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눅 6:39). 한편 유대 관원들은 예수를 향하여 저가 남은 구원하였어도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고 조롱했는데, 이는 비록 조롱의 말이기는 했지만 실제 그 말씀에는 중요한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즉 예수께서는 그의 능력을 남을 구원하는데 는 사용하시면서도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쓰지 않은 것이다. 이는 십자가 위해서 전적으로 자신을 멸하심으로써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루기시 위함이었다.
23: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 예수님을 조롱하며 신 포도주를 주는 군병들의 모습은 누가만이 언급하고 있는 말씀이다. 즉 이 말씀과 예수님께서 골고다에 도착하셨을 때 쓸개 탄 포도주를 준 기사(마 27:34; 막 15:23)와 예수님의 운명이 임박했을 때, 한 사람이 신 포도주를 우슬초에 적셔 예수님에게 준 기사(마 27:47-49; 요 19:28,29)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한편 '신 포도주'는 당시 로마 군병들이 마시던 값싼 술이었는데. 이 술은 십자가 처형이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처형을 당하는 죄수들의 고통을 약화시키기 위한 배려로 가끔 주어지던 것이었다. 이로 볼 때 예수님을 조롱하던 군병들은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에게 다가가 이 술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희롱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Spence).
23:37,38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 본절에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군병들의 구체적인 행동이 명시되어 있다. 특히 군병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며 희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자들의 고소 내용과 예수님을 심문했던 빌라로의 판결 내용에 관해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있는 죄패를 보고 이와 같이 예수님을 조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기서 '패'(에피그라페)는 정확히 '죄패 '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받던 사람들에게 관례에 따라 조그만 나무판자에 그 죄수의 이름과 죄명을 적어 십자가의 꼭대기 부분에 붙였던 것이다(Robertson). 이에 대해서는 요 19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 본절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가운데서 한 강도의 비방과 또 한 강도의 회개를 언급하고 있다. 이 말씀은 두 강도가 함께 예수님을 비방했다는 마태 (마 27:44)와 마가(막 15:32)의 기록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어 왔는데, 그 대표적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마태와 마가의 기록과 같이 처음에 두 강도는 다 같이 예수님을 비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후에 한 강도는 회개하였는데 마태와 마가는 이것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Origen, Chrysostom). 둘째로 처음부터 예수님을 비방한 것은 한 강도였지만 마태와 마가는 이 사건을 기록할 때, 강도의 예수님 비방을 강조하기 위해 복수 명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마치 두 강도가 모두 예수님을 비방한 것처럼 표현되었다는 것이다(Agustine. Ambrose).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표현 양식은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시 2:2; 히 11:33,34). 이 두 견해 가운데 어느 견해가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편 강도가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은 것은 분명하다. 한편 한 강도는 유대인 관원들과 군병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를 구원하라'는 말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가 단지 십자가 형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를 구원하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비방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23:40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 예수님을 비방했던 강도와는 달리 그의 잘못을 꾸짖고 있는 이 강도는 비록 그가 강도로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있지만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인간의 올바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동일한 정죄'는 '범한 죄에 마땅한 판결'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반적인 의미에서 본절은 '너의 죄로 인해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네가 어찌 거기에다 예수님을 조롱함으로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더욱 자초하고 있느냐'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Cobbin).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 예수님을 비방했던 강도를 책망하는 이 강도는 자기들의 십자가 처형은 자기들이 범한 죄에 상응하는 마땅한 결과라는 고백을 통하여 이제 자신의 죄에 대해 온전히 회개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 그는 자신이 죄에 대한 심판을 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받는다는 진술을 통해 예수님의 무죄성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는 그의 말 속에는 그가 이전부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23:42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 바로 앞절에서 예수님을 비방했던 강도를 책망하여 자신의 죄에 대한 온전한 회개의 모습을 보였던 이 강도는 이제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하고 더 나아가 예수님에게 자신의 구원에 관한 소망을 간구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신적 사역을 바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러한 이 강도의 모습은 자신이 처한 육체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사역을 비방했던
다른 강도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강도의 말 속에는 비록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나라를 세우시며, 자기를 구원할 충분한 권세를 갖고 있다는 잣을 그가 확신하고 있었음이 내포되어 있다.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비록 강도로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구원을 간구하는 이 강도의 소원을 예수님께서는 결코 외면치 않고 들으셨다. 더욱이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이라는 분명한 시간을 언급함으로써 그가 즉각적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보편적인 원칙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즉각적으로, 확실하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실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그 강도에게 '오늘', 즉 십자가에서 운명하면 곧바로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는 '낙원'이 성도가 사후에 곧바로 가는 처소임을 암시한다. 즉 '낙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개별적으로 사후(死後)에 가서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과 함께 부활하여 영육(靈肉)을 다 가진 존재로서 천국(天國)에 들어가기 전까지 머무르는 '중간기 처소'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낙원에서 사후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다. 중간기 처소로서의 '낙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장의 자료노트와 그랜드 종합 교리의 종말론을 참조하라.
