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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믿음의 주를 바라며 인내할 것과 화평과 성결의 권면 및 배교에 대한 경고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존재나 성품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보여 주는 본서 본론의 전반부 1:4-4:13과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이 기록된 본론의 중반부인 4:14-10:18에 이어서 앞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믿는 성도가 실생활 가운데서 준수해야 할 규범에 대한 실천적 권면을 수록한 본론의 후반부인 10:19-13:17의 일련 기사이다. 즉 본론 후반부의 도입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믿음의 향상을 위해 노력할 것에 대한 일반적인 권면이 기록된 10:19-39과 과거 믿음의 선진들의 장엄한 믿음의 역사를 기술한 11:1-40에 이어서 본장은 당시 성도들이 신앙을 지킴에 있어 당면한 현실적 문제들의 대처 방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전장에서 본서의 저자는 성도들의 귀감이 된 믿음의 선진(先進)들의 과거의 영광된 삶을 제시했는데, 이제 본장에서는 본서 독자들의 현재와 미래의 삶이 어떠해야 할 지를 성도들이 바로 실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는 4가지 주제로서 보여 준다. 먼저 1-3절에서는 믿음의 주를 바라보며 인내로써 경주해야 할 신앙인의 삶의 태도를 그리며, 4-13절에서는 고난스러운 현실 가운데서도 인내함으로 고난과 주의 징계를 받아들일 것을, 14-17절에서는 성도들의 생활이 인내 위에 화평과 거룩함이 더해져야 함을 권면하며, 마지막으로 18-29절에서는 본서 저술 목적이기도 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저버리는 배교(背敎)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킴을 밝히며 이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구성된 본장의 각 부분을 구속사적으로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1-3절은 구속사의 주역으로 부름받은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온갖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으나 승리하시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구속의 성취자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함을 보여 준다. 즉 십자가에서 대속의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 대한 구원의 보증이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지향하여야 할 삶의 궁극적인 모형이 되신다. 이러한 삶의 이상적인 모형을 바라보며 그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앞으로 전진하는 신앙의 삶을 살 때 앞장에서 보여지는 바 믿음의 선진들의 대열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4-13절은 비록 구원의 대열에 들어선 성도라 할지라도 이 세상의 삶 가운데 고난과 하나님의 징계를 겪게 됨을 보여 준다. 이 사단이 왕 노릇하는 이 세상에는 여전히 악이 범람하며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이러한 악의 세력과 맞서서 투쟁하는 과정 중에서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고난을 당할 뿐 아니라 악에 오염되어 신앙의 길에서 멀어질 수도 있는 바 이때 하나님은 성도를 징계하심으로써 의로운 길로 다시 이끌어 내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는 당장에는 성도들에게 고난으로 보여지나 결국에는 성도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싫어하거나 회피해서는 안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신앙 성장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한편 이것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악의 세력이 완전히 소멸되어 구속사가 종결되는 그날이 오기까지 성도는 항상 경성하여서 악한 사단의 세력에 미혹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며 또한 구속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없이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영적 진리를 깨닫게 된다.
14-17절은 성도가 구원의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성화(聖化)의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본받지 못하는 자는 거룩하신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신앙이 퇴보하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은 성도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목할 것을 권면하는데 이는 독선적인 신앙을 버릴 것에 대한 촉구로 보아도 무방하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다른 성도들과 더불어 지체(肢體)를 이루는 영적 공동체의 일원인 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화합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화합을 깨뜨릴 때 이는 성도들이 합심하여 이루어나가야 할 하나님 나라 건설의 방해꾼이 되며 구속사의 발전에 역행하는 사단의 하수인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18-29절은 이미 앞서 기록한 교리편인 1:4-10:18에서도 누차 지적되어 온 바와 같이 구약과 신약을 대비하여 신약의 우월성을 강조하되 특히 여기서는 두 언약이 주어진 장소적 배경을 들어 비교의 근거로 삼고 있다. 즉 구약 율법이 부여된 시내 산에서의 무서운 광경(18-21절)과는 대조적으로 신약 복음은 하나님의 도성(都城)의 영광스러움을 배경으로 하여 주어졌다는사실을 밝힘으로써 복음의 우월성을 논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땅에서 주어진 율법을 범하여도 큰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주어진 복음을 범하게 될 때 주어지는 형벌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상기시킴으로써 당시 교인들 가운데 복음을 버리고 배교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데 대해 경계를 준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저자는 이같이 배교가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한다는 소극적 측면과 더불어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라는 보다 적극적 권면도 주고 있다. 진실로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로우심을 깨달아 아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부르심에 대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섬기며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열심을 보여야 한다.
외울 말씀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3)
신앙의 경주를 위한 권면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화평과 거룩에 대한 권면
14 ○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새 언약에 대한 바른 자세
18 ○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25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12:1-3 믿음의 경주 자로서의 성도의 기본 자세
1. 경주를 방해하는 죄를 버려야 함(히 12:1)
2. 경주의 목표를 바로 알고 경주해야 함(히 12:2)
3.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경주해야 함(빌 3:14)
4. 뒤에 있는 것, 곧 믿기 전에 좇던 모든 것을 잊어야 함(빌 3:13)
5.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함(행 20:24)
6. 경주자로서 지켜야 할 법을 온전히 준수해야 함(딤후 2:5)
7. 결코 뒤로 물러서거나 돌아서는 일은 없어야 함(히 10:38,39)
8. 다른 경주자들과 용기를 같이하며 달려야 함(갈 6:9,10; 히 12:3)
9. 끝까지 인내로 경주해야 함(히 12:1)
10. 자신을 믿음의 경주자로 부르신 자의 뜻만을 생각함(롬 12:2; 빌 3:14)
원어연구-12:11, 연달한 자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게귐나스메노이스'로 '귐나조'의 완료 수동 분사형이다.
여기서 '귐나조'는 '벌거벗은', '가리지 않은', '하의만을 입은'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 '귐노스'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운동하다', '연습하다', '훈련을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아마 당시 헬라인들이 운동을 할 때 하의만 입고하거나 혹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했던 관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성경에서 '연습하다'(딤전 4:7; 히 5:14)란 말로 번역되기도 한 이 단어는 신 체적 훈련 뿐만 아니라 정신적 훈련을 나타내는 말로도 주로 쓰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헬라어 문법에서 완료형은 어떤 일이 반복됨이나 계속됩이 없이 완전히 끝나서 종결된 상태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그리고 분사형은 종종 명사와 같이 '~한 자'로 해석된다.
