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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이단의 정체와 특성, 이단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및 이단의 불의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성도의 신앙생활은 물론 교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거짓 교사 곧 이단(Heresy, 異端)의 정체와 그들의 부패상 및 그룻된 사설(邪談)을 고발함으로써 성도들에게 이단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경건 생활에 힘쓸 것을 권면하는 본론 2:1-3:13까지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러한 본장은 내용상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전반부 1-3절으로서 거짓 교사 곧 이단의 정체와 속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어 중반부 4-10절에서는 이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에 대해과거 천상에서 범죄한 천사에 대한 심판, 노아 홍수 심판, 소돔과 고모라 성 심판의 세 전례를 들어 증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후반부 10b- 22절에서는 하나님 심판의 필연적 이유를 보여주는 이단의 종교적 · 도덕적 타락상 소개와 함께 성도의 탈선을 유도하는 이단의 사설에 대해 비판하고 이단의 미혹에 빠진 자들의 비참한 최후 상태를 개와 돼지의 비유로 설명함으로써 이단의 미혹을 경계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본장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함에 있어서 우리는 성도 개개인의 신앙 파괴는 물론 성도의 공동체인 교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이단의 존재와 활동 및 그 운명과 관련된 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현 세상의 공중 권세자인 사단(Satan, 엡 2:2)은 마침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모두 회개하여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서 사단과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세상 끝 날이 오기까지 그 시기를 지연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믿는 성도들을 집중 공격한다(벧전 5:8). 그리고 그 양상은 핍박과 환난뿐 아니라 각양 이단 사상으로 미혹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단의 궤계에 의해 등장하게 된 이단은 그리스도의 구속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 왜곡되게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거짓 사설로써 호도함으로써 사람들이 세상의 죄악 속에 머물게 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을 그 본령(本領)으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단의 활동은 비단 초대 교회 당시뿐만 아니라 2,000년 교회사(敎會史)에 있어 한 번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세속 학문의 탈을 쓴 이단들이 마치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사자와 같이 교회 안팎으로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 같은 이단, 궁극적으로는 그 배후에 있는 사단의 활동은 세상 끝날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종결될 것이며 본문에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그 운명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계 20:7-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당신의 택한 백성들이다 복음을 믿고 회개하여 구원 얻을 때까지 장구한 구속사(救贖史)가 현 세상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한 이 같은 이단의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와 같은 현 세상의 구속사적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더불어 이단의 거짓 사설에 현혹되어 넘어가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영적 각성을 새롭게 다져야 할 것이다(빌 2:12; 엡 6:10-20). 더욱이 이단은 계속해서 우리의 시야가 천국 본향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고 할 수 있는 한 이 세상의 자랑과 정욕에 머물도록 미혹하는 바(요일 2:15,16) 우리 성도들은 이를 과감히 뿌리치고 우리의 삶을 성결하게 하며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더욱 견고히 하여야 할 것이다.
외울 말씀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거짓 교사의 정체
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거짓 교사의 속성
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거짓 교사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거짓 교사의 종교적 불의
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거짓 교사의 도덕적 불의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거짓 교사의 거짓 교리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거짓 교사의 미혹에 대한 경계
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본문&자료노트
주요주제-2:1, 이단의 이해
요일 4장 자료노트 참조
신학용어- 2:1, 주
요 13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2:21-22 거짓 교사에 대한 본장의 묘사
1.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1절)
2. 진리의 도를 훼방하는 자(2절)
3.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10절)
4. 육체의 더러운 정욕 중에 빠진 자(10절)
5. 잡혀죽기 위해 난 이성 없는 짐승(12절)
6.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는 자(13절)
7. 낮의 연락을 기뻐하는 자(13절)
8. 사호의 점과 흠(13절)
9. 저주의 자식(14절)
10. 발람의 길을 좇는 자(15절)
11. 물 없는 샘(17절)
12.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17절)
13. 멸망의 종(17절)
14. 토한 것으로 다시 돌아가는 개(22절)
15. 씻은 후 오물에 도로 눕는 돼지(22절)
보감-2:1-22 거짓 교사가 성도를 유혹하는 방식
1. 성도와 접촉하는 중에 믿음의 약한 부분을 파악함(창 3:1)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의심을 불어넣음(창 3:1)
3. 의심하는 성도를 거짓 교리로써 혼동시킴(창 3:4,5; 벧후 2:1)
4.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비방함(벧후 3:3,4)
5. 여러 이적과 기사로 자신을 따르게 함(신 13:1-3; 살후 2:9,10)
6. 진리에서 떠나 자신의 헛된 사설을 따르게 함(딤후 4:3,4)
7. 종국에는 자신과 함께 멸망에 이르게 함(벧후 2:20-22)
보감-2:1-19 배교의 10대 원인
1. 사단의 획책(눅 22:31; 벧전 5:8)
2.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엡 2:2)
3. 성경의 곡해(딤후 4:3,4)
4. 환난과 핍박(마 13:30,21)
5. 영적 무지(행 28:25-27)
6. 거짓 교사와 거짓 선지자(벧후 2:1)
7. 이단의 사설(딤후 4:3,4; 벧후 3:4)
8. 교만(행 7:54,57; 히 10:26-31)
9. 세상에 대한 사랑(딤후 3:2; 4:10)
10. 육체의 정욕(벧후 2:2,10,13-16)
신학용어- 2:4-9, 하나님의 진노
신 9장 자료노트 참조
신학용어- 2:9, 시험
출 15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2:1-22, 거짓 교사와 참 교사의 가감승제
거짓 교사 | 참 교사 | |
+ | 거짓 복음을 더하여 가르침 (갈 1:6-8) | 성도들의 믿음에 여러 덕을 더하게 함(벧후 1:5,6) |
- | 그리스도의 공로를 제외함 (벧후 2:1) | 성도들의 악한 죄를 없애도록 권면함(갈 6:1) |
x | 자신의 이익만을 배가함 (사 56:10-12; 벧후 2:3) | 성도들이 은혜와 평강을 배가하여 받도록 축복함(벧후 1:2) |
÷ | 성도들과 교회를 분열시킴 (딤전 6:3-5) | 물질과 사랑을 서로 나누게 함 (행 4:34,35) |
도표-2:6,7 음행으로 인해 심판이 임한 구약의 실례들
본문은 음란한 도시 소들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본서를 기록할 당시 영지주의(露知主義, Gnosticism) 이단 중 '영지'를 소유한 인간에게는 본질상 육체의 어떠한 행위도 용서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도덕 방임주의자들, 또는 쾌락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것이다. 또한 이는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가 수없이 자행되고 있는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에 대한 강력한 경계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이러한 영지주의 이단의 주장의 헛됨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성경상 음행으로 인해 심판을 받은 실례들을 도표로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한편 영지주의에 대해서는 요일 서론 특별 자료를 참조하라.