23:44-56 예수의 죽음과 장사
본문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과 조롱을 받으시던 예수님께서(32-49절)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운명하시는 장면과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지내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마 27:45-66; 막 15:33-47; 요 19:30-42). 먼저 예수님의 죽음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혀 오후 3시경에 운명하셨다(막 15:25). 결국 예수께서는 여섯 시간 동안을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그가 진정 메시야이셨음을 증거한다.
① 온 땅에 어두움이 깔렸다(44절). 이것은 공관복음서가 모두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표시이다. 실로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요 1:9) 죽으실 때에 온 세상이 어두워진 것은 당연한 것이다. ②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45절).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속이 완전히 성취되어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벽이 제거되었음을 의미한다. ③ 예수의 사형을 집행한 백부장이 예수를 의인으로 고백했다(47절). 이러한 이방인 백부장의 메시야 고백은 예수님의 죽음을 집행하고 목격했던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무죄하게 죽으심을 입증하고(마 27:54) 십자가의 사건이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그 효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④ 모인 무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47절), 즉 무리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동조하였지만 그의 죽음을 목격한 후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애통했던 무리들의 모습과 연결할 수 있다(행 2:23-37). 한편 운명하시기 전에 외친 예수님의 고백은(46절) 모든 일생을 하나님께 맡기셨던 순종의 모습을 다시 보여 준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은 모두 일곱 마디였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소위 '가상 칠언'(架上七言)이라 부르는데 이에 대해 요 19장 자료노트와 본서 14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즈'를 참조하라.
다음으로 예수님의 장사지냄을 살펴보면 예수의 시신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의해 장사되는데(50-56절: 마 27:57-66: 막 15:42-47; 요 19:38-42) 이것은 사 53:9의 성취였다. 여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먼저 예수를 장사한 아리 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으로 예수를 죽이고자 한 공회의 결의에 반대한 자이며(50,51절)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까지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으로 인해 드러나지 않게 예수를 따르던 자였으나 빌라도에게 찾아가 시체를 달라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치룸으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담대한 신앙과 헌신적인 믿음을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갈릴리에서 함께 온 여자들인데.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는 헌신된 사랑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예수님의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 버린 열한 제자의 모습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참된 일꾼은 말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삶이 있어야 함을 교훈해 준다(행 21:13).
23:44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 유대 시간으로 '제 육시'는 정오를 그리고 '제 구시'는 오후 3시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던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갑자기 천지가 어둡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정오부터 3시까지는 태양이 가장 뜨겁고 그 빛이 가장 환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는 사실은 이것이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일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월절은 일식이 불가능한 만월 때에 지켜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한 사실이 암시하는 바에 대해서는 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우주적 슬픔을 나타낸다는 견해와 ② 종말에 있을 준엄한 심판의 경고라는 견해가 있다.
23:45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 -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바로 그 순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일어난 일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누가복음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주제별 사건 기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즉 누가는 예수님의 죽음에 따른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언급한 후에 예수님의 죽음을 언급하고,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밝혔는데, 이와 같은 기록 방식은 누가복음서의 극적인 효과를 증진시키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Hendriksen).
한편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막힌 죄의 담이 예수의 속죄 사역으로 허물어진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다 자세한 것은 마 27:51 주석을 참조하라.
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말씀은 시 31:5에 기록된 말씀의 인용이지만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궁극적인 의미를 시사하는 말씀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심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계획한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해 완전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던 것이며, 그리고 그 최종적인 단계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자발적인 헌신이 뒷받침되어야 했는데,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기희생을 하셨다는 것을 입증한다. 특히 전반적인 맥락에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온전히 수행한 예수님께서 이제 아버지 하나님께 자기의 영혼을 맡기심으로써 참된 평화를 누릴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박해가 심했던 초대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 귀한 순교의 모범이 되었다(행 7:59).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정녕 의인이었도다. - 이 백부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때까지의 모든 일들을 지켜보았던 것 같다. 그는 비록 로마 군인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담당한 책임자였지만 십자가 위에서 시종일관 예수님께서 보여 주었던 인자하고 거룩한 모습과 아울러 예수님의 죽음에 따른 여러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직접 목격하고서는 이러한 고백을 한 것이다. 즉 예수님이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그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이러한 고백은 그가 예수를 진정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아마도 예수를 단순히 아무런 죄가 없는 자 정도로 취급했을 것이다(Meyer. Bruce). 다만 예수를 직접 못 박은 자가 이러한 고백을 했다는 것은 예수의 무죄를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라는 면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23: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 이 말씀에서 '구경하러 모인 무리'는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기 위해 호기심을 갖고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서 있었던 여러 사람들을 가리킨다. 사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던 이들의 태도는 49절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평소에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심정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또한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 찬성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전후해서 일어난 여러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직접 목격하고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여기서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란 표현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인해 고민하며, 자기들이 행한 죄악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의 행동을 잘 묘사하고 있는 말씀이다.
