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시조문학(時調文學)의 관점과 전통시조(傳統時調)
동촌 고마실(김재경)
1.
현대 시조문학은 통상 최남선 이병기 이후로 규정되거니와1) 이들 양인 중에도 『문장』지를 통해 후배 시조계 지도자들을 다수 등단시켰던 이병기가 실질적 영향력은 막중했던 듯하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했는지,그에 의해 등단한 조남령은 이병기의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에 대해 “뭇 시인의 경전이 되어 마땅하다”고까지2) 신성불가침시하였다.이런 교조적(敎條的) 기풍은 『문장』지 동료 정지용의 장황한 헌사(獻辭)3)까지 등에 업고 지금껏 후인(後人)들에게 음양으로 육중 영향을 미치는 것같다.
필자는 이병기의 시조에 대해 응당한 가치를 존중하며 매력도 느낀다. 그러나 절대시함은 어디에나 문제가 있고 무비판적 숭앙은 항용(恒用) 발전을 가로막는다.
이를 감안하면서 본 글은 이병기의 관점과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필자가 여기서 제시하는 관점 또한 유아독존(唯我獨尊)이나 유일(唯一)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오직 시조문단의 다양화 측면에서 이런 시각도 일정 영역을 할양받아야하며,적절한 발언권을 행사해야한다고 믿을 뿐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병기가 시조를 대폭 바꾸자고 동아일보에서 주장했던 원래 시조의 원형(原形)이다.그 원형을 오히려 유지 계승하려는 관점이다.
전통의 불변(不變) 계승부(繼承部)와 가변(可變) 개혁부(改革部)에 대한 논쟁은 늘 뒤따르는 것이지만,시조라는 고유(固有) 문맥(文脈)을 잇는 영역에서까지 과거 방식과 달라야한다는 선입견이 문단(文壇)에 너무 강고해 보인다.물론 그럴 필요도 있겠지만 다 그런 식일 필요는 없으며,안그래야할 부분도 있을 것이다.
본 글은 이런 점들에 대해 상론(詳論)하려 기필(起筆)되었다.
2.
시조의 뿌리는 고대 민요(民謠) 등에서 연유하여 고려 말부터 체체를 정립했다고 하나4) 그 이전 향가(鄕歌) 등과의 관련성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실질적 출현은 한글 발명 이후 존재된 시가(詩歌) 형식이라 추정되니 한자 시대에는 한국어를 제대로 구현할 수 없는 상태여서 음수율 3·4·3(4)·4 / 3·4·3(4)·4 / 3·5·4·3로 정비된 시조를 항식화(恒式化)하기는 어려웠겠기 때문이다. 이점 삼국시대인들의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말의 정몽주나 이방원 등 일군(一群)의 시조도 현존 형태대로 보기는 어려우며 후대에 창자(唱者)가 자신들의 가창(歌唱)에 적합하게 번역 내지 다듬었을 개연성이 크지 않나 한다.
한편 세종대 이후 맹사성의 감군은식(感君恩式) 충절이나 이현보·이황·이이 등 유림(儒林)의 세계관을 토로한 작품들은 향언(鄕言)의 전파 능력을 중시한 지배층(支配層)의 이념홍보적 성격이 가미되었던 듯하다. 기존 가악(歌樂) 곡조에 얹혀져 다양히 불리어진 시류(時流)는 이황의 이현보 어부사에 대한 발문5)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그후 한글을 매개로 시조 양식(樣式)의 전파력은 사회 각계로 확산되어 조선 후기 다양한 주제의 시조가 성행되고 수요층의 확대를 이루었다.이에 시조를 정격(定格) 음율화한 전문 가객(歌客)들도 등장하고6) 이들의 가창(歌唱) 가사집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시조의 고향이라면 결국 시조는 시조창(時調唱)의 가사(歌詞) 정리 과정에서 출생한 셈이 된다.
돌아보면 서양에서도 시의 뿌리되는 서정시를 리릭(lyric)이라 부르거니와 이는 리라(lyre)라는 악기에 맞추어 노래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 한다. 한시(漢詩) 또한 음율을 중시하여 악부시(樂府詩)를 넘어 통상 운(韻)을 저변(底邊)에 깔았고 일본의 하이쿠의 뿌리되는 단가(短歌) 또한 노래와 깊이 연계되었음은 그 이름에서부터 시사된다.
