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에서 문안 합니다.
매월 첫째주 화요일과 셋째주 화요일은 구조분석 방법론을
함께 연구 할수 있도록 하신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목사님들께서 동참하시여 성서의 깊은 성찰이 있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많은 은혜 받으시고 하나님만 자랑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아주 좋아 하세요.
주제절: 외울 말씀 15장 1-2절이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울지니라
로마서 15장 1-7절 【믿음이 약한 자에 대한 강한 자의 배려와 덕을 세움】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15:1 우리 강한 자들이 마땅히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만을 기쁘게 해서는 안 된다.
직역: 그래서 연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을 우리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15:1 Ὀφείλομεν δὲ ἡμεῖς
마땅히해야한다 그래서 우리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복)
οἱ δυνατοὶ τὰ ἀσθενήματα τῶν ἀδυνάτων βαστάζειν
그 능력있는사람들이 그 약점들을 그 연약한 사람들의 담당하는것을 (부정사: 현재 능동태)
καὶ μὴ ἑαυτοῖς ἀρέσκειν.
그리고 말도록 우리자신에게 기쁘게하는 것을 (부정사: 현재 능동태)
주해
▣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 14장에 이어 여전히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과 약한 그리스도인 간의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은 여기서 '우리'란 말을 함으로써 자신 역시 '믿음이 강한 자'임을 자인한다. 그리고 로마 교회 구성원들 중 다수였던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 더욱더 책임 있는 행동을 할 것을 요청한다. 한편 복수로 사용된 '강한 자'(호이 뒤나토이)라는 단어는 '능력 있는 자들'이란 뜻을 지니며, 이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자를 가리키는 '연약한 자'(아뒤나토이)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이채롭다. 이렇게 대조적인 표현을 통해 바울은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킨 후 '마땅히' 강한 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강변한다. 여기서 '마땅히'(오페일로)는 원래 '빚지다'라는 뜻으로서 단순한 권고 이상으로 반드시 해야 할 의무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또한 '약점'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아스데네마타'는 복수형으로 쓰여 여러 가지 연약함을 뜻하는데,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측면 양쪽으로 다 사용된다. 그리고 '담당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스타제인'은 무거운 것을 '지다'라는 뜻이다. 이는 십자가를 '지다'라는 표현에도 사용되었듯이 철저한 자기희생을 암시한다. 여기서 특별히 이 용어가 사용된 것은 믿음이 강한 자들은 어떤 행위를 거리끼지 않고 할 수 있지만 약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이해 못하며 그때에 강한 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자제함으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양보의 정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 믿음이 강한 자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행동은 결코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미 본서(A.D. 57년경) 이전에 쓰여진 고린도전서에서도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면서 자기희생에 있어서도 자신이 모범이 됨을 천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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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15:2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15:2 우리 각자가 이웃을 기쁘게 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직역: 우리 각사람은 이웃에게 기쁘게 하라 선을 위하여 덕을 세움으로 하라
15:2 ἕκαστος ἡμῶν τῷ πλησίον ἀρεσκέτω
각사람은 우리의 그 이웃에게 기쁘게 하라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3단)
εἰς τὸ ἀγαθὸν πρὸς οἰκοδομήν·
으로 그 선한 일 위하여 덕을 세움
주해
▣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 그리스도인의 가장 분명한 행동 원리인 사랑이 외부적으로 실천될 때 바로 이렇게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결과를 이룬다. 그러나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은 이웃의 바라는 것을 모두 들어 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는 본절의 문맥이 말하는 바와 같이 강한 자가 자신의 행위의 자유를 절제하여 약한 그리스도인들의 거리낌이나 유혹을 제거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 여기서 '선'은 '아가도스'로서 '유익'의 의미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이는 믿음이 강한 자의 행위의 내적 ․ 궁극적 목적을 암시하는 말로서 그 이웃들의 선을 함양하는 것에서 절대적으로 벗어나서는 안 됨을 암시한다. 한편 '덕을 세우다'는 '집을 세우다'란 의미를 갖는 단어로서 믿음이 강한 자의 행위의 외적 ․ 직접적 목적을 보여준다. 즉 믿음이 강한 자의 이웃에 대한 배려는 직접적으로 이웃의 신앙 성숙을 가져옴을 암시한다. 또 빌 2:3,4의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 주님의 기쁨이 된다는 말씀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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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15: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d)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한 것과 같습니다. (d. 시69:9)
15:3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아니하셨으니, 기록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습니다." 라고 하였다.
직역: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그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것이 기록되어져 왔던것 같이 주를 비난하는 비난들이 내 위로 임하였다.
15:3 καὶ γὰρ ὁ Χριστὸς οὐχ ἑαυτῷ ἤρεσεν,
그리고 왜냐하면 그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자신에게 기쁘게하였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 3단)
ἀλλὰ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시편 69편 9절 인용구절]
다만 같이 그것이기록되어져왔다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οἱ ὀνειδισμοὶ τῶν ὀνειδιζόντων σε
그 비난들이 그 비난하는 너(주)를 (분사: 현재 능동태 속격 복수)
ἐπέπεσαν ἐπ᾽ ἐμέ.
임하였다 위로 내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 3복)
주해
▣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 개역 성경은 생략하지만 헬라어 본문에 나오는 '가르'란 접속사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으로 본절이 2절의 이유를 설명해 줌을 분명히 한다. 즉 형제를 기쁘게 하는 일에 대해 바울 역시 자신이 모범이 된다고 말하였지만 그러한 바울도 그리스도의 본을 절대로 앞설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되시는 분임에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연약함을 체험하셨고, 고난의 십자가를 감당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늘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는데 그것은 또한 우리 인간들을 위한 일이었다. 이처럼 본문은 자신의 기쁨이나 유익에는 전혀 관심 없는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를 내세워 성도의 삶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로 인하여 고난 받음을 묘사한 시 69:9의 인용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구약에서의 내용을 메시야가 하나님께 충실한 탓으로 비난과 수모를 당하셨다는 내용으로 보다 확대하여 해석하고 있다. 이렇듯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기쁨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그에게 맡겨진 인간들을 기쁘게 하시기 위하여 핍박과 고난을 감수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의 모욕을 참으며 고난을 감수하셨듯이 믿음이 강한 자들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그러한 고난을 받아야 한다. 하물며 믿음 약한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는 일이야 더욱더 쉬운 일이다. 하지만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수모와 고통을 믿음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에게 받을 수 있는 비난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바울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모범적인 행위를 들어 강한 자들을 권면하는 것은 강한 자들도 역시 그리스도의 모범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보고 약한 자들에 대해 교만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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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를 교훈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인내와 성경의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직역: 무슨일이든지 전에 기록 되어졌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하여 그 교훈들을 기록하였다. 성경들을 통하여 위로로 우리가 그 소망을 가지게 된다면 가지게 하기 위함이라
15:4 ὅσα γὰρ προεγράφη,
무슨일이든지 왜냐하면 전에 기록되어졌다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단)
εἰς τὴν ἡμετέραν διδασκαλίαν ἐγράφη,
위하여 그 우리의 교훈을 기록되었다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단)
ἵνα διὰ τῆς ὑπομονῆς
위함이라 통하여 그 인내로
καὶ διὰ τῆς παρακλήσεως τῶν γραφῶν
또한 통하여 그 위로로 그 성경들의
τὴν ἐλπίδα ἔχωμεν.
그 소망을 우리가 가지면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1복)
주해
▣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 성도들의 생활의 가장 분명한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기록된 구약을 앞절에서 인용한 바울은 이제 범위를 보다 넓혀 구약 성경 전체로 자신의 주장을 확증한다. 여기서 '전에 기록한바'란 결코 신약 시대의 성도들과도 무관할 수 없는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바울은 앞에서 인용한 시 69:9의 적용이 합당하다는 논거를 성경의 기록 목적으로 증거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표현을 함에 있어 본서 전체의 중요한 경향인 구약의 인용들 모두를 염두에 둔 듯하다. 이처럼 바울은 본서에서 구약의 기록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구속사의 점진적인 전개 과정에서 당시의 시대 상황에 주어지는 바와 연결됨을 명쾌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이 부분은 앞선 문맥에 이어 인내와 더불어 성경을 상고할 때 얻는 유익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데니는 이 부분을 '인내와 성경에 의해 주어진 위로를 통해 우리가 소망을 가질수 있다'라고 번역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가져야 할 소망은 늘 말씀을 상고함으로 얻는 위로를 통해 삶의 모든 고난을 견디면서 묵묵히 전진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인내는 성경의 안위를 통해 소망을 가지게 하는 실제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역으로 인내할 수 있어야 지속적인 성경의 안위를 얻을 수 있기도 하다. 한편 여기서 '인내'(휘포모네)는 고난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감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역경을 헤치고 선을 이루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하늘에 소망을 둔 성도에게는 반드시 이러한 인내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안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시스'는 '탄원', '권고'의 뜻으로도 폭넓게 쓰이지만 본절과 같이 '위로', '격려'의 뜻이 더 일반적이다. 성경은 이러한 '위로'와 '격려'의 약속들로 가득차 있으므로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그것 자체가 이미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내와 성경의 안위는 특히 연약한 자들에게 더욱 필요하다. 그들의 연약한 믿음이 성경의 위로를 받고 인내함으로 소망을 가지게 될 때 더욱 강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강한 자들은 연약한 자들이 그러한 경지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어야만 한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다음 절들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결과들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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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15:5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15: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서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같은 마음을 품게 하셔서,
직역: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 서로 생각하는 가운데 같은 것을 주시기를 원한다.