23:49 예수의 아는 자들과‥‥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 앞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구경했던 무리들과는 달리 본절에 나타나 있는 사람들은 안타깝고 슬픈 심정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특히 이들은 의기양양한 유대 관원들과 로마 군병들의 기세에 눌려 그나마 예수님을 멀리 서서 바라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전후로 해서 발생한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목격한 이 사람들은 그러한 현상들을 마냥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지켜보았던 무리들과는 사뭇 다르게 아마도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를 다시 확인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Hendriksen).
갈릴리로부터 따라 온 여자들도. -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 여인들 속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글로바의 아내) 그리고 사도 요한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 27:56; 막 15:40). 성경에 나타나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과 특징에 대해서는 눅 1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아울러 이 여인들은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수종들었던 여인들을 가리킨다(눅
8:2,3).
23:50,51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공회원으로 부자였고 또한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으며,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여 그 사실을 숨겨오던 사람이었다(마 27:57; 막 15:43; 요 19:38). 특히 본절은 공회원이었던 그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하여 십자가 처형을 계획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그가 아예 처음부터 그 불법적인 모임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결정은 만장 일치였기 때문이다(막 1:64; 15:1), 한편 여기서 '기다리된(프로세데케토)이라는 말은 미완료형으로서 이는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계속해서 신실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사모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결국 이러한 그의 생활은 '그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하는 것이다.
아리마대. - 아리마대는 일반적으로 선지자 사무엘이 태어났던 '라마다임소빔'을 가리킨다(삼상 1:1). 구약 시대에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해 있던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은 '네비 삼월'(Nebi Samwil)이라고 불리운다.
23:52-54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여‥‥이 날은 예비일이요. - 아무 죄도 없었지만 반란을 꾀한다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고소와 또한 총독으로서 그들과의 정치적인 타협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허락했던 빌라도에게 직접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내기 위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그들에게 자기가 예수님 의 제자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와 이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어떤 해를 받기 쉽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였고 그 시체를 그의 새 무덤에 장사지냈다. 이것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두려워 예수님의 제자된 사실을 숨겨오던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이것은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동시에 그것을 전후로 해서 일어난 여러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의해 그의 믿음이 더욱 담대해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세마포로 싸고. - 당시 로마인들의 장례법은 화장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시체가 쉽게 부패되어질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시체에 향품을 바르고 향료를 뿌리는 작업을 끝낸 후에 세마포로 시체를 싸서 매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요 19:40). 따라서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린 다음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몸을 깨끗이 씻고 예수님의 시체를 세마포로 싼 것이다. 그리고 이때 니고데모가 가지고 온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품을 예수님의 몸에 바르고 싼 것을 알 수 있는데(요 19:39), 이것은 촉박하게 다가오는 안식일로 인해 시체에 향품을 바르고 향료를 뿌리는 작업을 실시할 수 없어서 시체가 부패되어 냄새가 나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한 임시적인 조치였다(Spence).
바위에 판 무덤. - 이것은 바위를 옆으로 파서 만든 무덤으로, 결코 수직으로 파서 만든 무덤이 아니다. 그래서 그 무덤의 입구는 돌을 굴려서 막을 수가 있었던 것인데, 이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이 소유하고 있었던 '새 무덤'이었다(마 27:60).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 원어상 이 말의 정확한 표현은 '안식일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이 하루 해가지는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는 누가의 표현은 '안식일 날이 밝아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금요일 저녁 해가 지면서 지켜지는 안식일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의미로 여기서 안식일은 유월절과 중복된 니산월 14일이다.
23:55,56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 본절을 통해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동안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 왔던 여인들, 즉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어머니를 비롯해서 예수님과 직접적인 친분 관계를 맺고 있던 여인들이 시종일판 예수님의 장례 과정을 지켜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 여인들은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는데 이는 촉박한 안식일로 인하여 예수의 시체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지 못하고 장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 여인들은 예수님의 장례 과정을 지켜본 다음 예수를 장례한 무덤을 확인한 후, 향품과 향료를 예비하고 나서 율법적 규례에 의해 안식일에는 쉬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켰던 이 안식일은 이제 '옛 언약'이 규정하는 마지막 안식일이었다(God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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