1. 소돔, 고모라 성(창 19:1-28; 유 1:7)
2. 히위 족속의 추장 세겜(창 34:2)
3. 야곱의 아들 르우벤(창 35:22; 49:3,4)
4. 모압 여자들과 행함한 이스라엘 백성들(민 25:1,9)
5. 한 레위인의 첩(삿 19:2,25,27)
6. 기브라의 비류들(삿 19:22-25; 20:43)
7.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삼상 2:22; 4:11)
8.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렘 23:10; 29:23)
원어연구- 2:21, 저버리는 것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스트렙사이'이다. 이는 '회심하다', '방향을 바꾸다','전환하다', '변화시키다'라는 뚠의 동사 '에피스트레포'( )의 부정과거 부정사형이다.
'에피스트레포'는 본래 개종(改宗)하거나 처음으로 어떤 종교에 입문하는 것을 가리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대개 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눅 1:16,17; 행 28:27 등). 그리고 몸을 돌이켜 방향을 바꾸어 가는 것을 가리켜 사용된 경우도 있다(마 12:44).
한편 헬라어 문법에서 부정과거형은 어떤 동작이 단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내며, 부정사는 '~하는 것'이란 명사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의 '에피스트레포'의 부정과거 부정사형인 '에피스트렙사이'의 문자적인 의미는 '단번에 회심하는 것'이 된다. 이는 본문에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타락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 단어가 참 믿음을 가졌다가 그 믿음을 저버리는 것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외면상으로 교회 안에서 생활하다가 교회를 떠나는 것을 가리키므로 이 단어를 근거로 성도의 견인(堅忍)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 다. 참 믿음을 가지는 것과 단지 겉모양으로만 신앙생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보감-2:14, 탐욕의 결과
삿 8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2:20-22 사단의 미혹을 잘 받는 자들의 특징
딤전 6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2:20-22 배교자가 받을 심판
1. 하나님이 버리심(대상 28:9)
2. 하나님의 저주를 받음(렘 17:5)
3. 쓸모가 없게 됨(막 9:50)
4. 다시 새롭게 할 수 없음(히 6:4-6)
5. 전보다 더 더러워짐(벧후 2:20)
6. 죄악 중에서 죽음(겔 3:20)
7. 심판의 불에 던져짐(요 15:6)
8. 안식에 이르지 못함(히 3:7-19)
2:1-3 거짓 교사의 정체 및 속성
본 단락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거짓교사 곧 이단의 정체와 특성 및 이단의 사설 등에 논박하고 있는 본서 본론 2:1-3:13까지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미 도입부 1:3-21에서 암시하였거니와 성도에 대한 이단(Heresy, 異端)의 2대 공격 목표는 도덕적 탈선과 정통 교리에서의 이탈, 특히 그리스도 재림에 대해 부인하는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본론에서 이러한 이단의 실체와 그들의 죄상 및 이단 사설의 허구성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성도들이 이를 분명히 깨닫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한 경계의 지침으로 삼도록 하고 있다.
이런 맥락 하에 본론에 대한 일종의 서론격인 본문에서 베드로는 거짓 교사 곧 이단의 출현에 대해 예고한 후(1절) 이단의 정체와 속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먼저 본문에 언급된 이단의 정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언젠지 모르게 교회 안에 몰래 들어와 거짓 교사 노릇을 하는 중에 또 다른 이단, 곧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이는 자이다(1절). 본문에서 베드로는 마치 거짓 교사와 이단이 서로 구별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실상 이들은 동일한 부류이며 다만 거짓 교사들은 마치 밭의 가라지처럼(마 13:24-30) 언젠지 모르게 교회 안에 들어와 표면적으로 성도들과 동일한 신앙생활을 하며 또 선생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던 자들이고, 이단은 그 후에 거짓 교사들에 의해 끌어 들여진 것이라는 차이만 가질 뿐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구속 교리를 부인함으로써 스스로 임박한 멸망을 자초하는 자이다(1절). 그리고 이단의 속성에 대하여는, 첫째는 도덕적으로, 특히 성적으로 극도로 타락한 행위들을 일삼으며(2절), 둘째는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하여 자신들이 지어낸 사설(那說)로 성도들을 미혹한다는 것이다(3절). 이상의 본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① 사단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 즉 친구나 같은 교우들 심지어 교회 안에서 신앙의 지도자로 가장한 거짓 교사들을 통하여 성도들을 자주 미혹하기 때문에 이를 철저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행 20:28-31).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경계할 때에 동복(同腹) 형제나 자녀나 품의 아내나 자신과 생명을 함께하는 친구가 가만히 필지라도 결코 유혹당하지 말며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었다(신 13:6-10). 이는 우리 자신들이 인정(人情)에 이끌리어 이단의 미혹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② 예수께서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라고 교훈하신바(마 7:15-22) 우리들은 이단의 행위들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그들을 분별하고 경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단은 자주 광명한 천사처럼 자신을 가장한다(고후 11:14). 때문에 겉모습만 보고는 그가 이단인지 광명의 천사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미혹되지 말고 근본 타락한 자들은 타락한 행위들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바 그 행위를 보고 이단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③ 이단을 분별하는 또 한 가지 방법으로서 그가 자기 행위나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 아니면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있는지를 살펴 이단의 여부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단이 어떤 사설을 꾸며내어 퍼뜨림으로써 성도들을 미혹하는 첫 번째 목적은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이야기의 표면적인 내용보다 그 배후에 그 이야기를 말한 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이단을 잘 분별해야 할 것이다.