따라서 '귐나조'의 완료 수동 분사형인 '게귐나스메노이스'는 문자적으로 '연습을 완전히 마친 자', 또는 '훈련을 다 받은 자'가 된다. 이는 본절에서 성도의 연단을 위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징계를 잘 참고 이겨냄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의 신앙의 성숙을 이룬 자를 가리킨다. 이처럼 훌륭한 운동 선수에게는 그만큼 더 힘든 훈련이 요구되듯이 우리 성도들의 신앙이 성숙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단을 위한 하나님의 징 계가 요구되는 바 이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받을 것이 아니라 연단 후에 올 자신의 아름답고 성숙된 모습을 바라보며 인내와 기쁨으로 이겨내야 할 것이다.
보감-12:4-13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성도의 자세
1. 하나님께 받은 징계를 반드시 기억해야 함(신 11:2)
2.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분노해서는 안됨(욥 36:18)
3. 하나님의 징계를 귀히 여기고 경히 여겨서는 안됨(잠 3:11)
4. 하나님의 징계를 버려서는 절대 안됨(잠 10:17)
5. 하나님의 징계가 도리어 복인 줄 알고 감사해야 함(시 94:12)
6. 하나님의 징계 때문에 낙심해서는 안됨(히 12:5)
7. 사랑 때문에 징계하시는 주님을 생각하고 징계를 참아야 함(히 12:6,7)
8. 징계 속에 나타난 주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함(히 12:8)
9. 징계를 통해 주를 더욱 경외하고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함(히 12:9)
10. 징계를 통해 죄를 벗고 거륵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함(히 12:10)
11. 징계를 감수함으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어야 함(히 12:11-13)
12. 세상과 함께 멸망치 않도록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해야함(고전 12:32)
신학용어-12:4-13 하나님의 징계(懲戒)
1. 정의(定義)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징계에 해당하는 구약 히브리어에는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 '무사르', '토카하트'가 있는데 이 둘은 모두 '징책', '징책', '훈련', '가르침', '정정', '교정'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서 주로 아비가 자식을 교육하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된 원어이다(신 21:18; 잠 22:15).
한편 징계에 해당하는 신약 헬라어에는 '파이데이아'가 있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두 히브리어와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가지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가정 교육 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까지도 내포한다. 예를 들면 행 7:22에서는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배운 사실을 가리켜서, 또 행 22:3에서는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사실을 가리컥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징계'란 하나님이 성도들에 대해 아비와 같은 깊은 사랑의 심정으로 성도의 실수를 교정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주시는 각종 견책을 의미한다(신 8:5; 왕상 12:11,14; 히 12:5,6).
2. 하나님의 징계 이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당신의 성도들을 징계하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성도들의 범죄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성도가 때로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하며 그 영광을 가리우기 때문에 그러한 범죄에 대하여 그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거룩과 영광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징계하시는 것이다.
둘쩨 성도들이 징계의 과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더욱 성화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징계는 교정의 목적도 갖고 있다. 실로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의인의 영적 지위는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획득하였지만 그 인격 자체가 완전한 의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실수할 수도 있다. 이에 하나님은 아비가 자식을 교정시키듯이 성도를 교정시키시고자 징계를 주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징계(Dicipline or chastise)와 징벌(Punishment)은 다르다. 즉 징벌은 죄인에 대한 단순한 공의의 형벌로서 결국 완전한 멸망에 이르게 하는 반면 징계는 우리 성도를 향한 공의와 사랑의 조화로서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판이란 용어가 일단 한 인간의 공과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선언과 그 공의의 시행을 나타내는 포괄적이고 객관적인 용어라면 징벌과 징계는 성도와 자연인 각각에게 다르게 시행되는 심판의 목적과 대상까지를 나타낸 용어라 하겠다. 실로 성도에게도 심판은 있으나 그것은 징벌이 아니라 징계의 심판인 것이다.
3.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성도의 자세
이상에서 살펴본 바 하나님의 징계의 실체를 충분히 숙지한 성도라면 그 징계가 어떠한 형태로 온다하더라도 절망하거나 좌절하기보다는 오히려 한편으로는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깨닫는 각성의 계기로,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징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징계에 대한 바른 자세의 교훈은 본장 자료노트의 도표를 참조하라.
보감-12:1-29 본장에 나타난 12대 권면
1. 얽매이기 쉬운 죄에서 벗어나라(1절)
2. 인내하는 믿음을 가지라(1절)
3. 항상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의 본을 따르라(2절)
4. 죄에 대해 피흘리기까지 싸우라(4절)
5. 권면을 소중히 여기라(5절)
6. 징계를 기쁘게 받아 의의 열매를 맺으라(11절)
7. 담대한 태도로 바른 믿음의 도리를 고수하라(12,13절)
8. 화평케 하는 자, 거룩한 자가 되라(14절)
9. 사단의 유혹을 주의하라(15절)
10.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축복을 경히 여기지 말라(16,17절)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라(25절)
12.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라(28절)
12:1-3 인내로써 경주해야 할 신앙인의 삶
본 단락에서부터 13:17까지는 믿음에는 실천이 뒤따라야 함을 권면하는 본서 본론의 후반부인 10:19-13:17내에서 믿음의 향상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는 10:17-39와 믿음의 선진들의 모범된 믿음의 삶을 실증적으로 제시한 11:1-40에 이어 이제까지 언급한 모든 논증들을 근거로 본서의 수신자들에게 실제적인 삶 속에서 신앙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은 크게 여섯 단락으로 나누이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그리스도와 신앙의 선진(先進)들이 보이신 모범을 따라 인내(忍耐)하며 경주하라는 권면(12: 1-3). ② 징계는 아들에게만 주는 아버지되신 분의 사랑의 표현이므로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으라는 권면(12:4-13). ③ 이단의 사상과 육체를 따라 사는 죄악으로 인해 배교하지 말고 화평과 거룩을 좆으라는 권면(12:14-17), ④ 구약은 물론 구약보다 탁월한 새 언약인 신약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라는 경고(12:18-29), ⑤ 도덕 생활에 대한 권면(13:1-6), ⑥ 교회 생활에 대한 권면(13:7-17).