15:5 ὁ δὲ θεὸς τῆς ὑπομονῆς καὶ τῆς παρακλήσεως
그 이제 하나님이 그 인내 와 그 위로의
δῴη ὑμῖν τὸ αὐτὸ
주시기를원한다 너희에게 그 같은것을 (동사: 희구법 과거 능동태 3단)
φρονεῖν ἐν ἀλλήλοις κατὰ Χριστὸν Ἰησοῦν,
생각하는것을 가운데 서로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부정사: 현재 능동태)
주해
▣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 이 구절은 앞선 3,4절을 적절하게 요약한 표현이다. 앞선 부분에서는 인내와 안위가 성경의 상고를 통해 가능한 것으로 밝히고 있지만 여기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점에서 하나님이 인내와 안위의 근원이심을 밝히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삶 속에서 인내와 위로를 실천하며 정진할 것을 요구하심을 보여 준다. 그러한 성도의 행위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본받아'에 해당하는 헬라어에는 '따라'란 의미를 지니는 '카타'란 전치사가 사용된다. 이는 성도가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여기고 그분의 명령이나 그분의 자취만을 좇아야 함을 보여 준다. 이처럼 성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모든 면에서 본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특히 본절에서 바울이 관심을 가지는 면은 빌립보서 2장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찬송시 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 즉 성도는 본래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낮추어 사람의 모양을 입었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자신의 삶도 믿음이 강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추며 믿음이 약한 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에 성도는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
▣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 신자들 각자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해진다면 신자들 상호 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자로서 이처럼 일치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한편 '주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에'는 '디도미' 동사의 희구법으로서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해서 미래에 그들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5: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15:6 한 마음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15: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를 원한다.
직역: 한마음으로, 한입으로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스럽게 다면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
15:6 ἵνα ὁμοθυμαδὸν ἐν ἑνὶ στόματι δοξάζητε τὸν θεὸν
위함이라 한 마음으로 으로 한 입 너희가영광스럽게하면 그 하나님을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2복)
καὶ πατέρα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그리고 아버지 그 주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
주해
▣ 한 마음과 한 입으로. - 성도 간에 내적인 신앙이 동질성을 가지며 동시에 외적인 신앙 고백에 있어서도 일치점을 가짐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연합을 묘사한다. 한 분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한 성도들의 찬양과 영광 돌리는 행위들은 사실상 이러한 전제 조건 하에서만 진정한 의의를 가진다.
▣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 이 부분은 성도의 삶의 지향점이 되어야 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특징적인 관계적 묘사(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유대교 묵시 문학에서 그 풍부한 사상 전개를 볼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이위일체론적인 사상은 신약 성경에 있어서도 바울뿐 아니라 요한이나 베드로의 글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초대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이위일체론(二位一體論)을 근간으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사도들이 그 성령을 하나님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여러 증거들을 수납하고 정리하여 삼위일체론을 정립 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초대 교회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에 돌리는 영광을 인간 구원의 실현자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에게도 돌려져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편 '영광을 돌리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독사제테'는 현재시제의 가정법으로서 '계속 영광을 돌리게'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문맥이 말하는 바와 같이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들을 대신 지며 서로 한 마음과 한 몸으로 일치된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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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아들여라.
직역: 너희는 서로 가까이 받아드리라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이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너희를 가까이 받아들였다.
15:7 Διὸ προσλαμβάνεσθε ἀλλήλους,
왜냐하면 너희는 가까이받아들이라 서로를 (동사: 명령법 현재 중간태 2복)
καθὼς καὶ ὁ Χριστὸς προσελάβετο ὑμᾶς
이같이 역시 그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받아들였다 너희를 (동사: 직설법 현재 중간태 2복)
εἰς δόξαν τοῦ θεοῦ.
위하여 영광을 그 하나님의
주해
▣ 이러므로. - '디오'(왜냐하면)라는 그리 흔치 않은 접속사를 사용하여 바울은 지금까지 14장에서부터 논의된 로마 교회의 문제, 즉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의 조화 문제에 대해 요약적 진술을 제시한 후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려 한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권면했던 바울은(6절) 그러한 행위의 모범 역시 그리스도에게서 볼 수 있음을 천명한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 모두를 포함함) 받아 구원으로 인도하신 행위가 인간 구원을 위한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신 행위라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우리를'(헤마스) 대신에 '너희를'(휘마스)이라는 독법을 취하는 사본들도 상당수 있다(시내, 알렉산드리아, 에브라임, 바질 사본 등). 또한 이는 하반절에 나오는 '너희도 서로'란 표현과 조화를 이룬다는 측면에 있어 서도 문맥상 후자가 적합하나 전자를 취하는 독법도(바티칸, 베자 사본) 의미는 하나도 다르지 않다. 한편 '받으라'에 해당하는 원어 '프로스람바네스데'나 '받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셀라베토는 모두 다 롬 14:1에서 바울이 이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할 때 사용했던 '프로스람바노'의 활용으로 '가까이로'(프로스)와 '취하다'(람바노)의 합성어이며, '동질성을 인정하고 구성원의 하나로 여김'이란 뜻으로 그 의미 역시 동일하다. 이렇게 바울이 동일한 단어를 시작과 끝에 위치시키는 것은 바로 강조점이 거기에 있음을 명시하기 위한 의도적 배려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를 막론하고 모두를 받으셨기에 그들도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당위성이 성립되는 것이다.
로마서 15장 8-13절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에 대한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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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견고하게 하시고
15:8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e)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증하시고 (e. 유대 사람을 가리킴)
15:8 내가 말하는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자의 종이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증하시고
직역:
15:8 λέγω γὰρ Χριστὸν διάκονον
나는(항상)말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사역자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지속시제
γεγενῆσθαι περιτομῆς ὑπὲρ ἀληθείας θεοῦ,
되어져왔다 할례의 위하여 진리를 하나님의 (부정사: 완료 수동태)
εἰς τὸ βεβαιῶσαι τὰς ἐπαγγελίας τῶν πατέρων,
위하여 그 확증케하기위하여 그 약속들을 그 조상들의 (부정사: 과거 능동태 목적격)
주해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간의 문제에 대해 길게 논의한 바울은 이제부터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문제를 다룬다. 추측컨대 이 문제는 앞에서 논의한 문제보다는 덜 심각했던 것으로 보이지만(8-13절까지로 분량이 적음) 당시 로마 교회의 구성원이나 상황을 알 수 있게 한다. 본서 서론 참조. 즉 바울이 서신서에서 다루는 문제는 늘 그 교회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명제가 여기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나는 유대인이 곧 앞에서 논의한 연약한 자요 이방인이 강한 자라고 하거나 그 반대라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한 가지 경향성을 확대 해석한 것으로 반드시 그렇다고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인이었으나 믿음이 강한 자였고 이와 같은 유대인이 결코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내가 말하노니. - 아마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하에서 주장하는 바에 관심을 집중시키며 강조적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 '하나님의 진실하심'(알레데이아스 데우)이란 하나님께서 한번 주신 약속을 결코 변개치 않음을 가리킨다. 또한 이어지는 '할례'라는 언급으로 보아서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과거 족장들에게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약속으로서 할례를 명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표현의 뜻은 '할례 받은 사람들', 즉 '유대인'들을 섬기는 '종'이 되었다는 뜻이다(공동번역).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 태어난 유대인으로서 그의 생애 동안 유대인의 규례를 모두 준수하셨다. 또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 하였노라'고 하심으로써 일차적인 사역의 대상이 유대인임을 분명히 하셨다. 물론 예수께서 '수종자'(디아코노스, '종'이라는 번역이 더 좋음)가 되신 것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염두에 둔 구속 행위였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은 유대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 획기적 사건이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 한마디로 이 구절은 '그리스도에서 유대인을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후손을 허락하셔서 모든 족속들의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은 그의 아들 이삭과 야곱, 요셉에게 계속되어 결국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다. 한편 '견고케 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베바이오사이'는 '약속'이라는 단어와 결부되어 '성취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본절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가 이스라엘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고 이스라엘(유대인)은 그 순서상 먼저일 뿐 반드시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역사가 뒤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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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5:9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f)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께 찬양을 드리며, 주의 이름을 찬미합니다"한 것과 같습니다. (f. 삼하22:50)
15:9 이방인들로 하여금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 기록된 것과 같으니, "이러므로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하였고,
직역:
15:9 τὰ δὲ ἔθνη ὑπὲρ ἐλέους δοξάσαι τὸν θεόν,
그 그리고 이방인들을 위하여 긍휼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 그 하나님을 (부정사: 과거 능동태 목적격)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삼하 22:50절 인용)
같이 기록되어져 있었던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διὰ τοῦτο ἐξομολογήσομαί σοι ἐν ἔθνεσιν
때문에 이 철저히 고백할 것이다. 당신 가운데 이방사람들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 1단)
καὶ τῷ ὀνόματί σου ψαλῶ.