2:1 그러나. - 이 표현은 본절 이하의 내용이 앞장의 내용과는 다른 반대되는 것이 다루어질 것을 나타내준다. 앞장의 말미에서 저자는 참된 교사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진리를 말한 것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그와는 반대되는 거짓 교사들이 멸망케 하는 거짓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한 마디로 전장에서는 참된 교사들에 의한 진리를 따르라고 권면하고 있고 본장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거짓 교훈에 미혹되지 말라고 권면한다고 할 수 있다.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 여기서 '민간에 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라오’는 문자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라는 뜻이며,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민간'을 뜻하는 '라오스’는 '이방인'을 뜻하는 '게노스’에 대조되어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행 3:23; 롬 15:11; 벧전 2:9; 유 1:5). 그러므로 본절은 과거 구약 시대 때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거짓 선지자가 일어났었던 사건을 지칭한다(왕상 22:6; 렘 6:13; 23:16; 겔 8:9; 13:1). 여기서 '거짓 선지자'(프슈도프로페테스)는 벧후 1:21의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 곧 참 선지자와 대조되는 자들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않고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는 자들을 가리킨다(신 18:20).
너희 중에도 있으리라. - 여기서 '거짓 선생'(프슈도디다스칼로스)은 구약 이스라엘 시대에 있었던 거짓 선지자에 대응되는 자들로 교회 내에서 거짓 교훈을 전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과거에 이스라엘 가운데 거짓 선지자가 일어났었던 것처럼 신약의 교회 내에서도 거짓 선생이 있을 것을 간파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있으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손타이의 시제가 미래형인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멸망케 할 이단. - 문자적으로는 '멸망의 이단'이다. 즉 이단은 그 자체로 멸망할 성질의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을 멸망케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단'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이레시스'는 본래 ‘선택’, ‘의견'을 뜻했으나 이것이 변의되어 후에는 '바른 것에서 빗나가는 의견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른 것에서 벗어난 것은 진리가 아니다. 따라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에서 빗나간 이단은 자신도 멸망에 빠질 뿐 아니라 사람을 멸망으로 인도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요일 4장 자료노트 '이단의 이해'를 참조하라.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단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의 이단으로는 에비온파, 영지주의, 니골라당 등이 있었다.
가만히 끌어들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이삭수신’은 '가까이', ‘곁에'를 의미하는 '파라'와 '안으로 데려오다'를 의미하는 '에이사고'의 합성어 '파레이사고의 미래 능동태로, '은밀히 끌어들여'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로 앞부분이 이단이 가져다 주는 결과를 설명한 것이라면 본구절은 이단이 교회 속에 들어오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이단은 결코 정문으로 들어오지도, 모두가 알게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단은 거짓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옆문으로, 비공개적으로 살그머니 들어와 암세포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파괴하면서 세력을 확장한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 - '사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고라산타'는 '구속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고라조'에서 파생된 말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음을 표시한다. 이단자들이 드러내는 가장 큰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속하셨다는 사실, 즉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벧후 1:17) 육체를 입고 오신 인간이시며(요일 4:3) 자기 백성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 가셨다가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특징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단은 그리스도의 권위와 신성과 인성, 그리고 그의 사역을 부인하며, 멸망의 길을 서슴없이 선택하는 이단의 보이지 않는 침입을 막아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의 눈을 크게 뜨고 이러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2:2 여럿이…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 '여럿이'로 번역된 헬라어 '폴로이는 '많은 사람이'로 번역하면 그 뜻이 보다 명확해진다. '호색'( 아세게이아스)은 복수로 쓰여 온갖 종류의 반복되는 성적인 행위를 가리키는데, 이는 이방 종교의 특색이었고 동시에 쾌락을 추구하는 문명사회의 공통적 현상이다.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성에 있어서는 미혹되기 쉬운 존재이다. 따라서 거짓을 가르치는 자들은 일종의 사탕발림으로 호색을 미끼로 삼아 사람을 멸망에 빠뜨린다.
진리의 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호도스 테스 알레데이아스'는 '구원의 길'(행 16:17), '주의 도'(행 18:25)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낱말로 흔히 그리스도교 자체를 가리킨다(창 24:48; 시 119:30).
멸망을 받을 것이요. - '음행'은 성경이 초지일관 금지하는 죄악이다(출 20:14; 신 5:18; 계 22:15). 그런 죄악이 교회 안에 있게 되면 교회는 안팎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롬 3:23,24; 딤전 6:1). 안으로는 죄가 퍼져 성령을 훼방하게 되며 밖으로는 교회의 윤리성에 흠집이 생겨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고로 호색은 교회 내에서 단호하게 배격되어야 하며, 그 호색을 조장하는 반 기독교적 사상이나 가르침은 처음부터 아예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2:3 탐심을 인하여… 이를 삼으니. -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호색하는 이단의 또 하나의 특징은 탐욕의 거짓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을 파괴하는 것이다. 탐심은 모든 죄를 범하게 하는 기본적인 악덕이다(약 1:15). 그래서 사도 바울은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고 정언하였다(골 3:5). '지은 말을 가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스토이스 로고이스'는 '흙 같은 것으로 빚어 만들다'라는 의미의 '플랏소'에서 유래한 말로 '목적 성취를 위해 꾸며낸 말을 가지고' 라는 의미이다. '이를 삼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포류손타이’는 '장사에 열중하다'는 의미를 가진 낱말로 신약에서는 본절과 약 4:13에서만 나온다. 본래 이 낱말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진 '엠포로스'에서 온 낱말이다. 따라서 본절은 이단자들의 자신들의 탐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장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이단자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서 마귀에게 팔아넘기는 것이다.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 이것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옛부터 있었으며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으되 마지막 심판에 의해 영벌을 받을 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체하지 아니하며, '자지 아니하느니라'는 표현은 옛적부터 거짓 선지자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이 깨어 계시사 거짓 교사들의 죄악을 간과하시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확신에 찬 표현이다. 하님의 심판은 옛적에 이미 출발하였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처음 작정하신 그 목표에 이르기까지 강하고 생생하게 진행될 것이며, 결코 실패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악인들이 마치 제때를 만난 듯이 악행을 계속한다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시다(시 121:1-8).
