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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부활의 확실성과 부활 이후의 성도의 몸의 상태 및 부활로 인한 성도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교훈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7:1-16:4까지 이어지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설립자요 사도인 바울에게 자신들 교회의 현안 문제로서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도록 요청한 여러 사안에 대하여 바울이 그와 관련된 신학적 원리와 실천 방안을 각각 답변한 내용을 보도한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런 문맥하에서 본장 전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근거의 하나인 부활(復活, resurrection)에 대한 말씀을 보도하고 있다. 이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전반부 1-34절은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여 신앙의 토대가 굳건치 못한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부활의 확실성 자체를 강조한다. 다음 중반부 35-49절은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부활에 대해 갖고 있던 가장 큰 의문인 부활 이후의 성도의 몸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보도하고 있다. 끝으로 후반부 50-58절은 결론적으로 영생을 위한 성도의 부활이 성도에게 보장하는 최후 승리의 확실성을 새삼 각성시키면서 신앙을 굳건히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런 본장의 보다 세부적인 내용 전개와 각 단락별 의의는 본문과 자료노트 부분의 단락 제목과 해당 강해 주석을 참조하기로 하고 본 개관에서는 부촬 사건 자체의 전반적인 구속사적 의의에 대해서만 개략하기로 한다.
죽음(death)이란 신학적으로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영적 죽음과 영육의 분리로 이 세상에서의 생명(生命)이 종결되는 육적 죽음을 당한 뒤 인간이 자신의 죄의 대가로 받들 영벌까지 포함한다. 실로 이런 죽음은 자연인 모두의 절망과 불안의 궁극적 근원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로 성도가 된 우리 택한 자를 제외한 자연인 모두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바로 이 죽음의 사슬에 얽매여 있고 이를 의식하건 또는 의식하지 않건 그로 인한 공포와 좌절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성경(聖經)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는 성령(聖靈)으로 주와 연합하여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죄값을 대속한 주의 죽음심에 동참하여 죄의 대가를 다 치른 것은 물론 주의 부활에 동참하여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영생의 시작인 부활을 얻을 것을 확증하고 있다.
그리하여 먼저 이처럼 절대무오(絶對無談)의 책인 성경이 태초부터 종말까지 예수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절대 불멸의 구속사의 원리에 의해 우리의 부활이 확실함을 선포하고 또 동시에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가 이를 확신하는 바 실로 부활은 우리 성도 모두에게 가장 역동적인 구속사적 비전(vision)과 희망의 확고한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부활 신앙에 의해 죽음과 심판을 넘은 성도의 최후 승리와 영생이라는 절대 영원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희망 안에서 죄로 오염된 이 세상에서의 인생을 잠시의 순례길로 여기고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이 세상에서의 복락과 고통에 연연하지 않고 격동하는 회망과 기쁨 속에서 묵묵히 이 세상에서 각자가 맡은 바 구속사적 소명(救續史的習命)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특히 본문에 즈음하여 오직 성경만이 과거 태초의 아담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구속 수난 그리고 부활 숭천 등 실제 역사적으로 있었던 구속사적 사건에 담긴 불변의 구속 원리에 입각하여 인간이 희구하는 실존적 구원의 절정인 부활을 무오하고도 명백히 선포하고 있음에도 유의하여야 한다. 즉 오직 성경만이 세속 철학이나 기타 실제적 근거가 없는 허황된 논리로 구원을 논하는 이방 종교와 달리 그저 고상한 도적 규범이나 일시의 정서적 위안을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인간의 전존재의 영생을 가능케 해주는, 곧 존재론적 구원(存在論的救援)을 보장하는 유일한 절대 진리임을 새삼 발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이런 성경에 근거한 나의 신앙은 참구원을 가져을 것을 다시금 굳게 믿으면서 나아가 이를 전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적극 매진하고자 하는 각오도 새로이 하여야 할 것이다.
외울 말씀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성도의 부활의 확실성
12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성도의 부활의 보증이신 그리스도
20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부활 신앙에 근거한 성도의 삶
29 ○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부활 몸의 상태에 대한 답변
35 ○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부활로 말미암은 성도의 긍극적 승리
50 ○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 주제-15:3-8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 후 행적
주요 주제-15:9 사도의 이해
행 1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 - 15:12-19 부활이 없다 할 때 야기될 일들
1 그리스도의 부활도 인정할 수 없게 됨(13절)
2 성도의 전파하는 것이 헛되게 됨(14절)
3 성도의 믿음도 헛되게 됨(14절)
4 성도는 하나님의 거짓 중인이 됨(17절)
5 하나님이 그리스포를 다시 살리지 않았을 것임(15절)
6 인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임(17절)
7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죽음이 헛되게됨 (18절)
8 성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됨(19절)
9 성도가 가졌던 내세의 소망이 헛되게 됨(19절)
10 기독교의 모든 구원 교리들이 거짓이됨(12-19절)
원어 연구 - 15:10, 수고하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코피아오'( )로서, 명사 '코포스'( )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코포스'는 다시 '치다' 또는 '때리다'라는 뜻의 '코프토'( )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일차적인 의미는 '구타' 또는 '매질'이다. 고대 헬라의 비극(悲劇), 시(許) 따위에서는 애통하여 가슴을 치는 행위를 가리켜 사용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이 단어는 외부의 어떤 자극에 의한 정신적인 또는 신체적인 '피곤함'이나 '우울감'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이것은 다시 이런 피곤함에 이르게 하는 '수고'와 '노력'을 의미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본문의 '코피아오' 역시 이런 배경에 따라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동사는 (노역이나 어떤 의무감 또는 슬픔으로 인해) '지치다' 또는 '피로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마 11:28의 '수고하다'는 이런 의미를 반영하는 것이다. 둘째. 이 단어는 '(지칠 정도로) 일하다' 또는 '노력하다'(요 4:35)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 자신이 수고하였다라고 말한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지칠 정도로 복음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다했음을 뜻하며 나아가 사역 중에 갖은 매질과 핍박을 당하여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과 신앙의 지도자들이 주의 사역에 임하는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주요 주제-15:35-49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성경의 주요 증거들
죽은 자들이 과연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제한적인 경험과 지식으로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 제시가 불가능하다. 오직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창조주 전능자 하나님만이 이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주실 수 있을 뿐이다. 이에 우리는 어떤 인간의 증거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특별계시로 주신 진리의 말씀인 성경(Hoty Bible)을 통하여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확실한 단서들을 발견하고자 한다.
1. 구약의 10대 증거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은 자의 부활(Resurrection)에 관한 사상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신앙이 투철한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분명히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계시가 아직 완전히 주어지지 않은 때이기 때문에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가진 것같이 구체적이지는 않았으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가진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에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부활에 관한 증거들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주요 주제-15:12-58 성도의 부활
그랜드 종합 교리 '종말론' 참조
보감-15:12-58 부활의 확신이 주는 7대 유익
1. 현세에서의 아무 대가없는 선행도 기꺼이 하게됨(눅 14:14)
2. 신령하게 변화될 몸을 더럽히는 죄를 짓지 않게 됨(고전 6:15; 15:44)
3.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에 더욱 열심을 냄(고전 15:14,15)
4. 사람 중에서는 불쌍한 자처럼 보여도 마음에 평안이 있음(고전 15:19)
5. 현재의 모든 고난도 감내할 수 있게됨(고전 15:30-32)
6. 썩어질 세상 것들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게 됨(고전 15:50)
7. 현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알고 더욱 주의 일에 힘쓰게 됨(고전 15:55)
도표-15:20-26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묘사
1. 화평케 하는 자(롬 5:1)
2. 영광의 주(고전 2:8)
3. 유일한 교회의 터(고전 3:11)
4. 희생양(고전 5:7)
5. 사망을 이긴 자(고전 15:20-26)
6. 하나님의 형상(고후 4:4)
7. 자유케 하는 자(갈 5:1)
8. 성도의 성화의 목표(엡 4:13)
9. 교회의 머리(골 1:18)
10. 재림주(살전 4:15-17)
11.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딤후 4:1)
12. 구원자(딛 2:14)
내용(관련 성구)
1.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 부활을 믿음(창 22:1-14; 히 11:19)
2. '열조와 함께 잔다' 는 표현은 부활 신앙을 반영함(창 47:30; 신 31:16)
3. 여호와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하나님으로 묘사됨(출 3:6; 마 22:29-32)
4.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행함(왕상 17:22; 왕하 4:35)
5. 엘리사의 무덤에 던져진 시체가 살아남(왕하 13:21)
6. 욥은 자신이 구속자에 의해 부활할 것을 믿음(욥 19:25-27)
7. 시편 기자들은 자주 음부의 권세 곧 사망에서의 구원을 노래함(시 49:15; 73:24,25) 8. 이사야가 새왕국 곧 천국의 도래와 함께 부활을 에언함(사 26:19)
9. 해골 골짜기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은 그의 부활 신앙의 증거임(겔 37:1-14)
10. 다니엘은 마지막 때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있음을 예언함(단 12:2)
2. 신약의 10대 증거들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신약은 구약보다 훨씬 더 명료하고도 풍부한 증거들을 제시 하고 있다. 이 것은 혹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신약 성경 기자들이 당시 이방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부활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계시의 점진성에 의해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구약 시대보다 훨씬 명료하고 풍부한 계시를 주셨기 때문이다. 이에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증거 들을 도표로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내용(관련 성구)
1.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을 여러 차혜 행하심 마옷25;눅 7:14등 2 예수께서 부활을부정 하는 사두개인들에 게부활을 중거하심 pl 22:27-33 3 예수께서 자기를믿는 자의 부활을가르치심 요 6:39,40;11:25
