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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장 바울의 로마 여행 개시와 가이사랴에서 미항까지의 여정 및 유라굴로 광풍 전 ․ 후 사건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21:17-28:31까지 이어지는 일련 기사 곧 유대주의자들과의 충돌로 븐의 아니게 큰 소요(騷遷)를 일으켜서 일단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된 바울이 그 후에도
거듭 그를 율법 모독자 및 사회 소요자로 보도하는 일부 광신적 유대인들에게 대항하여 수차의 변론 끝에 자신의 로마 시민권(Roman Citizenship)을 이용하여 직접 가이사(Caesar) 곧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결과 로마로 이송되게 되었던 과정을 기록한 소위 '바울의 로마 여행' 관련기사의 연속부분이다.
또한 본장은 좁게는 이제 유대 땅에서 대략 2년간의 구금 생활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미결수(未決囚)의 신분으로 로마 이송 여행을 개시한 바울의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의 이송 경로 및 마침내 도착한 로마에서의 약 2년간의 바을 사역을 보도함으로써 사도행전을 마감하는 27:1-28:31까지의 일련기사의 개시부분이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 1-8절은 가이사랴에서 미항(美港)까지의 바울의 로마 여행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다음 후반부 9-44절은 미항에서 바울이 성령의 인도로 앞날에 큰 역경이 있을 것을 내다보고 출항을 만류하였으나 바울의 말보다 선주의 말을 믿은 백부장의 명령으로 미항을 출항한 배가 유라굴로(Euro낌ydon) 광풍을 만나 표류(漂流)한 사실을 먼저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선 이어 비록 그러한 와중에서나마 바다 한 가운데에서 다시 행해진 바울의 예언대로 14일간의 표류끝에 배만 깨어지고 거기 탔던 모든 사람들은 무사히 멜리데섬에 도착한 유라굴로 광풍 전 ․후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전반부의 가이사랴에서 미항까지의 바울의 로마 여행의 여정을 밝힌 기사는 단순히 생각하면 사소한 관련 사실 보도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깊이 고찰하면 다음과 같은 심오한 교훈을 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사실 보도성 기사들은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여정이 구체적이고도 정확히 기록되었듯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그리고 역사적 정확성을 가진 기록임을 입중내지 암시해 줄다. 그리하여 이런 기사들은 결국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이 우리 역사의 구체적 장(場)에서 주어진 것으로서 역사의 실재(實在)에 기반을 둔 진리이며 따라서 성경의 궁극적인 약속인 천국 구원도 역사적으로 필히 실현될 것이라는 구속사적 확신을 강력히 뒷받침 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성경의 사실 보도성 기사들은 성경의 모든 진리는 단순한 도덕적 또는 신학적 허구가 아니라 창조에서 종말까지 이어지는 실제 역사에 근거한 것이라는 또 그래서 거기 기록된 모든 말씀도 분명히 실현될 것임을 입증해 준다. 실로 이런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은 확고한 존재론적 기반을 가진 유일한 진리이다.
후반부 9-44절의 유라굴로 광풍 전 ․ 후 사건의 구속사적 의의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본문을 보면 비록 바울이 죄수의 신분에 있었지만 그의 말대로 광풍이 불기도 하고 또 그치기도 하였음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죄인의 신분에 그가 처하게 된 것은 그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지키실 힘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 자신이 전 우주에 대한 주권이 있으시고 심지어 당신의 종 바울에게 조차 천지의 조화를 분명히 예언할 능력까지 갖게 하실 수 있었음에도 다만 복음 전파를 위하여 당신의 종을 죄인의 신분에까지 낮아지게 하신 것일 뿐임을 역설적으로 입중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구속사적 교훈을 얻는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육 간의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시나 궁극적으로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바는 천국의 구원이다. 따라서 때로 잠시 동안 사는 것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는 최종적인 천국 구원을 위하여 환난과 역경도 주실 수 있으므로 그럴 때 요동하지 말고 그 고난과 역경의 의미를 직시하여 더욱더 하나님을 의뢰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관련,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었다(롬 8:17).
둘째로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과 같이 여기에 왔던 백부장을 위시한 사람들이 바울을 통해 정해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행하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으나 후에 다시금 바울을 통해 주어 진 말씀대로 구원을 얻은 사실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을 의지해서 살면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마침내 궁극적으로는 유라굴로 광풍과 같은 시련과 지옥의 심판을 맞을 수 밖에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이는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고 방황하지만 하나님은 거듭 거듭 인간에게 회개 구원의 기회를 베푸신다는 구속사의 진리도 응축적(凝縮的)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돌이컥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겔 33:11).
외울 말씀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떠나는 바울
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가이사랴에서 미항까지의 여정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성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유라굴로 광풍 속의 배
9 ○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광풍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 하는 바울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광풍에서의 구원
27 ○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28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3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34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인이러라
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9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42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27:1-44 바울의 로마 압송 사건에 나타난 영적 의미
사도 바울이 주의 일로 인해 억압받는 자가 되어 로마로 압송되는 사실은 당장 겉으로 보면 복음 사역의 패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음을 알게 된다. 즉 이미 그전에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 싶어하던 바울은 비록 죄인의 신분으로나마 로마를 방문하게 되어 결국 복음을 더 널리 퍼지게 한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적 교훈을 살펴볼 수 있다.
1.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놀라움(행 28:30,31; 롬 11 :36)
2.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름(롬 8:28)
3. 성도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약속만을 기억하고 담대헤야 함(행 27:25)
4. 성도는 잠시 얽매일 수 있으나 말씀은 얽매이지 않음(딤후 2:9)
5. 성도의 의로운 고난을 통해 복음이 전파됨(딤후 4:5)
삽화-27:3 바울 시대의 항구
지도-27:1-44 바울의 로마행(I)
역사배경-27:1 신약에 반영된 로마법
신약 성경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Roman Empire)의 식민 통치 하에 있었다. 따라서 문화 관습, 법, 정치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로마 제국은 신약 성경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특히 신약 성경의 1/3가량을 기록한 바울이 로마의 문물에 익숙했었기 때문에 그가 기록한 서신서에는 그런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다. 본장에서도 바울이 로마의 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점을 잘 이용하여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항소하기 위해 로마로 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지면 관계상, 또 본서의 특성상 로마법 전반에 관해서는 다를 수가 없고 신약 성경에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에 관해서만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재판에 관한 법
원칙적으로 죄수에 대한 판결권은 로마시의 경우는 황제와 원로원이, 속주에는 총독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속주의 경우에 총독의 특별 소환이 없을 경우에는 그 속주외 지방행정 기관이 단독으로 판결할 수도 있었다.
다만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자기 거주지의 총독의 판결에 불복할 경우 로마 황제에 항소할 수 있는 항소권(抗訴灌)이 있었다(행 25:11,21). 유대인인 예수님은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마 27장), 유대인이면서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은 로마 황제 에게 재판을 받았다(행 28:16).
한편 형벌(刑罰)에 있어서는 대부분 벌금형이며 감옥에 가두어 두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것은 재판을 받기 위해 잠시 구류되어 있었던 것 뿐이다. 중차대한 죄를 저지른 경우, 즉 내란죄나 반역죄의 경우에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는 사형은 면하고 국외 추방령을 내렸으며 그외는 고된 뱃일이나 광산의 일을 위한 노예로 보내거나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나 사형은 될 수 있는 대로 집행하지 않게 했다.
2. 양자 입양법
로마는 후사(後綱) 없이 죽게된 시민이 친척의 아들이나 혹은 자기가 원하는 어떤 사람을 양자로 삼아 대(代)를 잇게 하였다. 이는 가문의 보존을 중히 여기는 고대 사회 에서 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며 로마의 경우는 조상 숭배 사상과 관련하여 오래된 옛날부터 이런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입양된 양자는 친아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재산의 상속은 물론이고 죽은 자의 실제적인 대리인(代理人)으로처 그 가정에 대한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남 ․ 녀 두 사람이 상속자인 경우 여자도 재산의 절반 가량에 대한 권리는 가질 수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남자 상속자가 재산 전부를 관리하였다. 바울은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도는 '하나님의 양자, 곧 후사'라고 말했다(롬 8:15,17).