본 단락은 이 여섯 단락의 첫번째에 위치하는 단락으로서 믿음장인 앞의 11장에서 예중(틴證)한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 및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바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을 따라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말며 믿음을 굳게 잡고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도록 매진(速進)하라는 권면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에서 저자는 전장(前章)에서 상술한 바 수많은 증인들을 통하여 믿음으로 사는 삶의 가치가 충분히 입증된 바(1절) 이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모범으로 삼아 신앙 생활에 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권면하고 있다(2,3절). 즉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인간의 모든 질고와 고통을 친히 체험하시면서(4:15; 사 53:1-6)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완벽한 삶의 모범이 됨을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 성도들이 그의 삶을 모범으로 하여 그와 같이 인내와 순종을 통한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한편 본문은 ① 신앙으로 승리하여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을 극복하는 끈기 있는 인내가 필요하며(10:36; 눅 21:19; 롬 5:3,4; 약 1:4), ② 인간을 멸망으로 이끄는 죄는 그 형태라도 벗어 버려야 하며(살전 5:22), ③ 구원을 얻을 자에게 주어지는 자기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감당하여야 하며, ④ 일상생활 가운데서 죄에 대해 이기는 삶을 살므로써 주위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참으로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중거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12:1 이러므로. - 앞장과 연관시켜 결론적 권면을 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접속사이다. 즉 본서 저자는 앞장에서 살펴보았듯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믿음의 경주를 잘 하였으니 본서의 수신자들 역시 믿음의 경주를 잘해 동일한 영광을 얻어야 할 것임을 본장에서 교훈하기 위해 본 접속사를 사용하여 앞장과 본장을 잇고 있는 것이다.
구름같이 둘러싼. - 경기장에서 관중들이 빽빽하게 앉아 경기를 관람하는 것과 같이 하늘에 구름이 빽빽하게 떠있는 것을 의미한다. 본서 저자는 자신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이같은 구름에 비유하고 있다.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 역사상 하나님을 믿고 그분에 대해 증거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앙의 중인들이 존재했음을 뜻 하는 말이다. 본서 저자는 이미 앞장에서 이토록 많은 증인들의 믿음과 그들의 믿음의 삶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소개했었다.
모든 무거운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옹코스'는 '짐', '장애'라는 뜻을 가진 낱말로서 운동 선수가 경기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수영 선수에게는 긴 머리카락조차 장애물이 되며 육상 경주자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의복이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경주를 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되는 영적 장애물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는 인간의 욕심, 인생의 고민 등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참 구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무거운 멍에가 되는 의문(儀文)의 율법도 이에 포함될 수 있다(행 15:10).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은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일부 의식법적, 시민법적 규정은 폐기되었으며 그밖의 조항은 더욱 승화되어 복음이 요구하는 각종 교훈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10: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율법의 규정에 얽매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우리가 도리어 속박하는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본서 저자는 본서에서 율법의 행위를 고집하는 유대교도들의 잘못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서 수신자인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서 일부가 유대교도들의 핍박이나 유혹으로 인해 다시금 유대교에로 되돌아가려 한 데 대해서도 경계하고 있다.
얽매이기 쉬운 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유페리스타톤 하마르티안'은 직역하면 '주위에 위치한 죄', 곧 우리 주변에 상존하고 있는 각종 죄악들을 의미한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언제든 그같은 죄악에 빠질 수 있는데, 한 번 범죄하면 그 죄는 우리를 계속 얽어매려 든다. 따라서 성도는 그러한 죄에 얽매이지 않도록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벗어 버리고. -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에서 때때로 사용한 이 표현은 '낡은 옷을 벗어 버리듯 하는 것'을 의미한다(골 3:8). 비록 우리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 이래 모두가 죄책(罪責)을 지니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구속 공로를 힘입기만 하면 사함을 받고 죄에서 자유하는 자들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하여 '죄'란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새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엡 4:22-24).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 본서 저자가 신앙인의 삶의 여정을 경주로 비유한 까닭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이다. 첫째, 믿는 이의 삶은 모든 인생고와 죄의 장애물을 넘어서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 경주를 거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리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9:24; 갈 2:2; 빌 2:16; 3:12; 딤후 4:7). 한편 '인내'란 소극적으로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적극적으로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들이 이같은 신앙의 인내를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앞서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신 자인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때문이며(2절) 또한 성령께서 우리에게 힘주시기 때문이다.
12:2 믿음의 주. -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르케고스'로 '창시자' 또는 '앞서 인도하는 자'를 뜻한다. 따라서 본절은 '믿음의 창설자'(Meyer) 또는 '앞서서 인도하는 믿음의 선구자'(Alford, engel, Westcott, Dods)라는 말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믿는 성도들의 믿음을 가능케 한 자시며 또한 그 믿음대로 장차 온전한 구원을주실 자이시기 때문에 믿음의 창설자이시다. 그리고 동시에 자기 백성을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인도하는 분이기 때문에 믿음의 인도자가 되신다.
온전케 하시는 이. - 그리스도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인간을 자기 피로 속량하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자로 변화시키는 일종의 영적 치유자이시다. 따라서 본서 저자는 그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예수를 바라보자. - '바라본다'는 것은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은 옆눈 팔지 말고 오직 예수를 쳐다보며 그를 향해 달려가자는 말이다. 즉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고 있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점으로 삼아 좌로나 우로 치우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 - 구속 사역을 성취하심으로 성도들을 구원할 수 있게 된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기쁨을 뜻한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 십자가형(十字架刑)은 고대 근동의 여러 국가에서 행해지던 것으로 로마인들도 이를 본받아 시행한 형벌이다. 이 형벌은 대역죄(大逆罪)나 아주 중대한 죄를 범한 자에게만 시행되었던 매우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눅 23장 자료노트, '로마시대의 십자가형' 참조. 그런데도 근본 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아담과 그 후손의 죄값을 대신 갚음으로 인간을 구원해 주시려는 성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법인 구속(救贖)의 법을 성취하시고자 이러한 십자가형을 감내하셨었다. 마 27장 자료노트, '십자가 수난을 통한 구속 성취의 이해' 참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예수께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후 승천하사 본래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회복한 것을 뜻한다. 히 1:3 주석 참조.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 '피곤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메테'는 '약하게 되다', '병들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이며, '낙심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뤼오메노이'는 '피곤하여 지치다' 또는 '피곤으로 느슨해지다'는 의미이다. 1절에서 성도들의 신앙 여정을 경주에 비유했듯이 성도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영적 경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때로 지치고 피곤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그럴 때에 성도는 좌절하거나 그냥 주저 앉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대항하는 자들을 참으신 그 인내를 생각하며 인내하라는 것이 본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본절의 요지이다. 주님은 그러한 때에 성도들이 인내함으로 믿음의 승리를 할 수 있도록 이미 먼저 참으심으로 모범을 보이셨던 것이다.
죄인들의…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 -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시다(빌 2:6).따라서 그분의 피조물인 인간들이 성자 하나님(God, the Son)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때리고 희롱하고 능욕하며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은 너무나 큰 죄악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치욕을 참고 묵묵히다 감내하셨다. 그 참으심은 우리 인간이 참을 수 있는 그 어떤 인내와도 비교되지 않는다. 따라서 성도는 그 그리스도의 위대한 인내를 생각하면서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이겨 내려고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릎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의 마땅한 태도인 것이다(벧전 2:21).
