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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4. 비전중앙교회 주일오전예배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히 10:30-37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여러분들 잘 한번 생각해 보시면 예수님은 정말 이상하신 분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인물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말씀들을 우리가 보면 이상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영생을 줄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했죠. “이런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죄가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여러분들과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너무나 믿음이 좋아서 그런지, 이런 내용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고 있고, 그렇다 맞다, 이건 확실하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사실은 가만히 보면 좀 이상한 말들입니다. 상식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가 매우 곤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지금 이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종교들이 있고, 그 종교들을 만든 창시자들이 다 있는데,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들도 예수님과 같이 이런 말을 한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도를 닦기도 하고, 선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지도하고 가르치기도 했지만, 예수님처럼 이런 말씀을 자신 있게 한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조사해 보세요.
“내가 생명이다, 영생이다”, “내가 부활한다”, 또 “너희들에게도 영생을 주겠다”,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세상에 많은 종교를 창시한 창시자들은 “나를 믿으면 너희들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나를 믿으면 좋은 데 갈 것이다”, 이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도 확신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말을 하겠어요? 자기 자신도 확신이 없다고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내용들을 확실하게 말씀하셨어요. 딱 단정을 해서 “나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너희들이 나를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게 되면 너희들 심판받지 않는다”, 그다음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도록 하지 못한다. 나만이 유일하게 너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나를 믿는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겠다”, 적당하게 살아있을 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또 “나를 믿는 사람들을 내가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너희들과 영원히 함께 있겠다. 내가 너희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신 지가 2000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 전에 이미 그리스도는 죽었고 말씀대로 부활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 계시는데, 어떻게 그분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고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인지 굉장히 의아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12명에서 70명으로, 70명에서 3000명으로, 3000명에서 5000명으로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리들이 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라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이 이스라엘 나라에 있는 그 조그마한 예루살렘에서 유대 땅으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전세계로 뻗어가서, 오늘날의 여러분들과 저도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져요. 또한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말이 믿어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가는 하나님이 계셔요, 그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이분은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분이 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확신하게 만들고 믿도록 만들고, 그리고 항상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요.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이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리고 “고아처럼 너희들을 버려두지 않겠다”는 이 말씀이 그대로 지금 실행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10장 30절부터만 읽었습니다만, 히브리서 10장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굉장히 놀라운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의 기록 목적에 대하여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는 굉장히 놀라운 말씀이 히브리서 10장입니다. 여러분들은 구약 성경을 쭉 보고, 신약 성경을 쭉 보면서,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스도에 관하여, 인간에 관하여 많은 말씀들을 듣습니다. 교회에서 수없이 많은 말씀들을 듣고 또 본인이 공부도 하고 그러는데,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이 말씀이 믿어지고 이 말씀들만 확실히 이해해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임이 분명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정말 놀라워요.
1절에서 10절 사이에는 그리스도가 오신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라고 증거하고 있고, 11절에서 14절 사이에는 이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자신이 죽어서 제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건 좀 이상해요. 아니,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왜 예수님 자신이 죽어야 하느냐?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구약시대 때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용서받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게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가 굉장히 엄격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요즘 예수 안 믿는 분들이 지내는 제사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아요. 유교식으로 상을 차려놓고 하는 제사는 구약시대 때 제사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지은 죄에 따라 다섯 가지가 있어요. 