3. 노예법
당시 로마 사회에서 노예는 마치 물건처럼 취급되어 언제든지 매매가 가능했다. 그러나 어떤 노예에게 후견인이 나타나서 그를 노예에서 해방시키고자 할 때는 일정한 절차를 밟아 해방될 수도 있었다. 해방의 절차는 노예가 후견인의 겉옷을 입고 후견인으로부터 관장(官丈)으로 매를 맞고 나면 그 노예는 이전의 극심한 고역(苦役)에서 해방되고 대신 그 후견인의 가정 일을 돌보며 그를 섬기게 된다.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는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빌레몬을 후견인으로 만나 해방된 노예 출신이었다(몬 1:10). 그러나 그는 그 후견인을 배반하고 로마로 도망갔다가 바울을 만나 회심하게 되었고 다시 빌레몬의 충성된 종이 되었다(10-20절).
4. 의의
이상의 사실들에서 우리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배경이 되고 있는 그 당시의 역사나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핵심 진리들은 아무리 시대가 바꿔어도 그 뜻이 변하지 는 않으나 그러한 진리들을 어떻게 오늘의 우리들 삶 속에 올바로 적용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이 기록된 당시에 그 진리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고 또 적용되었는가를 살피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실로 성경은 허공 속에 주어진 진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원어연구-27:25, 안심하다
여기에서 '안심하다'에 쓰인 헬라어는 '유뒤메오'( )로서 '좋은'이란 뜻의 접두어 '유'( )와 '열정' 혹은 '욕정'을 뜻하는 '뒤모스'( )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유뒤메오'는 단순히 '두려워하지 알라', 혹은 '염려하지 말라'라는 정도의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좋은 열정을 품으라', '안심하라', '즐거워하라'(약 5:13)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다.
한편 이와 유사한 의미의 헬라어로서 '다레오'( )가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어떤 사실에 대한 분명한 확신, 혹은 곁에 있는 돕는 자로 인하여 안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대한 세부 설명은 행 23장 자료노트의 원어연구를 보라. 반면에 본문의 '유뒤메오'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 스스로 마음을 굳게 먹고 용기를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서 바울은 광풍으로 인해 파선할 위기에 처한 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간적인 측면에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일을 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믿는 믿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에서 우리는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인해 안심하는 것(헬, 다레오)과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이 스스로 마음을 굳게 먹고 안심을 하는 것(헬, 유뒤메오)은 본질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옴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게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스스로 마음을 굳게 먹는 것에서 더 나아가 확고한 믿음 안에서 용기를 갖는 자세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도표-27:23,24 바울이 본 환상
행 18장 자료노트 참조
삽화-27:31 로마 병사
도표-27:42,43 본서에 나타난 초대 교회 확장의 숨은 공로자들
1. 앉은뱅이: 베드로에게 치유받고 하나님을 찬미 영광돌림(3:9,17)
2. 입곱집사: 초대 교회의 구제 사역을 담당함(6:2-6)
3. 도르가: 살아서는 선행과 구제로, 죽어서는 이적적 부활로 주를 중거함(9: 36-42)
4. 고넬료: 최초 이방인 신자로 이웃에 복음 전파(10:44-48)
5. 미가 요한의 모친: 자신의 다락방을 예배처로 사용케 하고 봉사함(12:12)
6. 루디아: 바울의 빌립보 전도에 큰 힘이 됨(16:13-15)
7. 야손: 바울을 숨겨주고 대신 읍장에게 끌려감(17:5-7)
8.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아볼로에게 주의 도를 가르쳐 전도자 만듦(18:26-28)
9. 바울의 생질: 바울 살해 모의를 알려주어 탈출케 함(23:16-24)
10. 율리오: 바울을 죽이려는 호위병들로부터 구해줌(27:42,43)
도표-27:23,24 본서에 나타난 천사 활동의 실례
1. 사도들이 잡힌 옥문을 열어 탈옥케 함(5:18,19)
2. 빌립이 가야할 전도지틀 지시해 줌(5:26)
3. 고넬료에게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해 오도록 지시해 줌(10:3-7)
4. 옥중에 매인 베드로의 쇠사슬을 끊어 탈옥케 함(12:7-11)
5. 충으로 교만한 혜룻을 죽게 함(12:23)
6. 풍랑을 만나 불안해 하는 바울을 위로해 줌(27:23,24)
27:1-8 바울의 로마 여행 시작
행 21:17-26:32까지에서는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투옥된 사실과 다섯 차례에 걸친 바울의 변론 장면을 언급했다. 이어 본장에는 드디어 바울이 그토록 가기를 열망했던 로마로 떠나는 모습이 소개된다. 이러한 바울의 로마행은 가이사에 대한 상소(행 25:11,12)가 성취된 것이었다. 하지만 바울의 이 로마 여행은 단지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실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행 23:11; 딤후 4:17)대로 로마에 복음 전하려는 원대한 목적에 따라 스스로 죄인의 신분이 된 것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마치 인류의 구속을 위해 스스로 죄인과 같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케 한다. 하여튼 이 로마 여행기는 저자 누가의 동행으로 인하여 매우 사실적이고 생생한 모습들을 흥미 진진한 모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있는 사자로서의 바울의 활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하나넘의 보호와 섭리에 따른 구원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그 가운데 본문은 로마 여행의 서론 부분으로 가이사랴에서 그레데까지의 행적을 소개한다. 즉 바울은 백부장 율리오의 책임 아래 다른 죄수 몇 사람과 함깨 가이사랴에서 배를 탄 후 시돈을 거쳐 구브로 해안을 통과하여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른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하여 이달리야로 가는 배를 갈아타고 그레데섬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바울의 여정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지도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누가와 아리스다고의 동행이다. 여기서 누가는 본서의 저자로 마게도냐에서부터 줄곧 바울과 동행 했던 인물로(행 16:10 주석 참조) 이번 여행에도 바울과 함께 동행하였으며,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로마에까지 이르는 여정을 세밀히 기록함으로써 복음이 어떻게 세계까지 확장되어 갔는지를 증거하고 있다. 또한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인으로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된 바 있으며(행 19:29), 바울이 가이사랴에 2년간 투옥되어 있을 당시에도 바울을 수종들었다. 그리고 이제 바울과 함께 로마에 가게된 것이다. 하여튼 이러한 누가와 아리스다고의 동행은 로마에서 사역하는 바울에게 큰 도움과 위로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그와 같이 성도들은 어려움에 처한 복음 사역자와 성도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야 함은 물론 형제의 고통을 나눠가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갈 6:10; 약 2:15,16; 요일 3:16-18).
다음으로 바울 앞에 기다리고 있는 역경이다 바울은 이미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경험했다. 이는 복음 전파를 방해하려는 사탄의 훼방에 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로마를 향해 떠난 바울에게 또다시 역경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항해 처음부터 바람의 영향으로 항해가 순조롭지 못한 것이다. 이 역시 사탄의 훼방으로 볼 수 있는 바 앞으로 바울의 여정에 얼마나 큰 역경이 있을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었다(행 23:11). 따라서 어떠한 난관도 바울의 로마행은 저지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이루말 할 수 없는 난관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지만 성도들이 낙심하지 않고 충성을 다해 주님을 섬기고 의지한다면 능히 극복하고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지까지 무사히 여행을 마치게 될 것이다(행 20:24).
27:1 우리의‥‥갈 일이 작정되매. - 바울은 유대인들의 빈번한 고소건에 맞서 친히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었다(행 25:6-12). 이제 그 청원이 받아들여졌으니 드디어 바울은 로마의 황제 법정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이송되게 되었다. 그런데 본문에서 누가가 '우리'라고 표현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서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써서 본서 저자인 누가 자신이 바울과 관련된 사건을 기록한 곳은 본문까지 포함하여 모두 네 곳이다(행 16:10-17; 20:5-15; 21:1-18). 즉 바울의 주치의인 누가와 개인 수행원이었던 아리스다고가 행 21:18 이후로는 바울과 함께 언급되지 않다가 본문에서 다시금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몇 가지 사항을 추측할 수 있다. 우선 바울이 그 동안 감옥에 있었으며 재판을 받는 2년 간은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서로 떨어져 있다가 바울이 로마로 이송되는 현시점에서 다시금 합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2절). 그러나 이 2년간의 기간에도 누가와 아리스다고는 수시로 바울을 면회하며 자주 수종드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이다(행 24:23). 아무튼 본서 저자 누가가 바울과 같이 로마로 가게 되므로 로마 여행의 생생한 목격자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실제로 로마로 항해하여 가는 과정이 본장에서 상세하게 묘사된 것 자체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달리야. - 원래는 티레니아 해와 아드리아 해 사이의 지중해상에 돌출해 있는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 끝 부분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로마를 수도로 하고 있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가리킨다.
