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과 동행한 절망의 현장
절망의 인생을 극복한 존재의 탐구
1. 왜 시인의 길로 들어섰나
나는 태어나서 2년 뒤(1945년)에 해방을 맞았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 어느 부두에서 강제노역을 하다가 현해탄을 건너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정착했다. 해방을 맞이하고 얼마후 초등학교 1학년 때 6. 25가 발발했으나 전쟁 피해는 없었고 친척들이 우리 집으로 피난을 왔다. 그러나 날마다 붉은 완장을 두른 청년들이 죽창(竹槍)을 들고 온 동내를 휘젔고 다니면서 위험의 천지로 만들었다.
이렇게 나는 사회적 격변기를 살아왔다. 동내 아저씨들이 전장에 나아가 잿봉지로 돌아오는 괴뢰군들의 만행(蠻行)이 동심에서 너무나도 혼란스럽게 진행되는 세상을 보면서 낮에는 폭격기가 요란하게 지나가고 밤이면 빨찌산이 소를 잡아가는 행패에 벌벌 떨면서 자랐다.
이제는 휴전이 되고 세상이 조금 안정되자 보리고개가 찾아왔다. 아직 국가근간이 완벽하지 못해 치수(治水) 등 농경(農耕)에 필요한 부분들이 미진해서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식생활이 해결되지 않았다.
나의 유년은 그렇게 비참했다. 당시 지주였던 할아버지는 토지개혁으로 농지를 분배당한 그 분노를 안으로 삭이면서도 손자들에게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가르쳤다. 아침마다 형들의 어깨너머로 나도 따라 읽었다. 글자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포함된 유교적 의미를 이해시키고 있었다.
한편 일본 부두에서 한 쪽 팔을 부상당하는 절망에서도 고향에서 수해로 농토가 사라진 벌판을 다시 일구어 호구(糊口)를 지탱하려던 아버지가 갑자기 신경성 급성 위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집안은 풍지박산의 지경에 이르렀고 나는 정상적인 학교 교육이 불가능해 졌다.
그레도 실망하지 않고 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익혔고 당시(唐詩)를 배웠다. 아마도 그때 시의 절묘한 함축성과 언어(당시는 한자였지만)의 의미를 간직하게 되어 지금까지 시업(詩業)의 길에서 이탈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참된 시와 시정신은 무엇인가
그후 육군을 제대하고 복학은 엄두도 못내어 내 인생에서의 새로운 개척(?)을 위해서 고향을 떠났다. 부산이나 서울에서도 방황은 시작되었지만, 내 손에는 『현대문학』이 항상 쥐어져 있었다. 그때 어문각에서 발행(1963년)한 『세계문예강좌』 5권을 대하면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독학으로 시작했으나 우선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해서 손을 놓고 검인정교과서회사 교정사원을 비롯해서 과외 선생, 시험문제 출제원, 개인 출판사 편집원 등 다양한 직장에서 일했지만, 어쩐 일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시에 대한 희망을 접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골수(骨髓)에 박혀있던 시에의 꿈은 삼수(三修) 끝에 겨우 박목월 선생이 주재하던 『심상』지에 어렵게 당선하는 영광(황금찬, 김광림 심사)을 안았다. 내 나이 불혹(不惑)이었다. 당시에는 늦깎이였다. 문단 말석에서 선배들의 문학정담을 경청하면서 열성으로 시작(詩作)과 시학(詩學)에 골똘히 매진했다.
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나에게는 종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허탈과 굴욕에서 황사바람이는 현상의 어느 벌판, 이런 곳에 한 줄기 훈풍으로 영원히 남아 있었다. 가시거리를 순간에 잊어버렸어도 꿈으로만 엮어진 가난한 마음이 있었고 그 내부 깊숙이 언제나 섬광처럼 번뜩이는 커다란 사상이 깔려 있음은 오늘의 황사현상을 용케도 헤쳐 나온 원동력이었으리라.
이와 같이 신인상 당선소감(‘불혹의 언어’의 일부)을 썼다. 이처럼 나는 이 현실적 갈등과 고뇌를 오로지 문학(시)을 통해서 정화하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저항감이나 특정의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당시 농촌의 보릿고개 시절, 지속하지 못한 학업으로 인한 지적 자양의 충전이 불가능했던 정서는 언제나 우울한 그림자로 나를 고통스럽게 이끌고 있었기에 친자연적, 향토의 토속적인 소재에서 인생의 의미 찾기와 존재를 성찰하는 시 세계로 몰입하게 된 것이다.
나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지만, 철저한 유교정신의 근본으로 성장했기에 인본주의(휴머니즘)를 신봉했다. 공맹(孔孟)의 교리도 좋으나 장자의 물을 심취하는 연유도 그렇다. 시를 통해서 자아를 인식하고 가치관을 다시 정립하는 일은 문학에서 중요하다. 여기에는 성찰과 화해라는 상보성이 전제하지만, 여전히 상존하는 현실적인 갈등과 번민을 해소하는 지적 혜안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성취해야 할 문학적 과제이며 숙명이었다. 인간의 고통과 자연의 파괴 등은 위정자나 특수 관계인들만의 정책으로는 해소하기 힘들다. 우리 문학이 참여해서 인간의 정신 승화와 자연 친화에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삶의 궤적을 회상하는 독백이나 사물을 스케치하는 문학 시대는 이미 낡았다는 어눌한 사유(思惟)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3. 시적 지향과 인생의 행로
어찌보면 나의 삶은 시와 더불어 행장기(行狀記)가 성립한다. 이후에 운 좋게도 성춘복 선생을 해변시인학교에서 만난 인연으로 한국예총에 몸을 담게 되고 많은 문화예술인들과 교감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문인협회와도 인연이 닿아서 사무처장과 시분과회장 그리고 부이사장까지 몇 수년의 시간을 동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선후배문인들을 만나 문학적 의견을 교환할 수 있어서 나의 문학 인생은 더욱 정진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시인은 명백한 현실에 비해서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꿈같은 느낌을 일으킨다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나도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허상이든 이상이든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이 비록 나의 삶과 나의 시를 연약하게 할지라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쓴 시 한 편이 아무리 시시하다고 해도 나의 지적혜안으로 추출한 모든 사물들의 의미가 거기에 있다면 그것을 나는 내 시의 진실이라고 신뢰하고 있으며 이러한 신봉(信奉)의 정점이 나의 진정한 삶을 인식하고 성찰하는 원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우리 인간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혹은 문학은 왜 하는 것일까 하는 참으로 우둔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서 쓴 웃음을 짓는다. 요즘처럼 물질의 풍요를 위해서 또는 권리와 지위, 명예 등을 위해서 살아가는 21세기 현대인들의 가치관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과연 문학은 필요한 것일까. 오늘도 불행한 여건에서 신음하는 가난한 이웃 하나 구제하지 못하는 문학(옛날에는 쌀 한 됫박, 연탄 한 장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의 기능이 현실적인 미망(迷妄)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문제들이 우리 문학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오늘도 순박한 서정을 바탕으로 우리의 아름다운 마음을 열 수 있는 작품 한 편을 창작하기 위해서 골몰하는 문인들을. 그들은 문학을 통해 인생과 삶의 가치를 궁구(窮究)하고 있는 것이다. 곧 문학이 ‘나’의 존재와 공존하는 그 가치성을 절대시하면서 원고지(요즘은 컴퓨터로 하지만)와 함께 살아왔다.
그리하여 나는 첫 시집 『서울허수아비의 수화』를 비롯해서 『시인의 사랑법』 『물의 언어학』 그리고 최근에 발간한 『지워진 흔적, 남겨진 여백』 등 12권의 시집과 시집 해설, 월평, 시론집 등 많은 책을 상재하여 독자들과 교감하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그동안 교감했던 문우들의 부탁으로 시집 해설을 쓰면서 주변에서 시를 공부하겠다는 후학들의 요청에 따라 옛날 KBS시창작반에서의 경험을 되살려서 강의도 계속하면서 그들의 시세계와 나의 시정신이 어떻게 변모되었는가를 깊이 절감하고 다시 신작 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인생과 문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문인협회 [2021. 2. 문단실록]
나의 창작 산실
1.사유(思惟)의 확대와 언어 조탁의 공간
나는 달동네 가까운 산중턱 연립주택에서 살다가 조그마한 단독으로 옮겨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어린 애들과 올망졸망 살다보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공간이 따로 없어서 가족들이 잠든 후에 날밤을 새면서 대학노트에 끌적여 습작을 하던 시절을 벗어나 이제 좀 넓은 주택에서 독서와 집필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우선 ‘청송시원(聽松詩苑)’이라는 당호를 붙여놓고 만년필이나 볼펜으로 원고지를 메꾸는데 손목과 팔에 통증을 느낄 정도로 힘들었으나 얼마후 아들이 물려주고 가르쳐 준 컴퓨터로 독수리 타법으로 겨우 글을 완성하는 쾌거가 있었다. 아들은 대학에서 컴퓨터가 전공이어서 기능을 높일 때마다 나에게 물려주었다. 사실 나는 워드기능과 이메일 송수신, 까페 댓글 다는 정도 외에는 별로 다른 용도가 필요치 않았다.
나는 그 당시 문학지에 시를 청탁 받는 일도 있었지만 고향 선배가 어떤 협회에 중견 임원으로 있으면서 사보발행에 관여하는 책임자로서 딱딱한 통계숫자로 꾸며지는 업무용 내용에다가 교양과 지혜가 가미된 글을 연재하여 사원들의 업무 능률제고와 일반 상식의 향상을 통한 인성회복에 기여하겠다는 그의 방침에 따라서 무려 5년간이나 월간지에 잡문을 연재를 했는데 그 선배는 쏠쏠한 원고료와 함께 글 내용이 알차다는 전언이었다.
나는 이를 계기로 다채로운 교양서적의 탐독을 위해서 서가에는 문학서적 말고도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책들로 채웠다. 사서삼경을 비롯해서 삼국유사, 고대 신화, 구약성경, 부처님 생애, 이야기한국사 그리고 민속사전, 속담사전, 고사성어, 유머사전 등등에서 인용, 연재의 관심을 더욱 이끌어 현실과 적절하게 접맥하는 작법을 활용하였지만 시 창작에도 다양한 사유의 범주를 확대하는 효과도 있었다.
나는 주로 새벽에 글을 썼다. 조용하고 맑은 아침공기를 음미하면서도 담배를 피워 물어야먄 글이 씌어지던 내 집필실의 모습이었다. 일찍 잠을 깬 아내가 쥬스 한 잔을 들고 방문을 밀었을 때 자욱한 담배연기로 구박받던 나의 서재, 지금은 시를 통한 나를 탐색하기 위한 나만의 아늑한 별천지로 다시 바뀌었다.
나의 창작 공간에서는 다양한 문학 서적이 서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간직한 문학의 지향점이나 정신(특히 시정신)을 수시로 깨우치기 위해서이다. 시론집, 시창작법, 시해설집, 시문학사, 시학사전, 시전집, 시전문 잡지 그리고 많은 시집들이 저마다의 표정으로 나를 손짓하고 있다. 옛 성현들의 말씀처럼 남아수독 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나 위편삼절(韋編三絶)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나는 이들을 골고루 만나서 즐겁게 대화로 교감하는 일이 요즘의 일과가 되었다.