어떤 죄를 지었느냐에 따라서 드리는 제사도 다르고, 제물도 다르고, 방법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 제사가 잘못 드려지면 때로는 하나님이 바로 심판하시기도 합니다.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이렇게 구약시대에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는 방법으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셨는데, 이 중에 가장 중요한 제사로 ‘번제’와 ‘속죄제’가 있습니다. ‘번제’는 모든 것을 태워서 완전히 없애도록 만든 제사이고, ‘속죄제’는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렇게 속죄 제사를 드릴 때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와서 그냥 아무렇게나 제사를 지내라고 하신 게 아니고, 제물을 반드시 요구하셨습니다. ‘이 제물에 네 죄를 전가하여 이 제물이 전가 받아서 대신 죽게 되는 것이다. 네 죄 때문에 이 제물이 죽게 되는 것이다. 양이 죽거나, 염소가 죽거나, 소가 죽거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 제물이 죽고 피가 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너의 죄를 용서한다’는 속죄의 원리가 제사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은총도 참 많이 받았지만, 진짜 골치 아픕니다. 맨날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이게 요즘처럼 그냥 예배드리는 것은 아주 신사예요, 너무 편해요. 구약 때는 맨날 양양양양 하면서 와야 돼지, 염소 염소 염소 하면서 와야 됩니다. 줄줄줄 끌고 와서 그 제사에 맞게 죽여야 되죠, 피내야 되죠, 불태워야 되죠. 또 이 내장들을 다 분리를 해야 돼요. 그리고 기름은 또 따로 분리해야 되고요. 제사장이 직접 짐승을 잡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오시는 분들이 짐승을 잡아요. 제사장은 분류를 해서 이걸 이렇게 저렇게 배치를 시키고 하는 이것이 굉장히 복잡합니다. 게다가 만약에 하나님의 법칙에서 어긋난 제사를 드리게 되면 이 제사는 굉장히 위험해집니다. 이와 같이 제사를 통해서 짐승들을 죽여 피를 냄으로써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죄 용서 방법이 구약의 율법서라고 해요. 그래서 율법이 다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약의 율법서가 인간이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 짐승이 죽도록 왜 그렇게 구체적으로 설명을 했냐 하면, 이것이 앞으로 인간들을 대신해서 인간들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줄 희생제물이 이 땅에 오실 것임을 예표로 보여준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것을 예표로 보여주시면서, 이제는 짐승의 제사가 아니라 사람이 죽어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단번에 끝내줄 것, 다시 제사가 필요 없이 단번에 끝내줄 한 분이 오실 것이라고 증거하였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단번에 죽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서 14절의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직접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죽고 피를 흘렸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일반 사람의 죽음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일반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었지만, 그리스도는 자기의 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 18절에는 이렇게 죄 용서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께서 증거하신다 그래요. 성령이 증거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고, 특히 17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어떤 죄도 기억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죄는 하나님 앞에 기억함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어떤 분들이 “아니, 목사님, 말도 안 되는 말을 다 하시네요. 성경의 계시록에 보면 ‘행위록’이 있지 않습니까? ‘생명책’이 있고 ‘행위록’이 있는데, 그 행위록에 보면 지은 죄들이 전부 다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다 그거 아는 거 아닙니까?” 성경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굉장히 무식한 사람입니다. ‘행위록’과 ‘생명책’은 천년왕국 뒤에 백보좌 심판 때 펼쳐지는 책입니다. 그 행위록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행위가 기록된 책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죄가 기록된 책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기록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나는 죄 없는데,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라고 변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행위록을 펼쳐버려요. “자, 네 죄 한번 봐라, 죄가 없는지.” 그들이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도록 모든 행위가 자동 저장이 됩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과 예배드리는 이 내용도 자동 저장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 이상이잖아요. 하나님은 능력이 어떤 분입니까? 다 자동 저장이 저절로 되는 거예요. 우리는 용량이 정해져 있지만, 하나님은 용량이 무한하여 다 저장이 됩니다.
우리가 죄용서 받는 것은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죄를 기억하지 않을 뿐이에요. 그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지,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굉장히 놀라운 신비입니다. 너무 신비로운 일이에요. 그래서 17절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에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런 언약을 받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은총을 못 받습니다.
그리고 19절에서는 “이제는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다”라고 기록하는데,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서 영원한 안식과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성소’라는 것은 –설명하면 복잡하지만- 원래의 성소, 성전은 건물 형태였어요. 처음에는 성막이었잖아요. 그다음에는 성전이 됩니다. 건물이잖아요. 예루살렘 성전을 솔로몬이 처음 세웠잖아요. 그러고 나서 성전의 개념이 바뀌어버립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서,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 됩니다. 그래서 성전 된 그리스도의 몸이 이제는 실제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 성전은 다시 바뀌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가 바로 성전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개념이 바뀌어버려요. 이런 성전이 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너희들도 내 안에 들어옴으로 성전 된 너희들이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얻을 수 있고, 거기에 우리가 담대히 갈 수 있다”는 말씀을 오늘 19절에서 하시는 겁니다.
