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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장 새하늘과 새땅 및 새예루살렘에 대한 묵시들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주의 재림과 사탄의 세력들의 멸망, 그리고 현 우주의 붕괴와 전 인류의 대부활, 최후 백보좌 심판 및 현 우주의 완전한 갱신으로 마침내 현 우주와 역사가 종결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최종적으로 도래하는 일련의 폭발적 사건, 즉 현 우주와 역사의 결정적 종말 자체를 전후한 사건들 곧 소위 '대종말 사건'을 보도하는 19:1-22:5에 걸친 일련 기사의 후반부 기사이다.
또한 본장은 좁게는 19:1-22:5의 일련 기사 중에도 현 역사는 최종 종결되고 현 우주는 갱신되어 마침내 새로이 도래할 신천신지(新天新地) 곧 새 하늘과 새 땅 및 그 신천 신지에서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묵시를 기록한 21:1-22:5 기사의 앞부분이다.
이런 문맥 하에 있는 본장에 즈음하여, 신천 신지의 최종 도래와 그 신천 신지 중에서도 구원받은 성도가 거할 천국, 그리고 그중에서도 천국의 중심이 될 새 예루살렘 성과 천국 일반이 구원받은 성도가 영복을 누릴 거처로서 갖는 완벽성을 노래함으로써 구속사의 최종점인 천국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을 전성경의 말미에 위치시켜 놓음으로 그 어떤 성경 본문보다도 가장 응축적으로 제시하는 21:1-22:5의 소위 '신천 신지의 묵시들'의 관련 기사 전반을 일단 일람하면 다음과 같다.
첫 단락인 21:1-8은 이제 최후의 백보좌 심판으로 태초부터 이 세상에 혼재되어 오던 하나님의 뜻과 사탄의 뜻, 그리고 선과 악이 영구히 분리되어 모든 갈등이 종식되고 이미 백보좌 심판 직전의 전 인류의 대 부활 당시 일단 환전 붕괴된 현 우주를 이제 하나님께서 전면 갱신하여 새로이 조성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각각 영복과 영벌의 장소로서 천국과 지옥이 개설되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리고 이에 첨가하여 천국 및 지옥 심판의 확실성을 거듭 강조하시며 경고하신 말씀도 보도된다.
다음 21:9-27은 새하늘과 새땅 안에 구원받은 성도의 축복의 처소로 개설된 천국의 중심지인 동시에 구원받은 성도의 전공동체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묵시가 제시된다. 특히 이 묵시들은 새예루살렘은 죄와 질고로 오염된 현 세상과는 절대 무관한 순수지복의 공동체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것이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옴을 강조하는 동시에 신.구약 성경 계시 전체 및 태초부터 종말까지의 신 구약 시대 구속사 전체와 연속성을 가지는 동시에 그것의 완성임을 각각 다양한 측떤과 관점에서 강력히 암시한다. 이런 맥락 하에서 9-17절은 순수지복의 완전한 공동체요 공간이 될 새 예루살렘의 기원과 모양 및 규모를, 그리고 18-21절은 새 예루살렘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를 보여 줌으로써 그것의 절대 영광을, 22-27절은 새 예루살렘에서의 구원받은 성도의 생활의 특징을 묘사함으로써 그 축복의 완전성을 각각 제시한다.
끝으로 22:1-5은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 개설되어 구원받은 성도의 처소로서 영구히 존속할 천국 전체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 그리고 그의 영원성과 완전성을 거듭 제시함으로써 다시 한 번 성도에게 약동하는 소망과 환회를 주고 있다.
이상처럼 요약될 수 있는 소위 신천 신지 관련 묵시들은 그 세부 문단 각각의 내용 자체도 실로 말할 수 얼이 황홀하고도 원대한 이미지와 거기에 담긴 심오한 교훈으로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구속사(救贖史)의 일부 시대나 어느 한 측면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실로 현 우주와 역사의 종말과 신천 신지의 도래로 새 역사 및 새 세상이 개시될 것이라는 구속사의 절정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세부 문단별 의의는 해당 강해 주석에서 다루기로 하고 본 개관에서는 태초부터 종말까지의 구속사의 전지 평에서 이처럼 현 세상과 그 역사의 종말을 넘어 새 세상과 새 역사가 도래한 사실과 그 도래할 새 세상의 복된 면모를 보여주는 이 신천 신지 관련 기사의 전반적인 구속사적 의의만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엇보다 먼저 성경(聖經)이 이처럼 그 가장 마지막 책의 그것도 말미에서 세상 끝 날에 구속사가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현 역사의 종말과 영원한 새 세상이 도래할 것을 보여 준다는 사실은 전날 성경이 그 첫 책인 창세기를 현 세상과 역사의 창조로 막을 연 사실과 강력히 대조되면서 실로 성경은 태초에서 종말까지, 아니 영원에서 영원까지의 구속사의 전 지평을 제시하는 위대하고도 유일한 계시의 책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리하여 오직 찰나만을 명멸하다 사라지는 하루살이와 같은 인간. 그것도 죄성으로 오염된 세상의 온갖 모순과 질고에 휩싸여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성경만이 역사와 우주의 존재론적 위치와 질서, 그리고 인생의 나아갈 방향과 구원의 길에 대하여 해답을 줄 수가 있음을 강력히 암시한다. 실로 현 우주와 역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절대 초월자에 의한 창조론(創造論)을, 그리고 그 미래에 대해서는 일단 현 우주와 그 역사가 종결되는 반면 그저 단순한 개선이나 회복이 아닌 완전히 갱신된 새 우주와 새 역사가 단절적 비약을 통해 새로이 개시될 것이라는 종말론(終末論)을 진실 그 자체와 한 점의 모순없이 제시함으로써 전 우주와 역사의 질서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와 아울러 그에 근거한 인생의 가치와 바른 삶의 길은 물론 영원한 구원의 길까지 제시하는 진리는 인간의 명상이나 탐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된 성경밖에 없다(딤후 3:15-17; 벧후 1:21).
복되도다. 성경으로 깨우침과 인도함을 받는 우리 성도는!