2:4-10a 거짓 교사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앞에서(1-3절) 거짓 교사 곧 이단의 출현에 대한 예고와 이단의 정체 및 속성에 대해 언급한 베드로는 이제 본문에서는 이단의 종교적 · 도덕적 타락상에 대해 일일이 언급하기 이전에 먼저 이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이단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을 입주하기 위해 베드로가 제시한 증거는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증거는 천상에서 하나님께 대해 범죄한 천사들, 곧 사단(Satan)과 그 수하의 마귀들이 천상에서 쫓겨나는 심판을 받았으며, 또 최후의 심판 날에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 작정되어 있다는 것이다(4절; 유 1:6). 둘째 증거는 노아 홍수 심판 때에 모든 불의한 자들이 홍수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며, 심판받지 않은 자들은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었다는 것이다(56절). 셋째 증거는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해 심판하실 때에도 의로운 롯을 제외한 모든 불의한 자들이 다 멸망했다는 것이다 (6-8절). 그러므로 경건한 자는 구원하시고 불의한 자에게는 반드시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절대공의(絶對公義)에 근거해서 볼 때 불의한 이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자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9,10절). 이러한 심판의 경고는 비단 거짓 교사들 곧 이단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이는 초대 교회 당시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로 하여금 이단에 미혹되어 불의에 지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발견하는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불의한 자들이 현재는 이 세상에서 온갖 불법을 행하면서도 번영을 누리고 있으나 종국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때 우리 성도들은 모순된 현실 속에서도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더욱 경건생활에 매진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합 1:12-17; 2:3,4).
② 홍수 심판과 소돔과 고모라 성 심판 때에 각각 노아의 여덟 식구와 롯을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경견한 성도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비록 잠시의 고통과 어려움은 있지만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깊은 사랑인가!
2:4 범죄한 천사들. - 헬라어 원문에는 본절 초두가 '만일…이라면 (에이 가르)의 조건절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본절에서부터 시작되어 10절까지 계속되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그들도 그렇게 심판하셨는데 거짓 교사들을 심판하시지 않겠느냐'라는 것이다. 저자는 지체하지 아니하고 졸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형벌을 받은 첫 번째 실례로 타락한 천사를 든다. 이들은 천상계의 창조 때에는 본래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이었으나 교만으로 말미암아(사 14:12-14) 혹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유 1:6) 하나님과 원수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천사이다. 이가 곧 '마귀’이다.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르타로스'는 '음부의 깊은 심연'을 가리키는 말로 신약에서는 본절에서만 보이는 용어이다. 그러나 이 낱말이 음부의 깊은 심연'을 뜻한다고 해서 성경이 흔히 '지옥'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게엔나'와 같은 곳을 말하는 용어는 아니다(Lumby, Vincent). 아마도 이곳은 '게엔나' 중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마귀 및 그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받기 위해 갇히는 어둡고 음침한 곳으로 여겨진다(계 20:1-3). 특별히 여기서 '어두운 구덩의에'로 번역된 '세이라이스 조푸’는 문자적으로 어두움의 결박(유 1:6)을 의미하는 것으로 타락한 천사들의 비참한 처지를 잘 나타내 준다. 즉 타락한 천사들은 지옥의 흑암에서 결박당한 채 심판을 기다리게 되며 마지막 심판 때에 그곳에서 끌려나와 영원한 불못에 처해지는 형벌을 받게 된다(계 20:7-10). 한편 본 구절은 유 1:6과 병행 구절로서 그곳에서도 범죄한 천사들이 결박되어 흑암에 갇힌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마귀는 자유롭게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으며(벧전 5:8)그가 그를 따르는 악한 영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다(엡 6:10-12). 이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우리는 이를 하나님께서 타락한 천사의 일부는 지옥에 가두고 또 일부는 심판 날까지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용하신 것으로 이해한다(Blum).
2:5 옛 세상. - 여기서 '옛 세상'이란 노아의 홍수로 말미암아 멸망한 홍수 이전 세대를 지칭한다. 저자가 노아 홍수 이전 세대를 '옛 세상' 이라고 표현한 것은 노아의 홍수가 멸망과 구원을 상징하는 구분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멸망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듯이(계 20:11-21:1), 노아의 홍수도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고 새 세상을 시작케 하였기 때문에 물로 멸망한 홍수 이전의 세대를 옛 세상이라고 한 것이다(White).
의를 전파하는. - 창세기의 기사를 보면 노아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드로의 손을 빌어 노아가 그 때에 의를 전파했다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계신다. 죄악이 관영한 때에 노아는 의를 행하고 전파했으나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죄의 길을 걸어갔으며, 지체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을 멸절시키셨던 것이다.
노아와 그 일곱 식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오그도온 노에’로 이것을 직역하면 '여덟 번째인 노아' 이다. 저자는 노아의 세 아들과 세 며느리, 그리고 노아의 아내 다음으로 노아가 여덟 번째라고 표현함으로써 노아의 가족 8명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2:6 소돔과 고모라 성을…재가 되게 하사. -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지 않다는 것에 대한 세 번째 예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원인은 음란의 죄 때문이었다(7절; 창 19:5,8; 유 1:7). 그리고 그 음란의 성들은 노아 시대의 불경건한 자들이 물로 심판을 받은 것과는 달리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다(창 19:24,25). '멸망하기로 정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스트로페 카테크리넨'은 본서와 창 19:29의 70인역(LXX)에만 나오는 용어로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이 훗날의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 본으로 삼기 위하여 정하였음을 시사한다. 또한 '재가 되게 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프로사스'는 '재로 덮다'라는 의미로 소돔과 고모라 성에 내린 불심판의 정도가 어떠하였는지를 잘 보여 주는 표현이다.
본을 삼으셨으며. - 소돔과 고모라에게 내린 불심판은 성경에서 자주 죄인들에 대한 멸망의 경고의 재료로 사용되었으며(신 29:22,23; 시 107:34; 사 13:19; 렘 49:18; 50:40; 암 4:11; 습 2:9) 이것은 종말의 때에 반드시 있을 최후 심판을 예표한다.
2: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 - '무법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데스모스’ 는 부정 접두어 '아'와 '본성'을 뜻하는 '데스모스'의 합성어로서 '본성과 양심의 법에 대하여 거역하는' 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음란한 행실' 은 2절에 나타난 호색과 같은 단어로 온갖 종류의 반복되는 변태적안 성(性) 행위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리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심어 놓은 양심의 법까지도 거스린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에 있는 성들에 거주하던 자들이 그 대표적인 전형들이었다. 그들은 가장 반인간적인 죄악을 서슴지 않고 행하였으며 기본적인 창조질서마저도 깨뜨린 무법자들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현대 문명의 타락상 속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 역시 그러한 무법자들로 둘러싸여 있음을 직시하고 더욱 깨어 기도하고 애통해 하며 경건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고통하는 의로운 롯. -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서 아브라함과 함께 양을 치다가 규모가 커짐에 따라 아브라함에게서 독립할 때 영적인 안목이 적어 곧 멸망할 죄악이 관영한 땅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뒤(창 13:1-11),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 겨우 구원받은(창 19:16) 한 마디로 불 가운데서 구원함을 입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편 본절에서 그를 '의인' 아라고 부르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할만큼 이기적이었고, 죄악의 도시에 깊숙이 들어가 살아갔고, 또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이후 두 딸과 동침하여 자손을 이은 자이다(창 19:30-38). 이렇듯 그는 비록 다른 믿음의 선진들처럼 뛰어나고 성숙한 하나님의 종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믿음을 통해 최소한 죄악을 보고 고통해 하는 의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여기시고 그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롯의 경우를 통해 구원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롬 1:17; 히 11장).