다른 죄수 몇 사람을. - 본문은 단순히 '다른 죄수'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류(類)의 죄수들'(Meyer)이란 의미이다. 어쨌든 이는 현재 바울이 로마로 이송당하고 있는 유일한 죄수가 아님을 나타내 준다. 아마도 저들은 재판을 받기 위해 가는 바울과는 달리 처형당하기 위해 로마로 가는 죄수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Ramsay). 물론 죄수들의 죄질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당시에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은 종종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맹수들과의 싸움의 대상으로 로마로 보내지곤 했었다(Lenski, Robertson).
아구사도대. - 본문의 '아구사도대'(스페이레스 세바스테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군대'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존경하는' 혹은 '위엄있는'이란 뜻의 '세바스테스'( )는 다른 곳에서 '황제'라는 말로 번역되었다(행 25:21,25). 여기에 해당하는 다른 말은 '주'(퀴리오스)로, 행 25:26에서는 '황제 폐하'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구사도대'를 황제의 친위대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에 따라서 이를 아그립바 왕의 친위대로 보기도 하며(Holtanann), 다른 이는 '세바스테스'가 사마리아의 수도 '세바스토스'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사마리아인 군대(Alford, Kuinoel, Lumby)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아구사도대'는 행 10:1에 언급된 '이달리야대'와 더불어 황제 직할 부대로, 황제와 지방의 주둔군 사이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던 부대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Ramsay, Rackham. Mammsen).
백부장 율리오. - '백부장'(헤카톤타르케스)은 약 1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장교를 말하는 것으로(행 10:1; 21:32). 다른 곳에서는 '관원'으로 번역되기도 했다(행 22:25-26; 23:17,23; 24:23, NIV). 한편 '율리오'(율리오스)는 로마의 가문명(家門名)으로 여기서의 율리오는 연락 장교단과 함께 직무를 수행하는 백부장으로서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로마로 이송하는 책임자라는 사실 외에는 달리 알려진 인적 사항이 없다.
27:2 아드라뭇데노 배. - 바울 일행이 승선한 항구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가이사랴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배는 아드라뭇데노를 향하는 배였다. 아드라뭇데노(Adramyttium)는 소아시아 북쪽 무시아(Mysia) 지방의 중요한 무역항으로 앗소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오늘날 '아드라미티'(Adramiti) 혹은 '에드라미트'(Edramit)로 불리운다. 한편 이 배는 아시아 지방의 연안을 항해하는 무역선으로 폭풍이 많은 겨울철이 시작되기 전에 주로 항해를 하였던 것 같다. 백부장 율리오는 이 배를 타고 가다 중간에 로마로 가는 큰 배로 바꿔탈 계획이었다(6절). 아마도 율리오가 이렇게 한 것은 가이사랴에서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로마로 직항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안전한 항로였지만 때를 맞추어 그 배를 타지 못한 까닭으로 보인다.
아리스다고. - 그는 의사인 누가와 함께 이방인으로 바울을 시중든 자였다. 그가 처음 언급된 곳은 행 19:29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에베소에서 아데미 여신의 신봉자들이 소동을 일으켰을 때 바울과 함께 체포된 것으로 나와 있다. 또한 그는 고린도에서부터 아시아까지의 바울의 여행 때에 함께 동행했던 것으로 나타난다(행 20:4). 그런데 혹자는 아리스다고가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이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가 바울과 함께 로마로 가지 않고 자신의 고향인, 데살로니가(행 19:29)로 돌아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서 쓴 서신에 그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골 4:10; 몬 1:23,24) 그는 바울 및 누가와 함께 로마에까지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골 4:10에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라는 말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 혹자는 이를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 로마 옥중에 갇힌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반면에 또 다른 이는 이러한 바울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 이는 바을 서신의 독특한 표현으로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 사상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바울은 로마에서 실제로 감옥에 갇히지 않았던 것으로 사료되는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 대하여서도 '나와 함께 갇혔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롬 16:7). 따라서 이것은 곧 그의 주요 사상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헌신과, '그리스도만을 위한 삶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 중 어느 견해가 보다 정확한 것인지는 단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어였든 바울의 아리스다고에 대한 여러 언급을 보아 그는 함께 로마에 가서 희생과 봉사로 바울을 도왔던 것이 확실시 된다.
27:3 이튿날 시돈에 대니. - 시돈(Sidon)은 두로와 함께 베니게의 중요한 항구 도시로 가이사랴에서 북쪽으로 약 122km 떨어진 곳이다. 이곳은 스데반의 순교 당시에(행 11:19) 예루살렘을 떠났던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교회가 있는 곳이었다(Longeneker). 바울 일행을 태운 배가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은 긴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싣거나 아니면 하역 관계로 일시 정박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울을 친절히 하여. -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하게 대한 것은 바울의 신변에 개인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율리오의 이와 같은 처사는 예외적인 것이긴 하나 복음서에서도 이와 같이 훌륭한 인간성을 지닌 백부장이 언급되어 있다(눅 7:5; 23:47). 한편 율리오가 바울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푼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베스도(행 26:7)로부터 바울을 관대하게 취급할 것을 지시받았거나, 아니면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동행하는 가운데 바울을 수종들자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자로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친구들에게‥‥허락하더니. - 본문의 '친구들'(투스 필루스)이란 말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지칭할 때 사용했던 호칭으로 보인다(요삼 1:15, Harnack). 당시에 스데반의 순교 이후 계속되는 박해로 말미암아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교회가 이곳에 있었으니(행 11:19), 아마도 그곳 성도들이 바을 일행을 환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율리오의 배려와 시돈의 성도들이 베푼 이러한 호의는 로마로 여행하는 바울과 그 일행들에게 앞으로 로마까지 여행함에 있어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27:4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 누가는 바울 일행의 항로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가운데 본절은 지중해 동부에서 서부로 항해하는데 따른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지중해에서 가장 흔히 부는 바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바람이다. 때문에 그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구브로 섬 동쪽으로 항해하기는 용이했으나 구브로의 남서부 해안을 따라 그레데 동부로 항해하는 것은 어려웠다. 따라서 바울을 태운 배도 어쩔 수 없이 맞바람을 피해 구브로 섬 동쪽 해안을 따라 무라로 나아간 것이다(5절). 한편 계속되는 바울의 항해에 대한 기록은 고대 항해에 대한 맡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오늘날 매우 시사적인 문서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Hendriksen).
27:5 루기아의 무라 성에 이르러. - 이미 바울은 2년 전에 서풍을 타고 '바다라'(Patara)에서 '두로'로 항해한 경험이 있었고, 남쪽에 있는 구브로 섬을 통과한 적도 있었다(행 21:1-3). 이러한 경험을 살려 바울은 선원들에게 조언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반대 방향의 서풍을 피하여 내륙에서 지중해 쪽으로 불어오는 미풍을 타고 길리기아와 밤빌리아의 연안을 따라 행선하여 무라 성에 이르렀을 것이다. 무라(Myra)는 애굽과 로마 사이를 왕래하는 곡물선이 정박하는 중요한 항구였다. 따라서 이렇게 무라에 우선 도착한 것은 이 곡물선을 통해서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로마까지 이송하기 위해서였다(6절). 즉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간의 곡물 무역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곡물 무역을 위한 선박 운행은 국가에서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있었고, 정규 항로도 운행하여 신속히 왕래하고 있었다(Ramsay). 율리오는 이 사실을 익히 알고서 이 배편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27:6 이달리야로‥‥알렉산드리아 배를‥‥오르게 하니. - 당시 애굽은 로마에 대한 주요 곡물 공급지였기 때문에 곡물 운반선은 보통 애굽의 북부에서 소아시아로 항해한 다음 지중해를 지나 서진(西進)하였다. 특별히 무라성(5절)의 안드리카 항구는 곡물 선단이 기항하는 주요 항구로 큰 배가 입항할 수 있는 충분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곡물 수송선은 그레데 남방을 거쳐 로마로 직항하기도 했으나(Hackett) 대개 다른 항구들을 거치기 위해서 무라에 기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옮겨탄 곡물 수송선은 276명의 사람을 태울 만큼 큰 배였으며(37,38절), 화물 수송과 함께 승객을 위한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배가 반대 방향의 바람이라도 능히 헤치고 항해할 수 있을 만한 배였다고 이해하고 있다.