한국에서도 고대 시가인 공후인(箜篌引), 황조가(黃鳥歌), 구지가(龜旨歌) 및 향가(鄕歌) 등이 노래와 밀착된 것은 통상적 명칭에서부터 재언의 여지가 없다. 한시(漢詩) 주도 시대 이들 고유언어 문학은 그늘에서 연명해 오다 한글 발명 이후 사리(舍利)처럼 영글은 것이 시조로서 가(歌)와 시(詩)가 완형(完形)의 셋트를 이룬 종합예술이라 할 것이다.
이가 조선(朝鮮) 영·정조대(英·正祖代) 『청구영언(靑丘永言)』이나 『해동가요(海東歌謠)』 등 시조집으로 결실되고 최종 결정판은 주지되듯 구한말 박효관과 그 제자 안민영에 의해 편찬된 『가곡원류(歌曲源流)』(1876 ; 고종 13)였는데 모두 가단(歌壇)의 배경 하에 이루어졌다. 이어 왕조 국가가 해체되고 이족(異族)의 압제가 본격화함으로서 시조는 언론에 외침(外侵)에 저항하는 준문학적(準文學的) 기능으로 활용되었다. 흔히 현대시조의 출발로 지칭되는 『대한매일(大韓每日)』 게재 대구여사(大邱女士)의 「혈죽가(血竹歌)」(1906.7.21) 또한 민영환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작품이었음도 공지되는 바다.
이러하던 시조를 문학 영역에 본격 끌어들인 인물은 널리 알려진 바처럼 최남선(1890-1957)이었다. 그는 국풍(國風)이라는 이름 하에 일찍부터 약간의 시조를 창작하였고 『가곡선(歌曲選)』,『시조유취(時調類聚)』7)등 고시조 모음집도 발간하는가 하면 개인 최초의 창작시조집 『백팔번뇌』(동광사,1926)를 출간하였다. 한편으로「조선 국민문학으로의 시조」8)등을 통해 시조의 문학적 중요성을 설파하였는 바 1920년대 프로문학에 대항하는 국민문학파의 후원 속에 범문단적 지원도 확보할 수 있었다.
전위에 섰던 최남선은 백과전서적(百科全書的) 인물로 시조를 자신의 논찬(論纂) 세계의 일부로 삼았으나 국문학자이자 시조인을 직접 추천 관리했던 이병기(1891-1968)는 좀더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 분담에 비유될만하다.
3.
시조 중흥조(中興祖) 최남선이 1913년 편찬한 『가곡선』에서는 시조를 ‘우조(羽調)’,‘계면조(界面調)’ 등 곡조 중심으로 분류 편집했으나 개인 시조집 『백팔번뇌』를 출간했던 1926년에 함께 편집 간행한 『시조유취』에 이르러서는 가사 내용의 중심으로 분류를 바꾸었다. 스스로 이에 대해 언급하되
재래의 시조서(時調書)는 대개 곡조(曲調)로서 류(類)를 나누고 그 중에 혹 작가로서 위(位)를 정함이 통례이었으니,낭자(曩者)의 『가곡선』도 또한 이 구례(舊例)를 따랐었습니다. 그러나 창(唱)을 위하던 전일(前日)에는 이것이 무론 편의한 방법이었겠지마는 감상과 고험(考驗)을 주로 하는 시방에는 도리에 신체예(新體例)를 베풂이 가할 듯하여 이제 차서는 내용에 의한 분류로서 전시조를 우선 시절(時節)·화목(花木) 이하 21부에 분배하기로 하고
운운하여 시조에 대한 비중이 음악성에서 문학적 내용으로 기울어짐을 나타낸다.9)
이같은 기류는 최초의 개인 시조집 『백팔번뇌』의 제어(題語) 항 아래 친구 홍명희의 발문(跋文)에서도 일인(一因)을 유추할 수 있다. 홍명희는 시조에 대해 평소 큰 관심이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면서
육당(六堂)은 근년에 드문 시조(時調) 작가(作家)이다. ‘개소리 쇠소리 하노매라’ 작가들과 동일(同日;同一의 誤인듯-필자주)하여 말하지 못할 작가이다. 시조라는 조선고유시형을 다시 살리다시피 한 것이 말하자면 육당의 노력이다. 육당은 시조를 우리의 것이라 하여 매우 숭상하나 시형(詩形)으로 보아서는 그다지 숭상할 가치가 있을 것이 아니다. (중략)시조 형식이 악착(齷齪)하든지 아니 하든지 악착함으로 흥미가 있든지 없든지 육당이 그의 님 ‘조선’에 대하여 사랑하는 정념(情念)을 표현함에는 다시 둘도 없는 좋은 형식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시조의 형식에 대해서 악착스럽다고 폄하하되 최남선이 그의 님이 되는 ‘조선’을 표현하는 서술 수단으로서는 좋은 형식이라 말한다. 결국 스스로 시조를 좋아할 수 없으나 최남선이 애국적 충정에서 전통적 시조문학에 집착하는 것 자체는 이해할만하다는 태도이다.