그다음 23절에는 “우리에게 죽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약속하신 그분의 약속은 절대적으로 신실하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한 약속, 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한 약속을 철저히 지키시고 분명히 지키신다는 신실함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부터 39절입니다. 마지막 절까지 우리 성도들에 대해 권면을 하시면서, 자신이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올 것이니 그때까지 믿음을 잘 지켜 승리하도록 당부하는 내용으로 마무리해요.
우리 성도님들이 히브리서 10장을 쭉 보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와 방법이 나와 있고, 성도를 지켜준다는 말씀이 나와 있죠. 그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이 나와 있죠. 그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 전체의 내용이 여기에 요약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 10장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고 싶고, 과연 성경의 핵심이 뭘까 궁금하면요, 10장을 좀 자세히 보십시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좀 보다가 히브리서 10장을 보면, 하나님의 이 구원, 또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놀라운 은총, 그리고 구원의 완벽한 약속 그것을 지키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해서 예수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이 재림까지 다 들어있는 내용이에요. 구원론, 인간론, 심판, 재림 그리고 우리 구원이 안전하다는 약속까지 이 히브리서 10장 안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한번 여러분들 자세히 봐요. 굉장히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10장을 기분 좋게 읽어가다가 26절 들어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여기서 ‘짐짓’이라는 것은 알면서 짓는 죄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알면서 죄를 범한즉.” 그 뒤에 보니까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이야, 참 뭔가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해요. 25절까지는 그래도 참 감격과 감사함으로 읽어왔는데, 26절만 딱 그래놨고, 그다음에 27절에 뭐라 해놨냐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이걸 보는 순간에 앞에서 읽었던 은혜가 다 폭삭 내려앉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이 죄를 안 짓고 살아갑니까? 다 죄 짓고 살아가잖아요. 그리고 속으로 대답하면 됩니다, 알면서 짓는 죄가 많습니까? 모르고 짓는 죄가 많습니까? 대부분이 알면서 죄를 짓습니다. 또 하나 물어볼게요. 같은 죄를 많이 짓습니까? 다른 죄를 많이 짓습니까? 당연히 같은 죄를 반복해서 많이 짓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분들은 이 내용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예수를 믿기 전에는 우리가 지은 죄가 다 용서를 받지만, 예수 믿고 난 뒤에 짓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뒤에 짓는 죄는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에 심판받는다. 그래서 심판 안 받으려고 하면 회개를 계속해야 한다-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구원에 관한 회개입니다-, 계속 회개를 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너희들이 구원을 받지, 안 그러면 너희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야 심판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에 속죄하는 제사가 이제는 없고 끝났다 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정말 바르게 경건하게-하여튼 답은 뭔지 모르겠지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해석하며,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도 반드시 열심히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행위 구원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특히 이 구절을 가지고요. 여러분들도 이렇게 들어보면 맞잖아요. 틀린 말 아닌 것 같잖아요. 짐짓 짓는 죄, 다 알고 죄 짓거든요. 또 같은 죄를 많이 지어요. 사람이 같은 죄를 많이 짓고 그렇게 죄를 짓고 살아가는데 그러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여기까지 읽고 난 뒤에 ‘나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을 만한 자가 못된다’ 하면서 성경을 딱 덮어버리고 ‘지금부터 어차피 나는 죄를 짓고 구원받지 못하니까 그냥 적당하게 살아야겠다’라고 여러분들이 그냥 끝내버린다면, 정말 슬픈 일입니다.
그 뒤의 말씀을 또 봐야 해요. 그 뒤를 안 보고 거기까지만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겠지만, 그 뒤를 봐야 합니다. 뒤의 말씀이 무슨 내용이냐 하면, 28절과 29절을 보세요. 28절은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이고, 29절은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했거든요. 자, 누구를 이야기하느냐,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믿지 않는 자, 이게 바로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걸 알고 짐짓 알고서도 범한 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복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다 들었는데도 알면서도 죄를 짓는 자,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이제 답이 나오죠. 여기까지 봐야 한다고요.
