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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성도의 합당한 삶에 대한 교훈 및 그리스도 재림과 죽은 성도의 부활에 관한 교훈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본론 전반부에(1:2-3:13) 이어지는 본론 후반부의(4:1-5:24) 일련 기사이다. 본론 전반부에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한 과거에 대한 회고를(2:1-12) 바탕으로 현재 그들의 신앙에 대한 감사의 내용을 주로 다룸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시점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본론 후반부는 현재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삶이 어떠해야 함을 밝힌데 이어(4:1-12)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이란(4:13-5:11) 미래에 되어질 일을 바탕으로 현재 그들이 지향해야 할 성결한 삶에 대한(5:12-24) 내용을 주로 다룸으로써 현재일과 더불어 미래와 현재의 시점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한편 이러한 특성을 지니는 본론 후반부를 시작함에 있어 본장 전반부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방 교회로서 비록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가지고 있었으나 헬라 문화권에서 보편적이었던 성적 타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점을 염두에 두고, 실제 생활에 있어서 성결할 것에 대한 교훈과 더불어 기독교의 미덕인 형제 사랑과 근면에 대한 권면을 줌으로써 모범적인 성도의 생활을 교훈하고 있다(1-12절). 또한 본장 후반부는(13-18절) 다음 장 전반부(5:1-11)와 더불어 본서의 중심 주제인 종말의 문제를 다루는데 후자가 재림의 시기를 중심하여 언급하는 반면 전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에 이어지는 성도의 부활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이런 문맥 하에 있는 본장 각 부분의 구속사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반부 1-12절은 구속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령으로 거듭남(重生)을 체험한 사람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변화됨을 입어야 함을 교훈한다. 육에 속한 자는 육적 생활을 하여 썩어질 육적 열매를 맺게 될 것이나(갈 5:18-21) 영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를 닮는 성결한 생활을 함으로써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갈 5:22,
23). 이처럼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나타난 행실을 보고 그가 영에 속한 자인지 육에 속한 자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마 7:16-20). 따라서 성도는 성령에 속한 자답게 스스로의 몸을 성결의 도구로 삼음으로써 덕을 세워야 한다.
후반부 13-18절은 구속사가 완료되는 시점에 제 2위 성자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서 재림하실 것과 이때 이미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여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됨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이 재림의 모든 비밀을 다 말해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대로(요 14:3)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이는 구속의 성취를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구유에서 태어나신 초림과는 달리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발하는 가운데 가시적(可視的)이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구속의 완성을 위하여 임할 것임을 보여 준다.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은 자나 살아있는 자 모두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여 그리스도로부터 위로함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 역시 명백하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처럼 우리의 대장되시는 그리스도의 승리로 구속사가 마감되며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는 이러한 재림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현재 당하는 고난을 능히 극복하는 영적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장 17절에 나오는 휴거(Rapture)에 대하여는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성결한 삶에 대한 권면
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형제 사랑에 대한 권면
9 ○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근면한 삶에 대한 권면
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재림과 성도의 부활
13 ○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본문 & 자료노트
원어연구-4:11, 힘쓰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필로티메오마이'( )로서, '필로스'( )와 '티매'( )의 합성어인 '필로티모스'( )에서 유래하였다. 먼저 '필로스'는 '사랑하다'(마 10:37), '갈망하다'(마 23:7) 등의 뜻을 가진 '펼레오'( )에서 파생된 명사로 '사랑', '열정'이란 뜻을 가진다. 그리고 '티메'( )는 가격(price, 마 27:9), '가치'(value)라는 뜻과 큰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것들을 의미하는 '귀중함'(벧전 2:7), '값비싼'(계 18:19) 등의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 어떤 인격체가 귀중하게 여겨지고, 높이 평가된다는 의미에서 은유적으로 '존경'(마 15:8), '영예'(히 2:7), '경의'(롬 2:10) 등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필로티모스'는 문자적으로는 '영예에 대한 열망을 가지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에서 파생한 본문의 '필로티메오마이'도 문자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다'(롬 15:20). '열심히 노력하다'(고후 5:9)라는 뜻이 파생되어 나왔다. 그런데 이 단어는 주로 악이 아닌 선을 행하려는 열심을 다한다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쓰였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필로티메오마이'는 스스로 영예를 얻기 위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뜻을 가진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일상적인 일을 소홀히 할 뿐만 아니라 아예 자기 직업을 버리고 마냥 주의 재림만 기다리는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이 있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의 일상의 일들에도 최선을 다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영예를 얻도록 하라는 권면을 본문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용어 - 4:14-17 휴거(Rapturee)
1. 용어의 정의
'휴거'(17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르파게소메다'( )로서 문자적으로는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을 가리킨다(행 8:39; 고후 12:2,4). 이 헬라어가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끌어올려'로, 영역 성경들에서는 'caught up'으로, 라틴어 성경에서는 동일한 뜻의 랍투레'(Rapture)로 번역되어 있다. 이처럼 이 단어는 주의 재림 때에 살아있는 성도들이 공중으로 들림을 받아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 일에 부수(分數)를 넘어서 형제를 사용되었고 이를 한자어로 '끌어 데리고 간다'는 뜻의 '휴거'(携擧)로 표현한 것이다.