한편으로 그는 최남선을 ‘개소리 쇠소리하노매라’ 작가들과 동일시하기 어렵다고 하여 시조인 일반을 ‘개소리 쇠소리’ 부류로 표현하였다. 이 비유는 물론 홍명희가 창작했다기보다 당대 사회 일각에 동종(同種) 비아냥이 존재한데서 연유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구지배세력(舊支配勢力) 일반을 비판 조롱하던 범개혁세력들의 여론적 대세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소리 쇠소리란 다소 저열(低劣)한 표현은 기층 민중의 기존 지배층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직설적으로 담겼다고도 보여진다. 그리고 이때 독화살은 시조 중에서도 문학 쪽보다 ‘소리’, 곧 창(唱)에 주된 초점이 가 있는 듯하다.최남선 시조가 창에서 분리하는데 힘을 싣는 발언이 아닌가 한다.
시집 『백팔번뇌』는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등청나무 그늘)와 제2부(구름 지난 자리)는 조국에 대한 애끓는 사랑과 국토 순례 과정에 문화유산을 살핀 내용이다.
이에 비해 제3부의 시조는 일상에 대한 평범한 심회의 묘사가 주를 이룬다. 물론 그 속에도 전기한 사관(史觀)과의 일관성은 불가피하나 이것이 전면에 들어나지는 않는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관련 시조 일수(一首)를 예거하면
▲혼자 앉아서
가만히 오는 비가 락수저서 소리하니
오마지 안흔이가 일도업시 기다려저
열릴듯 다친문으로 눈이자조 가더라.10)
시조라는 자수율에 맞추었을 뿐 평범한 일상의 마음을 리얼하게 표현하였다. 현대시조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최남선이 주력한 1부와 2부 유형은 그의 독특한 단군사상과 조선심 관념이 후인들에게 희미해진 것처럼 시류에 따라 사그러진 감이 크다.오직 3부적 유형이 이병기계의 이른바 현대시조의 지반으로 이관되어 오늘까지 꾸준히 계승되는 듯하다.
4.
가람 이병기(1891-1968)는 시조를 혁신하자고 주장하면서 그 방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1. 실감실정(實感實情)을 표현하자
2. 취재(取材)의 범위를 확장하자
3. 용어의 수삼(數三 ; 선택)
4. 격조의 변화
5. 연작(連作)을 쓰자
6. 쓰는 법 읽는 법11)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실감실정을 표현하자는 것과 연작을 쓰자는 부분이다. 이는 이후 현대시조 주류파의 연시조 우선과 가창(歌唱) 배제의 이론 토대가 되었다.전통 시조창은 단시조(單時調) 중심이며 가창(歌唱)에 요구되는 사설(辭說)의 함축성이 요긴하지만 실감실정(實感實情)이란 이와 거리를 두는 성향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병기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수선화」를 보면 다음과 같이 쓰여졌다.
풍지(風紙)에 바람 일고 구들은 얼음이다.
조고만 책상(冊床) 하나 무릎 앞에 놓아두고
그 우엔 한두 숭어리 피어나는 수선화(水仙花)
투술한 전북 껍질 발 달아 등에 대고
따듯한 볕을 지고 누워 있는 해형수선(蟹形水仙)
서리고 잠드던 닢도 굽이굽이 펴이네
등(燈)에 비친 모양 더욱이 연연하다.