2.나의 작품 어디까지 왔나
--착목(着目)한 사물에 투영된 의미 탐색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다’라는 등단 초기, 어느 노시인이 들려준 말을 잊지 못한다. 첫 시집 『서울 허수아비의 手話』를 펴내고 난 뒤, 시 쓰기에 부닥친 문제가 바로 언어의 고갈이었다. 먼저 사용했던 단어가 다시 이 작품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는 사어(死語)이거나 새로운 생동감이 없는 언어의 나열이라는 자괴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노시인이 ‘국어사전을 몇 번 읽었느냐’는 물음에 의아했던 내가 비로소 작품에 사용할 언어의 부족으로 새롭고 참신한 표현력을 갖추지 못한다는 반성에서 서점에서 국어사전 몇 권을 사서 안방에, 거실에, 심지어 화장실에 까지 던져두고 수시로 무작위로 펼쳐서 그 속에 잠자는 낱말들을 깨우는 일을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옆에서 주어들은 천자문을 비롯한 한자공부가 지금의 언어숙련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깊게 묻혀있던 사전 속에서 어렵게 발굴해 낸 생기 넘치는 낱말 하나하나가 작품의 의미와 품위를 상승시키는 묘미에 심취하는 언어의 마력을 지금도 굳게 신임하고 있다.
나는 시전문지 『심상』에 당선소감으로 ‘시는 종교와 같다’라고 표현한 일이 있다. 이 종교와 같은 믿음의 원천이 바로 언어구사 능력의 연금술적인 기능이 작품의 전개와 의미의 충족을 제시한다는 문학적인 신뢰를 명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언어의 조탁을 위한 훈련을 지속하면서 창작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현장에서 활용하기 위해서 시창작 이론 학습에 몰두하다가 운좋게 KBS방송문화센터 시창작반에서 강의를 진행하면서 『김송배 시창작교실』을 집필, 발행하게 되어 나처럼 시공부에 열중하던 사람들과 많은 시인 지망생들의 공감을 받기도 했었다.
지금까지 내 작품의 지향적인 주제의 투영은 대체로 살아온 체험을 근간으로 해서 이미지를 재생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소재의 선택이나 상황의 설정과 전개 그리고 명민(明敏)한 주제의 정립을 위한 관념적인 시법을 상용하다 싶이 즐겼는데 그 체험은 바로 착목하는 사물들이 유소년, 청년기를 체험한 고향산천이나 전원 그리고 순박한 농촌 이웃들의 생활 속 풍속 등 그 정감 넘치는 순정미에서 탐색하는 인간애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정서나 사유의 방식은 자연스럽게 서정성을 배제하지 못하고 소박한 정념들이 작품의 주안점으로 정착하고 전원적, 토속적인 친자연, 친인간애 등 시적 아름다움 투영에 골몰하게 되어 최근의 『지워진 흔적, 남겨진 여백』까지 13권의 시집을 상재하게 되었다.
첫 시집 이후에는 약간의 사회적인 삶에도 시선을 집중하여 파괴되는 자연과 무너지는 인성에 대한 안타까움들이 작품으로 형상화하여 『안개여, 안개꽃이여』 『백지였으면 좋겠다』 『혼자 춤추는 이방인』 등의 시집을 펴내고 문명 비판이나 내면의식의 탐구로 존재의 문제, 생명의 문제 등 우리 인간들이 당면한 가치관의 인식에 의식의 중심적 흐름으로 사유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지우지 못하는 불망(不忘)의 한(恨)이 작품 속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가난이며 눈물이며 절망의 연속적인 내 삶의 단면이 가감 없이 상상으로 재생하는 형상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하는 인간의 연약한 심리가 작품에 항상 동행하고 있어서 때로는 어눌한 면모를 떨치지 못함도 있었다.
다시 시집 『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 『꿈, 그 행간에서』에서는 무상(無常)의 세월에 대한 회의감으로 바뀌는 것을 내 자신이 스스로 감지하게 되면서 불경(佛經) 등 종교서적에 몰입하기도 했었다. 이 시간은 말없이 흘러가면서도 삼라만상의 생멸(生滅)을 주관하는 무형의 위력에 경악하면서 그의 신비함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에는 인간의 위기의식과 함께 시사적(時事的)인 현실적 고뇌가 동시에 침잠하고 있어서 내가 창작하고자 하는 시적 진실이나 시정신은 약간 치졸한 표현으로 발현되는 경향도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러하듯이 등단 40여년에서 되돌아보는 나의 시 쓰기의 주안점은 삶을 통한 생생한 체험(七情-喜怒哀樂愛惡慾)에서 창출한 다양한 이미지가 슬픔에서 분노로 다시 사랑으로 새롭게 정련된 형태의 시법을 실험하면서 진정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심경의 변화를 자각하게 되었는데 이는 고희를 넘긴 삶의 연륜에서 지각하게 되는 자성의 가치관 확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유를 바탕으로 한 시집 『나와 너의 章法』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나’를 추적하면서 과거, 현재의 시간과 더불어 지탱해온 나, 나에 대한 진솔한 가치관은 무엇이며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남아 있는 미래의 시간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삶을 유지하면서 작품을 창조할 것인가를 스토리 텔링의 형식으로 써보기도 했었다.
최근에 발상하게 된 지워져버린 흔적이나 아련하게 남겨진 흔적의 여백에서는 두 갈래의 형태의 전개를 볼 수가 있는데 여과되지 않은 생생한 삶의 궤적을 실재의 현장에서 회고하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만유(萬有)의 사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친근하게 교감하면서 의미를 긍정하는 ‘사물의 의인화’ 작업에 몰두한 바도 있었다.
이제 박목월 선생님의 순수서정에 함몰했던 초기의 정서는 현대사회의 변혁과 인성의 변화에 따라서 나의 시법도 많은 변동을 실감하게 된다. 가끔 이러한 발상은 시의 위의(威儀)나 본령을 이탈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느끼지만 M. 아놀드의 ‘시는 본질적인 면에서 인생의 비평이다’라는 말을 신뢰하면서 지금까지 써온 작품들을 집대성하고 정리하는 일과 여생(餘生)에서 유종의 미를 향한 자적(自適)의 향기를 만끽(滿喫)하는 일만 남아 있는 것 같다.(2022.11. 월간문학)
방황과 절망의 시간들
--그때 그 시절
나의 20대는 한 마디로 절망의 시간들이었다. 보릿고개 시절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안간 노력을 기울이던 아버지가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장을 잃은 한 가정은 엉망이 되었고 가족들은 모두 절망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학업도 인생도 아무 위안이 되지 못한다는 위압감에 하릴 없이 뒷산에 올라 저기 둥둥 떠가는 흰구름만 응시하다가 실성한 사람같이 휘적휘적 돌아오고 했다.
또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사랑방에 쳐박혀 미동(微動)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형이 군에 입대하고 나는 아버지가 그토록 아끼시던 논밭으로 나가서 농부가 되기로 결심한다. 낮에는 형이 제대해서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할 때까지 열심히 일했다. 밤에는 평소에 가까이 했던 명심보감(明心寶鑑)과 소학(小學), 대학(大學) 등 책에서 풍기는 먹냄새를 물리치지 못하고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방황과 절망의 시간을 잊어려고 노력했다.
무더운 밤이 파리한 눈으로 들여다보고, / 숲속의 달을 저어 가려 했다. / 무엇이 나로 하여 이처럼 불안하게 잠 못 이루고 밖을 내다보게 하는가? / 잠들어 꿈에 잠겨 있던 나를 / 무엇이 한밤중에 불러 깨서는 / 그토록 불안하게 만들었는가? / 귀중한 그 무엇을 잃어버린 듯-- // 차라리 집에서, 정원에서 뛰어나와 / 마을에서 이 땅에서 벗어나 / 헤아릴 수 없는 그 신비의 부름을 따라 멀리 넓은 세상으로 떠나고 싶다.--헤르만 헤세의 「잠 못 이루는 밤」전문--
그러던 중 학업을 계속하고 있는 큰집 장조카가 보내준 헤르만 헤세의 시집을 읽고 또 언젠가 형이 사다준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책을 읽었다. 물론 학원 잡지를 통해서 읽었던 시, 소설 등 문학에서의 감명은 이미 깊게 각인(刻印)되어 있었지만, 헤세의 시는 더욱 불면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었다.
이것이 아니다. 이건 사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꿈을 실현해야 한다. 헤세의 시처럼 ‘멀리 넓은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다. 한 방편으로 나도 육군에 지원 입대하게 된다. 새로운 세상을 접하면서 우선 육신을 단련하고 틈나는 대로 영혼과의 접맥을 위해서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때 외출 나가서 시내 서점에서 대하게 된 『현대문학』과 『시문학』 등 문학잡지에서 만나는 시편들은 나의 가슴을 또 두근거리게 해서 잠 못들고 있었다.
이제부터 깊은 사유(思惟)가 시작된다. 제대를 하고 무작정 가출해서 해인사 한 암자에서 지낸다.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하늘만 쳐다보다가 하루해가 저문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이렇게 고뇌에 차 있을까. 이러한 의미심장한 의문을 한꺼번에 풀어낼 해법을 찾지 못했다.
다시 하산해서 ‘멀리 넓은 세상’을 찾아서 서울로 튀었다. 서울은 생존경쟁의 표본이었다.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길이 없었다. 열심히 일했다. ‘낮선 꿈, 지고한 열망, 위대한 희망, 좌절되고 고쳐지는 생각들, 이 모든 것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절망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지. 나는 그것을 연옥(煉獄)이라 부른다’는 염세철학자 칼 지브란의 말을 긍정하기로 했다.
그때도 이러한 방황과 절망은 문학이나 철학이 그 해법을 명쾌하게 제시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문학의 굴레를 집어던지지 못하고 밥을 못 먹더라도 지금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 비애(悲哀)는 나의 작품에서 중요한 체험으로 승화(昇華)하여 시의 위의(威儀)나 기능을 보다 차원 높게 형상화해 주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그 당시 어떤 애들은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서 학창(學窓)의 낭만을 즐기고 있었으나 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러니 하면서 체념하고 인내로 살아가기로 했던 문학청년의 집념은 아직도 좋은 작품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시간으로 대체되고 있다.
나의 20대는 한 마디로 절망과 방황이 전신을 휘감은 불행이 항상 엄습(掩襲)하고 있었다. ‘젊음은 자라나는 것의 싱싱한 아름다움이요, 뻗어가는 것의 단순하면서 강인한 아름다움이며, 잡것이 곁들이지 않는 정결하고 신선한 아름다움이다. 젊음이 뿜어올리는 그 순수하고 순결하고 싱싱한 아름다움으로 젊음은 스스로를 신록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라는 박목월 시인의 「신록송」과 같이 나의 젊음은 아름다움이나 그것들의 설계를 위한 준비가 송두리째 좌절되는 고초(苦楚)뿐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 멀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나는 당시 그 유명한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의 시를 애송하면서 스스로 위안으로 삼았다.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지만 이를 ‘참고 견디면’ 다른 인생의 장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하면서 살아갔다.