628 고린 도전서 15 장
團圈-15. 12-57
그리스도의 부활이
증거하는 7대 사실
f 그리스도의 신성(름1.4) 2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정성(고전 15 : 14, 17) 3 그리스도의 천국 구원 약속의 확실성(고전 15 17-20) 4 사망에 대한 그리스도의 숭리(고전 15 . 54-57) 5 하나님의 능력(엡 1 : 19,20) e 성도의 부활의 확실성(살전4 13-18) 7 사탄의 궁극적 패배(711. 18)
驪蘿圈-15 20-28
죽은 자의 부활에 있어서
성자 그리스도의 역할
요 11장 자료노트 참조
驪蘿驪-15'21-23, 45
대표와 연합의 원리
름 5장 연구자료 참조
隱圈-15 : 31-34 성도가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1 깨어 있어야 말씀의 참 뜻을 깨달을 수있기 때문에(시 119:18)
2 깨어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 수 있기 때문에(사 26;19)
3 주의 재림이 부지불식간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마 25:13)
4 깨어 있어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에(롬 12:2)
5 구원의 날이 임박했기 때문에(롬 13:11-14)
6 언제 악한 자의 유혹에 빠질지 모르기 때문에(고전 15:33,34)
7 믿음이 연약해지기 쉽기 때문에(고전 16:13)
8 때가 악하기 때문에(엡 5:14-17)
9 성도는 밤이 아닌 낮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살전 5:5,6)
10 사탄이 항상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에(벧전 5:8)
4 예수께서 믿는 자 뿐만아니라 욜신자의 부활도가르치심 요 5:29 5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죽은 성도들이살아남 마 27:52 藝 베드로와 바울이죽은 자를 살리는이 적을 행 함 행 9:脚,41;20:7-12 7 바울은 주의 재림 때의죽은 성 도들의부활을 말함 살전 4:7 8 사도 요한은 마지막심판 때의 전인류의부활을 예언함 7120:4-6,131 9 바울은 기독교 구원론이부활의 진리 에근거함을 설파함 롬 8:11,33고전6: 13-20 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모든 성도 부활의보중이 됨 고전 15: 17,20.45
77-15 : 40-49
본서에 나타난 상호 대조되는 개념들
대 조 개 념 성구 세상의 지혜 하나님 의 지혜 2:6, 7 세상의 영 하나님 의 영 2'll, 12 육에 속한 자 신령 한 자 2 : 14. 15 젖 밥 32 나무 ․ 풀 짚 금 ․ 은 ․ 보석 3'12 미 련한 자 지혜로운 자 3: 18 일만 스승 아비 4 . 15 사람의 말 영 적 능력 4 : 20 육신의 멸망 영 의 구원 5's 창기 의 지 체 그리스도의 지 체 6. 15 무할혜자 할례자 7 : 18 종 자유자 7 22 지식 사랑 8:1 많은 신 한 하나님 8: 5.6 육신의 것 신령 한 것 9 11 귀 신의 잔 주의 잔 10 : 21 어린 아이 장성 한 사람 13 : 10 일만 마디 방언 다것마디 말 14 19 사망 죽은 자의 부활 15'21 땅에 속한 자 하늘에 속한 자 15 '錦 책을 것 썩지 아니 할 것 IS 42 욕된 것 영 광스러운 것 15 : 43 약한 것 강한 것 IS 43 육의 몸 영적인 몸 15 .설 첫 사람 둘째 사람 IS : 47
'하나님의 나라'의 이해 눅 서론 특별자료 참조
15:1-11 신자의 부활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확실성
본장은 성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그 유명한 '부활장'으로 '사랑장'인 고전 13장과 더불어 바울의 모든 서신서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확신에 찬 내용으로 이
루어져 있다. 그런데 제 7장 이후 본서 본론의 후반부에서 거론된 문제들은 고린도 교회의 직접적인 질문에 의한 것으로 논의의 초점도 실제 문제들인 반면, 본장은 교리적인 문제인 '부활'(resurrection)에 관해 언급하고 있으며 또 '... 에 대하여는'(고전 7:1; 8:1)라는 형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 교회의 직접적인 질문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바울이 본서를 마감하기에 앞서 '부활'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하면서도 육체의 부활을 결코 인정치 않는 헬라 철학(행 17:7)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 사이에서 '부활이 없다'(12절)는 것과 부활한다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35절)라는 두 가지의 질문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부활 신앙이 야말로 기독교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부활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확실한 믿음을 갖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기독교 신앙을 정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올바른 신앙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 '부활'에 대해 매우 체계적이고 상세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본문은 부활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 성도들 역시 부활의 소망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코 환상이나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너무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라는 점을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결과이다(3,4절). 즉 십자가 죽음이 성경의 예언에 따른 것이었듯이 주님의 부활도 전적으로 성경의 예언에 근거한 것이므로(시 16:10,11; 사 53:10). 결코 환상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이 존재하며 더구나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생존하고 있으므로, 주님의 부활을 몇몇 사람의 조작에 의한 결과로 보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5-8절). 이와 관련해서는 요 20장 연구자료,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 후 예수의 행적 요약'을 참조하라. ③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 자신의 회심에 의해서도 입증되는 것이다(9-11절). 사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기독교 신앙을 핍박하던 바울이 가장 위대하고 헌신적인 복음 전도자로 변화된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행 9:4,17).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유언비어로 여기면서, 그것을 믿는 성도들을 색출해 내는 데에 물불을 가리지 않던 그가 도리어 애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부활이 너무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확증해 주고 있다.
이상의 본문의 사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부활 신앙은 성경의 많은 증인들에 의해서 사실로 증거되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경이 정확히 증거하는 역사적 사실임을 굳게 믿고, 이러한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하겠다(요 11:25; 행 24:15). ② 바울은 자신의 구원 얻음과 사도됨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였다. 이것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입으면 입을수록 더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것이 참 성도의 모습임을 깨달아야 한다(고후 12:9; 엡 3:8).
15:1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직역하면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그 복음'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그리고 다시 오심을 전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어리석게도 그렇게 바울이 자식을 기르는 심정으로 양육했음에도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특히 부활의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했다(12절).
이런 연유에서 바울은 지금 이제까지 전해 왔던 그 복음을 다시 알도록 해주겠다는 의도로 전에 가르쳤던 그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알게 하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리조'( )는 단순히 '다시 상기시켜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확실히 이해하여 마음에 심어 놓겠다'는 의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아서 그 가운데서 있었음에도 교회 내에서 복음의 기본 진리에 대한 곡해와 탈선이 있었다. 이에 바울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확고하게 고린도 교인들에게 심고자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I5:2 나의 전한 그 말. - 이는 1절의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과 동의어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다시 오심에 관한 말을 의미한다.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구원을 얻으리라. - 여기서 '헛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케'( )는 '목적이나 계획성 없이'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생명의 복음을 전하였지만 고린도 교회에는 이처럼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목적이나 계획성 없이 신앙 생활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신앙을 지킨 자들에게는 더욱 굳센 믿음을 주고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경고를 주기 위해 본장의 서론부에 이와 같은 언급을 하고 있다. 한편 '구원을 얻으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제스데'( )는 현재형이다. 복음을 지키고 옳게 믿은 자는 이미 구원 가운데 있고 그렇지 못한 자는 아직 구원에 속해 있지 않음을 암시해 주고 있는 표현이다.ㄴㅇ
15:3 내가 받은 것. - 이에 대해서는 바울이 주께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를 가리킨다는 견해(갈 1:12, Chrysostom, Alford, Godet)와 다른 사도들을 통해 들은 것이라는 견해(Meyer, Hofmann)가 있다. 그러나 바울의 사도됨과 그가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은 기록이 있음을 상기해 볼 때(행 9:4,6; 23:11; 고전 11:23) 전자의 견해가 합당하다(갈 1:12). 고전 11:23 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바울이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것이다.
먼저.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프로토이스'( )는 '첫 번째 것들 안에'라는 뜻으로 시간적인 순서보다도 중요성에 있어서 먼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바울은 가장 먼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시간적인 순서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은 고린도 교회에 무엇보다도 먼저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우선적으로 전했다는 의미이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고린도를 비롯하여 가는 곳곳마다 그것을 우선적으로 증거 한 것이다.
성경대로. -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등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졌던 것으로 그것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미리 계획하시고 때가 되매 그리스도를 보내사 인간을 구속하게 하심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구약의 예언의
대표적인 실례를 든다면 죽으심은 창 22장; 출 12장, 시 22편; 사 53장; 단 9:26; 슥 12:10 등을 들 수 있고, 부활은 시 16:10,11; 사 53:10; 호 6:2; 욘 2:10 등을 들 수 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메시야가 오면 영원히 죽지 않고 세계를 제패하여 이 땅에 메시야 왕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요 12:34). 이러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에 대해서는 본서 17권 막 서론 특별자료, '메시야의 이해'를 참조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구약의 분명한 가르침임을 제시하여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수정하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15:4 장사 지낸 바. - 바울은 주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실재적인 개념으로 도출시키기 위해 죽음을 상징하는 장사를 언급하고 있다. 장사란 죽은 자를 매장하는 의식으로 그것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별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사된 그리스도는 실제로 육체의 생명을 잃고 죽음의 세계로 갔었던 것이다(벧전 3:18-19).