2. 휴거의 시기 논쟁
휴거의 시기에 관한 직접적이며 정확한 언급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이에 학자들 간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있을 7년 대환난을 기점으로 하여 휴거시기에 관한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주장되고 있다.
① 환난 전 휴거설(Pre-tribulation View): 이는 성도가 지상에 임하는 7년 대환난을 겪지 않고 휴거한다는 견해로서 주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의 견해 중 하나다.
② 환난 중 휴거설(Mid-tribulation View): 이것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의 견해 중 하나로서 7년 대환난을 전 3년반, 후 3년 반으로 나누어 그 중간 시기에 휴거가 있다는 견해이다.
이들은 실제적인 대환난은 후 3년반 기간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성도가 환난을 겪지 않고 휴거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①의 견해와 일치한다.
③ 환난 후 휴거설(Post-tribulation View): 이는 대환난 기간 동안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가 환난이 끝나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으며 이때 성도의 휴거가 있다는 견해이다. 이는 비록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다르지만 무천년설 주의자들이나 역사적 전천년설주의 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견해이다.
3. 의의
사실 휴거가 어떠한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어느 시기에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은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으므로 규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께서 반드시 재림하신다는 사실과 주를 믿는 성도들만이 재림하시는 주를 기쁘게 영접하게 될 것이며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휴거와 관련된 성경 구절을 볼 때 우리
성도들은 과연 주의 재림을 맞이할 신앙의 준비가 올바로 갖추어져 있는지 돌아보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도표 - 4:13-18 예수의 초림과 재림 비교
초 림 | 구유에 누이심(눅 2:7) |
속죄양으로 오심(계 5:12-14) | |
낮고 가난함(마 8:20) | |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으심(막 9:12) | |
사단의 시험을 받으심(마 4:1-11) | |
대적에게 죽임을 당함(마 27:45-50) | |
이세상의 미움을 받으심(요 15:18) | |
재 림 | 구름을 타고 오심(마 24:30) |
만왕의 왕으로 오심(계 19:16) | |
큰 권능을 가지심(막 13:26) | |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심(살후 1:10) | |
사단을 무저갱에 가두심(계 20:2,30 | |
대적들에게 승리하심(골 2:15) | |
온 세상을 무릎 꿇게 하심(빌 2:10) |
4:1-12 성결과 근면한 생활에 대한 교훈
지금까지 본서 본론의 전반부에서(1:2-3:13)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바울은 이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실제적 교훈을 주는 본서 본론의 후반부를(4:1-5:24) 시작하고 있다. 먼저 본문에서는 저들의 계속적인 신앙 성장을 위해 도덕적 신앙적 권면의 말을 들려준다.
실제로 당시 여러 교회들에서는 이방 우상 숭배와 관련한 종교적 타락 현상과 더불어 도덕적 ․ 성적 타락 현상이 범람하고 있었다. 즉 성도라고는 하나 과거 그들이 침잠했던 구습(舊習)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계속 타락한 생활을 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에서 개인적으로 성결한 생활과(1-8절) 형제 사랑에 대한 권면(9,10절). 그리고 근면한 생활에 대한 권면을 줌으로써(11,12절) 모범적인 성도의 생활을 교훈하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는 마땅히 우리를 거룩케 하시려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7,8절) 스스로 자제함으로써(롬 6:12) 자신의 몸을 성결케 하여야 한다(롬 6:19). 이것이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는 성도의 바람직한 삶이다.
②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임과 동시에 또한 형제를 사랑하는 자이다(9절).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요 15:12).
③ 영적인 일을 도모하는 자는 이 땅의 일에도 충실해야하며 게으르지 말고 근면해야 한다(11절). 즉 노동은 하나님의 명령이며(창 3:19) 고귀한 것이므로(시 128:2) 성도들도 마땅히 노동을 함으로 근면한 생활을 통해 사람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
4: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 ‘종말로’는 헬라어로는 '로이폰 운'( )으로 표기되는 접속사로서 문장의 초두에 사용되어 내용의 전환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를 한글 번역의 문자적인 뜻으로 풀이하여 종말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물론 본서의 주제 자체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계된 교훈이라는 종말적 테마로 일관되어 있지만 본절에서 이 단어는 '그래서', '끝으로'(KJV, Furthermore~; NIV, Finally~)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 본서는 전 ․ 후반으로 나뉘어 전반부(1-3장)는 과거에 대한 감사로 후반부(4,5장)는 미래에 대한 교훈으로 구성되어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극심한 환난과 곤궁, 핍박을 잘 이겨내어 믿음의 견고함을 보여주었으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는 바람직한 식견을 지니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들 중 다수는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생활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교도들 특히 헬라 문화권에 거주하는 민족들은 도덕적 타락과 성적 문란함을 그 특징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무질서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데살로니가 도시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개종한 이방인들, 즉 기독교인이 된 이방인들 중에는 비록 회개했다 할지라도 아직 구시대의 습성을 청산하지 못하고 그러한 생활에 빠져 사는 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먼저 이러한 문제를 거론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결단성 있는 행동과 적극적인 실천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받았으니'란 말은 '배웠으니'란 의미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마땅히 행할 바를 바울에게 배웠고 바울의 가르침대로 일정 정도 신앙의 진보를 보이고 있었지만(살전 1:6-10) 여기서는 더욱 많이 힘쓸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딤전 4장 자료노트 '성결된 삶의 8대 지침'을 참조하라.