웃으며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숭이 숭이
하얀한 장지문 우에 그리나니 수묵화(水墨畵)를12)
문풍지에 찬바람이 이는 한겨울, 조그만 책상 위에 수선화 한두 송이가 피어나 있고 이것이 문풍지에 수묵화를 그리듯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다. 그러나 이미지 묘사에 치중되고 가창(歌唱) 영역은 도외시되었음도 두루 확인된다.내용상으로도 각 싯귀에 함축된 은유성은 허약한 편이니 ‘투술한 전북 껍질’,‘따뜻한 볕을 지고’,‘더욱이 연연하다’ 등 단순 직설적 비유가 많다.이점 산문적 기류를 떠올리게도 하는데,수필가 운오영이 ‘문장의 품격은 가람 이병기를 첫째로 꼽을 것’이라 극찬하며 「가람문선 서」를 그 대표적 사례로 든 점13)도 재음미하게 된다.‘조촐한 선비의 고담한 풍격’이라는 산문(散文) 평은14)은 그대로 이해되나 ‘시조’라는 특수 영역에서는 가람 특유의 문풍(文風)이 오히려 시조의 본성(本性)을 크게 굴절시킨 점을 간과할 수 없다.
5.
이병기 이후 현대 시조계를 일별(一瞥)하면 이병기가 주장한 연시조와 실감실정 묘사라는 양대 기조가 대세를 이룬다.
예컨데 조운(1900-?), 이호우(1912-1970), 이태극(1913-2003), 김상옥(1920-2004), 정완영(1919-) 등은 이병기 이후의 주요 시조작가로 공지되며 나름의 개성으로 현대시조의 영역을 확장한 거장들이다. 이들을 살피면 우선 조운의 경우, 기층민적 경력과 월북한 환경 등 전통 문인들의 사류(士類)적 성향과는 거리가 있었고 시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호우와 김상옥은 한국 전통정서를 현대시조 형식에 아름답게 직조(織造)해 넣어 성공한 케이스다. 양인의 출세작으로 널리 애송되는 「달밤」15)과 「봉선화」16)는 유년기 조부모와의 생활, 누님이 손톱에 물들여주던 추억을 동양화나 민화(民畵)처럼 정감있게 그려냈다. 시조시인이자 시조지 발행인, 시조학자 등 다방면에 활동한 이태극은 전통 정서에 서구적인 색감을 대담히 추가하기도 하였다.「서해상의 낙조」17)같은 작품에서는 “어허”, “아차차” 등 일상 구어체 감탄사를 덧칠하며 일몰(日沒)의 해경(海景))을 역동적으로 묘사한다.정완영은 「조국」18)등에서 볼 수 있는 우국(憂國) 정서, 「부자상」19) 등에서 엿보이는 가문(家門) 의식, 「을숙도」20) 등에서의 자연관조 같은 전통 사류적(士類的) 정서를 현대어로 절묘히 버무려 표현했다.
그러나 이들의 시조가 큰 틀에서 이병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음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공사(公私) 간 이병기와 지근 거리에 있었음도 한 요인이 될 듯하다. 조운은 친교가 깊었고21) 김상옥과 이호우는 애초 이병기에 의해 『문장』지의 추천으로 시단에 등단했으며 이태극은 사제(師弟) 관계였다. 정완영은 이들과 일정 거리를 가진다해도 스스로 조운과 이호우 및 김상옥의 종합적 성과를 기약22)할 만큼 시조 창작의 방향만은 동계(同系) 흐름 위에 서 있었던 터이다.
6.
현대시조의 비주류계 원조로서 안확을 들 수 있다. 그는 최남선처럼 국학(國學) 전반에 광범히 천착(穿鑿)한 인물로 역사관에서도 최남선과 대척적인 점이 많았다.근래 전집이 간행되고23) 학문 전모에 조명을 더하면서 후학들에게 경이로움과 국학 인식 지평을 신선하게 확장시키고 있다.