성경대로. - 주님의 구원의 사역과 여정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바울은 전절에 이어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눅 24:25-27).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여기서 '사흘'이란 72시간의 만 사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날 수 상의 사흘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금요일 오후에 운명하시어(마 27:1,50) 안식일이 지나고 그 다음날 새벽에 부활하셨던 것이다(마 28:1; 막 16:2; 눅 24:1,7). 하여간 주님은 자신의 예언대로(마 12:39,40) 분명히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한편 여기서 '다시 살아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게게르타이'( )는 현재 완료 수동태 직설법이다. 앞부분의 시제는 모두 과거이나 여기서 바울이 이처럼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과거의 한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부활하신 몸으로 살아계셔서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심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또한 이 낱말은 수동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주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15:5 게바에게. - 본절에서부터 8절까지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 나열되어 있다. 부활에 대한 증거에는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요 20장 연구자료,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 후 예수의 행적 요약'을 참조하라. 한편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이다(마 28:8,9; 막 16:9). 이에 대해서는 눅 24장 자료노트, '4복음서의 부활 기사와 관련된 난제들'을 참조하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본절에서 게바와 열 두 제자를 먼저 언급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사적 증거보다 사도들이라는 공적 증거를 제시하여 신뢰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여기서 '게바'란 베드로의 별칭으로 아람어이다(요
1:42). 주님은 사도들 중 제일 먼지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눅 24:34). 베드로와 관련해서는 벧전 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열 두 제자에게. - 변절자 가룟 유다가 없었으므로 실제로는 '열 한 제자'였다. 그래서 베자 사본(D)이나 보엘네리안 사본(G)에는 '열 한 제자'로 되어 있다. 하지만 유다가 없었음에도 당시 열둘은 하나의 고유 명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마 19:28; 행 6:2; 계 21:14) '열 둘'이라는 표기가 오기라고는 볼 수 없다. 게다가 본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맛디아가 열 두 제자에 편입되어 있었는데(행 1:26),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므로 열두 제자가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본절의 증언을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15:6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살아있고. - 복음서 어디를 살펴보아도 일시에 오백여 명이나 되는 무리 앞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기록이 없다. 때문에 본절의 기록은 오기라는 주장이 있다(Bauer, Eelier).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는 유월절 기간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타나셨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며, 또 바울 스스로가 그 때의 오백 명 중 태반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증언한 점으로 보아 본절의 '오백 명'은 오기가 아니라 사실로 여겨진다. 한편 부활을 목격한 오백여 명 중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다는 말은 예수의 부활의 확실성을 명백히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부활의 목격자 중 많은 사람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은 부활이 결코 조작된 것이 아님을 확증하기 때문이다.
잠들었으며. - 이는 성도의 죽음을 나타내는 신약적 표현이다(18,20절; 요 11:11; 행 7:60). 성도는 비록 육신의 생명이 다하여 사망했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육과 영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성도의 육신의 사망을 사망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는 의미에서 잠들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15:7 야고보에게. - 본절이 언급하고 있는 야고보는 12사도 중 하나인 야고보가 아니라 주님의 형제 야고보이거나 작은 야고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본절의 야고보가 12사도 중 하나인 야고보라면 그는 5절에 이어 중복해서 두 번 언급된 것이 되는데 바울이 이처럼 야고보를 특별히 중복해서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절의 야고보를 주님의 동생 야고보로 본다. 왜냐하면 외경 히브리 복음서를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동생 야고보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Edwards).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주를 믿지 않았으나(요 7:5),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뒤로는 변화하여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일하였다(행 15:13; 21:18; 갈 2:9). 주의 형제 야고보에 대해서는 약 1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모든 사도. - 혹자는 이것을 5절의 '열두 제자'를 반복한 것으로 보나(Findlay, Godet). 일반적으로는 그 열두 제자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사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Meyer, Alford). 사도행전을 보면 주의 제자들 외에도 바나바나 실라와 같은 주의 종들이 사도로 불리우고 있다(행 14:14). 이와 관련해서는 행 1장 자료노트, '사도의 이해'를 참조하라.
15:8 맨 나중에‥‥내게도. -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사건을 가리킨다(행 9:5). 이 사건으로 바울의 생애는 완전히 바뀌었으며, 이 감격이 그의 생애를 온전히 지배했다. 또한 이 사건 이후 주님의 부활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되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에크트로마티'( )는 신약에서는 본절에서만 보이는 낱말로 본래는 조산'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학자들 간에는 이 '조산'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① 바울 자신의 육체적인 부족함을 의미한다는 견해(Estius, De Wette, Meyer, Bengel, Edwards)와 ② 바울이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하지도 않았을 때에 돌연히 주님을 만나 회심하게 되었으므로 영적인 의미에서 조산이라는 견해(Calvin, Grotius, Godet, Vincent, Beet)로 대별되는데, 전자가 바울의 본래 의도일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바울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마치 육체적 미숙아인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 바울은 엡 3:8에서는 자신을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하였으며, 딤전 1:15에서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자신을 더욱 낮추고 있다. 이처럼 바울이 자신을 낮춘 이유는 과거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함으로써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큰 걸림돌과 같은 역할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모
함하며 공격하는 악한 무리들에게는 자신이 그 어떤 사도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답변한다(고후 11:5 이하). 바울은 실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수고 속에서 복음을 위해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한 것이며, 또 자신이 마땅히 해야할 일임을 알았기에 자신의 일을 자랑하지 않고 겸손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사도권과 그가 전한 복음을 부인하려는 자들에게는 그의 사도권을 힘 있게 강조하여 복음을 수호하였던 것이다.
15:10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며 죽이던 자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실로 바울은 인간 됨됨이로는 만삭되지 못한 자요, 행위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신이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그로 하여금 복음 전파 사역에 열정을 다해 충성케 하였던 것이다. 우리 역시 진정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하며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피땀 흘린 수고에 대한 기록은 고후 11:23-29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본절과 관련해서는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15:11 내나 저희나‥‥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 여기서 '내'는 바울을, '저희'는 다른 사도들을, '너희'는 고린도 교인들을 지칭한다.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요 일관된 분이시기 때문에(고전 14:33)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동일한 내용을 하나님께로 받아 믿는다.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큰 은혜를 입었음을 믿고 전하였으며, 그 전파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도 동일한 복음을 믿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부활을 부인하는 다른 복음을 가진 자들이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의 '믿었느니라'(에피스튜사테)라는 말이 부정 과거시제로 되어 있어 고린도 교인들이 과거에는 사도들의 전한 복음을 믿었으나 지금은 온전히 믿지 않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15:12-19 성도의 부활의 확실성
앞 단락(1-11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부활을 논한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성도들의 부활의 확실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부활의 소망 가운데 거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먼저 바울은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아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의 실례를 들어 부활의 확실성을 거듭 강조하고(12절),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부활을 극구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됨을 경고한다(13절). 그리고 14절 이하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함으로 빚어지는 불행한 결과들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임을 설명하여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의 근거가 됨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친히 감당하셨고. 인간의 칭의를 위해 부활하셨다(롬 4:25). 그런데 이 같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증거하는 복음은 헛되어 우리는 거짓 증인으로 인정될 것이며, 믿음도 소용이 없게 될 뿐만 아니라(14-15절), 여전히 죄와 사망의 자리에 놓여 있게 될 것이었다(17절). 또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죽은 그리스도인들도 죽음과 함께 영원히 멸망했을 것이다(18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내세를 소망하며 믿음을 지켜 나가는 성도들은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자가 되었을 것이다(19절). 왜냐하면 구원과 영생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만 소망을 두고 현재의 삶 속에서 겪는 모든 고통도 다 감수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단지 이 세상에서 모든 삶이 종식된다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모두 헛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또한 부활하셨으므로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귀한 것이 되었으며, 부활에의 확신과 소망에 찬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참으로 이러한 신앙을 겸비하지 않는 자는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으므로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을 감내할 수 없게 된다. 바울의 확신에 찬 복음 증거와 고난을 견디는 신앙도 사실 부활을 믿으며 자신의 부활을 확신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하는 믿음의 자세인 것이다.
한편 이상의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에게 있어서 구원과 믿음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갖는 믿음의 본질적인 근거는 무엇인지? 대상은 누구인지를 다시 점검해 보고 참된 기초 위에 세워진 믿음 생활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행 4:12).
②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구원과 영생과 소망이 없다면 모든 삶은 어리석고 무가치한 것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의 확신에 찬 소망이 내재되어 있기에 일시적인 이 세상의 삶에 미련을 두지 않고 오직 영원한 하늘나라의 삶을 염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도 꿋꿋이 이겨내고, 힘겨운 이 세상의 삶도 믿음으로 감수해 내어 날마다 신앙의 승리를 경험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요 16:33; 롬 8:37).
15:12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부활이 없다 하느냐. - 바울은 주님의 부활을 4절에 이어 계속해서 현재 완료시제로 표현하고 있다.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을 과거에 있었던 한 사건으로 넘기지 않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주님의 부활이 실제적으로 역사하고 있는 역동적 사건임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4절 주석 참조. 이와 같이 주님의 부활은 정확하고 틀림없게 고린도교회에 전파되었다. 그 복음을 전파한 당사자인 바울도 분명히 전파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그렇게 정확하고 틀림없게 전파된 부활이 고린도 교회 내에서 올바로 보전되지 못하고 그 내용이 변질되거나 소멸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 불상사는 죽은 자들은 부활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로 인해서 제기됐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든지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자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피조물인 자연계의 법칙 속에 가두어 놓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오류와 교만에 빠졌거니와 과학주의를 신봉하는 현대인들은 더욱 이런 오류와 교만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스스로를 돌아보아 이런 사조와 이론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며 더 나아가서 그런 사조와 이론을 타파할 수 있는 신앙과 지식으로 무장하여야 한다.
