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동행'에 대한 원고 청탁을 드리면, "예시를 먼저 보여라" 라는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저도 이번 주말에는 밀린 숙제가 있어서 이번 주말 넘겨서야 글 잡으러 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순서로 진행하려고 하는데요. 이렇게 잡아보시면 어떨까요?
1. 우선 아침에 눈뜨면 향기 짙은 커피를 내리고, 우유를 1/3쯤 넣어 들고 부엌에 있는 식탁이나 햇빛이 비치는 창가에 앉습니다.
(오후 쯤 경산에 있는 근사한 카페에 앉아서 생각하려면...... 명예교수회에서 이 방면 정보를 드릴 수 있는 확실한 분이 계십니다.
2. 휴대폰을 가지고 녹음할 준비를 합니다.( 휴대폰으로 말한 것이 글짜가 되는 시스템을 활용해도 좋겠습니다.)
3. 사제 동행으로 떠오르는 분을 생각하고 첫 말을 생각합니다. 그분과 어느 장면(기억)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그분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분은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은 어떤 영향을 미치셨는지(그분을 거울로 내 인생 보기, 이외 사회나 학계에 미친 영향도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그리고 그분께 지금 하시고 싶은 말씀은 ......
4. 논문과 달리 ..... 이런 글은 한단락만 꺼내 놓으면(녹음해 놓으면) 그리고 컴퓨터에 앉으시면, 일사천리로 나가지 싶습니다.
아래 글은 이 특집에 맞는 글이 아닙니다. 전에 쓴 수필인데, 제 선생님을 이야기 한 것이라 한번 올려 봅니다. 교수님들께서도 같은 주제로 예전에 쓰신 글이 있으면 먼저 게시하셔서 함께 나누어 보시면 어떨까요? 그러면서 이번 글을 더 세세히 쓸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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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바위
김 정 숙
조종성 선생님은 내 인생항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다. 어떤 이들은 인생이란 정해진 팔자여서 그분이 안 계셨으면 또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해주었을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떻든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나는 그분 덕택으로 ‘중학교’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었다. 즉 나도 중학교를 진학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오늘까지 학교에 다니고 있다. 선생님은 2년 전 대장암으로 가셨다.
어젯밤에도 사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갑상선암으로 수술하고 나와서 항암치료 과정에 있는 내게 사모님은 고비마다 참 세세하게도 찾아서 전화하셨다. 이번 고성능요오드방사성 치료를 들어갈 때에는 치료를 받고 나오면 너무 지치니까 한 열흘쯤 지난 후에 전화하마고 하셨는데 너무 궁금해서 했노라고 하셨다. 나도 어제는 마침 초복이라 전화를 드려야지 하고 벼르고 있던 참이라 무척 반가웠다.
“김 박사, 힘들지는 않았어?”
선생님과 사모님, 두 분은 고향 분들이라 그런지, 평생을 같이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선생님께서 살아생전에 하도 나를 불러서 그런지 사모님이 김 박사라고 발음하는 소리는 선생님이 부르시는 소리와 정말로 같다. 음성 색깔이라든지 그 길이, 높낮이까지 꼭 같다.
내가 암 조직 검사를 받은 다음다음 날이 선생님 제사였다. 그때는 연휴여서 올라갈 수도 있었는데, 왜 나는 그렇게 철이 없었는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자면 선생님 상 앞에서 울까봐 두려워서였다고나 할까? 사모님께 전화로 그 전날 조직을 떼어 암검사를 신청해 놓았는 데다, 서울 가기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전화 드린다고 했었다. 사모님은 내가 암조직 검사를 받는 중임을 알린 첫 사람이 되었다. 말하다 보니 서러워진 나에게 사모님은 괜찮을 것이라며 오히려 위로해 주셨다.
조직검사 결과를 보고 온 날 사모님이 전화를 하셨다. 내가 조 선생님을 만난 지 45년 만에 사모님이 전화하시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는 수술 날짜 잡히는 날, 병원을 옮기는 날, 한 번도 미처 내가 먼저 연락드리지 못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모님은 병자성사를 준비해 주셨고, 퇴원한 뒤에는 집에서 입을 편한 옷, 음식을 해가지고 집으로 찾아오셨다.
사모님을 통하여 나는 아주 조금씩 선생님의 투병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또 내가 본 선생님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모님을 통해 선생님이 사람으로 산 일상을 보게 되었다. 전라도에 사시는 친척 길흉사에 두 분이 가시면 차비가 두 배로 드니, 한 분씩만 다녀야 했다는 생활...... 당신 자신은 단 한 번도 내게 보이지 않으셨던 부분이다.
선생님은 내가 선생님들은 화장실도 가지 않는 줄 알았던 초등학교 시절에 만났기 때문에 내게는 언제나 선생님이시기만 했다. 대학시절에도 길을 같이 갈 때면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 손을 잡고 가듯이 그렇게 걸어가셨다. 청바지를 입고 인사드리러 가면 대학교수 옷차림이 그게 무어냐고 꾸지람하셨다. 그러는 중에 그분은 늙어가고 나는 성장해 있었는데.
통화 중에 내가, “사모님이 저를 처음 보신 날 하신 말씀 기억나셔요?”라고 여쭈었더니, 하도 오래되어서 잘 모르겠다고 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한 후 선생님은 고향에서 결혼을 하고 사모님과 올라오셨다. 중학교 시절에는 매월 성적표가 나오면 그것을 들고 선생님을 찾아뵈었기 때문에 그날 나는 댁에서 새댁인 사모님을 뵐 수 있었다. 사모님은 그날 나에게 이렇게 인사하셨다.
“결혼식을 마치고 서울로 온 날 선생님이 느닷없이, ‘내게는 크으은 딸이 하나 있다.’고 하셔서 놀랐는데, 그 아이가 너로구나.”
사모님은 내 말에 기억난다고 하시면서 말을 이으셨다. 선생님은 나를 두고 동료들에게 이런 제자 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늘 큰소리 치셨단다. 그리고 일곱 명이 항상 함께 찾아뵙는 남자 제자팀이 있는데 그 제자들을 두고, “이런 제자들 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며 늘 자랑하셨단다.
그래서 그런지 장례식날 선생님의 친구분들이 그 김 박사 왔느냐고 사모님께 물으셨단다.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어서 그런다고. 그러나 정작 그 김 박사는 선생님 장례식 때에는 미국에 있어서 몰랐고, 기제사 때는 막 귀국해서 경황이 없다는 이유로 참석을 못했고, 두 번째 제사는 올해였다.
오늘 새벽 눈을 떴는데, 선생님은 결국 당신의 암 투병 경험을 가지고 오늘 나를 세우고 싶어 하시는구나 하는 느낌이 선명히 다가왔다. 사모님을 통하여.
나는 왜 선생님도 한 명의 생활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내야 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나이 오십이 넘었고 대학교수인 내가 그 긴 세월 동안 왜 선생님 앞에서는 언제나 초등학생 노릇밖에 못했을까? 처음 만났을 때는 거대한 바위이던 선생님이 세월과 함께 한알 한알 조각나고 있을 때 그 제자가 아는 척을 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위로가 되셨을까? 선생님은 바위이며 모래였다.(제21회 계산 에세이문예 분격수필신인상 당선작)
출처 : 계간 『에세이문예』 2009년 겨울호, 109-1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