생각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날로기사스데'는 '~에 대하여 숙고하다'는 의미이다. 이는 곧 회의(懷疑)나 망설임을 가지지 말고 생각한 바를 그대로 실행하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즉 주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사 갖은 모욕과 수난을 당하셨음을 안 이상 우리도 주를 위하여 갖은 모욕과 수난을 감내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12:4-13 성도가 받는 징계의 유익
본 단락은 믿음에는 실천이 뒤따라야 함을 권면하는 본서 본론의 후반부인 10:19-13:17 가운데서 실제적인 삶 속에서 신앙인들이 지켜나가야 할 삶의 구체적인 교훈을 수록한 12:1-13:17의 일련 기사이다. 그리고 이 부분 가운데서도 본 단락은 인내로써 믿음의 주를 앙모할 것을 촉구한 첫 번째 단락인 1-3절에 이어 계속해서 소망을 가지고 고난이나 주의 징계에 대해서 인내(忍耐)하라는 주제의 두 번째 단락이다.
그런데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인내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으면서도 앞 단락과 본 단락은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 차이란 앞 단락이 그리스도의 삶을 모범으로 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중 당하게 되는 각종 고난을 인내하라는 인내에 대한 원론적인 권면을 준 반면, 본 단락은 특별히 성도가 신앙 생활 중에 성도의 신앙 연단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인내하라고 권면하면서 인내의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마치 육적 아버지가 잘못을 범한 자식에게 사랑의 매질을 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결국 성도 자신의 신앙성숙을 위해 주는 것이므로 참고 인내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 단락은 먼저 본서의 일차 수신자들인 유대인 개종자들이 극한 고난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킨 뒤(4절), 잠 3:11,12의 말씀을 인용해(5,6절) 지금 수신자들이 유대주의자나 로마로부터 받고 있는 박해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7-9절) 영적 자식인 성도들을 연단시켜 더 큰 유익을 주려는 징계이므로(10,11절) 피곤과 연약함 중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힘을 내어(12절) 징계받는 중에도 오히려 성한 사람처럼 바르게 나아가라(13절)고 권면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영적 교훈을 준다.
① 우리가 육체의 아버지의 징계에 순종하듯이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징계에도 순종하여야 한다. 순종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지켜야 할 가장 큰 덕목(德目)이다(삼상 15:22). 따라서 하나님의 양자(養子)로서의 자각을 가진 우리는 더욱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롬 8:15-17).
② 고난 중에도 인내하여 천국의 평강을 소유하도록 하자. 천국은 고난 가운데서도 좌절치 않는 자의 것이며(눅 21:19), 천국을 소유한 자만이 의의 평강을 열매 맺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로 평강의 열매를 맺어 고난 중에서도 화평하고 평안한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③ 성도는 승리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연약하고 불완전한, 자신의 영적 약점을 고쳐야 한다(롬 7:23). 우리의 대장되시는 주님은 우리가 신앙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보증해주며, 또 도와 주시지만 직접 싸우는 것은 성도 각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의 세력과의 영적 싸움을 위하여 우리의 연약함과 불구됨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고침받아 죄와 사단의 권세에 효과적으로 대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2:4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 성도의 신앙 여정을 경주에 비유했던 저자(1-3절)는 이제 성도의 영적 투쟁을 격투에 비유하고 있다. 즉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격투사들이 서로 맞붙어 피흘리기까지 싸웠듯이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항하여 싸우되 죽기까지 철저히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수신자들은 아직 이 정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에 본서 저자는 그들을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우리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고 한 사도 베드로의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2:5 권면하신 말씀. - '권면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알레고마이'는 '대화하다'는 뜻을 가진 낱말이다. 본절과 다음 절에 인용된 말씀은 잠 3:11,12로서 마치 아버지가 아들과 대화하는 것과 같은 권면의 말씀이다.
잊었도다. - 혹자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렐레스데'를 의문형 종결어로 보아 '잊었느냐'로 해석하기도 한다(Calvin, Bleek). 그러나 본절 전체에서의 어조상 본문과 같이 서술형 종결어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Alford, Bengel). 저자는 본서 수신자들이 마땅히 잠 3:11,12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고 있어야 했는데도 그렇지 못한 것을 조용하게 경책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아들아… 낙심하지 말라. - 잠 3:11의 인용구로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징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마땅한지를 교훈하고 있는 구절이다.
주의 징계하심. - '징계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스'는 '어린이'라는 뜻의 '파이스'에서 온 말로 본래 '아이를 훈련시키다'는 뜻이다. 이것이 보다 발전하여 결국에는 '훈계', '교훈'(딤후 3:16)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한편 '주의 징계'란 하나님께서 그릇 행하는 자기 백성들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하여 내리시는 고난이나 또는 당신의 종들을 보내사 주시는 책망 등을 가리킨다. 이같은 하나님의 징계는 그 목적에 있어서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책망 이상의 것이다.
경히 여기지 말며. - '경히 여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올리고레이'는 '가볍게 취급하다'는 뜻의 동사 '올리고레오'의 현재 능동태 명령형이다. 이는 곧 '계속해서 가볍게 취급하라'는 명령의 말이니 여기에 '말며'란 부정어를 붙여 그와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은 항상 소홀하게 대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하찮게 여기는 행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불경(不敬)과 교만한 태도이니 성도가 이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 하나님께서 그릇 행한 자를 책망하시는 이유는 저를 사랑하사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지 결코 저를 미워하여 질책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를 오해하여 꾸지람을 들은 것 때문에 낙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을 바로 깨닫지 못한 잘못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러한 잘못된 태도 역시 마땅히 삼가야 하는 것이다.