따라서 26절과 27절 말씀에서 심판의 대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 즉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도 거부하는 자들이고, 두 번째는 배교자들입니다. 이 배교자는 어떤 배교자냐면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 교회에 와서 신앙이 있는 척하고 예수를 믿는 척하면서 장로도 하고, 목사도 하고, 집사, 권사도 하고, 봉사도 열심히 했는데, 뭔가 이상한 진리를 가르치면서, 성도들을 미혹한 거짓 교사들이 히브리서를 기록할 당시에 굉장히 많았습니다. 지금도 많습니다. 지금도 거짓 이단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들에게 미혹되고, 이런 식으로 잘못된 자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그 내용이에요.
26절과 27절까지만 들었을 때는 너무 가슴이 두근두근했는데, 그래도 28절과 29절을 들으니까, ‘아, 이런 말씀이었구나’ 하면서 다시 안심이 됩니다, 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앞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자기를 믿고 따른 자는 절대 용서받는다, 함께해 주겠다, 영원히 함께하겠다, 또 반드시 지켜주겠다, 또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내용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걸 알고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내용인 겁니다.
이렇게 깨달으면서 성경을 쭉 읽어보다가 37절에 보면,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신다”는 말씀이 있어요. 이 말씀에서 제가 제목을 잡았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37절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잘 기억해야 할 말이 ‘잠시 잠깐’이라는 이 단어입니다. 이것은 ‘빨리, 짧은 시간 안에’라는 뜻입니다. ‘속히’라는 의미예요. ‘짧은 시간 안에 올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이 말씀을 하신 지가 2000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짧은 시간이냐고 지금 우리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타임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타임으로 보셔야 해요. 하나님의 타임은 1000년이 하루 같은 시간입니다. 우리 인간은 100년, 조금 더 살면 110년, 요즘 120세까지 사는 사람들도 좀 있고 하지만, 그러나 그 시간은 하나님이 볼 때는 점과 같은 아주 찰나의 순간입니다. 우리 쪽에서 보니까 아주 길게 느껴지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굉장히 짧은 시간입니다.
그래서 ‘잠깐 뒤에, 잠시 후면 내가 너희들에게 다시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면서, 그 뒤에 이어서 30절부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주님이 오실 때가 다 됐으니까 우리 이런 식으로 살아가자고 30절부터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어떻게 살아가라는 삶의 원리들이 굉장히 많지만, 오늘은 이 히브리서 10장 30절부터 뒤에 나오는 말씀 속에 24년도뿐 아니라 앞으로도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있으니까, 이 답대로 살아가도록 함께 노력해주셔야 합니다.
첫째, ‘원수 갚지 말라’ 하셨습니다. 30절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하신 말씀을 우리가 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31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이래 놨거든요. ‘원수 갚지 마라.’ 여러분들 살아가면서 원수 많이 지잖아요. 요즘은 성도들 간에 다툼이 생기면 원수로 생각합니다. 성도들은 좀 다투면 이상하게 잘 안 풀어집니다. 목사님에게 꽁하고 있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갖고 갑니다. 교회 좀 다니다가 또 다른 곳으로 가면 끝까지 갖고 가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나빠요. 왜 원수를 자꾸 맺으려고 그래요? 성경은 수도 없이 원수 맺지 마라고, 또 원수에게 머리에 숯불까지 올려 두라 그랬잖아요. 이 숯불은 뭐라고 했습니까? 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불이 되라는 뜻이에요. 원수를 그렇게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따뜻하게, 겨울에 덜덜덜 떠는 사람에게 숯불을 머리에 이고 가서 줄 정도로요 -그렇다고 이런 큰 숯불이 아니겠죠. 머리를 불태우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숯불의 의미가 이렇게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이 숯불을 주어서 따뜻하도록 도와주는 의미로 사용되었어요.