둘째, 이런 신천 신지 관련 기사 전체가 전제하는 바요 결론하는 바인 현 세상과 역사는 그것 자체가 스스로 완전해져 가거나 아니면 영원할 것이 아니라 분명 그 종말을 맞을 것이며 또한 그 종말도 단순한 파국이나 붕괴가 아니라 영원하고 완전한 새 세상과 새 역사로 비약할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현 세상의 본질과 그 운명에 대한 구속사적 인식을 새로이 해줄 뿐만 아니라 도래하는 새 세상과 새 역사를 희구하는 강렬한 구속사적 소망을 갖게 해준다. 그리하여 너무나 단순하지만 너무나 중대한 다음의 원론적인 구속사적 인생관의 진정성을 거듭 확신케 해주는 것이다. 즉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몸담고 살고 있으나 이 세상과 이 인생이 우리의 진실한 거처와 인생 전체가 아님을 각성시켜 준다.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역사의 이면에서 구속사가 도도히 흘러 마침내 현 역사의 종말과 새 세상의 도래가 을 것인바 매순간 이 땅에서의 삶에 충실하면서도 거기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아니하고 영원한 본향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구속사적 인생관의 참됨과 중요함을 거듭 깨닫게 해준다. 그렇다면 진정 바로 이 시간의 나의 삶은 천국을 온 몸과 마음으로 지향하는 선한 순례자(the Pilgrim)의 삶인가?
셋째, 새로이 도래할 새하늘과 새땅에는 성도의 영복의 장소로서의 천국뿐만 아니라 사탄과 그의 죄성에 동참하고도 끝내 회개치 않던 자들의 영벌의 장소로서의 지옥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새 세상의 묵시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이후의 결과와 양상을 보도함에 있어서 지옥에 대해서는 단순히 지옥의 존재와 거기에서의 형벌에 대하여, 그것도 예언적 경고로서 말한 21:8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오직 천국의 영광과 기쁨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근본 관심은 심판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과 구원받은 성도에게 우선적으로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기사를 대하면서 우리는 실로 우리의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실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가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단순히 공의에 의한 냉엄한 지옥 형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분의 뜨거운 구원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구속사의 섭리에 순복할 것을 결단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그러하다! 구속사는 법 이전에 사랑으로 유지되고 진행되는 것이다(요 3:16)!
넷째, 신천 신지의 묵시들은 그 절대지복의 나라 곧 천국이 도래하는 필연적 과정으로서 사탄과 인간의 타락과 범죄 이래 끊임없이 죄성으로 오염된 현 세상이 붕괴되고 신천 신지로 전혀 새로이 갱신될 일과, 또한 절대지복의 나라인 천국의 근본 양상으로서 인간의 범죄로 파괴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이는 죄성으로 오염된 인간과 세상은 그 자체로는 결코 완전한 평화와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강력히 암시한다. 또한 성경이 여타 부분에서 우리의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결국 전인생의 모든 질고의 원인이었음을 강조하였듯이 이제 본문이 이미 십자가 대속 수난으로 성취된 우리 주 예수의 구속 사역의 최종 실현으로서의 천국이 도래하는 필연적 과정 또는 그 근본 양상이 그 옛날 범죄 이전의 에덴동산에서와 같이 하나님과 성도가 그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고 이제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는 것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사실은,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이를 믿고 회개하는 인간의 죄가 대속되고 나아가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천국 구원을 주신다는 일관된 진리로 태초부터 종말까지 진행됨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나는 성도로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있는가? (고후 6:1-3)
다섯째로 신천 신지의 묵시들은 그 내용 중에 거듭하여 신천 신지에 개설될 천국의 신성한 아름다움과 영광의 완전성, 그리고 천국에는 오직 기쁨과 평화만이 있다는 그 축복의 순수 절대성, 그리고 이런 천국은 무궁할 것이라는 천국의 영원성 등을 강조한다. 이는 두말할 것 없이 만세대의 성도들에게 그들이 처한 삶의 모든 정황을 극복하고 그 언제나 천국을 바라보며 약동하는 구속사적 희망을 갖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성도여 천국으로 전진하자! 날아오르는 젊은 독수리처럼(사 40:31)!
외울 말씀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에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丹粧)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術客)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얘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쩨 사망이라
새 예루살렘의 기원과 모양과 규모
9 ○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밝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城廓)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 얘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18 그 성곽은 백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계는 옥수(玉髓)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골째는 황옥이요 여덟쩨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둘째는 자정(紫晶)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
이 그 등(燈)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중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21:2 성도를 위하여 세상 끝 날에 예비된 것 10가지
1. 하나님의 나라(마 25:34)
2. 생명의 부활(요 5:29)
3. 성도들의 처소(요 14:2,3)
4. 큰 영광(롬 9:23)
5. 의의 면류관(딤후 4:8)
6. 영원한 생명(딛 1:2)
7. 지상의 것보다 더 좋은 것들(히 11:4)
8. 영혼의 구원(벧전 1:5)
9. 성도의 온전케 됨(벧전 5:10)
10.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계 21:2)
주요주제-21:5 재창조
사 43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21:7 하나님의 양자된 자들의 12대 특권
갈 4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21:8 성경에 나타난 사망의 종류
1. 영적 사망:
모든 사람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아담이 범죄할 때 정죄되어 영적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창 2:16,17; 3:22-24)
2. 육적 사망: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일단 선악과 언약대로 성도나 불신자 모두 그 영혼과 현세의 몸이 분리됨으로 당하는 육체적 죽음(롬 6:23; 히 9:27)
3. 영원한 사망:
영적 사망의 최후 상태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어 영적 사망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불신자들이 세상 끝날 심판을 받아 영원한 고통과 슬픔에 처하게 된 상태. 성경은 이를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함(계 20:6,14; 21:8)
원어연구-21:8, 흉악한 자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엡델뤼그메노이스'로서 '브델뤼쏘'의 수동태 분사형이다. 여기서 '브델뤼쏘'는 능동태로 쓰일 때는 고약한 냄새를 풍겨서 '더럽게 하다', '몹시 싫어하는 것이 되게 하다'는 뜻을, 중간태로 쓰일 때는 '악취 때문에 외면하다',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다'는 뜻을 갖는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경우는 우상숭배 행위(롬 2:22), 또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딛 1:16), 이방 종교의 가중한 것들(계 17:4,5)에 대해서이며 구약 헬라어 역본 성경인 70인역(LⅩⅩ)에서는 근친상간, 수간 등과 같은 도덕적으로 극도로 타락한 행위들에 대해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특별하게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신성 모독 행위를 가리켜서도 사용되었다(살후 2:3,4).