4:2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기억을 되살려 바울의 교훈이 스스로 창안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가르침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바울이 교회에 명령한 것은 주 예수께 로부터 (RSV, ~ through the Lord Jesus; Luther, durch den Herrn Jesum) 받은 것이요, 주 예수의 요구로 말미암아 교회에 전해줄 것임을(고전 11:23)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명령의 권위를 강조할 뿐 아니라(롬 15:30; 고전 1:10) 그 권위의 기원을 그리스도께 둠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속히 그 명령을 듣고 죄의 모습을 청산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다음절부터는 그 가르침의 실례가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 이는 이하에 나오는 여러 실질적 교훈의 근거를 밝히는 것으로서 성도들이 반드시 그 교훈들을 따라야 할 필연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너희의 거룩함. - 거룩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속성임과 동시에 구약에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요구되어진 생활의 대강령이었다(레 19:2). 이 낱말은 신약에서는 주로 바울에 의해서 그의 서신에 종종 인용되었는데(살전 4:3,4,7; 살후 2:13) 그 주된 용례는 본절과 마찬가지로 성도의 성결한 생활을 강조하는데 있었다. 살전 3:13 주석 참조. 즉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성도들이 필히 걸어 가야할 과정이며 점차 완성시켜 나가야 될 것으로 이를 신학적으로는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한다. 한편 성화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 다음에 오는 단계이고 '성화' 다음에는 '영화'(榮化, glorification)의 단계에 들어간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 세 가지는 구원론의 근간을 형성하는 중심테마인데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칭의는 이미 성취된 사실을, 성화는 현재도 계속 추구하는 과정을, 하나님의 자녀로 영화로움을 획득하는 영화는 미래의 소망을 말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교리 '구원론'을 보다 참조하라. 그러나 본절에서는 '거룩함'의 의미가 다소간 제한적으로 사용되어(롬 6:22; 고전 1:30) 성도들의 도덕적이고 성적인 순결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1절 주해 참조) 이방인 교회들이 일면 그들 주위에 범람하였던 이교도적인 성적 문란함을 그대로 용인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음란을 버리고. -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제일 먼저 생활 가운데서 추구할 것으로 촉구한 것은 음란한 성적 생활을 타파하는 일이었다. 바울이 본서를 기록한 장소인 '고린도'라는 도시는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부에 위치한 향락 도시였다. 그곳에는 특히 여신(女神) 아프로디테(Aphrodite)의 신전이 있었고 1,000여명의 신전 창녀가 있어 종교 행위의 하나로 매음(賣淫)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밖에도 헬라 지역 각지에서는 무질서한 성범죄, 부패, 난교(亂交) 등이 성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고대 헬라인들이 향락을 지고의 가치로 추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창녀는 향락을 위해, 정부(情婦)는 육체를 위해, 아내는 자식을 위해'라는(Demosthenes의 기록)말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교도들의 이러한 관습에 대해서 유대인 교회 공동체들은 규정을 제정, 그들의 성적 문란을 제한하는 조처를 취했으나(행 15:29) 이방인 개종자들 즉, 기독교인이 된 이방인들이 어느 만큼이나 성적인 순결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가는 매우 불확실하다. 또한 그들 사이에서도 이교도들 간에 성행하던 타락한 모습들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만한 근거를 발견할 수도 없다. 실제로 그들은 음행을 방관했을 뿐 아니라 호의적으로 수용했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Ellicott, Lightfoot). 그러므로 이러한 무질서한 생활 태도가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지적의 대상이 안될 수 없었던 것이다.
