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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성도의 대신(對神)관계와 성도의 신앙생활에 대한 결론적 권면 및 바람직한 부부 상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 및 변화된 성도의 개개인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실천적 교훈들을 주고 있는 본론 후반부 4:1-6:20까지의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하에 본장은 다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된다.
먼저 전반부 1-14절은 넓게는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일련의 교훈들을 기록한 4:17-5:1의 연속부분이다. 그리고 좁게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마땅히 요청되는 새 삶의 방법으로서 대인(對人) ․ 대신(對神)관계에 있어서의 성도의 태도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4:25-5:14에 기록된 일련 기사의 종결부분으로서 성도와 하나님간의 대신 관계에 있어서의 성도의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대할 때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대상(對象)인 성도들이 구원의 주체(主偉)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가져야 할 마땅한 삶의 자세로써 성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적합하며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하고 순결한 것이어야 한다(롬 12:1,2)는 것과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성도의 자세는 삶의 전 영역에서 실제적으로 실천해야 할 모든 윤리적 행위의 기초가 된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중반부 15-21절은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일련의 교훈들을 기록한 4:17-5:21의 종결 부분으로서 성도의 신앙생활에 관한 결론적 권면을 기록하고 있다. 즉 그 결론적 권면은 세월을 아껴 주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행하라는 것과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대할 때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즉 태초부터 세상 종말까지 이어지는 구속사(救讀吏)의 한 노정에서 우리 개개인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전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볼 때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개 성도들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짧은 시간은 우리 성도들에게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노정에서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귀중한 황금 같은 시간이다. 이 시간에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맡겨 주신 구속사적 사명을 완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는 촌음(寸陰)이라도 허비할만한 여유가 전혀 없다. 따라서 이 시간을 최대한 아껴서 우리 성도들은 매 순간마다 실존적인 종말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바 그 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파악하여 주께서 기뻐하시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에 의하여 구원받은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우리 성도들은 개개인이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수직적 관계를 힘씀과 동시에 동일한 구속사의 시대에 즈음하여 동일한 사명을 수행해야 할 교회의 지체로서의 성도와 성도간의 일치와 화목을 이루는 수평적 관계에 있어서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후반부 22-23절은 지금까지 4:17-5:21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일련의 교훈들을 준 것에 이어 보다 구체적으로 성도의 가정생활에 관한 교훈들을 제 시 하고 있는 5:22-6:9까지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으로서 성경적인 바른 부부관계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그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먼저 22-24절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대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해야 함을, 25-2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남편들도 그 아내를 사랑해야 함을, 그리고 29-33절에서는 부부관계에 대한 결론적인 교훈으로 그리스도와 교회가 머리와 그 몸의 지체들로 한 몸을 이루듯 부부도 한 몸으로서 남편은 자기 지체를 돌보듯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아내는 머리된 남편을 경외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5:22-6:9까지에서 기록하고 있는 성도의 가정생활과 관련된 교훈들 전체에 대하여 구속사적으로 개관할 때에 우리는 성도의 가정에 대한 구속사적 의의를 발견하게 된다. '가정'(Family)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의 원리에 따라 인생의 생활을 위한 여러 가지 기본 사회 제도를 허락하신 바 그 중에서 부부(夫婦)를 중심으로 혈연 관계자가 함께 살고 있는 가장 작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다. 인간은 가정을 통해서 태어나 존재하게 되며 또 가정을 중심으로 일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가정으로부터 인생에 가장 원초적으로 필요한 생명과 사랑과 양육과 보호를 공급받는다. 이러한 가정은 태초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중심으로 최초로 성립된 이후로부터 세상 끝날까지 이 땅에 존속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세대의 인간들은 이러한 가정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아담의 타락 이후 전 인류에게 미친 죄의 오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창조시대 허락하신 참다운 가정의 모습은 왜곡되게 되었고 온갖 비정상적인 가정의 양태가 인간 세계에 난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를 중심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이 서서히 회복되게 되었다. 때문에 성도들이 온전한 가정의 모습을 회복할 때에 그것은 먼저 성도들 자신의 가족들의 행복은 물론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참 가정의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선교의 효과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른 가정을 만들어가는 일은 필연적이라 하겠다.
이러한 맥락 하에 바람직한 성도의 부부상에 대해 제시하고 있는 본문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대할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즉 가정의 핵심은 부부(夫婦)이다. 가정에 질서와 조화가 있고 사랑이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부간에 질서와 사랑이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할 때만이 다른 가족들도 가정 안에서 참 행복을 느끼며 그 속에서 참 인생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 원리에 따라 부부간에 질서가 있게 하시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며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관계가 되도록 창조하신 것이다(창 2:18-15). 그런데 가정의 참다운 모습의 왜곡과 마찬가지로 창조 당시의 이러한 본래적인 부부관계도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왜곡되어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각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회복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델로서 교회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부부 관계도 복종과 사랑의 관계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는 가정의 질서와 평안 및 화목을 위해 필연적인 것이다.