한편 본문에서 이 단어는 수동태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몹시 경멸할 자들', 또는 '가중한 자들'이란 뜻이 된다. 이는 결국 도덕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극도로 부패하여 전혀 보기에도 싫은 경멸스러운 자들을 가리킨다.
신학용어-21:1-27 새하늘과 새땅 및 새예루살렘
1. 용어의 이해
① 새하늘과 새땅: 종말에 현재의 지구를 포함한 전우주의 구조와 그러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모든 법칙이 전면 붕괴되고 그 구성 요소들이 모두 다 태초의 상태 곧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으나 아직 현 우주처럼 조성되지 않았던 상태(창 1:2)와 유사한 상태로 복귀될 것이다(벧후 3:10; 계 20:11). 왜냐하면 태초의 전피조물의 대표인 인간의 타락으로 전우주도 오염된바 이는 영원한 구원과 심판의 처소로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름 8:20-23). 그후 이제 새로운 영생과 영벌의 장소인 천국과 지옥을 그 안에 가진 새 땅이 현 우주를 전면 갱신하여 새로이 조성되는 방식으로 도래할 것이다. 흔히 새하늘과 새땅을 그대로 공간으로서의 천국과 동일시 내지 혼동하는 경향이 많으나 천국과 함께 공간으로서의 지옥도 대종말 이후에 영속할 것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바 지옥과 그에 대조되는 천국을 포함한 전우주적 개념으로 신천 신지를 정의하고 이를 천국과 구분해야 할 것이다.
② 천국: 이는 예수의 구속 사역으로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시작한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와는 구분되는 성도를 위한 종말론적 영복의 장소 곧 공간으로서의 천국이다. 이 같은 예수의 재림과 백보좌 심판 이후에 현 우주를 전면 갱신하여 조성된 새하늘과 새땅 안에 비로소 개시될 영복의 공간으로서의 천국에 대한 언급은 신약 성경 도처에서 발견된다(마 8:11; 18:3; 25:1; 눅 6:23; 히 12:22; 딤후 4:18; 계 22:1-5).
③ 새예루살렘: 이는 광의적으로 쓰이면 공간으로서의 천국은 물론 그러한 천국 공간 및 그 안에서 살 전성도를 포함한 천국 공동체를 총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는 예루살렘이 이 땅에서 구약 선민 이스라엘 나라의 수도였던 사실에 기인하여 성도들의 영복의 공간으로서의 천국의 중심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2. 신천 신지의 도래 과정
천국과 지옥을 망라한 신천 신지의 도래 과정에 대해서도 그것이 단순히 예수 재림 직전이나 직후 아니면 백보좌 심판 이후 일시에 도래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기실 신천 신지 자체가 직접적으로 최종 조성되어 개시되는 것은 백보좌 심판 직후이나 현우주의 붕괴와의 연속으로서의 신천 신지의 도래 전 과정은 그 사이 사이의 일련의 소위 대종말 사건들과 관련하여 다음의 단계를 거친다.
① 현 세속 문명의 붕괴-말세의 삼대 7중 재앙 중 최종 재앙인 일곱째 대접 재앙의 결과(계 16:17-18:24)
② 최후의 대전쟁-아타겟돈, 곧 곡과 마곡의 전쟁(계 19:17-12; 20:7)
③ 예수의 재림과 사탄 및 악령의 멸망-계 19:6-16; 20:9,10
④ 현 우주의 붕괴-벧후 3:10; 계 20:11
⑤ 전인류의 대부활-계 20:11-15
⑥ 백보좌 심판-계 20:11-15
⑦ 신천 신지의 조성으로 인한 천국 및 지옥의 개설-계 21:27
3. 의의
말세에 이르러 표면적으로는 사탄의 최후 반역으로 인하여 그리고 이면적으로는 사탄과 그의 죄성으로 오염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점진적 심판으로 인하여 상당 기간의 범우주적 대환난이 필연적이다. 그리고 마침내 현세상과 우주는 전면 붕괴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만 그 과정일 뿐 궁극적으로는 대종말은 신천 신지와 그 안에서의 새역사의 도래로 귀결될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 기독교 성도로 하여금 현역사와 세상에 대하여 무조건적 낙관이나 염세를 넘어 엄정한 종말론적 비전하에서 궁극적 희망을 갖게 해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러한 대종말을 포함한 전구속사의 지평에 대한 비전 위에서 이 땅에 살면서도 늘 천국을 지향하는 역동적 삶을 살 수 있는 것이고 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1:1-8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
4:2의 보좌로부터 시작하여 20:11의 보좌로 끝난 악에 대한 심판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발진하여, 인(印)을 떼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일곱 인 나팔 대접 재앙이라는 최종적인 대종말 직전에 이 세상에 있을 삼대 칠중 재앙이 집행되어지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악의 세력을 제압하신 뒤 모든 인류를 부활시키시사 백보좌 심판으로 모든 악을 진멸하시어 모든 것을 정리하시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심판과 구속의 대역사(大役史)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낡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의 심판에서 건져내시고 구원을 입게 하사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자들이 들어갈 하늘나라와 그 하늘나라에서의 축복된 삶에 관한 묘사뿐이다. 그리고 본문부터 22:5까지에는 적절하게 그것에 관해 잘 묘사해 놓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제 본문에서 가장 아름답고 최음적인 장면과 주제를 담고 있는 계시의 절정 부분에 이르른 것이다. 더욱이 본서의 기록 목적이 지금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 받는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격려를 주는 것인 만큼, 악의 궁극적 멸망과 함께 성도가 누릴 영원한 복락이 찬란하게 펼쳐지는 이 부분은 모든 계시의 정점(頂點)이요 백미(白眉)라고 아니할 수 없다.