그리고 그 이름에 당신의 찬송할것이다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1단)
주해
▣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의 언약은 본래 유대인들을 통로로 하여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나타났다. 이것이 이방인들이 구속사의 측면에 있어서 구약 시대에는 '대부분' 국외자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참여자로서의 '가능성이 확대된' 사실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방인의 구원 사상이 신약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이미 언급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 에도 이미 나타나며 본절에서 바울이 인용하는 구절 외에도 구약의 여러 구절에 반영되어 있다.
▣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 본절부터 12절까지에서 나타나는 인용구 네 개는 8,9상반절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사상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 인용이다. 먼저 인용된 것은 시 18:49로 다윗이 이방 정복 후의 승리를 감사하며 부른 노래이다. 다윗이 이방 민족을 정복하고 그들을 복종케 하여 이스라엘로 영입한 것같이(시 18:43-47) 그리스도 역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정복해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셨다. 따라서 바울 역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가운데로 포함됨으로 인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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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5:10 또 g) "이방 사람들아, 주의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여라" 하였으며 (g. 신32:43)
15:10 또 "이방인들아, 주님의 백성과 함께 기뻐하여라." 하였으며,
직역:
15:10 καὶ πάλιν λέγει· (신 32:43절 인용)
또 다시 그가 말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εὐφράνθητε, ἔθνη,
즐겁게 되어라 이방사람들아 (동사: 명령법 과거 수동태 2복)
μετὰ τοῦ λαοῦ αὐτοῦ.
함께 그 백성과 그의
주해
▣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 신 32:43의 인용으로 구약 본문에서 이 구절은 모세가 이 지상의 삶을 마무리하기 전에 부른 마지막 노래의 한 구절이다. 이것의 문맥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하나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는 장차 이방인들의 회심이 있을 것을 의미하는 예언인데 이것이 이제 성취되었다고 바울은 주장한다. 구약 시대의 언약에 이미 나타났던 이방의 구원이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바울은 본문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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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5:11 또 h) "모든 이방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였습니다. (h. 시117:1)
15:11 또 "모든 이방인들아, 주님을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분을 찬송하여라." 하였다.
직역:
15:11 καὶ πάλιν·
또 다시
αἰνεῖτε, πάντα τὰ ἔθνη τὸν κύριον,
찬양하라 모든 그 이방사람들아 그 주님께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καὶ ἐπαινεσάτωσαν αὐτὸν πάντες οἱ λαοί.
또 온전히 찬양하라 그를 모든 그 백성들이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3복)
주해
▣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되. - 시 117:1의 인용으로 내용적으로는 10절과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10절에는 '주의 백성과 함께'라는 부사구가 '열방'의 '독자성'을 제한했지만 본절에서는 '열방'이 오히려 찬양의 '주체'가 된 듯한 인상을 준다. 바울은 이렇게 보다 진전된 단계의 인용을 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차별성을 없애려 하고 있다. 한편 '모든 열방들'(판타 타 에드네)이나 '모든 백성들'(판테스 호이 라오이)은 대구적인 표현으로서 모두 이방을 가리킨다. 이방들도 이제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이스라엘에 베푸셨던 여호와의 인자하심(헤세드)을 자신들에게도 베풀어 주신데 대해 만민에게 동일하게 긍휼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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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5:12 그리고 이사야가 말하기를 i)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방 사람을 다스릴 이가 일어날 것이니, 이방 사람은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이다." 하였습니다. (i. 사11:10(70인역))
15:12 그리고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새의 뿌리, 곧 이방인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분이 있을 것이니, 이방인들이 그분께 소망을 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직역:
15:12 καὶ πάλιν Ἠσαΐας λέγει·
그리고 다시 이사야가 말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ἔσται ἡ ῥίζα τοῦ Ἰεσσαὶ
있을 것이다 그 뿌리가 그 이새의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3단)
καὶ ὁ ἀνιστάμενος ἄρχειν ἐθνῶν, (부정사: 현재 능동태)
곧 그(분) 다시 일어나는 다스리는 것 이방사람들을 (분사: 현재 중간태 주격 단수)
ἐπ᾽ αὐτῷ ἔθνη ἐλπιοῦσιν.
위에 그분 이방사람들 소망을 둘 것이다.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복)
주해
▣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 9절부터 계속된 4번의 구약 인용 가운데 마지막 인용으로 사 11:10의 말씀이다. 지금까지 바울은 모세와 다윗의 글을 인용하였으나 여기서는 메시야의 출현과 사역에 대해 많은 예언을 남겼던 이사야의 글을 인용함으로 열방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긍휼을 입게 되는 근본적 원인을 밝혀주는 논리적 귀결로 삼고 있다. 즉 본문은 열방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를 묘사함에 있어 인용된 구절이 ① '이새의 뿌리', ②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라고 기록된 데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①은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야가 태어나실 것이 강조된바 소위 나단의 예언과 연관된 유대적 배경의 뉘앙스가 강하다. ②는 그 메시야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열방을 통치하시기 위해 오신 것을 나타냄으로써 세계적 배경의 뉘앙스를 가진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즉 온 인류의 구속을 이루신 분이다. 따라서 이 그리스도에 대해 열방이 소망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소망을 두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피우신' 은 '엘피조' 동사의 미래형이다. 이것은 70인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이에 상응하는 단어로 '다라쉬' 동사가 사용되어 '돌아오다', '찾다'라는 뜻을 가진다. 따라서 히브리어 본문과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역 사이에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70인역 번역자들이 본문의 의미에 열방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확대 번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울 역시 이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적어도 히브리어 본문과의 차이를 간파하고 70인역 저자들의 의도를 수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이미 형성된 구약의 본문도 새로운 계시의 빛 아래서 변형하여 인용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본절도 그러한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편 우주를 회복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이방인과 유대인, 즉 모든 인류는 참 소망의 원천을 발견하리라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의 이 신학적 강조점은 다음 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관한 수식어구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13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믿음 안에서 모든 기쁨과 평강을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한다.
직역:
15:13 Ὁ δὲ θεὸς τῆς ἐλπίδος πληρώσαι ὑμᾶς
그 이제 하나님께서 그 소망의 충만케 하기를 원한다 너희를 (동사: 희구법 과거 능동태 3단)
πάσης χαρᾶς καὶ εἰρήνης ἐν τῷ πιστεύειν,
모든 기쁨 과 평안의 안에서 그 믿음(확신) (부정사: 현재 능동태 여격)
εἰς τὸ περισσεύειν ὑμᾶς
위하여 그 넘치기 너희를 (부정사: 현재 능동태 여격)
ἐν τῇ ἐλπίδι ἐν δυνάμει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으로 그 소망 안에서 능력 영의 거록한
주해
▣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본절은 마치 바울이 지금까지의 교훈을 종결하며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축도하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본절은 이제부터 전개할' 내용이 바울의 전도에 대한 근황이나 형제들에 대한 문안 등인 점을 고려한다면 실상 실생활에 관한 교훈의 끝맺음이기도 하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과 성령님, 그리고 전절의 그리스도까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언급함으로써 실천적인 교훈의 종결의 뉘앙스를 분명히 한다. 한편 '기쁨과 평강'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믿음 안에서 생활하는 신자들이 맛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이것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필수적인 덕목으로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진작시킨다. 또한 그 소망은 장차 올 천국의 축복된 상태를 이 땅에서 예기적으로 맛보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능력이다. 이러한 사실은 여기에 사용된 전치사 '엔'이 '~안에' 혹은 '~을 통하여'로도 번역된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즉 성도는 성령의 능력 안에 거하며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궁극적인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로마서 15장 14-21절 【이방인 사도로서 바울의 직무】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5: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1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 마음에 선함이 가득하고, 온갖 지식이 넘쳐서 서로 권면할 능력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15:14 나의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으로 충만하므로 능히 서로를 권고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직역:
15:14 Πέπεισμαι δέ, ἀδελφοί μου,
내가 확신한다 그러나 형제들아 내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1단)
καὶ αὐτὸς ἐγὼ περὶ ὑμῶν
역시 나자신도 나는 관하여 너희에
ὅτι καὶ αὐτοὶ μεστοί ἐστε ἀγαθωσύνης,
때문이다 역시 너희자신도 가득하여 너희가있지 선함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πεπληρωμένοι πάσης [τῆς] γνώσεως,
충만하게 되었다 모든 그 지식에 (분사: 완료 수동태 주격 2복)
δυνάμενοι καὶ ἀλλήλους νουθετεῖν. (부정사: 현재 능동태)
할 수 있는 또한 서로를 훈계하는 것을 (분사: 현재 중수디 주격 2복)
주해
▣ 내 형제들아. - 바울은 문단 전환상 중요성을 감안하여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이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는 깊은 호의가 담긴 호칭이다.