외울 말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6,17)
구원받은 성도의 대 하나님 관계
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구원받은 성도의 생활에 대한 결론적 권면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리스도인 부부 관계에 대한 교훈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5장 본문&자료노트
원어연구-5:4, 희롱의 말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유트라펠리아'( )로 이는 형용사 '유트라펠로스'( )에서 유래한 말이다. '유트라펠로스'는 '좋은' (good), '잘'(well)이라는 뜻인 '유'()와 '돌다'(turn)라는 뜻인 '트레포'( )의 합성여로여 문자적인 의미는 '잘 도는'이다. 여기서 '신속히 준비된 , '재치 있는'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어 나왔다. 따라서 '유트라펠리아'는 머리가 잘 돌아가 상황에 맞게 던지는 말을 지칭하는 '익살', '농담'(pleasantry), '유모어'(humor)를 뜻한다.
그러나 이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저질스러운 농담', '천한 말', '상스러움'이라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본문에서는 이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책망한 것은 일상생활 가운데 활력을 주는 유우머가 아니라 상스러운 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자녀로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칫 소홀하여지기 쉬운 일상의 언어생활에 있어서조차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람의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안다면(약 3:1-12) 언어생활에 있어 우리 성도들의 혀의 절제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5장 강해주석
5:1-14 그리스도인의 대(對) 하나님 관계
5:15-21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생활에 대한 결론적 권면
5:22-33 그리스도인 부부 관계에 대한 교훈
5:1-14 그리스도인의 대(對) 하나님 관계
앞 단락(엡 4:5-32)에서 바울은 새사람의 생활의 보다 구체적인 적용으로써 수평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대 이웃 관계에 대해서 논한 바 있다. 이어 본문에서는 수직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대 하나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바울은 먼저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1절)는 말로써 그가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대 하나님 관계에 대한 전제를 삼고 있는데, 이는 본문 전체의 결론이라 해도 무방하다. 사실 성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일 것이다. 때문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본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본받는 생활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사랑 가운데 거하라는 것이다(2절).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우리의 대속물로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와 같이 성도들도 자기를 희생하여 하나님과 형제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성도들은 본질상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을 본받아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4:7-21).
둘째, 불순종한 죄인의 생활을 버리라는 것이다(3-7절). 즉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과 우상 숭배 등의 크고 작은 모든 죄악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눈에 잘 띄는 죄악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경계하지만 눈에 잘 안 띄는 작은 죄악에 대해서는 소홀하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더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특히 우상 숭배에 있어서도 우리는 표면적으로 나타난 우상을 섬기는 것만을 죄악시할 수 있는데 어느 것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관심을 두며 중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불순종한 죄인의 생활을 일삼아서는 안되며 이러한 죄악된 생활에서 돌이켜 성도된 자의 마땅히 행할 바인 성결의 생활을 해야 한다(롬 13:12-14; 빌 2:15). 그리고 이러한 세상을 사랑하며 육체의 소욕대로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그러한 자들에게 임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고후 5:10; 벧후 2:9; 3:7).