어떻게 보면 시대적 여건이나 사회적 상황들이 그렇게 모두가 행복하고 낭만적인 젊음을 누리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세상을 구현하려는 시기에 다시 6.25라는 민족생생이 발발해서 더욱 혼란해지고 보릿고개의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서 나는 가정의 불행과 함께 20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들이 나의 작품 속에서 휴머니즘적인 이미지나 주제로 형상화는 문학적인 호재로 재생되면서 그 시대의 아픔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자위(自慰)로 살면서 지금도 문학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1912. 지구문학)
시의 사회성에 대한 서글픈 편견
영국의 시인 매슈 아널드가 ‘시란 본질적인 면에서 인생의 비평이다’라고 했다. 인생의 비평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모든 생활 저변에서 발생하는 일들에서 비인간적이며 반사회적인, 그리고 불합리적인 현실들을 시로 비평할 필요가 발생한다.
세상이 시끄럽던 시절, 8,15. 6,25. 4,19. 5,16. 등 사회적 변혁에 따른 인간들의 사유는 더욱 폭넓게 진취적으로 향상하면서 또 다른 방안으로 삶의 방식도 전환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국가적으로는 하나의 역사적인 흐름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거기에서 생성하는 갈등은 너무나 많은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인 개혁이나 변동은 우리 문학에서도 저항적이거나 타도의 대상으로써 소재나 주제로 형상화하는 경우를 많이 읽을 수 있게 된다. 가령 일본 압제시대에서는 애국적인 소망이 넘치는 작품을, 동족상잔의 비극에서는 생명의 존엄과 동포애를, 그 후에 독재나 부정선거 등에 대한 민주주의 완성을 그리고 유신이나 도 다른 상황에서는 좌우간의 민족적인 분열과 적대시 등의 이데올로기적인 대결 등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구조로 변경시키는 국가의 비운도 있었다.
그러나 차츰 국가적으로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할수록 인성(人性)은 황폐화를 가속화하고 있어서 우리 시인들은 정서는 화해의 해법을 탐색하는 주제를 취택하는 경향의 작품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문학적인 진실을 탐구하려는 지적인 노력이 발현되고 있었다.
이제 완성한 시집 『나와 너의 장법』에서는 불감증시대에서 북쪽에서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탄도미시일을 쏘아올리는 등의 불안을 조성해도 그런가보다 하고 안이한 습성에 젖어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는 화산이 폭발해서 마을을 용암으로 쓸어버려 폐허가 되어 회생자가 얼마이고 이재민이 얼마라는 위기의 소식이’ 뉴스로 나오지만 남의 일이니까 나는 모른다는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나라 안이 시끌시끌 위기상황인데 AI(조류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까지 창궐(猖獗)해서 양계농가의 닭과 오리를 생매장(살처분)하는 울분까지 겹쳐지고 있다. 이 고병원성 조류독감은 냇가 갈대밭에서 숨져 있는 야생조류의 시체를 해부해서 검사해보면 이 병에 감염되어 죽었음을 밝혀내는 것. 인체에도 감염될 수 있다니 각별히 조심해야겠다. 이번엔 또 구제역(口蹄疫)대란까지 겹쳐져서 소나 돼지 수십만 마리를 살처분하는 비극이 또 발생했다.(「나와 너의 장법 . 57」 중에서)’라거나 ‘황사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출근하거나 외출하라는 기상캐스트의 쩌렁쩌렁한 울림이다. 창문을 열지 말고 노약자는 되도록이면 집 밖 출입을 자제하라는 당부이다. 이제 우리 지구에도 환란(患亂)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가.(「나와 너의 장법 . 58」 중에서)’라는 위기의식이 시의 사회성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시사성 어찌보면 사회를 살고 있는 시인들의 진실 탐구에서 일종의 고뇌와 갈등이 교차하는 의식의 흐름인지도 모른다. 시읜 사회성은 우리 인간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 교류하고 집단을 이루면서 사회를 형성하게 되는데 시도 이처럼 그 사회 생활에서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의 현실에 직면하여 거기로부터 끊임없이 주제를 찾아내려는 시적인 욕구가 있다.
현대의 사회는 더욱더 그 기구가 복잡화하고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며 불합리한 것이 곳곳에 노출되어 있어서 시인은 비록 자기 내부에 침잠한 갈등을 그들의 사고와 표현으로 분사(噴射)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는 종전까지는 순수하게 생활이나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거기에 몰입해서 인간들의 덕목(德目)인 진선미(眞善美)의 발현으로 시의 형태를 탐미적으로 형상화했으나 현대시의 지평이나 지향점은 이렇게 사회성도 중시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살펴보는 것은 ‘대통령이 탄핵소추가 되어 헌법재판소에서 심리가’ 인용이 되는 국민의 수치가 나타나도 무관신이며 국정농단이니 촛불시위니 국기를 문란시킨 대통령도 있고 이를 계기로 국민성이 양분하는 위험천만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내버스에 백발 노신사가 승차한다. 앉을 좌석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그냥 서서 가기로 한다. 차창 아래에는 ‘노약자석’이니 ‘임산부석’이라는 표지 딱지가 붙어 있으나 마나하다. 그 자리를 차고 앉은 젊은이는 스마트폰으로 연신 무언가를 두들기고 있고 또 다른 이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거나 아예 못본 척 졸고 있다. 그렇다. 요즘도 문맹(文盲)이 많은가 보다. 한편 버스에서는 ‘노약자석과 임산부석은 그들을 위하여 비워두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다. 아마도 이들은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聽覺)에도 문제가 있는 듯하다. 분명히 노자(老者)도 아니요 약자(弱子)도 아니며 병자(病者)도 아닌, 또한 임산부도 아닌 요즘 젊은 애들의 삐뚤어진 정신머리가 서글프기만 하다. 이봐, 물질문명이 최고로 발달하고 입시위주의 교육에 매달리니까 윤리 도덕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나. 백발 노신사는 끝까지 서서 가다가 혀끝을 차면서 하차한다.
--「나와 너의 장법 . 63」 전문
시의 사회성에는 작품의 주제가 사회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에 상응하는 능동성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는 소박한 생활의 단면을 엿보게 하는 것부터 정치적인 이슈나 사회 체제의 변혁을 갈망하고 또 인류 평화의 해법을 모색하는 등의 작품경향을 자주 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위의 작품처럼 이러한 사회적인 부도덕과 비윤리적인 정서를 요즘 일부 청년들에게서 목도(目睹)되는 흔한 일상을 개탄하는 하나의 시의 사회적인 사소한 문제들을 시인의 시각에서 스스로 체념하는 형상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어서 요즘 사회적인 비극적인 행태를 언제부터 누가 망가트려 놓았는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물론 문학 자체가 언어를 매개체로 하기 때문에 언어 예술로서의 문학을 말할 수 있겠지만, 시는 고도의 언어 예술이다. 그것은 우리가 시를 쓰거나 이해하고 분석하려 할 때 먼저 그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를 살피고 언어를 통한 의식의 흐름을 유추하게 된다. 이 언어는 시를 구성하는 기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작품 전체가 포괄하는 이미지, 은유, 상징, 나아가서 주제까지도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작품의 총체적 의미 파악은 바로 언어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우리가 시를 창작할 때 언어의 결핍을 얼마나 절감하는지 모른다. 공자가 그의 아들 백어에게 시를 공부하지 않고는 남 앞에서 말을 할 수 없다(不學詩 無以言)고 가르친 것처럼 우리는 언어에 대한 별도의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시를 쓰는데 많은 애로를 직면하게 된다. 오래전 신인상에 응모할 습작 한 편을 퇴고하던 날 밤, 적절한 단어 하나를 찾기 위해 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국어사전을 뒤적인 적이 있었다. 끝내 찾지 못하고 다음날 우연히 만나게 된 중진 시인에게 물었다. 언어의 고갈을 충전하는 묘안은 무엇이냐고. 그의 대답은 한 마디로 ‘국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은 읽은 후에야 시를 쓰기 시작해도 될까 말까’였다.
시인이 되려면 언어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적, 인격적으로 또 다른 무엇이 가미되어야 한다는 암시로 받아들여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교훈으로 새기고 있다. T.S. 엘리엇도 시는 근본적으로 언어방법이라고 말했다. 언어에 의해서 시인은 그의 사상과 정서는 물론 그의 직각적인 메카니즘을 포착하고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한편 리처즈는 언어 전달의 총체적 의미 파악을 ‘말뜻’, ‘느낌’, ‘어조(語調)’, ‘의도’의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시 문장에서 한 단어 뜻이나 한 행, 한 연, 또는 시 전문에 대한 느낌을 이해하고 화자(話者)나 청자(聽者)들의 어조를 통해 작품 속에 내재된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내어
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의 시조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 남도 삼백 리 / 술 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나그네」
이 작품들은 일반 통념이나 과학적 사고에서 보면 지극히 비이성적이다. 사실성이 없고 객관적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어떤 개념이나 의미 전달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긴 밤의 시간을 비축했다가 임이 오는 날 모두 소비하겠다’라거나 ‘어떤 나그네가 저녁놀이 덮힌 강나루를 건너 밀밭 길을 간다.’라는 서술로 충분하다. 그러나 시와 언어 사이에는 신비로운 시적 진실과 우주적 진실의 메시지를 내포(內包)하고 있다. 이렇게 시는 언어의 예술임을 자각한 우리의 최초 시인은 정지용이며 이를 되풀이하여 강조한 시인은 김기림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다. 시인은 언어를 직조하는 우수한 기능공이어야 한다. 똑 같은 쇳덩이로 칼을 만들 때 어떤 사람은 겨우 칼의 형체만 거칠고 서투르게 만드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칼날을 비롯하여 칼자루에도 세공을 곁들여 정교한 칼을 만드는 것은 무슨 차이 때문일까. 시인은 마치 마술사처럼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절실한 언어의 훈련이 요구된다. 가령 한 작품에서 어떤 언어가 적합한가, 투박하고 아름답지 못한가, 감각적이며 색채가 있는가, 너무 관념적이며 어둡지는 않는가 등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대체로 시의 언어는 의미와 음성 그리고 이미지의 세 요소로 구분되어 있다. 우리가 시 한 편을 감상하면서 이러한 복합체의 미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언어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 그 작품이 제시하고자하는 빛깔, 음성, 무늬, 감촉, 무게, 리듬 등등의 다양한 감각과 함께 나아가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까지도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언어를 좀 다룰 줄 안다’고 한다면 이는 벌써 시인이다. 그는 이미 언어의 성질이나 기능을 이해하고 있으며 언어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언어에 대한 감각이 없거나 둔감한 사람은 일차적으로 시를 쓸 자질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제 아무리 좋은 소재에 아주 훌륭한 착상(着想)을 했더라도 언어의 고갈에 부딪히면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은 모두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서부터 우리말을 사용하면서 살아왔는데 왜 언어를 다룰 줄 모르겠는가. 이런 언어로 표현만 하면 될 것이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시의 언어에는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요소의 기능이 복합적으로 발휘되어야 한다.