▣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 당시 로마 교회 교인들의 상태를 보여 주는 말이다. 여기서 '선'(아가도쉬네)은 단순히 도덕적인 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의 내주(內住)로 인하여 실현된 신앙적 성숙함과 이것이 실생활에 표현됨을 의미 한다. 이러한 사실은 '가득하고'(메스토이)가 빈틈없이 가득 차서 넘칠 정도가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지식'(그노시스)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구원의 비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당시 로마 교인들은 다소 분쟁이 있었으나 신앙적으로 매우 성숙했으며 바울도 이러 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 헬라어 본문에는 '나도 확신하노라'에 해당하는 '페페이스마이 카이 아우토스 에고'가 문두(文頭)에 위치하여 강조적이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페이도'의 완료수동형으로서 자신의 주관적 추측이 아닌 어떤 객관적 사실에 의해 납득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당시 로마 교인들이 스스로에 대해 선과 지식이 가득 찼을 뿔 아니라 이러한 미덕을 외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들에게 서로 권하는 신앙적 성숙함을 가진 사실을 바울이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주목을 해야 할 점은 확신한다는 표현에 '수동형'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로마 교회에 대한 소식을 바울이 타인으로부터의 소식에 의존하였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로마 교회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전해준 자는 아마도 당시 로마에 내려진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고린도에 건너와서 바울과 함께 하며 장막 짓는 일에 동업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을 가능성이 많다. 학자들은 이 박해(추방령)를 A.D. 50년경에 있었던 글라우디오 황제에 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로마 교회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며, 또 바울과 교제가 있던 자들이 로마로 간 경우도 있었다(16장). 어쨌든 ① 로마교회는 비록 바울이 세우지는 않았지만 ② 바울에게 있어 매우 친근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이는 아직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내 형제들아'를 빈발하는 것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이 그들의 문제를 길게 지적하고 나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장점에 대한 발언을 하게 된 동기로도 보인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5 그러나 내가 어떤 부분에서 매우 담대하게 쓴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고 한 것이다.
15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몇 가지 점에 대해서 너희에게 매우 담대히 썼다.
직역:
15:15 τολμηρότερον δὲ ἔγραψα ὑμῖν
더욱 담대히 그러나 내가 썼다 너희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1단)
ἀπὸ μέρους ὡς ἐπαναμιμνῄσκων ὑμᾶς
부터 부분으로 하려고 다시 생각 나게 너희를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1단)
διὰ τὴν χάριν τὴν δοθεῖσάν μοι ὑπὸ τοῦ θεοῦ
인하여 그 은혜를 그 주어진 나에게 의하여 그 하나님에 (분사: 과거 수동태 대격 단수)
주해
▣ 그러나 내게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신앙적 성숙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의 미덕에 대한 칭찬과 함께 그들에게 충고의 말 또한 해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생각나게 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나밈네스콘'은 신약에서 유일하게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로서 '마음에 되새기게 하다', '반복하여 상기시키다'라는 뜻이다. 즉 바울은 본서에서 다루는 복음의 원리에 대해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설명함으로 믿음에 굳게 서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일을 함에 있어 바울은 어떤 자신의 능력이나 사상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만 감당하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은혜'(카리스)라는 용어는 바울에게 있어 매우 다양한 용례를 가지는데, 여기서는 문맥상 자신의 사도직과 연관해 사용한 듯하다. 즉 바울은 구원의 은혜를 말할 때에 자신이 구원받은 이유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에게 있어 은혜는 바울의 소명이자 이방인에 대한 사도직과 연관된다. 한편 '더욱 담대히'란 본서에 나타나는 로마 교회 교인들의 '반 율법적 경향', '일부 성도들의 교만, '국가 권세에 대한 오해', '교회 내의 불일치' 등에 대해 경고조의 훈계를 했던 사실을 바울이 회상하는 표현인 듯하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내세우는 겸손함을 보이는 동시에 또한 그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담대함을 보임으로써 사도로서의 권위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대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 메루스'는 '부분적으로'라는 뜻이므로 '더욱 담대히 대강'이라는 표현은 '어떤 부분은 아주 담대하게'(새 성경)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5:16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내게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이방 사람 앞에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실 제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5:16 그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고, 그리하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 일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직역:
15:16 εἰς τὸ εἶναί με λειτουργὸν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εἰς τὰ ἔθνη,
위하여 그 있기 나를 사역자로 그리스도 예수 위한 그 이방인들을 (부정사: 현재 능동태 대격)
ἱερουργοῦντα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οῦ θεοῦ,
제사장 직무를 하며 그 복음의 그 하나님의 (분사: 현재 능동태 대격 1단)
ἵνα γένηται ἡ προσφορὰ τῶν ἐθνῶν εὐπρόσδεκτος,
위함이라 되기 그 헌물이 그 이방인들의 기쁘게 받으실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디 3단)
ἡγιασμένη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거룩하기되어있는 안에서 영 거룩한 (분사: 완료 수동태 주격 단수)
주해
▣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 전절에서 이야기한 은혜가 사도직임을 분명히 규정하며 더욱 구체적으로 그 은혜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사도직은 명백히 이방인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소명 받았던 때에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의 계획이 그러했고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인정하는 교회의 전반적인 인식도 그러했다. 한편 '일꾼'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고스'는 '공적인 봉사' 특히 '종교적 봉사'를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처럼 바울은 이방인에 대한 전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임명된 일꾼이다.
▣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 구약의 제사를 연상케 하는 매우 독특한 비유가 사용되고 있다. 이 비유에 의하면 바울은 제사를 담당하는 제사장이고 그가 하는 복음 전파의 일은 제사장의 업무이다. 그리고 바울의 선교를 통해 회개한 이방인 신자들은 바로 제사의 제물이다. 이러한 사상은 사66:20에 나타나는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라는 이방인 회심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사람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는 은유적 표현은 유대적 배경에서 그리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한편 바울이 현재 예루살렘에 위험을 무릅쓰고 가려는 것도 이방인 신자들이 모은 헌금을 예루살렘에 가져감으로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방인 신자들이 하나님께 제물로 열납된다는 견해를 가지는 바울의 심정에는 이 일에 이어서 진행될 자신의 동포인 유대인들의 빠른 회심을 기대하는 간절한 마음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 '받으심직하게 하려'라는 표현은 '열납될 수 있는 제물이 되게'란 의미이다. 벧전 2:5 주석 참조. 또한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라는 말은 당시 선교 현장적 정황에서 이해해야 한다. 특히 유대인 신자들은 당시 복음 전파가 확산됨으로 점차 숫자가 많아지는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 유대적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은 불결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에 일침을 가하며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존재를 통해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거룩하게 되어'(헤기아스메네)란 말이 완료형 수동태 분사 구문으로 쓰여 할례와 같은 의식을 통해 스스로 거룩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힘, 즉 성령의 역사하심만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시제가 완료형으로 쓰였다는 것은 이미 이방인 성도들이 거룩하여졌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것은 베드로가 예루살렘 회의 때에도 밝힌 바 있는 것으로 하나님은 믿음으로 깨끗케 되어 성령 안에 거하는 성도들은 구분하지 않으심을 분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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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5:17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15: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으나
직역:
15:17 ἔχω οὖν [τὴν] καύχησιν
나는가지고있다 그러므로 그 자랑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지속시제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τὰ πρὸς τὸν θεόν·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그(일들) 향한 그 하나님을
주해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 바울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자랑은 절대로 자신에게서 연유하지 않음을 앞절에서 언급한 자신의 직무와 관련하여 밝히기 위해 본절 문두에 '그러므로'(운)라는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다. 즉 그는 앞절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도직에 근거해서 자랑하는데, 그 자랑도 ①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이고 또 ②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랑이다. ①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라는 표현은 전적으로 스스로를 위한 개인적인 뉘앙스는 배제된 것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한 구원이란 공식적인 복음과 구원받은 자가 이루어나가는 하나님 나라에 관계된 일을 말한다. 또한 이것은 제사를 언급한 앞절과 연결해 예배의 기능들을 나타내는 유대교적 제의 용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 및 하나님이 열납하실 거룩한 성도를 확보하는 자신의 사명을 자랑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한편 ②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 역시 바울이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를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예수 호칭이다. 그는 '주'(퀴리오스)라는 호칭은 삶의 주관자요 주재권을 지니신 예수를 표현하는 데 사용한 반면, 본절에서 사용된바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믿음의 대상이며 구원을 주실 분이라는 맥락에서 자주 사용했다. 그런데 이 칭호를 지금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자신의 사도직을 구원과 연결시키는 그의 독특한 소명 사상과 같이 그가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 역시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하신 은혜 때문임을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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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룩하신 것 벅에는, 아무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통해 역사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다. 그것들은 말과 일이며,
직역:
15:18 οὐ γὰρ τολμήσω τι λαλεῖν (부정사: 현재 능동태)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감히~하다 무엇을 말하는 것을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1단)
ὧν οὐ κατειργάσατο Χριστὸς
것들의 아니다 역사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디 3단)
δι᾽ ἐμοῦ εἰς ὑπακοὴν ἐθνῶν,
통하여 나를 위하여 손종을 이방인들의
λόγῳ καὶ ἔργῳ,
말 과 행위(역사)
주해 헬라어 원문에는 본절의 문두에 '왜냐하면'(가르)이란 말이 나와 앞절에서 언급한 바울이 자랑거리로 여기는 바가 본절에서 설명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 이는 앞 구절에 나오는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즉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성결케 되어 흠과 티가 없는 하나님께 합당한 제물과 같이 된다는 의미이다.