너희 중에 어떤 이들. - 학자들 간에는 부활을 믿지 않던 이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몇 가지 이견이 있다. ①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었다(행 23:8). ② 내세를 부인하던 쾌락주의자나 비인격적인 내세의 삶을 말하던 스토익파 철학자들이었다(Farrar). ③ 일반적인 이방신자들이었다(De Wette, Alford, Bengel). 그런데 당시 고린도는 헬라 문명이 꽃 피던 중심 도시 중 하나였으므로 고린도교회에는 온갖 이방신을 섬기던 사람들이 다 들어왔을 것이다. 따라서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견해로 여겨진다.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 본절은 12절에서 언급된 어떤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을 것이므로 그 주장은 거짓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구절이다. 바울은 역설적인 논리로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의 논리를 제압하고 있다. 보편을 부인하는 것은 특정을 부인하는 것이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참이므로(3-8절) 그 주장은 거짓인 것이다. 특별히 보편적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하는 성도의 부활도 부인하는 것이 므로 그 주장은 기독교의 진리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위험한 사상이다.
15:14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믿음도 헛 것이며. - 본절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일어나는 두 번째의 결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을 것이고(13절)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을 것이므로 모든 복음의 내용도 그것을 믿는 믿음도 헛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만 있고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 죄 사함만 있고 새 생명이 실제로 주어지지 못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즉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는 것인데 부활이 없다면 그 시민의 실체가 없으므로 복음의 목적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 없는 전도와 믿음은 모두 헛것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헛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논'( )은 '빈 껍데기'라는 의미이다.
15: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일어나는 세 번째 결과는 부활이 있다고 전한 자가 하나님 앞에 거짓 사자가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거짓 증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슈도마르튀레스 투 데우'( )는 '하나님을 거짓 증거하는'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전자는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주체로, 후자는 부활을 증거하는 자가 거짓말하는 주체가 되나 어느 쪽으로 하든 거짓말한다는 의미에는 변화가 없다. 일반적으로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은 전자의 번역이 옳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Godet). 그러나 다음 문장의 의미와 연관지어 볼 때에는 후자의 번역도 타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가 하나님이‥‥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 여기서 '하나님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카타 투 데우'( )는 이를 직역하면 '하나님에 대해서'이다. 즉 본문은 사도들이 하나님께 대항해서 하나님이 부활시키지도 않은 그리스도를 부활시켰다고 거짓을 만들어 전파했다는 의미이다(Meyer, Godet, Hofmann). 그렇다면 거짓말하는 주체는 사도들이 되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는 앞 문장을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짓 증거하는'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게 보여진다.
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 본절은 13절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13절이 14절의 결론을 도출시키기 위한 선행 전제가 된 것처럼, 본절도 17절의 결론을 도출시키기 위한 선행 논리가 되고 있다. 즉 13절과 14절, 본절과 17절은 삼단 논법으로 결론을 도출시키고 있는데 13절과 본절은 그 삼단 논법의 선행 논리 역할을 하고 있다.
15:17 믿음도 헛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본절은 본질적으로 14절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만 '헛되다'는 의미가 보다 강조되어 있고, '헛되다'는 의미의 결과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더 실제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 '헛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마타이아'( )인데, 이 용어는 14절의 '헛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논'( )보다 그 의미가 훨씬 강하다. 즉 '케논'은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공허인데 반해, '마타이아'는 진리가 결여됐다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허무를 나타낸다. 그리고 14절은 전파하는 자와 듣는 자에게 허무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본절은 듣는 자 자신들이 완전한 허무 가운데 있게 될 것을 나타내고 있다. 즉 부활의 부인에 대한 실제적인 허무의 해악은 부활을 부인한 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바울은 암시하고 있다. 이 의미는 부활이 없다면 고린도 교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부활이 없다면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실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영생을 얻지 못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죄 사함이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하게 되므로 부활이 없으면 여전히 죄 가운데 놓이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살아나지 못하는 자는 죽은 자인 것이다.
15:18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상태에서 육체의 생명이 다해 죽은 자'를 지칭한다. 6절 주석 참조. 이들은 모두 부활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하기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이들은 부활할 수가 없으므로 영원히 죽음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 '망하였으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론토'( )는 '파멸시키다', '죽이다'는 뜻의 '아폴뤼미'( )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17절의 '죄 가운데 있으리라'는 말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인간이 죄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의 정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망하였다'와 '죄 가운데 있으리라'는 동일하게 죄로 인해 죽음 아래 있다는 의미이다(Meyer, Alford, Godet).
15:19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더욱 불쌍한 자리라. - 헬라어 원문을 보면 '다만'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논'( )이 한글 개역 성경처럼 '이생' 앞에 있지 않고 문장의 맨 끝에 있는데 이에 따라 이 낱말이 무엇을 수식하는가에 대해 몇 가지 이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① '그리스도 안에서'를 수식한다(Ruckert). ② 한글 개역 성경이 번역한 것과 같이 '이생'을 수식한다(Billroth, Grosheide). ③ 문장 전체를 수식한다(Meyer, Godet, Morris, Robertosn, Edwards, Hodge). 이 가운데 일반적으로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생에서 부활하지도 않은 그리스도를 바라는 것이 전부라면 그 어떤 세상 사람들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가장 불쌍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자들인데 만약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못하고 죽은 신이라면 그 신을 좇는 성도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방신을 좇는 자들은 죽은 신을 좇지만 세상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참신이 없다면 이방신을 좇는 자들보다 세상을 부인하며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더 불쌍할 수밖에 없다.
15:20-28 성도의 부활의 보증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1-11절).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며, 부활이 없을 경우 성도들의 비참한 결과를 언급함으로써 성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언급한 바울(12-19절)은 이제 본문에서는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보증이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첫 열매가 되신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20절).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성도들이 장차 부활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예표요 보중이 된다는 의미이다. 20절 주석 참조. 특별히 바울은 이러한 부활의 확실성을 설명하기 위해 '대표와 연합의 원리'(롬 5장 연구자료 참조)를 도입하고 있다(21,22절). 즉 모든 인류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 안에서 죽은 것과 같이 이제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 안에 있는 모든 성도가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롬 5:12-21).
한편 바울은 부활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이루어질 성도들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게 되며(23절), 그 후에는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인데 그때에는 재림하신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모든 권세와 죄악의 세력을 멸하시고 마지막으로 사망의 권세까지 정복하신 후에 모든 만물을 주인되신 하나님께 돌려 드리게 될 것을 밝히고 있다(24-28절). 즉 성도의 부활이 있게 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원수의 세력을 정복하시는 사역을 완성하시고 이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신 후 이 세상을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께 양도함으로 성자의 중보적 사역은 마감되고 성부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을 통치하게 되신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 권세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암시하는 것으로서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될 미래에 대한 소망을 성도들에게 갖게해 줌과 동시에, 성 도들이 부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이 세상의 삶 역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할 것과 성도들이 현재에는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을 소망하여 인내로써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해 준다(롬 8:29; 빌 3:10-21).
15:20 그러나 이제. - '그러나'(데)라는 이 대위 접속사는 지금까지 언급한 일련의 처 참하고도 끔찍한 가정의 논의들이 진실이 아님을 나타내 주는 희망과 즐거움의 낱말이다. 이 낱말은 지금까지의 거짓된 가설들을 뒤집어 엎어 생명과 영광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더욱이 '이제'(뉘니)라는 낱말은 '그러나'와 함께 작용하여 지금까지의 '만일'(에이)이라는 허구의 가설과 대조되어 앞으로 논의되는 것은 실제의 현실이라는 진리의 사실임을 암시해 준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 그리스도는 죽지 않았었거나 또는 죽었으나 부활하지 않은 것을 부활한 것처럼 꾸민 것이 아니다. 그는 완전히 죽어 죽음 가운데 있다가 거기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4절 주석 참조.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죽음을 맛보고 그 사망 가운데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 '첫 열매'(아파르케)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수한 것 중 처음 거둔 것을 하나님께 바친 것에서 온 개념이다(출 22:29; 23:19; 레 23:10). 따라서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곧이어 큰 추수가 있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주님이 첫 열매로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곧이어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부활할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요 11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I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 바울은 부활의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해 '대표와 연합의 원리'를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대표와 연합의 원리는 성경의 구속사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사상인바 롬 5장 연구 자료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하였으니 그곳을 필히 참조하라. 하여간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 것 같이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통해 영생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창세 이후로부터 인류 역사를 궤뚫고 내려오는 복음의 줄기이다. 한편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는 표현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참인간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었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우리와 같은 죽음이며, 그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필연성을 뒷받침해 준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몸과 성정을 가졌으므로 그 안에 있는 우리 또한 그와 같이 부활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다.