우리는 청록파(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서정 시인들의 언어 조탁(彫琢)을 경험했다. 사실 요즘처럼 국어사전도 흔치 않고 우리말이 체계적으로 정리도 되어있지 않은 시대에서 정련된 우리말로 좋은 시를 창작했다는 것은 그들의 천재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시의 매력은 언어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며, 시인은 항상 언어의 마력에 빠져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의 유희(言弄)를 경계해야 한다. 잡다한 가식의 언어를 나열하거나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하여 마치 새로운 시세계를 개척한 것처럼 시의 본령을 어지럽히는 경우도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더러는 현학적이고 풍자정신의 노출로 독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경각심을 촉발하는 역할도 하지만, 어쩌면 건전한 언어의 사용이라기보다는 말의 측면적인 재미와 일종의 관념에서 부리는 말의 장난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결점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시의 언어와 시어는 다른가
우리가 시를 쓸 때 필요한 말을 시의 언어 또는 시어(詩語-poetic diction)라고 한다. 시의 언어는 시에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말한다. 어떤 특정한 언어만을 사용해야 시가 되는 이른바 ‘시적 언어’가 아니다. 우선 유치환의「幸福」의 일부를 보기로 하자.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렇다. 우리 신문학 이후로 일상작인 구어(口語)로 자유시를 써왔다. 일상생활에서 나누는 구어, 그것이 시에 사용되는 언어이다. 그러나 그것을 한 단어씩 떼내어 본다면 아무 색채도 없는 그저 평범한 단어로 돌아가지만, 언어를 조합하거나 그 조합 자체가 각자의 사물에 대한 인식과 시 정신 또는 발상에 따라서 훌륭한 시의 언어가 된다. 그러나 시인은 단순히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동떨어진 무엇을 기본으로 하여 어떤 창조상의 세계를 언어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앞에서도 말한 이미지를 포괄한 언어,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들이다. 이런 언어들을 구사하여 착종(錯綜)시키면서 시인의 감동과 사유를 표현하게 되는데 이를 더욱 깊이 형용하거나 비유, 상징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그 복합적인 내용을 단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대체로 일상어는 다양한 개념과 통념을 지니고 있다. 가령 ‘꽃 같이 아름답다’는 언어는 아름다움에 대한 일차적인 개념뿐이라서 시인들은 이 때묻은 표현을 깨뜨리고 자신이 감동한 아름다움의 본질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의 언어는 다양하다. 부드러운 언어의 연결로 복잡하거나 난해한 부분도 시인의 언어 조합이 아니면 적절한 이미지를 살리지 못할 때도 있게 된다. 시인이 직면한 진실에 대해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시인의 시 정신의 엄격함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시어는 ‘시적 언어’ 즉 시 창작에 사용되는 특별한 단어나 어구(語句)이다. 이렇게 본다면 시의 언어와는 달리 일상어와 구분되져야 할 것이다. 옛날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어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일상어도 시어가 된다는 견해이다. 현대 시인들은 대부분 구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대시에서는 이미 시어라는 개념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시학에서는 시어라는 개념보다는 비유를 시적 본질로 생각하고 이를 탐구하고 있는 경향이다. 어쨌거나 ‘시어는 언어를 초월한다’는 말을 새길 필요는 있다. 언어의 영역을 초월하는 데에 정제된 시어의 참맛이 있고 시의 진실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아무 단어나 시에 모두 도입할 수도 있지만, 시의 구성 조직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그 시어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미래를 지향하는 사물의 이미지를 부각시켜야 한다. 상실된 인간성 회복에 신선한 향기를 주고 만유(萬有)의 사물 본질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심미안을 길러주어야 한다. 실제로 현대시는 시어의 선택에도 대담해졌다. 금기된 언어와 쌍말까지 등장하는가 하면, 너무 의미를 강조하다보니 난해시도 낳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직설언어든, 한자이든, 외래어이든 또는 추상 관념어이든 관계없이 시어가 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언어들이 시 전체의 앞뒤 문맥에 따라 어떤 자리에 놓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이미지로 바꿀 수 있는가하는 언어의 용법에 더 익숙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자 한다.
우리가 시는 언어 예술이라고 강조하면서 시인이 자긍심을 갖는 연유도 순수한 우리말인 토착어를 발굴하는 것이나 언어에 함유된 민족의 풍습, 역사 등을 이해는 등 우리말을 갈고 닦아야하는 책무 같은 것도 시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미감의 언어로 잘 짜여진 비단폭 같은 시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시를 읽다보면 국어사전에도 없는 생소한 단어를 대하는 수가 간혹 있으며 어떤 시는 우리 맞춤법에서 정한 띄어쓰기나 문장법 등을 무시한 채 표현된 예를 볼 수 있다. 이를 들어 ‘시인은 언어의 무법자’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이는 아마도 시인이 직접 적절한 언어를 새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과 때로는 개인의 취향 또는 호흡 조절을 위해서 붙여쓰는 것을 용납할 수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아직 신조어(新造語)에 대해서는 그렇게 익숙하지가 않다. 그것은 억지로 만든 단어가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리도 없고 그 의미의 이해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목월의「靑노루」에서 보는 것처럼 ‘청노루’, ‘청운사’. ‘자하산’ 등이 모두 상상속의 사물이다. 하도 많이 읽어서 그런지 낮설지는 않아 보인다. 박목월은 ‘靑石 돌담’이니 ‘남도 삼백리’, ‘보랏빛 石山’, ‘水晶그늘’. ‘砂礫質’ 같은 상상의 신조어를 많이 구사하고 있어서 특이하다.
김춘수의「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내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것처럼 한 사물에 시인이 적절하고 아름다운 명명과 의미를 부여했을 때 비로소 그 사물은 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조어이든 일상어이든 그 작품에서 가장 적절한 언어의 조합이냐, 그 조합 자체가 시인이 사물에 대한 인식과 시정신의 발상에 효과적이라면 모두 시의 언어로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이는 어떻게 보면 시인은 단순한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말하며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약간 동떨어진 것을 기본으로 하여 어떤 창조상의 세계를 작품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시인의 고충이기도 할 것이다.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 이미지를나타내는 언어, 그것들을 구사하고 서로 섞여져서 조합하면서 시인의 감동과 사유(思惟)를 더욱 깊이 형용하거나 비유, 상징 등의 방법으로 복잡한 내용을 단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의 언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요즘 현대시에서도 간혹 대할 수 있는데 특히 이상 시인은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것은 그의 작품 전부가 그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시의 목적과 시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언어의 횡포가 되기 싶다. 간혹 맞춤법에 정한 문장부호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예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때묻은 언어’ 또는 ‘죽은 언어-사어(死語 : obsolete word)'가 있다. 일상어는 다양한 개념과 통념을 지니고 있다. 가령 ’꽃과 같이 아름답다‘라는 형용은 아름답다는 말 그대로 한번의 개념만 줄뿐이지 자기가 느낀 아름다움의 본질은 표현되지 않고 있다. 시인은 과감하게 이 때묻은 표현을 깨뜨려야 한다. 이처럼 시의 언어(곧 시어)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역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나 많이 사용하여 식상하거나 시대에 역행하는 언어들은 자제하는 것이 시의 위의나 시인의 위상에도 품위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 언어는 시 속에서 우리에게 존재를 보여주는 등불이 된다. 존재의 영역은 존재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나는 범위에 국한하는데 가령 캄캄한 밤에 성냥을 켯을 때 성냥불이 비춰주는 그 범위만 환하게 눈에 보일 것이다. 이것은 암흑(또는 無) 속에 나타나는 존재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의 언어는 일상생활에서 단순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논리적인 기능보다는 정서적인 기능을 중시하는데 모든 사물과 관념의 시적 대상물에 대한 아름다움과 진실을 지적으로 판별하는 것은 물론, 언어가 지닌 음향, 즉 음악적인 미묘한 요소가 결합하고 있어서 신비하고 오묘한 맛이 조화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일상적인 담론에서도 말하는 주체(화자)가 있고 말하려는 화제가 있으며, 그것을 듣는 청자(聽者)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처럼 시에서도 화자(話者)의 표정과 상황, 그리고 담론(언어)에 따라서 독자(청자)에게 전달되는 시적 메시지가 어떠할까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현대시에서는 이런 화자와 그 어조를 통해서 반어법, 풍자, 역설법 등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그 의미적 요소를 이해하려 하지만, 작품 전체를 이야기로 전개하여 주제를 적시하는 경향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시인이 어떤 사물에 관한 스토리를 전개하여 작품 전체에 포괄되는 의미를 추적하는 작법이다. 이것을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이라고 하는데 소설에서의 주된 기법이지만, 시에서도 많이 적용하고 있음에 유의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누가(화자) 어떤 목소리(어조)로 이야기(주제)를 들려주느냐하는 문제는 현대시와 언어의 불가분적 관계와 그 중요성을 우리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물며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 언어 속에 존재의 거창한 문제가 깃들어 있어서 시인의 지적사유에는 낡아 버린 관념어(美辭麗句처럼 非詩的 언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자신의 언어계발에 몰입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시인들의 숙명적 과제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자리에 놓일 가장 적합한 언어 하나를 찾기 위해 날밤을 새우는 고충도 감수해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시와 인생은 함수관계인가
--자전적 에세이
시란 무엇인가라는 낡은 질문이 새로운 것은 무슨 연유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답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시의 정의를 요즘 와서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한생을 시 창작에 매달리다 보니 나의 좁은 뇌리에서 사유하는 방향이 시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확신을 증명이라도 하는 양 일상생활 자체가 모두 시로 귀결되는 듯하다.
어찌 보면 다양화, 경쟁화된 현실 사회에서 고매한 사유만 지향하면서 살아가려는 시인의 자존심이 심히 갈등을 동반하는 예는 많다. 그만큼 시적인 삶이 퇴색되고 산문적인 삶이 현재를 충만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의 인격체가 허약해질 수밖에 없는 무서운 현실에 시인은 고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5년째 맡고 있는 KBS 방송문화센터 시창작반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에 의하면 아직도 시와 시인의 기대는 새롭고 예지적이며 영원하다. 처음 시를 대하는 사람에게는 시 그 차체에 대한 신비감이며 시인에 대한 최상의 동경이다. 대개 연만하신 분들이 시창작반을 찾는 이유가 이런 양상으로 일치되는 것을 보면 아무리 삭막한 물질우위의 문명세계에 살아가고 있지만 지혜로운 영양분의 고갈을 느끼는 측면이 있음에 다행스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소녀, 청년시절을 진통하고 이제 중년을 넘어서 가정적으로 안정을 이룬 후에 다시 문학의 고행을 시작하는 계층이 많아졌음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남은 여생이라도 정신적인 면 그러니까 영혼의 위대한 진실이 무엇인가 나름대로의 인생관이 가미된 노래를 부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 편의 시에서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라고 한다면 이를 만년에사 거두어 보려는 보람 있는 삶의 지표가 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시인에 대한 동경이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강한 집념이 팽배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시인은 신선과 같다는 옛 비유도 그러하려니와 인생에 있어서 숭엄한 존재가치로서의 표본으로 설정하려는 일종의 충족 욕구 같은 것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사실 시인은 소설가, 수필가, 평론가와 달리 사람 인(人)자를 붙여서 문학의 다른 장르인 집 가(家)와 구태여 구분 짓는 연유가 잘 반영된 듯도 하지만 이 인(人)이 상당한 고뇌를 요구하고 있는 점은 깊이 새겨보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요즈음 인쇄매체의 발달과 함께 문학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겨나서 시인으로 등단하는 문이 넓어져서 그 꿈을 이루는 기회가 비교적 쉬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 시인의 길을 너무나 안이하게 대처하는 경향도 있고 보면 어떻게 이를 이해해야할 지 약간은 부정적인 견해도 있는 것 같다.