27:7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 본문의 '간신히'에 해당하는 헬라어 '몰리스'는 '고생', '고통'을 의미하는 '모기스'( )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것은 곧 무라를 출발해 북서쪽으로 항해하다 맞불어 오는 북서풍을 만나 천신만고 끝에 니도에 도착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여러날 만에'(엔 히카나이스 데 헤메라이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꽤 오랫동안의 날이 지난 후'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무라에서 약 208km 떨어진 니도까지 도착하는데 여러 날이 걸렸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따라서 이곳까지의 항해가 얼마나 힘들었는가 하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무라에서 니도까지는 순풍을 타고 항해하면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Hackett). 한편 '니도 맞은 편에'(카타 텐 크리돈)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니도를 따라 아래로'라는 의미이다. 니도는 소아시아의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에게 해를 가로질러 이탈리아로 가려는 배들의 마지막 기항지이자 북서풍을 막아 주는 육지의 역할이 끝나는 곳이었다(Robertson). 그래서 이 항구는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정박하는 배들을 위한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바울 일행은 니도에서 항해할 방향을 다시금 잡아야 했다. 그러기 위하여선 우선 니도에서 정박하여 순풍이 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왜냐하면 순풍이 불면 서쪽의 키데라 섬으로 항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지체하지 않고 계속해서 항해를 원한다면 그레데 섬의 동쪽 끝인 살모네까지 가서 그 섬의 서남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길이 있었는데 바울이 탄 배가 택한 항로는 바로 이 길이었다. 이렇게 한 것은 본문의 언급처럼 북서풍이 심하게 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레데의 살모네 항구를 경유하여 미항(8절)으로 가는 것은 가장 어려운 항로였으니 저들이 당한 어려움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그레데. 그레데(Crete) 섬은 헬라 본토에서 남방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으로 지중해의 교통 요충지이다. 섬의 동서 거리가 250km, 남북의 길이가 약 10-50km되는 좁고 긴 섬이다. 행 2:11 주석 참조. 바울은 디도를 그레데에 파송시킨 적이 있으나(딛 1:5), 자신이 직접 방문하여 전도한 기록은 없다. '살모네'는 이 그레데 섬의 동쪽 끝에 위치한 해협이며, '미행'은 남쪽 끝의 마다라 반도에 있는 항구이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를 감안할 때 바울이 탄 배가 북서쪽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섬의 남단을 이용해 항해한 것은 최악의 항해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27:8 미항‥‥라새아 성. - '미항'은 그레데 섬의 남단에 위치한 항구로, 문자 그대로(칼루스 리메나스) '아름다운 항구'라는 의미로 오늘날에도 그 명칭이 그대로 남아 있어 '리메오나스칼루스'라 불리우고 있다. 다음으로 '라새아'(Lasea)는 미항에서 동쪽으로 약 8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한편 바울의 서신에 의하면 그레데인들은 게으르고 탐욕스럽다고 알려져 있다(딛 1:12). 그리고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 교회에 장로를 세울 것을 권면하기도 했다(딛 1:5).
27:9-26 광풍 속에서의 하나님의 보호 약속
앞에서는 바울 일행이 가이사랴를 출발하여 그레데 섬까지 당도한 여정을 살펴보았다(1-8절). 이어 본문에는 바울을 호송하던 배가 바울의 충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하다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위기에 처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주지하다시피 바울이 탄 배는 어려운 항해 끝에 그레데의 미항이라는 곳에 정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탄 배가 미항에 도착한 것은 유대인의 절기인 대속죄일(민 29:7-11)이 훨씬 지난 때로 겨울철이었다(9절). 그래서 바울은 그의 항해 경험을 들어 지금 항해하는 것은 위험하므로 그냥 미항에서 겨울을 나기를 주장했다(9,10절). 사실 당시의 선박으로는 겨울철에 지중해를 항해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겨울철의 지중해에는 강한 북동풍이 불뿐만 아니라 태풍이 자주 발생하여 당시와 같은 선박은 조난을 당하거나 파선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항은 많은 사람이 겨울을 나기에는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선장과 선원들은 항해를 계속하여 그레데 섬의 뵈닉스라는 곳에서 겨울을 나기를 원했다(11,12절). 그런데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는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원들의 말을 더 신뢰하였고 항해는 강행되었다. 물론 항해는 처음에는 매우 순조로웠다(13절). 하지만 배는 얼마 못되어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다(14절). 결국 선장을 비롯하여 배에 탄 모든 사람은 무려 14일이라는 오랜 기간을 광풍과 사투를 벌어야만 했음은 물론 배는 파선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실로 절망적인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15-20절).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충고를 무시하고 인간의 세상적 안목과 정욕에 따라 당장의 편의와 실리를 추구하다가 낭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와 같이 인생의 여정에 있어서도 순간의 세상적 쾌락과 안락을 찾고자 우리 인생의 참 선장과 인도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안목대로 행하는 자는 이와 같은 낭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눅 9:25: 요일 2:15).
한편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서도 오직 한 사람 바울만은 담대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로마에 복음을 전하게 되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이번 풍랑에서 구원얻게 되리라는 것과 행선하는 모든 자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다는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23,24절). 바울은 이 사실을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알려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21-26절). 이러한 구원의 선포는 아마도 배 안의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소망을 주었을 것이고, 바울의 권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떠났다가 풍랑을 만난 배부장을 비롯한 선장과 선원들에게는 바울을 크게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풍랑은 바울을 사람들 가운데서 높여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완수케 하려는 성령의 역사요 섭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한 죄수가 가장 믿음직한 선장으로 바뀐 이 놀라운 사건은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바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보전하시는 섭리를 믿고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담대히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27:9 금식하는 절기…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 '금식하는 절기'는 유대 종교력으로 7월(태양력으로 9-10월 10일에 지키는 '속죄일'(Day of Atonement)을 가리킨다(레 16:29). 본서 신명기 서론 특별자료, '히브리인의 절기' 참조. 그런데 오늘날과 달리 당시 지중해에서의 항해는 9월 14일 이후 3월까지는 위험스러운 항해였고, 11월 11일 이후에는 항해가 거의 불가능하였다(Longeneker). 그런데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이미 역풍으로 시간이 지연된 상태인 데다, 때도 속죄일이 이미 지난 때이었으므로 지중해를 통과해 이탈리아까지 항해하기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배가 항해를 계속한다면 큰 재난을 맞게 될 것이 명백하였다.
27:10 내가 보니…손해가 있으리라. - 본문의 '내가 보니'(데오로)는 '주의 깊게 본다'는 뜻으로(I perceive; KJV, RSV) 바울의 오랜 경험의 결과를 반영해 준다. 실제로 바울은 여러 번 항해의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바다에서 파선당한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고후 11:25)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충분히 조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에게 미항에 계속 머무를 것을 권면했다. 한편 바울의 이와 같은 권면에는 경험을 통한 전문적 지식이 작용했을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하나님의 계시에 힘 입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뒤에 그들은 바울의 경고에 따라 배와 화물을 잃고, 생명조차 잃을 뻔했기 때문이다(38-44절).
27:11 백부장이…더 믿더라. - 바울이 탄 배는 이제미항에서 과동(過冬)할 것인지 거기를 떠나 약 65km나 떨어진 그레데의 남쪽 해안에 있는 뵈닉스(Phoenix)항으로 갈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곡물 운반선은 로마 정부의 통제하에 운항되었기 때문에 결정권은 결국 백부장의 손에 달려있었다(Toussaint).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권면을 무시하고(10절) 선장과 선주들의 견해를 더 중시하였다. 물론 백부장이 판단하기에 바울보다는 항해술에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백번 타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인간의 경험과 지식,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여기에서는 간과되고 있으니 곧 바울의 배후에서 바울을 보호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따라서 이를 거스른 결과가 어떠한 것일런지는 불을 보듯 명백하다(14-26절).
27:12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 선장과 선주의 주장은 미항이 겨울을 지나기에 불편한 곳이므로 더 한전하고 따뜻한 뵈닉스 항구로 가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항은 촌락이 작고 위치적으로도 겨울 폭풍우를 맞받는 곳이므로 겨울을 나기에 알맞은 장소는 아니었다. 따라서 백부장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의 충고에 귀를 기울였다.