이렇게 오히려 원수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주고 선을 베풀고 이렇게 하라고 수도 없이 이야기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싸우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주일에 교회에 오면 얼굴에 영적 가면을 쓰고서 굉장히 밝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어서 오세요”라고 이야기해서, 진짜 그것을 보는 목회자인 저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죠. 우리 교회는 그런 게 거의 없으니까 다행입니다만, 일반적으로 그런 게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도 영적 가면을 잘 쓰거든요. 속은 뒤집어지지만, 거룩한 척하고 안 그런 척하면서. 그래도 저는 조금 솔직한 편입니다. 성도님들이 “목사님 안녕하세요?” 그러면 -저는 안녕이 잘 안될 때가 많거든요- “저는 지금은 안녕 못합니다.” 그렇게 말하기도 해요. 안녕하지 않은데, 어떻게 안녕하다 합니까? “목사님, 평안하십니까?” “아니, 지금 평안하지 못해요,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우리가 좀 솔직한 게 좋은데, 여러분들 영적 가면 쓸 필요 없어요. 이거 하나님 다 아시는 거거든요. 그리고 성도들 간에 뭐가 원수지고 할 게 있어요? 또 불신자라 하더라도 원수지고 할 거 없습니다. 원수져본들 손해는 자기 손해지, 그 사람 손해 아니에요. 그러니까 오히려 원수에게 따뜻하게 다가가서 잘해 주셔야 해요. 그러면서 원수 갚는 것을 누구에게 맡기라? 하나님께 맡기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31절을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가는 것이 무섭다는 거예요. 네가 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이 하는 게 더 무섭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놔두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서서 하면 나도 피곤하고 힘들지만, 하나님이 하시도록 다 맡겨두면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만약에 그 사람이 징벌을 받을 만하면 하나님이 징벌을 때려버립니다. 나는 한계가 있고 얼마 못하잖아요. 자칫 잘못 원수 갚다가 내가 범죄자가 되잖아요. 그거 하지 말아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맡겨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때리는 매는, 심판은 더 무섭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차라리 맡겨버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지금 현재 마음속에 뭔가 불편하고 원수 비슷한 이런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거든, 지금 빨리 지워요.
그래서 속으로 따라 합니다.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모래에 새기자.’ 원래 우리나라 속담은 ‘은혜는 모래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예요. 이걸 거꾸로 하라고요. 은혜는 어떻게 해야 해요? 돌에 새기고. 원수는요? 모래에 새기라고요. 모래에 새겨 두면요, 물이 싹 오면 금방 지워진다고요. 여러분들 그렇게 하셔야 해요. 받은 은혜는 돌에 새겨요, 가슴에 새겨요, 깊이 새겨요. 그래서 내가 은혜 받은 분들에게-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말할 것도 없고- 연말연시가 되면 따뜻하게 인사라도 한마디씩 그렇게 해주고 그러는 게 좋습니다. 저는 신년을 맞이했는데,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저에게 신년 인사하신 분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슬픈 목사예요. 그런데 다른데 계시는 분이 목사님에게 인사가 왔어요. 그것도 생각지도 못한 분에게. 제가 다음에 만나면 우리 교회 데리고 오려고요, 여러분들 잘 아는 분이에요. 인사를 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목사님, 건강하시냐? 잘 계시냐? 하면서 눈물을 글썽글썽 하면서 저 보고 영적인 아버님이 계셔서 너무 고맙다면서, 그런데 영적인 아버님이라면서 영적인 아들처럼 못 살아간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원수는 그냥 모래에 새겨서 잊어요. 그냥 잊고 용서해요. 다 용서한들 안 한들, 여러분들 살아가는 삶 자체가 다 그렇거든요. 지금 그런 분들이 생각나면 그냥 다 용서하고 사세요. 그게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라고 말씀을 하거든요.
그다음에 32절에서 34절에는 그 어떠한 도전이나 고난이 와도 인내하며 싸워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뭐 특별합니까? 특별하지 않고 똑같잖아요. 여러분들 눈이 3개입니까? 코가 4개입니까? 다 똑같잖아요. 귀 2개, 눈 2개 맞죠? 코 하나, 입 하나. 다 똑같잖아요. 다른 게 뭐가 있어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고난들도 다 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더 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다가와요. 하나님께서 그분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에 주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크게 평안하고 복을 주시는 때가 있는가 하면 또 고난과 어려움을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굉장히 많이 받고 살아가는 세상에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려운 시대가 옵니다. 그 시대를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고요. ‘그런 시대가 오더라도 너희들은 끝까지 인내하면서 살아가라’ 말씀하는데, 32절의 ‘전날에-우리가 예수를 믿은 그런 상황입니다.