그가 시조를 한국문학의 핵심부로 이해한 것은 최남선과 같았으나 내부에 결착된 음악성의 비중에 대해서는 문학과 대등한 무게로 놓고 “시조의 생명은 오직 문학적에 잇지 않고 음악에 율하여 존속하야온 것”24)이라 단언했다.이같은 안확에게서 유의할 점은 시조의 전통 처리에 있어 이병기와 같은 혁신,분리를 주장하지 않은 점이다.그는 오히려 “예술은 수우조(粹又調)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한갓 형식적 또 기교로 흐르면 망국적 물(物)이 되는 것이다. (중략) 시조시도 (중략) 근본 정신과 그의 운율(韻律)을 잃으면 아니되나니 문예가던지 미술가던지 모두 이것을 크게 주의할 것”25)이라고 하여 전통 기조의 계승 쪽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시조 창작의 전범(典範)으로 스스로 시조를 창작 발표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일부를 예거하면,
▲경주6곡 중 1-불국사
불국사 어듸메냐 석탑이 은근하다
법당의 목탁소래 신라성대 방불하다
상좌(上座)야 포석정 가기가 예서 몃리(里)?26)
여기서 전기 문단 주류계가 경원시한 고어체가 거침없이 사용된다. ‘어디메냐’가 그러하고 종장에서 ‘상좌야’ 부르며 시작하는 것도 고시조에서 ‘아이야’ 등의 돈호법(頓呼法)이다. 마지막을 ‘예서 몇리’로 끊은 것은 시조창에서 종장 끝 세마디는 생략함을 감안한 것이겠다.신라 성대(盛代)를 회상함은 식민지 시대 민족혼을 환기하는 저의도 잠재되며 시조 전체의 울림이 가창(歌唱)에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안확의 시조가 모두다 가창에 적합하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고, 또 그 적부를 자세히 논하기도 어렵지만 대체로 그런 성향이 강하다는 점은 직감할 수 있지 않나 한다.
7.
현대 시조계에 있어 이색적 인물 중 하나는 노산(蘆山) 이은상이다. 그는 애초 이광수·방인근이 주도한 『조선문단』에서 활동하여 당대 문인들과 교유하였으나 그의 시조 색체는 자못 고풍한 것으로 문단 주류와는 거리를 가지는 것이었다.일일이 예거하기도 번다하나 「금강에 살으리랏다」(『노산시조집』)일수(一首)만 보더라도
금강에 살으리랏다 금강에 살으리랏다
운무 더리고 금강에 살으리랏다
생전에 썩은 명리야 아는체나 하리오
여기서 ‘살으리랏다’는 여요(麗謠) 청산별곡과 같은 고풍한 표현법이요 종장의 ‘하리오’ 등도 이병기 계열에서는 기피되는 고어풍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시조창을 직접 듣고 자랐다고 하는데27) 이 경험은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던 것같다. 그의 첫 창작집 『노산시조집』 서문에서 “그 님이 가오신 지 어느덧 십년(十年). 그로 말미암아 내가 시조의 길로 들어간 것이 또한 십년”이라 술회하고 있으니 시조 창작의 주된 동력(動力)이 아버지와의 시조 경험임을 거듭 확인시킨다.
이렇게 보면 그의 시조는 애초부터 시조창과 불가분이었으며 학창시절 안확에게서 받은 가르침28)은 이러한 노산에게 좀더 이론적 무기를 보강시켜 주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8.
석암(石菴) 정경태(1916-2003)는 시조창 체계화의 거인(巨人)으로 스스로 시조보(時調譜)를 저작 출간했던 바, 이는 당시까지의 각 지방의 시조들을 종합하여 나름의 창법으로 기록 정리한 것이었다. 최종 결실인 『선율선시조보』(1970:신촌회관)에서 취급된 시조는 「평시조 26수, 사설시조 19수, 남창질음시조 9수, 여창질음시조 8수, 반질음시조 2수, 온질음시조 3수, 중허리시조 2수, 사설질음시조 2수, 우조질음시조 2수, 반각시조 5수, 각시조 2수, 우시조 3수, 역음질음시조 3수, 시창 1수, 편질음여창 1수, 편질음남창 1수, 편시조 1수, 편사설시조 1수, 굿거리시조 1수, 굿거리사설시조 1수」(총 93수)로 구성되었다. 그는 시조보 각면에 한글 시조의 한시(漢詩) 번역문도 부기하였는데 시문(詩文) 전반에 상당한 관심과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직접 창작한 시조로서 상기서(上記書) 내에는 다음 등이 전한다.