뵈닉스는…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 본절은 뵈닉스 항이 시승해 서쪽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형태를 띠고 있어 '서남쪽과 서북쪽을 바라볼 수 있음' (공동번역)을 뜻한다. 이 피닉스 쌓은 그래데섬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항에서 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진 지점이다. 오늘날 이곳은 '루트로'(Lutro)라고 불리우고 있다.
27: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 선장과 선주 및 율리오 백부장이 뵈닉스 항으로 항해하고자 결정했을 때(11,12절) 때마침 불어온 남풍은 그들의 결정을 더욱더 천명한 것으로 여기게 해주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발생하는 갑작스런 광풍이 자주 일어나고 맹렬하다는 것과 자신들을 미항에 도착하게 하고 머물게 했던 역풍을 생각한다면 좀더 신중히 행동했어야 했다. 어쨌든 저들이 안심하고 출발하여 항해 도중에 겪은 온갖 어려움은 실로 인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저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을 것이다(14-44절). 그런즉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성도들은 우선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해서는 안됨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즉 우리는 매사에 신앙의 안목에 입각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하나님 중심의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27:14 유라굴로라는 광풍. - 뵈닉스로의 항해 결정과 함께 순풍이 불자 백부장과 선장, 선주 등은 자신들의 결정이 옳은 줄로 알고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여 항해를 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순풍이 돌풍으로 변함으로 해서 저들의 항해 결정이 잘못된 것임이 금방 드러나게 되었다. 여기서 '광풍'(아네모스 튀포니코스)은 '거센 회오리'와 '돌풍'을 동반한 태풍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태풍의 이름인 '유라굴로'(유라퀼론)는 '동풍`을 의미하는 라틴어 '유루스'(Eurus)와 '북풍'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킬로'(Aquilo)의 합성어로 '동북풍'을 뜻한다(Bruce). 이러한 폭풍은 그곳의 전형적인 지형으로 인해 형성되는 돌풍이다. 즉 이것은 그레데 섬의 한 가운데 솟아 있는 2,100m의 이다(Ida) 산맥에서 형성된 두 반대 기류가 맞부딪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순한 남풍이 이러한 돌풍과 겹쳐 북풍으로 급격하게 변하기 때문에 '유라굴로'로 불리운다. 한번 이 바람에 휩싸이고 나면 배가 방향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표류하다 결국에는 암초에 부딪혀 파손되는 것이 기정 사실이었다.
27:15 배가 밀려‥‥가는 대로 두고. - 마치 배가 기대한 괴물에 의해 잡혀 끌려가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구질이다. 여기서 '밀려'(쉬나르파스텐토스)라는 표현은 부정과거 수동태로 배가 스스로 조절할 수 없이 외부적인 힘에 의해 단지 움직이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는' 역시 광풍에 배를 내맡겨 버린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Hervey). 이러한 모습은 선장이나 선주의 의지나 선택에 관계없이 뱃머리를 못 가눈 채 그저 바람따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백부장의 명령이나 선장의 기술이나 모든 것이 소용없게 되었고, 선주도 이제는 목숨 부지하기에 바빴지 곡물을 염두에 둘 형편은 못되었다. 비로소 저들은 자신들의 항해 결정을 후회하고 바울의 권면(9,10절)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27: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 '가우다'(Cauda)는 뵈닉스에서 남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섬이다. 따라서 선원들이 배를 조종할 수 없어서 그냥 떠내려 가도록 놓아둘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 상당한 거리를 떠밀려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섬에 도착한 것도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한편 이 가우다 섬은 오늘날 '가우도스'(Gaudos)로 불리우고 있는데 섬 모양이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한쪽은 동쪽에 연해 있고, 다른 한쪽은 남서쪽 그리고 세 번째면은 북쪽을 향해 있다. 그런데 당시 바람은 이 섬의 남서쪽을 향해 불어왔었다.
아래로 지나. - 문자적으로이 말은 '사이로 지나'(휘포드라몬테스)라는 의미이지만, 7절에서처럼 '~의 보호 아래'(휘포)라는 의미의 접두어와 함께 사용된것으로 보아 '~을 바람막이로 하여'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Robertson, Hervey). 이 말은 곧 배가 겨우 가우다 섬을 의지하여 바람을 피하고 선체를 가누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간신히 거루를 잡아. - '거루'는 보통 배 고물에 매달아 끌고 다니는 작은 배(boat)로 기상 조건이 나빠지면 갑판 위로 끌어 올리곤 했다. 이제 선원들은 가우다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바람을 조금 피할 수 있자 거루를 잃지 않으려고, 또 그것이 배 본체에 부딪쳐 파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갑판 위로 끌어올렸다. 이로 보아 그 동안에는 갑자기 불어닥친 유라굴로 광풍 때문에 거루를 끌어올릴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가 파선될 경우 정박 시설이 안되어 있는 곳에 비상 상륙을 하려면 이 거루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저들은 생사를 걸고 이를 끌어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27:17 선체를 둘러 감고. - 가우다 섬을 바람막이로 삼고 있는 동안 두 번째로 취한 비상 조치는 선체를 밧줄로 동여 매는 것이었다. 항해 도중 선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악재는 돛대와 선체가 파괴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원들은 두 번째 비상 조치로 밧줄로써 선체를 죄어 매어서 파괴적인 강풍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곧 당시 상황에서 선원들이 할 수 있는 최후의 가능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대체로 당시의 배들은 선체의 널판지가 파괴되어 침몰하기가 일쑤였기 때문에 이에 대비할 수 있는 밧줄을 준비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요건이었다(Longeneker).
스르디스에 걸릴까. - '스르디스'(쉬르틴)는 카르타고(Carthage)와 구레네(Cyrene) 서쪽의 아프리카 해안에 위치한 두 개의 사주(砂洲)를 가리킨다. 이 중 보다 큰 것은 현재의 발카(Barca)와 트리폴리(Tripoli) 사이에 있고, 보다 작은 것은 카르다스(Carthase) 부근에 있다(Hervey). 그런데 본문의 스르디스는 관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트리폴리 부근의 대 사주를 가리키는 듯하다(Robertson). 아직은 이 사주가 가우다 섬에서 먼 곳에 위치해 있지만 게속해서 광풍이 심하게 불어닥치면 그곳에 닿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연장을 내리고. - 선원들은 스르디스 라는 모래톱에 걸리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연장을 내려 비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선원들이 비상조치로 사용한 연장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배가 방향을 잃고 표류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제동 장치로 갯바닥을 끌도록 만들어진 부묘(浮猫, floating anchor)라고 하기도 하며(Renie), 또 혹자는 돛대나 색구(索具), 닻 등의 여러 부속물들을 가리킨다고도 한다(Smith). 어쨌든 선원들은 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배가 떠내려 가는 속도를 줄여야만 했다. 이와 동시에 가능한 한 배의 요동을 줄여야만 했다.
그냥 쫓겨 가더니. - 선원들이 온갖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배는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갔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실제로 본문의 '쫓겨간다'(에피디도미)는 말은 '포기하다', '누군가의 손에 넘겨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원들이 배를 조종할 수 없어 그냥 바람에 내어 맡긴 상태를 생생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이처럼 배가 폭풍우에 휩쓸려 겉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선원들이 허둥대는 모습은 출항 당시의 의기양양했던 모습(13절)과 너무나 대조가 된다. 이는 인간의 능력과 생각이 이처럼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연약한 것임을 깨닫고, 더욱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존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 준다.
27: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가 파도로 심히 흔들리다'(스포드로스 데 케이마조메논 헤몬)이다. 즉 누가는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광풍이 계속되고 있어서 여전히 시달리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누가는 특별히 '우리가'라고 표현하여 승선한 모든 사람들의 처지를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 계속해서 폭풍이 누그러지지 않자 그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을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비상 식량만 남겨둔 채 모든것을 버리는 최후의 방편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물론 누가는 배의 밖으로 무엇을 버렸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이 배가 화물선임을 감안할 때 여분의 곡식과 다른 화물을 바다에 던졌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처럼 폭풍우 속에서 배를 가볍게 하려고 노력한 장면은 욘 1:5에서도 볼 수 있다.
27: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버리니라. - 이미 많은 화물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18절) 폭풍이 약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사공들은 이처럼 3일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들조차 바다에 버려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배의 기구'(텐 스큐엔 투 플로이우)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때문에 혹자는 모든 승객들과 선원들이 합심하여 닻이나 돛대를 버렸다고도 주장한다(Smith). 그러나 이는 40절에 가서야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대신 돛을 달아 바람을 맞추었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타당치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배 안에 설치되어 있던 테이블이나 탁자 등을 바다에 던졌을 것으로 보인다(Vincent, Meyer). 또한 '저희 손으로'라는 표현도 헬라어 원문에는(아우토케이레스) 3인칭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승객이나 선원들이 합심하여 이 모든 것을 바다에 던진 것으로 보인다.