본문은 이러한 계시의 백미요 절정 부분 중 첫 번째 단락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으로서 영원한 안식 세계의 특징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영원한 안식 세계의 첫 번째 특징은 그 세계가 비록 현 세계를 개조한 것이지만 현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라는 점이며(1절), 두 번째 특징은 마치 부부의 삶이 그렇듯이 성도들이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2,3절). 그리고 세 번째 특징은 옛 세상에 있던 모든 고통과 눈물과 질곡이 완전히 없다는 점이다(4절). 한편 본문은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을 묘사한 뒤 아울러 이기는 자는 그 나라에 들어가고 악을 행하는 자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고 승리함으로 구원에 이르라고 권면하면서 끝을 맺는다(5-8절).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히 이 세상을 고쳐서 살기 좋게 만든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을 갱신한 것으로,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세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장차 유업으로 받게될 하나님의 나라는 질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모든 면에 있어 깨어지고 변질되기 쉬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창 3:22-24) 현재의 물질세계와는 다른, 하나님의 저주가 완전히 소멸되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완전한 새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 세계에서는 무가치한 현 세계의 것들에 우리의 소망을 두어서는 안될 것이며(요일 2:16,17). 하나님의 나라란 현 세계를 개선하여 현세계의 질서와 구조 속에서 살기 좋게 만드는 것이라고 미혹하는 현대의 일부 잘못된 사상들에 넘어가지 말고 오직 온전한 나라에서의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히 11:13-16).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보니. - '또 내가 보니'라는 말은 본서에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새로운 환상이 전개되는 것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4:1; 5:1; 6:1,12; 10:1; 14:1; 16:1; 19:1; 20:1). 앞장에서 저자는 불신 세상과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묘사하였다. 이제 그 심판에 이어 본장에서는 천국과 천국 백성이 누릴 영원한 삶을 묘사하고 있다. 이 묘사는 사 60-65장과 겔 40장 등을 배경 삼고 있는 것으로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장차 실현될 실재에 관한 것이다. 즉 요한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악의 멸망과 함께 완성될 천국이라는 실재를 환상 중에 미리 보았고 그 본 바를 기록한 것이다.
새하늘과 새땅. - 일반적으로 '새하늘과 새땅'이라 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고 든다면 새하늘과 새땅은 하나님의 나라와 동격(同格)이 아니다. 즉 새하늘과 새땅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사탄과 그의 세력이 멸망당하고(19:20; 20:10), 현 우주와 역사가 붕괴된 뒤(20:11), 최후의 대심판(20:12-15), 이후에 조성되는 천국과 지옥을 다 포함하는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새하늘과 새땅 안에 있는 것이고, 새하늘과 새땅은 하나님의 나라와 지옥을 다 포함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이다. 한편 학자들간에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옛 것을 새롭게 변화시킨 것인지, 옛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새롭게 창조된 것인지에 관한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 새 세계는 전혀 새로운 창조물이 아니라 옛 세계를 재료로 해서 새롭게 개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새하늘과 새땅은 옛하늘과 옛땅을 재료로 헤서 새롭게 조성한 새로운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새하늘과 새땅이 옛 것을 개량한 것이라고 해서 현 우주가 단순히 개선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새하늘과 새땅은 옛 것을 단순히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개량하되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개조한 것으로 옛 것과는 그 구조에 있어서나 본질에 있어서나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13:1에서 '바다'는 적그리스도가 출현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20:13에서는 죽은 자들을 품고 있던 처소로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바다'는 '악'을 상징하는 듯하다. 따라서 새하늘과 새땅에 바다가 없다는 말은 새하늘과 새땅이 죄와 악으로 검철된 옛 세계의 질서와는 엄격히 구별되는 새로운 세계임을 시사한다.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 - 새예루살렘은 구원 받은 성도들의 공동체(9,10절)를 의미하는 동시에 또한 그들이 거할 하나님 나라에서의 새로운 처소를 이중적으로 의미한다. 구약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공동체 또는 그 수도를 뜻하던 이 땅의 예루살렘(Jerusalem)은 바로 이 '새 예루살렘'의 모형이었다(사 2:2,3). 한편 이 쓴 예루살렘의 특징은 ① 그곳에 다시 사망과 애통함, 아픈 것이 없으매(4절) ② 죄와 악인이 없으며(8절) ③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친히 함께 거하신다는 점이다(3절).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 이 말은 구원받은 성도의 공동체 또는 그들이 거할 새 처소를 상징하는 새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에 의해 온전히 구현되어진 것으로서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준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성도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적 자녀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시고 구속(救贖)하시며 영화롭게 해주셨기 때문에 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롬 8:29,30).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구원받은 성도들의 공동체 또는 그들의 새 처소인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다. 한편 여기서 '예비했다'(헤토이마스메넨)와 '단장한 것'(케코스메메넨)이라는 말은 모두 현재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이는 곧 신랑되는 그리스도가 영적 신부인 성도를 데리고 새로운 보금자리인 하늘 처소로 인도해 들일 준비가 완료되었음과 그 때가 도래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혼인 잔치에 관해서는 계 19:7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니 그곳의 주석을 참조하라.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 5-7절에 의하면 이 음성의 주인공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거하시리니. - 본절을 가장 잘 반영해 주는 것은 과거에 성막(tabernacle)을 중심으로 생활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다는 증거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 주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이었다(레 26:11,12). 말하자면 성막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거하는 이상(理想)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옛 성막의 이상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실현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이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의 삶 이상으로 완전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 이는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부터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내용이다(창 17:7,8; 출 19:5,6; 렘 24:7). 이 언약 역시 본문이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성도들은 하나님과 영원한 친교를 맺게 된다.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 눈물은 고통과 죽음과 슬픔과 불행을 상징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통과 죽음과 슬픔과 불행을 상징하는 눈물을 하나님께서 씻어 주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고통도 죽음도 슬픔도 불행도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 본문에 나열된 것들은 앞의 눈물의 원인이 되는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들이다. 따라서 눈물이 없어지므로 눈물의 원인이 되는 이러한 죽음도(사 25:8). 애통도(사 35:10; 51:11), 곡하는 것도(사 65:19), 병도(사 21:2) 천국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천국에서는 오직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웃음과, 생기가 넘칠 뿐이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처음 것이란 불완전한 옛 피조 세계에 있던 모든 것을 지칭한다. 