시인의 길은 인생과 함수관계가 있다.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좋지만 시인이 되기까지는 먼저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할 중요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시인은 사물이나 인생을 관찰하는 동안 보통 사람들보다 예민한 감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가져야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현실 생활이나 그 생활을 통해서 얻은 경험을 소재로 한 것이 곧 시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시인이 존재할 필요가 없이 기록으로 남겨도 좋을 것이다.
똑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함께 체험한 일이라 할지라도 시인은 이것을 시로서 표현할 수 있는 감수성과 상상력이 있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냥 자기의 지나간 체험으로 끝난다는 마음의 자세가 다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시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인생과 어떤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정리해 나가야 할 것인가. 먼저 나의 인생에 있어서 나는 죽을 때까지 시를 사랑할 수 있으며 죽는 순간까지 시를 쓸 수 있겠는가가 문제이다. 시를 향한 투철한 정신, 인생의 마음밭에 깔려있는 충만한 시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시는 바로 나의 인생이다 라는 확고한 삶의 지표가 세워져야 한다.
옛말에 시자인심지감어물이성성자야(詩者人心之感於物而成聲者也)라는 것이 있다. 시는 성정(性情)에서 발생되어 사물에서 느낀 바를 운어(韻語)로 나타낸 것으로서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또 논어에서는 공자의 제자 중에는 진항(陳亢)이란 사람이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와 함께 공부를 하면서 스승이 아버지인 백어에게 서당 이외에 집에서 따로 무엇을 배운게 있느냐고 물었다. 백어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일찍이 아버님께서 뜰에 홀로 계시거늘 내가 뜰을 지날 때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시경(詩經)을 읽었느냐 묻기에 아직 읽지 못하였다 한즉 시를 읽지 않으면 남과 더불어 말할 수 없다하여 시를 배웠노라’고 했다. 진항이 감복하고 그도 즉시 시를 공부하여 백어를 따라갔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불학시 무이언(不學詩 無以言)이라는 유명한 말이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앞에서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아주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또한 이어서 불학례 무이입(不學禮 無以立)라 하여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서 있을(살아 갈) 자격이 없다하여 시와 예를 중시했던 것이다.
이처럼 시나 예는 한 인생을 영위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며 이를 잘 다듬고 이해하는 것은 특히 시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람은 시와 인생과의 일치된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이 확실하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신석정 시인도 그의 <나는 시를 이렇게 생각한다>는 글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생에 대한 불타오르는 시인의 창조적 정신에서 결실되는 것이니 대상하는 인생을 보다 더 아름답게 영위하려고 의욕하고 그것을 추구, 갈망하는 데에서 제작된다면 그 시인의 한 분신이 아닐 수 없다고 했으니 시는 곧 인생의 수양이며 시인은 한 인격의 결집이다.
시인은 올바른 인생관과 정립된 가치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시는 그 사람의 마음(其詩其人心)이고 그 글은 곧 그 사람 자체이며 그 사람은 그 글이어야 한다. 진실이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바로 시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우리는 사무사(事無邪)라는 휘호를 많이 접한다. 이것도 논어에서 ‘시경의 시 삼백 편의 내용은 한 마디로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詩三百一言而蔽之曰 思無邪)’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얼마만큼의 인간에 대한 진실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의 진실이 곧 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실은 정의하기가 너무 광범위하지만 시적인 진실은 어디까지나 사랑의 실천이어야 한다. 순수하고 진솔한 삶의 진실도 내가 남을 사랑하면 남도 나를 사랑한다(愛人者卽愛之)는 신념이 무르녹아서 그 진액이 진실로 형상화되어야 한다.
이제 가을 기운이 완연하다. 그 많은 시인들은 저마다 시 한 편을 창작하기 위해서 또 고뇌에 쌓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내가 필요하리라. 시인은 지독한 고독과 갈등과 번민을 참아내는 인내심이 요구된다. 시가 돈이 되지 않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 고통을 극복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리라.
지금 와서 내 인생에서 진정한 시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두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도 내가 택한 시인의 길이 내 인생의 역정과 어떤 괴리는 없었는가하는, 존재가치의 배타적인 결함은 없었는가하는 자성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시인의 자긍심에 대한 조그마한 손상도 있어서는 안 될 터이기 때문이리라.
( 『생각과느낌』)
내가 쓰는 시작법
--많은 체험과 좋은 시 쓰기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사물과 만나거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사유(思惟)가 어떤 영감으로 나타나느냐하는 문제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이러한 시적 발상법에서 나는 먼저 살아온 과정을 회상하면서 거기에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무엇인가 사무치는 정감을 재생시키는 일부터 시작한다.
우리들은 누구에게나 오욕(五慾)과 칠정(七情)을 간직하고 있다. 이 칠정 중에서 사무치도록 재생되는 체험을 노(怒)와 애(哀)와 다른 애(愛)를 많이 시적인 소재나 주제로 투영시키는 경향이 많다.
시는 어차피 나의 인생을 회고(回顧)하면서 인식하거나 성찰하면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습성을 지금도 탈피하지 못하고 있어서 많은 고뇌와 발황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시 쓰기는 초기에는 농촌에서 시각적으로 응시(凝視)한 생활 서정과 전원의 자연 친화를 소재로 거기에서 전개되는 상황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습성이 있었으나 첫 시집 이후에는 좀더 인간과 접목하는 인본주의의 정신을 탐색하는 인식론에 근거한 관념적인 소재와 주제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이는 우리 인간의 칠정 중에서 애한(哀恨)이라는 슬픔의 근원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아버지의 생활상을 목격하고 6.25라는 동족상쟁의 민족적인 비극을 어린 나이로 체험하면서부터 인간의 비애(悲哀)가 한(恨)이라는 원류로 발동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심저(心底)에서 많은 충동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와중(渦中)에서도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익혔다. 그 덕분에 당시(唐詩)도 접하게 되고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시에 대한 친근감을 절감하면서 정서나 사유의 지향점이 오로지 시라는 문제에서부터 출발하는 참으로 어리석음 또한 경험하게 되었다.
한편 아버지가 중환(重患)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에 풍파가 일어났다. 학업도 포기하야 하는 위기가 닥쳤다. 그러나 시(문학)에 대한 집념은 더욱 공고(鞏固)해지면서 깊은 사색과 독서가 생활화하듯이 변해갔다.
이와 같은 충격적인 체험은 다시 사랑이라는 다른 모티브를 제공해 주었고 만유(萬有)의 사물이나 인간의 심정에는 사랑이라는 공존의 정감을 탐색하는 인본주의에 매달리게 되어 인문학이 어떻고 인간성 회복이 무엇이라는 등의 존재인식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의식이 흘러갔다.
그후 나는 사회생활의 일원으로서 세상을 살았다. 그러나 현실과는 문학이 주창(主唱)하는 정신이 많은 괴리(乖離)를 야기(惹起)시켰다. 분노했다. 세상이 왜 이런가. 아주 위험한 생각도 가끔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방편은 곧 시를 더욱 나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으로 정립해야 하겠다는 숙명적인 소명의식을 가지게 된다.
시에서 분노(憤怒)를 화해하는 해법을 탐구하는 시법(詩法)을 연구하게 되고 실제로 작품의 소재로 삼거나 주제를 투영하면서 시의 정신과 목적을 음미(吟味)하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일찍이 워즈워스가 말했듯이 시는 힘찬 감정의 발로이며 고요로움 속에서 회상되는 정서에 그 기원을 둔다는 글이 더욱 실감으로 다가오는 심정이 이 세상의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 그리고 모순들이 시를 통해서 정화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또 어리석은 상념을 가진다.
우리의 주변에는 인성교육이 없다느니 인간다운 덕목(德目)을 잊은 지 오래라는 등의 비극적인 심경만 있을 뿐 그 누구도 이를 개선하고 올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강력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천에 옮기려는 위인은 없다.
지구의 존재를 위협하는 대기오염이나 생명을 담보하는 물의 오염 등 자연파괴의 주범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라는 위기를 그냥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시의 발상과 동기는 친자연적인 테마에서부터 친인간적인 실질적인 상황을 도입해서 작품을 전개하면서 시 정신과 시인 정신이 융합(融合)하는 주제가 창출할 때 우리의 시는 인간과 정감으로 화합하는 좋은 시가 창작되지 않을까하는 고심(苦心)에 차 있기도 하다.
처음 등단하면서 ‘시는 종교와 같은 것’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당선소감을 쓴 기억이 난다. 결국 시를 여기(餘技)로 생각하지 않고 생활화하면서 일생의 동반자로 임해야 한다는 일념(一念)의 다짐으로 표현되었으리라.
황금찬 선생님의 말씀마따나 대한민국의 전 국민이 시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불법과 위험이 없는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는 현실적인 분노를 정화하는 시적 진실을 이해하게 한다.
누군가가 말했다. ‘한 줄의 글자와 공백으로 구성되는 시구(詩句)는 인간이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말을 찾아내는 이중의 작용을 한다’는 언지에 동의한다.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도 안 된다는 호라티우스의 시론처럼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을 뒤흔들거나 이끌어나가는 작용이 필요하다.
우리들의 정한(情恨)을 중화하는 시의 목적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존엄과 직결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메시지로 현현해서 시적주제로 그 진실을 명징(明澄)하게 전해주고 공유(共有)할 필요성을 항상 자각하면서 시 쓰기에 골몰하고 있다.
내가 시를 쓰는 방법은 이처럼 특별한 게 없고 평범한 일상에서 감응(感應)하거나 시상이 포착되면 외적인 사물과 내적인 관념이 융화(融和)하면서 생성하는 이미지를 바로 시 속에 투영하여 그것이 우리 인생과 어떤 교감을 이룰 수 있느냐하는 문제를 더욱 중시하는 일에 지금도 고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체험도 중요한 매개의 역할을 하지만 새로운 인생체험을 위해서 직접, 간접 구분하지 않고 분주하게 시적으로 탐색해야 할 것이다.(현대수필 여름호) 게재
시 쓰는 일, 시를 읽는 일
시인은 모름지기 시를 써야 하고 남의 작품도 많이 읽어야 한다. 2008년에는 시를 쓰는 일보다 시를 읽는 일에 몰두한 느낌이다. 그것은 많은 문학지(『월간문학』『문학세계』『한맥문학』『문학저널』『지구문학』『문학미디어』등)에서 ‘시 월평’을 청탁받았기에 거기에 수록된 시(매월 평균 300편)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고 마감일을 맞추려고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일을 두고 즐거운 비명이라는 역설이 통할지 모르겠다.
또한 후배 시인들의 ‘시집 해설’을 쓰기 위해 시(시집당 80편×30명)를 읽어야 했다. 받은 시집을 포함해서 어림잡아 한 해 동안 약 1만 편의 시를 읽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처럼 시 읽기의 시간적 가능은 직장에서 물러나 특별하게 하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작년에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을 맡으면서 간혹 있는 회의와 심사 그리고 행사참석 등과 매주 화요일에 있는 ‘청송시창작아카데미’ 강의, 동두천문협 금요 시창작 강의를 빼고는 거의 집에서 시 읽기와 글쓰기에 전념하는 상황으로 생활리듬이 변해 버렸다.