27:20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 폭풍은 계속 사납게 몰아 붙였다. 짐을 바다에 던지고 그 다음날 배의 기구를 내어 버리고 난 후에도 상황은 조금도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절망적인 것은 폭풍우 때문에 몇날 며칠 동안 해나 별들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곧 항해자들이 배의 현재 위치를 알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나침판이 발견되기 전인 당시의 항해는 해와 별과 달이 항해의 방향을 잡아주는 유일한 길잡이였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구원의 희망이 거의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율리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 바울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즉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보다 스스로의 판단과 경험을 더 중시한 탓에 겉잡을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다. 때로는 성도들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폭풍우에 휘말려들 때가 있다. 즉 참을성이 없거나(9절),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뜻을 더 내세워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적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순히 다수의 의견을 따르거나, 인간적인 생각이나 합리적인 조건들을 더 신뢰하는(13절) 것 때문에 화를 자초할 때가 허다하다. 그런즉 이로써 깨달음을 얻은 우리들은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는 말씀을 따라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청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27:21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 계속되는 악천 후 가운데서 생명에 대한 소망마저 끊어진 상태이니 사람들이제대로 음식을 먹을 경황이 없었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더욱이 생각컨대 폭풍에 요동하는 배 안에서 배멀미도 겹쳤으리라 믿어진다. 따라서 식욕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직 저들의 관심은 살려는 여망만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바울이⋯내 말을 듣고⋯좋을 뻔하였느니라. - 구원의 소망이 없는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좌절에 빠져 있을 때 바울이 동료들을 향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것은 지금의 이러한 소망 없는 위기에 처한 것이 지난날 자신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백부장과 선장 및 선주들의 잘못된 결정을 지적하는 것은 단순히 저들의 잘못을 책망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자신들의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를 더 신뢰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였다. 이처럼 모두가 낙담하고 있는 가운데서 이제 바울은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즉 아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대처 방법을 일러주기 시작한 것이다(22-26절). 이러한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위기가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 주는바 바울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자로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 본문의 '권하노니'(파라이네오)는 '조언하다'는 의미로 9절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안심하라'(유뒤메오)는 말은 낙심이나 불안 중에처해 있는 자에게 용기를 주는 말로 25절에서도 나타난다. 이 두 용어는 모두 의학적인 용어로 마치 의사가 절망 중에 있는 환자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들려주는 것을 연상시켜 준다. 사실 바울의 이와 같은 말은 암담한 절망 중에 있는 저들에게 삶의 희망을 갖게 하는 구원의 메시지로 들렸을 것이 확실하다. 바울의 이와같은 권면은 자신이 비록 결박된 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는 그의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오직 하나님의 사람만이 단언할 수 있는 확신이다.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 바울은 절망 가운데 있던 동료들에게 인명에는 아무런 해가 없음을 말함으로 먼저 저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있음을 알렸다. 물론 지금과 같은 폭풍우의 상황 가운데서 이러한 확신있는 언급은 인간의 수많은 경험이나 통찰력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절에서 우리는 바울도 이러한 소망의 말씀을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계시받았음을 보게 된다(23절).
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 - 바울은 동료들을 향해 전달한 구원의 메시지가 자신의 경험이나 주관적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계시해 주신 것임을 밝혀 자신의 말을 확신시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배 안에는 분명히 유대인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특별히 바울은 자신이 지금 섬기고 있는 그 하나님을 계시의 원천으로 밝힘으로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도 믿게끔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사자'(앙겔로스)는 천사(angel)를 가리킨다(공동번역). 물론 특별히 구약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현현(Theophany) 하셔서 계시한 적이 있다. 삿 6장과 13장에서 또한 창 32장에의 야곱과 씨름하는 장면에서 그러하셨다. 이 점에 대해서 호세아 선지자는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가 '만군의 여호와' 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호 12:5). 다시 말해 피조된 천사와는 달리 하나님 자신이 친히 현현하셔서 직접 계시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자는 그와 달리 하나님의 피조물인 천사로 이해함이 옳다. 이와 관련해선 출 33장 자료노트, '하나님의 현현'을 보다 참조하라.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시어 바울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격려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행 18:9-10; 22:17-21; 23:11). 하나님께서는 위기 때마다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저를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기도 하셨다. 한편 오늘날 우리는 바울이 경험한 것과 같은 신비적인 체험을 모두 다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 66권으로 완성되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를 동일하게 격려하는 약속들이 들어있다(사 41:10; 43:1-5; 롬 15:4). 즉 오늘날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나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 들려주신 말씀은 동일하니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바울이 더욱 굳센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듯이 우리 역시 그러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비록 과거와 똑같은 환상의 방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에 우리의 삶의 지침과 약속들이 들어있음을 확신하고 그 약속들을 듣고 신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7:24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첫 번째 말씀은 이처럼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곧 바울이 죽지 않고 살 뿐만 아니라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바울이 가이사 앞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은 이미 예고된 사실이었다(행 23:11). 그런데 이제 절망의 폭풍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바울에게 이를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약속하신 것을 최악의 환경 가운데서 바울에게 다시금 확인시켜 주심으로 바울은 더욱더 확신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실로 바울의 삶이 단순히 사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일꾼이자 증인으로 사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드러내 준다. 즉 하나님께서 일찍이 바울을 택정하시고 사도로 부르시며 또한 갖은 위기 가운데서 저를 구원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와 함께… 다 네게 주셨다. - 바울에게 들려 주신 두 번째 말씀은 그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자의 생명을 바울에게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저들이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도록 하시겠다는 의미이다. 참으로 이번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자들 중에는 바울이 증거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역사하심에 놀라 하나님을 믿게 된 자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아무튼 이상의 사실은 바울이 비록 죄수의 모습이지만 이제는 그 배를 관장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즉 백부장도, 선장도, 선주도 이제는 더 이상 그 배를 주관할 수 없게 되었고 바울이 승선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주관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위기 중에서도 바울을 높이드사 당신의 살아 역사하심을 분명히 나타내셨으니 이후 바울은 계속되는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성도들은 구약 성경 하박국서에서 주님이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던 교훈을 되새기게 된다. 즉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 자기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지도록 추구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주님 안에 닻을 내리고 있기만 한다면 인생의 폭풍우 가운데서라도 넉넉히 생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능히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합 3:17,18).
27:25 여러분이여 안심하라…하나님을 믿노라. -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세상에서 신령한 생명을 맡은 자들이며,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전파하는 자들이다(창 18:26). 여기서도 바울은 폭풍우에 휘말린 사람들에게 삶의 길을 증거하고 있다. 즉 바울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께서 배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조금도 동요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시킨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바울의 말을 사람들이 어느 만큼 받아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생명의 위험이 목전에 있는 승선한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바울의 믿음에 대한 고백과 그로 말미암는 구원의 메시지는 바울이 보통 죄수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27:26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 바울은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구원의 소망을 전했을 뿐 아니라 이처럼 앞으로 전개될 구체적인 일까지 예고하고 있다. 물론 이것도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계시(23절)에 의거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아무튼 이러한 바울의 구체적인 예언이 실제적으로 성취된 결과는 먼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실하심을 여지없이 드러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목격하고 체험한 자들로 하여금 그같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였을 것이다.
27:27-44 광풍에서의 구원
지난 단락(9-26절)에서는 백부장을 비롯하여 선장과 선원들이 바울의 권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강행했다가 광풍을 만나 표류하게 된 사실과 바울이 그 배의 지휘자로 부상(浮上)된 사실을 살펴보았다. 본문 역시 그러한 바울의 탁원한 활약과 바울로 인해 배 안의 모든 사람이 극적으로 구원받게 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배는 열나흘 째 되는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멜리데라는 섬 부근에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배가 육지에 가까운 것을 눈치 챈 선원들은 비겁하게도 자신들만 살고자 하는 욕심으로 배에 싣고 다니던 구명정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비겁한 행동은 바울의 간파와 바울의 말에 순종한 백부장 및 군사들의 행동으로 저지된다(27-32절). 실로 풍랑을 만나기 전에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했던 백부장과 군사들은 이제 경험을 통해 바울의 말이 더 옳은 것을 깨달았고 그들이 지금 할 일은 오직 바울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임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그들의 순종은 그 자신들 뿐만 아니라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했다.