셋째, 어두움 대신 빛 가운데 사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8-14절). 구원받기 이전의 성도들은 행할 바를 몰라 어두움 가운데 헤매이던 자들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빛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어두움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로서 세상에 대하여 말과 행위로써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빛의 자녀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 맺는 생활(갈 5:22,23)은 성도의 책임이자 의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 '본받는 자'(미메테스)는 '흉내를 잘 내는 사람'(미모스)에서 유래된 말로 '모방자'의 뜻을 지닌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인간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었는데 (고전 4:16; 11:1), 본절에서만은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의 자녀가 되고 용서함을 받은 자로서 마치 어린아이가 그 부모를 모방하듯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모방하여 닮아가야 하는 것이다.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 하나님을 본받을 구체적인 내용이 사랑임을 밝히고 있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요 14:9,16). 그리스도께서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새 계명으로 주셨다. 한편 '행하라'(페리파테이테)는 현재 명령형으로 계속되는 반복의 뜻을 지닌다. 즉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계속해서 실천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 - '버리다'(파라디도미)는 '~에서부터'(파라)와 '주다'. '건네주다', '위탁하다', '제물로 바치다'(디도미)의 합성어로 '양도하다', '포기하다'의 뜻을 지닌다.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자의에 의한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 단어는 엡 4:19에서 이방인들에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방인들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는 것과 대조하여 성도는 그리스도와 같이 의와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함을 보여 준다.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구약의 제사 제도에 비유되고 있다. 여기서 '제물'(프로스포라)은 일반적인 제사의 통칭으로 주로 감사제를 가리키며, ‘생축’(뒤시아)은 짐승의 퍼를 뿌려 바치는 속죄제를 가리킨다. 따라서 '제물'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바치신 그의 전 생애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으며, '생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희생 자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Clarke, Westcott, Vincent).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 '음행'(포르네이아)은 '간음', '매음'의 뜻을 지니는 말로 결혼 관계 이외의 모든 불법적인 성관계를 가리킨다. 이러한 음행은 이교도들의 종교의식의 한 특징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죄를 음행에 비유하고 있기도 하다(렘 3:6-10). '더러운 것'(아카다르시아)은 '음행'의 불결한 성격을 묘사한 말이다. '탐욕'(플레오넥시아)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욕망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정관사 '에'( )와 함께 쓰여져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을 추구하는 정욕적인 욕심을 가리킨다(Westcott, Abbott, Salmond). 이 같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구절은 이방신들의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 것과 그들의 제사 방식에 대해서도 일체 말하지 말 것을 강조한 구약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 있다(출 23:13; 신 12:30; 시 16:4). 사도 바울의 이러한 명령은 풍요의 여신으로 간주되어 그를 숭배하는 데 보통 성적 향연이 자행되었던 헬라 여신 아데미(Diana)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던 에베소 지역의 성도들에게 매우 수준 높고 고상한 요구였다(Stott).
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 '누추함'(아이스크로테스)은 '천한', '속된'(아이스크로스)에서 유래된 말로 신약에서는 본절에만 나온다.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러운 행동 전반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Bengel. Meyer. Abbott) 본절의 문맥상 저급하고 속된 말을 의미한다고 봄이 타당하다(Harness, Westcott). '어리석은 말'(모롤로기아) 역시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말로, 아무 유익이나 가치가 없는 말이라는 의미 이상의 죄성을 띤 말을 가리킨다(Vincent). '희롱하는 말'(유트라펠리아)은 '좋은'(유)과 '들다'(트레포)의 합성어로 좋은 의미로는 '재치 있음', '재빨리 재치 있게 응답함' 등의 뜻을 갖고 있으나 저속한 의미로는 본절처럼 '상스러운 말', '독설'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 '감사하는 말'(유카리스티아)는 '좋은'(유)과 '은혜'(카리스)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이 단어를 '은혜를 끼치는 말'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Calvin, Meyer). 그러나 성경에서 이러한 용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말'로 해석함이 타당하다(Lincoln). 사실 그리스도인은 더럽고 추한 죄악된 말을 삼가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그 입술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인 것이다(골 2:7; 3:15).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 본구절의 헬라어 '투토 이스테 기노스콘테스'( )는 현재 직설법으로도 볼 수 있고 명령법으로도 볼 수 있다. 이를 명령법으로 해석하면 '이것을 진실로 확신하라'는 의미가 되고(NEB, RSV), 직설법으로 해석하면 '너희가 이것을 안다'(KJV, NIV, Foulkes, Bruce)가 된다. 어느 것을 취해도 무방하나 직설법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Robertson).
음행하는 자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 여기서 '우상 숭배자'가 '탐하는 자'에 게만 연결되느냐(Eadie, Salmond) 앞에 나온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를 포함하느냐(Harless, Stier, Meyer)가 문제가 된다. 골 3:5에 비춰 볼 때 전자의 의견이 타당성이 있으나, 음행하는 자, 더러운 자, 탐하는 자가 뚜렷이 구별된다기 보다는 성도와 대조되는 악한 자들의 더러운 속성을 표현한 것으로 볼 때 후자의 의견도 일면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한편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엔 테 바실레이아 투 크리스투 카이 데우)는 '하나님' 앞에 관사가 없으므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나라'로 해석하기도 하나(Bengel, Harness, Hodge), '그리스도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로 해석함이 자연스러운 해석이다(Meyer, Ellicott, Eadie),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는 신령하고 의로운 나라로서 모든 불의한 자들은 이곳에서 배척될 것임을 바울은 경고한 것이다.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 본절의 '누구든지'에 대하여는 ①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Barth, Milton), ② 불신 이방인들을 가리킨다는 견해(Meyer, Eadie), ③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는 견해(Lincoln), ④ 유대주의적 이단을 가리킨다는 견해(Grotius) 등이 있다. 본문에서 특정한 지칭이 없으므로 일반적인 거짓 가르침을 행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리고 '헛된 말'은 공허한 거짓말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대조되는 거짓 교훈을 가리킨다. 특히 본문에서는 육체의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심을 가지고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부정하여 사람들을 육체적 방종에 빠지게 하는 거짓된 이단사설을 가리킨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 '불순종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히브리적인 표현법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엡 2:2 주석 참조. 한편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요 3:36; 골 3:6; 계 19:15) 심판의 시기에 대하여 ① '임하나니'(에르케타이)가 현재형이므로 현세에 받는 심판이라는 의견(Calvin), ➁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있을 마지막 때의 심판이라는 의견(Meyer), ③ 현재와 미래의 심판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의견(Abbott, Barth) 등이 있다. 성도들의 구원의 문제가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질 때 역시 궁극적으로는 미래일 것이나 그것은 이미 나타난 사실이기 때문에 ③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보겠다. 즉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이제 시작되어 심판의 마지막 날에 가서는 절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롬 1:18; 엡 4:17-19).