4: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 - 선행 절에서 부정적 어조로 말한 것이 본절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긍정의 분위기로 바뀐다. 따라서 선행절과 관련하여 본문을 문맥적으로 풀이하면 '음란을 버리고 각자 자기 아내와 바른 관계를 가지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본절에서 '아내'로 번역된 헬라어 '스큐오스'( )의 번역을 둘러싸고 논쟁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이 낱말이 본래 '그릇', '기구'의 뜻을 지니는데(막 11:16) 그 적용 범위가 '사람', '몸'(행 9:15; 롬 9:22) 등까지 확대된다고 보는데 있다. 즉 먼저 변론의 시발이된 견해는 이 낱말을 '몸'으로 파악하고, '취한다'로 번역된 헬라어 '크타스다이'( )를 '지배한다'라고 해석하여(Chrysostom, Calvin, Bengel) 본문을 각각 음행을 피하고 자신의 몸을 거룩하게 다스릴 줄 알라는 의미로 풀이하였다. 그러나 본문을 개역 성경과 같이 번역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인데 그 근거는 ① '스큐오스'란 낱말이 그릇이나(계 2: 27) 비유적 의미에서의 '아내'로 사용된 경우는 있으나(벧전 3:7) 성경 가운데서 '몸'의 뜻으로 사용된 경우는 없다. ② 헬라어 '크타오마이'( )는 '지배함'보다 '취함'으로 풀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③ 문맥상 '몸'보다는 '아내'로 풀이해야 더 자연스럽다. ④ 고전 7:2의 증거, 즉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아내'로 해석해야 옳다는 등의 입장이 있다(Augustine, Aquinas, AHord, Ellicott, Bailey).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이 두 가지 견해는 서로 타당성이 있고 그것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비중도 매우 무겁기에 경솔하게 어느 한편을 지지하기는 곤란하다. 첫째 주장은 '스큐오스'( )를 '몸'으로 풀이 하는데 문제가 따르고, 둘째 주장은 여성을 남성의 음행방지용 도구로 격하시키는 것은 남성 본위사상이며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이 아니냐는 강한 문제를 촉발시키는 우려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첫째 주장은 '몸'을 '영혼'과 '육체'가 통일된 입장에서, 즉 인간을 전체적인 관점으로 파악했다는 장점을 가지며 후자의 주장은 비교적 전후문맥에 매우 충실했다는 장점을 가지기도 한다. 이렇게 두 주장이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에 양자택일은 유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래서인지 공동번역 성경은 '각각 존경하는 마음으로 거룩하게 자기 아내의 몸을 대하고'라는 식의 다소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4: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 ‘이방인’은 구약시대에는 할례를 시행하지 않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의 반열에 들지 아니한 자들을 이방인이라 일컬었는데 반해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들을 무시하고(롬 1:18-32) 하나님을 부정하며 그 뜻대로 살지 아니하는 모든 자들을 이방인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비록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자는 참 유대인이요(빌 3:3)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출생했으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은 참 이스라엘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마 3:9), 따라서 본절에서 '이방인'은 혈통적 이방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색욕을 추구하는 영적인 이방인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 본문은 일반적으로 해석하면 윤리적으로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는 행동을 하지 말도록 권고하는 구절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분수를 넘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바이네인'( )은 '들어가다'라는 동사 '바이노'( )와 '넘어', '초과하여'라는 전치사 '휘페르'( )가 합성된 형태(욥 9:11; 미 7:18)로서 일반적으로 소유관계에 있어서 타인의 소유를 탐내는 것, 탐욕 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런데 본절에 있어서는 바울이 문장 초두에 말한 '이 일'에 대한 해석에 따라 본문의 해석이 달라진다. 즉 '이 일'에 대해 ① 지금까지 거론된 음란의 문제로써 자신의 몸을 거룩하게 다스리고 각각 자기의 아내를 취해야지 타인의 아내를 탐함으로 인해 형제를 해쳐서는 안된다(Chrysostom, Bengel, Ellicott)로 보아야 할지, ② 현재까지 언급된 문제와는 달리 일반적인 상거래에 있어서 타인의 재물을 탈취, 착취해서는 안된다(Calvin, Bibellius, Meyer)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 엇갈린 주장이 내세워졌다. 그러나 문맥상 강조되고 있는 어조에 근거해 볼 때 '이 일'이 사업상의 거래를 말한다기보다는 지금까지 계속 언급해 오던 바와 같이 '성적인 문란함'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 장래에 주께서 인간들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상은(고전 3:10-17) 성도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보수자로서(KJV, ~the Lord is the avenger) 모든 인간의 불의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보응하신다(신 32:35; 히 13:4). 이런 사상은 구약 성경에서 흔히 발견될 뿐 아니라 바울에게서도 발견된다(롬 12:19). 즉 하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악을 미워하시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불의'와 '악행'을 징벌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장차 인간의 모든 불의에 대하여 징벌하시며 데살로니가 교인 중 음란에 젖어 있는 자들에 대하여도 반드시 상관하실 것인데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그 날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일 젓이다(요 5:22; 고후 5:10). 이에 대해서는 계 20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 성도들이 마땅히 성결해야 하는 이유는 종말적 심판에 대비하는 것 외에 성도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그 부르심 자체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성도들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시기에 그들을 초청하신 것이다. 한편 본절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철저히 수동적이고 수용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가적으로 알 수 있다. 즉 인간을 택하시고, 택하신 인간을 부르시는 행위의 주체자는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해 있으며,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도들은 성결한 삶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 그리스도인의 삶의 소극적 지향점과 적극적 지향점이 언급되어 있다. 즉 성도는 성적 부정을 비롯하여 도덕적 더러움에서 떠나야 하며 더 적극적으로는 거룩함을 추구하여야 한다. 여기서 '거룩케 하심'은 원어적으로는 '거룩함 안에'라는 의미인데 진실로 성도는 거룩함 옆이나 가까이 접근하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머무는 삶을 살아야 한다.