12:6 본절은 잠 3:12의 인용구로서 하나님께서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다.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채찍질하심이니라. - 헬라어 원문상 본절은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 '가르'로 시작하고 있어 본절이 전절의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임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으로 성도들을사랑하시사 우리가 그릇 행할 때에 다시금 올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징계하고 채찍질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는 자는 그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서 속히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러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그릇된 길로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매를 많이 맞게 될 것이니 그 고초가 클 것이다.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은 '에이스 파이데이안 휘포메네테'로서 이를 해석하면 '너희는 징계에 대하여 인내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5절의 권면과 같은 것이다. 즉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징계하지 않는 경우가 없는 것 같이 하나님도 자기 자녀를 사랑하사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시니 그 같은 하나님의 징계를 멸시하거나 그로 인해 낙심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라는 것이 본절의 요지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 5절 초두에서 하나님과 성도들 간의 관계를 부자 관계와 같은 것이라고 시사한 저자는 본절에서 분명하게 하나님과 성도는 영적으로 부자 관계에 있음을 언급한다. 사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래 죄 아래에 놓여 하나님과 원수되었었으나 성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되시는 그리스도의 화목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養子)로 입적되어 하나님을 가리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롬 8:15).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양자되었다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 주는 가장 대표적인 증거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이면 또한 하나님의 상속자이니 성도는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각양 좋은 것을 기업으로 상속받게 되기 때문이다(롬 8:17).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이같은 당신의 부끄럼 없는 자녀로 양육하시기 위하여 성도가 그릇 행하였을 때는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징계하듯 징계하시는 것이다.
12:8 징계는…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본서 저자는 역설적인 증명을 통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는 오히려 하나님의 참된 자녀라는 사실을 밝힌다. '사생아'(私生兒)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소이'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보이는 낱말로서 정상적인 결혼에 의하지 않고 낳은 아이를 뜻한다. 사실 일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도 사생아가 정상적인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처럼 부모의 사랑과 훈육을 받고 성장하기는 힘들다. 즉 대부분의 사생아들은 부모의 관심 밖에 밀려나 있기 쉽상이며 저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방치되는 것이다. 양육을 받는 자식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저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부모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을 고쳐 주기 위하여 징계하는 것이다. 본서 저자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들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택한영적 자녀들에 대하여 그들의 잘못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심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12:9 육체의 아버지가…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않겠느냐. - 저자는 육체적 부자 관계의 전륜(天倫)이 절대적인 것이듯 하나님과 성도 간의 영적 부자 관계는 그보다 더 확실하게, 절대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한다. 즉 우리는 우리를 낳아 준 육신의 부모에 대하여서도 당연히 공경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영육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사 영원토록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영원한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공경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잃고 나면 그 무엇도 소용이 없다(마16:2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사 영원한 새 생명을 보장해 주셨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선 우리의 마음과 힘, 가진 물질을 다바쳐도 도리어 부족할 뿐인 것이다.
모든 영의 아버지. - '모든 영'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생명의 본체인 영혼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창조하신 자이시며 그 영혼을 주관하시는 영적 아버지이신 것이다(겔 18:4).
12:10 저희. - 우리를 낳아 길러 주시는 육신의 부모님들을 지칭한다.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 '잠시'라는 기간은 부모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즉 우리 육신의 부모님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때에만 우리를 징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하나님께서는 영원 자존(永遠 自存)하시는 분이시니 우리를 영원토록 권면하며 권념하실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기 뜻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타 토 도쿤 아우토이스'로서 이 말은 '자기에게 좋게 생각되는 것에 따라'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곧 육신의 부모는 자기 나름대로 가장 선한 것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자식을 징계하고자 하나 그들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잘못된 감정과 판단으로 자식을 징계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인간에게 좋게 생각되는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니 그 하시는 일에 그릇된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은…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 본절은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궁극적 목적과 그 특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징계하시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성도의 완전한 성화(聖化)를 이루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 법적으로 의롭다 인정받은 성도들이 실제적으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한 성품을 공유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저들을 연단하고 징계하며 채찍질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달리 전능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심에 있어 전혀 잘못된 판단과 실패함이 없으시다.
12:11 징계가…후에…열매를 맺나니. - 좋은 약은 입에는 쓰나 몸에는 이롭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는 받는 그 순간에는 비록 괴롭고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이를 잘 감내하면 결국에는 우리에게 진정한 유익을 안겨다 주게 되는 것이다.
의의 평강한 열매. -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운데 신앙 성숙을 이룬 자들이 맺게 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말한다(갈 5:22,23).
12:12 본절과 다음 절은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잘 인내하라는 권면에 대한 결론적 말씀이다. 저자는 이 결론을 말함에 있어서 사 35:3과 잠 4:26의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다.
피곤한 손. - '피곤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이메나스'는 '지나가게 하다', '완화시키다'는 뜻을 가진 동사 '파리에미'(rapinut)의 완료 수동 분사로서, ‘지나감을 당했다', 완화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곧 기력이 다하여 쇠잔하게 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이란 '힘이 빠져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연약한 무릎. - '연약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랄레뤼메나'는 '옆에서 풀다', '해결하다', '마비시키다'(눅 5:18,24)는 뜻을 가진 동사 '파랄뤼오'( )의 완료 수동 분사이다. 그러므로 '연약한 무릎'이란 '이미 마비된 무릎'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에 더 가깝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제 11장에서도 저자가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대부분 고난과 환난과 궁핍과 죽임 당함 속에서 삶을 살아갔다고 증거했거니와 본절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손의 기력이 쇠하고 무릎이 마비될 정도로 험난한 역경의 인생을 살게 되기 십상임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피상적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항상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여 육신의 축복을 누리다가는 그런 삶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이 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고난의 삶이다(마 5:10). 이는 불의한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저를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하였듯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 대하여서도 동일한 미움을 보여 핍박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요 15:18,19). 따라서 이러한 거친 세파(世波)를 헤쳐 나가야 하는 성도들의 삶이 일반 불신자들보다 더 곤고한 것이기 십상임은 자명한 사실인 것이다.
일으켜 세우고. - 본절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그의 나라를 소망하며 추구하는 인생(마 6:33) 은 때로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달파 피곤하여 쓰러질 수 있다. 그러나 피곤하다고 해서 쓰러져 다시금 일어나지 못하면그것은 아무 유익이 될 수 없다. 오직 피곤한 중에서도 피곤을 극복하고 일어설 때 성도는 최후의 승리를 거둘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곤고한 중에라도 낙심지 말며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분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고 마치 독수리가 날개치며 비상하듯 천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사 40:31).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고침을 받게 하라. - 비록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대속 공로를 힘입어 죄사함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완전한 성화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는 여전히 죄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때로는 죄에 유혹되어 넘어지며 또 한편으로는 죄악의 세력과 대항하다 기력이 쇠하여 만신창이가 되어 절룩거릴 수있다. 그러나 그때에 성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다시금 일어나 새 힘을 얻고 죄에 대항해 싸우면서성도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여기서 '곧은 길'이란 성도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바른 길을 뜻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성도들이 최종적으로 성취해야 할 온전한 구원을 의미한다(Lane).