5: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 3절부터 시작된 권면의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여기서 '함께 참예하는 자'(쉼메토코스)는 '함께'(쉰)와 '동참자'(메토코스)의 합성어로 신약에서는 본서에만 나온다. '참예'의 대상에 대하여는 ① '죄'를 가리킨다는 견해(Eadie), ② 심판을 가리킨다는 견해(Koppe, Abbott), ③ 두 가지를 동시에 가리킨다는 견해(Stier, Westcott)가 있다. ①과 ②의 견해가 필연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③의 견해로 봄이 좋겠다. 즉 바울은 비록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표하는 자라 할지라도 불신자들의 악행에 협동하여 범죄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들이 당할 진노의 심판에도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심각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경고는 구원의 확신이 단순히 지적 동의나 감정적인 동감의 차원이 아닌 행함의 열매가 있는 전인격적인 차원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임을 교훈해 준다(약 2:26).
5:8 바울은 1-7절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태도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는 제목 하에 권 면하였다. 이제 8-14절에서는 '빛 가운데서 행하라'는 제목 하에 권면하고 있다. 전자에 있어서는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묘사된 반면, 후자에서는 '빛의 자녀'로 묘사되고 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 '전에'와 '이제'를 대조하여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신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빛'은 죄악 세상과 대조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5)고 증거하며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과 거룩하심 그리고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계시인 진리를 빛으로 상징하고 있다(시 43:3; 딤전 6:16), 하여튼 에베소 성도들은 과거에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불신앙의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흑암의 권세를 쥐고 있는 사탄의 추종자들이었다(엡 2:1,2). 그러한 그들이 이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췸을 받아 어둠의 권세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가 된 것이다(롬 13:12; 고후 4:6; 골 1:13).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에베소 성도들을 '빛의 자녀'라고 규정한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 빛의 자녀들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구속 받은 성도들의 본질적인 신분의 변화된 상태에 대한 직설법적 표현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수행하라는 명령법적 권면은 성도들의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성과 그에 따르는 인간의 책임과 의무와의 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속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결단하고 힘씀으로 비로소 구원의 역사가 온전히 이루어짐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 '빛의 열매'는 '빛'과 '열매'라는 두 개의 비유가 결합되어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행실을 의미하고 있다. 후기 사본들에는 '빛'대신 '성령'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갈 5:22). 여기서 '착함'(아가도쉬네)은 일반적 의미의 도덕적 선을 가리킨다. 또 '의로움'(디카이오쉬네)은 도덕적 악을 버린 정직과 성실한 태도를 가리키며, '진실함'(알레데이아)은 허위와 외식에 반대되는 도덕적 진실을 의미한다. 이상의 세 가지 는 빛이신 하나님께서 자녀들과 공유하시는 신적 속성으로 어두움의 열매(엡 4:31)와 대조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당연히 나타나야 할 행함의 열매들이다.
