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李氏) 본관(本貫) 광산(光山)입니다.
[관향의 연혁]
광산(光山)은 전라남도(全羅南道)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던 곳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 무주(武州)로 개칭하고 940년(고려 태조 23)에 현재의 명칭인 광주(光州)로 개칭하였다. 996년(성종 15)에 강등하여 자사(刺史)를 두고, 후에 다시 해양현(海陽縣)으로 강등하여 현령(縣令)을 두었다. 1259년(고종 46)에 승격하여 지익주사(知翼州事)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승격하여 광주목(光州牧)으로 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1501년(연산군 7)에 주(州)가 되고 1895년(고종 32)에 다시 광주군(光州郡)이 되었다가 1935년에 광주군 내의 광주읍(光州邑)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광주군은 광산군으로 개칭되었다.
[가문의 유래]
광산이씨(光山李氏)는 신라(新羅)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의 후예로, 송악(松嶽)에서 태봉국(泰封國)을 세웠던 궁예(弓裔)의 6세손 이종금(李宗金)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종금(宗金)은 1010년 거란(契丹)의 40만 대군이 내침하여 송도(松都)와 주읍(州邑)이 허물어지고 왕(王)이 남천(南遷)하는 혼란속에서 강감찬(姜邯贊)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대소전투(大小戰鬪)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018년(현종 9) 3차로 재침해 온 거란의 10만 정예군(精銳軍)을 맞아 휘하의 주군을 이끌고 강화성(江華城)을 굳게 지켜 나라의 귀중한 재화(財貨)를 보전(保全)시킨 공적으로 1032년(덕종 2)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지고 이종금(李宗金)이라는 성명(姓名)을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광산군(光山君) 일원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광산(光山)으로 삼게 되었다.
그 후 시조 종금(宗金)의 8세손 각(慤)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슬하에 아들 순백(珣白)․ 숙백(叔白)․ 승백(升白)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광산이씨(光山李氏)의 3대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맏아들 순백(珣白)은 1320년원(元)나라 환관(宦官) 빠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참소로 토번(吐蕃)에 귀양가는 충선왕(忠宣王)을 박인간(朴仁幹) 등과 함께 호종(扈從)하였다가 3년만에 돌아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르고 충장(忠莊)으로 추시(追諡)되었으며, 그의 아우 숙백(叔白)은 1328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직제학(翰林院直提學)에 올랐고, 막내 승백(升白)도 등과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후손들이 이들 3형제를 중시조(中始祖)로 봉안(奉安)하고 기일세(起一世)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광산이씨의 3대 인맥을 계통별도 살펴보면, 상서공(尙書公) 순백의 아들 기(奇)가 고려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고, 증손 일영(일영: 병조참판을 역임)의 둘째 아들 선제(先齊)가 조선조(朝鮮祖)에 와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어려서 양촌(陽村) 권 근(權 近)과 매헌(梅軒) 권 우(權 遇)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선제(先齊)는, 1419년(세종 1) 20세의 나이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부교리(集賢殿副校理)로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이 되어「태종실록(太宗實錄)」편찬에 참여했고, 형․ 호․ 예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한 후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정인지(鄭麟趾)와 더불어 「고려사(考慮史)」개찬(改撰)을 관장했다.
특히 선제는 당시에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뚸어나 조선초 찬란한 문화발전의 개화기(開化期)를 연 주역(主役)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광주현(光州縣)을 목(牧)으로 승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슬하에 아들 5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했다.선제(先齊)의 장자(長子) 시원(始元)은 예조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차자(次子) 조원(調元)은 이조참의(吏曹參議)로 물러나 후학(後學)을 길러 많은 동량지재(棟梁之才)를 배출시켰으며, 3자(三子) 한원(翰元)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4자 찬원(贊元)은 홍문관의 수찬(修撰)을 역임하여, 부제학(副提學)으로 일본 통신사가 되었던 막내 형원(亨元)과 함께 이름을 떨쳐, 이들 5형제가〈광산이씨5원화족(光山李氏五元華族)〉으로 일컬어졌다.
그 후 양심당(瀁心堂) 시원(始元)의 아들 복선(復善)이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성심당(惺心堂) 형원(亨元)의 아들 달선(達善)은 성종(成宗)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해박한 경연(經筵)으로 왕(王)으로 부터 사유(師儒)라는 칭호를 받았다.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를 지낸 공인(公仁 : 달선의 맏아들)은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하는 애석(哀惜)함이 있었으나 그의 아들 백호(伯虎)․ 중호(仲虎 : 전라감사)․ 숙호(叔虎)의 후대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하여 가문의 융성을 누렸다. 전라감사(全羅監司) 중호(仲虎)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급(汲)은 사마시(司馬試)에 이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校理)와 정읍현감(井邑縣監) 등을 지냈다. 그러나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謀叛) 사건에 연루되어 아우 발(潑)․ 길(洁)과 함께 화(禍)를 당했다.