복음을 받아서 예전에 예수를 믿고 지금도 믿고 있는 상태예요.-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서 참은 것을 생각하라.’ 참았잖아요. 인내하라는 것이죠. 여러분들 정말 귀하게 참고 살아왔습니다. 예수 안 믿었으면 내가 지금 세상적으로 성공했을 법도 한데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포기 많이 하잖아요. 많은 걸 포기하고 여러분들 살아왔지 않습니까? 그 즐거운 노래방에 가서 노래 한 번 안 하고 살아왔잖아요. 사실 그런 데 가서 놀고 술도 좀 마시고 그러면서 살아가고 싶어도 우리 다 참았잖아요. 뭐 때문에?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영화도 마음대로 못 보고, 주일날 되면 산에도 가고 싶고, 바다도 가고 싶고, 여행도 가고 싶고 한데 이거 전혀 안 되잖아요. 그렇게 잘 안 하고 이 주님 믿는 것 때문에 우리의 삶을 진짜 많이 희생하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많은 유혹들도 우리가 많이 희생하거든요. 그래서 너희들이 이 고난의 큰 싸움에서 참은 것을 생각하라는 거예요.
그다음에 ‘비방과 환란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이것은 아주 공개적인 박해 기간인데, 사람을 예수를 믿는다고 잡아다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박해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쉽게 생각을 하면,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면서 군중들에게 잡혀 왔잖아요. 잡혀 와서 구경거리가 됐잖아요, 비난거리가 됐잖아요. 그리고 얻어터지고 맞았잖아요. 바로 비방과 환란을 받고 구경거리가 됐잖아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비방을 받고 환란에 던져지고 어려움을 당한 자와 친구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다 그런 데서 하나가 다 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귀한 자들인지 모릅니다. 너무 귀한 자입니다.
그래서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거예요. 그렇게 사귀면서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힘주고 용기 주고 극복해 갈 수 있도록 손잡아 세워주고 하는 게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헐뜯고 시기하고 싸우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안 됩니다. 앞으로는 여러분들 어려워집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복을 많이 받은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나가고 어려운 시기가 다가오면, 여러분들이 혼자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안 된다고. 그래서 조금 약한 분들을 힘 있는 사람이 좀 도와주고, 없는 사람들 좀 생활하도록 해주고 이런 걸 하셔야 한다고요. 그렇게 도와주면서 같이 격려하고 힘을 내고 하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로 가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34절에 보면 정말 귀한 말씀이 있어요.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긴다.’ 우리는 갇힌 자 많이 동정하거든요. 그러면서 산업이 빼앗긴대요, 물질도 빼앗기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솔직하게 한 번 이야기해 봅시다. 여러분들 주일에 교회에 헌금 하잖아요. 십일조 헌금도 하고 감사 헌금도 하죠. 이게 뭡니까? 물질이 빼앗긴 거잖아요. 여러분들 건데 교회에 쉽게 말하면 빼앗긴 거잖아요. 이런데도 여러분들은 감사하게, 기쁘게 생각하는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 앞에 많이 바치지 못했음에 대해서 오히려 안타까워하기도 한다고요. 참, 이게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생각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이거에요. “네가 그렇게 먹고 살기 힘든데, 주일마다 무슨 헌금을 한다고 그러느냐? 이거 좀 안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제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성도가 고난 당하고 어려움도 당하고, 산업이 또 빼앗기는 거예요. 물론 이건 헌금의 개념은 아니에요.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 빼앗기는 자기 재산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어요. 나중에 국가적 박해가 들어오면 성도 재산 다 빼앗아 버리잖아요.