5: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보라. - '시험하여 보라'(도키마존테스)는 '분별하다', '입증하다', '중명하다'의 뜻으로 실험을 통해 무엇을 실증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성도들이 행함에 있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성도들이 이처럼 자신의 발걸음을 맞추어 나가야할 기준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발걸음을 맞추어 나가는 삶이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산제사요 영적 예배인 것이다(롬 12: 1,2).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 여기서 '어두움의 일'은 '악한 일'(골 1:21), '육체의 일'(갈 5:19), '죽음의 일'(히 6:1)로서 열매가 없는 사망에 이르는 길이다(롬 6:21). 한편 바울은 7절에서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는 소극적인 권면을 한데 이어 본절에서는 '책망하라'는 적극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그런데 '책망하다'(엘렝코)는 원래 '망신시키다', '부끄럽게 만들다'의 의미를 지녔다. 따라서 여기서의 의미는 성도들이 말로만 어두움의 일을 책망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된 성결하고 거룩한 빛으로 행함으로 그들의 죄를 들춰내어 부끄럽게 만들라는 뜻이다. 이러한 바울의 권면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즉 성도들의 빛된 삶은 죄인들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여 부끄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빛으로 들어오게 하는 전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5: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 본절의 초두에 '왜냐하면'(가르)이라는 전치사가 있어 앞절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어둠의 일들의 속성으로 그러한 일들이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더럽고 가증한 일들이므로 책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5: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 성도들이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한 빛의 삶을 삶으로 어둠의 일들을 책망하여야 할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세상에 빛된 삶으로 세상의 어두움을 밝게 비추어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은밀한 일들을 세상에 밝히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빛을 비추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그 속에 숨기웠던 모든 악한 일들이 밝히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 '나타나지는'(파네루메논)의 형태를 중간태로 보아서 본구절을 '나타내는 자는 빛이 라'로 해석하는 견해(Calvin, Grotius, Abbott)와 수동태로 보아 본 구절을 '나타냄을 받는 자는 빛이 된다'로 해석하는 견해(Bengel, Ellicgtt, AHord)가 있다. 문맥상 후설이 좋으나 전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후설을 취하면 본절은 성도들이 빛을 비춰 어두움의 일들을 책망한 결과로, 빛을 비췸을 당한 자들이 회개하여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아온다는 뜻이다. 한 사람의 빛이 어두움을 비춰 그 속의 것들을 드러나게 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을 빛으로 만드는 것이다(Foulkes) .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 '이르시기를'(레게이)은 보통 다른 구절을 인용할 때 쓰이는 말이다. 본절은 구약의 사 26:19; 60:1 등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초대 교회 당시 세례식 흑은 부활절에 부르던 찬송시를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Bruce, Weod).
잠자는 자여 깨어서. - '잠자는 자'는 아담 안에 죽은 자, 즉 하나님과 분리 되어 영성이 죽고 어두움에 속하여 도덕적 감각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받기 전의 모든 사람의 상태이다. 그리고 '깨어서'(에게이레)는 영적인 부활, 즉 회심을 뜻하고 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 '잠자는 자'와 '죽은 자들', '깨어서'와 '일어나라'는 대구법적 표현으로 그 의미가 보다 강화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어두움을 이기시고 그 속에 있는 죄인들을 생명의 빛으로 옮기시는 구속 사역을 묘사한 것이다(요 1:9). 한편 본절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변화하는 인간의 삶의 변화가 인간 스스로의 능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5:15-21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생활에 대한 결론적 권면
바울은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4:17-24), 그리스도인의 대 이웃 관계(4 25-32), 그리스도인의 대 하나님 관계(5:1-14)에 대해 논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된 성도들의 개인적 생활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훈하였다. 이어 본문에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생활에 대한 결론적 권면을 함으로써 실천적 권면의 두 번째 사항(4:17-5:21)을 종결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권면의 요지는 혼탁한 세상에서 지혜 있는 자의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지혜 있는 자의 생활은 ① 시간을 규모 있게 사용하고(16절) ➁ 주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에 맞게 살며(17절) ➂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라(18절)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세상을 향하여는 절제된 삶을, 하나님을 향하여는 역동적인 삶을 살라는 참경건의 요청이라 하겠다. 각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해당 주석을 참조하라.
5:I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 '주의하다'(블레포)의 문자적 의미는 '보다'의 뜻으로, 여기서는 '주의 깊게 살피다'의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행하다'(페리파테오)는 '걸어 다니다', '살아가다'. '따라다니다'의 뜻을 지닌다. 그러므로 본구절은 '너희가 어떻게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지를 주의 깊게 살피라'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 바울은 본절에서 '지혜 없는 자'와 '지혜 있는 자'를 대조시켜 앞에서의 '어두움'과 '빛'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지혜 없는 자'(아소포이)는 부정접두어 '아'( )와 '지혜로운', '현명한'을 의미하는 '소포스'( )의 합성어로 '어리석은 자'를 뜻한다. 빛은 순결함의 상징일 뿐 아니라 지혜의 상징이기도하다.