나로 말미암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에무'는 '나를 통하여'란 의미로서 '내'가 순전히 도구의 역할을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일을 하시는 원천은 그리스도이시며 바울 자신은 그 통로만 됨을 겸손히 고백한 것이다.
▣ 말과 일이며. - 여기서 '말'은 일차적으로 바울이 복음 전파를 위해서 선포했던 설교를 가리키나 좀 더 넓게는 이에 수반되는 모든 노력을 가리킨다. 또한 '일'은 복음 전파에 있어 바울이 겪은 고난과 선포된 말에 부응하는 실천적 행동을 가리킨다.
▣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 앞서 언급한 '말과 일'이 인간 바울에게서 근원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서 '표적'(세메이온)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임하는 이적이란 의미가 강한 반면, '기사'(테라스)는 자연 법칙을 초월하여 자연계에 일어나는 이적을 가리키는 의미가 강하다.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이러한 현상이 뒤따랐다.
▣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 앞서 언급한 '말과 일' 그리고 '표적과 기사'의 근원이 성령에게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즉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이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며 열매 맺게 되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 원문에는 이 표현이 본절의 문두에 나와 강조적으로 쓰이고 있다. 즉 바울은 이방인들을 회심시키는 자신의 본분을 감당키 위해 성령의 능력에만 절대 의존함을 명확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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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15:19 표적과 이적의 능력으로 a) 성령의 권능으로 이룩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 (a. 다른 고대 사본에는 하나님의 영의 권능으로)
15:19 표적과 놀라운 일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니,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두루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만하게 전하였으나,
직역:
15:19 ἐν δυνάμει σημείων καὶ τεράτων,
으로 능력 표적들의 과 기사들의
ἐν δυνάμει πνεύματος [θεοῦ]·
으로 능력 영의 하나님의
ὥστε με ἀπὸ Ἰερουσαλὴμ
그러므로 나를 부터 예루살렘
καὶ κύκλῳ μέχρι τοῦ Ἰλλυρικοῦ
그리고 두루(행하여) 까지 그 일루리곤
πεπληρωκέναι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οῦ Χριστοῦ,
완전히전파하여왔다 그 복음을 그 그리스도의 (부정사: 완료 능동태)
주해
▣ 이 일로 인하여. -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사도직을 가지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통하여 라는 의미이다.
▣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친 자신의 전도 여행을 회상하며 기록하는 것으로 이 표현 속에 과거 회고 뿐 아니라 그가 장차 행할 선교의 비전도 포함되어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그의 전도의 시점과 시작 장소는 회심한 직후 다메섹 지방이었으며 첫 해외 이방 선교의 출발지는 안디옥이었으므로 '예루살렘으로 부터'라는 언급은 다소 생소하다. 따라서 본절의 예루살렘과 일루리곤이라는 지명은 실제로 바울이 전도한 곳이기도 했을 터이지만, 그가 지금까지 전도한 모든 지역을 총괄적으로 언급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예루살렘은 복음의 발상지로 볼 수 있으며 현재 유고슬라비아 영토이며 아드리 해 동쪽 연안에 위치했던 일루리곤은 당시 대 로마 제국 영토의 관점에서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기 전에 있는 서쪽 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루리곤까지 갔다는 것은 로마와 그 서쪽 지역을 제외하고 바울이 갈 수 있었던 모든 지역을 다 다녔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했고 전할 포부가 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두루 행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클로'이다. 이 단어의 일차적인 뜻은 '둥글게'이지만 그 개념 속에는 빠지지 않고 전부 전도했다는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또한 '편만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케나이'라는 표현이 '완전하게 채우다'라는 뜻을 지녔다는 것도 그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더구나 이 동사가 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그 복음 전파의 완결을 표현한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자신의 사역 평가가 그의 과장된 성격 탓이거나 스스로의 업적을 자랑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동사들의 사용은 바울의 선교에 대한 중요한 인식을 보여 준다. 즉 그는 팔레스틴과 시리아, 소아시아와 헬라 지역에 이르는 일련의 연결원에 속한 지중해를 중심한 지역들을 완전히 선교하려는 포부를 가졌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John Knox). 하지만 그는 세 번의 전도 여행을 대부분 간선 도로를 따라 주로 큰 도시에서 짧은 기간을 선교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바울이 일정 기간 목적지에서만 전도하고 떠난 것이 아니라 모든 여정을 전도의 기회로 삼았고 또 전도지에서 떠나더라도 다른 사람을 남겨둠으로써 계속적인 교회 성장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두루 행하여‥‥편만하게 전하였노라'란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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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15:20 이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진 곳 말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b)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다가 집을 짓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15:20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곳에서 복음 전하기를 힘썼으니, 이는 내가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직역:
15:20 οὕτως δὲ φιλοτιμούμενον εὐαγγελίζεσθαι (부정사: 현재 중간태)
이와같이 또 내가열심히 힘을 쓰면서 복음을 전하는 (분사: 현재 중수디 대격 1단)
οὐχ ὅπου ὠνομάσθη Χριστός,
아니다 곳에서 이름이 불려졌던 그리스도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단)
ἵνα μὴ ἐπ᾽ ἀλλότριον θεμέλιον οἰκοδομῶ,
위하여 않다 위로 다른 터를 내가건축하게된다면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1단)
주해
▣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 썼노니. - 이 구절은 두 가지 사실을 반영해 준다. ① 전절과 연관해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은 늘 미개척지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당시 인식되던 땅 끝의 개념인 지중해 세계를 전도하려면 그렇게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 의해 이미 복음이 전파된 곳이라면 그곳에서 더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본문은 바울이이방 선교에 대해 책임을 진 '이방인의 사도'라는 자기의식에 투철했다는 점과 연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② 바울은 본서의 수신자들인 로마 교회에서 새롭게 전도할 계획이 없다는 점이다. 다만 15절에 반영된 대로 그들에게 필요한 영적 문제에 대해 답변하며 그들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실을 본 서신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서신중에서 본서가 가장 분량이 많은 이유도 바로 이러한 점에 연유한다. 즉 바울은 로마 교회에 더 이상 복음의 세세한 내용을 전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오래 머무르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나가는 길에 잠간 그들을 보고 그들의 지원을 얻어 서바나로 급히 가려했던 것이다.
▣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 바울은 자신에 대해 언급하기를 '터를 닦는 자'라고 표현하기는 하나 남의 터 위에는 건축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이는 자신에 대한 독선이나 우월 의식과는 거리가 멀며 더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바울 자신의 선교관이고 목회 윤리이다. 그가 로마로 가서 거기서 머물지 않고 서바나로 가려는 이유도 바로 그 지방(지중해 동북부 지역)에는 일할 곳이 없이(23절) 이미 복음의 터가 놓인 반면, 서바나는 미개척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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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15:21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c) "그의 일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요, 듣지 못하던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15:21 기록된 것과 같으니 "주님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직역:
15:21 ἀλλὰ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다만 같이 그것이기록되어져 온것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οἷς οὐκ ἀνηγγέλη περὶ αὐτοῦ ὄψονται,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3복)
사람들에게 아니하였고 소식이알려지지 관하여 그에 그들이 볼 것이다.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단)
καὶ οἳ οὐκ ἀκηκόασιν συνήσουσιν.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복)
그리고 사람들이 못하였다 듣지 그들이 깨달을 것이다.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3복)
주해
▣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 사 52:15의 70인역 인용이다. 원래 히브리 원문의 문맥은 이방의 '나라들과 그 왕들'이 과거에 멸시하던 '고난 받는 종 메시야'가 높아지는 것을 보고 놀라며 이들도 메시야를 높이게 될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바울은 이를 보다 확대하여 해석한 70인 역의 의미를 잘 살려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지만 이제 복음을 듣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 역시 원문의 뜻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처럼 바울은 그 '이방인들'의 새로운 무리들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로마서 15장 22-29절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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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15:22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려고 하였으나 여러번 길이 막혔습니다.