15:22 아담 안에서‥‥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삶을 얻으리라. - 본절은 전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한 것이다. 즉 전절의 '사람' 가운데 전자는 본절의 아담을 후자는 본절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사망과 생명에서 각기 전 인류의 머리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논란이 되는 것은 두 번째의 '모든 사람'(판테스)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죄 아래 놓여 죽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영생에 자동적으로 이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래서 이 두 번째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견들이 있어 왔다.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이것은 문자 그대로 전 인류를 의미한다는 견해이다(Origen, 01shausen, De Wette). ② 택함을 입은 신자들을 지칭한다는 견해이다(Bengel, Ewald, Hofmann, Hodgo). ③ 기본적으로 전 인류를 가리킨다고 보나 본절의 '삶을 얻으리라'는 말을 '구원'으로 보지 않고 '부활', 즉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이 모두 포함된 개념으로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Chrysostom, Theophylact, Calvin, Meyer, Godet). 이 가운데 첫 번째 설은 만인 구원설로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대치되기 때문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골 1장 자료노트, '만인 구원설 비판'을 참조하라. 따라서 두 번째 견해가 옳다. 세 번째 견해도 일견 타당성이 있으나 ① 본절의 '삶을 얻으리라'(조오포이에오)가 악인에게 적용된 예가 성경에 없고, ② 바울이 비록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에 대해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다고는 하나(행 24:15) 본장 전체에서는 의인의 부활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으며, ③ 평행 구절인 롬 5:12-21이 의인의 영생을 말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두 번째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15:23 각각‥‥차례대로 되리니. - 여기서 '차례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그마티'( )는 본래 '정렬하다'는 의미의 동사 '탓소'( )에서 온 고대 군사 용어이다. 70인역(LⅩⅩ)의 민 10:14; 13:22,25; 삼하 23:13에는 이 단어가 '부대'로 번역되어 있다. 고로 이 말은 군대가 일사불란하게 정렬하며 차례대로 이동하듯이 부활도 그렇게 될 것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즉 부활은 일시(一時)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시간적 간격을 두고 발생할 일인 것이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로서 모든 부활의 원형이므로 그리스도가 순서상 제일 먼저 인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는 가장 먼저 부활하셨으며, 그 부활은 이미 일어난 과거의 완료 사건이다.
강림하실 때. - '강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루시아'( )는 본래 황제나 왕의 도착 또는 방문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였다(Deissmann). 이 용어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또는 임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는 재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에게 붙은 자. -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 곧 성도들을 지칭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 다음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두 가지 견해로 나누인다. ①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부활이 있은 후에도 아직 부활하지 못한 '그 남은 자들', 곧 불신자들의 부활을 의미한다(Theodoret, Meyer, Bengel). ②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성도들이 부활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엔 완전한 종말이 온다는 의미이다(Chrysostom, Ewald, Findlay, Hodge). 전자의 견해는 22절의 세번째 견해에 입각한 주장으로, 최후 심판에는 불신자의 부활이 필수적이므로(계 20:13) 타당성이 있으나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는 역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모든 정사와‥‥권세와 능력. - 이 낱말들은 성경에서 때로 선한 세력을 표현하기도 하고(엡 1:21; 골 1:16), 악한 세력을 표현하기도 한다(엡 6:12; 골 2:15).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모든 형태의 세력을 총칭하며 집합적 세력을 나타내는 응어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마지막 때에 모든 악의 세력을 정복하시사 그에게 매여 있던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하고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세워 그 나라를 하나님께 드린다.
15: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왕노릇하시리니. - 본절은 시 110:1을 바울이 약간 변형시켜서 인용한 것이다. 이 말씀은 다른 신약 성경에서도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마 22:44; 히 1:13), 그 본래 내용은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물리치고 멸망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본절의 주어인 '저'를 시편이나 다른 인용 구절의 경우와 같이 성부로 보기도 한다(Hofmann, Godet). 그러나 본절에서는 바울이 성부에서 그리스도로 주어를 변화시킨 것으로 보아 '저'를 성자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Findlay, Robertson & Plummer). 악의 세력을 멸절시키시는 그리스도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악이 멸망할 때까지 불가불 자기 백성의 통치자로 역사하신다. 그리스도는 악의 세력을 완전히 별하신 후에 비로소 그 나라를 성부께 돌리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지금도 악을 물리치시기 위해 우리의 대장으로 사역하시고 계신다.
15: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 '사망'은 인간이 범죄한 결과인 동시에(롬 5:12; 6:23; 히 9:27), '생명'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모든 피조물의 부패와 죄의 권능이 형상화된 하나의 상징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 인격적인 개념에 불과한 사망을 하나의 인격적인 것으로 의 인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의인화된 사망이 멸망한다는 표현은 악의 세력이 멸망한다는 개념을 매우 극단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해 준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망은 모든 죄악과 그 세력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죄를 근거로 인간을 정죄하고 협박하며 속박하고 괴롭히던 사망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부활로 더 이상 권세를 행사하지 못하고 끝내는 악의 세력의 멸망과 함께 소멸하고 말 것이다.
15:27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 여기서 만물을 복종케 하신 주체가 하나님인지 그리스도인지 분명치 않다. 어느쪽을 취하여도 의미상의 차이는 없으나 본절 하반절과 28절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본절에게 '저'는 그리스도이고,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신 이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말씀하실 때. - 이 때는 시편 기자를 통해 말씀하신 과거를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고(Hofmann, Godet), 종말이 일어나는 미래라는 견해가 있다(Meyer, Edwards). 일반적으로는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 본문을 한 마디로 말하면 만물의 창조주이시요 주권자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셨으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지극히 당위론적인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는 아마도 그리스도도 결국 하나님께 복종하게 된다는 28절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15:28 아들 자신도‥‥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 본절은 성자가 성부에게 복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매우 논란이 되는 구절이다. 아리우스(Arius)는 이 구절이 성자 종속설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할 정도로 본절을 악용하였다. 그래서 정통주의 학자들은 본절을 을바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그 결과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다. ① 본절이 말하는 성자의 성부에 대한 복종은 성자의 인성으로 인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성부께 복종한다(Augustine, Jerome. Calvin). ② 이는 은혜의 왕국에서 영광의 왕국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역할상의 표현이다. 즉 성자의 중보적 역할이 끝나고 성부의 직접적 통치가 시행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상의 결과이다(Melanchthon, Luther, Bengel, Meyer, Robertson & Plummer). ③ 본절은 성자가 복종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자가 머리되신 교회가 복종한다는 의미이다(Theodoret, Ambrose). 세번째 견해는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이다. 첫번째 견해는 일리가 있으나 그리스도를 양분하여 그리스도의 전인격적 사역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결국 두 번째 견해가 가장 자연스럽다.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본질상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동등하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맡으신 역할 때문에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신 것이다.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 '만유의 주'는 초월자를 '만유 안에 계신 주'는 내재자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초월자인 동시에 내 재자이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유의 참 주권자되시며 인도자되신 이유이다. 이 세상의 어떠한 신도 이 양자를 완전하게 조화시키는 신은 없다. 오직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그것을 가능케 하신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로 완전한 현실성을 가지게 된다. 즉 그리스도께서 복종하심으로 죄를 멸하시고 세상을 하나님께 드릴 때 만물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온전하게 되어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가 되는 절대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15:29-34 부활 신앙에 근거한 성도의 삶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망 권세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였음을 역설한 데(20-28절) 이어,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는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자신의 전도 사역에 미친 영향을 토대로 하며 부활 신앙에 근거한 성도의 현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먼저 바울은 자신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굳게 지니고 있었기에 생사의 경지를 헤매는 위험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30,31절).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성도가 갖는 부활 신앙은 단순히 관념적인 이론이나 현실의 삶과 유리된 피상적인 개념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모든 절망적인 상태를 극복케 하고, 긍정적인 사고로 현실의 어려운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참 신앙의 힘인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복음 전파 과정 속에서 맹수와 싸우는 것과 같은 죽음의 위험과 날마다 환난의 연속인 삶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성도의 부활도 없고, 내세의 삶도 없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이고 모든 것이라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바울은 만약 그렇다면 이세상을 쾌락과 무절제한 삶으로 일관되게 살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32절). 그러나 성도의 부활이 있을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영생 또한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역경도 마다하지 않으며 절제하는 삶을 살았다고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한편 바울은 고린도 성도에게 부활 신앙에 대해 확신을 가질 것을 그의 경험을 토대로 권면함과 아울러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며 왜곡된 말로 미혹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충고한다(33,34절).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타락과 방종의 생활을 추구함으로써 참 신앙의 길을 가고자 하는 성도들을 미혹한다는 것이 바울의 충고의 이유이다. 결국 바울은 믿음을 훼방하는 세속적인 자들과의 교제를 금하고, 오직 부활의 확신과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을바른 신앙 생활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참으로 확신에 찬 부활 신앙은 온갖 환난을 극복케 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믿음으로 복음에 복종케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상의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바울은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계속적인 핍박과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오직 부활을 퉁한 미래에의 소망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본받아 믿음의 여정을 걸어야 하는 성도들도 삶 속에서 겪는 고통이 아무리 중할지라도, 또 견디기 힘든 슬픔에 처할지라도 내세에 있을 영광된 삶을 바라보고 부활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롬 8: 17,18; 히 6:11,12)
② 장차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 영광스런 하늘나라에 거하게 될 우리 성도들은 무리의 신앙을 미혹하여 죄악으로 유혹하는 악의 세력들을 철저히 경계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하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행하는 성숙한 신앙을 소유해야 할 것이다(롬 12:2).
