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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장 예수의 부활과 부활하신 예수의 출현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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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18-21장까지 이어지는 요한복음 종결부의 일련기사의 연속부분이다. 이 종결부는 본래 성자 곧 제 2위 하나님이셨으나 태초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우리의 절대 유일의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구속사역을 최종 성취하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주의 부활 및 부활 이후 잠시 더 세상에 머무시면서 이제 구약을 성취 확장한 신약 복음의 실체인 구속 사역이 성취된 시점에서 다시 향후 세상 끝 날까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택한 자가 회개 구원 얻을 때까지 계속 진행될 구속사의 전개에 임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약속을 주신 사역을 보도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 18,19장이 예수의 체포와 심문, 십자가 수난과 장례로 이어지는 예수의 구속 사역의 성취 과정을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제 20,21 두 장은 십자가 수난(crucifixion)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당신의 부활의 확실성을 제자들에게 증거하시며 또한 당신이 이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을 최종 실현시키시려 다시 재림하실 세상 끝 날까지 이 땅에 남은 성도들의 신앙의 요람이 될 교회를 세울 사명을 맡은 제자들에게 소명의 수여와 위로를 주시는 등 승천 직전에 주께서 행하신 여러 사역을 약술하고 있다.
이런 문맥 하에 십자가 수난으로 인한 주님의 죽음이 무덤에 묻히기까지 하신 확실한 죽음이었음을 증거한 전장에 이어 본장에서는 지상 최대의 사건인 예수 부활(Jesus Resurrection)의 사실성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문맥 하의 본장 내용을 보다 더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지상 최대의 사건(The Greatest Event)인 부활 사건을 보도하는 전반부 1-18절의 내용을 좀 더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도 요한은 먼저 막달라 마리아의 증거에 따라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의 빈 무덤을 확인한 사실을 상세히 보도한다(1-10절). 그리고 나서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속에서 두 천사를 목격한 사실과 부활하신 예수께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위로하시고 또 그녀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과 승천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서 증거하게 하신 사실을 보도한다(11-18절). 결국 사도 요한은 여기서 예수 부활의 확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로서 당시의 상황, 곧 빈 무덤과 천사들의 증거,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 자신의 직접적인 증거 등을 제시함으로써 주의 부활이 너무도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역설(力說)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주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주님의 죽음도 역사상 있었던 수많은 여러 이방 종교의 창시자들, 그리고 도덕 사상가의 순교(Martyrdom)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흠 없는 유일한 인간이기 전에 제 2위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는 영원히 죽으실 수 없었고, 또 이처럼 영원한 죽음을 당하시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이제 주님의 부활 기사를 대하면서 우리는 실로 벅차오르는 구속사적 희망을 억누를 수 없으며 이를 근거로 원대한 구속사적 비전(vision)을 확보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육신한 주님의 수난과 부활은 그 사건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 및 부활과 구속사적으로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모두는 그 옛날 모든 인간의 육적 조상이자 처음 대표였던 아담(Adam)의 타락 이래 그의 죄성을 이어받아 구원에 관한 한 절대적 타락과 절대적 무능력 상태에 빠져 있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인간 중 택한 백성 곧 성도들을 위하여 그들의 죄 값을 대신 치르사 그들의 구원(救援)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시어 성도들이 당신을 믿고 회개(repentance)하면 당신 안에서 구속의 은혜를 입어 구원 받게 하시고자 성육신하시고 또 죽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단 성도의 죄 값이 대신 치러지는 구속 사역을 완수하셨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시어 마침내 하늘나라로 승천하심으로써 먼저는 자신에게 부활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시고 나아가 당신이 사랑하는 성도도 훗날 당신처럼 부활하여 천국(天國)에 임할 수 있다는 사실, 즉 구속(救贖)의 결과 주어질 구원에 대해서까지 확증시켜 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우리의 육적 대표인 첫 번째 아담 안에서 혈육으로 연합하여 죄인이 되었듯이 우리의 영적 대표요 실패한 첫 아담과는 다른 둘째 아담이신 주님과 성령의 세례로써 연합하게 되면 주님의 의와 구속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고 부활하여 마침내 천국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롬 6:5; 고전 12:13).
실로 십자가 수난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주님의 부활은 지금까지 주님이 주셨던 구속과 구원의 복음이 모두 다 진실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이제 너나없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우리 인간이 주 안에서 부활하는 것은 물론 그 죄를 구속받고 영원한 천국 구원을 누릴 것을 확증 받고 또 이를 담대히 바랄 수 있는 원대한 구속사적 희망과 역동적인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편 부활 후 예수의 나타나심을 집중 보도하는 19-29절의 내용을 좀 더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23절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가룟 유다와 도마를 제외한 10제자들(눅 24:33)에게 직접 나타나사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시고 복음 전파와 일의 수행을 위해 성령 수여의 명령을 주신 사실을 보도한다. 이는 먼저 주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은 자는 그 복음을 세상에 전할 구속사적 의무가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복음 전파는 인간의 지혜나 말의 증거가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의해 가능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구속사의 전개라는 시각에서 볼 때 이 명령은 구속사의 시대가 이제 죄인의 죄 사함과 구원의 확실한 근거가 되는 구속의 복음을 성취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서 그 구속의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땅 끝까지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확장하시는 제 3위 성령 하나님의 시대로 바꿔는 전환기가 곧 임박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행 1장 개관을 보라.
그리고 24-29절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10제자들에게 보이신지 10일 후에 도마를 포함한 11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사실을 보도한다. 여기서 자신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 않고는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했던 도마가 직접 예수를 목격한 후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My Lord and my God!)라고 한 사실은 실로 요한복음 전체의 결론임과 동시에 매우 심오한 구속사적 교훈을 준다.
여기 도마의 의심은 예수의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초대 교회의 성도들, 특히 이방지역의 성도들로부터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절대 우상시 하는 현대의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의 성도들이 한 번쯤은 품을 수 있는 그런 의심이었다. 그러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하신 예수의 말씀에도 암시되어 있듯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은 오직 단 한 번으로 죄인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구속의 조건들을 완전 충족시켰다. 또한 그 구속의 효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건 이전에 살았던 구약 시대의 성도들과 그 이후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신약 성도들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십자가 구속 사건과 부활 사건은 역사상 단 한 번 있을 수밖에 없으며, 더욱이 이 사건을 직접 목격하지 못하였다 하여 의심을 품는 자들을 믿도록 하기 위해 다시금 재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 시대 이후의 모든 성도들은 오직 성령의 내적(約的) 증거와 성경의 증거들을 통해서만 이 사건들을 접하게 되는데 이런 간접적인 증거들을 통해서라도 믿는 자들은 직접적인 증거를 통해 믿은 도마보다 더 복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서 본서의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하기를 바라는 본서 저자의 간절한 바램이 여기에 진하게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끝으로 30,31절은 사실상 본서의 결론 구절로서 본서 저자가 최후로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였다는 본서 기록 목적을 다시금 밝히고 있다. 우리는 과연 요한 기자의 간절한 바램처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고히 믿고 있는가? 혹 도마처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조금이라도 의심하여 우리의 신앙에 흔들림이 있는 것은 아닌가 돌이켜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아 구속사적 자세를 더욱 견고히 해야 할 것이다.
외울 말씀
26 여드레는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서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6,27)
그리스도의 빈무덤
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
11 〇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0 제자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
19 〇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도마와 11제자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
24 〇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〇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〇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 & 자료 노트
도표-20:1-9 예수 부활의 성경적 증거
예수 부활의 성경적 증거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사망 가운데 영원히 거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망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셨다. 이 부활 신앙은 기독 신앙의 근본 교리이며 죽음을 앞둔 인간 존재의 최고의 소망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도들은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게 될 때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설 수 있다. 이에 다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모아 보았다.
1. 미리 예언됨(시 16:10; 16:21)
2. 열려진 무덤(요 20:1-8)
3. 벗겨진 세마포 수의(요 20:5-7)
4. 마리아에게 나타나심(요 20:14-18)
5. 여인들에게 나타나심(마 28:8-10)
6.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요 20:19-29)
7. 천사들의 증거(마 28:56)
8. 파수꾼의 보고(마 28:11)
9. 대제사장들의 거짓 유포(마 28:13)
10. 그리스도의 승천 (행 1:9-11)
주요주제-20:1-31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 후의 행적 요약
본장 연구 자료 참조
인물연구- 20:2, 베드로
벧전 2장 연구 자료 참조
난제해설-20:1-18 4복음서의 부활 기사와 관련된 난제들
눅 24 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20:21 본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하는 표현들
1.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함(3:34)
2.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14:11)
3.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임(14:21)
4.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할 것임(14:23)
5.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나를 증거하실 것임(15:26)
6.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릴 것임(16:14)
7.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임(16:15)
8.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낼 것임(20:21)
보감-20:28 도마의 신앙고백의 10대 특징
1. 주의 부활에 대한 기쁨의 고백
2. 진정한 회개의 고백
3. 의심이 치유된 믿음의 고백
4. 예수의 전능에 대한 놀라움의 고백
5. 예수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의 고백
6. 확고해진 믿음의 고백
7. 주께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고백
8. 주께 대한 찬양과 경배의 고백
9.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랑의 고백
10. 자신의 구원을 감사하는 고백
도표-20:1-8 예수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에 대한 4복음의 기록 차이
마태복음 27:55,56,61; 28:1 | 마가복음 15:40,41,47; 16;1,2 | 누가복음 23:49,55; 24:1-10 | 요한복음 19;25,27; 20:1-8 | |
사망의 목격자 |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그 밖의 여인들 |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그 밖의 많은 여인들 |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자들, 예수의 아는 자들 | 예수의 어머니, 이모,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사랑하는 제자 |
매장 목격자 | 막달라 마리아, 다른 마리아 | 막달라 마리아,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 갈릴리에서부터 온 여자들 | - |
무덤 방문자 | 막달라 마리아, 다른 마리아 |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여자들 |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다른 제자 |
방문 목적 | 무덤을 보려고 | 향료 바르려고 | 무덤을 보려고 |
원어연구 - 20:19,26, 평강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에이레네'로서 이는 동사 '에이로'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그리고 동사 '에이로'는 '결합하다'라는 뜻을 가졌고, 이에서 파생한 '에이레네'는 두개로 나누어져 있던 것이 하나로 결합됨으로써 얻게 되는 '고요함'이나 '안식'을 뜻하게 되었다. 또 '에이레네'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평안'(마 10:13; 롬 8:6)이나 '화평'(롬 14:19; 계 6:4) 및 '평강'(롬 15:13; 딛 1:4)으로 번역이 되고 있는데, 이것이 쓰이는 각각의 맥락에 따라 그 의미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즉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마 10:34; 롬 14:19)를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하고, 국가 간의 평화 관계(눅 14:32; 행 12:20) 및 우정에 대해서도 사용된다(행 15:33; 고전 16:11).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복음을 통해서 얻게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행 10 :36; 엡 2:17)나 또한 그 결과로 얻어지는 안식과 만족의 상태(마 10:13; 막 5:34)를 가리킬 때도 사용이 되었다.