그 옛 피조 세계는 불완전하여 거기엔 죄악도 있고 죄악으로 인한 온갖 고통과 불행과 모순이 있었으나 그것이 흔적없이 사라지고 완전한 새 세계가 왔으므로 이제는 선과 아름다움과 기쁨만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보좌에 않으신 이가 가라사대. -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4:2). 따라서 본절 이하 8절까지는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한편 앞에서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에서 성도가 누릴 복락을 언급한 뒤 본절에서부터 8절까지는 하나의 삽경처럼 다시 현세의 관점으로 돌아와 그리스도를 믿고 그 가르침을 실행하는 자는 그 복을 누리고 그렇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가리라는 권면과 경고의 말씀이 주어진다. 결국 이렇게 볼 때 본문의 하나님의 음성은 앞에서 보여준 계시를 근거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라는 하나님의 권면의 말씀이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 본문을 의역하면 '네가 보았듯이 나는 반드시 옛 세상을 없애고 완전한 새 세상을 만들 것이며, 또한 그 완전한 새 세상에서 영생을 누릴 새 피조물, 곧 나의 백성을 만들 것이다'이다. 하나님은 이미 보여 주신 계시(1-4절)를 근거로 자신이 한 이 말씀은 반드시 성취될 진리임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 동일한 지시가 그리스도에 의해서도(1:11), 하늘의 음성으로도(14:13), 천사의 증언으로도(19:9) 본서 저자에게 주어진 적이 있다. '신실하다'(피스토스)는 것은 '신뢰할 만하다', 또는 '믿을 수 있다'는 의미이며 '참되다'(알레디노스)는 것은 거짓이 없음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만한 것으로서 반드시 성취될 것이므로 기록해 두라는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사 식언치 아니하시므로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신다(민 23:19). 따라서 그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되어 만인에게 증거될 필요가 있다(Lenski).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루었도다. -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가상칠언(架上七言) 중 여섯 번째 말씀과 같다(요 19:30).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의거해 이제 세계를 새롭게 개조하실 것이다. 본문은 이 사실을 확정적인 말로 선언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본서에 계시된 내용은 반드시 이루어질 사실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과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의 말이다. 계 1:8,17 주석 참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자존자(自存者)이시자 또한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최후 심판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만유의 대주재자이시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며(요 1:3) 그로 말미암아 종결되었고(20:11), 그로 말미암아 새 세계가 창조되어(5절), 그와 함께 영원히 지속된다. 그러므로 본서에 계시된 모든 것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 동일한 개념이 시 42:1; 사 55:1; 요 4:14; 17:37-39와 본서 22:1,17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값 없이 주시는 구원과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샘에서 물을 구해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에 비유한 아름다운 비유적 표현이다(Hendriksin).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도 언급되어 있다(2:7,11,17,26; 3:5,12,21). 여기서 '이기는 자'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함으로 세상을 이기고, 악을 이기며, 핍박과 고난을 이기는 자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것들'이란 4-6절에 언급된 영생과 천국의 축복들을 가리킨다.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 본문은3절의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라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며,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가장 밀접한 관계로 묘사한 것이다. 즉 본문은 하나님과 성도를 단순히 같이 있는 관계로 묘사한 것보다 영적 부자(父子) 관계로 묘사함으로써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두려워하는 자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일로이스'( )는 마 8:26과 막 4:40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비겁한 자, 곧 핍박으로 말미암아 신앙을 저버린 자들을 가리킨다(Plummer). 그러므로 이 자들은 7절의 '이기는 자'와 대조되는 악에 굴복하는 자들을
지칭한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스토이스'( )는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한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본서에서 이 부류의 사람들은 '땅에 속한 자'로도 언급되어 있다(11:10).
흉악한 자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엡델뤼그메노이스'( )는 '가증한 자들'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성경에서 '가증하다'는 말은 우상숭배 행위나 사탄을 추종하는 것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었다(9:20; 17:4,4). 따라서 본문의 '흉악한 자들'은 사탄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거나 우상 숭배를 조장하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살인자들과 행음자들. - 이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금하신 윤리 덕목 중에서 가장 큰 덕목을 위반하는 자들이다. 살인은 하나님만이 주관하시는 인간의 생명을 강탈하는 행위이며(창 9:6), 음행은 하나님께서 주신 몸으로 그 몸에 죄를 짓는 행위이다(고전 6:18).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 - 술객들이란 마술, 또는 점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이며, 우상 숭배자들은 글자 그대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이 중 우상 숭배 행위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이며(출 20:4,5) 술객 또한 모세 율법상 반드시 신앙 공동체 내에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되어 있을 만큼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행악자이다(신 18:10). 본서에서는 불신의 세상을 지배하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등이 사술로써 사람들을 미혹하는 수단으로 언급되어 있다(13:13; 18:23).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 - 이는 자신의 양심을 속이면서 행동하는 모든 악한 자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려 이단 사상을 유포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은 사탄과 그의 졸개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서 영원히 거하게 되는 형벌의 처소인 지옥을 가리킨다(계 20:10 주석 참조). 한편 '둘째 사망'에 대해서는 계 20:6,14의 주석을 참조하라.
21:9-17 새 예루살렘의 기원과 모양과 규모
그리스도의 재림, 악의 세력의 패배, 현우주와 역사의 붕괴, 전인류의 대부활, 백보좌 심판 등과 같은 최종적인 일련의 대중말 사건들을 통해 모든 악이 진멸되고 나서 필연적으로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는 21:1-22:5 안에서 첫 단락을 형성하고 있는 앞단락 1-8절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들을 설명해 주었고, 그 다음으로 죄악의 성 바벨론(14:8)과 대칭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관하여 요한이 본 환상의 내용들이 본단락과 및 이어지는 다음 두 단락인 18-21절과 22-27절에서 언급된다.
여기서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구약적 개념으로서의 지상의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그림자였던 그 구약의 예루살렘 성이 지향하던 원형(原型)으로서의 예루살렘 성,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 세워진 완전한 예루살렘 성을 지칭하는 것으로(21:2), 이 성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기도 하며 동시에
그들이 거할 하늘 나라에서의 중심 처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 성은 성도들 자신이기도 하면서 성도들이 복된 삶을 누릴 터전이기도 한 것이다.
본문은 이러한 새 예루살렘 성의 기원과 모양과 규모를 묘사해 주고 있다. 즉 이 성의 기원은 하나님 자신이고(9절), 이 성의 모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입고 있어 고귀하고 순결하며(11절), 이 성의 규모는 약속의 백성들을 다 온전하게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와 구조로 잘 축성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12-17절).