4: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 바울에 의해 주어진 성(性)에 관한 권면을 경솔히 여겨 이를 저버리는 자들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결과에 빠지게 된다는 심각한 경고의 내용이다. 사실 성적으로 극히 문란했던 당시 문화풍토에서 본다면 성적인 순결을 주장하는 바울의 논리는 자칫 낯설고 무가치한 소리로 취급될 소지가 충분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의 교훈의 원천을 하나님께로 소급시키고 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의 교훈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는 것은 본장 1절 이하부터 본절까지의 주된 흐름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자신이 주었던 교훈의 권위를 확립한다는 의도도 있겠지만 하나님과 성도들의 특별한 관계, 곧 영적으로 아버지와 자식으로서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결과라고 생각된다. 즉, 바울은 단순히 외면적 행동의 정결만을 요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정결함이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성도간의 인격적인 교제의 회복이라는 테마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바울이 하나님을 '성령을 주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더욱 확연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마음에 성령을 주실 뿐 아니라(겔 36:27; 요 15:26) 그 속에서 같이 활동하신다(겔 37:14; 요 14:16,17).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부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특권을 가지는 한편, 그에 따르는 책임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성도들과 긴밀하게 관계하시지만(갈 4:6; 엡 3:16)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기피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 본절을 통하여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성결한 행동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답하고 올바른 교제를 회복하도록 자기의 교훈의 진원지를 하나님께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신 30장 자료 노트,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자세' 참조.
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라델피아스'( )는 '사랑', '우정'(필리아)과 '형제'(아델포스)의 합성어로서 '형제로서의 사랑'을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은 성도는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와 영적으로 형제이고 이들에 대해 사랑의 의무를 가진 자이다.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 이는 앞에서 언급한 성적 성결에 대한 교훈이나(3-8절) 이어 나오는 근면에 대한 교훈과는(11,12절) 달리 형제 사랑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의해 이미 매우 잘 준수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 교훈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형제 사랑이 너무나 중요한 기독교의 기본 덕목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디다크토이'( )는 성경에서 단 1회만 사용된 특수한 용어이다. 그러나 이 말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직접 데살로니가 교회에 사랑을 가르치셨다는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선행 절에서와 같이 바울이 자기의 교훈의 권위를 하나님께 소급한 경우이거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을(요 13:34) 그들이 배웠으리라는 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일반적인 의미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신앙적으로 잘 배우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요 14:17; 고전 2:13; 요일 2:27).
4: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형제 사랑은 온 마게도냐 지방에 확대되는 파급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역의 수도요, 데살로니가 교회도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진실된 사랑의 행동들이 마게도냐에 있는 다른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유익한 모범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성경에는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에 대해 빌립보, 베뢰아, 데살로니가 등 세 개의 교회만 언급되어 있는데 실라, 누가, 디모데 등의 사역자들이 이곳에서 활약한 것과 Lightfoot에 의한 적어도 2-3개의 교회가 더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토대로 해보면 상당수의 교회가 있었을 것(행 16:9-17:34)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위해 자기 몸을 희생시키기까지 사랑을 주셨다. 따라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랑을 알고 있었지만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4: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이미 맡은 바 직무에 근실하게 임할 것을 교훈한 바가 있음을 보여 준다. 노동은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에 대해 누차 강조했을 것이다. 창 3:19 주석 참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 3절 이하에서 '음란'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9절 이하에서는 '형제 사랑'이란 주제로 바뀌었다가 본절부터는 다시 '근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왜 갑자기 바울이 '노동'을 강조했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견고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본을 보였던 데살로니가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아직 성적인 문란함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몰지각, 몰이해로 인하여 질서와 평정을 잃고 무절제한 방종, 무위도식에 빠진 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당시의 배경 하에서 이 구절은 열심은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마땅히 걸어야 할 바른 길에서 이탈해 있는 신자들에게, 그들이 절제해야 한다는 것과 노동을 통해서 안정되고 바른 삶을 유지하여야 함을 권고하는 목적으로 기록이 된 것이다. 한편 바울은 사도로서 노동을 하지 않아도 공궤 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천막을 만드는 노동을 하여(행 18:3; 20:33-35)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맡은 바 생업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교훈에 힘을 더하고 있다. 한편 손으로 일한다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수공업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는데(Alford, Findlay) 이는 당시 상황과 기술 수준을 고려해볼 때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4: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이는'(히나)이란 접속사로 시작하여, 전절에 나오는바 바울이 성도들에게 노동을 권유하게 된 까닭이 설명되고 있다. 비록 성도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진리를 자기 생활에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고 방만하게 생활을 하면 결국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기의 역할과 직무를 수행하여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본이 되는 자세를 견지해야만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으며 또한 노동을 통해 물질적으로도 부족하지 않을 뿐더러(~ye may have lack of nothing, Alford) 그 누구에게도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 태도(RSV, ~ be dependent on nobody, Ellicott)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하여 일상생업을 중단하고 남에게 의지하며 무위도식하는 무리들이 당대에 사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바울의 엄중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이런 폐단이 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본서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더욱 강경한 어조로 이런 문제에 대하여 그들에게 경고하게 된다(살후 3:11,12). 한편 '외인'은 본래 유대민족이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는데(Josephus) 바울은 그 의미를 구원받은 신자의 입장에서 구원의 도리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는 불신자를 지칭하는 말로 대치하여 사용했다(고전 5:12,13; 딤전 3:7).