특별히 본절의 경우는 당시 헬라 사회에서 통용되던 일반적인 인사말로 쓰인 예인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 같은 평강을 말씀하심으로써 그때까지 불안과 혼란 속에 있던 제자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다. 한편 부활하신 예수께서 평안(헬, 에이레네)을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인사말이라기보다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으로 이제 구속 사역이 완전히 성취되었으므로 택한 죄인들이 과거 죄 때문에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영원히 평안을 누리게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도표-20:29 믿음의 세 종류와 그 종류의 실례
특징과 사례
1. 보고도 믿지 못하는 믿음
1) 예수를 인정은 하나 믿지는 않음
2) 영적 무관심에 빠져있음
3) 환난 후에야 비로소 깨달음
. 애굽 바로 왕(출 9:27-35)
. 아하시야 왕(왕하 1:2-16)
2. 자신이 보는 것만 믿는 믿음
1) 믿음보다 자기 이성을 더 신뢰
2)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믿음을 추구
3) 감각에 의존하며 의심이 많음
4) 어떤 표적이나 극적 섭리만을 기대
. 기드온(삿 6:17,37)
. 도마(요 20:24-29)
3.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
1) 말씀을 통해 믿는 겸손한 믿음
2)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 됨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 노아(히 11:7)
. 아브라함(히 11:8)
보감 -20:31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성도에게 미친 영향
1.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간구할 수 있음(요 14:6, 14; 히 4:15,16)
2. 생명을 얻게 됨(요 20:31; 롬 6:23)
3.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됨(롬 1:8; 엡 5:20)
4.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됨(5:1,2; 2:14,15)
5.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고전 6:11)
6.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됨(고전 15:57; 히 2:17,18)
7. 믿음으로 인해 담대해짐(엡 3:12; 히 10:19)
8.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를 받음(엡 4:32; 요일 2:2,12)
9. 하나님을 찬미하는 생활을 하게 됨(히 13:15)
10.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됨(벧전 2:5)
20:1-18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의 메시야되심(1-18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아니하다고 무죄하신 예수를 대적하여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하였음에 관해 살펴보았다(19장). 그러나 이제 그 같은 암울한 기사는 끝나고 본장에서부터는 역사상 초유(初有)의 사건이 언급된다. 즉, 본서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소개한 앞장에 이어 본장에서 본서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 지도자들의 사악한 음모와 로마 총독 빌라도의 세속적 가치관이 야합한 결과로 초래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제자들을 엄청난 불안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마침내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리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영원한 소망과 기쁨 가운데로 인도한다. 사실 만약 본장에 소개되는 예수님의 부활 기록이 없다면, 비록 본서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가지 표적과 교훈, 구약 예언의 성취 등을 제시하고 있다 할지라도 전혀 인류의 구원과 상관없는 인간 예수 개인의 전기(傳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본서 저자는 확신과 환희에 찬 어조로 예수가 온 인류의 구원자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안식일 후 첫날에 발생한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본문은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와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병행을 이루는 다른 구절들을 참조해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막달라 마리아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함께 무덤을 방문했고 그곳 빈 무덤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천사들의 말을 들었으며(마 28:5-8; 막 16:2-8; 눅 24:1-8) 이들이 이 말을 제자들에게 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거듭된 예고(요 11:25; 12:24; 14:19; 16:16)와 천사들의 고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베드로와 요한은 즉시 무덤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텅 비어 버린 무덤만을 보았을 뿐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채 각기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곳에 남아 눈물을 흘리고 서 있었다. 참으로 가장 기뻐하고 기뻐해야 될 일을 놓고 도리어 걱정에 빠진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아직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친히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시는 동시에 자신의 승천을 예고하셨다(11-18절).
결국 여기서 우리는 부활 신앙이 결코 인간 스스로의 경험과 지식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교훈 받게 된다. 즉 막달라 마리아(11절)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것(12-18절)은 결코 스스로의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신 결과였다.
그러므로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거나 장차 있게 될 자신의 부활(고전 15:21,22)에 대한 소망을 지니고 있지 못한 성도가 있다면 인간적인 경험이나 지식으로 그것을 납득하려고 애쓰기보다 지금 즉시 주님께 무릎을 꿇고 부활에 대한 확신의 눈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친히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를 죽음에서부터 건져내시는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롬 10:9,10).
20:1 안식 후 첫 날. - 유대인들은 로마인들과 같이 한 주간 각 날의 명칭을 '요일'(曜日)로 사용하지 않고 안식일을 중심으로 첫째, 둘째, 셋째 날과 같은 식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안식 후 첫 날이란 토요일인 안식일 다음 날 즉 일요일이다. 또한 유대인들의 하루 계산은 일몰(日沒)부터 다음 날 일몰까지였으므로 안식 후 첫 날이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토요일 일몰부터 일요일 일몰 때까지를 말한다. 한편 개역성경이 '안식 후'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톤 사바톤'인데 그 뜻은 '안식일들의'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모든 날 중에서 가장 거룩히 여겨 안식일이라는 복수형으로 그 주간 전체를 대표적으로 묘사하는 관용적 용법이다. 즉 '안식 후'라는 표현은 '그 주간의'라는 뜻과 다를바 없다. 이러한 원문의 뜻을 살려 몇몇 한글 번역 성경들은 이렇게 '그 주간의 첫 날'이라고 번역하고 있다(표준신약성서, 현대인의 성경, 새 성경).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 요한이 묘사하는 시간 설정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시간은 마태나, 마가가 표현하는 '미명(未明)'(마 28:1)이나 '해 돋은 때'(막 16:2) 보다는 더 이른 시간이었다. 이러한 시간상의 차이는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의 출발 시점에 관심을 둔 반면 마태나 특히 마가는 무덤에 도착한 시점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 보면 마리아가 아직 밝지 않을 때에 출발해서 무덤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가 떠올라 사물을 식별할 수 있게(요 20:2) 되었음을 알 수 있다(Robertson, Lenski). 이렇게 일찍 예수의 무덤을 찾은 것은 마리아가 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졌기 때문이며 아울러 예수를 대적하던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 일찍이 일곱 귀신에게 고통 받을 때 예수께 고침을 받은 후(눅 8:2) 줄곧 예수를 따르며 수종들던 여인이다. '막달라'는 마리아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많이 등장하는 관계로(신약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모두 6명, 마 27:56; 막 15:47; 눅 1:30-38; 10:39; 행 12:12; 롬 16:6).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인 마리아의 고향명이다.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 근처의 디베랴 북쪽 5km지점의 내지(內地)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이 여럿 있었다고 하는데(마 28:1: 막 16:1; 눅 23:55; 24:1), 막달라 마리아만 무덤을 찾은 것으로 묘사하는 듯한 본절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의문시 된다. 그러나 이를 해소하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①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 무덤에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2절에 나타나는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가 그것을 입증해 준다. 다른 여인들도 함께 갔으나 본절에선 다만 막달라 마리아가 대표적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E.Bode, G.Beasley-Murray, Hendriksen, Bernard). ② 본절에서 보듯 무덤에 간 사람은 사실 막달라 마리아 혼자였다. 아마도 마리아는 애곡을 하기 위해서 갔을 것이다(요 11:31; 외경 지혜서 19:3 참조). 요한은 목격자적 증언을 하고 있으므로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는 그의 기록에 더 신빙성이 있다. 다만 2절에서 1인칭 복수가 사용된 것은 '나'와 '우리'가 관용적으로 대체될 수 있던 갈릴리 아람어의 영향 탓일 것이다(G.Batman, J.Jeremias). ③ 여러 여인이 갔을 테지만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도착했을 것이다. 요한이 공관복음서 기자들보다 더 빠른 시간 설정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본절 '이른 아침 어두울 때에' 주석 참조. 따라서 예수의 무덤에 가장 빨리 도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였고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러 가면서 뒤따라오던 여인들과 함께 돌아가 '우리'(2절)라고 말한 것이다(Westcott, M.Reynolds). 이 중 학자들 간에서 보편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첫째 견해이며 셋째 견해도 고려할 만하다.