15:29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 - 본절은 그 명확하지 않은 의미 때문에 지금까지도 수 없이 많은 해석들을 제공하게 하고 있다. 이제까지 제시된 해석들은 무수히 많지만 그 중 중요한 것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신자를 위해 산 자가 대신 받는 것을 의미한다(Meyer, Afford, Ellicott, Edwards, De Wette, Stanley). ② 이것은 모든 신자가 받는 일반 세례를 지칭하나, 세례를 받는 자가
부활의 소망 가운데 자신을 이미 죽은 것으로 보고 나타낸 표현이다(Chrysostom, Theodoret, Aquinas, Calvin). ③ 성도가 죽어 동료 신자들이 그 성도의 가족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것을 듣고 감동하여 회개하고 믿은 자들이(죽은 자로 인해) 세례받는 것을 의미한다(Findlay, Robertson & Plummer). ④ 죽음의 세례, 곧 순교를 가리킨다(Flatt. Lighuoot, 7odet), ⑤ 세례받지 않고 죽은 친구를 대신해서 관이나 무덤 속에서 대신 세례를 받는 풍속을 일컫는다(Stanley). ⑥ 세례받지 않고 죽은 성도의 시신을 물에 담그는 풍속을 지칭한 것이다(Beza). ⑦ 병들어 거의 죽게 된 자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Holstein, Kling). ⑧ 새 신자가 입교한 뒤 죽은 성도의 자리를 계승하여 세례를 받는 것을 말한다(01shausen). ⑨ '~위하여'로 번역된 '휘페르'( )를 '~위에서'로 본 견해로 순교자의 무덤 위에서 받는 세례를 지칭한다(Luther, Ewald). ⑩ 고린도 교회에서 부활을 믿지 않고 부인하던 자들이(12,35절) 세례받는 것을 지칭한다(Atto). 일반적으로는 '~을 위하여'로 번역된 '휘페르'( )를 '~을 대신하여'로 해석하여 첫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대신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 옳은 것인지 효력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그런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바울은 그것을 실례로 세례란 부활을 소망하고 받는 것인데 부활이 없다면 그토록 세례는 받아 무엇하냐고 풍자적으로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부활의 상징인 세례를 받는다면, 그것도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하여서까지 세례를 받는다면 그 행위는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죽은 자를 대신해 세례를 받는 것은 좀더 후대에 케린투스파(Corinthians)나 말시온파(Marcionites) 등의 이단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이러한 사상이 어떻게 고린도 교회에 침투했으며, 또한 그것이 고린도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리고 바울이 이러한 사상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리 세례가 세례의 원리에 위배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이에 찬동했다고 볼 수는 없다. 바울은 아마도 당시 유행했을 가능성이 있는 대리 세례를 실례로 다만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의 모순을 지적하고자 한 듯하다.
15:30 때마다 위험을 무릎쓰리요. - 바울 일행은 복음 전파를 위해 말할 수 없는 고생과 수고와 위험을 겪었다(고전 4:9-13; 고후 4:10; 11:23-27).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부활이 없다면 미래의 소망이나 영광은 없기 때문이다.
15:31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전도를 통해 얻은 전도의 열매, 곧 성도들과 교회를 자랑스럽게 여겼다(고후 7:14). 특히 그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우상 문화가 범람하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된 고린도의 성도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단언하노니.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 )는 일종의 감탄사로 무엇을 선서하거나 증언할 때 쓰는 엄숙한 맹세의 용어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전도의 열매, 곧 고린도 교회를 놓고 앞으로 전개할 자신의 말이 틀림 없는 사실임을 엄숙하게 맹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드 혜메란 아포드네스코'( )는 직역하면 '나는 매일 죽음의 위험 가운데 있노라'이다. 즉 이 말은 30절의 '때마다 위험을 무릎쓰리요'를 더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극도로 생명이 위협받는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고 있고, 또 이처럼 그것을 고백하는 이유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부활을 믿기 때문에 그런 극한 위험의 삶을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15:32 범인처럼. - '범인'이라는 말의 헬라어 '카타 안드로폰'( )은 '평범한 사람', '일
반적인 사람'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죄성을 가진 보통 사람, 곧 명예나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 이 말은 만일 바울이 인간적인 동기와 목적으로 맹수와 싸웠다면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겠느냐 하는 의미이다. 실로 바울이 부활의 소망을 가진 채 하나님을 위해 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했다면 그의 고난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두 가지 의견이 있다. 하나는 이것을 문자적으로 보고 실제적으로 맹수와 싸웠다고 해석하는 것이며(Theodoret, Luther, Calvin, Lightfoot, Godet), 다른 하나는 맹수를 비유적으로 보아 짐승처럼 악하고 사나운 자들과 싸웠다로 해석하는 것이다(Chrysostom, Tertullian, Beza, Grotius, De Wette, Meyer. AHord, Findlay. Barclay, Hodge). 일반적으로는 후자의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 당시 로마 사회가 행하던 맹수 우리에 넣어지는 극형을 받았다고 추정하기에 무리가 있고, 사도행전에 그런 형벌을 받았다는 기록도 없으며, 에베소의 서기관이 바울에게 관대했다(행 19:35-41)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본절은 바울의 에베소 전도 사역 때의 은장색 소요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행 19:23-41). 아무튼 바울은 에베소에서건 어디에서건 맹수와 같은 자들에게 고통과 죽음의 위험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좌절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매진한 것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 본문은 70인역(LXX)의 사 22:13을 인용한 것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보상이 없는 일이라면 인간은 그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고로 정말 내일의 소망이 없다면 누구라도 오늘을 즐기고자 할 것이다. 바울도 거기에서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런 즐거움과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맹수와 싸우는 것은 내일의 소망이 있다는 역설적 증거이다. 따라서 부활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 있음에도 믿지 못하고 쾌락과 즐거움만을 좇는 것은 어리석고 패역한 행위이다.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 이 말은 아테네의 시인이요 극작가였던 메난더(Menander)의 희극 작품 '타이스'(Thais. B.C. 322년경)에 나오는 대사의 한 구절이다. 물론 학자들은 메난더 이전부터 이러한 격언조의 말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Findlay). 하여튼 바울은 이 말을 인용하여 전절의 '먹고 마시자'는 순간 쾌락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악한 동무'란 넓게는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을, 즙게는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미래의 소망이나 심판의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방탕하고 죄의식 없이 패역한다. 따라서 그들을 따르면 같이 악해지게 된다.
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 '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네프사테'( )는 '술 취함에서 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Chrysostom, Vincent). 즉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부활을 부인하고 방종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술 취해 환각 상태에 빠진 것에 비유한 것이다. 바울은 그 상태에서 깨어나 의를 행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의를 행하라'는 말은 '정당하게 행하라'는 말로 '죄를 짓지 말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결국 이 명령어들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행동하라는 말이다.
한편 '죄를 짓지 말라'는 현재 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꾸준히 계속해서 죄를 짓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 여기서 '알지 못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그노시안'( )인데, 이 낱말은 '뻔뻔한 무지'를 나타내는 고대 단어로 일반적인 무지를 나타내는 '아그노에우신'( )보다 그 의미가 강하다. 즉 이 단어는 무지를 자랑하는 파렴치함을 나타내 주는 용어이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 안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마치 하나님에 대해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으시대는 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바울은 그들을 지적하고 있다.
15:35-49 부활한 몸의 상태에 대한 답변
본장의 전반부(1-34절)에서 부활의 확실성과 부활 신앙의 중요성을 교훈한 바 있는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는 부활한 육체의 상태와 본질 및 현재의 인간의 육체와 부활한 육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설명해 주고 있다. 즉 바울은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의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만약 부활한다면 어떠한 몸의 상태를 지니게 되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파종의 비유와 대표 원리에 근거해 답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먼저 바울은 새로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각 식물의 씨앗들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가능하듯이, 인간의 육체의 부활도 죽음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
쳐야 함을 말한다(36절). 그리고 심기운 씨앗이 새로운 형태의 식물을 만들어 내듯이(37절)부활 이전의 육체의 상태와 이후의 상태는 분명히 다름을 답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 질서를 통하여 모든 피조물들에게 각기 다른 다양한 형체를 주셨듯이(30절) 부활할 때도 하나님께서 죽기 이전의 육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몸의 형체를 예비하여 주신다는 것이다(39-41절).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부활을 통하여 새릅게 변화될 육체의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현재의 육체와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현재의 육체는 색고 욕되며 약한 것이나, 부활 후의 육체는 영원히 색지 아니하며 영광스럽고 강하다는 것이다(42-44절).
이처럼 부활 이전의 육체의 상태와 부활한 육체는 뚜렷이 대조되고 있는데 바울은 이러한 차이를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아담이신 예수를 비교하여 또다시 논리적으로 설명해 준다. 그것은 첫 사람 아담이 근본적으로 육과 땅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피 후손인 우리가 썩어질 육에 속한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영과 하늘에 속하신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도 장차 영적인 몸으로 변화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흙에 속한 첫 사람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죽어서 썩어 없어질 육체를 가지고 있으나 장차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부활을 통해 생명의 상태로 회복되며 영적인 몸을 덧입게 된다는 것이다(45-47절).
이러한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질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사 화복(生死禍福)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고하지 말고 겸손히 행할 것이며. 또한 현재 눈앞에 닥친 근심과 걱정들을 무조건 절망으로 덮어 버릴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신앙을 겸비해야 한다(시 32: 10; 사 51:5).
② 성도는 현재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종래에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선택받은 백성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진정 지상에서의 삶만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적인 몸을 허락하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며 경건을 연습하는 영광된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딤전 4:7; 히 12:28).
15:35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 본절은 두 개의 질문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부활의 방법에 관한 질문이며, 다른 하나는 부활한 후의 상태에 관한 질문이다. 방법에 관한 첫 번째 질문의 '어떻게'(포스)라는 말에는 이미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부정과 회의의 사고가 내포되어 있다. 즉 이 질문은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놓고 하는 회의적 질문이다. 그리고 이 회의적 질문을 한 자는 인간이 도저히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자신의 확신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해 죽어서 썩어버릴 육체가 어떤 형태로 재생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더한다. 그러나 모든 것에 뛰어난 그리스도의 지혜를 소유한 바울은 이런 반대자의 반론적 질문에 굴하지 않고 다음 절 이하에서 멋진 답변을 해준다.