그리고 감옥에 집어넣어 버리잖아요. 아무것도 안 주고 그렇게 될 때도 있고, 옛날에 그렇게 핍박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지 않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해서 산업도 빼앗겼는데, 그 뒷말이 우리를 너무 감동하게 하는 말이에요. 34절에 ‘그렇게 되어도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했다’는 거예요. 즐거움으로 당했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비난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이렇게 내가 사람들에게 때로는 조롱당하고, 내 산업이 빼앗기고, 그리고 여러 가지 많은 박해를 당하더라도 이것을 기쁘게 여긴다는 겁니다.
이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상한 현상이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웠던 세상이 싫어지기 시작합니다. 너무 사랑하는 주님도 떠나게 됩니다. 어떤 주님인가 아시겠죠? 예전에 제가 학교 다닐 때 그때 지도하는 선생님이 교회의 어떤 집사님이셨어요. 그분이 주님을 굉장히 사랑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주님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가 많이 빨리 먹어서 소비를 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면서 잘 마시는 그런 분을 봤어요, 교회 집사이면서 이 주님 빨리 없애야 된다고 하면서요. 그런데 여러분, 그 좋아하는 술, 담배, 이게 그냥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게 아닌데, 왠지 모르게 멀어지기 시작하고, 이상하게 세상적으로 같이 재미있게 놀던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딱 보니까 내 주변에는 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로 딱 포진이 되고, 그러면서 같이 믿음 생활을 해가는 동역자들이 되어갑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무수히 많은 어려움도 당하고 또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이렇게 사는데도 이상하게 그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기쁘게, 감사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인이거든요. 내가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령께서 그런 식으로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성령이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정말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의 말씀이 35절, 36절에 있는데,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항상 용기를 가지라는 거예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 제가 여호수아 이야기, 작년 마지막 주일에 설교했어요. ‘담대하게 2024년을 맞이하라’는 거예요.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인내하라는 겁니다. 35절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그리고 36절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이렇게 해놨거든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를 대부분이 '인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인내’가 아니고 ‘필요함’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필요하다’는 것은 조금 필요하다, 적당히 필요하다 하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것 없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완전히 이것으로 채워야 한다는 그런 의미의 필요를 말합니다. 그래서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거예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언제까지 인내해야 합니까? 승리할 때까지. 이래서 야고보 사도가 인내를 이루되 온전히 이루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내가 완성이 되도록, 여러 가지 도전과 어려움 속에서 완전히 승리하도록 그때까지 인내를 갖고 가자 하는 그런 말씀이에요.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설교 제목처럼 주님 다시 오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온다는 건 알아도, 이 지식이 머리에 갇혀 있어요. 지식적으로 이성적으로만 알아요. 이걸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이것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잠시 잠깐 후면’ –이것은 ‘속히’,‘얼마 있지 않아’라는 뜻인데- 이것이 가슴 속에서 느껴져야 해요. 그런데 세상과 계속 친하다 보니, 주님의 재림을 은근히 회피하고, 안 왔으면 좋겠다는 이런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 많습니다. 세상이 자꾸 재미있고 즐거워지면, 예수님 안 오시면 좋겠다 싶고, 나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마음이 자꾸 듭니다.
여러분들, 제가 말을 안 해도, 지금 현시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십시오. 주님 다시 오심에 대한 징조가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뉴스 안 듣고 방송 안 듣고 그냥 일만 하시는 분은 모르겠지만, 뉴스나 방송을 조금만 보더라도, 여러분들이 ‘야, 이거 세상이 장난 아니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장난 아닌데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오시겠다는 느낌이, 세상 뉴스나 방송 돌아가는 거만 조금만 들어도 그런 마음이 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러분 지금 징조들 보세요. 곳곳에서 지금 난리 아닙니까? 마태복음 24장 6절에,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는다고 그랬어요. 소문? 정보통신기술이 발전 안 하면 소문이 없습니다, 특정한 지역에서 끝나 버리잖아요. 그런데 지금 딱 정보통신기술이 발전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실시간으로 방송이 됩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 예수님이 2000년전에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어요. 지금 그 시대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 보십시오, 역사 이래 이런 때는 없었어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들이 전부 지금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어요. 동시에 쫙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혹시 요한계시록 6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신 분들은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가 요한계시록 6장의 사건과 너무 비슷하게 돌아간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네 마리 말이 나와요. 인을 뗄 때, 첫째 말이 백마, 둘째 말이 적마, 셋째 말이 흑마, 넷째 말이 청황색말이예요. 그런데 여기서 백마 빼고 지금 세 가지가 다 이루어지고 있어요. 전염병 돌았죠? 청황색마. 그리고 전쟁 지금 일어나고 있죠? 적마. 그다음에 기근, 흑마. 지금의 경제 위기가 가중되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그런 시기가 지금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금 되었거든요. 하나 남았어요, 백마. 이것은 평화를 상징하거든요. 그러면 뭔가 이 세상을 안정화시키는 백마 탄 인물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어요.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가 되고 사탄의 앞잡이가 된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갑작스럽게 이 모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간다. 큰 혼란 속에서 갑자기 세상이 평안해지는 시점이 옵니다.