무덤에 와서. -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무덤에 간 것은 유대인의 관습대로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이다(막 16:1). 장사 지낸 후 며칠 동안 향유를 바르고 시신을 돌보는 것은 시체가 썩기 전까지는 죽은 자의 혼이 계속 시신을 떠나지 않고 붙어 있다고 믿은 유대인의 통념에 따라 생긴 관습이다. 요 11:17,39 주석 참조. 아무튼 안식일 규례를 지키기 위해 안식일 전과(눅 23:56) 안식일이 지난 후에 두 번에 걸쳐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막 16:1) 이른 아침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예수에 대한 사랑은 너무도 극진하다. 이러한 극진한 사랑은 시체와 접촉하는 자마다 부정하게 된다는 의식법(레 21:11; 민 19:13)을 염두에 두지도 않을 정도였다.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 통상적인 유대인의 무덤은 바위를 뚫어서 굴과 같이 만든 공간에 시체를 눕히고 커다란 돌로 막아 놓는 것이었다(요 11:38). 이 돌은 대여섯 명의 장정이라야 겨우 옮길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더구나 예수의 무덤을 막은 그 돌은 빌라도 총독에 의해서 굳게 인봉(印封)된 것이었으니 함부로 열 수 없었는바(마 27:62-66) 여인들은 무덤을 열어줄 사람이 없었던 것을 걱정하였다(막 16:3) 따라서 그녀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졌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한편 그 돌은 비스듬히 비껴 옮겨진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분리를 나타내는 '에크'( )라는 전치사가 사용된 것은 돌이 한 쪽으로 깨끗이 빠져나와 있었던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이는 사람이 밀어서 돌을 옮겨 놓은 것이 아니란 사실이 명백해지며 천사가 초자연적인 힘으로 단숨에 돌을 옳긴 것을 보여준다(마 28:2).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에 의해 무덤의 돌이 옮겨진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예수님이 단순히 무덤에서 나오시게 하기 위해 이 돌이 제거될 필요가 없었음은 요한이 밝히는 예수의 부활체가 가지는 신비성(18절)을 통해 입증된다. 즉 예수의 부활체는 공간을 초월하여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돌이 제거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반드시 필요했다. ① 예수에게 있어 이미 죄로 인한 사망의 권세를 신적 권능에 의해 정복하였음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해서이다. ② 요한과 베드로가 들어가서 확인하고(6-8절) 모든 사람들에게도 부활을 증거하게 하기 위하여서이다(Hendriksen).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미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요 18:17,25-27) 여전히 베드로가 제자들의 무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막 16:7; 눅 24:12). 이는 아마도 예수 부인 이후에 있었던 철저한 그의 회개와(막 14:72)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는 예수의 예언적 말씀을 제자들이 수용한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란 본서의 특징적인 필치에 의해 확인할 수 있는 대로 본서 저자인 요한이 여기서도 자신을 익명의 제자로 묘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요 13:23; 19:26; 21:7,20).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속을 확인해 보고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아니면 돌문이 열린 것을 보고 하도 놀라서 안을 들여다볼 겨를도 없이 무덤 도굴을 상상했는지는 본문에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병행구절을 보면 이때 여인들은 무덤에 들어갔고. 여기서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즉 천사를 목격했으며, 그 천사의 부활 증언을 들고 제자들에게 달려 왔던 것을 알 수 있다(마 28:5-8; 막 16:2-8; 눅 24: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놀라운 사태로 경황이 없었던 여인들은 예수의 시체를 도둑맞은 것으로 확신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마리아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분명치 않다. 이는 '가져다가'라는 뜻의 '에란'이 비인칭 동사로서 구체적 대상을 밝혀 주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국가 모반죄와 같은 악질의 죄를 저지르고 처형된 죄수의 시체를 함부로 유가족에게 넘겨주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그 흉악범의 시체를 거두어 자신이 매장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빌라도의 허락 하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넘겨져 장례를 치른 예수의 시체(요 19:38-42)를 예수에 대하여 적대적이던 유대교 광신자들이 훼손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J.Jeremias). 물론 대제사장들은 예수가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이 죽은 후 부활하리라는 말을 했으므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 백성들을 선동할 것이 두려워 무덤을 지킬 것을 빌라도에게 의뢰해서 시행하였다(마 27:62-66). 하지만 모든 유대인들이 다 대제사장의 지시에 복종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므로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적대하던 광신적 유대주의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을 것으로 먼저 의심했을 것이다.
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그 정경이 제대로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원문상 본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베드로가 뛰쳐나갔고 역시 그 다른 제자도 무덤으로 갔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뛰쳐'(엑셀덴)는 단수이고 '갔다'(에르콘토)는 복수이다. 그렇게 베드로의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가 단수라는 것에 착안해 막달라 마리아와 동행한 제자는 베드로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Hartmann), 본절 하반절과 4절만 보아도 요한이 동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것은 요한의 목격자적 필치로 당시의 상황을 섬세하고 미묘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잘 알려진대로 성격이 급한(요 18:10) 베드로는 마리아의 소식을 듣자 당장 '뛰쳐나갔다'. 이러한 추정은 '엑셀덴'( )은 결과적 부정과거로서 그러한 동작의 급박성을 회화적(繪畵的)으로 표현한 것이란 점에서도 가능하다(Robertson). 그리고 뒤이어 요한도 사태를 알아보기 위해 함께 간 것이다.
20: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 이렇게 두 제자들이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에 대해 즉각적이고 급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저들도 마리아가 생각한 것처럼 예수의 시신이 도난당하지나 않았나 염려하여 이를 즉각 확인해 보기 위하여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곧 그들이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일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시사해 준다. 즉 이는 요한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대두되는 예수 부활 사실을 부인하여 내세우고 있는 '시체 도적설'(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간 후 부활했다고 주장한다는 설)을 반박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만약 지금 무덤으로 달려가는 두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도적질했다면 그렇게 급히 무덤으로 달려갔을 리가 없다.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 3절 주석에서 살펴보았듯 먼저 뛰쳐나간 베드로보다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은 많은 학자들이 추측하는 대로 요한이 더 젊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Bernard, Morris, Hendriksen, Robertson). 또한 그는 예수의 처형장면을 직접 목격한 자로서(요 19:26,27) 예수의 무덤 위치도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거침없이 달려 베드로보다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혹자가 주장하듯 이것을 요한이 베드로보다는 주님에 대한 열정이 더 많은 자라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요한은 항상 베드로를 열두 제자들의 대표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런 경향은 베드로의 타락 이후에도 여전하다(요 21:1-23).
20:5 구푸려. - 이에 해당하는 '파라큅사스'는 무엇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 위해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본절에서 이 행동을 요한에게 적용시키는 것과 같이 공관복음에 따르면 누가는 이 행동을 베드로의 행위에 대하여서도 적용시키고 있다(눅 24:12). 이처럼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 속의 상황을 좀 더 상세히 살피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 '세마포'란 삼 껍질에서 뽑은 실로 짠 고급 삼베를 가리킨다. 히브리인들은 이것으로 성막의 앙장이나(출 26:1) 고관의 옷(창 41:42)을 만들곤 하였다. 여기서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쌌던 시체 처리용 고급 천을 가리킨다(요 19:40; 마 27:59).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 이것을 혹시라도 무덤 안에 시체가 남아 있어 그로 인해 부정하게 되지 않기 위해 주저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뒤에 온 베드로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무덤에 들어갔으며(6절) 요한 역시 뒤이어 무덤에 들어갔다(8절). 다만 요한이 이러한 행동을 취한 것은 베드로와 달리 세심한 관찰력을 지녔던 요한의 성격이 반영된 행동이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요한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으려 신중을 기했을 것이다. 이는 요한이 '우뢰의 아들'(막 3:17)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성격이 급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그의 또 다른 침착한 면모가 아닐 수 없다.
20:6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 비록 요한보다는 늦게 도착했지만 베드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무덤에 들어가서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평상시 그가 보이던 행동 양식과 일치한다(요 13:9; 18:10). 이러한 베드로의 급하고 열정적인 성격은 요한의 행동과는(5절) 상당히 다르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오셨을 때도 주님을 먼저 알아 본 사람은 요한이었지만 급히 서둘러 바다로 뛰어내린 이는 베드로였다(요 21:7). 한편 베드로가 목격한 것도 요한과 마찬가지로 세마포뿐이었다는 것은(5절) 이미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보여 준다. 만약 혹자의 주장대로 시체가 도적질되었다면 세마포까지 없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 무덤 안에 들어간 베드로는 그 안의 상황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수건'은 기후가 뜨거운 팔레스틴 지방에서 햇빛을 막고 땀을 닦기 위하여 항상 지니고 다니던 긴 천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의 장례를 치를 때에 시신에 세마포를 감고 머리는 이 같은 수건으로 동여 멘듯하다(요 11:44). 그런데 이 수건이 '딴 곳'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세마포가 놓인 쪽과는 떨어진 곳에 수건이 놓인 것을 말하며(즉 머리쪽에 가지런히) 그 무덤의 상태가 도굴당한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더구나 '개켜있더라'는 헬라어는 '엔테튈리그메논'( )으로서 본래 '감아 싸다'란 뜻으로 마치 머리에 감겨졌던 상태처럼 돌돌 말려 있던 모양을 가리킨다. 이러한 무덤 속의 정돈 상태를 요한이 목격자적 필치로 자세히 묘사하는 것은 '시체 도적설'을 반박하고(2,6절 주석 참조), 아울러 예수의 육신의 실재(實在)를 부인하고 영적인 존재인 점만을 주장하던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을 반박하기 위함이다. 요 19:35 주석 참조. 즉 예수는 장례되어진 상태에서 몸이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세마포와 수건을 벗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한 육신의 존재를 무덤 속에 흔적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사실 시체를 누가 도적질해 갔거나 예수님이 육신이 없던 존재라면 세마포와 수건이 그렇게 정돈된 상태로 거기에 놓여있을 리가 없다. 이 장면은 마치 무덤 속의 정경이라기보다는 밤이 지난 아침의 침실 모습 같다. 바로 이 빈 정돈된 무덤의 토대 위에 부활 종교인 기독교가 세워진 것이다.
20:8 그 때에야 무덤에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 본절에서는 베드로가 무덤 내부를 확인하자(6,7절) 뒤이어 요한도 따라 들어가 무덤의 내부를 보고 믿게 되었다는 단순한 내용을 진술하는 것 같지만 해석상 상당히 어려운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본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은 매우 오래된 본문의 사본에까지 나타난다. A.D. 4-5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베자 사본(Codex Bezae, 사본 기호는 D)은 본문을 9절과 조화시키기 위해 '그가 믿지 않았다'라는 잘못된 독법(讀法)조차 남기고 있다. 아무튼 구체적 대상을 기록하고 있지 않는 본절의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단순히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Calvin, Meyer, Bernard, Barrett). 하지만 요한이 예수의 부활을 믿었다면 왜 베드로나 막달라 마리아 일행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 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또한 이 같은 주장은 이어 나오는 '저희가 예수의 부활 예언을 아직 알지 못했다'는 7절과도 상치된다. 따라서 아직은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알아차린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믿는다'는 뜻의 '피스튜오'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데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단순한 확신에도 사용되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Brown, W.Bauer). 따라서 믿음의 대상을 억지로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게만 고정시킬 필요는 없다. 그럴 경우 여기서 요한은 시체가 없어졌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2절)을 확인하고서 믿은 것으로 볼 수 있다(Augustine, Erasmus, Luther). 즉 그는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을(2절) 믿게(즉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요한이 무덤에 들어가서 시체를 훔쳐 가느라 서두른 흔적이 없는 정돈된 상태를 보고(6,7절) '다른 사람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간 것은 아닌 것을 믿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Chrysostom, Lucke, Lange, Moulton).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어지는 9절을 볼 때 요한이 예수의 부활을 완전히 신뢰한 것은 아직 아니었다.
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 여기서 '성경'은 메시야의 부활을 암시하는 시 16:10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한편 몇몇 소문자 사본들은 일종의 삽입구와 같은 본절을 11절 이후에 위치시키고 있다. 이처럼 위치를 변경하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나 베드로처럼 아직 예수께서 부활하신다는 예언을 미처 알지 못한 영적 무지의 상태에서 요한을 제외시키려는 시도로 보인다(R.Brown). 그러나 만약에 요한이 무덤 속을 보고 예수의 부활을 알았다고 가정하더라도(8절)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적(redemptive) 구원 사역으로서의 부활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구약 시대부터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부활을 믿어왔던(시 16:10; 49:15) 전통적 히브리인의 관념을 연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사실 요한을 포함한 예수의 제자들은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눅 24:44-47) 오순절 성령강림 후 말씀을 바로 깨닫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부활 사실과 그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행 2:27; 13:35).
