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8
새로운 피조물 된 증거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나그네”는 깊이 있는 선율과 반주로 독일 가곡에 새 장을 연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그중에 <봄의 꿈>을 노래한 것이 있습니다.
‘한 겨울 숲 속에 외롭던 산새들,
잃었던 기쁜 노래를 또다시 부르게 하는
봄바람, 봄바람, 불어라 내 맘에도’
겨울하면 눈이 하얗게 뒤덮인 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죽은 사람 위에 덮어놓는 하얀 천같이 눈은 죽음의 대지를 지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생명의 씨앗을 담고 있기에 실제적 죽음이라기보다는 잠재적 죽음인 것이고 그래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죽은 것 같았던 생명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봄은 부활의 계절인 셈입니다.
“7년 주기 교체”(seven-year switch) 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사람 몸은 약 7년이 되면 완전히 새롭게 바뀐다는 겁니다. 그 기간 동안 몸의 모든 옛 세포는 새로운 세포들로 교체된다는 것이고 그래서 7년이면 육체적으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반복되다 보면 차츰 노화되어 결국엔 수명을 다하고 맙니다.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증가의 법칙 곧 무질서 증가의 법칙에 의해서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약을 먹고 음식을 먹어도 얼마간의 시간은 연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엔 죽고 맙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혼, 곧 속사람은 어떠할까요, 같은 과정을 겪는 것일까요?
‘인간의 철학적 이해’ (P.N. 폐도셰예프 외, 새날출판사)라는 책에 보면
인간적인 것 또는 사람다움의 패러다임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1) 생물학적으로 비전문화되어 있다.
(2) 물음을 묻는 지성적 이성적 존재이다.
(3) 문화의 창조자, 피조자이다.
(4) 자유의지를 가진 윤리적 존재이다.
(5) 고유한 내면적 세계를 가지고 있다.
(6) 이해를 초월하는 탈 중심성을 가지며, 불편, 부당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
(7) 유토피아 의식을 가지며 미래지향적이다.
(8) 사회적 존재이다.
(9) 학습적 존재이다.
(10) 상징적인 존재이다.
(11) 기도, 희망, 사랑등을 추구하는 종교적 존재이다.
(12)수치를 아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런 패러다임은 주기적이지 않습니다.
육체적 7년 주기와는 상관이 없고 교체되지도 않으며 나름대로 발전 또는 변화하며 사는 동안 존속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7년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피조물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육신이 7년 간격으로 모든 세포가 교체되는 그 기간 동안 필요한 것은 땅의 음식물입니다.
반면에 그 안에 깃든 영혼은 시104:30에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바람같은 하나님의 영으로 삽니다.
주의 영, 그것은 창세기의 “Ruah" 곧 흙으로 빚은 아담의 코에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던 그 생기 곧 하나님의 영의 바람을 말합니다.
그 주의 영이 아담의 타락으로 죽어버렸었지만 사람들에게 다시금 불어 넣어지면 생명의 봄바람이 되어 세상을 바꿔놓는 그래서 새 생명을 잉태하고, 가을이 되면 결실을 맺게하는 것 같은 그런 변화의 바람인 것입니다. 그 바람이 누구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인 (고후 5:17) 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리스도 안에’ 라는 이 구절은 거의 바울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바울 특유의 표현입니다.
그 한 예로 그는 (고후 12:2)에서 말하길 ‘내가 알았던 한 그리스도인’이라 하지 않고, ‘내가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그가 셋째 하늘에 끌려간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에 관해 말하면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윗으로부터 요나단을 떼어내 버리면 그것은 다윗에게 곧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그들 각자는 떨어져서 살았지만 다윗은 궁전에 있는 요나단을 생각했고 요나단은 친구 다윗이 바로 그 순간 들판이나 동굴에 있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 안에 사는 것은 사랑의 한 가지 정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건 그와 같이 주님과 나와 사랑의 관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망의 골짜기로부터 구원해 주신 주님의 대속의 사랑이 고맙고 감격스럽고 놀라워 주님을 위해 살기 원하게 되고 그렇게 인생관이 달라지고 생사관이 달라지며 새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 부활 이후 주님이 자주 보이질 않자 주님이 자신들의 곁을 떠나신 것 같아 낙심한 제자들은 주님과의 추억이 서린 예루살렘을 떠나 도로 옛사람이 되어 고향 갈릴리로 돌아갔고 그렇게 물고기나 잡으며 실의에 빠져 있던 베드로 일행에게 어느 날 새벽 부활 주님께서 갈릴리 호숫가로 찾아오셨고 ‘베드로야 네가 여전히 날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 처럼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며 다시금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되고 그렇게 자신을 찾아 주신 살아계신 부활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격하고 그때 받은 사명으로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주님께 헌신했던 베드로처럼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와 같이 소망 없는 죽음과 같았던 삶이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삶 곧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가 그런 뜻입니다.
그것은 잃었던 생명의 찾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어려서 주일학교에 다녔지만 커서는 노예 상인이 되었다가 어느 날 런던의 한 작은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을 고백했던 죤 뉴턴목사님처럼 주님께 헌신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그렇게 그가 지은 고백 시가 바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그렇게 뉴톤은 작은 목회자가 되어 죽기까지 작은 교회에서 헌신하였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된 자에게는 새로운 사명과 직책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 지책이란 이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고후5:40)
곧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과 화목케하는 사신(ambasador)이되는 것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 된 증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에는 두 종류의 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원로원 관할의 성; 곧 로마와 화친하여 전쟁이 없는 백성들이 거주하는 성.
또 하나는 황제 관할의 성; 기회만 있으면, 로마에 반역하려는 성.
그래서 황제는 그곳에 수시로 화목의 사신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곳. “황제 관할의 성”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선 이들에게 전쟁이 아니라 평화의 선포를 위해 새로운 피조물된 우리를 사신으로 이 세상에 보내려 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신됨에는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 진실성은 이것입니다.
(고후 5: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할 때, 메콜리경은 일 년에 한 번 인도 출장을 했고 많은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늘상 가족과의 이별이 아팠습니다. 그의 소망은 비록 작아도 편안한 집, 훈훈한 난로가 있고, 잘 익은 고기와 좋은 포도주 한 잔이 있는 곳. 그 누구에게도 의무를 지지 않고, 세상의 변화에는 무감각하게 완전히 무관심한 곳이 그가 꿈꾸는 수년 뒤의 집이었습니다.
반면에 동시대의 그리스도의 사신 된 인도 파송 선교사들은 귀국 후의 희망이나 아무 노후 보장도 없이 가족과의 만남도 포기한 채 홀로 묵묵히 일하면서 고국에의 희망을 버리고 인도에서 끝까지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육신이 훈훈한 벽난로를 꿈꾸며 예수를 믿으나
어떤 이들은 겨울 나그네 같은 삶을 택하여 살면서 영혼 깊은 곳의 영원한 봄바람을 꿈꾸며 삽니다.
새로운 피조물된 우리는 그렇게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1.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에필로그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주의 십자가 붙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