이제 2008년이 저문다. 아, 벌써,라는 감탄적 수식어가 어쩐지 덤덤할 뿐이다. 시적으로나 인생적으로 무엇 하나 성취된 것이 없어서 일까. 그래도 자위(自慰)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써 두었던 시론과 해설을 모아서 시론집『여백의 시학』(도서출판 한강)을 발간하고 ‘조연현문학상’을 수상한 일이라고 하겠다.
한편 바깥 세상에서는 새 대통령이 취임해서 ‘지난 잃어버린 10년’을 되돌린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촛불시위 하나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하고 경제적인 어려움만 불러왔다. 더구나 진보 문학이니 진보 예술이니 하던 사람들의 횡포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넘어가는 것 같다.
2009년이라고 뭐 특별하게 세울 계획이 없다. 한국문협이 국가나 회원들에게 인정받는 단체가 되어 우리 문학의 활성화와 우리 문인들의 창작여건 개선에 앞장서는 일에 일조가 된다면 기꺼이 동참해야겠다.
그리고 똑바른 시 한 편 쓰기 위해서 지적자양의 충만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겠다. 국내외 여행을 통한 견문 넓히기와 철학서적을 탐독해서 존재의 문제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여 시와 상관성, 연결성에 관한 일에 손을 대고 싶다.
2009년 새해에도 나에게 특별한 신상 변화가 없는 한 시 쓰기와 시 읽기는 영속될 것이다.* 계간 [문학예술] 2008. 겨울호 게재
작품 구상 나는 이렇게 한다
--절실한 체험의 원류를 탐색
나는 작품 구상을 이렇게 한다라고 잘라서 말하기는 그렇지만, 평소에 외적인 요소인 사물에 대한 명민(明敏)한 응시를 통해서 감응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외연(外延)에서 생성된 체험들이 내면에서 작품의 원류로 항상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험에서 추출된 사유의 진실이 내포(內包)하는 인식 자체가 외적 요인과 융합할 때 작품은 잉태하게 되며 그것이 좀더 숙성될 때까지 많은 인내와 지적 인식을 필요로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는 절실한 체험의 소산을 축적한 후에 그것이 실질적으로 나의 진실이 될 때를 기다려야 한다.
대체로 문인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성에 따라서 작품의 구상이나 표현등에 필요한언어의 취택이 크게 달라지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에도 소중한 추억이나 비통한 체험, 아름다운 사랑의 역사들이 잠재해 있다가 어느 날 사물이나 관념에서 추출한 이미지와 조화를 이룰 때 영감(靈感)으로 한 줄기 섬광을 발휘하게 된다.
시의 세계는 참으로 오묘하다. 기행문이나 일기처럼 막 쓰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지적 혜안으로 응집한 주제의 적시는 그 시인의 다양한 체험속에서 정립한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포괄해야 한다는 결백증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
내가 한 편의 작품을 구상할 때에는 현대시가 구도적으로 설정한 구성요건을 적절하게 응용해야 한다. 우선 시가 요구하는 음악성을 살핀다. 일종의 리듬이라고 하는데 시조에서 볼 수 있는 정형율이 아니고 호흡을 중시하는 내재율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것은 언어의 절제를 위해서나 의미의 함축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음에는 회화적(繪畵的)인 요소 즉 이미지의 적합한 투영이 조화를 이루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사유(思惟)를 요구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작품의 구상은 일차적으로 완성단계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속에 동화(同化)하거나 투사(投射)할 정점을 결정하고 이를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 이미지를 추출해야하는 어려움도 따른다.
다음은 주제를 설정하는 문제에 많은 집중을 하게 된다. 이는 화자(話者)인 시인이 청자(聽者)에게 들려줄 메시지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이다. 바로 시인이나 독자가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주제를 찾아 헤매어야 한다. 이것이 만약 음풍롱월(吟風弄月)이 된다거나 독백(獨白)이 된다면 언어에 의한 장난으로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이렇게 지적인 사유로 창출해내는 주제(의미)도 나의 현재까지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서 오랜 기간 곰삭아서 나의 심저에 용광로처럼 불타는 인생 최대의 메시지를 발견했을 때 이를 투영시킨다. 이것은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아를 인식하면서 지금까지의 현실적 갈등과 고뇌 그리고 불합리적인 모순 등이 화해를 하는 나의 철학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고심이다. 시는 본대로 느낀대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을 묶어서 어떤 정서와 언어로 표출해서 공감대를 확산할 수 있는 창조적 예술로 승화하느냐하는 산고(産苦)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는 보이는 것, 느끼는 것의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내재되어 있는 숨은 뜻까지 나태내어야 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평범하고 보편적인 시적 발상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오관(五官)을 통해서 감지한 고감도의 사물과 관념에 대한 한 차원 높은 사유 즉 이것이 바로 나의 존재이며 자연이며 우주적 산물이라는 시적 정감의 표출까지 작품구상의 기본으로 삼는다.
또한 시의 소재를 동원하여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최초의 계기를 중시한다. 이 동기는 시의 주제와도 동일하다고 할 정도의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시의 중심 사상이 포괄하는 매개체의 역할도 담당하는 요소가 되어서 착품 형성상의 출발점이라 할 수 도 있다.
나는 소재와 주제를 정리하면 그것들과 대응해서 나의 지적 감도와 인식이 본래의도했던 메시지가 어느 정도 근접하게 충족되고 있는가를 다시 검토하는 고충을 인내로 포용하는 심리적 결단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렇다고 아직 한 편의 시가 완전하게 탄생되었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문학미디어 2010.봄호)
고난의 삶과 불혹의 언어
--나의 삶 나의 문학
1. 농촌 청소년의 꿈과 생활 언저리
나는 서부 경남의 합천 농촌 오지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형들을 따라가서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어깨너머로 읽었다. 그때 배운 ‘천고일월명(天高日月明)이요 지후초목생(地厚草木生)이라’는 추구집(推句集)의 구절과 명심보감의 명구(名句)들은 항상 국어 성적을 일등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후 중고생 시절에는 당시(唐詩)에서 읽은 이백(李白), 두보(杜甫), 도연명(陶淵明), 소동파(蘇東坡) 등의 한시에서 매력을 느끼고 나도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소박한 마음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물론 중환으로 그동안 집안과 온 식구들 특히 어머니의 고통이 심했다. 가산은 몰락되었다. 지금까지의 학업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당시의 사회적인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형이 몇 평 안 되는 농사를 맡아서 호구(糊口)를 해결했지만 당시에는 치수(治水)가 잘 되지 않아서인지 가뭄이 계속되고 어떤 때는 홍수로 전답을 휩쓸어가는 일이 빈번했다.
아버지의 별세는 바로 ‘인생은 이런 것인가’하는 우둔한 의문에 항상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당시 ‘학원문단’에 얼비치는 청소년들의 사유는 이러한 나의 고뇌가 충분한 대화의 장으로 이끌고 있었다. 좋은 시를 써야겠다. 시를 씀으로써 사소한 문제들까지 포용하는 방편을 찾아야겠다는 지극히 순정어린 감상주의의 발동이 용틀임치고 있었다.
육군에 자원입대해서 공백기간을 메웠다. 제대한 후 한동안 수심에 잠긴 나날을 보냈다. 1966년 가을, 몇 권의 책을 싸들고 산사를 찾아 갔다. 자연과 깊이 접하면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섭리에 심취하고 물은 어디에서 솟아나 어디로 흘러가는가에 대해서 골돌하게 생각해 보다가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당돌한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나 찾아낸 해답은 아무것도 없었고 머리만 더욱 복잡해지면서 가슴은 더욱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 계곡의 물소리는 선녀들의 합창이었다. 차라리 세속을 벗어나 이 산속에서 일생을 마쳤으면 하는 막연한 기원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산문을 드나드는 스님의 행장이 그러하고 산새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와 새벽부터 들리는 독경소리가 모두 여린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도 알리지도 않고 무작정 상경해서 과외선생, 육성회비징수원, 교정사원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잠시 문학과 멀어졌다. 한 10년을 허송한 것 같다. 그래도 퇴근시간 후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면 다시 병이 도져오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무지개 지우고 떠난
풀꾹새 울음소리
밤 되면 고향 먼 에움길에 깔리는데
제 마음으로 남아
어느 날 바람이 된 텃밭 감나무
주저리로 달려있는 떫은 전설은
오뉴월 불볕 잘도 견딘
구름 한 조각 가슴 깊이 묻어 두고
따갑게 흘러간 시냇물
오늘도 찾지 못한 무지개빛
아픈 그림자들만
빗속에서 헤어지고
젖은 채로 지워지고
초가지붕 위 하얀 박꽃잎 하나
풀꾹새 울음으로
가슴 앓은 소리여.
당시의 습작 「풀꾹새 울음」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향수에 젖은 일상적인 관념의 단면이다. 자연이나 전원의 정서는 순박하면서도 서정적인 문학소년을 벗어나지 못하고 대학노트에 빼곡하게 숨어있던 낙서였다.
그후 결혼을 하고서도 시에 대한 연민을 계속되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노트를 찾아내서 밤새워 뒤지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고통이었다. 갈등과 좌절로 점철되었던 삶 자체가 고난이었지만 실종당한 나를 찾는 일은 더욱 처절했다.
2. 자력으로 성취한 불혹의 언어
나는 시를 낙서처럼 썼다. 그 당시 어렵게 형이 읍내에서 구해준 『소년세계』, 『새벗』에서부터 『학원』,『학생시대』를 밤새워 읽으면서 틈틈이 적어둔 습작을 여기에 투고하던 순진성을 상기하면서 글을 썼다. 그 이후에 『현대문학』과 『시문학』과 접하면서 현대시를 이해하게 되고 지도작품을 투고하여 선정되는 기쁨도 맛보았다.
시의 신은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마침 서울시교육위원회 일로 만난 시 쓰는 어떤 시인이 시를 이야기하면서 습작을 한번 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박목월 선생의 제자였다. 평소에 동경하던 목월 선생과의 만남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으나 1978년 3월에 목월 선생님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멀리서 쓰러진다
누군가 마른 풀씨만 씹다가
썩지않은 마음 한 쪽 남겨놓고
한 생의 막을 내리는가
하늘이 엷게 흔들린다
흔들리는 저 언저리
시린 시야 밖으로
돌아가 눕는 저녁 새떼
바람만
빛살 고운 무늬로 어른거린다
오늘밤
귀에 젖은 물소리는
밤의 중심으로 흐르고
홀로 잠들지 못하는 섬 하나
거기에 나는
그림움처럼 남아 있다.
한 생명의 심층까지 죄어드는 많은 허탈과 절망의 껍질을 벗겨내는 존재의 확인 절차인 이 작품「바람」과 수십 편을 『心象』에 투고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심사가 연기 되고 발표는 기약할 수 없게 상황이 바뀌었다.
