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와 슬픔

[임정숙로즈마리]

고흐와 슬픔

                                                                       임정숙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숱 없는 머리칼, 축 처진 가슴, 구부린 무릎에 얼굴을 묻은 여인. 고흐가 연인 시엔을 모델로 그린 ‘슬픔’이란 그림이다.

  몹시 우울했던 날, 친구가 보낸 메일에서 이 슬픔과 마주했다. 뜻밖에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란 배경 음악마저 가슴을 저몄다. 시엔의 불행함을 분명하게 각인하듯 비장하고 섬뜩한 울림이었다.

  좀 전 빈방 의자에 망연히 벽만 보고 앉아 있던 내 모습이 떠올라 눈을 감았다. 세상 믿음이 사라진 공허함에 한없이 작아진 나의 슬픔도 거기 있는 듯했다.

  고흐의 불꽃같은 격렬한 필치, 눈부신 색채는 순수한 사랑의 갈증에서 비롯된 걸까. 그는 하숙집 딸과 사촌 케이를 차례로 연모했지만, 그녀들의 단호한 거절로 깊은 절망에 빠졌다.

  알코올 중독의 거친 매춘부 시엔을 만나 행복함을 누린 것도 잠시였다. 끝내 가족의 격렬한 반대와 궁핍으로 결혼까지 이를 순 없었다. 동거할 당시, 지극한 애정으로 순한 비둘기처럼 길든 시엔의 모습을 고흐는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에로틱한 누드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세 살 연상인 그녀는 세파에 시달려 볼품없기 짝이 없는 초라한 여자였다. 지쳐 방황하던 그녀의 슬픔을 외면했더라면, 그 사랑이 존재할 순 없었다. 누구 자식인지도 모를 그녀의 아이들과 가정을 이루고 싶은 바람은 가당치도 않았으리라. 그리도 순정의 따뜻함을 지녔던 고흐였건만, 그의 나날은 혹독하고 거칠 뿐이었다.

  슬픔은 누구에게든 운명처럼 예고 없이 찾아와 휘청이게 하지만, 유독 고흐의 자화상이었다. 자살 직전까지도‘슬픔은 이후로도 끝나지 않을 거 같다.’라는 고흐의 독백처럼 슬픔은 그의 지독한 그림자였다.

  화집을 뒤지며 고흐를 마주하는 것이 내내 편안한 일은 아니었다. 나의 묵은 아픔과 알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이 쌓인 먼지를 건드리듯 잠잠히 일어나 슬픔으로 떠돌았다.

  고흐의 ‘뿌리’란 그림은 몇 해를 병상에 누워 계신 친정아버지의 굴곡진 인생과 닮았다. 대지에 간신히 지탱한 고목의 뿌리와 시커멓고 초췌한 나뭇가지들이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산전수전 다 겪은 곡절 많은 나목이 아버지 그대로였다. 이른 새벽 어김없이 비틀대며 골목길을 나서던 가장의 시름에서 이젠 가벼워지셨을까. 사람의 생로병사에도 아랑곳없이 무심하게 찾아드는 절기에 그저 숙연할 뿐이다.

  아들이 입대 후 한 계절이 지나니 살갑던 여자 친구는 바람처럼 떠났다. 한결 수척해진 얼굴로 휴가 나온 아들의 어색한 미소가 눈에 밟힌다. 이별의 경험은 성숙한 인연을 위한 과정이라며 장황하게 위문편지를 써 보낸 어미는 안다. 자식이 훌훌 털고 일어설 때까지 그 열병의 비를 함께 맞아야 한다는 것을.

  글짓기 시간에 ‘가장 슬펐던 일’을 글 제목으로 주었던 적이 있었다. 평소 언행이 조숙했던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의 한 줄 고백이 내내 가슴에 맴돌았다. 아빠가 엄마와 헤어지며 ‘이제부터 엄마라는 사람은 기억에서 지워라.’라고 했다던가.

  고흐는 결국 37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아끼던 동생에게 아들이 태어났을 때 파란 하늘에 분홍 꽃 핀 아몬드 나무를 그렸었다. 그런 기쁨의 순간은 늘 짧기만 했던 것일까.

  그러나, 오늘도 나는 슬픔을 껴안는다. 도망칠 수 없으므로 차라리 슬픔 속에 피어날 그 무엇을 꿈꾸어 보기에.

[차은량 카타리나]

슬플 때 고흐의 슬픔을 끌어안고 있노라면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되곤 했어요.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다시 만나 서로의 글을 읽을 수 있다니요~

[임정숙로즈마리]

슬픔도 삶의 일부이니 끌어 안고 다독이며 가야겠지요.
만날 사람은 돌고 돌아 결국 만나게 되나 봅니다.

[하재영(루도비꼬)]

삶은 희노애락의 파도타기겠죠.
즐거워도, 슬퍼도-.

그림 감상을 좋아하는 저 역시 그림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며
내 생활을 살펴보는 일이 종종 있죠.

잘 읽었습니다.

[임정숙로즈마리]

늘 잔잔하기만 한 삶은 없겠지요.
파도타기의 모험을 잘 즐겨야 하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이규흥 대건안드레아]

슬픔의 뿌리, 시대의 아픈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늘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만큼 유지되고 있으며
어둠 속에서도 희망은 자라고 있습니다.^^

[임정숙로즈마리]

기도가 생명줄임을 번번이 깨닫곤 합니다.
어둠의 빛을 주시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