2: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 한글 개역 성경과 KJV, RSV와 같은 영역 성경들에는 본절이 괄호로 되어 있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괄호가 없다. 또한 헬라어 원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왜냐하면'(가르)이 있는데 이로써 본절이 롯이 불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불법한 행실'(아노모이스 에르고이스)은 '법에 배반되는 행실'이란 뜻으로 7절에서 언급된 '무법한 자들의 모든 행실'을 가리킨다.
날마다…보고 들음으로. -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얼마나 관영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날마다' 음행을 저질렀으며, 의로운 롯이 보고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공공연히' 행해졌던 것이다.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 이것이 롯이 의롭다함을 받아 멸망에서 건짐을 받은 이유이다. '심령'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쉬케’로서 이 낱말은 '생명' 또는 '영혼'을 의미한다. '상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사니조'는 '괴롭히다'(마 8:6,29), '고통을 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로 보건대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상을 날마다 보고 듣는 가운데 마음과 영이 상하여 심한 내적 고통을 당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 어여삐 여겨져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 얻게 된 것이다(창 19:4-11; 전 7:20).
2:9 경건한 자는…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 본절은 4절에서부터 계속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실례의 결론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는 자와 반대로 하나님을 거역하며 불의와 음란을 행하는 자가 궁국적으로 처하게 될 결과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시험은 성도들을 연단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trial)을 가리키는데(약 1:2 주석 참조)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러한 시련에서 건지신다. 벧전 1:6 주석 참조. 또한 '형벌 아래 - 두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콜라조메누스'는 '형벌을 버리다'라는 뜻을 가진 '콜라조'의 현재분사로서 현재도 계속 형벌을 받고 있으며 주의 재림 때에 가서 대심판을 받을 것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노아를 구원하시고 롯을 건지신 것과 같이 자기를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의롭고 경건한 자는 '반드시' 구원하신다. 그리고 그와 정반대로 자기를 거역하고 그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노아 시대의 행악자들과 소돔과 고모라의 성읍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같이 형벌 아래 두셨다가 마지막 날에 영벌을 내리신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겉보기에는 세상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상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요 3:18-20).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상태로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형벌인 것이다.
2:10b-19 거짓 교사의 불의
앞에서 (4-10a절) 거짓 교사 곧 이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에 대해 언급한 베드로는 이제 본문에서는 그들이 그렇게 심판을 받게 되는 필연적인 이유들로서 이단의 종교적 · 도덕적 타락상에 대해 조목조목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단(異端)은 그 본성 자체가 교만하다는 것이다(10b-12절). 때문에 훨씬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조차도 자신이 마땅히 서야 할 위치를 넘지 않고 본분을 지키는데, 이들은 마치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하나님을 훼방하며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비방하고 헐뜯는다는 것이다. 둘째, 이단은 도덕적으로 극도로 방종하여 세상 연락(宴樂)을 즐길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쉬임없이 행하되, 음심(心)이 가득하며 불의의 값을 사랑한다는 것이다(13-16절). 셋째, 이단은 과거의 죄악된 행위들을 버리고 이제 막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려는 초신자들을 미혹하여 다시 육체의 방탕과 타락에로 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17-19절). 베드로는 이렇게 이단의 종교적·도덕적 타락상에 대해 열거하면서도 계속해서 이런 자들은 반드시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여 주고 있다(12,17,19절).
이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세 번째 사항이다. 초대 교회 당시 교회에는 이제 막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됨으로 인해 갓 개종한 이방인 성도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아직 과거의 죄악된 행위들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충분한 지식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도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주로 이런 초신자들을 집중 공략하여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 진리를 악용하여,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구원은 보장된 것이며 무슨 행위를 하든지 어떠한 법적 제한도 받지 않는다는 잘못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종교적 . 도덕적 방종에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는 얼핏 보기에는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참 믿음을 가진 성도는 마땅히 참된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영적 진리를 완전히 무시한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요 15장). 이처럼 거짓 교사들은 표면상으로는 진리를 내세우고 있는 듯하나 실상은 아담 이후 전 인류가 갖고 있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여 그것대로 살도록 미혹함으로써 종국에는 멸망의 길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단의 교묘한 책동은 비단 초대 교회 당시에 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에 와서 이단은 더욱 교묘하고 교활한 모습으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이생의 자랑과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빠지도록(요일 2:15,16) 하는바, 성도들은 이를 철저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는 베드로의 교훈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2: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 이것은 2절과 3절에 언급된 호색과 탐심의 죄악을 지칭한다(유 1:8). 호색과 탐심은 육체의 정욕으로 인해 짓는 가장 대표적인 죄악으로 하나님께서 심히 미워하시는 윤리적 죄상이다.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아시느니라. - 본문의 '주관하는 이'(퀴리오테스)에 대하여 혹자는 천사라고도 하며(Bricker), 혹자는 정권자라고도 하고(Calvin, Clarke, Hofmann), 혹자는 교회 지도자라고도 하며(Zahn), 혹자는 자신보다 위에 있는 모든 권세자라고 해석하기도 한다(Caffin).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문맥에서 벗어난 해석들이다. 본절이 지칭하는 '주관하는 이'는 1절이 말한 '자기들을 사신 주', 곧 세상과 만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Weiss, Wiesinger, Von Soden, Meyer, Bigg). 저자는 앞부분에서 윤리적 죄상을 언급한 뒤 여기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경의 죄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불경죄는 율법이 금하는 죄 중에서 가장 무거운 죄악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신다. 결국 하나님께 대해서나 사람에 대해서나 육신을 좇아 범죄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한편 본구절까지 이어지는 10절 상반절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을 언급하고 있는 4-10절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10-19절까지에서는 거짓 교사들의 불의한 죄상을 언급하고 있다.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훼방하거니와. - '담대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톨메타이'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 대한 당돌함을 의미하며 신약에서는 본절에서만 사용된 낱말이다. '고집하여'에 사용된 헬라어 '아우다데이스'는 '아우토스'와 '헤도마이'(douae)가 합성된 형용사로서 본래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거만한'이라는 뜻이다. 신약에서는 본절과 딛 1:7에만 나오며, '자기의 만족에 따라 남을 의식하지 않고 고집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훼방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메오' 는 '중상하다', '불경을 저지르다', '참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이다. 결국 본문은 1절에서의 '멸망을 스스로 취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범죄하되 일말의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고 고의로 행악하는 가장 패역한 행동을 말한다. 육체를 따라 행악하며 거짓을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로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사 지옥의 가장 깊은 곳으로 던져버리신다(계 20:10).