한편 선원들의 도주를 저지한 바울은 사람들을 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고 위로함으로써 소망과 평안을 갖게 하였다(33-38절).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마치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가에서 낙심 가운데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위로의 음식을 떼어 주시고 말씀으로 권면하시는 모습을 연상시키는바(눅 22:14-38), 바울은 비록 죄인의 몸이었지만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권면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에게는 결코 두려움이 없으며, 진정한 평안과 안전이 있음을 증거하였다(고후 6:9,10).
결국 사람들은 날이 새자 육지에 무사히 상륙함으로 모두 구원을 얻게 된다(39-44절).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울에 대한 백부장의 호의이다. 즉 날이새자 사람들은 배를 육지에 대기 시작했는데 배가 두 물이 합쳐지는 곳으로 잘못 빠져들어 배는 파손되기에 이르렀고 군사들은 죄수들이 도망칠 것을 염려하여 그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 이때 백부장이 바울을 살리기 위해 군사들의 행동을 막은 것이다. 아마도 백부장은 베스도의 말을 듣고 바울이 죄가 없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풍랑 속에서 바울을 겪은 뒤로는 그가 무죄하다는 사실과 진정한 하나님의 사자임을 깨닫게된 듯하다. 물론 백부장의 이러한 호의는 긍정적으로 로마 전도를 위해 바울을 계속적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상의 본문에서 보듯이 이러한 난파선 속에서의 구원은 풍파 많은 세상 속에서 성도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며, 풍파가 몰아치는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은 오직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 뿐임을 교훈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항해 속에서 평안한 때이든지 풍랑을 만나는 때이든지 언제나 선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와 보호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시 46:1; 막 4:35-41; 눅 21:17-19)
27:27 열 나흘째 되는 날. - 바울 일행이 탄 배가 미항을 출발한지(13절) 14일째 된 것을 말한다(Hervey). 그들이 바다에서 2주 동안 유라굴로라는 태풍에 밀려 멜리데(행 28:1)에 이르른 것을 보아 그 동안 약 800km에 이르는 거리를 표류했음을 알 수 있다.
아드리아 바다. - '아드리아 해'(Adriatic Sea)는 본래 이탈리아와 그리이스의 달마시아 지방 사이의 만을 가리켰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탈리아 멜리데(Malta) 반도 남부에 있는 시실리 섬 아래의 멜리데(Malta)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의 지중해를 일컫는 말로까지 확장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이오니아 해에 해당한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도 자신이 아드리아 해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Smith).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 폭풍에 밀려 배가 아드리아 바다에까지 밀려왔을 때 사공들은 비록 밤중이어서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육지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육지에 가까와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없다. 그러나 저들의 항해 경험을 통하여 파도가 해안에 부딪치는 소리를 통해서나(Lenski) 아니면 배 밑에 달아놓은 추가 밑바닥에 부딪히는 것을 통해 알았을 것으로 추측된다(Breusing).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지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저들이 취한 이후의 행동이다.
27:28 이십 길이 되고... 열 다섯 길이라. - 여기서 '길'(오르케이아)은 '편다' 혹은 '뻗치다'는 뜻으로 양팔을 벌린 간격을 말하는데 약 6척(18m)에 해당한다(Robertson). 따라서 선원들이 육지가 가까운 것을 짐작하고 수심을 측정하니 처음에는 이십 길 곧 36m, 그 다음은 열 다섯 길 곧 27m로 확인하였다. 이것은 곧 수심이 급격히 얕아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선원들이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이 정도의 수심이면 파도 소리를 통해서 육지가 가까워 온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27:29 고물로 닻 넷을 주고. - 수심이 27m인 것을 확인한 선원들은 배가 암초에 부딪힐 것을 염려하여 일반적인 방법과는 달리 닻을 내렸다. 닻은 배를 한곳에 머물게 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쇠줄이나 밧줄에 무거운 쇳덩이나 나무갈퀴를 매어단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고물은 배의 후미(後尾)를 가리킨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닻은 배의 앞부분에 내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은 배가 해안쪽으로 부는 바람과 파도 탓으로 앞으로 더 나아가거나 선미가 180도 회전하여 암초에 부딪힐 위험이 있어 배의 뒷부분의 네 귀퉁이에 네 개의 닻을 내려 배를 고정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의 상황에서 닻을 고물에 내린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일단은 이렇게 하여 밤을 지낸 후 날이 밝으면 해안을 살핀 후에 조심스레 상륙을 시도하는 것이 상책이었기 때문이다.
27: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 배가 암초에 걸려 파선하지 않도록 닻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선원들은 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만이 살려고 야비한 생각을 했다. 즉 비상시에 상륙하는 데 이용하는 작은 배를 바다에 띄워 자신들만이 타고 육지로 나아가려 한 것이다. 선원들의 이러한 행동은 바울이 구원을 예고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믿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선원들의 이러한 얄팍한 행동은 낙심에 빠져 소망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구원을 제시한 바울의 의연한 모습과 너무나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21-26절). 이물. - 배의 머리쪽, 즉 뱃머리를 가리킨다. 이는 '고물'과 반대되는 말이다.
27:31 이 사람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만 구원얻기 위해 거루를 타고 도망치려는 선원들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알려 그들의 도망을 저지시키도록 촉구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명백하다 해도 인간의 노력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지금과 같이 어려운 처지에서 선원들이 없어진다면 배 안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큰 악영향이 미칠 것이 뻔했다. 더군다나 다음날 배를 몰아 무사히 육지에 닿는 데에도 선원들의 기술과 경험은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선원들의 비겁한 탈출을 제지케 한 것이다. 한편 백부장과 군사들을 향한 바울의 경고는 배 안에서 바울의 위치가 어떠한가를 보여 준다. 이것은 다음절에서 군사들이 취한 행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27:32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 배에 승선한 모든 사람들이 오직 주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원들이 거룻배를 타고 몰래 탈출하려 하자 바울의 경고를 들은 바울을 호송하던 군사들은 오히려 거루를 묶어 놓은 줄을 끊어 선원들의 탈출 수단을 막아 버렸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백부장 대신(11절) 이제 이 배 안에서의 실질적인 명령자가 되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군사들의 이러한 태도는 미항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 안전하다고 주장하던 바울의 권고를 거부하던 이전의 그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좋은 대조를 이룬다(9-12절).
27:33 날이 새어 가매…음식 먹으라 권하여. -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의 계시를 받고서는 이미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망과 함께 위로를 전하였었다(24절). 그리고 이를 불신하고서 자신들만이 살려고 도망치려 했던 선원들의 행동에 대하여서도 제어했었다(30-32절). 그런 바울은 이제 날이 밝는 대로 상륙을 시도하기 위하여 먼저 그 동안 굶주린 자들에게 음식을 먹도록 권면하여 기운을 차리도록 조처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도 친히 음식을 먹어 보임으로 모든 사람이다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일러주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를 믿는 담대한 믿음을 저들에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열나흘인즉. - 이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14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동안 규칙적인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Alexander, Hervey). 사실 미항을 출발하자마자 곧 밀어닥친 폭풍 속에서 생의 위험과, 그로 인한 긴장, 또한 배멀미로 인해 정상적인 식사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27:34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 본문의 '구원'(소테리아)은 영혼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14일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가운데서 기운을 차리지 못하면 위기 상황에서 생명을 부지하기 힘들다. 이러한 바울의 염려는 다음날 실제적으로 발생하였으니 만일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체력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면 배가 난파된 상황에서 제대로 헤엄치지도 널조각 등을 의지하여 해안에까지 닿지도 못하였을 것이다(41-44절).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식사 권면은 단순한 주림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육체적 생명의 보존과 관계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 이는 히브리인들의 격언 형식의 문구로 완전한 보호를 해주신다는 의미이다(삼상 14:45; 삼하 14:11; 왕상 1:52; 눅 21:18). 이 말씀은 주님께서도 인용하신 문구로(눅 12:7), 바울 역시 이를 인용하고 있다. 바울의 이와 같은 확신있는 말은 이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구원을 기대토록 했을 것이 분명하다.