이러한 본문은 하늘 나라에서 성도들은 영광되고 온전한 모습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현재의 고통을 이기고 용기 있게 살아가도록 소망의 및과 부푼 회망을 심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이 주는 이 생동하는 소망을 마음에 간직한 채 기쁜 마음과 설레는 마음으로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어 그 영원하고 찬란하며 완전한 하늘 나라의 일원이 되도록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7절; 마 6:33).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일곱 대접을 가지고‥‥일곱 천사 중 하나가‥‥가로되. - '일곱 대접'은 이 땅에 임한 마지막 재앙인 일곱 재앙을 담고 있던 일곱 대접을 가리킨다(11:15-19; 16장; 17:1). 그 일곱 대접은 일곱 천사가 각기 하나씩 맡고 있었는데 본절의 천사는 그중 하나이다. 한편 이 천사는 앞서 '큰 성 바벨론'에 관한 환상을 요한에게 보여 주었는데(17:1) 이제 본장에서는 그것과 대조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요한에게 보이려고 등장한다(Plummer).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 본절부터 22:5까지는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요한에게 보여준 새 예루살렘의 모습과 그 곳에서의 그 풍요한 삶에 관한 환상을 글로 기록한 것이다. 천사는 맨 먼저 어린 양의 아내요 신부인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영광스런 모습(9-17절)을 요한에게 보여 준다. 여기서 '어린 양'은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영적 신부인 성도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2절 주석 참조.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요한에게 음녀 바벨론을 보여 줄 때에도 성령의 인도함이 있었다(17:3). 한편 이 사실은 본절 이 하에 기록된 내용들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어 보고 기록한 것들임을 강조해 준다.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 본문에서의 '산'은 17:3의 '광야'와 대조된다. 그곳에서의 '광야'는 죄악과 향락이 성행하는 세상을 상징하였다. 그러나 본절의 '산'은 하나님의 기지(基地)가 있는 성산(시 87:1)을 연상시켜 준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내려 온다는 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2절 주석 참조.
거룩한 성 예루살렘. - 2절에는 이것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언급되어 있다.
본절에는 '새'라는 수식어가 빠져 있을 뿐 서로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선 2절 주석을 참조하라,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 본문에서 말하는 '영광'은 구약 시대에 지성소에 임하던 하나님의 영광인 '쉐키나'( )로서,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Plummer).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다(3절).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밝더라. - 여기서 '빛'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스테르'( )는 빛 그 자체를 뜻하는 용어인 '포스'( )와는 달리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체를 의미한다. 즉 예루살렘 성의 빛은 그 자체가 발하는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투영한 빛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23절이 명확하게 밝혀 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스스로의 공로나 선행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해주시기 때문에 되는 것임을 교훈받게 된다(고전 15:10).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하지 말고 오직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서야 하며, 날마다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다른 이들에게 또한 받은 그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편 '벽옥과 수정'에 대해서는 계 4:3,6의 주석을 참조하라.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 '크고 높은 성곽'은 외부로부터의 적의 침공에 대비, 성읍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사 26:1). 여기서는 성도들에 대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상징한다.
열두 문이 있는데‥‥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 이 문들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문이 열두 개이고 그 문들 위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영적 이스라엘 자손, 곧 택함을 입은 모든 성도들이 천국에 다 들어가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그 열 두 문에 열두 천사가 서 있다는 것은 영적 이스라엘 자손인 성도들만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자가 지키고 있는 것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자들이 보호되고 있다는 것도 아울러 의미해 주고 있다. 한편 어린 양의 신부인 예루살렘 성에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음녀가 탄 짐승의 몸과 머리에 참람된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과 대조된다(13:1; 17:3).
21: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동편에‥‥북편에‥‥남편에‥‥서편에 세 문이니. - 이처럼 문들이 사방으로 세 개씩 나 있음은 세상 만민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누구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요 3:16). 그러나 이처럼 천국이 만민에게 개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8절) 곧 하나님 밖에서 악의 편에 서 있는 자들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21: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본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기초석이란 글자 그대로 기초가 되는 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도들의 교회 공동체가 열두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그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엡 2:20). 한편 성벽의 기초석에는 이처럼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열두 성문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 교회가 하나의 통일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21: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
내게 말하는 자. - 9절에 언급된 천사를 가리킨다.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 - 11:1에도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는 기사가 나온다. 그곳에서의 척량은 성도들을 계수하여 성별하고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척량은 그러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성도들의 영광과 축복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기 위한 목적에서 행해진다. 한편 '갈대'는 그 줄기가 곧기 때문에 고대에는 곧잘 잣대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그 자가 불변하는 성질을 지닌 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그 척량이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해 주는 동시에, 그 척량에 의해 보여지는 성도의 영광과 축복이 영원토록 불변하게 지속된다는 것을 아을러 암시해 주고 있다.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 성의 형태가 네모 반듯하다는 것은 완전 정입방형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균형과 안정, 그리고 흠이 없음을 상징한다. 즉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불러모아 당신의 영적 자녀로 삼아주신 성도들의 공동체는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완전한 하나님의 속성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나타내 준다.
일만이천 스다디온. - 한 스다디온(Stadion)은 약 185m에 해당하는 길이이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은 한 변이 약 2,220km인 정방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방 2,220km의 크기는 우리가 사는 지구나 우주에 비하면 매우 작은 크기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묘사되고 있는 성의 크기나 윤곽은 실제의 크기나 윤곽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성의 완전성을 뜻하는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12,000 스다디온'의 12는 완전수를 의미하며, 12를 12,000이 되게 하는 곱하기 수 1,000은 만수(滿數) 10을 세제곱한 수로 무수히 많은 수 또는 매우 큼을 뜻하는 수이기 때문이다(Lenski).