15:22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으나,
직역:
15:22 Διὸ καὶ ἐνεκοπτόμην
그러므로 또한 내가막혀있어왔다 (동사: 직설법 미완료 수동태 1단)
τὰ πολλὰ τοῦ ἐλθεῖν πρὸς ὑμᾶς·
그 여러번 그 가려는것이 에게로 너희 (부정사: 과거 능동태 속격)
주해
▣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 새로운 이방인 전도 대상을 찾는 바울은 다음 선교 지역을 위해 로마에 갈 계획이 여러 번 있었다고 밝힌다. 이렇게 그가 가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갈 수 없었던 것은 ① 지금까지 전도하던 지역의 개척 전도와 그들을 양육하는 일이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② 또한 중요한 것은 그의 선교 원칙과 정책상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이 '많은 일들로서'라는 뜻을 지닌 '여러 번'(타 폴라)이라는 말과 함께 '끼어들어 훼방하다'라는 뜻이 있는 '막혔더니'(에네코프토멘)란 말을 미완료형으로 쓴 것은 바울에게는 외부적이며 유형적인 방해가 여러 차례 계속적으로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그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다만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바울이 로마행을 고대하던 그 열정만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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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15:23 그러나 이제는 이 지역에서 내가 일해야 할 곳이 더 없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로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에,
15:23 이제는 이 지역에서 더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너희에게 가려는 소원이 있었으므로,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고 한다.
직역:
15:23 νυνὶ δὲ μηκέτι τόπον ἔχων
이제 그러나 더 이상아닌 곳을 있는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1단)
ἐν τοῖς κλίμασιν τούτοις,
안에 그 지방들에 이
ἐπιποθίαν δὲ ἔχων
열방을 또 가진니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1단)
τοῦ ἐλθεῖν πρὸς ὑμᾶς ἀπὸ πολλῶν ἐτῶν,
그 오기위한 에게로 너희들 부터 많은 해들의 (부정사: 과거 능동태 속격)
주해
▣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한 곳이 없고. - 로마서를 기록한 장소는 고린도로 여겨진다. 그는 3차 전도여행의 반환점인 고린도에서 지금까지의 전도 사역을 회상하면서 이제 로마 본토 동쪽 지역은 거의 선교의 대상으로 삼았으므로 더 넓은 미개척지가 필요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 로마는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로마에 한 번씩은 가보려는 욕망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인간적 호기심이 아니라 로마를 비롯해 로마 제국 전체를 복음화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로마 방문을 원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언제부터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본서를 기록하기 약 6년 전에 고린도에서 로마 교회 교인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난 때부터라고 하더라도 그 후 여러 번 로마로 가려는 시도를 할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 지금까지 암시된 중요한 바울의 계획들이 드러나 있다. 바울이 로마로 가려는 목적은 ① 지금까지의 자신의 선교가 종결 되었기에 ②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나서는 데 경유지 혹은 선교의 전진기지를 확보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그렇다고 하여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고 함께 형제된 기쁨을 나누는 일이 바울의 관심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다. 이미 그러한 목적에 대해서는 본서 서두에 바울의 간절한 심정을 표현하면서 밝힌바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이 곳 서신의 후반부에서는 그러한 기본적인 목적보다는 실제적인 목적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서바나는, 구약의 '다시스'와 동일한 지역으로서 오늘날 스페인 지역으로 당시 주요 무역항이었다. 이곳은 로마 제국의 서쪽 끝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히 '땅 끝'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바울은 이처럼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자의 삶을 자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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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15:24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보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여러분과 먼저 기쁨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15:24 이는 내가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만나보고 얼마 동안 너희와 기쁨을 나눈 후에, 너희가 나를 그곳으로 보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직역:
15:24 ὡς ἂν πορεύωμαι εἰς τὴν Σπανίαν·
할 때에 내가 가다면 향하여 그 서바나를 (동사: 가정법 현재 중수디 1단)
ἐλπίζω γὰρ διαπορευόμενος θεάσασθαι ὑμᾶς (부정사: 과거 중간태/디) (분사: 현재 중수디 주격 1단)
나는원한다 왜냐하면 지나면서 보는 것을 너희를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καὶ ὑφ᾽ ὑμῶν προπεμφθῆναι ἐκεῖ ἐὰν ὑμῶν
그리고 의하여 너희에 먼저보내지는 거기로 만일 너희의 (부정사: 과거 수동태)
πρῶτον ἀπὸ μέρους ἐμπλησθῶ.
먼저 부터 부분으로 내가 즐거워하다면 (동사: 가정법 과거 수동태 1단)
주해
▣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 전술한 바와 같이 로마로 가서 바울이 할 기본적인 일이다. 여기서 '지나 가는 길'이란 물론 헬라어 원문에 기록된 대로 '서바나로 지나는 여행길'이란 뜻으로 개역 성경이 앞절의 영향을 받아 '서바나'를 생략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로마를 하나의 경유지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편 '만족을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플레스도'는 '충분한 양을 채우다'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로마 교회 성도들을 만나 함께 지내면서 믿음의 역사들을 간증하며 위안을 얻고 영적인 은사도 함께 나누며 가능하다면 불신자들에 대한 구원의 열매도 맺어 충분한 기쁨을 누린다는 뜻이다. 즉 로마 교회 교인들과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동료의식을 통해 영적 ․ 정신적 만족함을 얻으려는 것이다.
▣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 '보내줌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펨프데나이'는 단순한 전송의 뜻이 아니라 음식이나 교통비 등 여행에 필요한 준비를 갖추어 보낸다는 뜻이다. 이 목적은 아직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먼 서바나 지역의 선교를 계획하고 있던 바울에게 있어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한편 이렇게 바울이 로마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선교의 방법으로 볼 수 있다. 그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는 특수한 고린도 교회의 생활로 인해 자비량(自費糧)해서 생계를 유지했으며 자급의 선교는 바울의 기본 방침이었으나 교회의 도움으로 선교하는 것 역시 당시 보편적 선교 방법 이 었으며 또한 바울도 취했던 바였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당연한 교회의 선교 지원 의무를 상기시키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동참을 호소하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15:25 그러나 지금 나는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15:25 그러나 지금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간다.
직역:
15:25 Νυνὶ δὲ πορεύομαι εἰς Ἰερουσαλὴμ
이제 그러나 내가 간다 으로 예루살렘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1단)
διακονῶν τοῖς ἁγίοις.
섬기려고 그 성도들에게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1단)
주해
▣ 그러나 이제는. -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이 로마를 방문해야 하는 당위성과 방문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큰지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은 로마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에 위치하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야 하는 필연적 이유를 '그러나 이제'(뉘니 데)라는 말로 요약하는 것이다.
▣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 당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구약의 비느하스에게 기원을 두고 마카비 시대에 이방인들과 이방에 협조하는 유대인들을 처형함으로 그 피를 통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한 일종의 폭력 신학이 '열심당' 등의 형태로 팔레스틴에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겪는 생명의 위협도 바로 이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위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이 그가 계획하던 서바나 행 선교가 좌절될 수도 있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루살렘 행을 감행하는 것은 그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 예루살렘행의 목적은 그가 밝히는 대로 '성도를 섬기는 일', 즉 '구제하는 일'이었다. 이 일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요청받은 일이요 바울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힘쓰던 일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서 중히 생각해야 할 점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방인 교회들의 헌금이 단순한 구제의 정성 혹은 형제 사랑의 표현이거나 모교회(母敎會)에 대한 물질적 갚음의 차원만이 아닌 두 가지 근본적이고 중요한 측면이 내재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① 신학적 측면에서 이방교회의 헌금은 말세에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제물을 가지고 순례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예언의 성취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정성껏 섬김으로 혈통적 이스라엘의 범주를 벗어나는 인류 보편적인 구원의 성취를 확인하시는데, 바울이 대동하는 이방인 형제들의 존재가 바로 그러한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지중해 동북부 지역의 선교를 마감하면서 그 선교의 결과로 얻은 이방인 성도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② 보다 실제적인 측면으로 마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을 대동한 헌금 전달을 통해 예루살렘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로부터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함을 인정받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 신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결정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이방인 개종자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실제로 바울이 선교하고 떠난 교회들에(갈라디아, 고린도 교회) 다른 교사들이 일어나 다시금 유대적 종교 규례를 강요하고 바울의 사도권에 의문을 제기했던 일이 있었다. 이러한 때에 바울은 다시 한 번 당시 초대 교회 중심지로 여겨졌던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할 필요성을 강력히 요구받았던 것이다. 이 문제는 이전에 바울이 했던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은 물론이고 이후의 이방 선교 계획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따라서 그는 예루살렘 행을 감행해야만 했다. 또한 바울이 아직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로마서를 먼저 썼던 이유는 율법 준수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구원이란 주제로 요약되는 긴 구원 논중을 예루살렘에서 변론하기에 앞서 로마 교회에 보냄으로 자신의 복음을 정리해 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 하였음이라
26 마케도니아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26 이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기 때문이다.
직역:
15:26 εὐδόκησαν γὰρ Μακεδονία
그들이기뻐하였다 왜냐하면 마게도냐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ὶ Ἀχαΐα κοινωνίαν τινὰ ποιήσασθαι εἰς
그리고 아가야(사람들이) 구제 어떤 행하는 것 위하여 (부정사: 과거 능동태)
τοὺς πτωχοὺς τῶν ἁγίων τῶν ἐν Ἰερουσαλήμ.
그 가난한 사람들 그 성도들중의 그 안에 예루살렘
주해
▣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 마게도냐와 아가야는 오늘날 그리이스 지역에 있는 로마의 행정 구역명(名)이며, 이는 바울이 제 3차 전도 여행 시에 방문했던 곳으로서 마게도냐에는 빌립보 교회가, 아가야에는 고린도 교회가 대표적 교회였다.