5:16 세월을 아끼라. - '세월'(카이로스)은 단순히 일반적 의미의 시간을 의미하기 보다는 '기회', '적절한 기간'의 뜻을 지닌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특별한 기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아끼다'(엑사고라조)는 문자적으로 '그로부터 사들이다'의 뜻을 지니며 갈 3:13; 4:5에서 이 단어는 '속량하다'의 의미로 쓰였다. 여기서는 '다 사버리다'의 의미로 보아 '세월을 최대한 이용하라'(RSV)로 해석할 수 있다.
때가 악하니라. - 세월을 아껴야 하는 이유는 시간이 양적으로 짧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현 세대가 질적으로 악한 시대이기 때문이다(Eadie, Salmond). 즉 지혜로운 자는 악한 시대 속에서 살면서도 그 악한 시대 속에 흘러가지 않고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악을 대항하고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선한 일을 위해 바쳐도 모자라는 짧은 생애를 악을 행함으로 허비하는 것은 지혜 없는 자들인 것이다.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 '어리석은 자'(아프로네스)는 15절에서 언급한 '지혜 없는 자'(아소포이) 보다 더 강한 뜻으로 기본적인 지혜의 부족함을 넘어 도덕적으로 우둔함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이해하다'(쉬니에미)는 문자적으로 '같이 놓다'의 뜻으로, 비유적으로는 '깨닫다', '지혜 있다'(고후 10:12)의 뜻으로 쓰인다. 즉 이해하려면 지혜가 있어야 하고 자기의 생각을 그 대상과 같이 놓을 때 비로소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결국 바울은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확신 아래 성도들에게 주의 뜻에 자기의 뜻을 맞추어 지혜로운 자로서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본절과 10절의 말씀은 롬 12:2의 말씀에서 종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 '방탕'(아소티아)은 문자적으로 '저축하지 않음', '낭비'의 뜻으로 윤리적인 면에서의 '부도덕'과 '허랑방탕한 생활'(눅 15:13)을 의미하는 말로 이교도들의 윤리상태를 잘 표현하는 말이다(Trench), 특별히 에베소에서는 신전 제사에서 술에 취하여 춤을 추었고 술 취함이 자랑거리로 여겨졌었다고 한다. 바울은 이러한 사회 문화적 배경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교도들과 같이 술 취함의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지혜로운 자로서의 절제되고 경건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충만을 받으라'(플레루스데)는 현재 수동명령형이다. 여기서 현재시제는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단회적인 것이 아니고 연속적으로 늘 받아야 할 것임을 나타낸다. 즉 성령의 인 치심(엡 1:13)은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성령의 충만은 계속적으로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다(행 4:8,31; 6:3:5; 9:17). 또한 수동태는 성령 충만케 하는 주체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 명령형은 비록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지만 성도들은 성령 충만을 갈망하고 하나님께 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한편 바울은 '술 취함' 과 '성령 충만'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는 두 가지가 외관상 유사성을 보이기도 하면서 본질적으로 대조되기 때문이다. 술 취한 사람이 술의 힘에 자신을 내맡기고 행동하듯이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힘을 의지하여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술 취함은 무절제와 방탕을 가져오고 성령 충만은 절제와 거룩한 행실을 낳는 것으로 대조된다.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 바울은 여기서 술 취한 자들의 떠들썩함과 성령 충만한 자들의 신령한 노래로 인한 온전한 기쁨을 대조하고 있다(Robertson). '시'(프살모이스)는 구약의 시편과 시 형태의 새로운 노래들을 의미한다(눅
1:46-55,68-79; 2:29-32). '찬미'(휨노이스)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기 위해 지은 노래이다. '신령한 노래'(오다이스 프뉴마티카이스)는 성령의 영감으로 만들어 진 노래로 일반적인 성가(聖歌)를 가리킨다. 한편 '서로 화답하며'는 초대 교회의 공 예배시 서로 나뉘어 교창하던 것을 묘사한 것이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그 대상이 하나님이신 찬양은 형식적인 것이 아닌 성도들의 심령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범사에 감사하라'는 권고는 바울 서신에서 자주 나타난다(골 3:15-17; 살전 5:18). 사실 성령 충만한 생활의 특징은 찬미와 더불어 감사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 '범사'에 대하여서는 ① '모든 축복'으로 제한하는 견해(Meyer, Abbott, Salmond)와 ➁ '모든 길흉'을 포함한다는 견해 (Chrysostom. Jerome, Eadie)가 있는데 ②의 의견이 유력하다. 왜냐하면 성도의 모든 고난도 결국엔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행 16:25; 빌 1:12-1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본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 오듯이 성도들의 감사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려짐을 보여 준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모든 일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이다.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 본절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의 견해가 있다. 즉 ① 본절을 뒷절들과 연결시켜 22-33절의 서론으로 보는 견해(Meyer, Olshausen), ② 본절을 독립구로 보는 견해(Calvin, Koppe), ③ 앞절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Lenski, Hendriksen) 등이 있다. 내용상으로 볼 때는 22절에 연결된다고 보는 ①의 견해가 타당성을 지니나, '복종하라'(휘포탓소메노이)는 말이 앞절들에서 언급된 '화답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 , '감사하며'와 함께 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③의 견해가 문법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본절을 앞절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③의 견해가 보편적이다.