21: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 한 규빗(cubit)은 성인의 팔꿈치 아랫 부분의 길이를 말하는 것으로 약 45.6cm이다. 제 1권 성경 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 참조. 따라서 문자 그대로 하면 성곽의 크기는 약 65.6m 정도이다. 그러나 '144규빗'이란 수치 역시 완전수 12를 제곱한 것이기 때문에 앞절에서와 같이 이 수치는 실제의 수치라기 보다는 성곽의 완전성을 나타내 주는 상징적인 길이이다.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 이 말은 천사가 사용한 척량이 사람들이 사용하는 척량을 따른 것이라는 의미이다(Plummer). 말하자면 천사는 이 세상의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척량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새 예루살렘을 설명해 놓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21:18-21 새 예루살렘의 축성 재료
온전한 성도들의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동시에 그 성도들이 거할 하늘 나라에서의 중심 처소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부분인 9-27절 안에서 첫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앞단락 9-17절은 새 예루살렘의 기원과 모양과 규모를 설명하였고, 이제 두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본문에서는 그 성을 지은 재료(材料)에 관해 설명해 주고 있다.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의 축성 재료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보석들로서, 이것은 분명히 하늘 나라에서의 성도와 성도의 삶이 빛나는 보석과 같이 찬란하고 고귀하며 영구하다는 것을 상징해 주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의 그 어떤 귀한 것으로도 실제로는 하늘나라의 고귀한 특질과 내용들을 표현하지 못한다. 다만 본문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들로 하나님의 나라의 고귀함을 비유적으로나마 표현해 놓은 것이다.
한편 하늘 나라에서의 성도와 성도의 삶이 값진 보석과 같다고 해서 성도의 고결함과 영화로움이 하늘 나라에 간 이후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성도는 비록 아직(not yet)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아니하였지만 영적으로는 이미(already)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이 땅에서도 본문과 같이 고결하고 거룩하며 영화로운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마 5:16; 요 15:8; 롬 14:16-18).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 본절부터 21절까지는 새 예루살렘 성을 쌓은 재료가 열거되고 있다. 그 재료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좋은 것들로서 이 보석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된 성도들이 존귀하게 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말하자면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은 지극히 존귀하게 되는데 땅의 것으로는 비견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하늘에서 지극히 영화로운 성도들의 공동체를 이 땅에 있는 우리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땅에서 가장 귀한 보석들을 그 성의 재료로 언급한 것이다. 한편 '벽옥'(jasper)은 푸른 빛이 나는 고운 옥으로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상징한다. 계 4:3 주석 참조. 그리고 '정금'은 불변성과 고귀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본절의 이 금은 어찌나 순수한지 맑은 유리와 같이 빛난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그만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완전하고 순결한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입어 매우 영화로운 것임을 뜻한다.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 성곽의 기초석은 열두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새겨져 있는 돌이다(14절). 그런데 이 열두 기초석의 재료들이 다 다른 것은 이 기초석들의 특색이 다 다른 것과 같이 그 구성원들의 특성도 다양하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즉 각 사도를 중심으로 세워진 사도적 공동체인 교회는 전체적으로는 하나요 통일체를 이루고 있으나, 그 구성원은 각 성도들은 획일적이지 않고 각양의 특색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본문은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본절과 20절에서 열거되고 있는 12보석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흉패에 장식된 보석들의 반영이기도 하며(출 28:17-20), 두로 왕의 의복에 장식된 보석들에 비견되기도 한다(겔 28:13).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 이 보석은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 쓰인 재료와 같은 것이다(18절).
둘째는 남보석이요. - '남보석'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삽피로스'로 사파이어(sapphire)를 가리킨다. 이 보석은 맑은 하늘색을 띠는데 극히 귀한 보석으로 취급된다(욥 28:16).
셋째는 옥수요. - 이 보석은 칼케돈(Chalcedon)에서 처음 산출되어 그 이름이 칼케돈이라고 명명되었다. 이 보석의 색깔은 녹색이나 보는 방향에 따라서 그 색이 변한다.
네째는 녹보석이요. - 이 보석은 에메랄드(ermerald)로서 하나님의 보좌에 둘린 무지개를 묘사하는 데에도 언급되 었다(4:3).
21: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다섯째는 홍마노요. - '홍마노'에 해당하는 헬라어 '사르도뉙스'는 마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희귀한 보석이다. 본래 '마노'란 손톱을 의미하는 말 '오뤽스'( )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모양이나 색깔이 손톱과 비슷해서 명명된 듯하다(Plummer). 이 보석은 대체로 살색이나 핑크색을 띠고 있으며 그 중 홍마노는 더 붉은색을 띠고 있다.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 '홍보석'(carnelian)은 '홍옥'(紅玉)이라고도 하는 루비를 가리킨다. 이 보석은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양을 묘사하는 데에도 언급되었다(4:3). 그만큼 이 보석은 찬란하게 빛나며 아름다운 색깔을 지니고 있다.
일곱째는 황옥이요. - '황옥'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크뤼솔리도스'로, 이 말은 '황금'이라는 말 '크뤼소스'와 '돌'이라는 말 '리도스'의 합성어이다. 이 보석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황금과 같은 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황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아홉째 보석과 유사한 것이다.
여덟째는 녹옥이요. -'녹옥'에 해당하는 헬라어 '베륄로스'는 네째 보석인 녹보석과 비슷한 것으로 녹보석의 변종이다. 그러나 바다색과 같은 푸른색을 띠고 있어 녹보석보다는 푸른색이 강하다.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 홍해에는 토파즈(Topaz)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에서 이 보석이 처음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 보석은 '토파지온'이라고 명명되었다. 이것은 일면 '귀감람석 '으로도 불리운다.
열째는 비취옥이요. - '비취옥'은 '황금'이라는 말인 '크뤼소스'와 리이크 나무를 일컫는 '프라손'을 합성한 말인 '크뤼 소프라소스'라는 보석이다. 이 보석은 리이크 나무잎과 같이 황녹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
열한째는 청옥이요. - '청옥'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아킨도스'는 지크론(Zicron)의 변종으로 사파이어와 유사한 보석이다. 네모난 프리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백색, 황색, 적색, 회색, 자주색, 연한 녹색이 종합적으로 보여지는 아름다운 보석이다. 서양에는 이 이름과 같은 꽃이 있다.