15:36 어리석은 자여. - 회의적 질문을 한 자들은 유별나게 지성적인 냄새를 풍기며 반론적 질문 공세를 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그들을 더 어리석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더불어 자연의 이치 속에서도 알 수 있는 부활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즉 반대론자들은 지식 있는 척했으나 크게는 참 지식이 있다는 것을 몰랐으며, 작게는 조그마한 자연의 이치 속에서 조차 나타나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 반대론자들의 어리석음을 나타내려는 듯 바울은 반대론자들의 첫번째 질문에 대해 하찮은 씨의 비유로 답변한다. 씨는 밭에 뿌려지면 죽어서 썩어야 새로운 싹을 배태시킨다(요 12:24). 이와 같이 인간도 죽음으로써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지극히 간단한 비유로 죽음 이 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가볍게 물리친다. 한편 헬라어 원문에는 본절에서 '너'가 강조되어 있는데, 이것은 네 자신이 그런 일을 하면서 그것도 모르느냐는 힐책인 동시에 38절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역사'와 대조시키는 역할을 한다(Meyer).
15:37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 바울의 비유는 점점 더 상식적인 것으로 가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릴 때 성장한 형태의 나무나 다른 식물을 심지 않고 작은 한 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뿌려진 씨앗은 썩어져 전혀 새로운 형태의 식물로 살아난다. 따라서 씨앗과 새로 살아난 식물은 서로 연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내용이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새로 살아난 식물은 씨앗의 형태보다 더욱 풍성하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 안의 인간도 죽음으로써 새롭고 이전보다 완전한 형태로 부활하는 것이다.
15: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 36,37절의 씨 뿌린 자인 '너'와 대조되고 있다. 씨를 뿌리는 자는 사람이지만 그 씨가 각각의 씨의 종류대로 형체를 가져, 그 종류대로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은 밀의 씨 속에는 밀의 형체를 넣어 놓으시고, 보리의 씨 속에는 보리의 형체를 넣어 놓으시사 씨 뿌리는 자가 종류대로 씨를 뿌리면 뿌린 씨에 따라 열매를 거두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있기 때문이다. 곧 죽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나는 가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해답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믿음의 씨를 우리 속에 뿌리면(사실은 성령께서 뿌리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뿌린 씨앗에 따라 부활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창조적 하나님께서 부활의 몸을 예비하고 주실 것이다.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사람‥‥짐승‥‥새‥‥물고기의 육체라. - 여기서 사람, 짐숭, 새, 물고기는 세상에 사는 육체를 가진 모든 생명체를 총칭한다. 즉 바울은 식물의 종류에서 나타난 각 종자의 다양성에서 이제 육체를 가진 모든 생명체의 육체의 다양성으로 논점을 확대시킨다. 바울이 이처럼 식물에서 사람과 동물로, 즉 하등 생물에서 고등 생물로 논점을 확대시키는 것은 고등 생물보다 더 높은 세계, 곧 영의 세계, 하늘의 세계의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15:40 하늘에 속한 형체‥‥땅에 속한 형체. - '땅에 속한 형체'는 의심할 여지없이 39절의 땅의 생명체들을 의미한다. '하늘에 속한 형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견들이 있다.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천사들을 지칭한다(Meyer, Alford, Stanley). ② 하늘의 성도들을 지칭한다(Chrysostom, Tertullian). ③ 41절의 해 ․ 달 ․ 별을 지칭한다(Calvin, Findlay, Hofmann, Vincent, Hodge). 이상의 세 견해 가운데 지금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세 번째 설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천체는 지구의 생명체보다 더 넓고 신비한 세계로 보다 광대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양 세계의 영광은 각기 다른 것이다.
15:41 해‥‥달‥‥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 여기서 '영광'은 단순히 빛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스스로 빛을 내는 해와 해의 빛을 받아 빛나는 별들의 빛의 세기가 다르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을 설명하면서 본절이 부활한 성도들이 받을 다양한 영광의 정도들을 설명한 것이라고 해석하며(Chrysostom, Estius), 혹자는 영광의 정도가 아니라 그저 부활의 다양성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Tertullian, Meyer). 이 두 견해 가운데 바울은 여기서 부활의 진정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므로 부활 이후의 문제인 전자의 견해보다 후자의 견해가 합당하다.
15:42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 본절부터 49절까지는 부활을 부인하는 어떤 자들의 두번째 질문(35절)에 대한 답변인데, 그 중 본절에서 44절까지는 부활하기 전의 상태와 부활한 후의 상태를 36절의 씨와 씨가 죽어 성장한 나무의 비유에 네 가지의 대조되는 것들을 적용시켜 설명하고 있다. 본절은 그 네 가지 중 첫번째 대조되는 것인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썩을 것이란 유기적 생명이 다해 죽으면 썩어 없어질 흙으로 된 인간의 육신을 가리키며(창 3:19), 썩지 아니할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하여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다시는 죽지 않는 새 퍼조체를 가리킨다. 성도는 죽어 없어질 자기 육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그것을 통해 새 생명인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하는 것이다(고후 5:17; 갈 2:20). 그러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지해야 할 것은 육체를 심어 영적인 부활의 몸을 입는다는 것이 육체의 고행이나 육신을 통한 그 어떤 무엇으로 부활에 이른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은 썩을 육체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의의 씨앗을 심어 썩지 아니할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15:43 욕된 것‥‥영광스러운 것. - 42절이 부활하기 전의 상태와 부활한 후의 상태의 내용을 대조한 것이라면, 본절은 그 상태의 가치를 대조한 것이다. 사람의 육체는 악의 노예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죄악성으로 인해 욕된 것이며, 부활한 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거룩성으로 인해 영광스러운 것이다.
약한 것‥‥강한 것. - 이것은 양자의 능력을 대조한 것이다. 죄 아래 놓여 있는 육체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의 종이며 시공 속에 갇혀 있고, 세상의 병마 따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연약하여 쓰러지기 쉽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입은 상태의 존재이기 때문에 만국을 다스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15:44 육의 몸‥‥영적인 몸. - 부활한 전후의 상태를 나타내는 이 네 번째 대조는 양자의 본질을 대조시키고 있다. '육의 몸'이란 아담의 죄된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 본래의 존재를 가리킨다. 반면 '영적인 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근거로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새롭게 창조하신 완전한 인간을 가리킨다. 전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욕된 것이요, 썩어질 것이요. 약한 것이며, 후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거룩 가운데 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이요, 썩지 아니할 것이요, 강한 것이다.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적인 몸이 있느니라. - 본문은 어떤 것이 있으면 그 반대되는 것도 있다는 변증법적인 논리로 부활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논점은 부활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자들이 제기한 질문(35절)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다.
15:45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 본절은 창 2:7을 근거로 한 말이다. 아담은 흙으로 지음을 받은 뒤 생기를 받아 생령이 되었다. 그 '생령'을 바울은 본절에서 '산 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산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 )는 44절의 '육의 몸'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키콘'( )과 동일한 어원을 가진 낱말로 '육적인 생명'을 의미한다. 본절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육체적 생명의 시조라는 것을 밝혀 주고 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첫'이라는 표현에 대조되어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전혀 다른 인물인 것을 나타내 주는 동시에,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살려 주는 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불완전한 생명의 시조가 된 아담과 달리 완전한 생명을 주는 메시야이심을 나타내 준다. 첫 사람 아담은 죽어 썩을 몸의 시조였지 만,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완전한 인간의 시조인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가 영적인 몸의 시조가 된 것이 부활을 통해서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20절).
15:46 그러나 먼저는‥‥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 영적인 몸이 참된 몸이고 완전한 존재라고 하여 그것이 불완전한 육체보다 순서적으로 앞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심에 있어 일련의 법칙을 두셨는데(Meyer, Hodgw, Farrar), 그 법칙이란 불완전한 육의 몸을 입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죄와 부활함을 입어 완전한 사람이 되는 일련의 과장이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어떤 철학자(Platon)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영적인 존재가 먼저 있고 현세의 불완전한 존재는 그 영적인 존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이원론적 세계 구조가 아니다. 즉 인간은 육의 몸을 근거로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지 육과는 아무 상관 없는 별종의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영적인 영적인 존재가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불완전한 존재가 썩어지고 거기서 그리스도를 힘입어 쥐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다시 나는 것이다.
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 '첫 사람'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지칭하며, '땅에서 났다'는 말은 땅, 곧 흙을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다(창 2:7). 또 '흙에 속했다'는 것은 흙으로 만들어 졌으므로 종국에는 흙으로 돌아간다(창 3:19)는 뜻이다. 따라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 영지주의자들은 본절을 근거로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신 분으로서 인성을 가지지 않았다는 가현설을 주장하였으며, 케노시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 나신 것만을 강조하여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나셨다는 본절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본절에 대한 이 양자의 시각은 온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본절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셨느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요 3:13)과, 재림주로서 오실 때에 하늘에서 오실 것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자로서 영원한 절대자이시다. 따라서 그가 어디서 나셨는가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리스도는 비록 썩을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지만 그 근본은 하나님께 있으며(Athanasius, Edwards, Vincent), 다시 오실 때에도 하늘에서 오실 것이다(Meyer, Godet).
15:48 무룻 흙에 속한 자는‥‥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 여기서 '흙에 속한 자'는 첫 사람 아담을, '흙에 속한 자들'은 아담의 후손을 가리킨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자'란 그리스도를, '하늘에 속한 자들'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무릇‥‥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는 육의 몸을 입고 있는 현재의 우리의 상태를 나타내고, '무룻‥‥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는 부활 후에 입게 될 영광된 몸의 상태를 나타낸다. 즉 현재 우리의 몸은 저 흙에 속한 아담과 같으나 장차 부활 때에는 저 하늘에 속한 주님의 부활의 몸과 같이 된다는 말이다.