12:14-17 화평과 거룩함에 대한 권면
본 단락은 믿음에는 실천이 뒤따라야 함을 권면하는 본서본론의 후반부인 10:19-13:17 가운데서 실제적인 삶 속에서 신앙인들이 지켜 나가야 할 삶의 구체적인 교훈을 수록한 그 세 번째 부분인 12:1 -13:17의 일련 기사이다. 그중 앞의 두 단락인 1-3절과 4-13절에서 고난 중에 인내(忍耐)하며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으라고 권면한 저자는 이어지는 본 단락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도가 구원의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인내 위에 화평(和平)과 거룩함을 더하라고 권면한다.
즉 본 단락을 전개시킴에 있어 저자는 초두에서부터 화평과 거룩함이 없으면 거룩하신 주님께 나아갈 수 없고 결국 신앙이 퇴보하게 되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 거룩하도록 노력하라고 명령한다(14절). 그리고 나서 저자는 화평하지 못하고 거룩함을 지키지 못하면 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며, 왜 주님 안에 거하게 되지 못하는가를 설명한다. 그 이유는 화평에 반대되는 분열의 쓴 뿌리를 퍼뜨리는 자(15절)와 거룩함에 반대되는 음행(淫行)과 식물(食物)을 탐하는 것, 곧 육신에 속한 것을 탐하는 자(16절)는 장자(長子)의 직분(職分)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먹은 에서가(창 25:27-34) 자기의 장자권을 되 사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떨어져나간 것처럼, 결국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게되기 때문이다(17절). 따라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본받아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벧전 1:16).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된다.
①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주장하게하면 우리의 영이 더럽혀지므로 우리는 늘 이를 경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만 믿고 행동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벧전 1:16).
②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과 화평하도록 해야 한다(롬 12:18). 성도는 영적으로는 악의 세력과 싸우되,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평화를 심어 그리스도의 평강을 전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자들이다. 이를 위해 성도는 제일 먼저 용서와 관용의 자세를 모든 사람에게 취해야 한다. 용서와 관용이 없는 곳에 다툼과 분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가 위협받지 않는 한 모든 것을 용서하도록 자기를 훈련시키자(골 3:13).
③ 육체를 위한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특히 현대인들이 가장 넘어지기 쉬운 음행의 죄와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림으로 그리스도께서 성결하심 같이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자 (고후 7:1).
12:14 본절부터 17절까지는 믿음의 인내에 이어 성도가 지녀야 할 또 다른 덕목인 '화평'과 '거룩'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 여기서 '모든 사람'의 범위가 성도들만을 지칭하는지(Moffatt, Peake, Michel), 아니면 믿지 아니하는 모든 세상 사람들까지 포함하는지(Oecumenius, Grotius, Alford, Westcott, Ellicott)에 대해 이론이 많으나 문맥상으로 볼 때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롬 12:18).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셨다. 따라서 성도는 그 사랑을 본받아 비록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자들과도 지혜롭게 화평을 도모하여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거룩함을 좇으라. - 할 수만 있으면 세상 모든 사람과 화평을 도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다른 사람과 화평하기 위해 거룩함을 저버리고 죄악과 벗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함을 공유하지 않는 자는 이미 성도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화평을 도모하되 거룩함 안에서 그러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이것'은 '거룩함'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는 장차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시 24:3,4이나 마 5:8을 보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음이 청결한 사람, 곧 거룩한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힘 입어 죄사함 받는 길뿐이다. 그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로 더러워진 우리를 깨끗케 해주는 것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다(롬 5:8). 성경은 누구든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거룩하게 되지 못한 자는 장차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는 자리에 참여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계 21:1-8). 이는 그리스도 역시 근본 하나님으로서 죄와 불의가 그와 상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후 6:14,15).
12:15 돌아보아…두려워하고. - 먼저 '돌아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인 '에피스코페오' '주의 깊게 응시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분은 너희 중에 행여라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주의 깊게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보라는 권면의 말이다. 본서 저자는 6:4-8 과 10:26-31에서 이미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고도 짐짓 죄를 범하여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자들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본질로 17절의 내용도 이와 같은 맥락의 경고의 말씀이다.
쓴 뿌리. - 신 29:18에서는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배역한 자들을 이 '쓴 뿌리', 즉 독초에 비유하였다. 여기서는 교회내의 가라지, 곧 거짓 신자들을 가리키는데 본서 저자는 그들로 인하여 행여라도 성도들이 죄악에 물들게 될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12:16 음행하는…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 본절은 해석상에 있어서 두 가지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첫째는 '음행하는 자'가 상징적인 의미로서 영적인 음행을 하는 우상 숭배자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서 음란을 행하는 자를 지칭하는지 하는 문제이다. 성경을 보면 종종 우상 숭배 행위를 음행으로 표현하기도 한다(겔 23:29,48; 호 2:2; 나 3:4; 계 18:3; 19:2 등).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영적 의미보다 실제적인 음행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Dods, Westcott, Bruce, Vincent). 두번째는 '음행하는 자'란 말이 '한 그릇…명분을 판'과 함께 에서에 걸리느냐(Theodoret, Primas, Zahn, Alford, Moffatt)아니면 독립된 것이냐(Chrysostom, Calvin, Bleek, Dods, De Wette, Westcott)하는 문제이다. 만일 '음행하는 자'가 우상 숭배자를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였다면 이는 한 그릇 식량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팔아먹은 이라는 말과 함께 모두 에서에 걸린다고 보는 전자의 견해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미 '음행하는 자'를 문자 그대로의 음행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결론지은 이상 이 말은 에서와는 무관한 독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필로(Philo)는 유대인의 구전을 따라 에서가 이방 여자를 아내로 택할 정도로(창 36:2,3) 성욕이 강하여 음행한 자였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그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은 것은 아브라함도 그러했고(창 16:1) 모세도 그러했기 때문이다(출 2:21). 또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이 아니었는 바 그가 자의 대로 결혼을 해도 하나님께서 간섭지 아니하셨으므로 그가 이방 여자와 결혼한 것을 음행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본서 저자가 음행하는 자와 장자의 명분을 팔아 먹은 에서를 독립적으로 언급한 뒤 육과 영을 다 더럽히는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본서 수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진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배가 고파서 야곱이 쑤어 놓은 팥죽한 그릇에 장자권(長子權)을 팔아 넘기는 어리석은 짓을 한 기사는 창 25:27-34에 수록되어 있다. 그 자세한 내용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하여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망령된 자. - 영적인 것보다 육적, 물질적인 것에 더 집착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를가리킨다.