4:13-18 재림과 성도의 부활에 대한 교훈
앞부분에서 성도의 도덕적 삶에 대해 논했던(4:1-12) 바울은 이제 본서의 중심 주제인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때에 일어날 이미 죽은 성도의 부활에 대해서 설명한다. 초대 교회 성도, 특히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있어서 종말의 문제는 큰 관심사였기에 바울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하여 단편적인 정보를 준 바 있지만(1:3,10; 2:12,19; 3:13) 여기서보다 포괄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바울이 이러한 교훈을 준 배경에는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 사이에 이미 죽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살아 있는 성도들처럼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여러 논란이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죽은 성도의 부활이 있으며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에 참여할 것이므로 죽은 성도를 위해 근심할 필요가 없음을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재림의 소망 가운데서 살아야 함을 교훈 받을 수 있다. 즉 인간의 삶은 현세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미래가 약속되어 있는 바, 현세의 삶이 비록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주께서 약속하신 면류관을 바라보며(벧전 5:4)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 선행절까지는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윤리적 태도에 대한 교훈이 개진되었는데 비해 본절에 접어들면서는 주제가 '종말'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본서의 중심 주제가 그리스도의 재림사상이고, 바울이 앞서서 수차례 종말에 관해서 언급하기도 했지만(살전 1:3,10; 2:12,19; 3:13), 본절 이하에서 5:11까지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역사적 종말에 있을 일들이 보다 조직적으로 명료하게 거론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사상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처럼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 이유는 바울이 전해준 종말사상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데 있었다. 즉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핍박으로 데살로니가를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행 17:1-10), 그런 과정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심도 있는 강론을 할 수가 없었으며 그로 인해 잘못된 재림관을 갖게된 성도들이 생겨나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특히 혼동한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미 죽은 자들은 구원에 참여할 수 없고 오직 당시에 살아 있는 자들만이 영생(永生)을 얻는다는 점에 있었다. 또한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은 재림 때에 부활하지 못한다던지(Chrysostom) 생존해 있는 성도들이 참여하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지(Ellicott, Frame)에 대해서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잔다고 표현한 것은 신 ․ 구약에 공히 나타나는데(창 47:30; 신 31:16; 마 27:52; 고전 15 :18) 아마도 이러한 표현은 미래의 부활을 전제하고 예고하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Augustine, Calvin, Ellicott, Frame)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는 자'라고 지명된 자들이 실제로 데살로니가 성도 가운데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일반적으로 죽은 자들을 통칭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본서에서 이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지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 있을 동안 교인들 중 몇 사람이 죽게 되었고 그래서 교인들이 그런 문제로 서로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보다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여기서 '소망 없는 다른 이'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 생각하는 불신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불신자들이 행하는 것처럼 죽은 고인(故人)에 대해 맹목적으로 슬픔을 가질 이유가 없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사상이 헬라 철학의 주를 이루었고 그 영향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미쳤을 것이나 바울은 믿는 자들은 죽음 저편에 대하여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역설하였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누가 죽으면 그와 일시적으로 이별하며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해 슬퍼할 수는 있지만(빌 2:27) 불신자들 같은 절망적인 슬픔을 가져서는 아니될 것이다(Augustine, Chrysostom). 이처럼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낙담해서는 안될 보다 자세한 이유가 다음 구절에서 명백히 제시되고 있다.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 죽은 성도들이 다시 부활하게 된다는 근거가 명백히 제시되었다. 즉 성도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죽음과 역사적 부활 사건은 곧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곧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의 죽음이요 그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함께 참여한 성도들의 부활이기 때문이다(롬 6:3-11; 고전 15:20). 부활을 어리석은 신앙이라고 조롱했던 헬라인들을 향해 바울은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이라고 하는 불변의 진리로써 부활의 확실성을 변증하고 있는 것이다(고전 15:1-19). 그랜드 종합 교리 '종말론'을 참조하라.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이 구절은 크게 두 가지 문제에 있어 해석상 난이하다. 첫째는 '예수 안에서'가 '자는 자'에 걸리는가 아니면, '데리고 오시리라'에 걸리는가 하는 것이요, 둘째는 '데리고 오시리라'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첫째 문제에 있어서 '예수 안에서'라는 문구가 '자는 자'를 수식하는가(KJV, ~ even so them also which sleep in Jesus will God bring with him, Calvin, Luther, Bengel) 아니면 '데리고 오시리라'는 문구를 이어주는가(RSV, ~ even so, through Jesus, Ged will bring with him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De Wette, Moflat) 하는 것에 대하여는 학자들의 견해가 양분되며 문법적으로 양자 모두 가능하다. 