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에서 가장 오랜 재실 건물로는 관남재(觀南齋)를 꼽는다. 관남재는 서면 금산리 1112번지(신숭겸로 52-46) 관음동에 있다. 한백록(韓百祿, 1555~1592) 장군의 묘역 입구에서 묘소를 관리하며 각종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재실 겸, 종손이 거주하는 가옥으로 쓰이고 있다. 일반 민가의 형태로 지어져, 안채와 사랑채가 모두 ‘一’자 형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 왼쪽 칸에 대문을 달았다. 양쪽 측면과 후면에 이어지는 디귿자형 담을 둘렀다. 안채의 대들보 상량문에 “구 대한 광무구년 을사삼월이십사일 계유생 입주상량 용(龜 大韓光武九年乙巳三月二十四日癸酉生立柱上梁 龍)”이라는 붓글씨가 보인다. 이해는 1905년이니 세는 나이로 올해 120살이 된다. 안채와 사랑채의 바깥쪽 초석은 자연석에 둥글게 홈이 새겨져 있으나, 현재의 기둥은 사각이라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이는 이곳 마을 명칭이 불교를 상징하는 관음동(觀音洞)이라고 하니, 원래 관음보살을 주불로 하는 절터였던 곳에 재실을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춘천시, 『향토문화유산 총람』, 2021)
한백록 장군의 자는 수지(綬之),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1580년 알성 무과에 급제하고, 진잠현감, 지세포만호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와 합포 해전에 참전하였다. 1592년 7월 부산진 첨사로 미조항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이에 노비 득충(得忠)이 지게에 시신을 지고 전국에 깔린 왜군의 눈을 피해 고향인 춘천에 안장하였다. 나중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에 증직되었고, 충신정문(忠臣旌門) 및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한씨 집안이 관음동에 세거한 내력은 13세 몽계공(夢溪公, 1321~1401)이 목은 이색 등과 공부하다가 문과에 올라 사헌부 장령, 양광도 안렴사, 봉익대부 전법판서를 지냈다. 고려말 조선 초 이른바 두문동 72현으로서 숨어 살다가 태종이 예로써 맞이하려 하였으나 다시 경남 합천(陜川)으로 가서 “지는 해 청계에 한가히 누워 전조 고려를 꿈꾸리라(落日淸溪上 閒臥夢前朝)”라는 시 한편도 남겼다(한희민, 『관남재』, 2018). 그 후 4남 한양(韓讓)이 행촌 이암(杏村 李嵒) 선생의 외손 조안평(趙安平)의 사위가 되면서 춘천으로 입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현재의 재실 관남재의 이름도 관음동의 觀자에 남쪽을 바라본다는 南자를 합쳐 지었다고 한다.
이 춘천의 한씨 집안에는 서면 박사마을 제3호 박사로서 국제연합총회 의장을 역임한 한승수를 비롯하여 많은 인재를 키워냈을 뿐만아니라, 현 종손 한희민(62세)은 자랑스러운 집안을 지켜내기 위해 재실에 기거하면서 낮에는 과수 농사, 밤에는 한학과 한시를 연구하여 서면 박사마을 제201호 박사(2023)가 되었다. 지금도 옛 춘천지역의 문인을 찾아 각 집안의 고서와 묘소를 찾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명감과 열정이 살아있는 한 관음재는 더 오래도록 춘천의 문화유산으로 빛을 발할 것이다. 다만, 여러 가지 제약과 번거로운 일로 문화재 등록을 보류하고 있어 유지 보수에 어려움이 예상됨으로 정부예산이 지원되어 보다 잘 관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료기록 지석 손호정, 1차 현장답사 2024. 5. 30 이상석, 김명호,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