영광 있는 자. - 이에 대해서도 앞의 '주관하는 이'와 같이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선한 천사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며(Ritshel, Von Soden, Alford), 혹자는 악한 천사라고도 해석하고(Scott, Meyer, Bengel), 혹자는 선과 악의 천사를 다 지칭한다고 주장한다(Kühl, Spitta, Strachan). 또 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alvin). 이러한 견해들 가운데 본절과 병행을 이루는 유 1:8에 비추어볼 때 마지막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2: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 여기서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은 유 1:9에 나타나는 미가엘과 같이 '선한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저희'는 '거짓 교사들' 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선한 천사들이 큰 힘과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짓 교사들을 정죄하거나 주께 고소하지 않는다는 말로, 자기 분수를 모르고 교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거짓 교사들의 악행을 역설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유 1:9 주석 참조.
2:12 이 사람들. - 온갖 육적인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멸시하며 거룩한 이들을 훼방하는 거짓 교사들을 말한다. 한편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멸망당함을 잡혀 죽을 수밖에 없는, 짐승에 비유하고 있다(계 13:11-13).
잡혀 죽기 위하여. - 이 말은 본래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 잡혀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영원한 심판의 형벌을 받을 것을 뜻한다.
이성 없는 짐승. - 오직 범죄하는 것밖에 모르는 거짓 교사들은 그 양심이 화인 맞아서 하나님의 의를 분간치 못할 뿐더러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양심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판단력 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간다(롬 1:24,25). 영의 세계에 있어서 영적으로 무지한 자는 금수와 동일한 것이다.
그 알지 못한 것. - 영광과 거룩에 관한 것을 가리킨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그 영광과 거룩을 소유한 자들을 어처구니없이 훼방한다(10절). 이와 같이 불신의 근본원인은 영적 문제에 있다(딤전 1:13).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 거짓 교사들의 멸망이 필연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병행구인 유 1:10과 비교해서 볼 때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거짓 선생들이 본능을 따라 행하는 것, 즉 진리에 대한 무지로 인해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2: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 이것은 심은대로 거둔다는 뜻으로 불의한 자들은 불의한 행위로 행악하여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고 하나님을 능욕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대로 심판의 보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낮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헤메라'를 혹자는 '매일' 로 해석하기도 하며(Oecumenius), 혹자는 '일시적인'으로도 해석하나(Huther, Meyer, Alford),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낮 시간대에’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다(Zahn, Bigg, Strachan, Robertson). 거짓 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연회가 밤에 일어난다는 상식을 넘어 낮부터 연회를 열어 술 취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거짓 교사들은 말이나 사상으로써 뿐만 아니라 향락 풍조를 조성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훼방하고 기독교인들을 미혹함을 알 수 있다.
연락.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트뤼페'는 '연약하게 하다', '방종하게 하다’, ‘방탕하다'는 뜻을 가진 '드뤼프토'(Apinto)에서 온 말이다. 거짓 교사들은 연회를 열되 결코 선하고 유익되는 연회를 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영혼을 모두 망치게 하는 연회를 대낮부터 열고 그것을 기뻐한다고 저자는 우리에게 전해준다. 영적인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은 육적인 쾌락을 통해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
점과 홈이라. - '점(스필로스)은 '얼룩'을 뜻하며, '홈’ (LOS, 모모스)은 '과오’ 또는 '오점'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들은 거짓 교사들의 불의한 행동을 가리킨다. 거짓 교사들은 있어서 아름답거나 유익한 존재가 아니라 더럽고 해로운 존재들인 것이다.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뉴오쿠메노이'는 '함께'라는 뜻의 '쉰'(obv)과 '충분히 먹다'는 뜻의 '유오케오'가 결합된 동사 '쉬뉴오케오'의 현재 수동태 분사로서 직역하면 '너희와 함께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을 때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저들의 밤낮 베풀어지는 연락의 장소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모임 속에서도 자신들의 불의를 나타낸다는 것을 시사한다. 거짓 교사들은 양의 탈을 쓰고 가만히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의 연회에 함께 참여하여 거룩한 모임을 육체의 쾌락을 탐닉하는 기회로 삼고 더 나아가서 성도의 모임을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즐거움을 나눌 때에도 그 즐거움을 방탕으로 만들려는 악한 자들을 분변하여 거룩한 무리 가운데서 거룩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저희 간사한 가운데에. - 시내산 사본(X), 알렉산드리아 사본(A), 에브라임 사본(C), 모스코 사본(K) 등을 포함하는 대다수의 사본들은 본문의 원문을 '엔타이스 아파타이스'로 표기하여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저희 간사한 가운데'라는 의미로 표현하고 있으나, 바티칸 사본(B)만은 '엔 타이스아가파이스'로 표기하여 '저희 애찬 가운데'라는 의미로 표현하고 있다. 전자의 표현을 채택하면 본절은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거짓 교사들이 간사하게 방탕한 즐거움을 취하며'라는 뜻이 되고, 후자의 표현을 채택하면 '거짓 교사가 성도들의 애찬에 참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누지 않고 쾌락만을 일삼으며'라는 뜻이 된다. 본서가 유 1:12과 병행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유다서가 '애찬' 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므로 후자의 표현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2:14 음심이 가득한 눈. - '음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이칼리스'는 '음심' 이라고 번역될 뿐만 아니라(마 12:39; 16:4) '음녀'라고도 번역된다(롬 7:3; 약 4:4). 따라서 본문은 '음녀가 가득한 눈' 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눈에 음녀가 가득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여자를 볼 때 음탕한 생각이 없이는 여자를 보지 아니하는 호색의 욕정으로 가득한 것을 뜻한다(Meyer, White). 이러한 표현은 거짓 교사들이 교회의 거룩한 모임을 방탕의 시간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 여기서의 '범죄'란 음란의 죄를 지칭한다. 주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다(마 5:28). 따라서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여인을 보는 것은 이미 십계명의 제 7계명을 어기고 범죄한 것이다. 거짓 교사들은 이와 같이 음탕한 눈으로 쉴새 없이 범죄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눈으로만이 아닌 실제로 음란을 자행하는 부류였다(2절). 성이 개방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안목의 정욕이 미혹당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범죄에서 벗어나 시험에 들지 않도록 주께 기도하며 경건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 '연단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게컴나스메넨'으로, 이 낱말은 신체적 단련 또는 연습을 의미하는 '컴나조'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므로 '탐욕에 연단되었다'는 것은 '탐욕이 완전히 습관화되어서 거기에 익숙해졌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적응력을 가진 존재이되 특히 나쁜 것에는 쉽게 동화되어 버리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동화가 오래 지속되면 동화된 악습은 그의 인격에 침투하여 마치 그의 본성처럼 고착화되어 버린다. 거기까지 가면 그는 더 이상 죄의 권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저주받을 악인의 자리에 서게 된다. 거짓 교사들이란 바로 그런 자리에 서 있는 자들이다.