하지만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전자의 뜻으로 보는 것이 보다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현재 논하고자 하는 요점이 죽은 자의 부활 문제이므로 이미 믿다가 예수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해야 보다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둘째로 '데리고 오시리라'가 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함께 오신다는 것인지(Ellicott, Dewette), ② 영원하신 생명에 인도한다는 것인지(Vos, Gloag)하는 문제이다. 이것 역시 후자의 의미가 전혀 배제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전자의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문맥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일치된다고 생각된다. 즉 본절은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완전히 참여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죽음에 대하여 더 이상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이미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었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함께 부활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사실도 마땅히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 예수께서 죽은 자의 부활과 그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설명하는 것과 같은 내용의 말씀을 했다는 기록이 복음서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명으로 해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① 복음서에는 누락되었지만 구전 전승으로 보존된 그리스도의 말씀일 것이다(Calvin, Frame, Bailey). ② 바울은 계시를 많이 받았는데 이 역시 그가 예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계시 내용(고전 15:51; 갈 1:12)의 하나일 것이다(Chrysostom, Ellicott) ③ 복음서에 나타난 일련의 예언 문구들을 (마 24:31; 요 6:39) 바울이 임의적으로 종합하여 해석한 것이다. 그중 첫째 주장은 복음서 기록자들이 이렇게 신학적으로 중요하고 심도 있는 테마를 누락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 이로 볼 때 '주의 말씀'을 바울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특별하고 독특한 계시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각되어진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 이 표현을 통해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주의 재림 때까지 생존해 있을 것이요, 자기의 죽음 전에 반드시 재림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또한 이러한 견해를 취할 때 바울이 예수의 재림 시기에 대해 착각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Calvin, Alford, Frame). 그러나 이러한 주장보다는 '우리'란 일인칭 복수의 표현을 오히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생존해 있을 그 누군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바울은 주의 재림이 가까왔다는 것을 늘 강조했고 또 종말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었지만(롬 13:11; 고전 16:22), 재림의 시기가 언제이다라는 식의 언급은 절대적으로 피하고 있었으므로(고전 15:51-58; 살후 2:1-12) '우리'란 표현을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반드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생존해 있는 성도들을 지칭하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다(Bengel, Ellicott, Chrysostom).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논리대로 '우리 살아남아 있는'이란 구절을 예수 재림 때 생존해 있을 믿는 자들의 총체를 지칭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럽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자기의 생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기를 소망했다는 사실까지도 거부해서는 아니된다(고후 5:1,2; 딤후 4:6; 빌 1:23).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시기를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초대 교회 시대에 무르익던 종말적 분위기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까지 자기가 생존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개인적인 소망을 피력하기도 했기 때문이다(롬 13:11; 딤전 6:14; 딛 2:11-13). 생각컨대 바울은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는 성도들의 일반적이고 표준적 자세를 간접적으로 교훈하였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즉 풀어 말하자면 자신의 삶의 진행 자체를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이라는 주제와 긴밀하게 관련시켜 파악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종말적 분위기를 견지하였기 때문에 현실의 삶, 곧 선교사역에 더욱 긴박감 있게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여겨진다. 눅 17장 연구자료, '다가오는 종말과 성도의 현실 생활 자세' 참조. 즉 '우리'라는 1인칭 복수 인칭대명사를 '바울 자신의 동시대인'으로 간주하든 '모든 시대 성도들의 총칭'으로 생각하든 양자 모두 가능한 이론들이며 후자가 문맥에 보다 부합된다고 생각되나, 다만 전자(前者)의 견해를 취할 때 성도들이 지향해야 하는 바 종말적 삶의 태도를 더 강조하는 것이 된다고 볼 수도 있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 '결단코'(우메)는 매우 강력한 부정의 뜻을 내포한다. 즉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이미 죽은 신앙인들도 영생(永生)을 경험하는데 있어서는 살아서 주의 재림을 맞는 신앙인에 비해 조금의 차별도 없을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 하시리니. - 죽은 자의 부활 시점을 그리스도의 재림 시로 들고 있다. 한편 여기서 '주께서'(아우토스 호 퀴리오스)는 문자적으로는 '그 주 자신께서' (the Lord himself)란 뜻으로서 재림의 주체가 그리스도임이 극히 강조된 표현이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 주께서 재림하시는 장면과 관련된 존엄한 광경이 세 가지로 묘사되었는데 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청각적인 효과를 동반하는 것으로 기술되었다. 