12:17 후에…버린 바가 되어…못하였느니라. - 본서 저자는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팔아먹은 뒤에 후회하였으나 장자의 축복을 회복하지 못한 사건을 영적으로 확대 해석하여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즉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없나니'(6:5,6) 삼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도록 조심해야 함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서 저자는 이같은 경고를 함에 있어 본서 수신자인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서 유대교도들의 핍박이나 미혹으로 인해 복음의 진리를 저버리고 다시금 유대교로 되돌아가려 한 자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같은 교훈으로써 저들을 복음의 진리 가운데 착념게 하고자 하였다.
12:18-29 새 언약을 거역함에 대한 경고
본 단락은 믿음에는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함을 권면하는 본서 본론의 후반부인 10:19-13:17 중 당시 교회에 필요한 고난을 이기고 거룩함을 지키라는 권면이 집중적으로 기록된 세 번째 부분인 12:1-13:17 안에서도 네 번째 단락을 형성하고 있는 동시에(12:1-3 문단강해 참조), 본서에 모두 다섯 번 등장하고 있는 경고(2:1-4 문단강해 참조) 중 마지막인 다섯 번째 경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제까지 여러 각도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버리지 말고 지키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행위를 하여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경고해 왔던 저자는 이제 그가본서를 기록한 핵심되는 목적인 배교(背敎)에 대한 경계를 다시 한번 반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언약의 말씀(1:1-3)을 버려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라고 권면한다.
본 단락에서 저자가 본서의 수신자들이 배교하지 않도록하기 위해 도입한 논리는 모세가 땅에서 받은 구약의 율법을 거역하여도 죽음의 형벌을 면치 못했는데(18-21, 25절) 하물며 모세보다도(3:1-6), 모세의 율법보다도(7:1-10:18) 높고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주어진 복음을 버리면 얼마나 더 큰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인가(22-26절)하는 논리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었던 과거의 사례를 사용하여 저자는 아주 적절하고 탁월하게 그리스도와 신약의 복음을 버리는 것이 결코 용서받지 못할 참으로 무서운 것임을 유대인으로서 개종한 본서의 수신자들에게 경고해 주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배교에 따른 무서운 경고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이므로 그 은혜를 따라 배교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는 긍정적인 관점에서의 접근 또한 잊지 않는다(27,28절). 한편 저자는 마지막으로 배교에 대한 자신의 경고를 보다 더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함으로써 (29절) 본 단락을 마무리 짓는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 첫째는 복음의 말씀은 감히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말씀이 지시하는 바를믿고 준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딤후 3:15-17). 만일 인간이 이 진리의 말씀을 거역하면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있을 뿐이다(계 22:17,18).
그 둘째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므로 비록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라 할지라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참된 자녀는 자기 부모를 성심으로 공경한다. 그렇듯이 우리는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경건과 성실로써 공경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하나님의 은혜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12:18 본절 이하 21절까지에는 모세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 산 율법 언약을 체결하시기 위해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의 광경(출 19:16-25)이 묘사되어 있다.
너희의 이른 곳은. - 본절은 19절의 '아니라'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너희'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니라'는 말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율법 언약을 체결한 것과 같지 아니하다는 말이다. 즉 신약 성도들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하나님의 새언약을 체결한 자들이요 시온 산에 와 있는 자들인 것이다(22-24절).
만질 만한 불 붙는 산. -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시내 산(Sinai Mount)을 지칭한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셨을 때 그곳에는 연기가 가득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불 가운데서 그곳에 강림하셨다(출 19:18). 그때 '불'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는 것이자 하나님께서 죄와 불의에 대하여 맹렬히 진노하시는 분임을 상징해 주는 것이었다. 흑운과 흑암과 폭풍. - 출 19:16에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위에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을 뿐 흑암과 폭풍에 관한 언급은 나와 있지 않다. 아마도 '흑암'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드리워진 탓에 그 일대가 어두워진 것을, '폭풍'은 우뢰와 번개가 칠 때의 사나운 비바람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어쨌든 이것들 역시 '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주는 가견적 현상물이었음에 분명하다.
12: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 당시에. - '나팔소리'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심을 알리는 신호였다(출 19:16). 그리고 '말하는 소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소리였다(출 19:19,20). 그 자세한 사항에 관해서는 해당 주석을 각기 참조하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구하였으니. - 하나님의 영광스럽고도 위엄스러운 강림 장면을 목도한 시내 산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이 직접 자신들에게 말씀하시지 말고 중재자 모세를 통해 말씀해 주시도록 요청한 것을 가리킨다(출 20:19).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신약 시대와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10:20).
12:20 이는…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께 중재자 모세를 통해 자신들에게 말씀해 달라고 간청했는가 하는 데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존전(尊前)에서는 그 어떤 피조물도 목숨을 무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출 19:12,13,21,24). 한편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는 말씀은 출 19:13에 나와 있는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12:21 모세도…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 구약성경에는 본절과 같은 직접적인 언급이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신 9:19과 행 7:32에 비추어 이와 같은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모세는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자로서 구약의 인물 중에서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지냈던 하나님의 일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 한 자였으며(출 33:11) 하나님의 권능을 대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하고 큰 하나님의 종이라 할지라도 모세 역시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이요 또한 죄인이었으니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를 힘입어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영적 자녀가 된 자들이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7:28; 10:19-22).
12:22 그러나. - 본절부터 24절까지의 내용은 18절에서 21절까지의 언급된 내용과 첨예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기에 저자는 '그러나'(알라)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내용의 전환을 시사하고 있다.
너희가 이른 곳은. - 본절은 24절의 '∼니라'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속죄받은 성도들은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직 이 세상에 거하는 자들이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계신 저 세상과 접촉하고 있음을 뜻한다. 시온 산. - 본래는 예루살렘 남동쪽의 구릉(丘陵)을 가리키나 점차 광의적인 의미에서 예루살렘 전체를 뜻하기도 하였다. 삼하 5:7 주석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18절의 시내 산과 대조되는 산인 하늘의 시온 산을 뜻한다(Alford, Bengel, Vincent). 하늘의 시온 산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서(시 2:6; 3:4; 15:1; 48:2; 50:2; 78:68; 사 18:7; 욜 2:32; 암 1:2 등) 성도들은 장차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계 14:1).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 이 도성(都城)은 11:10,16에서 이미언급된 것으로 장차 도래할(13:14)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이 도성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표현된 것은 이 도성이 영원 자존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영원토록 존속할 도성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이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계 21:2-27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니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천만 천사. - '천만'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리아스'는 '많은'이란 의미를 가진 '뮈리오스'에서 파생된 낱말이다(고전 4:15). 그러므로 천만 천사란 수많은 천사를 뜻한다. 성경은 천사의 수가 무수히 많은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시 68:17; 단 7:10). 예수께서도 각 사람에게는 그 사람을 지키는 각각의 천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18:10). 하나님의 피조물이면서도 영적인 존재인 이 천사의 속성, 사회 등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그랜드 종합 교리의 '천사' 부분을 참조하라.