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 '집으로'에 해당하는 '프로스 아우투스'는 '각각 그들의 집으로 갔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집에 같이 들어간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요한의 고향이 갈릴리의 벳새다로서 그곳에 저들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막 1:19; 요 1:44). 따라서 예수의 빈 무덤을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가 그 같은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갈릴리까지 간 것도 아니며(2절) 그 같은 보고를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갈릴리에서 한걸음에 예루살렘까지 달려왔던 것도 아니다(3,4절).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한곳에 모여 혹시라도 닥칠 수 있는 유대인들의 위협과 핍박에 대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공동의 회집 장소는 일전에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마가의 다락방'(막 14:12-16; 행 1:13,14)일 가능성이 많다. 이 같은 사실은 부활의 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주님이 나타나신 것을 보아도 그렇고(19절) 요 21장에 나타나는 고기잡이의 기사에서도 그런 공동 거처의 암시를 받을 수 있다. 한편 무덤에서 돌이켜 집으로 향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 상태가 헨드릭슨(Hendriksen)이 말하는대로 기쁨이 넘친 것은 결코 아니다. 누가의 진술에 의하면 베드로는 '기이히 여기며'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눅 24:12). 즉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에 대하여 당혹감을 느끼며 착잡한 심정 중에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서서 울고 있더니. - 공관복음은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예수가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고 전한 사실은 언급하지만(마 28:8; 눅 24:8-11; 막 16:10,11)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것과 관계된 독특한 체험을(11-18절) 기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요한은 1,2절에 이어 또다시 그녀에 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한편 마가도 예수께서 부활 후 처음으로 만나셨던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라고 밝히고 있지만(막 16:9) 그 상세한 내용을 기술하지는 않는다. 한편 마리아의 울음에 대해 죽은 자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례적인 애곡(요 11:31)이라고 보는 견해가(J.Jeremias)가 있는데 그보다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데 대한 슬픔으로(2절) 이해하는 것이 좋다(Lenski).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덤이 빈 사실을 알리고서(2절) 아마도 그들보다 조금 늦게야 다시 무덤에 도착했을 그녀는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어떠한 말이나 암시도 받지 못한 채(3-10절) 슬픈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통곡한 것으로 보인다. 즉 '울고'에 해당하는 '클라이우사'는 소리죽여 우는 울음이 아닌 대성통곡하는 것을 가리킨다(요 11:31-33).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니. - 울음을 그치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한 번 시체가 없어진 것을 확인해 보려 예수의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당시의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을 고려할 때 저들이 예수의 시신을 탈취해 훼손시킬 가능성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같은 일은 유가족이나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매우 치욕거리였고 불행이었다. 삼상 31:9-13에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모독당했을 때 울분을 느끼고 그것을 되찾아 온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경우가 이를 잘 나타내 준다.
20:12 횐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 천사의 묘사에 있어서 '눈같이 흰 옷 입은 두 천사'(마 28:2,3), '흰 옷을 입은 청년'(막 16:5),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눅 24:4)과 더불어 본절 역시 흰 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은 '빛나는 흰 옷'이 천상 세계(the heavenly world)의 상징으로 사용된 유대인의 전통적 관념을 반영한 것이다(Blank). 그런데 이들을 천사로 보지 않고 마침 그곳에 은거하던 흰 옷을 입은 에센파(Essenes)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합리주의자들도 있는데 그들의 견해는 무시함이 좋다(M.Reynolds). 아무튼 예수의 무덤에 천사가 나타난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에 의해 부활하셨음을 시사한다. 또한 예수의 탄생 시에도 그러했듯이(눅 1:26; 2:8-14) 부활 시에도 천사가 나타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정녕 예수께서 천상의 존재,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成肉身)하신 분임을 시사해 준다.
20: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어떤 상황 설명도 하지 않고 '어찌하여 우느냐'고 한마디를 묻는다. 하지만 이런 천사의 물음은 마리아가 우는 이유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 24:5,6)는 뜻의 질책이 담긴 물음이다.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마리아의 가슴 속에 확 들어찬 슬픔과 불안은 천사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그녀로 하여금 놀랄 겨를도 없게 하였다(Hendrikmien, A.Miedema). 그리하여 그녀는 천사들의 질문에 대하여 자신이 골몰하고 있는 문제, 즉 예수의 시신이 도적질 당했다는 이야기만을 한다. 이러한 마리아의 대답은 2절에서 제자들에게 했던 말과 유사한데, 다른 것은 본절에서는 단수 1인칭인 '내가'가 쓰여 천사를 만난 막달라 마리아의 경험이 그녀의 개인적 경험임이 강조되고 있는 점이다. 한편 혹자는 마리아가 미처 천사들이 천사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M.Reynolds). 사실 크나큰 슬픔으로 인한 눈물과 그리 밝지 않은 무덤 속이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마리아가 천사를 몰라보았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14절 참조).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 이 당시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면서(11절) 무덤 속의 천사들과 대화하고 있었다(12,13절). 그런데 왜 그녀가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① 가장 상식적인 생각으로 그녀가 뒤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다. ② 또한 천사들이 질문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뒤에 계신 예수를 가리켰을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중세 이후 여러 주석가들이 주장하지만 신빙성이 없다(Chrysostom 등). ③ 종종 맹인들도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처럼 마리아도 자신을 쳐다보고 계셨을 주님의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렸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다. 이중 비교적 타당한 견해는 ①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정작 요한이 중시하는 것은 이 문제보다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보았지만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① 슬픔으로 눈물이 시야를 가렸으며, 떠오르는 태양빛 의 역광(逆光) 때문 등 자연적인 요인 탓으로 보는 견해와 ②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 후 변형체가 되어 알아보지 못했다는 견해가 있는데 후자가 더 전통적인 견해이다.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신 주님이나(요 21:1-7)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눅 24:16)을 사람들이 곧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 이런 사실을 증거해 준다(막 16:12). 이런 부활 후 성도의 변형된 몸은 영광스럽고(고전 15:43) 신령한 몸이며(고전 15:44)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라고(고전 15:51-53) 사도 바울이 증거한다. 따라서 반드시 부활 후의 성도의 몸이 주님의 부활체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유사성은 가진다고 보는 것이 좋다. 부활하신 주님은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셨고(19절), 음식을 잡수시기도 했다(요 21:15).
20: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 부활하신 주님의 첫 말씀은 무덤 속 천사들의 질문과 유사하다(13절). 즉 이 말에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의 시신을 찾을 것이 아니라 다시금 부활하신 예수를 찾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주님께서 부활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극도의 슬픔과 흥분한 상태에 있던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도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 마리아는 예수가 그 동산의 소유자인 아리마대 요셉에게 고용된(요 19:41) 동산지기인줄 알고, 만약 그가 혹시라도 예수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면 돌려달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마리아가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할 수 있었다면 주님은 부활 후에도 보통 인간의 모습을 하셨지 어떤 사람들이 추측하는대로 결코 영광스러운 옷을 입고 계시지는 않았을 것 같다.
주여. -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심을 반영하는 호칭이 아니다. 그러므로 원어가 비록 '퀴리에'라고 하더라도 '선생이여!'라고 번역해야 옳다. 현대적인 우리말로는 '여보세요'라고 번역해도 좋은 일반적인 존칭이다. 요 4:11에서 수가 성 여인이 예수를 부른 호칭도 역시 이렇게 '선생이여!'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현대어 성경 등은 이를 '여보세요'로 번역하고 있고 표준 신약전서는 '선생님'으로 번역하여 이러한 의미를 잘 살리고 있다.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 마리아는 계속 예수의 시체를 가리켜 '그것'(중성)이 아닌 남성 단수 목적격인 '아우톤', 즉 '그'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비 록 그녀가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의 시신을 얼마나 소중히 취급하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우리말 개역성경은 본절에 세 번씩이나 나타나는 이 '아우톤'을 모두 생략한 채 번역하여 이러한 의미를 잘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설령 그가 동산지기이고 예수의 시체를 옮겨간 자로 알았다 할지라도 마리아가 여자의 몸으로 그 시체를 넘겨받아 혼자 다시 장사지내겠다고 호소하고 있음은 예수에 대한 대단한 열정의 발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 이 말씀 한 마디에 마리아의 눈에 끼어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던 '안개'는 즉각 사라졌다. 목자가 자신의 양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 이름을 부르듯 하던(요 10:3,27) 이 친숙한 음성에 마리아는 마침내 지금껏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던 자(15절)가 바로 예수이심을 확연히 깨닫게 된 것이다.