혹자는 이 세 가지 표현이 동일한 현상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기도 하나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므로 그 의미를 하나하나 점검할 필요가 있다. 먼저 '호령'이라 하면 '명령'을 연상하게 되는데 말이나 사냥개 혹은 군대의 상관이 부하에게 내리는 긴급한 명령 등의 뜻을 함축한다. 재림 시에 내려지는 이 호령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고 또 누가 호령을 발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을 깨우시기 위해서 내리시는 호령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한편 이 호령과 함께 천사장의 소리가 발해 지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천사장은 유 1:9이나 계 12:7에 천사장으로 등장하고 유대인에 의해 수호천사로 여겨졌던 '미가엘'(Michael)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은 7천사장이 있어 자신들을 보호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미가엘은 가브리엘(Gabriel, 단 8:16; 눅 1:19), 라파엘(Raphael, Tobit 12:16), 우리엘(Uriel, ll Esd 4:1), 라구엘(Raguel), 사리엘(Sariel), 예레미엘(jeremiel) 등과 더불어 그 가운데 한 천사이다. 한편 예수께서도 그의 재림 시에 천사들을 동반할 것임을 예고하셨는데(마 24:31) 본절도 이와 사상을 같이 한다. 여기서 천사장의 소리 역시 재림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나팔이 울릴 것인데 이 나팔은 하나님이 부시는 나팔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팔로서 아마도 천사가 불지 않나 추측된다(시 47:5; 슥 9:14), 구약시대에 백성들을 모으고 출전할 때 나팔을 불곤 하였는데(출 19:13), 재림시에 울리는 나팔도 사탄에 대한 승리의 선포임과 동시에 '호령'과 함께 '죽은 자들을 깨우며 ' 택하신 백성들을 영광과 생명으로 부르는 역할을 할 것이다(마 24:31). 이처럼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 나팔소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성도들은 종말적 소망을 견지하면서도 종말적 표징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낱말, 단어 하나하나에 풍유적 의미를 부여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된다. 다만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극히 영광스럽게 이루어지는 것만큼은 분명하므로 이를 소망하며 경성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 주의 재림 시에 가장 먼저 이미 죽은 신자들이 부활하여 이에 참여하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장차 어떻게 되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던 데살로니가 형제들이 갈급하게 고대하던 대답이라 생각된다. 즉 '믿다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에서 밀려나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참여자로 영광스러운 경험을 하게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성도 역시 영광스러운 주의 재림을 영접하는 자가 된다는 이 구절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평소 가졌던 의문에 답을 주고 자칫 절망해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질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종말론'을 보다 참조하라.
4: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한 후에 당시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공중으로 끌려 올려지게 될 것이다. 또한 살아있는 성도들은 육체의 변화를 받아 부활한 성도들과 하나가 될 것이다(고전 15:35-52).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과 생존한 자의 올려짐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적 격차가 있는지는 본문의 표현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단지 본문에 '그 후'라고만 표현되어 있는 부사구가 시간의 전후관계를 나타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건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 다음에 재림 시 생존해 있던 성도들이 천사들의 도움으로 갑자기 공중으로 끌어올려질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끌어올린다'는 동사 '하르파게소메다'( )는 '갑자기, 그리고 강제로 끌어당기다'라는 의미를 갖는데 이 용어의 라틴어 번역 '라프투스'(raptus)가 현대 영어의 '납치'(rapture)의 어원이 되었다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성도들은 갑자기 들림을 받아(이것이 우리말로는 '공중 들림', '휴거' 등으로 표현되는데) 공중에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단 7:13; 마 24:30). 본장 자료노트, '휴거' 참조. 한편 '영접'이라는 헬라어 '아판테신'( )은 어떤 도시에 오는 손님을 미리 나가 환영한 다음 자기네 마을로 데리고 온다는 뜻 즉, 수행하다는 뜻을 가진다. 따라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던 자들도 휴거하여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만일 문자적 의미의 '영접'에 충실한다면 공중에서 성도들을 만난 그리스도는 그들과 함께 다시 지상에 내려와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지상 재림이 없이 성도들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 입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과연 지상에 도달하는가(Petterson) 아니면 공중 재림으로 끝나는가(Thomas, Gloag) 하는 문제는 난제임에는 분명 하나 최종적으로는 지상 재림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악인의 심판이나 신천신지(新天新地)의 건설로 보아 보다 더 타당할 듯하다(Ridderbos).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재림하는 그리스도를 공중에서 영접하는 상태가 계속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이후로부터는 항상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계속된다는 의미이다.
4: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 바울이 상기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 문제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기술하게 된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죽은 자에 대한 걱정과 염려에 가득차 지나친 슬픔에 빠져 교회를 근심스럽게 하는 자들이 있기도 했는데 바울은 위와 같은 사실을 교훈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었던 자라면 이미 죽었더라도 살아있는 성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라는 뜻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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