15:49 우리가‥‥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아담의 형상을 입는다(창 5:3).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은 아담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부활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입게 된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즉 부활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부활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종말론 중 '부활의 증명 및 성질' 부분을 참조하라.
15:50-58 부활로 말미암는 성도의 궁극적 승리
바울은 본장 초두에서부터 다루기 시작한 부활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지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성도들이 누리게 될 부활의 영광과 궁극적인 승리를 장엄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정녕 주님께서 천군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세상에 재림하시면, 이미 죽은 성도들이 '생명의 부활'에 참예하여 다시는 썩지 아니할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고,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성도들은 '영생의 부활'에 참예하여 영적인 몸으로 순식간에 변화될 것이다(50-53절). 그렇게 되면 아담의 범죄 이래로 인류를 끊임없이 지배해 오던 사망의 권세가 더 이상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결국 성도들은 환전한 승리를 누릴 수 있게 된다(54-57절).
한편 바울은 성도들이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고 궁극적인 승리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여진히 죄악과 죽음의 고통에 직면할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58절). 물론 이러한 바울의 지적은 결코 성도들을 낙심 가운데로 이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견고한 믿음 가운데로 이끌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의 영광을 누리고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게 될 성도들이 현실적으로 불신자들과 별로 다를 것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말고 믿음과 소망 가운데 굳게 서서 도리어 주님의 일에 더욱 열심을 내면 반드시 자신의 수고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이자 바울의 논지의 핵심이다. 따라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은 성도들이 지니는 부활 신앙이란 그저 미래에 일어날 종말론적 사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매일 매일 직면하는 현재의 삶에 대한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올바른 부활 신앙의 소유자는 주님의 재림만 기다리면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자가 아니라, 그날을 대비하여 자신의 사명에 충성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마 24:44-46).
한편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성도들은 비록 현재는 썩은 육신에 속해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거룩하게 변화되어 영적인 몸을 덧입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아 영광스런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과 영광이 장차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이므로 성도들은 현재의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절망스럽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소망 중에 거함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②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사망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을 담당하심으로써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부활을 통해 사망의 모든 세력을 정복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사망으로부터 승리함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거깃 가르침에 미혹됨이 없이 늘 믿음을 견고히 지켜나가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부활에 대해 확고한 소망으로 인내하며 근신하는 자가 되어 늘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15:50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뭇하느니라. - '혈과 육'과 '하나님의 나라', '색은 것'과 '썩지 아니한 것'은 대립되는 두 개의 개념이다. 전자는 불완전한 것이요, 죄 아래 있는 것이며, 인간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완전한 것이요, 거룩한 것이며, 인간을 복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자와 후자는 양립하지 못한다. 더욱이 전자는 유한하며 스스로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오직 전자가 죽어서 썩어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할 때에만이 그것이 가능케 된다. 그렇다면 마지막 재림 때까지 살아 혈육을 입고 있는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다.
15:51 비밀. - 여기서 '비밀'이란 감추인 하나님의 계획으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드러내신 계시, 곧 장차 일어날 신비로운 섭리를 지칭한다(마 13:11; 롬 11:25; 고전 2:7; 4:1). 성도의 부활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이다.
다 잠잘 것이 아니요. - '잠잔다'는 것은 성도가 육체적 죽음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다. 6절 주석 참조. 따라서 본절은 풀이하면 '다 죽을 것이 아니요'라는 의미가 된다. 부활에 관한 하나의 비밀은 주께서 자기 백성을 일으켜 새 몸을 입히실 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지막 나팔. -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알리는 소리로서 최후의 순간이 다다랐음을 선포하는 역할을 한다(마 24:31; 계 8:2; 10:7).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 '순식간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토모'( )를 직역하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단 시간 안에'라는 의미이다. 성도의 부활은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부활은 짧은 시간 사이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본절에서 '다'라는 말은 이미 죽었던 자이든 주의 재림 때까지 살아 있는 자이든 어떤 자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입은 모든 자들을 총칭한다. 그러나 성도의 부활이 비록 장은 시간에 이루어질 동시적인 사건이라 해도 그 순서상에 있어서는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이 후에 변화된다는 것이 바울의 일관된 사상이다(52절; 살전 4:16,17).
15:52 죽은 자들이‥‥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본절은 부활을 논리적인 순서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본절은 부활의 논리적인 순서를 언급한 것일 뿐, 성도의 부활은 사실상 한 순간에 일어나기 때문에(51절) 시간적인 순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한편 바울은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를 양분하되 살아 있는 자 안에 자신을 포함시켜 마치 자기가 살아 있을 때에 주께서 재림하실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실제로 자기의 생전에 종말이 올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고전 7:26,29절 주석 참조.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생전에 주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영감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의 기대와 영감은 별개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 논리적인 순서에 의한 성도의 부활은 종국적으로 주의 재림의 때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이다.
15: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42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썩는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거의 같은 의미이나 전자는 육신의 죽음을, 후자는 전인격적인 죽음을 나타낸다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불가불'이라는 표현은 성도가 반드시 부활한다는 사실을 결론적으로 선언한다. 즉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성도의 부활은 불가항력적이고 필연적임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은 42,43절의 내용을 결론적으로 다시 언급한 것인데, 42,43절에서는 부활을 '다시 사는 것'으로 표현한 반면 본절에서는 '입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입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뒤사스다이'( )는 옷을 입는다는 의미로, 부활하는 성도는 헌옷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듯이 옛 몸을 벗어버리고 새 몸으로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이다.
15:54 이 썩을‥‥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 - '썩음'이나 '죽음'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발생되는 결과이다. 그리고 죄의 지배로 말미암아 그와 같이 멸망하는 것을 성경은 상징적으로 '사망'이라고 표현한다. 26절 주석 참조.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자기 백성을 썩을 것에서 썩지 않는 것으로, 죽을 것에서 죽지 않는 것으로 만드셨으니 사망은 결국 그 효력을 상실하며 멸절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망의 멸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되어 모든 성도들의 부활로 완성된다. 한편 '사망이‥‥삼킨 바 되리라'는 말은 바울이 사 25:8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부활의 절대성을 확신 있게 설명한 바울은 구약 호 13:14을 인용하면서 부활로 인해 멸망할 사망을 향해 승리의 개가를 부른다. 그것은 성도의 입장에서는 승리의 개가요 사망의 입장에서는 조롱과 모욕이다. 사망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권세를 휘두른 폭군이었으나, 그 절대 지배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멸망케 된 것이다. 따
라서 부활의 소망을 가진 모든 성도는 더 이상 사망을 두려워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한편 본절을 인용한 원문 호 13:14에는 앞의 사망이 '죽음'으로, 뒤의 사망이 '음부'(쉐올)로 되어 있으나 본절에는 앞뒤가 모두 사망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쏘는 것'(켄트론)은 행 26:14에서는 '가시채'로, 계 9:10에서는 전갈이나 황충의 독침으로 나타나듯이 이것은 사망이 가진 살해 능력이 강력함을 나타낸다.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 사망은 죄의 결과이다(창 2:17; 롬 5:12; 6:23). 사망은 오직 죄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자기 권세를 행사한다. 즉 죄가 없으면 사망은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며 인간에게 썩음과 죽음을 주지 못한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율법은 그 자체로는 선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중에는 선한 자가 없기 때문에 인간이 율법 앞에 서게 되면 모든 인간은 율법 앞에서 악한 자로 드러나게 된다. 롬 7:7-13 주석 참조. 이러한 이유로 선한 율법은 언제나 인간을 정죄 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죄는 항상 율법을 통해 인간을 정죄하고 인간을 지배한다(롬 3:20; 5:13; 7:8).
15:57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전절과 본절의 관계는 롬 7:24,25의 관계와 유사하다. 모든 인간은 죄의 지배 하에서 헤어날 수 없는 도저히 가망 없는 멸망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인간을 위해 죽게 하시고 부활케 하시사 죄인된 인간을 구속하심으로 율법의 정죄와 사망의 공포로부터 승리하게 하셨다. 따라서 바울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인간이 가장 감사해야 할 내용으로 보고 있으며(고전 2:2) 실제로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고귀한 것도 이 구원의 은혜보다 더 고귀하고 귀중한 것은 없다.
15:58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 바울은 부활에 관한 본장의 마지막 권면의 말을 함에 있어 고린도 교인들이 같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무리 문제가 많은 교회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에 있어서는 모두가 한 형제인 것이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 고린도 교회 내에는 신앙을 어지럼히고 흔드는 반부활론자들이 있었다(12,35절). 본절은 그러한 자들의 말로 인해 흔들리지 말고 신앙을 굳게 세우라는 의미이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 신앙을 굳게 지키면 주의 일에 힘쓰게 되고, 주의 일에 힘쓰게 되면 믿음이 점점 견고하게 된다. 즉 양자는 서로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어 어느 하나가 을라가면 나머지 하나도 상승하게 된다. 더욱이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우선 과제이다(마 6:33).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 부활은 반드시 있으므로(53절) 주를 위해 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안다'는 표현으로 확고하게 선언하고 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며, 그 때에 성도는 불가불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고, 거기서 각자는 자기의 수고한 대로 상급을 받는다(고전 3:8). 따라서 주 안에서 한 성도의 수고는 헛되지 않으며, 그러므로 오히려 이 수고는 항상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한편 '수고하다'에 대해서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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