마리아가 돌이켜. - 몸을 돌이켜 동산지기인 줄 안 남자와 대화중이었던 마리아(14,15절)가 어떻게 다시금 몸을 돌이킬 수 있는가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① 마리아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던 자와 이야기를 시작할 때에는 비스듬히 반쯤 돌아선, 즉 몸은 무덤 쪽으로 향하고 고개만
돌린 상태에 있다가 예수님 말씀 이후 몸을 완전히 돌이켰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이때의 '돌이켜'(14절)에 해당하는 '스트라페이사'는 완전히 돌아서는 행동을 의미하기에 이 견해는 부당하다. ② 이때 예수께서 새로운 아담으로서 벌거벗은(naked) 모습으로서 계셨으므로 마리아가 민망하여 얼른 반대편으로 몸을 돌이켰다는 견해이다(Kastner). ③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를 발견한 마리아의 충격을 강조하여 그녀가 완전히 주의를 예수가 계신 그쪽으로 집중했다고 묘사하려고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견해이다(Lenski, Lagrange). ④ 마리아가 몸을 예수에게로 향해 그를 붙잡으려한 것을 뜻한다는 견해이다(Bultmann). ⑤ '돌이켜'라는 단어는 아람어를 헬라어로 옮길 때 잘못 옮긴 단어로 본래는 '깨닫다'는 단어였다는 견해이다(Tatian, Bernard, Black). 하지만 이들이 증거로 삼는 그레고리 역본(Gregorian Version)은 필사자들이 난해 구절을 더 나은 의미로 고친 흔적이 엿보이므로 이러한 본문 변조에서 근거한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⑥ 마리아가 동산지기인줄 알았던 남자에게로 돌아서서 말한 후 다시금 무덤 쪽으로 돌이켜 있다가 예수의 음성을 듣고 완전히 돌아섰다는 견해이다. 이 중 평소 요한의 문체나 수사법의 특성으로 미루어 보아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견해는 세 번째 것이다.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이는 선생이라). - '랍오니'(람부니)란 '나의 선생님'이란 뜻으로 정확히 말해 히브리어가 아니라 이와 아주 가까운 셈족 언어인 아람어(Aramic)이다. 1권 구약 총론, '구약의 언어' 참조. 마리아가 순간적으로 이 말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평소에 마리아가 주님을 부르던 호칭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나 상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 칭호는 모든 랍비들이 아닌 극소수의 위대한 랍비들, 예를 들면 가말리엘(Gamaliel I), 가말리엘 2세 같은 이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존칭어라는 견해도 있다(Hendriksen). 한편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 간의 인간적이고 이성적(異性的)인 사랑을 묘사한 르낭(E.Renan)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이 이 호칭을 '내 사랑 랍비여!'(My dear Rabbi)라는 애칭의 축소형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할 수 있다(W. Albright). 즉 '랍오니'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이 담긴 표현이라는 것이다.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 마리아에게는 예수를 만지는 것이 금지된 반면 8일 후에 도마에게는 허용된 것과 관련하여(26,27절) 학자들은 궁금증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예수가 말씀하시는 바로는 자신이 아직 하나님께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만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반면 도마에게는 만지는 것을 허용한 것은 도마를 만나신 때는 이미 하나님께 올라갔다 오셨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그리므로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많은 견해들이 있다. ① 아직 예수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palthus), ② 주님의 영적인 몸은 손으로 만지기에는 너무나 부드러운 것이었기에(0lshausen, Schleiermacher), ③ 예수께서 수의를 벗은(6,7절) 벌거벗은 상태이므로, ④ 마리아가 예수를 '확 붙드는 것', 즉 포옹하려 했기 때문에(Hengstenberg, Bruckner), ⑤ 마리아가 예수의 몸이 환영(却影)이지나 않을까 생각하고 만져봄으로 확인하려 했기에(Meyer), ⑥ '만지지 말라'는 의미의 '메 무 아프투'는 '메 프투우'(두려워 말라)로 읽어야 한다는 것으로 본문의 사본상의 오류를 지적하는 해석(Bemard), ⑦ '만지지 말라'는 말의 뜻은 '너의 현재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라는 견해(Augustine), 아무튼 이러한 여러 견해를 살펴보면 자연히 지금 마리아가 예수를 '만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를 먼저 규명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불트만(Bultmann)은 마리아가 아직 예수의 몸을 만지지 않고 있다는 견해를 취한다. 그는 만약 마리아가 지금 예수를 붙잡고 있었다면 예수께서 '나를 놓으라'는 표현을 쓰셨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한글 개역성경이나 흠정역 성경(KJV)이 번역하는 대로 '만지다'(touch)라는 표현은 본문의 뜻을 명확히 전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붙잡다', '매달리다'와 같이 적극적인 행동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공동번역, 표준 신약전서, RSV, NIV, NEB, JB, New KJV, NASB). 또한 원문에서 현재 명령법에 사용된 부정어 '메'( )는 이미 행하고 있는 것을 중지할 것을 명하는 것으로(A.T.Robertson, R.Stein. Lenski) '만지려고 하지 말라'가 아니라 '붙잡고 있는 것을 중지하라'는 의미이다(마 28:9).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마리아에게 예수께서는 붙잡지 말라고 명령하셨을까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여야 한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정말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기쁘고 놀라워 예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를 죽으시기 이전의 모습대로 이해하며 다시금 주님과의 관계가 이전과 같이 이 지상에서 지속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단순히 이전의 모습이 아니라 부활주로서 승천하시어 새로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셔야 했다. 마리아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같이 계실 것을 바라며 예수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끌어안는 일을 중지하고 가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 자신을 알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R.Stein, Luthardt).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 마리아가 예수를 붙들고 매달려 있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곳으로 올라가서 성도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셔야 하기 때문이다(요 14:1-3). 더욱이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제자들이 보혜사 성령을 받아 더욱 큰 일을 하게 될 것임을 아셨기 때문이다(요 14:18-21,23,28; 16:14,17).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 -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단순히 주님의 혈육을 말하지는 않는다(요 19:27). 예수께서는 생전에 이미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막 3:35)라고 말씀하셨고 친히 그 호칭을 사용하셨다(히 2:11). 이제 부활 후 주님께서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신 것은 이전에 말씀하셨던 '친구 관계'(요 15:15)보다 더 진보한 것으로 필연코 성도들과 하나님간의 '부자(父子) 관계'를 확인시켜 준다. 이 호칭의 귀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인식하고 있던 초대 교회에서는 이를 성도 간에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심지어 아나니아는 기독교를 핍박하던 원수와도 같은 사울에 대해서조차 하나님의 신탁(信託)을 듣고 난 후 그와의 첫 대면에서 '형제 사울아'라고 불렀다(행 9:17).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이 '형제' 혹은 '자매'라는 호칭은 매우 친숙한 호칭으로 오래 전부터 사용되고 있다. 즉 1901년에 발간된 「그리스도 신문」에서도 이미 이 호칭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 예수께서 하나님을 이렇게 호칭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주님 자신과 제자 간의 구분을 또 한편으로는 일치를 가르쳐 준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맥락에서 영원하고 특별한 관계이다. 이 관계는 양자(養子)의 영을 통해 부자 관계가 된(롬 8:15)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와는 구분되는 것이다(Lenski). 즉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께서 본질적 아버지시요, 우리에게는 은혜로 된 양아버지이시다(Augustine, Westcott), 하지만 또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곧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이다. 이 동등성(同等性)이 예수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게 했던 것이다(Brown).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 여기서 '올라간다'고 함은 십자가상에 달리우는 것이 아닌 승천을 의미한다. 실제로 예수께선 부활 후 40일 간 지상에 더 머무시다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후 승천하셨다(행 1:3,9-11).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아나바이노'란 용어는 이처럼 승천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후에 여러 신경(信經, creed)에서는 이 단어가 보다 보편적으로 승천을 포함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후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즉 승귀(excellence)를 의미하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R.Brown).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뵌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도 필요한 기쁨의 소식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정신없이 제자들에게 달려가 먼저 '내가 주를 보았다'(헤오라카 톤 퀴리온)고 소리쳤다. 이 감격의 외침은 과거에 수가 성 여인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은 후 기쁨에 겨워 소리쳤던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는 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제자들은 마리아의 이 기쁨에 찬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요한이 제자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마가나(막 16:8-11) 누가의(눅 24:8-11) 기록에 의하면 제자들은 마리아나 여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마리아가 전에 일곱 귀신들린 적이 있는 여인이었다는 전력(前歷)이(막 16:9; 눅 8:2) 제자들을 더욱 의심의 안개 속에 갇혀 있도록 했을 것이다.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본문은 앞단락(1-18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마리아의 증거를 믿지 않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시는 장면이다. 그런데 요한은 그 이전에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다른 여인들에게 나타난 사실과(마 28:9,10)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건은(막 16:12,13; 눅 24:13-32) 생략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 잡혀 은신한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장면을 소개함에 있어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하는 구체적인 상황 서술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은 제자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문을 잘 봉했다는 사실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부활체의 신비로운 몸으로 제자들을 방문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의 의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생긴 손의 못자국과 로마 군병들에 의해 찔린 옆구리 창자국을 보여주신 사실이 본서에만 기록되어 있다(20a절). 그리하여 결국 자신들의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더욱이 손의 못자국 옆구리의 창자국까지 확인한 제자들은 비로소 불신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온전한 믿음을 갖기 시작했으며, 슬픔과 광포를 떨쳐 버리고 기쁨과 평강을 누릴 수 있었다(20b절).