백초(百草)를 심은 뜰에 솔·대를 먼저 옮긴 뜻은
청송(靑松)은 군자절(君子節)이요 녹죽(綠竹)은 열사조(烈士操)ㅣ로다
아마도 세한불변용(歲寒不變容)은 너 뿐인가 하노라.29)
어휘와 내용이 고시조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다.군자와 열사(烈士)를 찬양하되 이를 특정 식물로 상징해서 표현하였는데 가창에 적합한 싯귀의 함축성은 수긍되나 현대문학적 관점에서 거리감은 어쩔 수 없다.
따로 편찬된 개인 시문집(詩文集)30)에서는 관광시조(觀光時調)란 묶음 하에 전국 명승지를 사설(辭說) 등 다양한 시조 형식으로 표현한 바 가창(歌唱)을 염두에 두고 전통 정서가 주조를 이룸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현대시조로서의 부적합성은 응당 지적할 수 있으나 한편 동양화의 고풍(古風) 묵수(墨守)의 작품들도 관청,회사,상가,음식점 등의 벽에 걸리며 애용됨을 간과할 수 없다.그 천편일률적인 것이 오히려 또 하나의 애호층을 형성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사랑함은 천편일률적인 관행이지만 수천년 불변하는 삶의 기저가 되는 것과 유사한 점이 있을지 모른다.
필자가 여기서 상기 정경태의 시조 양태(樣態)를 반드시 동조,고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유형의 시조도 한국 현대문화 일각에 존재 가능함을 지적해 두는 것이다. 정경태는 현대인이므로 그가 창작한 시조 또한 현대시조임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9.
근래 분리되었던 시조문학과 시조창이 결합되려는 조짐은 여러 곳에서 산견(散見)된다.시조시(時調詩) 작가와 시조창을 겸수(兼修)한 인물이 등장하고 양자 결합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주장도 이곳저곳 분출한다.31)
그러나 해당 방면 성과를 들어낸 작품은 쉬 발견하기 어려운데 기성 시조시단 내의 주류적 색조의 관성(慣性)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이런 단색적 환경 하에서는 안확이 환생(還生)해도 시조시인으로 진출하거나 자기 시풍(詩風) 고수조차 간단치 않을 듯하다. 하물며 고시조(古時調)라는 죄 아닌 죄로 고려장(高麗葬) 당한지 오래인 김수장이나 김천택은 말할 나위도 없다.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가람 이병기의 충정과 공로는 그 나름 존중하되 그같은 논지에만 일방 구애되지 않는 좀더 넓은 공간과 이질적 시풍(詩風) 공존 풍토가 절실하다고 판단된다.
음악계에서 시나 시조, 동시를 불문하고 노래 가사로 활용함에 제약은 없다. 작사자가 문단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름다운 노랫말 시어(詩語)를 창작한 이들도 많다. 가곡뿐 아니라 대중음악에 있어서도 그 사례는 허다하며 특히 7080시대의 이른바 통키타 가요는 가사전달력이 우수해32) 작곡 작사에다 노래까지 겸하는 경우가 많았음은 주지되는 바다.
이들의 노래 가사말이 모두 문학 범주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포함해도 무방할 문향(文香) 짙은 시어들도 허다하며 기존 시인의 저명 시를 차용한 가사 또한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많다.
이처럼 음악이 문학을 끌어안듯이 문학도 음악을 포옹할 필요가 있음은 당연하다.시 낭송은 양자 접목(接木)된 예술 장르거니와 이들의 암송 메뉴판에는 시조도 응당 포함된다.그러나 이같은 짝짓기 무대에서도 근본 뿌리되는 시조창만은 소외된다면 터무니없는 일이다. 모든 시조가 가창될 필요는 없지만 모든 현대시조가 가창을 외면만해서도 안된다는 뜻이다.33) 이런 점에서 시조문학계는 시조창으로 부를 수 있을만한 시조를 적정 수준 생산할 필요성도 절실하다.
물론 시조음악계도 시조창을 좀더 대중들이 즐겨 부를 수 있게 개량화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 가곡(歌曲)들은 만대엽(慢大葉)에서 중대엽(中大葉)을 거쳐 삭대엽(數大葉)으로 발전해 왔는바 이는 템포의 단축 추세와 궤를 같이한다.34) 시조창은 삭대엽이 더욱 빨라진 형태로서 영정조(英正祖) 이래 평민세력의 성장이나 실용주의 문풍(文風)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이같은 대중친화적 흐름은 역사의 진화와 더불어 계속되어 마땅하다.