저주의 자식. - 이 낱말은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리라는 뜻을 가진 전형적인 히브리식 표현의 낱말이다. '멸망의 아들'(살후 2:3), '진노의 자녀'(엡 2:3)도 같은 표현이다.
2:15 바른 길.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러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생명과 의와 영광의 길을 뜻한다.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 - 브올의 아들 발람의 술수에 관한 기사는 민 22-24장에 나오는 것으로 본절과 다음 절은 그 내용을 바탕으로 말하는 교훈이다. 유 1:11에도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발람은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해달라는 청을 받았으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발락이 제공한 제물에 눈이 어두워져서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는 저주하지는 않았으나 모압의 여인들을 미끼로 이스라엘의 사내들이 음행의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제공하고 자신의 탐욕을 채웠다(계 2:14). 발람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 같았으나 내면은 음행과 탐욕으로 가득 찬 거짓 선지자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발람의 길을 좇는 거짓 교사들이 퍼뜨리는 음행에 넘어가지 말라고 교훈함과 동시에 거짓 선생들에 대해 발람처럼 멸망당할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 민수기에 나오는 발람의 기사를 보면 이러한 내용은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발람이 불의한 재물을 사랑했다는 것은 발람이 노상에서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 책망 받은 것에서 암시된다(민 22:21-35). 이 내용은 다음 절에서 보다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2:16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 민 22:23에 보면 하나님의 전사는 발람이 하나님 앞에서 패역하였다고 책망하였다. 여기서 '자기의 불법'은 자신의 부정한 이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도 저주하지 않은 자들을 저주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기려한 발람의 죄를 말한다.
말 못하는 나귀가…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 본구절은 앞에서의 '책망'의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탐심으로 가득차서 영의 눈이 먼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을 우화적으로 가르쳐 준다. 마음속에 불법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지 못하였으나 말 못하는 짐승은 그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 대신 말을 했던 것이다(민 22:21-35). 한편 여기서 '미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프로니안'은 '곁에'라는 뜻의 '파라'와 '마음'이란 뜻의 '프렌'이 결합하여 '마음 밖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말은 제 정신이 아닌 광기로부터 나오는 행동을 뜻하며 그 내용은 앞에서의 '자기의 불법'을 가리킨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여기서 발람의 미친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기 위하여 발락을 따라 가는 것 자체에 있지 않았고 그 따라 가는 마음의 동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진정 탐심은 인간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광기인 것이다.
2:17 이 사람들. - 하나님께로 가는 생명의 바른 길을 떠나 탐심과 음란에 미혹되어 발람의 길 좇는 거짓 교사들을 일컫는다.
물 없는 샘. - 이 말은 생명에 필수적인 물을 내지 못하는 샘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진리의 생명수를 전하지 못하는 거짓 교사는 무익한 자들이라는 것을 적절하게 설명해 주는 표현이다. 인간의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시는 유일한 분은 오직 생명 되신 그리스도이시다(요 4:14).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그 그리스도와 떠나 있으므로 생명수를 낼 수 없는 죽은 샘인 것이다(렘 2:13; 요 7:38).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 - '안개'로 번역된 헬라어 '호미클라이'가 모스코 사본(K)이나 레기우스 사본(L)에는 '구름'을 뜻하는 '네펠라이'로 되어 있으며 일부 영역 성경(KJV)에도 구름(clouds)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글 개역 성경에서와 같이 '안개'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안개' 란 밤에 생성되어 아침에만 잠깐 화려하게 보였다가 없어지는 것이다(약 4:14). 그런데 그러한 안개가 거센 바람에 밀려간다고 상상해 보라. 거짓 교사들은 그와 같이 잠시 세상을 미혹하다가 빛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사라져 없어져 버릴 허무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본절은 은유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나아가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참 빛이신 주님을 가리워 성도들로 하여금 실족케 하는 존재들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 여기서 '캄캄한 어두움'(호 조포스 투 스코투스)이란 거짓 교사들이 영원히 갇히게 될 지옥을 가리킨다(계 20:10). '예비되어 있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테레타이는 '완전히 하다', '끝 마치다'라는 뜻을 가진 '테레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이것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준비 완료되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2:18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 원문에서는 본절이 '왜냐하면', 이라는 뜻의 헬라어 '가르'로 시작되어 본절과 다음 절이 전절의 이유임을 보여 주고 있다. '허탄한'(마타이오테토스)이란 '빈', '헛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자랑의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롱코스'는 '과장하는', '더욱 부풀리는'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아무 내용도 가치도 없는 빈 말을 마치 크게 유의하고 가치 있는 것처럼 부풀려서 말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거짓 교사들의 거짓된 가르침의 속성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 가운데 반 성경적인 가치 체계를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마치 고상하고 아름답고 유익한 것 인양 과대 포장하여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풍조를 보고 우리는 그것이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거짓 선지자적 위선임을 깨달아 단호히 대처해야 할 것이다.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 - 이것은 죄악된 세상에서 막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의 일원이 된 초신자들을 가리킨다. '겨우'에 해당하는 헬라어 '올리고스'는 '약간', '조금'이란 뜻으로 그들의 신앙이 시간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극히 초보임을 나타내 준다.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 '음란으로써'에 해당하는 '아셀게이 아이스'는 도구 여격 복수로서 '음란한 행위로 인하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는 수단으로 '음란한 행위'를 사용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정욕 중에서'의 전치사 '중에서'(엔)는 사람들이 사는 '상태', '영역', '습관' 등을 나타내는 말로 거짓 교사들의 삶의 정욕에 빠져있는 상태임을 시사한다. 하여튼 음란은 타락으로 가는 첩경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모든 죄에 대해서는 대적하라고 했지만 음란에 대해서만은 피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고전 6:18).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음란의 죄는 아무리 경계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 '자유'(엘류데리아)는 거짓교사들의 '허탄한 자랑'의 핵심 주제로서 그들은 율법과 육체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니 더 이상 엄격한 도덕적 계율에 얽매이는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의 이러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요 8:32; 갈 5:1)를 오해한 것이다. 그러한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라 멸망으로 가가 전에 누리는 잠시의 자유, 곧 방종에 불과하다. 방종의 처음은 쾌락이요 마지막은 파멸이다(White). 거짓 교사들은 처음부터 마귀의 자식들이기 때문에(요 8:44) 멸망을 위해 일하는 멸망의 종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이 주시는 자유를 결코 줄 수 없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 이 말은 거짓 교사들이 왜 멸망의 종들인가를 설명해 주는 일종의 속담이다. 당시 사회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패전하면 패전국의 백성들은 가차 없이 승전국의 종으로 전락하였다. 마찬가지로 거짓 선지자들은 탐욕과 음란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의 도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멸망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다(롬 6:16).