5:22-33 그리스도인 부부 관계에 대한 교훈
지금까지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입고 새 사람이 된 성도들의 일반적 윤리로서의 교회 생활 및 개인 생활에 대하여 논하였다(엡 4:1-5:21). 이어 본문에서부터 엡 6:9까지에서는 가정생활이라는 좀 더 특수한 의미의 윤리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부부 관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하여 논하고 있다. 이런 부부 관계에 대한 권면은 먼저 아내들에게. 다음으로 남편들에게, 그리고 공동적으로 주어졌다.
이러한 권면의 세부 내용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아내들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22-24절).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아내들도 그 머리되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이미 고린도전서에서도 밝힌 바 있는 창조의 원리이다(고전 11:3). 물론 여기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도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다 같이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된 동등한 인격체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지배 논리가 성립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고전 11장 자료노트. '남녀의 상호관계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참조하라. 바울은 다만 여기서 창조의 질서적 측면에서 남편의 권위에 순복하되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자발적인 복종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남편들에게는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25-30절).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신 무조건적인 헌신적인 희생적 사랑이다.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면 아내는 응당 남편 자신의 몸이 분명하다. 따라서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임을 알고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사랑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남편과 아내 양자에게 결론적인 권면을 하고 있는데(31-33절). 여기서 바울은 창 2:24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교회가 뗄레야 뗄 수 없는 신비한 연합 관계에 있듯 남편과 아내도 신비한 연합을 이뤄 한 몸이 되었음을 강조하고 남편과 아내로 하여금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여 서로 존경하고 사랑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는, 부부는 협력함으로 온전한 한 몸을 이룸을 알고 존경과 사랑으로 부부 관계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 헬라어 원문에는 '복종하라'라는 단어가 없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앞절(21절)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바울은 '피차 복종하라'는 성도간의 일반 원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부부의 관계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입장에서 볼 때 남편에 대한 복종은 의무이다(고전 11:3; 골 3:18). 물론 여기서의 복종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신분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오히려 남성과 여성이 주 안에서 평등하다고 증거하고 있다(갈 3:28). 다만 바울은 창조의 질서에 입각하여(고전 11:2-16) 가정의 질서와 통일성을 위해서 아내는 남편을 가정의 대표로서 인정하여 존경하고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는 고전 11장 자료노트, '남여의 상호 관계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5:23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인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머 리가 되므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에 대해서는 고전 11:3 주석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 여기서 '그'에 대해서는 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견해(Calvin, Westcott)와 ➁ 남편을 가리킨다는 견해(Calvin, De Wette)가 있는데, ①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구주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모두 오직 '그리스도'일 뿐 누구에게도 그리스도 외의 인간이 구주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 앞절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비유한 바울은 이제 본절에서는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이란 말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이 하나님의 세우신 질서에 대한 자발적이고 순종적인 신앙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 강제적인 힘에 의하지 않고 감사와 믿음으로 하듯이 아내도 남편에게 복종함이 신뢰와 존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 22-24절에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취할 태도를 언급한 바울은 이제 본절에서부터 30절까지에서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취할 태도를 언급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 '사랑하다'(아가파오)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로, 전적으로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즉 교회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제물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주심 같이 남편들은 아내에 대하여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물로 씻어'와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는 동일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의미하는 말로 말씀으로 중생하여 영혼의 죄를 깨끗하게 씻는 것과 그것을 외적인 상징으로 나타내는 물세례를 함께 기록한 것이다(Calvin). '물로 씻어'(토 루트로 투 휘다토스)는 문자적으로 '물의 목욕탕에서'로 세례식을 나타낼 때 쓰였던 단어이다(딛 3:5). 즉 바울은 그리스도에 그의 피로 교회를 성결케 하신 사실을 신부가 결혼식 전에 몸을 깨끗이 씻는 사실에 비유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거룩하게 하시고'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목적으로 예수께서는 이것을 자신의 열망과 기도로 나타내신 바 있다(요 17:17-19).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 '세우다'(파리스테미)는 '~곁에','~함께'를 의미하는 '파라'( )와 '서게하다', '놓다', '임명하다'를 의미하는 '히스테미'( )의 합성어로 '옆에 놓다', '바치다', '준비하다'의 뜻을 지닌다. 