12: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 -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는 실상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은 분절을 '하늘에 등록된 상자들의 교회'로 번역하고 있다. '하늘에 기록한'이란 말은 성도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것을 가리킨다(계 3:5; 13:8; 17:8; 21:27). 그리고 '장자들'이란 하나님의 영적 자녀된 자요 또한 하나님의 약속하신 기업을 상속받을 자들인 성도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는 성도들의 맏형이신데 우리는 그 안에서 모두 하나님의 장자(長子) 곧 상속자들이 된 것이다(롬 8:17). 그리고 이러한 성도들의 총체인 '총회'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그랜드 종합 교리 교회론, '교회에 대한 성경적 용어들'을 참조하라.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사 통치하시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장차 이 세상 마지막 날에 당신의 공의에 입각,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그랜드 종합 교리 종말론, '최후의 심판' 관련 부분을 참조하라.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 받고서 죽은 성도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 강림 이전에도 신실되이 하나님을 신앙하다가 죽은 믿음의 선진들을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12: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 '새 언약'은 옛 율법에 의해 드려지던 불완전한 동물의 피 제사가 아닌 단번에 속죄 사역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피 제사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영생의 약속을 뜻한다(8:812). 그리고 '중보이신 예수'란 새 언약의 보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성취하신 구속 사역에 근거해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친히 간구하시는 사실을 가리킨다. 히 8:6 주석 참조.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 - 9장에서 동물의 피보다 탁월한 그리스도의 피에 관해 설명한 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아벨의 피의 호소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벨의 피의 호소는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복수해 달라는 호소였으나(창 4: 10) 그리스도의 피는 자기 원수까지 용서하고 그 원수의 죄까지도 속죄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과 같은 효력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눅 23:34; 롬 5:10). 특히 아벨의 피는 단지 억울하게 죽임 당한 피였으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목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피흘려 바친 화목제(和睦祭)의 피였으므로 그 탁월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12:25 말하신 자. - 구약 시대에는 모세와 같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으며 신약시대에는 자기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1:2) 하나님을 가리킨다. 거역하지 말라. -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주신 복음을 거부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이제 곧 참 중보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인간 사이의 벽이 무너졌으므로(10:20)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것(10:19)을 꺼리지 말라는 의미이다. 즉 본사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하나님의 지성소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도 하나님께 나이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라고 규정한 것이다.
땅에서…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 - 땅에서 경고하신 자나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나 그들을 통해 경고하신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다. 다만 '땅에서 경고하신 것'은 모세를 통해 구약 율법을 주신 것을 뜻하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복음을 주신 것을 뜻한다.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 이것은 옛 구약 율법을 거역하여도 죽임을 당하였는데하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을 거역하면 어찌 그보다 큰 심판을 받지 않겠느냐는 의미이다. 저자는 본절에서 땅에서 하늘, 그림자에서 실체라는 점층적 사실을 통해 과거에 사람들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을 어겼을 때에도 하나님의 진노를 사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 실체인 복음을 거역하면 더욱 큰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할 메시야이심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 즉 복음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유대교도들의 잘못을 경계하고자 하는 본서 저자의 본서 기록 목적을 잘 반영해 준다. 본서 서론 '신학적 집필 동기와 배경' 참조.
12:26 그 때에는…땅을 진동하였거니와.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약 율법을 수여하시고자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 온 산이 크게 진동한 사건을 가리킨다(출 19:18).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 이것은 학 2:6,21에 있는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저자가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 끝날에 있을 우주적 대격변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그때에는 현재의 하늘과 땅이 없어지고 신천신지가 실현될 것이다(벧후 3:10-13; 계 21:1). 또한 그때에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자들은 영생의 심판을,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영벌의 심판이 주어질 것이다(계 20:11-15).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그랜드종합 교리의 '종말론' 중 '최후의 심판' 관련 부분을 참조하라.
12:27 본절은 26절의 '또 한번'이라는 말의 의미를 중심으로 그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 이미 땅이 진동하였는데 장차 또 한번 땅은 물론 하늘까지 진동하게 되는 까닭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 '진동치 아니하는 것'이란 장차 그리스도 재림시에 실현될 신천 신지(新天新地)를 가리킨다(벧후 3:10-13; 계 21:1). 그것은 현재의 하늘과 땅이 없어지게 되는 것과는 달리 영원토록 존속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계 21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통일 것. - '진동할 것' 또 '만든 것'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현재의 천지 만물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인류의 타락과 함께 죄로 오염되었으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장차 세상 마지막날, 즉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이 기존의 것들을 모두 폐하여 버리실 것이다(1:10-12; 벧후 3:10; 계 21:1). 이러한 하나님의 새창조에 관해서는 사 43장 자료노트 '새창조'를 참조하라.
12:28 한편 18-26절까지에서 배교가 하나님의 경계를 초래한다는 소극적 측면에서 권면해 온 저자는 27절에 이어 본절에서 보다 적극적 측면에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을 권면해 준다.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 '진동치 못할 나라'란 27절의 '진동치 아니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장차 이 세상 끝날에 완성될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는 눅 서론 특별자료를 참조하라.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후사가 된 자들로서 장차 이 나라를 상속받게 되리라는 하나님의변치 아니하는 약속을 이미 받아 가지고 있다(6:17). 한편 '은혜를 받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멘 카린'은 '우리가 계속 은혜를 누리자'는 의미이다(4:16). 이는 곧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유업으로 받았으므로 그같은 약속을 받은 사람들답게 믿음의 삶을 살아 계속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자는 의미이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섬길지니. - '경건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라베이아'는 오히려 '경외함'이 더 바른 의미이다(5:6; 11:7). 그리고 '두려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스'는 '공포심’을 갖는 것이 아닌, '존중심'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얻은 자들인 성도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존중히 여기는 것은 마땅히 취하여야 할 기본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12:29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 헬라어 원문에는 '왜냐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가르'가 문장 초두에 남아 있어 본절은 왜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해야 하는가(28절)를 설명해 주는 구절임을 나타내 준다.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해야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시사 도무지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의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절의 말씀은 본래 신 4:24의 말씀으로 저자가 본절에다가 인용한 것이다. 실로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신 공의의 하나님이시다(계 1:4).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복음의 시대라 할지라도 성도는 마땅히 불의를 멀리하고 공의를 좇아 하나님을 경외함과 존중함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잠 3:7; 엡 5:3; 살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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