▣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 '기쁘게'란 헌금에 참여함에 있어 억지로 하지 아니하는 감정상의 '흔쾌함'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 시행 자체가 이방 교회들의 자발적인 공식 결정에 의한 헌금이었음도 암시한다. 물론 고린도 교회에서는 헌금 문제에 대한 약간의 잡음도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들도 상당한 양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헌금에 동참했을 것이다. 한편 '얼마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나'는 그 액수가 작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액수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처한 상황에 따라 헌금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동정하였음이라'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동정을 베풀었음이라'이다. 여기서 '동정'을 뜻하는 명사 '코이노니아'는 '교제'의 의미와 아울러 '헌금'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어쩌면 진정한 교제란 영적인 측면과 더불어 물질적인 측면까지 포함하는 전인격적 측면의 상호 교류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15:27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신령한 복을 나누어 받았으니, 육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그들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15:27 그들이 기쁨으로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직역:
15:27 εὐδόκησαν γὰρ καὶ ὀφειλέται εἰσὶν αὐτῶν·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그들이기뻐하였다 왜냐하면 또한 빛진사람들 그들이 있다 그들이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εἰ γὰρ τοῖς πνευματικοῖς αὐτῶν
만일 왜냐하면 그 영적인것들에 그들의
ἐκοινώνησαν τὰ ἔθνη, ὀφείλουσιν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함께 나누었다 그 이방사람들이 그들이마땅히 해야한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ὶ ἐν τοῖς σαρκικοῖς λειτουργῆσαι αὐτοῖς.
그리고 에있어 그 육적인일들 섬기는 것을 그들에게 (부정사: 과거 능동태)
주해
▣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 이방 성도들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은 일차적으로는 자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빚진 것은 갚아야 한다는 채무변제(債務辨濟)의 원리도 내포되어 있다. 즉 이방인들은 원래 유대인에게 주어졌던 구원에 동참함으로써 유대인에게는 구원의 빚진 자가 되었다. 이와 똑같은 원리는 본서의 저자 사도 바울이 스스로를 가리켜 '복음의 빚진 자'라고 표현한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 이방인들이 유대인에 대하여 빚진 자라는 사실을 좀 더 세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은 영적인 것, 즉 복음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이방인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육신의 것, 즉 재물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헌금한 이방인 교회는 자신들이 진 영적인 빚에 대한 되갚음을 행한 것이다. 따라서 그 헌금의 행위가 모 교회에 대한 의무적이거나 불문율적인 '상납금'이라는 견해는 바울의 생각과는 전혀 거리가 먼 추측일 뿐이다. 다만 이 행위는 은혜의 행위였다. 이처럼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혈통(血統)이나 민족의 장벽을 넘어서 서로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아름다운 교제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교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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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15:28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마치고 그들에게 이 열매를 확실하게 전해 준 뒤에 여러분에게 들렸다가 스페인으로 가겠습니다.
15:28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실히 전달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스페인으로 가겠다.
직역:
15:28 τοῦτο οὖν ἐπιτελέσας
이일을 그러므로 다 끝마치고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1단)
καὶ σφραγισάμενος αὐτοῖς τὸν καρπὸν τοῦτον,
그리고 인 친후에 그들에게 그 열매를 이 (분사: 과거 중간태 주격 1단)
ἀπελεύσομαι δι᾽ ὑμῶν εἰς Σπανίαν·
내가 떠나 갈것이다 거쳐서 너희를 로 서버나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1단)
주해
▣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 바울이 예루살렘 행을 시도하는 결정적 목적이 제시되어 있다. 이방인 신자들로부터 거두어 간 헌금은 바로 바울의 이방 선교 사역이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열매였다. 한편 여기서 '확증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프라기사메노스'는 상업 용어로 '소유의 확인' 혹은 '내용물의 공적 보장'을 뜻했다. 따라서 본구절의 표면적인 뜻은 '헌금을 확실하게 전달한 후에'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암시적 내용은 이방인 신자들 자체가 유대인 신자들에게 있어서 바울의 이방 선교의 열매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성령께서 확인하시기 때문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선교 결과를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예루살렘 방문을 이 헌금에 관한 표현 속에 함축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 바울의 이 말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기사가 바울이 로마에 머물며 2년 동안 전도하던 장면이고 이후 바울의 서신에도 서바나 전도나 그 이후의 일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1세기 말에 살았던 교부 크레멘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바울이 '서방의 끝'에 도달했다고 하는데, 그 서신의 신빙성을 고려한다면 바울이 서바나도 다녀온 후에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초대 교회의 주요 자료인 무라토리 단편도 이에 대해 암시를 주나 대부분의 교부가 이에 대해 침묵한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이러한 추정은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5: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15:29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것입니다.
15:29 내가 너희에게 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로 안다.
직역:
15:29 οἶδα δὲ ὅτι ἐρχόμενος πρὸς ὑμᾶς (분사: 현재 중간태 주격 1단)
나는 알아왔다 그리고 것을 갈때에 에게로 너희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1단)
ἐν πληρώματι εὐλογίας Χριστοῦ ἐλεύσομαι.
가운데 충만함 축복의 그리스도 내가 갈 것이다.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1단)
주해
▣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 비록 지금은 가지 못하나 후일에 축복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바울의 로마 교인들에 대한 사랑과 확신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런 확신으로 볼 때, 바울이 예루살렘에 갈 때 죽음도 불사하는 비장함을 보였지만 또한 거기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로마로 가게 될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이란 모든 성도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그 지체로 부름 받은 각 성도들에게 풍성하게 나눠주시는 축복이다. 그러나 레기우스 사본(L)이나 아도스 사본(ψ)에는 '그리스도'란 말과 함께 '복음'(유앙겔리우)이란 말을 삽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충만한 축복'이라는 독법을 취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사본(A), 바티칸사본(B) 등 대부분의 유력한 사본에 이러한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는 27절에 영향 받은 후대의 삽입임이 분명하다. 여하튼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로마 교인들과 나누게 될 교제의 기틀과 축복을 포괄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로마서 15장 30-33절 【중보 기도의 부탁과 축원】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15:30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그리고 성령의 사랑을 힘입어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도 기도합니다만,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으로 기도해주십시오.
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또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니, 나와 함께 힘을 합하여 나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여라.
직역:
15:30 Παρακαλῶ δὲ ὑμᾶς[, ἀδελφοί,]
나는 권한다 그러나 너희를 형제들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διὰ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통하여 그 주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
καὶ διὰ τῆς ἀγάπης τοῦ πνεύματος
그리고 통하여 그 사랑 그 성령님의
συναγωνίσασθαί μοι ἐν ταῖς προσευχαῖς
함께 힘쓰기를 나와 중에 그 기도를 (부정사: 과거 중간태/디)
ὑπὲρ ἐμοῦ πρὸς τὸν θεόν,
위하여 나를 향하여 그 하나님을
주해
▣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 본문의 '그리스도'와 '성령'이란 표현은 하반절의 '하나님께 빌어'와 더불어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모두 언급하는 것으로 이는 바울의 권면에 권위를 더하고 있다. 한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 속에는 비록 바울과 만난 적은 없지만 '우리'란 동질감을 강조하는 표현을 통하여 동일한 구주를 모신 신앙적 동지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이름' 속에는 교회의 주인 되시고 세상의 주관자 되신 그리스도의 충만한 능력과 존재성에 대한 깊은 신뢰가 반영되어 있다. 또한 '성령의 사랑'(아가페스 투 프뉴마토스)이란 표현의 '성령의'에서 사용된 '소유격'은 주격적 소유격으로 '성령이 주시는 사랑'을 뜻하며 이는 성령에 대한 의존적 태도를 보여 준다. 한편 '권하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로'는 '권하다'는 뜻 외에도 사랑을 가지고 '간청하다', 집요하게 '재촉한다'는 강한 의미를 가진다.