그럴 때 여러분 안심하면 안 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인이 떨어지는 거예요. 지금 요한계시록 6장의 사건들과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계시한 사건이 아니고, 사탄이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겁니다. 지금 그대로 흉내 내거든요. 너무 비슷하니까, 어떤 분들이 지금 하나님의 인이 떨어졌다, 몇째 인이 떨어졌다, 자꾸 이런 말을 하는데,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의 심판의 인은 안 떨어졌습니다. 사탄이 흉내 내고 있는 겁니다.
어쨌든 역사 이래 지금 이렇게 주님 오심에 대한 예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난리와 난리의 소문’ 뿐만 아니라 ‘지식의 급증’은 다니엘서 12장이 나와요. 지식이 급속도로 증가할 것이라는 거예요. 지금 지식이 얼마나 발달해 있습니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지식이 엄청나게 발달해 있어요. 그다음에 통신과 교통기술의 발달, ‘사람들의 왕래가 굉장히 빨라진다’는 거예요. 이것들이 다 성경의 예언이에요. 이게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 겁니다. 지금 이런 일들까지 다 이루어졌거든요.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다른 것보다도 구체적으로 지금 현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에요.
그래서 지금 우리들의 시대가 주님 오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준비해야 할 시대입니다. 이거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늘 당부하는 게 여러분들이 하는 모든 일 가운데 열심히 살되 항상 주님에 대한 사랑과 주님의 오심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라는 거예요. 이게 깨어있는 신부의 특징입니다. 열 처녀 중에 다섯 명의 깨어있는 신부의 특징이에요. 그렇게 사셔야 합니다. 그렇게 마무리를 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힘은 앞으로는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아왔지만,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뿌리,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믿음이에요. 이 믿음이 어디서 왔느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에요. 이 믿음이 우리의 뿌리가 되어서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시는 굉장히 큰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꼭 기억하세요. 39절,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했거든요. ‘침륜’이라는 단어는 멸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도전이 오고 어려운 일이 온다고 뒤로 막 물러가서 피하고 도망가고 하면서 멸망 받을 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멸망을 받을 자가 아니다.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다.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뭘 가진 자다? 믿음을 가진 자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으로 살고 멸망 받을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여러분들 지금 갖고 있는 모든 문제들 싹 해결됩니다. 얼마나 좋은 겁니까? 그래서 주님이 빨리 오셔야 해요. 여러분들 나이 들고 늙어가는 거 싫잖아요. 예수님이 오시면 그거 해결됩니다. 여러분들 병 있으신 분들 괴롭잖아요. 예수님이 오시면 다 해결됩니다. 자녀들 애먹이잖아요. 예수님이 오시면 다 해결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가졌던 수많은 아픔들, 그리고 믿음 지키려고 조롱도 당하고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이렇게 살아왔던 것 전부 다 주님이 오시면 싹 보상 다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이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고, 우리의 갈 길 다 가도록 주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신다. 무슨 일을 만나더라도 우리는 형통하게, 마음이 평안하고 감사하며 형통하게 갈 것이라는 약속을 생각하며, 오늘 주보 찬양 찬송가 43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같이 한번 찬양합니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담대하게, 강하게, 믿음을 갖고 살아가십시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해도, 우리는 은혜 가운데서 승리합니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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