한편 본문은 공관복음서에 없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22절)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이 이 사실을 기록한 것은 제자들의 유약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며, 그들에게 특별한 권세를 부여하신 사실을 밝힘으로써 초대 교회가 사도들의 전통을 이어 받는 것이 정당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즉 다른 사도들이 모두 죽고 없는 상황에서 노사도 요한은 자신마저 죽고 없어진 후에도 교회에 계속 사도적 신앙이 계승되기를 염원하셔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 첫날 나타나셨으며, 성령을 선물로 주셨음을 의도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 성령에 관해서는 22절 주석을 보라. 또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 사하는 권세도 부여하셨는데(23절), 이것은 제자들이 스스로 사람의 죄를 있다 없다 라고 말하거나 용서해 주는 권세를 부여받았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그 복음을 믿고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마 16:19).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못했다면 과연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무엇이 다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답을 얻을 수 있다. 즉, 예수 부활 사건은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우리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생명의 주이시자 '부활의 종교'인 기독교 신앙의 초석으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케 해주는 소망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의 모든 내용은 거짓에 불과하고, 기독교 신앙 역시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고전 15:14-19). 그러나 예수는 분명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 같은 사실을 세상에 널리 전하는 주의 증인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고전 1:17,18).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 즉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1절)인 주일(主日)을 가리킨다. 교부(敎父)들의 증거에 의하면 초대 교회는 '주의 날'(Lord's day)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날에 예배를 드리며 성찬을 나누었다고 한다. 물론 신약 성경에서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계 1:10에만 나타나지만 다른 곳의 여러 증거들을 참고할 때 이미 신약 성경이 기록될 시대 이전부터(즉 1세기 중반부터) 정기적인 주일의 모임이 있었음이 확실하다(행 20:71; 고전 16:2). 그렇다고 해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 날을 지킴에 있어 구약의 안식일 규정을 따른 것은 아닌 듯하고(골 2:16) 다만 안식일의 기본적인 원리를 그대로 이어내려 가면서 그것과 더불어 안식 후 첫날의 의미, 즉 그리스도 부활의 기념을 중시했던 듯하다. 한편 역사적으로는 A.D. 321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Ⅰ, 274-337)가 이 날을 공휴일로 선포하면서 그리스노인들에게는 전형직인 예배의 날로 굳어졌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물밀듯이 교회로 들어온 수많은 이교도들, 특히 태양신을 숭배하는 로마인들에게 있어 이 '주일 선포'는 또 다른 의미를 지녔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Jacques Etlul J.L. Gonzalez). 즉 당시 대부분의 태양신 숭배자들에게 있어 '태양의 날'로 여겨졌던 일요일(Sunday)의 공휴일 선포는 태양신에 대한 예배의 날로도 인식되었기에 별 반발 없이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이 콘스탄틴의 주일 선포는 이러한 이교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의로운 태양'이신(말 4:2) 그리스도를 기리기 위한 날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저녁 때에. - 공관복음에 따르면 아마도 이 시간은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저녁 식사하신 후의 시간일 것이므로(눅 24:28-32) 이미 날이 왜 어두웠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의 시간법대로라면(일몰부터 다음날 일몰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는 시간법) 이는 안식 후 둘째 날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요한이 '안식 후 첫날 저녁'이라고 표현한 것은 본절의 사건이 1-18절에 이어 계속적인 시간적 연계성을 지닌 사건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 제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특히 산헤드린의 결정인 듯하다. 산헤드린 공회는 누구든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면 출교(黜敎)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출교는 현대 개념으로는 공민권(公民權) 박탈과 같은 것으로 유대의 율법이 정하는 어떠한 보호도 받을 수 없는 배교자(背敎者)로 취급하는 것이다(요 7:13; 9:22; 14:17; 19:38). 아무튼 예수를 처형한 자들이 그를 따르던 핵심 인물들인 예수의 제자들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리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은 이에 공동 대처하고자 한 곳에 모여 있었던 것 같다. 10절 주석 참조.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 누가도(눅 24:33-36) 예수께서 주일 밤에 제자들을 찾아오신 기사를 기록하는데, 문이 굳게 닫혔다는 사실은 기록하지 않는다. 요한이 특이하게 이 사실을 기록한 것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이 공간에 대한 어떠한 장애도 받지 않는 특별한 영체(靈体)라고 하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다(Bultmann, Lenski, A.T.Robertson). 그렇다고 해서 이를 예수께서 육체를 지니시지 않으셨고 다만 그렇게 보였다고 주장하는 환영설(幻影說)의 증거로 보아서는 안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공간을 초월하신 것은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몸의 신비'이다. 즉 당시 부활하신 예수는 어디까지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육체를 지니고서 그곳에 서 있으셨던 것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이 말은 유대인의 일상적인 인사인 '샬롬!'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평소에도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신 인사였을 것이다. 삼상 25장 자료노트, '히브리인의 인사법' 참조. 그런데 특히 이 상황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인사말을 건네신 것은 죽었던 자신의 갑작스런 출현과 아울러 문이 닫혔음에도 그곳에 나타난 데 대해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안심시켜 주려는 의도에서였다(눅 24:37,38). 사실 이러한 예수의 출현에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를 유령으로 생각할 정도로 크게 놀랐었다(눅 24:37).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 본절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에 관해 많은 것을 보여 준다. 우선 예수의 몸은 환영(幻影)이 아니라 부활하신 실제의 육신이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손에 난 못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이셨다(요 19:18,34). 그곳의 상처들을 통해 자신의 육체가 실제적 몸임을 확인시켰던 것이다. 아마도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를 환영으로 이해하던 가현론자들(Docetists)을 염두에 두며 이 사실을 강조했을 것이다. 이처럼 요한은 이러한 기술을 통해서 처음에 제자들이 그러했고(눅 24:37) 오늘날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부활하신 예수를 단순히 무덤에서 살아난 예수의 영(혹은 유령)만이 나타난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다. 누가의 계속되는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를 더욱더 확신시키기 위해서 생선을 달라고 하여 잡수셨다(눅 24:41-43).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 제자들의 이 같은 기쁨은 예수께서 자신의 모습을 직접 확인시키고 음식을 잡수시고 만져보게 하신 후에야(눅 24:39) 가능했다. 누가는 덧붙여 저들이 너무 기뻐하므로 오히려 믿지 못했다고 말한다(눅 24:41). 다시 주를 본 기쁨은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제자들로 하여금 역동적인 부활의 믿음을 갖도록 했던 것이다(행 2:29-32). 한편 이것은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는 예수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로 볼 수 있다.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샬롬'을 말씀하신다. 첫 번째의 평강(19절)이 제자들의 두려움을 제거하고 부활한 자신을 확인하며 위로를 주신 것이라면, 지금의 것은 장차 있을 복음 전파 사역에서 당할 환난과 고초에 대하여서도 초연할 수 있게끔 용기와 희망을 주시기 위한 더욱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주님 자신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시듯(히 3:1)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당시 제자들에게 주어 진 명예로운 칭호인 '사도'(使徒)에 해당하는 '아포스톨로스'( )라는 말 자체가 바로 그런 뜻이다. 한편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일관되게 강조해 오고 있다(요 3:34; 5:36; 7:29; 13:20; 16:25; 17:3,8).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인식하고 계셨던 예수께서는(마 26:39; 눅 22:42) 이제 승천이 가까와진 시점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승계시키고 사명의식을 고취시키며 격려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시작하여 요 21장에도 계속 나타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대위임 명령(the Great Commission, 마 28:19,20) 등에서 보듯 예수께서는 부활 후 승천하기 전까지 40일 동안 여러 차례 사도들에게 이러한 복음 전파 사명에 대해 강조하셨다(행 1:2-8). 한편 버나드(Bernard) 같은 학자는 예수의 이 파송 명령이 열한 사도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 17:18,20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도 위함이니'라고 하시는 것을 보아도 사도적 사명은 교회를 통해 모든 성도들에게 승계됨을 알 수 있다(Hendriksen). 또한 근래에 시작된 새로운 성경 해석법인 '랭귀지 이벤트'(language event) 해석법에 의해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랭귀지 이벤트'란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의 사건이 일어난 그 당시의 '충격과 느낌'으로 그 말씀을 오늘날의 '나'에게도 적용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주님께서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실 때 너희 속 그 본문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대위임 명령을 하실 때 '열 한 제자'에게 하셨다고 마태가 기록하는데(마 28:16). 당시 제자들에 대해서는 '열두 제자'라는 표현이 상용구처럼 사용되었다는(24절; 행 10:41; 고전 15:5) 사실을 감안할 때(설령
유다가 빠졌어도) 그 '한 제자'의 자리를 독자(讀者)를 위해 남겨 놓았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이 파송 명령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성경 해석법이 천편일률적으로 다 옳을 수는 없으나 성경이 오고 오는 세대에도 불변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점에 비추어 보면 어느 정도는 수용할 만하다.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사사대. - 예수의 이 행위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즉 천지 창조 시에 하나님이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처럼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에게 능력의 근원이 될 성령을 주시는 것을 이처럼 상징적인 행동으로서 나타내고 계신 것이다. 이는 에스겔이 본 환상 가운데서 마른 뼈들에 살이 붙고 생기가 돌아오는 사건과도 연관되는데(겔 37:9), 그 사건이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복과 관련된 것이라면 여기서 예수의 행동은 영적 이스라엘 자손들을 회복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아무튼 이러한 예수의 행동은 사도들이 어떠한 인간적인 지혜나 말 재주가 아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 증거에 충실해야 함을 시사해 준다.
성령을 받으라. -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선 지금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견해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약속된 성령을 주실 것에 대한 상징적인 행동으로서 실재(實在)에 대한 보증으로 주어진 것이다. 즉 예수께선 이때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을 하신 것이다(Hofmann. Chrysostom, Luthardt, Grotius, Moulton. R. Brown). ② 다소 비슷한 견해로 성령의 오심은 오순절이었으나 이때 제자들은 주님의 성령의 일부를 분할 받았다는 견해이다(Alford, Westcott). ③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때가 바로 이 순간이라는 견해이다(Meyer, M.Reynolds). 이들은 '받으라'는 헬라어(라베테)가 제 2 부정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 일단 한번 받은 것을 영원토록 가지고 있어야 하는 효력(effect)을 강조하는 표현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또한 만약 그렇게 보지 않는다면 예수의 말씀의 권위가 효력성이 없다는 주장이 되므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우려하는 자들도 있다(Kein, M.Reynolds, Meyer. Bernard. Junes). ④ 본절의 성령은 특별히 성령의 한 은사, 즉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두는 교회 고유의 은사(23절)를 언급하는 것이라는 견해이다(Hendriksen). 이상과 같은 제 견해들 중 비교적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첫 번째 견해이다. 그러나 전후 문맥 관계를 고려해 보면 마지막 네 번째 견해도 어느 정도 개연성을 지닌다.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 본절 역시 해석상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데, 주요한 문제점은 어떻게 제자들이나 혹은 교회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둘'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이러한 죄 사함의 선고는 다만 선언적(declaratory)인가 아니면 실제로 효과적(effective)인가 하는 문제다. 후자를 택하는 카톨릭 교회는 죄를 사하거나 유보하는 권세가 오직 사제(신부, 神父)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졌다고 보며 지옥에 갈만한 큰 죄(mortal sin)와 용서받을 만한 작은 죄(venial sin)로 모든 죄를 구분한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의 몇 가지 이유는 카톨릭측의 견해가 틀린 것이며 이는 어디까지나 선언적 의미를 지닌 것임을 입증해 준다. ①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는 말씀같이 오직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막 2:5-7; 눅 7:48,49). ② 만약 예수의 이 말씀이 효과적인(effective) 위임이었다면 사도행전 같은 곳에서 초대교회가 그것을 시행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나타나지 않고 다만 죄 사함에 관한 말씀 선포만 나타난다(행 2:38; 8:22; 10:43; 13:38,39; 28:18). ③ 죄를 '사하는' 권세와 관련해선 죄를 '유보'하는 권세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늘 새롭게 되고 회개해야 할 존재인 인간에게 그러한 특혜를 주셨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실 그러한 권세는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질 수 있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참된 심령 상태를 아시는 유일한 분이시다(삼상 16:7; 잠 16:2). 따라서 이상의 사실들에 의거할 때 교회에게 주어진 이 권세는 선언적인 것임이 명백하다. 즉 이는 예수의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여 믿고 회개하는 자들은 죄 사함을 얻을 것이나, 그렇지 아니하는 자들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마 16:19).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므로 인해 사람들이 죄 가운데 죽는다면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고전 9:16). 또한 이와 관련 요일 1:8-10에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이요 '죄를 고백'하는 것은 '죄 사함이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 증거되고 있다. 이처럼 누구든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선포함으로 교회는 회개하지 않아 죄 사함이 유보된 자들에게 죄 사함 받는 길을 제시해 준다(R.H.Stein). 진정 회개하는 자에게는 죄 용서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죄 사함이 없는 저주의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Barclay).