2:20-22 거짓 교사의 미혹에 대한 경계
앞에서(10b-19절) 거짓 교사 곧 이단의 종교적 · 도덕적 불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베드로는 이제 본문에서는 이에 대한 결론적 권면으로서 거짓 교사들 또는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빠진 자들의 비참한 최후 상태를 개와 돼지에 비유하여 비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성도들이 거짓 교사에게 미혹되어 이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다.
본문에서 개와 돼지에 비유된 자들은 곧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으로 알고 옛 죄악된 행위들을 버리며, 또 심지어 입술로 신앙 고백까지 하나 실제로는 참 믿음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이들을 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무리와 대별되는 '저희'(20절)로 분명히 지적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로 볼 때 본문은 분명 참 믿음을 가진 성도가 그 믿음을 잃어버리고 다시 타락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그리스도를 참 믿음으로 영접지 아니하고 단지 지적으로만 알며 형식적으로만 그리스도인인 체하다가 다시 세상 죄악 가운데로 돌아가는 자들의 속성을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간접적으로 성도들에게 이단에 미혹되어 범죄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다. 즉 참 믿음을 가진 성도는 결코 완전히 타락에로 떨어지지는 않으나 죄악된 본성은 여전히 지니고 있는 연약한 존재라 범죄에 빠질 수는 있기에 개와 돼지라는 극단적인 비유를 들어 이를 경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실로 단지 입술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우리 자신이 가진 믿음대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있는지 겸손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마 7:21-23).
2:20 저희. - 이 대명사에 대해서는 ① 거짓 교사들(Alford, Meyer, Caffin), ②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어 넘어간 신자들(Bengel, Fronmiller, Strachan), ③ 일반적인 신자들(Zahn)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는데 문맥상으로는 거짓 교사들과 그들에게 미혹되어 넘어간 자들 둘 다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해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한 뒤에 (히 6:4,5).
다시…얽매이고 지면. - '얽매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플라켄테스'는 '섞어 짜다', '올가미를 씌우다', ‘속박하다'는 뜻을 가진 낱말로 본절과 딤후 2:4에서만 사용되었다. '지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헤트톤타이'로 이 낱말은 '반복해서 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재차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을 뜻한다.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 이것은 배교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나타내주는 말이다. 한편 본절은 한번 구원받은 자들이 다시 배교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한번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어떤 이들은 본절과 히 6:4-6; 10:26 등의 구절들을 근거로 하여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절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배교자들이 비록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며 자유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였으나 진리에 순종치 아니한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듯이 교회 안에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참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같이 섞여 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구분할 수 없으나 어떤 환난이나 유혹의 상황이 되면 그들은 구분지어진다(고후 13:5; 딤후 2:18,19; 요일 2:19; 3:7,8). 그러므로 여기서 베드로가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라고 한 자들은 참으로 구원받지 못했던 가라지 그리스도인 또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한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히 6장 자료노트, '한번 비침을 얻고 타락한 자'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이러한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곱 귀신의 비유'(마 12:43-45)를 연상케 하는데 두 교훈은 다같이 영적인 변화가 없는 거짓 믿음을 가진 자들의 최후 상태가 매우 비참할 것을 나타내고 있다.
2:21 의의 도. - 본장 2절의 '진리의 도'와 같은 의미의 낱말로서 기독교 진리, 즉 복음을 가리키는 말이다(마 21:32).
거룩한 명령. -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알고 그 앎을 실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실행해야 할 신앙의 실천 덕목(마 5:1-7:27; 벧후 1:5-7)을 말한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나으니라. - 이 말은 어차피 멸망에 이를 것이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알고 난 뒤 다시 타락한 자는 영원히 다시는 영생을 얻을 기회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히 3:12-14; 4:6; 6:6; 10:26,38,39) 심판의 형벌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10절).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비난을 속담을 인용함으로 결론짓고 있다. 이러한 본절은 잠 26:11인용으로, 저자가 잠언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참 속담' 이라고 표현한 것은 잠언의 내용이 불변의 진리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배교한 자들에게 딱 들어맞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개가 돌아가고 돼지가… 도로 누웠다. - 개가 자신이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는 이야기는 잠 26:11에서 따온 말씀이며, 씻은 돼지가 더러운 시궁창에 도로 눕는다는 것은 당시의 속담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Robertson, White). 아무튼 이 두 재의 속담들은 나쁜 것에서 떠났다가 다시 그 나쁜 것으로 되돌아간다는 어리석고 미련한 짓을 비유적으로 설명해 주는 아주 적절한 속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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