박목월 선생님의 추천을 받지 못하는 절망적인 아쉬움이 엄습했으나 침묵으로 기다렸다. 그 아들 박동규 교수가 잡지를 수습하여 1980년부터 정상적인 발행이 이루어지고 신인상도 심사를 하게 되었다. 1984년 4월호 당선 발표의 영광을 안았다. 많이 늦었다. 나에게 등단은 참으로 불혹에 얻은 인생의 보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의 확인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지, 또한 그 고행은 어디에서 끝날 것인지 황막하기만 했다.
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나에게는 종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허탈과 굴욕에서 황사바람 이는 현상의 어느 벌판, 이런 곳에 한 줄기 훈풍으로 영원히 남아 있었다. 가시거리를 순간에 잊어버렸어도 꿈으로만 엮어진 가난한 마음이 있었고 그 내부 깊숙이 언제나 섬광처럼 번뜩이는 커다란 사상이 깔려 있음은 오늘의 황사현상을 용케도 헤쳐 나온 원동력이었으리라.
나는 당선소감을 ‘불혹의 언어’라는 제목으로 썼다. 이처럼 나는 이 현실적 갈등과 고뇌를 오로지 시를 통해서 정화하려는 확고한 심저(心底)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저항감이나 특정의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당시 농촌의 보릿고개 시절과 아버지의 별세 그리고 학업의 중단, 그래서 지적 자양의 충전이 불가능했던 정서는 언제나 우울한 그림자로 나를 고통스럽게 이끌고 있었기에 친자연적, 향토의 토속적이면서 전원적인 소재에서 인생의 의미 찾기와 존재를 성찰하는 시 세계로 몰입하게 된 것이다.
나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지만, 철저한 유교정신의 근본으로 성장했기에 인본주의(휴머니즘)를 신봉한다. 공맹(孔孟)의 교리도 좋으나 장자의 물을 심취하는 연유도 그렇다. 시를 통해서 자아를 인식하고 가치관을 다시 정립하는 일은 문학에서 중요하다. 여기에는 성찰과 화해라는 상보성(相補性)이 전제하지만, 여전히 상존하는 갈등과 번민을 해소하는 지적 혜안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성취해야 할 문학적 과제이며 숙명이다. 인간의 고통과 자연의 파괴 등은 위정자나 특수 관계인들만의 정책으로는 해소하기 힘들다. 우리 문학이 참여해서 인간의 정신 승화와 자연 친화에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삶의 궤적을 회상하는 독백이나 사물을 스케치하는 문학 시대는 이미 낡았다.
평범한 일상이나 사물에서 범상한 진실을 일깨우는 일은 시인의 사명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미숙하고 사유가 부족한 나로서는 나의 존재 찾기의 고행이 더욱 가속화되어 나름대로 독서의 량을 늘리고 지적인 자양의 보충을 위해서 주야로 노력하였다.
아직까지도 고독과 현실 부적응에 혼돈이 따르고 있다. 그 ‘불혹의 언어’는 한국 시단에서 녹녹하게 적응되지 못하고 또 다른 고뇌에 헤매게 되었다. 현실이 냉대하는 인격체들의 생존경쟁에서 언제나 뒷짐만 쥐고 서있는 나의 몰골은 초라하기만 했다. 그러나 시를 종교처럼 간직한다는 그때의 결심은 어언 30여년의 시간 위에서 아직도 유효하다.
그 시절, 그렇게 열정적으로 시낭송회, 시강연회, 해변시인학교 등 시모임에 다녀본 경험은 바로 시창작의 소중한 한 질료로서 감회가 깊어진다. 지금사 시는 무엇이며 인생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내가 간직한 특유의 인내와 끈기 그리고 노력의 소산이 아닐까 여겨진다. 시는 일회성의 명멸이 아니라 영혼과의 영원한 접목이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3. 생활 전선과 문학 창작의 열정
나는 우선 서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문교부에 근무하는 종형(從兄) 댁에 숙소를 정하고 종로구 재동초등학교 근방에서 국민학생들을 모아놓고 과외선생을 시작했다. 성적들이 올라가 이름 있는 중학교에 합격해서 인기가 좋았으나 다음 해에 중입시제도가 폐지되어 다시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누군가가 소개해서 검인정교과서 회사에서 교정사원 등 다양한 생활 전선에서 인생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다시 이를 악물고 문학과 밤샘을 한다. 모지(母誌)인 『心象』에서 발표지면도 할애해 주고 해마다 열리는 삼상해변시인학교에도 참가해서 담임시인도 맡아 참가독자들과 밤새우면서 시를 얘기하는 행운도 있었다.
이 무렵부터 시중에서 열리는 시낭송회에 초대시인으로 참석해서 시를 읽거나 시론을 들려주는 기회가 많아져서 다시 시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으로 유수한 시론집과 함께 외국 문예이론서, 철학서적까지 탐독하게 되었다. 이는 나부터 시가 무엇인지를 좀 이해하고 독자들과 담론에 임해야 한다는 소박한 결정이었다.
그 후에 나는 성춘복 시인과 홍성유 소설가의 추천으로 한국예총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여 조경희 선생과 조우하게 되고 오학영, 김양수, 최절로, 황 명, 조병화 선생을 만나게 된다. 거기에서 약 20년간 총무부장, 사업부장, 월간 『예술세계』편집주간으로 근무하면서 박봉이지만 생활을 영위했던 것이다.
안개 속에서도 항해는 할 수 있을까
영점 몇 이하로 낮아진 시력
여전히 안개비는 뿌리고
누군가 手信號를 보낸다
퇴색된 추상화에 던지는 우리들의 초점은
희미한 기상도와 표류하는 영혼
어디쯤에서 닻을 내릴까
알 수 없군요,
이승과 저승 사이
끝없는 미궁의 물안개 속에
매우 위험한 항해를 시작하는
이 시대의 고통
찢겨나간 돛폭과 흔들리는 등대 불빛
어쩌면 젖어버린 뱃머리로
떼밀리고 있는 사랑이여
멈춰선 나침반은
아아, 방향 감각이 없는 이 바다에서
나 또는 우리들--.
나는 첫 시집을 상재하고 KBS방송문화센터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는 행운도 가졌다. 그러나 위 작품「안개꽃 시대」에서처럼 역시 인생의 혼돈에서 아직도 방황하는 문학청년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시집 10권을 상재하고 제11집을 준비하고 있다. 시인은 어찌되었거나 시를 써야만 하니까.
(1) 첫 시집 『서울허수아비의 수화』1986. 모모. 재판 : 미래문화사
바람 부는 날은 흔들리는 풀잎을 닮아 나의 가슴앓이가 시작 된다. 하늬바람에도 온몸으로 웅성대던 어릴 적 대숲으로 가보면, 게딱지 초가지붕 위로 너울대던 저녁연기는 따스한 한 폭의 정경으로 채색되어 내가 자라서도 남아있기를 염원하던 동심을 청솔밭에 묻어둔 채, 시를 쓰는 일은 조그마한 향수에서 출발한다.
불혹이 지나도록 지울 수 없는 수천의 허탈과 절망은 나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바람을 잠재우지 못하고 어두운 방황 또는 온화하지 못한 한 생명의 심층까지 죄어드는 현실에의 절규에서 빚어진 나의 시는, 더욱 시련의 몸부림 위에서 자리 잡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시는 가장 절망적인 허탈의 늪에서 마지막 건져 올린 찬란한 증언이기도 하다.
허탈은 진정한 한 생애의 비상을 알차게 다듬는 바로 그 과정이었으며, 절망은 삶의 시야에서 시행착오와 갈등을 시작하는 순수한 심상(心象)의 뜨거운 태동(胎動)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안다.(‘후기’에서)
(2) 제2시집 『안개여, 안개꽃이여』1988. 거목
안개 속에 흔들리는 조그마한 풀잎의 냄새가 그리웁다.
싱그럽지도 않을 그 이름 모를 풀잎은 언제나 파아란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을 꿈꾼다. 아니면 어둠과 맞서서 소리 없는 울음에 지쳐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어렴풋이 확인되는 것은 안개 흩날리는 언덕에서 떨리는 모르스 부호를 보내다가 간간이 한 소절씩의 신음 같은 노래만 제 목청으로 부르고 있음이다.
말없이 떠가고 있는 세월, 미처 삭이지 못한 나의 목쉰 노래들이 어쩌면 풀잎의 떨림과도 같으리라. 흐린 시야에 가늠되지 못하는 나의 젖은 마음들이 때로는 자수정처럼 빛나는 한 줄기의 시혼에 감전되어 어둠을 뚫고 구만리 장천을 치닫는 별빛으로 녹아 흐르리라.
어찌 이 세상 아픈 것들이 내 마음뿐이랴 마는 눈물 배인 몇 줄의 삶 위에 부질없이 돌팔매질만 해대는 나의 시는 아무래도 신통치 않음을 스스로 되뇌이면서 여전히 안개를 걷어내는 한 사내를 동숭동 마로니에 그늘에서 만난다.(‘시인의 말’ 중에서)
(3) 제3시집 『백지였으면 좋겠다』1990. 혜화당
지난 80년대는 내게 가장 중요한 삶의 전기가 마련되었었다. 좌절과 갈등을 한 묶음으로 엮어서 진정한 나의 목소리를 갖고자 무척이나 애를 썼다. 한편 생활의 터전을 대학로로 옮겨와서 문학과 더불어 인접 예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나의 시적 사고도 많은 변모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로 하여 상채기진 허물을 몇 껍질이고 벗어 던지면서 태어나는 진통도 맛보아야 했다.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인간 태초의 순수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숨소리, 그 아름다움을 깊게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느끼기에 이르렀음은 퍽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시인의 말’ 중에서)
(4) 제4시집 『황강』1992. 한강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는 그리움이 하나 있다. 知命에도 밤마다 꿈길로 어른대는 노래가 있다. 그것은 지금도 정갈하게 남아 있을 고향에 흠뻑 젖는 일이다. 누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즐거움이다. 하기야 분단의 저쪽에 두고 온 실향민의 고향에 미칠 수는 있을까마는 아리고 쓰라렸던 어린 시절의 애잔함은 나의 내면에서 어떻게 용틀임하엿을까. 하나 하나 더듬어서 집히는 데까지 아름다움으로 기억하리라.
세 권의 시집을 내고도 허물을 벗어 던지지 못하는 자신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말라버린 마음밭에 신선한 청량제를 뿌리리라. 촉촉이 젖은 꽃망울을 오래 간직하리라. 고향에 질펀히 누워있는 황강은 청순한 서정의 원류이다. 향수와 함께 찾아드는 황강이 언제나 내 곁에 있어서 포근하다.(1991. 11. 응시동인지『응시』 제11집, 시작노트)
(5) 제5시집 『혼자 춤추는 이방인』1994. 문단
그래도 어쩌랴, 육신과 영혼이 한꺼번에 흔들려도 시를 향한 소리는 들어야 하고 나 또한 그 소리에 맞춰 한 소절의 내 노래는 불러야 하겠으니……./ 나는 영원한 이방인(異邦人)이다. / 이제 혼자 춤추는 이방인이다. / 여름 나무는 겨울을 꿈꾸지 않듯이 보편적 존재 이상의 나를 경망되게 꿈꾸지 않는 실재의 춤을 간구하는 나는 이방인이다. / 고뇌하는 내가 아름다와 보인다 / 그 고뇌와 체념과 혹은 눈물이 어둠 속에서 혼불로 타오를 때 춤추는 나는 더욱 아름다와 보인다 / 아무리 살펴봐도 어눌한 몸짓뿐이다. / 어쨌거나 다섯 번째의 보잘 것 없는 나의 분신이다. / 아직 철이 덜든 감성으로 부르는 푸념의 노래만 솔직한 영혼의 소리를 다시 듣기 위해 내 품안을 떠나보낸다.(‘제5시집을 내면서’ 중에서)
(6) 제6시집 『시인의 사랑법』1996. 모아드림
여섯 번째 나의 분신이다.