20:24-29 도마의 신앙 고백
본장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음(1-18절)과 또한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음(19-23절)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에 이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보인 불신앙적 태도를 먼저 소개한다(24,25절). 그리고 이어서 그와 같은 도마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 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함으로써 도마를 굳건한 믿음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26-27절). 진정 인간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의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이기에, 도마는 막달라 마리아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혀 믿지 않았음은 물론이고(18절; 막 16:9-11) 동료 제자들의 증거(25절)에 대해서도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과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도마의 태도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예수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확인했다고 말했기 때문인데, 아예 그는 한술 더 떠서 눈으로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져 보아야 하겠노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마의 불신앙적 태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8일째 되는 날에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다시 한 번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는 은총을 베푸셨다(26,27절). 그리하여 다른 제자들의 말을 도무지 믿지 않고 직접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 보아야겠노라고 주장하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면전에서 무릎을 꿇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신앙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28절). 이는 곧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의심의 안개가 사라지고 확신의 빛이 찬란하게 비쳐 올 때 우리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을 돌려드릴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 준다.
한편 도마를 불신앙에서 해방시켜 놀라운 신앙 가운데로 이끈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 교훈하셨다(29절). 즉, 반드시 확실한 이적이나 신비할 능력을 체험하고서 갖게 되는 것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 성경 말씀과 앞서간 신앙 위인들의 고백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고 삶 전체를 그분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만일 이적을 보여 준다면 하나님을 믿겠노라고 말하는 자들의 요구가 결코 적절치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성경에 나타난 온갖 이적들을 믿지 못하는 자가 새로운 이적을 체험하면 신앙을 갖겠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더구나 이적이란 성도가 지닌 믿음의 결과로서 수반되는 것이지 믿음의 근거로 여기는 것은 전도된 생각이다. 그런즉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소유하기만 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큰 이적도 행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엄청난 이적을 체험하고 설혹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증거할지라도 절대로 불신앙적 태도를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하라 것이다(마 17:20; 눅 16:27-31; 17:6; 요일 5:4,5).
20:24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 '도마'는 아람어이고 '디두모'는 헬라어인데, 뜻은 모두 '쌍둥이'이다 요 11:6 주석 참조. 비록 '회의주의자', '비관론자' 등으로도 불리운 도마이지만 일전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고 외친 것으로 보아 그는 다소 꼼꼼하면서도(25절) 또 한편으로는 겁 없는 성격을 지닌 듯하다. 여기서도 다른 제자들은 다 모여 있었는데 혼자 없었던 것은 다른 제자들이 가졌던 두려움(19절)도 없이 밖으로 나가서 예수에 관한 소문의 진상을 확인해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 현재 제자들의 모임에는 유다가 죽어서 없고(마 26:15; 27:5; 행 1:18) 도마가 빠져서 열 명 뿐인데도 '열 둘'이라고 불리는 것은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이 표현이 사도들에 관한 관용적 표현으로 정형화(定型化) 되었음을 알려준다(21절 주석 참조).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 이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본 자가 당연히 전할 기쁜 소식이다(18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의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 다른 제자들이 처음에 마리아의 보고를 듣고 그랬듯이(막 16:7-11; 눅 24:8-11), 도마도 동료들의 말을 의심하면서 완강히 거부한다. 즉 그는 다른 제자들이 보았다는 예수를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고 상처 자국을 만져 보아야만 믿겠다고 대꾸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도마는 회의주의자의 대표 인물로 인식되어 왔는데, 실상 다른 제자들도 예수를 보기 전체 마리아나 여인들의 말을 듣고 믿지 못한 것은 도마와 똑같았다(막 16:10,11; 눅 24:11). 이처럼 확실히 보지 않고 믿는 것이 힘든 일이지만 참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게 하는 위대한 것이다(히 11:1,3,7). 한편 여기서 '믿지 아니하겠노라'는 헬라어는 '우'와 '메' 두 부정사가 연거퍼 사용되어 결코 믿기 힘들다는 강한 부정의 의미를 나타낸다. 또한 이러한 표현에는 자신만이 홀로 예수를 만나지 못한데 대한 도마의 안타까움과 역정(逆情)도 반영되어 있다.
20:26 여드레를 지나서. - 안식일을 중심으로 계산하는 유대인의 날짜 계산법에 의하면(1절 주석 참조) 이때는 예수께서 지난번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던 날(안식 후 첫날) 이후(19-23절) 꼭 일주일이 지난 날이다(Barrett, Robertson). 장소도 그때와 동일한 곳으로 보인다(Hendriksen).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도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 예수께서 처음 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와 똑같은 모든 정황이 이번에는 도마를 위해서 제공되었다(19절). 하지만 이 때 도마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를 의심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부활 후 40일간의 지상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실 때에도 제자들 중에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마 28:17). 이로 미루어 볼 때 이번에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신 일도 도마만이 아닌 모든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네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아마도 이때 도마는 일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25절) 당시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던 예수에 의해 그대로 인용되는 데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의 극진하신 사랑은 호된 꾸짖음이 아닌 부드러운 어조로 도마의 요구를 하나하나 충족시키고 있음에 더욱 그러하다. 즉 ①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내 손을 보고, ② 내 손가락을 못 자국에 넣으며-네 손을 내밀어, ③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④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표현을 함으로써 예수께서는 거의 전적으로 도마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도마가 실제로 주님의 몸을 만져 보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와 관련하여 본서의 저자 사도 요한이 요일 1:1에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된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는 진술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때 도마가 주님을 만져 보았을 가능성이 많다(눅 24:39). 한편 '믿음 없는 자'(아피스토스)란 신약 성경에서 '비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용어이다(고전 6:6; 고후 4:4).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 자체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믿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결국 예수께서 인간 죄의 구속을 완성하셨음을 믿지 않는 것이므로 비그리스도인이나 마찬가지이다.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철저히 문제의식(問題意識)을 가지고 예수의 부활을 의심해 본 후 도마는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확신의 경지에 이르는데,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결과이다. 즉 이러한 의심은 오히려 그의 신앙에 유익이 되었던 것이다(Grotius. Tertullian). 아무튼 요한 자신이 본서 서두에서 태초에 계신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했는데, 이제 결론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도마의 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을 선언한다. 한편 이 고백은 원문상 주어와 술어가 갖추어진 완전한 문장이 아니고 그저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데오스 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몇몇 영역 성경이나 한글 성경들은 이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감탄의 외침처럼 번역하고 있다(NIV, RSV, NASB, 공동번역, 표준신약전서 등). 하지만 이는 개역 성경에서처럼 '당신은 나의 주시고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말의 생략형으로 보는 것도 무방하다. 어쨌든 요한은 도마의 이 고백을 이전까지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진정하게 이해하지 못하던 단계에서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하게 된 전환점(turning point)으로 삼고 있는데, 이렇게 본다면 이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도마의 이 고백은 본서에서 말하고 싶은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의 신성(神性)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요절과도 같은 것이기도 하다.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에 대해서 몇몇 소문자 사본들은 의문 부호를 붙여 놓았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이 구절을 의문문으로 취급하기도 한다(Ewald. Lachmann).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즉 전지성(全知性)을 고려한다면 사실 여부를 알지 못했기에 도마에게 질문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의 전지성은 본서가 일관되게 강조해 오는 것이다(요 1:42,47,48; 2:24,25; 5:6; 6:64; 16:30; 19:28; 21:17). 따라서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표준 신약전서 등이 본절을 의문문으로 표현하는 것은(TEV, RSV, NASB) '네가 나를 본고로 믿는구나'와 같은 평서문 내지 감탄문으로 고쳐져야 한다(현대어 성경, 새성경,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KJV, NIV, LB, 0xford-Cambridge press New Testament 등). 한편 도마는 그나마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았기에 믿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모든 신자들은 이미 승천하신 예수를 육안으로 볼 수 없으니 다만 복음을 전해 듣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더 복되도다'라고 하신다. 그리고 베드로 역시 그의 서신서 첫머리에서 예수를 보지 못했으면서도 사랑하고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신자들을 칭찬했다(벧전 1:8). 사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이다. 우리는 비록 공기와 바람을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그것들을 감지할 수 있는 여타 증거들로 인해 그것이 존재함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비록 우리가 직접 주를 보지는 못하지만 그분께서 살아계심을 신앙의 선진들이 증거하며 또한 성경이 친히 증거하고 있으니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확실히 믿어야 할 것이다.
20:30-31 본서의 기록 목적
앞에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차례로 나타나 보이심으로 자신의 부활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증거해 보이셨음에 관하여 살펴보았다(1-29절). 이제 그에 이은 본문은 사실상 본서를 일단락 짓는 결론부로 본서 저자가 지금까지 예수의 표적(1-12장)과 가르침(13-17장) 그리고 수난과 부활(19-21장)에 관하여 기록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혀 준다. 그것은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뭇사람들로 믿게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절). 그런데 아직 21장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서 저자가 본서의 결론이라고 해도 충분할 만한 내용을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앞 단락에 소개된 도마의 신앙 고백(24-29절)과 본문을 연결시켜서 독자들로 하여금 그와 동일한 신앙을 갖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는 견해이다. 다시 말해서 지독한 의심에 둘러싸여 도무지 불신앙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던 도마가 과연 어떻게 해서 진실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한 후에, 곧바로 독자들 역시 그러한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도록 촉구하기 위해 본문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둘째, 본서가 처음에는 본문의 내용을 끝으로 일단락되었으나 나중에 21:1-25이 추가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21장의 기록자는 사도 요한으로 21장 말미에서 요한은 자신의 저작권의 진실성과 필요성을 부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요 21:24,25). 한편 본문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이 본서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많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구원과 영생을 얻도록 만드는 데에 필요한 내용들만 선별해서 기록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30절). 진정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적을 낱낱이 글로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모두 둘 수 없을 만큼 방대하기 때문에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성경의 기록 목적이 예수님의 행적을 빠짐없이 소개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고 기독교 신앙을 전달하려는 데에 있으므로. 그것은 또한 불필요한 일이 기도하다(요 21:2).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성경의 독자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마땅한 자세에 대해서 교훈받게 된다. 즉, 성경은 결코 심신(心身)의 수양을 위해서 읽는 도덕적 경전이 아니며, 사람들에게 종교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허구적 신화집도 아니다. 대신 바로 우리의 구원과 영생에 관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가르침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 읽어야 하는 것이다(요 5:39; 딤후 3:15,16).