일찍이 척암(惕菴)은 김근공(金謹恭)과 습정(習靜) 민 순(閔純)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발(潑)은, 1573년(선조 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어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제창(提唱)하고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항상 왕도(王道)를 진달(陳達)했으며,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하고 사정(邪正)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여겨 조금도 구차하게 야합하려는 뜻이 없었으므로 우계(牛溪) 성 혼(成 渾)․ 송강(松江) 정 철(鄭 徹) 등 서인(西人)들의 미움을 사게 되자 시사(時事)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을 알고 부제학(副提學)으로서 차자(箚子 : 간단한 서식으로 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발(潑)의 아우 길(洁)도 선조 때 등과(登科)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과 검상(檢詳)․ 사인(舍人) 등을 역임한 후 응교(應敎)로 있다가 낙향했는데 불행히도 역변이 일어나 형과 함께 국문(鞠問) 도중에 절명했다.「부계기문(涪溪記聞)」에 의하면 발(潑)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평소에 병이 많았으며 그는 옷과 띠를 풀지 않았으며 약을 달이는 것도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인맥을 소급하여 한림공(翰林公) 숙백(淑白)의 계통에서는 그의 아들 순(順)이 1374년(공민 왕23) 문과에 그제하여 헌납(獻納)을 거쳐 풍해 안렴사(豊海按廉使)를 지냈으며, 그의 맏아들 초(椒)는 조선(朝鮮)이 개국한 후 대사성(大司成)을, 차남 매(枚)는 영광교도(靈光敎導)를 거쳐 참판(參判)으르 역임했다.
회령판관(會寧判官)을 지낸 림(林)의 아들 형제 중 차남 근생(根生)은 단종(端宗)이 폐위되고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이 등극하자 이를 개탄하여 경북 고령군 성산면 고곡동(慶北高靈郡星山面高谷洞)으로 은거(隱居)하여 학문에 진력하다가 생(生)을 마치니, 그 후로 영남파조(嶺南派祖)가 되었다. 근생(根生)의 손자 수(樹)의 아들 홍기(弘器)․ 홍량(弘量)․ 홍우(弘宇)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도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영남삼객(嶺南三客)〉으로 불리웠으며, 뒤에 영남유림(嶺南儒林)의 총의(總意)로 3형제(兄弟)의 고결(高潔)한 생애를 기리기 위하여 회연서원(檜淵書院)․ 향현사(鄕賢祠)에 향배(享配)하였다.일찍이 한강(寒岡) 정 구(鄭 逑)는〈부귀한 집에 사위되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이씨(李氏) 문중에 장가들기를 원한다(不願富貴壻願入李氏門〉고 하여 광산이씨 집안에 장가들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김 면(金沔)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우고 진천현감(鎭川縣監)을 지낸 후 형 홍량(弘量)과 함께〈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유림(儒林)의 숭앙(崇仰)을 받았던 홍우(弘宇)의 아들 서(서)는,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특출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스승의 명을 받아「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편찬하였고, 1605년(선조 3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난정이 계속되자 스승을 따라 벼슬의 뜻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후 거처(居處)를 승호(承湖 : 현 경북 달성군 논공면)에 옮기고 동호학당(東湖學堂)을 열어 스스로 호(號)를 야로(野老)라 칭하고 후학으르 기르는데 정성을 다하여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1650년(효종 원년)에 생(生)을 마치니, 유림(儒林)의 발의(發議)로 덕요선생(德耀先生)이라 사시(私諡)를 짓고, 선조(先祖)가 모셔진 회연서원(檜淵書院)․ 향현사(鄕賢祠)에 배향하였다.그 외 숙종(肅宗) 때 부령부사(副寧府使)와 증산현령(甑山縣令)을 거쳐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한 두망(斗望)과 서산현감(瑞山縣監) 태창(泰昌), 영해부사(寧海府使) 징하(徵夏), 예조좌랑(禮曹佐郞) 중빈(重彬) 등이 유명했고, 규일(奎一)은 철종(哲宗) 때 무과에 급제하고 이원현감(利原縣監) 겸 북청진관병마절제도위를 역임하여, 고종(高宗)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된 필현(弼鉉)과 함께 명문(名門) 광산이씨의 전통을 지켰다.
[ 시조 논란] * 이 논란은 서로 다른 주장으로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내용이니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시조가 태봉의 왕 궁예의 아들 신광의 후손 이종금(李宗金)인지 고려 말 광주 지역의 호족 출신으로 추정되는 이정(李靖)인지 광산이씨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광산 이씨의 대종(大宗)인 상서공파 측에서는 시조를 향공진사(鄕貢進士)를 지낸 이정을 시조로 삼고 있으나, 소수파인 한림공파(대구와 고령에 집성촌이 있다)에서는 시조를 이종금으로 삼고 있다. 광산이씨종친회의 기본 입장은 향공진사(鄕貢進士) 이정을 시조로 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가족을 전부 주살(誅殺)해서 자손이 남아있지 않았던 궁예에게서 이종금이라는 후손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다.[3] 그렇기 때문에 신라계 김씨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4] 증보문헌비고에는 고려태조 왕건이 태봉왕 궁예의 후손 셋을 광주와 전주에 옮겨서 그 지역 향역을 맡아 살도록 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광산 이씨 상서공파와 한림공파는 본관만 같고 다른 집안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광산 이씨 상서공파의 Y 염색체 하플로그룹은 O2a1b1a1a1a(O-F11, 옛 O3a1c1)이고, 한림공파의 Y 염색체 하플로그룹은 O1b2a1a2a1(O-CTS723, 옛 O2b1b)이다. 두 하플로그룹은 지금으로부터 약 3만 500년 전에 갈라졌다. 광산 이씨 족보에는 상서공파와 한림공파가 13세기 말, 지금으로부터 약 750년 전에 갈라진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를 통해 두 파가 사실상 남남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쯤 되면 두 공파의 문중 회장들이 모여서 본관을 둘로 쪼개야 할 것 같다.[5] 게다가 상서공파 일부는 하령군의 후손 중 일부가 계유정난 때문에 화를 피해 광산 이씨로 편입한 경우도 있어서 더더욱 복잡하다
[주요집성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