10.
이상 시조문학의 흐름과 방향을 음악과의 연계성 하에 살폈다.그러나 기실 시조의 연계 대상은 음악에는 국한하지 않는다.미술로 보더라도 동양화는 애초 서화(書畵)라 하여 그림과 글씨를 함께 다루어왔고 일본의 하이쿠도 문인화와 접목되면서 활성도(活性度)을 높였다.35) 응당 시조의 회화(繪畵) 참여도 그림 내의 화제(畵題)로나 한글서예 자체로 문향(文香)을 풍길 공간은 광범하다.
예술 권역 밖에서도 참여 소지는 무궁무진하다.군왕이나 학자,장군,시인,기녀 등 다양한 계층의 시각과 견해를 담아왔던 전력(前歷)처럼,현대 각 방면 지도자들에게도 다용도로 활용된 바 있다.36) 여타 문학 장르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능이며 최남선이 주장했던 ‘국민문학’이라는 명칭도 결코 어색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북한의 경우에도 종래 시조를 봉건 통치세력들의 한가한 유희로 폄하했으나 90년대 이래 민족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제고(提高)하면서 위상을 대폭 끌어올리고 사회 다방면에 활용하는 듯하다.37)
한중일을 막론 서구화가 근현대화 개념과 등치(等値)되던 시대를 거쳐 점차 민족 고유 문화와 서구적 가치가 융화되어 제3의 문화로 항해(航海)하는 중이다.시조는 이땅의 대표적 민족 시가(詩歌)인 동시에 세계적인 문명자산의 하나이다. 시조음악의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등재는 그같은 위상의 편린(片鱗)을 재삼 확인시켜 주고 있다.38)
11.
근자 횡행하는 율격(律格)이 파괴된 변형시조도 구태어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들대로 발전되어야하며 그것이 예술의 다양성이다.그러나 같은 이유로 시조의 원본 형식을 ‘고(古)’라는 낙인(烙印) 하에 간단히 고려장(高麗葬) 시키고 동시대 예술 무대에 오를 수 없게하는 편파성 또한 해금(解禁)되어야 한다.
이점 고(古)·현(現)의 구분법은 그것대로 사용하되,‘전통시조(傳統(時調)’ 등 여타 분류 기준도 적절히 병용될 필요가 있다.‘고’란 말은 은연중 현재의 나와 분리를 교사(敎唆)하나 ‘전통’은 계승 발전에 긍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가급적 이런 탄력적 분위기 하에 상기(上記)한 개념도 나름의 창작 유형으로 입지(立地)를 존중받고,여기에 고시조 뿐 아니라 동시대 고시조풍 작품들도 포괄함이 마땅하다.그리하여 현대문학 내의 한 유파로 생존 공간을 확보함이 응당한 권리요,민족문화사상(民族文化史上) 일종(一種) 의무일 수도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푸른문학』,2017,봄호)
*일부 자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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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한국정신문화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서전』13,「시조」항 등 여러 글에서 엿볼 수 있다.
2) 『문장』(1940.10)
3) 『가람시조집』(1929),발문.
4) 조윤제,『한국문학사』,탐구당,1974,95-96쪽 ; 이병기·백철,『국문학전사』,신구문화사, 1991, 97쪽,등.
5) 농암선생문집4.
6) 조동일,『한국문학통사』3,지식산업사,317쪽 ; 송방송,『한국음악통사』,일조각,427쪽, 등.
7) 각기 1913년과 1928년 출간 ; 『육당최남선전집』13(동방문화사,2008)
8) 『조선문단』,1926;위 전집9.
9) 통상 최남선의 시조인식은 문학성과 음악성을 함께 중시하던 데서 점차 문학성 쪽으로 경사되었다고 공인된다.(서철원,「시조사의 편성 과정과 최남선의 시가 인식」,민족문학사연구49,민족문학사연구소,2012,등 참조)
10) 앞 전집5,463쪽.
11) 동아일보 1932 ; 『가람문선』,신구문화사,1971.316쪽.
12) 『가람시조집』,24쪽.