20:30 이제 요한은 그의 긴 복음서를 요약하는 결론을 제시한다. 요한은 요 12장 끝부분에 나타나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요 12:44-50) 예수께서 그의 생애 동안 강조하신 구원과 영생의 진리에 관해 요약하였다. 그에 이어 이제 본장에선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통한 확고한 믿음이 교회에 파급된 사실을 도마의 신앙고백(24-29절)을 통해 강조하면서 그의 복음서 후반부의 결론으로 제 시하고 있다(M. Reynolds).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 '다른', '많이'라는 단어는 독자들이 이미 친숙하게 알고 있지만 본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예수의 여타 행적들이 많았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요한은 그의 복음서가 지향하는 의도. 즉 그의 사관(史觀)에 따라 역사적인 사료(史料)들을 취사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서들이 예수에 관한 증거라는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 내용과 강조점이 서로 다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표적(세메이아)은 이적(테라타)과 같은 말이긴 하나 그 같은 이적들이 하나님 또는 예수의 권능과 신성을 드러내 주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특히 요한이 예수의 많은 이적 중 선택하여 본서에 소개한 것은 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요 2:1-11), ②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심(요 4:46-54). ③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요 5:2-9), ④ 5천명의 군중을 먹이심(요 6:4-13), ⑤ 바다 위를 걸어가심(요 6:16-21), ⑥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심(요 9:1-7), ⑦ 나사로를 살리심(요 11:1-44) 등인데, 이 표적들은 가급적 공관복음서와의 중복을 피하면서도 요한이 강조하고 싶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를 잘 증거해 주는 것들이다. 이 표적에 관한 기사들 사이사이에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 아들되신 증거들을 강화체(講話體)로 삽입하여 그 같은 표적의 의미를 더욱 더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강화로는 세례인 요한의 증거(요 3:22-36), 하나님과 동등됨을 선언하심(요 5:17-47).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심(요 6:22-71), 생수이심을 증거하심(요 7:37-39), 세상의 빛임을 선포하심(요 8:12-59), 선한 목자이심을 선포하심(요 10:1-21), 자신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 말씀하심(요 12:1-11) 등을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본서의 특징이나 기록 목적 등에 관해서는 요한복음 서론과 요 2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 요한 자신이 밝히는 본서의 기록 목적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은 예수의 본성, 즉 예수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을 뜻한다(요 5:18). 다음으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예수의 사역, 즉 예수가 온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속(代贖)사역을 이루신 메시야이심을 믿는 것을 뜻한다(요 4:25,26; 요 10:14-18).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곧 예 수가 온 인류에게 영생을 가져다주실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믿는 것이다(딤전 2:5; 히 9:15).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요 믿음의 결과는 영생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요한은 다시 한 번 결론적으로 진술한다(요 3:16). 구원론과 기독론이 잘 조화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 이름'이란 사물이나 사람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 사람(혹은 사물) 자신을 의미하는 히브리적 표현이다(요 1:12 주석 참조). 따라서 '그 이름을 힘입어'란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통해 그 안에 있는 생명(요 1:4)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연구자료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 후 예수의 행적 요약
기독교는 현 세상의 모든 질고와 죽음의 근븐 원인이 우리 인간의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에 있으며, 또한 기독교는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 제물로 희생하사 십자가 수난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사죄됨을 믿는 종교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당신의 십자가 대속 회생으로 우리를 사죄시킨 주님은 나아가 죄의 필연적 결과인 죽음까지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의 회생의 피로 사죄를 얻은 우리에게도 부활과 영생까지 주심으로 마침내 구원을 완성시키심을 믿는다.
만약 주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복음은 여타 이방종교들의 종교 철학들처럼 진정한 존재론적 기반을 갖지 한 공허한 이론 체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최초로 극복하시고 또 그를 통해 우리의 죽음까지 극복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 역사적인 곧 이 땅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부활이 있기에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의 전인격적, 그리고 실제적 구원을 보장하는 절대 유일의 신앙이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 사건은 기독교의 존립 여부를 결정할 만큼 중대한 사건이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은 항상 예수 부활사건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 그들의 공격 내용은 예수 부활 사건은 예수의 장례직후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이거나 기독교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후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실재했었던 역사적 사건이며 이에 대해 성경과 초대 교회 당시의 모든 중인들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또 예수 부활 사건이 있은지 2천여 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부활이 확실한 역사적 사건임을 믿고 증거한다. 이에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 후 예수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예수 부활의 역사성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이라는 사실은 바로 그 사건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이 이를 직접 목격하고 전한 사도들의 중언으로 시작된 교회에 의하여 보존되어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살아 있으며, 직접 부활 사건을 성취하셨을 뽈 아니라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이를 우리에게 확신시키시는 주의 사역으로 날마다 새로운 영흔들이 주의 부활에 근거한 복음을 믿고 성도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간접적으로 입증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가장 직접적 증거들인 성경과 초대 교회 당시의 증거들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성경적 증거
① 예수 자신의 예언 -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이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나실 것에 대 해 수차례 예 언하셨다(마 12:38-40; 16:21; 17:9,23; 막 8:31; 눅 9:22; 요 2:19-21). 우리가 예수의 인격과 그분의 복음의 말씀에 대해 신뢰하고 있다면 부활에 대한 그분의 예언도 분명히 성취되었음을 믿을 수 있다.
② 빈무덤 - 성경은 예수께서 분명 십자가 위에서 죽임 당한 사실, 그리고 장례된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동시에 그 무덤 안에 있던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사실에 대해서도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마 27:57-66; 막 15:42-47; 눅 23:50-24:11). 그리고 이렇듯 무덤이 빈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때문이라는 것이 여러 상황 묘사를 통해 증거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주의 제자들이 주의 시신을 감춰두고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은 예수를 처형했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제자들에 의한 예수 사체 유기설을 허위 날조 하게 하여 그와 같은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음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마 27:62-66; 요 20:1-12).
③ 제자들의 변화와 전도 사역 - 성경은 예수 사망 당시에는 매우 낙담하며 비겁히 도망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에는 완전히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담대히 증거한 것과 그들의 중거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초대 교회가 날로 흥왕하여 갔다고 증거한다(행 2:36; 6:7).
④ 신약 성경의 기록 - 사복음서를 비롯하여 신약 성경 전체는 바로 예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근본 전제로 하여 기록되었다. 만일 예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많은 신약성경 기자들이, 각자의 인격과 신앙 양심상 그토록 한결 같이 자신들의 책에 예수 부활을 기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양심을 속이고 성경을 기록했다면 그것이 약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대부분 예수 부활을 직접 목격했거나 또한 직접 목격한 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성경을 기록하였다.
2) 초대 교회 당시의 증거
만일 예수 부활 사건이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예수 부활의 목격자들이 실제로 부활하신 영육(靈肉)을 가지신 예수를 목격한 것이 아니라 환상을 본 것이거나 심리적 현상에 의해 보지 않고도 본 것과 같은 착각에 빠졌었다면 그러한 목격자들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점차 희미하게 전해지다가 결국은 완전히 잊혀져 버렸을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전해졌던 미신적 신화나 설화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예수 부활 사건은 달랐다. 예수 부활은 그것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과 여인들 이외에 기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전파되었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뚜렷한 현상이 나타났다.
① 초대 교회의 급속한 전파 - 초대 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 이후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은 기간 동안에 주지하다시피 수차례의 끔찍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 전역에 전파되었다.
즉 1세기도 채 지나지 않은 기간 동안에 팔레스틴 전역은 물론이고 소아시아, 유럽, 로마에까지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만일 예수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결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② 속사도와 교부들의 증언 - 주를 직접 목격한 12사도가 하나, 둘씩 이 세상을 다 떠날 무렵인 1세기 말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적 이단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사도를 계승한 1,2세기의 속사도들과 교부(敎父)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확실히 믿었으며 부활을 부정하는 이단들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여 부활의 교리를 확고히 세웠다. 그러한 교부들의 신앙이 오늘날까지도 성도들에게 전수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믿음이 확실하며, 그들이 증거하는 바 그리스도의 부활이 분명한 역사적 실재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성경 자체의 증거들과 초대 교회 당시의 증거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부활이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다(고전 15:14). 그러나 그것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는 우리 성도 자신의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더욱 견고히 하게 되는 것이다.
2. 부활 후 예수의 행적 요약
때와 장소 | 목 격자 | 주요 사건 | 관련 성구 | |
1 | 주일 이른 아침 예수의 빈 무덤 앞 | 막달라 마리아 | 부활 사실을 제자들에게 증언토록 명하심 | 막 16:9-11 요 20:11-18 |
2 | 주일 이른 아침 동산무덤 부근 | 막달라 마리아를 제외한 여인들 |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심 | 마 28: 9. 10 |
3 | 주일 정오쯤 엠마오 도상 | 익명의 두 제자 | 성경을 통해 부활의 필연성을 증거하심 | 눅 24:13-32 |
4 | 주일 낮 동안 예루살렘의 한 곳 | 시몬 베드로 | 눅 24:34 고전 15:5 | |
5 | 주일 저녁 마가 다락방 | 도마외의 열 제자 | 십자가에서의 상처를 보이심으로 부활 증거하심 | 눅 24:36-43 요 20:17-25 |
6 | 일주일 후 마가 다락방 | 열한 제자 | 의심 많은 도마에게 부활을 증거하심 | 요 20:26-31 고전 15:5 |
7 | 어느 날 새벽 갈릴리 바닷가 | 일곱 제자 | 이 적을 베푸시고 베드로 에게 '내 양을 먹이라' 하심 | 요 21:1-33 |
8 | 얼마 후 갈릴리의 한 야산 | 열한 제자 | 지상 대명(the Great Commission)을 주심 | 마 28:16-20 막 16:15-18 |
9 | 얼마 후 | 500여 형제들 | 고전 15:6 | |
10 | 얼마 후 | 주의 형제 야고보 | 고전 15:7 | |
11 | 부활 후 40일 감람산(베다니 부근) | 열한 사도 | 눅 24:44-49 행 1:3-8 | |
12 | 오순절 이후 다메섹 도상 | 사도 바울 | 바울을 책망하시고 개심케 하심 | 행 9:1-5 고전 15:8 |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기록을 종합하면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마침내 승천하시기까지 대략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면서 나타나사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로 당신이 생전에 예언하시고 가르치신 그대로 부활한 사실이 증언하듯이 당신은 우리 주 그리스도이심을 확신시키시면서 거듭 당신이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이 땅위에서 살아갈 성도들의 신앙의 요람이 될 교회의 설립에 관한 명령과 약속을 주셨다고 보도한다(행 1:3). 반면에 사도 바울 자신도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목격했다고 증거하고 있어(고전 15:8), 예수께서는 승천하신 이후에도 가끔 당신의 뜻에 따라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성경의 자료로는 부활 이후의 예수의 행적을 순서대로 완전히 정리할 수는 없다.
이에 성경의 기록에 따라 대략적인 부활 이후의 주의 행적을 위와 같이 요약하여 보았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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