27:35 떡을 가져다가…축사하고. - 본절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축사'하였다는 점이다. 우선 배 안에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지 간에 개의치 않고 바울이 그들 앞에 떡을 가져다 놓고 먹기에 앞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퍽이나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헌신된 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믿음을 명백히 보여 줌으로써 당시 전체적인 분위기가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이끌어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36절). 한편 떡을 떼어 축사하는 바울의 이 행위에 대하여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이때 성만찬의 형식을 따라(눅 22:19) 식사를 행했다고 해석하는데 (Bengel, Olshausen, Ewald) 당시 배 안에 이방인들이 많았던 점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유대인들이 감사하며 식사를 나누는 저들의 습관을 따라(Meyer, Robertson) 바울도 그같이 행한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습관을 따라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할지라도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 앞에서 자신이믿는 하나님을 드러내었다는 데서 그 중요성이 있다.
27:36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 '저희도 다 안심하고'의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바울의 위로와 행동으로 인하여 '그 때 모두 기분이 좋아져'이다. 즉 바울이 저들 모두 앞에서 떡을 취하여 축사하고 난 후 조금도 주저함 없이 먹은 모습이 저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고 안도감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의 일련의 이러한 태도는 승선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 동안의 불안감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저들은 두 주 동안 굶으면서 계속 불안에 싸여 있었다(22-25절).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위안을 얻고, 바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었다. 한편 바울이 이처럼 배 안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떡을 나눈 모습은 흡사 주님께서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실 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마 14:13-21).
27: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인이러라. - 이처럼 276명이란 숫자를 어떻게 셀 수 있었으며, 또한 어떤 목적으로 이를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음식을 나누는 가운데 이러한 인원수를 헤아리게 되었을 수는 있다(Longeneker). 이는 아마도 이번 폭풍에서의 구원 사역이 누가와 바울에게 너무 감격적인 것이어서 누가가 이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여 부각시켰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에 일부 학자들은 당시 해운의 취약성을 고려하여 76명이 승선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바티칸 사본의 기록을 지지한다(Weiss). 그러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당시 자신이 타고 다니던 배 중에는 600명 정도 승선할 수 있는 배도 있었다고 한다(Robertson). 따라서 본절의 276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과장된 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배가 화물을 실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인원을 태운 것으로 보아 고대의 해운 사업이 어느 정도 발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7:38 배부르게 먹고…가볍게 하였더니. - 날이 새기 전에 모두가 식사를 흡족하게 마친 뒤 저들은 이처럼 밀을 바다에 버려 배의 무게를 최대한 가볍게 하였다. 이는 배를 해안에 대기에 용이하도록 취한 조처였다. 그런데 여기서 바다에 버린 밀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즉 이 밀을 지금까지 남겨 놓은 비상 식량 중 이제 마지막 식사를 하고 남은 것으로 보는 견해(Bruce, Meyer, Weiss)와 로마로 운송하기 위해 선적해 두었던 곡물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Farrar, Lewin, Smith). 여기서 2주간의 절망적인 풍랑 속에서 아직까지 많은 곡물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18,19절). 그러므로 이 중 전자가 더 타당한 주장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배에 승선해 있던 인원이 276명이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을 위하여 간직했던 비상 식량의 양 역시 결코 적은 양은 아니었을 것이다.
27:39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의논한 후. - 행 28:11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 선원들에게 있어서 이 섬은 결코 낯선 곳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도 이 섬을 선원들이 분간하지 못한 점에 의거해 혹자는 이 섬이 실제로는 멜리데 섬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같은 주장은 행 28:1에서 이섬이 '멜리데'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과 상치된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당시 배가 상륙한 곳이 멜리데 섬의 주요 항구인 발레타(Valetta)에서 멀었고, 또 아무런 표지도 없었기 때문에 사공들이 미처 분간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한다(Ramsay, Smith). 아무튼 바울이 탄 배는 정식 정박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모래밭에 비상 착륙을 시도했는데, 오늘날 이곳은 '성 바울만'(St. Paul's Bay)으로 불리우고 있다(Bruce).
27:40 닻을 끊어…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 이미 저들은 화물을 버렸고(18절), 배의 기구들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19절), 밀까지 버렸다(38절). 게다가 이제는 지금까지 배를 고정시켰던 네 개의 닻(29절)까지 끊어버렸다. 물론 저들은 닻을 들어 올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 것은 최후의 수단을 간구하는 것으로 최대한 배를 가볍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동시에 저들은 오늘날의 키 역할을 감당하는 킷줄, 곧 조타용 밧줄을 늦추면서 바람에 맞춰 돛을 편 채 해안을 향해 배를 조종해 갔다. 이러한 저들의 태도는 이 섬에 상륙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생각으로 최후의 방편을 쓴 것이다.
27:41 두 물이 합하여...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이란 육지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바닷물이 합류하는 곳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진흙 갯벌이 있었는데 본절은 그곳에서 배의 앞부분이 물이 마주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갯벌 진창에 들이 박히므로 꼼짝 못하고 쳐박히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Smith). 실제로 물이 마주치는 곳은 무엇이든 흡인하듯 물 속으로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때문에 이처럼 뱃머리가 고정된 상태에서 더 이상 전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 합쳐지는 물의 흡인력으로 인해 뱃머리가 갯벌에 쳐박힌 데다 강풍으로 큰 물결이 배의 뒷부분을 자꾸만 강타하여 배가 파괴되어 가고 있었음을 말한다. 이로써 바울이 예언한 난파(26절)는 실제로 이루어졌다.
27:42 군사들은…죽이는 것이 좋다. - 전통적인 로마의 규율에 의하면 죄수들을 지키던 군사들은 죄수가 도망가면 도리어 자신들이 처벌을 받아야 했다(행 12:19; 16:27). 때문에 배가 난파된 상황에서 군사들은 죄수들이 헤엄쳐 도망가지 못하도록 아예 저희들을 죽이려 했다. 보통 죄수들은 쇠사슬로 묶어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폭풍으로 인한 여러 사정 때문에 당시에는 이들 모두를 풀어 놓은 듯하다. 어쨌든 배는 파선되어가고 있었으며 또한 육지가 가까웠으므로 죄수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도망갈 가능성은 충분했다(39-41절).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군사들이 죄수들을 죽이려 한 것은 당연한 자기 방어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27: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뜻을 막고‥‥나가게 하고. - 백부장이 군사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죄수들을 죽인다면 바울 역시 화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백부장은 처음부터 바울에게 호의적이었고(3절), 또한 바울의 예언이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더욱이 그는 바울의 타인을 위한 희생 정신에 감화를 받았다. 그리하여 바울을 살리고자 하였으니 이에 군사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헤엄칠 줄 아는 자들로 먼저 육지로 헤엄쳐 갈 것을 명령하였다. 이처럼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의로운 자 바울 한 사람이 있음으로 인해 모든 죄수들이 구원받게 되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백부장 율리오로 하여금 군사들의 계획을 막으시사 로마 사역을 위해 바울을 구원하신 것은 실로 당신의 신실하심과 그 말씀(행 23:11)에 변개함이 없으심을 잘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하나님께선 자신의 약속을 이행치 않으시거나, 변개하시는 분이 아님을 조금도 의심지 말고 믿어야 한다. 아울러서 의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 모습에서 내 자신이 먼저 생명의 복음을 소유한 자로서 뭇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구원의 참다운 증거자가 되도록 힘써야 겠다(사 52:7).
27:44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 백부장의 명령(43절)에 따라 헤엄칠 줄 아는 군인들과 죄수들, 그리고 승객들은 헤엄쳐 육지까지 당도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서진 배의 파편들을 이용하여 상륙하였다. 그 결과 긴 시간 동안 그렇게 무서운 풍랑과 싸우면서도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모두 구원을 받았으니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즉 바울이 예언한대로 배는 파선되고(행 27:22), 사람들은 섬에 상륙하였으며(26절),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게 되었으니(22절) 그의 예언이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상에서처럼 폭풍 속에서 펼쳐진 상황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배우게 된다. 즉 백부장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때때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므로(9-11절)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함께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아울러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마침내 온전히 성취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항상 그를 찾고 의뢰할 때 필요 적절히 여러 방법을 통해서 나아갈 바를 제시해 주신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욱더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의지하는 자를 결단코 외면하지 않고 지키시며 친히 우리의 선장이 되시어 이 험한 세상을 능히 헤쳐나가게 하신다. 한편 가이사랴에서 멜리데까지의 바울의 로마 여정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지도 '바울의 로마 행 Ⅱ'을 보다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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