열둘째는 자정이라. - 이 보석의 이름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풀이해 보면 재미 있다. 이 보석의 이름은 헬라어로 '아메뒤스토스'인데 이 단어는 '술 취하다'는 뜻의 '메뒤오'와 부정 접두어 '아'가 합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 이름을 해석하면 술 취하지 않는 돌이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이 보석은 몸에 지니면 술에 취하지 않도록 하는 어떤 효능이 있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오늘날에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혹자는 이것을 자수정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 오늘날과 같이 인조 진주가 생산되지도 않았고, 진짜 진주도 많지 않던 당시에 진주(pearl)는 매우 귀한 보석으로 여겨졌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진주를 진리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하였다(마 13:45,46). 따라서 이러한 귀한 진주로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열두 문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열두 문의 고귀성과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 투명한 유리 같은 정금이라는 표현은 18절에도 나와 있다. 거기서는 새 예루살렘 성벽의 재료로 언급되어 있고 본절에서는 성의 길의 재료로 언급되어 있다.
21:22-27 새 예루살렘에서의 생활
온전한 성도의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동시에 그 성도들이 거할 하늘 나라에서의 중심 처소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부분인 9-27절 안에서 첫번째 단락인 9-17절은 새 예루살렘의 기원과 모양콰 규모를 설명하였고, 두 번째 단락인 18-21절은 그 성을 지은 재료(村料)를 설명했었다. 이제 마지막 세번째인 본문에서는 그 성 안에서의 생활상(生活相)을 묘사하고 있다.
본문의 설명에 의하면 먼저 천국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며 살기 때문에 그곳에는 이 땅의 예루살렘에 있던 것과 같은 하나닐이 특별히 임재하시는 장소로서의 성전이 필요없다(22절). 또한 천국에서는 어두운 생활이 없다. 즉 악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는 오직 빛과 영광만이 언제나 밝게 비추일 뿐이다(23,24절). 그리고 천국에서는 피곤도 없고 제약도 없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마음껏 활동한다. 그래서 그곳에는 통행을 제한하는 문 닫음도 없고 밤조차 없는 것이다(25절). 게다가 새 예루살렘에서는 그처럼 사람들이 마음껏 활동하되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곳의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천국 사회를 온전케 하는 유익하고 선한 일만을 한다.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이 천국 시민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26절).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을 그 삶을 통해 드러내지 못할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며, 오직 빛에 속한 자들, 곧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간다(27절). 본문은 결국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하나의 교훈을 준다. 그것은 영광과 빛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두움에 속한 자는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어 및의 자녀가 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본문의 말씀에 의거하여 먼저 빛되신 그리스도를 믿고(요 1:4,5,7), 믿는 믿음에 따라 의의 열매를 맺는 빛에 속한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요일 1:7).
21: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 본절부터 27절까지에서는 새 예루살렘 성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상태가 묘사되고 있는데 본절은 새 예루살렘 성에는 성전이 없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처럼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성전이 없는 이유는 천국에는 죄가 없으므로 죄를 속하는 장소로서의 구약적 개념의 성전이 필요 없기 때문이며, 또한 땅에서 성전이 필요했던 이유는 하나님과 대면하기 위함이었는데 천국에서는 누구나가 다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살기 때문에 그런 개념으로서의 성전이 필요없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3,11절), 하나님께서 친히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다.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 사 60:19을 반영으로, 그곳에는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처럼 천국에는 빛 그 자체이신 하나님(요일 1:5)께서 자기 영광으로 환하게 비추시며 또한 및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요 1:4)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해와 달이 비추어주는 빛이 필요 없다. 한편 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빛은 햇빛과 달빛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친교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기에 합당한 의를 덧입혀 주시는 것인 동시에(Hendriksen) 모든 것을 직관하고 통찰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을 상징해 준다. 따라서 천국에서 성도들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보고 알게 되며(고전 13:12) 그럼으로써 천국의 삶은 성결하고 거룩
하며 온전한 삶이 되는 것이다.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 사 60:3을 반영하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서 '만국'이란 세상 만민 가운데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지칭한다(Plummer). 하나님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 중에서 큰 무리를 불러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는데(7:9) 이들이 본절에서 '만국'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렇게 온 천지에서 불러 모아진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다닌다는 것은 천국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낮은 자와 높은 자가 없이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복락을 누릴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 오리라. - 본문은 세상에서 남을 지배하던 사람들이 천국에서도 지배자로 군림한다는 말이 아니다. 천국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왕이시다. 아마도 여기서 '땅의 왕들'이란 천년 황국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던 성도들(20:4)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영광의 면류관을 가지고서 천국에 들어가 마침내 영광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21: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 여기서 성문을 닫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천국에서의 삶이 안전한 동시에 자유를 다는 것을 상징해 준다. 그리고 그곳에 밤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반대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동시에 천국에서는 피곤함이 없어 특별히 쉬는 시간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즉 천국에는 어둠으로 상징되는 고통과 슬픔이 없으며, 삶 자체가 안식이기 때문에 피곤이 없고 따라서 피곤을 해결하기 위한 밤이 필요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본문은 암시해 준다.
21: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 본절은 24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Plummer). 성도들은 모두가 영생과 각자 하나님께 충성 봉사한 데 따르는 천국에서의 상급을 약속받은 자들이다(2:7,10,11,17,22,26,27; 3:5,12,20,21). 따라서 성도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갈 때 그러한 각자의 영광을 지니고 감으로써 하나님 나라에서 약속받은 것을 실제로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자들의 부류는 이미 8절에서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여기서 '속된 것'(코이논)은 문자적으로 '깨끗하지 않은 것', '거룩하지 않은 것'을 뜻하는데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입어 죄사함 받지 못한 자들은 깨끗함을 입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속된 자'로 취급당할 뿐이다. 다음으로 '가증한 일'은 우상 숭배를 하며 사탄의 종노릇하는 죌악된 행위를 의미한다(17:4). 그리고 '거짓말 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진리에 거스리는 말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8절). 이러한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과 그분의 뜻을 거스려 행동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고 말 것 이 다(21절; 8; 22:15).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하고, 온전하고, 자유롭고, 죄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더럽고, 불완전하고, 죄가 가득한 자들은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 뿐이다(20:12,15). 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칭함받은 자들이며, 또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중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의롭고 충성된 삶을 힘쓴 자들이다(3:5; 13:8; 17:8), 한편 본문이 이같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속된 자',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 '거짓말 하는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현재 그러한 쬐 가운데 있는 자들은 이제라도 속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보혈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칭함받아 구원을 얻으라고 권면하기 위해서이다(Joh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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