▣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 바울은 생면부지의 성도들이긴 하지만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성도 간의 기도의 교제는 물질적인 교제에 앞서는 성도만이 가지는 특권이다. 한편 '나와 힘을 같이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나고니사스다이 모이'는 신약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본절 유일의 단어로서 매우 특징적인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다. 즉 이 단어는 운동경기장이나 투기장에서 상호 힘을 합하여 최선을 다해 싸우는 모습을 뜻한다. 바울 자신이 그렇게 목숨을 건 사투와도 같은 기도를 하고 있는데, 로마 교회 교인들도 그 기도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간절한 기도의 요청은 그의 현재 처한 상황의 중차대함을 반영해 준다. 한편 본절의 '말미암아'란 표현과 '빌어'란 표현을 통해 보건대 기도의 대상은 성부 하나님이며 성자와 성령은 수단 혹은 매개의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5: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15:31 내가 유대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화를 입지 않도록, 그리고 또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구제금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쁜 선물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15:31 내가 유대에 있는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봉사가 성도들이 받을 만한 것이 되게 하며,
직역:
15:31 ἵνα ῥυσθῶ ἀπὸ τῶν ἀπειθούντων ἐν τῇ Ἰουδαίᾳ
위하여 내가구원을 받게하다면 부터 그(사람들) 순종치아니하는 에있는 그 유대에 (동사: 가정법 과거 수동태 1단)
καὶ ἡ διακονία μου ἡ εἰς Ἰερουσαλὴμ
그리고 그 섬김 나의 그 위한 예루살렘
εὐπρόσδεκτος τοῖς ἁγίοις γένηται,
받아들여지도록 그 성도들에게 된다면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디 3단)
주해
▣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 바울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폭력도 불사하는 극렬 유대인들로부터의 안전이었다. 당시 예루살렘에 바울이 간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으나, 꼭 가야만 할 길이었으므로 바울은 이 기도 제목을 첫 번째로 내놓았던 것이다. 여기서 '순종치 아니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이둔톤'은 '설득하다'를 뜻하는 '페이도'에 부정 접두어 '아'가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설득되지 않는'이라는 번역이 더 적합하다. 당시 극우적인 유대인들은 이방 세력에 대해 단호했으며 정결한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변절한 유대인들을 죽여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이었다. 한때 바울도 이러한 부류에 속했으며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죽이는 일을 할 만큼 극렬했으므로 이러한 우려는 상당히 현실에 근접한 것이다. 사실 후에 바울은 이들에게 체포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되는 계기가 되었다.
▣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 바울의 두 번째 기도 제목으로, 이는 아직 율법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한 유대인 개종자들이 바울의 사역을 방해치 못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섬기는 일'이란 이방인 신자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하였던 헌금으로 바울은 이 헌금을 배타적인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받지 않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여 이 문제를 두 번째 기도 제목으로 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이 헌금의 수납 여부는 바울의 신학이나 선교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당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이방인 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염려는 당연한 것이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5: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15:32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을 안고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과 함께 즐겁게 쉴 수 있게 기도해 주십시오.
15:32 또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쉴 수 있도록 하여라.
직역:
15:32 ἵνα ἐν χαρᾷ ἐλθὼν πρὸς ὑμᾶς
위하여 으로 기쁨 간 후에 에게로 너희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συναναπαύσωμαι ὑμῖν.
통하여 뜻으로 하나님의 내가 함께 쉬다면 너희와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디 1단)
주해
▣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 바울의 세 번째 기도 제목은 그렇게 고대하던 로마로 가서 그곳 성도들과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선하게 인도해 달라는 내용인데, 사실상 이 제목은 유대인 적대 세력으로부터의 안전과 예루살렘 교회로부터의 용납이라는 첫째와 둘째 제목이 다 성취되는 것을 전제한다. 한편 '하나님의 뜻을 좇아'라는 표현은 모든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소원이 긍극적으로 성취되려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또한 '편히 쉬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나나파우오마이'는 '함께'(쉰)와 '쉬다'(아나파우소)의 합성어로서 '함께 쉬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는 구절은 나는 너희와 함께 영과 육을 휴식하기 원한다는 의미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5: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15:33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e) 아멘. (e. 고대의 한 사본에는 여기에서 16:25-27이 이어짐)
15: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두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직역:
15:33 Ὁ δὲ θεὸς τῆς εἰρήνης μετὰ πάντων ὑμῶν, ἀμήν.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평강의 함께 모든 너희 아멘
주해
▣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 본래 로마서 끝부분은 사본상의 논란이 많은데, 14장 끝부분을 본서의 종결로 보는 사본 외에도 어떤 사본(Pe)은 본절 끝의 '아멘'을 생략하고 곧바로 롬 16:25-27을 끝으로 본서를 종결하고 있기도 한다. 한편 본절은 바울의 격식을 갖춘 축복문으로 기도의 부탁에 이은 간절한 바램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속성 묘사는 본장의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에 이어지는 특징적 표현으로 아마도 장차 올 환난에서 건짐 받아 평화를 얻을 것을 기대하는 바울의 심경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심각한 현실적 위협과 고통 속에서 참 위로와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은 평화의 창시자이신 하나님 뿐임을 바울은 경험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평강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좇은 바울을 선하게 인도하셔서 그가 우려하던 바와는 달리 예루살렘 지도자들로부터 영접 받고 계획한 일들을 모두 할 수 있게 하셨으며 극렬한 유태인들에 의한 죽음의 위협에서도 건져내셨다. 또한 유대인들로부터 고발당해 법정에 섰을 때 실제적으로 로마의 실정법상으로는 무죄였기에 석방될 수 있었지만, 만약 그때 바울이 석방되었다면 그 살기등등한 예루살렘을 빠져 나가서 고대하던 로마로 갈 수 있었을 지가 의문시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가이사에게 호소하게 하는 지혜를 주심으로 인해 미결수의 몸으로나마 안전하게 관권의 보호를 받으면서 로마에 당도할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바울을 인도하실 평강의 하나님 의 은혜가 로마 교회에도 있기를 바울은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축복은 이미 그가 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첫댓글
그리스도인으로 실행의 지침 12:1-15:13
로마서 15:1-13
우리의 실행은
그리스도를 본으로 따라가는 것이 기준이다.
성경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본이 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1.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에 대하여 1-3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약점이 있다는 것이고 강한 자는 약점을 짊어져야한다.
이는 자신의 기쁨보다는 연약한 자의 기쁨을 위한 것이다.
이웃을 기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유익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모본인 그리스도는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주께 임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믿음이 강한자가 약한자에 대한 기준으로 본이 된다.
2.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다. 4-7
기록된 것들은 성경으로 구약 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인내를 통하여 우리가 소망을 갖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따라 생각을 같이 하기를 원하신다.
한 마음과 한 뜻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받아 들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받아 들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기록된 것을 넘어 가지 말아야 한다.
기록된 성경으로도 신앙과 행위의 본분으로 충족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원칙이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있다.
자기의 어떠함을 신비적 주관적 인 것들을 주장하여 진리를 혼탁케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아멘 입니다.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으로 성령으로 소망이 넘쳐야한다. 8-13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종이 되신 것이 약속을 확고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성경에 이방인들도 주님을 높이 찬양하고 찬송하리라 기록한 것이다.
또 이방인들도 주님의 백성과 함께 기뻐하리라하셨다.
이방사람들아 주를 찬양 하여라 모든 백성이 그 분을 찬송하라고 하였다.
이사야도 이새의 뿌리 이방인을 다스릴 분이 일어나는 이가 있다 하였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그 분께 소망을 둘 것이라는 것이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소망과 기쁨과 평안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소망이 넘치기를 바란다.
영원토록 받으실 영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만이 유일한 분 입니다. 아멘
복음의 완성인 교회 15:14-16:27
로마서 15:14-24
이방인들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대한 바울의 직무에 관하여
신앙의 결론과 복음의 완성은 이방인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1. 선함과 지식이 넘치기에 서로 권면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 내가 은혜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썼습니다.
이 은혜는 이방인의 사역자로 이방을 위하여 복음의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방인 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시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2. 그리스도께서 이방을 순종하게 하려 하여 나를 통하여 성취하신 것이다.
이 일은 나의 말과 행위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표적과 기이한 일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 까지 두루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려 힘썼습니다.
그것은 남의 기초위에 건축하여 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주님의 소식을 받지 못한 이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사람이 깨달으리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3. 로마를 방문하려한 이유를 다시 자세하게 분명히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방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 이일로 여러 번 가려하였으나 막혔습니다.
더 이상 전 할 곳이 없어 여러 분에게 이 복음을 전하려는 갈망이 있습니다.
스바나 까지 가려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보고 여러분이 보내주기를 바랍니다.
로마서를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만일 바울의 계획대로 로마를 방문하여 복음을 직접 전하였다면 이 로마서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는 알 수 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방문의 계획을 하나님이 막으셔서 이 로마서의 기록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인 바울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기록하였다.
그 결과 우리에게도 이 높은 복음을 알수 있게 된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섭리이다.
그러므로 막히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의 섭리를 우리가 어찌 측량하겠습니까?
은혜 아니면 살수가 없는것 같습니다. 아멘
로마서 15:25-33
이방인들과 유대인의 교통에 대하여
바울이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주고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다.
1. 지금은 성도들을 공급하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난한 이들을 도우라 헌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성도들에게 빚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영적인 것을 받았으니 물질적인 것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일을 마치고 열매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들렸다 스바나로 가려고 합니다.
2. 여러분에게 갈 때에 가지고 갈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는 [신령한 은사]로 곧 영적인 선물로 말씀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충만 한 복]을 가지고 가려는 것이라 합니다.
16장에서는 이를 영세 전에 감춰 있다 나타난 [신비의 계시]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신학으로 로마서에서 강조되는 그리스도와 연합의 복음이다.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영의 사랑으로 부탁하며 나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기를 부탁했다.
유대인들에게 고난 받지 않고 예루살렘의 봉사가 기쁨으로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하여 달라는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아가서 기쁨으로 함께 쉬고 새 힘을 얻도록 해 주도록 부탁했다.
화평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했다.
아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