시는 나에게서 카타르시스(淨化)이건 나르시스(자기도취)이건 두 가지 모두 수용한다.
그러나 확실한 시정신은 화해 구도의 설정에 있다. 곧 사랑을 의미한다. 사랑은 인간 최대의 진실임을 믿기 때문이다.
화해가 위기의식의 탈출이 아니라 극복을 위한 구원의 한 방식이라는 일단의 사유가 이 시집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참으로 불투명한 현실은 나에게 위기를 강요하고 있다. 한 편의 시가 이들에 대한 해법을 조화롭게 제시해 준다는 신념에 안도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나약한 내 모습이라 어눌함을 감출 수가 없다.(‘자서’ 전문)
(7) 제7시집 『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1998. 삶과꿈
나에게 배당된 시간은 얼마일까. / 남아 있는 나의 시간은 어림잡아 얼만큼의 길이일까. / 지금쯤에서 돌아본 시간은 과연 적절함과 최선으로 함축한 창조의 행보(行步)였던가. / 어쩐 일인지 시간에 대한 사유의 집착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불투명한 변주곡이기에 무엇을 속단하기 어려운 칠흑 어둠 속 어느 날 내가 홀로 서 있음을 알았다. / 시간은 빛깔이 없다. 동시에 향기도 없었다. / 그러나 시간은 인간이 소비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는 교훈을 새겼다. / 시간은 자아 성찰과 희망을 제공하는 마력에 공감한다. // 옛말 ‘무정세월 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니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도 시간의 허비를 경계하고 있다. / 존재의 확인을 통해 진실의 향방을 유추하는 일은 시간과 비례한다.(‘시인의 말’ 중에서)
(8) 제8시집 『꿈 그 행간에서』2002. 청송시원
여덟 번 째 나의 고뇌를 털어낸다.
인생은 60부터가 아니라 나의 시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한 편의 시가 나의 삶과 인생에 있어서 그 찬란한 증언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내면으로 삭여 왔다.
그러한 존재의 확인이나 성철과 더불어 현실과의 화해는 더욱 나의 시 쓰기를 곤혹스럽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고 육성으로 시를 쓸 것이다. 그것이 나의 영혼과의 교성(交聲)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해야겠다. 좀더 성숙한 언어와 가치관의 투영을 위해서 땀 흘려야겠다. 빗진 나의 인생에게 승화된 최후의 생명이 환희로 남을 것을 약속하리라.(‘시인의 말’ 전문)
(9) 제9시집 『여백시편』2006. 시원
詩가 곧 생활이라면 얼마나 端雅한 시간의 연속일까.
아무래도 꿈꾸는 이야기인 것 같다.
仙界에서나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복합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현실은 그렇게 나를 詩만 붙들고 있도록 그냥 두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살아가는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달래기도 하고 채찍도 가하는, 영원히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무엇이 항상 나의 내면에 가득하다.
그와 동행한 이래 그에게 어떤 증표라도 보일 요량으로 여덟 권의 시집을 묶고 ‘시전집’도 엮었다. 언제나 모자람이 많지만, 스스로 自慰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여기에 ‘餘白’이라는 話頭로 片片을 모은다.(‘시인의 말’ 중에서)
(10) 제10시집 『물의 언어학』2013. 시원
물의 진리는 오묘하다.
물은 생명수요, 활력의 원천이다.
물이 포괄하는 진실은
우리 인간들과 만유의 자연들에게서
생사의 한계를 결정하는 신의 선물이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서
물도 그 흐름이나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유형이 다르고
생멸(生滅)의 구분도 달라지지만,
물은 언제나 나에게 안온한 시혼을 안겨준다.
물의 탄생은 곧 나의 출생과 동일한 맥락으로 보았다.
그 행로도 나의 삶의 궤적과 비슷하다.
이러한 연유로 ‘물 詩’에 몇 년간 매달렸다.
이를 토대로 지금까지 써 모은 작품들을 모았다. 물의 진정한 의미와 시적 진실을 음미하면서 무려 90여편의 작품을 완성하고 이제 또 한 권의 시집을 상재하려 한다. 계속되는 시업(詩業)에 채찍과 함께 격려 바란다.(‘시인의 말’ 전문)
이 밖에도 시선집으로 『허물벗기 연습』(1994. 경원)과 시전집 『김송배 시전집』(2003. 청송시원) 그리고 시론집『화해의 시학』 『성찰의 언어』 『여백의 시학』『상상과 진실』 『존재의 원형』 『감응과 반응』등 6권과 시창작법 『김송배 시창작교실』 『시가 보인다, 시인이 보인다』『김송배 시감상교실』등 3권, 산문집 『시인, 대학로에 가다』 『그대 빈 가슴으로 대학로에 오라』 『시보다 어눌한 영혼은 없다』 『지성이냐 감천이냐』등이 있다.
제3시집 『백지였으면 좋겠다』가 문예진흥기금 수혜로 선정되어 지원금 100만원의 혜택을 받았으며 얼마 후 윤동주문학상 우수상도 수상하는 영광이 주어졌다.
4. 문단의 주변과 문우들의 교감
나는 한국예총에서 출발하여 한국문인협회 사무처장을 지내면서 많은 문인들과 교감했다. 어찌보면 나의 삶은 시와 더불어 행장기(行狀記)가 성립한다. 운좋게도 한국예총과 한국문협에서 호구(糊口)를 해결하면서 시업은 계속된다. 예총이나 문협은 문인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선배문인들을 만나 대화하고 문학적 의견을 교환할 수 있어서 나의 문학과 인생은 더욱 정진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문단과 문학의 업적이 인정되어 제6회 윤동주문학상(1990), 문화부장관 표창(1990), 제1회 탐미문학상(1995), 제23회 평화문학상(2003), 제11회 영랑문학대상(2006), 제27회 조연현문학상(2008), 제1회 한민족문학대상(2010)과 제14회 한국글사랑문학대상(2014) 등을 수상하는 영광도 따라주었다.
출근하는 날부터
거기에 묶여야 했다
자유인의 몇 마디 갈망들이
정리된 기호 속에 갇힌 채
더욱 선명한 모습으로
명상에 잠겨야 했다
환영(幻影)이었다
어느 날 사직서를 내고
온몸 얽어매어 부자유스럽던
진실을 해체했다
양쪽으로 묶여 있던 그 자리에는
침묵의 새 한 마리 문득
창공으로 비상하고 있었다.
또 한번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작품 「( )B에 관하여」에서와 같이 문협 사무처장직을 사임했다. 이유는 S이사장과의 불화였다. 괴팍스런 성격은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를 주었다. 훌훌 벗어던지고 고향 해인사를 다시 찾아갔다. 지독한 비염의 치료와 함께 잠시 무엇인가 정리를 해야겠다는 심사였다.
이제 잡다했던 공사직에서 물러나 시창작에 몰두하면서 시학의 근원에 접근하고 탐구하는 일만이 나의 여생을 더욱 알차게 그리고 감미롭게 장식하는 보람이 아닌가 하는 좀 엉뚱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절집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의 문구 ‘靜聽魚讀月(정청어독월)’이라는 싯귀(詩句)를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아아, ‘고기가 달을 읽고 있는 소리가 고요한 이 밤에 들린다’.는 한 줄의 싯귀는 누군가 대시인인 고승이 작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주일이 지나자 매일 고통스럽던 비염도 완쾌가 될 무렵 서울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급상경 요망이었다. 당시 김년균 시인이 문협 이사장을 출마하는데 나를 시분과회장으로 동반 출마하자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몇 번을 사양하다가 수락하고 오로지 S이사장에게 절묘한 패배를 안기고 싶어 열심히 운둥을 한 결과 승리했다.
이 때나는 연전에 KBS에서 강의했던 경험으로 청송시창작아카데미를 개설하고 후학 양성에 몰두하였다. 무려 연인원 300여명이 수료하고 수십 명이 등단하는 영광으로 시창작 강의에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문학단체에서 초청 강의가 쇄도하였다.
김년균 이사장 체제에서 시분과회장은 많은 시인들과 교감하게 되고 각종 행사와 문학상심사 그리고 세미나 주제 발표 등 문협에서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정종명 체제에서는 부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문협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특이한 일은 시인들이 시집의 해설과 서평을 부탁해서 지금까지 300 여명과 상호 작품으로의 교감은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시인이 해설을 집필한 경우는 최고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이 사람을 가르치고 있다
사람은 물보다 못한가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헐벗은 자에게도
가장 더러운 곳에서도
가장 비굴한 처신에도
생명의 신비를 함께 하는 물
물을 깨우친 사람이 물을 따라 간다
이 지상 닿는 어느 곳에서나
분명히 물보다 사람은 어리석다.
--아아, 물이여, 老子여
여과(濾過)할 수 없는 노래여.
나는 지금 ‘노자의 물’에 심취해 있다. 이 작품 「다시 노자의 물」에서처럼 ‘물의 언어학’ 탐구에 몰두하고 있다. 제10시집에서 91편을 창작했는데도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물과 우리 인간의 이야기. 참으로 생명과 연관된 것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어마하게 큰 명제(命題)가 다양한 목소리로 진실을 투영하고 있어서 그동안 고뇌해온 그 고통을 치유하는 행운을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물에 관한 탐구는 이것으로 마무리 된 것이 아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친자연적으로 접근해서 우리 인간들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서 숭엄한 상관성의 해법을 탐색해 나갈 것이다.(시론 「물의 언어학」중에서)’
나의 문학에 대한 평가는 이미 발간된 『김송배의 시세계』(2003. 청송시원)에서 윤강로, 이수화, 윤석산, 원형갑, 김양수, 유창근, 차한수, 채수영, 성춘복, 허형만, 조의홍, 구중회, 이명수, 이기철, 박명용, 제해만, 장 호, 윤병로, 김종주, 주경림, 육근웅, 이기애, 이시연, 유한근, 장백일, 현 희, 이상호, 이 탄, 김수복, 홍윤기 선생 등이 작품 해설을 통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또한 문인들과의 교감을 「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들」이란 제목으로 현재 60명의 문인들을 매월『문학공간』에 최광호 주간의 요청에 따라 연재하고 있다. 아마도 100회를 채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나이도 들만큼 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패기와 열정으로 나의 문학은 새로운 시적 지평의 창조를 위해서 부단하게 체험하고 사유하고 창작할 것이다. 문학과 문단과 그리고 나의 삶이 그 위의(威儀)와 본령(本領)을 성취할 때 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평소에 소망하던 한국문학과 문단 발전의 총아(寵兒)로서 우뚝 설 것이다. (『한국시학』 2014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