여기서는 '스스로'(헤 아우토)란 말과 같이 쓰여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교회를 자신에게 바친다'는 문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엔 독손)은 눅 7:25에서 화려한 옷과 관련하여 사용된 적이 있는 단어이다. 바울은 신랑이 아름답게 단장한 신부를 자기 앞에 세우는 것을 연상하며(고후 11:2)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구속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이 성취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아 재림의 때라고 하기도 하고(Meyer, Barth, Bruce, Wood) 현재적인 사건으로 보기도 하나(Lincoln, Schlier)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와 진행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현재와 미래를 다 포함하는 사건으로 봄이 좋겠다.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하심이라. - 신부가 완벽하게 단장하고 신랑 앞에 서듯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완전케 하시어 구원하시려 하심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이미 창세 전부터 세워졌음을 증거하고 있다(엡 1:4). 이러한 교회의 성화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시작하여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속에 진행되어지며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다.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 바울은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 역시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교훈의 요지이다. 이러한 바울의 권면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아내에 대한 남편의 자세에 적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 바울은 창 2:24의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라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사상적 배경으로 하여 아내 사랑이 곧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임을 교훈한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하여 아내와 남편이 한 몸임을 진술한 것은 타락으로 깨어 졌던 창조 질서 속에서의 부부 관계가(창 3:12)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구속 질서 속에서 다시 회복되었음을 암시 한다.
5: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 헬라어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가르)이라는 말이 있어서 본절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설명한 것임을 보여 준다. 즉 바울은 사람이 자기 몸을 아끼고 보살피듯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인 교회를 사랑하시고 돌보심을 언급하여 남편들도 자신의 몸인 아내를 사랑하고 돌보아야 함이 마땅함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이 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어 자신에게 연합시키며 깊고도 확고한 결합을 통해서 우리를 자신의 부분으로 만드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그 누구도 나눌 수 없다. 그와 같이 남편은 자기의 생명과 육체의 한 부분이 되어 뗄래야 뗄 수 없는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것이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 질서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길인 것이다(골 3:19; 벧전 3:7).
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 창 2:24의 인용으로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결혼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합하다'(프로스콜라오)는 '~로 향하여', '~에서부터'를 의미하는 '프로스'( )와 '아교로 붙이다', '합치다'를 의미하는 '콜라오'( )의 합성어로서 '꼭 붙이다','-에 집착하다'의 뜻을 지닌다. 여기서는 남녀가 합법적인 성적 결합을 통해 결코 분리될래야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을 이룬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전 6:16; Bruce, Wood).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 '비밀'(뮈스테리온)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예정으로 전에는 감추어져 있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이다. 본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통일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되고 그리스도와 교회가 연합되는 구원론과 교회론을 연결시키는 웅대한 하나님의 뜻을 큰 비밀로 소개하고 있다(엡 1:9; 3:3,4,9; 6:19), 특히 본절에서는 창 2:24의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속에 세우신 창조 원리를 비유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며 그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임을 밝히고 있다. 이 비밀은 구약 성경에서 이미 간접적이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 관계 에 비유함으로 나타나고 있고(사 54:5; 렘 3:14,20; 호 2:16), 예수께서도 성도를 신부에,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심으로 나타내셨다(마 25:11; 막 2:19,20).
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 '그러나'(플렌)는 반의(反意) 접속사이지만 본절에서는 '좌우지간', ‘이제' 등의 뜻으로 쓰였다. 바울은 아내와 남편간의 사랑과 순종의 자세를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큰 비밀을 교훈한 후에 다시 실천적인 권면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앞에서는 '사랑'과 '복종'이라는 말로 시작했으나 결론 부분에서는 '사랑'과 '경외'로 바뀌었다. '경외하다'(포베오)는 문자적으로 '두려워하다'는 뜻을 지닌다. 사랑이 공포와 공존할 수는 없으나(요일 4:18) 남편에 대한 아내의 깊고 강한 사랑은 '경외'와 '존경'으로 나타나는 '두려움'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두려움을 기초로 한 사랑과 존경은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자세(21절), 부모에 대한 자녀의 자세(레 19:3), 통치자에 대한 신하의 자세(수 4;14; 잠 24:21),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벧전 2:18)에도 요구되어지는 기독교 윤리이다. 또한 남편과 부모와 통치자와 주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사랑하심 같이 상대를 사랑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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