13) 윤오영,『수필문학입문』(태학사,2001),139쪽.
14) 같은 글.
15) 『문장』지 추천작(1940,6-7월 합호).
16) 『문장』지 추천작(1939,10월호).
17) 시집 『꽃과 여인』,1957.
18) 조선일보 신춘문예 1962 ; 『채춘보』,1969.
19) 『채춘보』.
20) 『연과 바람』.1984.
21) 「일기초」(『가람문선』,1947년 3월 26일,12월 28일 등 참조).
22) 『유심』,2006,겨울호, 인터뷰.
23) 『자산안확국학논저집』1-6(여강출판사,1994).
24) 「시조의 연구」上,『자산안확국학논저집』4,430쪽.
25) 「시조시학」,위 전집3,85쪽.
26) 위 전집5,415쪽.
27) “내가 소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아버지께서는 흖이 나를 업으시고 황혼이면 뜰앞 나무 밑을 거니시엇습니다.그리고는 늘 고인의 시조를 읊으시엇습니다.”(『노산시조집』서문,한성도서주식회사,1932).
28) 이은상은 일찌기 안확으로부터 고향 마산의 기독교계 창신학교(昌神學校)에서 배우기도 하였다.(「잊을 수 없는 스승」『자산안확국학논저집』6,18쪽 주).
29) 본문의 『선율선시조보』,16쪽
30) 『석암시문집(石菴詩文集)』(한국고전음악출판사,1975)
31) 예컨대 신웅순은 전부터 시조학과 문학 및 가창을 겸수하며 논문,단행본(『문학 음악상에 있어서의 시조연구』,푸른사상,2006)에다 학술지까지 발간(『시조예술』,2006.7.창간)하였고,시조창 사범 신분이던 이미숙은 최근 『시조문학』지에 등단(2015.봄호),시작활동 개시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김인숙은 시조창의 문학치료학적 효용성을 논증하고(「시조창의 문학치료학적 연구」『시조학논총』34,2011) 정형기는 자신의 학위논문 결론에서 (기존)시조 해명에 가적(歌的) 요소 분석이 절대적임을 주장하며(『시조시가론연구』,전북대박사학위논문,1995) 신경숙은 시조의 가곡창적 측면에서의 연계성을 강조한다.(「시와 예술의 만남-시조창」『유심』63호,2013.7)이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많은 관련글을 산견할 수 있다.
32) 김지평,『한국가요정신사』,아름출판사,2000,185쪽.
33) 최근 시조계의 지도적 인사들이 서구적 가곡 외 전통 시조창에도 자신의 창작 시조를 얹으려 노력함은 유의미한 일이다.그러나 그 시조들이 창에 적합하지 않은 내용들인 점에서 고시조를 중심으로 나름 활성화된 현 시조창계와는 적이 융화되지는 못하고 있다.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싶으며 본고도 그 과정상의 일조가 되기를 기대한다.
34) 장사훈,『시조음악론』(서울대학교 출판부,1986),149쪽 등,
35) 김향 편저,『하이쿠와 우끼요에,그리고 에도시절』,다빈치,2006,31쪽 등.
36) 예컨데 70년대 초 시조협회 주관으로 박정희 전대통령의 후원 속에 시조집이 편찬되어 대통령 외 많은 정계 요인들과 시조시인들의 작품이 실렸다.『거북선』(한국시조작가협회<이은상>,1971)에 박정희의 이순신을 주제로 한 시조 「거북선」 외 많은 정치인과 문인들의 작품이 상재(上梓)되었다.그런가하면 김대중 전대통령은 80년대 그의 저서 『옥중서신』 앞부분에서 자신의 심회를 역시 시조 형식으로 간절히 표현하였는 바(『김대중 옥중서신』(청사,1984) 권두의 연시조 「옥중단시」와 「인제가면」) 그중 일부는 후일 이상술(완제시조창 광주시 무형문화재 제10호)에 의해 가창(歌唱) 전파되기도 했다.
37) 박미영,『북한에서의 창작 시조 전개와 의의』(『한국시가연구』33 , 2012)
38) 시조의 가창(歌唱) 영역 일부는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가곡(歌曲)의 형식으로 수년전(2010)등재되었다.
첫댓글 다시 한번 탐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