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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교회의 성결성
1-7절, 사랑과 거룩함
[1-2절]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예물과 제물로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주께서는 친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사도 바울은 로마서 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로 내어주신 사실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확증되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4:9-11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본서신 에베소서의 시작 부분인 1:3-6에서 이렇게 말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의 아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구속(救贖)하셨고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는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려 중생(重生)시키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의 죽음은 예물과 제물로 향기로운 냄새[유화(속죄)의 냄새]5)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요한복음 15:12-13에 보면, 주께서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셨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 대속의 큰 사랑을 본받아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3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음행’은 합법적 결혼관계 이외의 성행위를 가리킨다. 합법적 결혼관계란 본인들의 동의와 부모들이나 증인들의 인정 아래 이루어진 결혼관계를 말한다. 부부의 성행위는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이지만, 그 외의 성행위, 즉 간음이나 강간이나 근친상간적 행위나 매춘행위나 동성애나 짐승과의 성행위 등은 음행의 죄악이다.
‘온갖 더러운 것’은 성적 불결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더러운 악을 가리킨다. 그것은 죄악된 것을 보고 들음으로 생각과 감정이 더러워지는 것부터 말이나 행위의 불결까지 모든 더러운 악들을 포함한다. 말과 행위의 더러움은 생각과 마음의 더러움에서 나오므로, 주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마 5:8), 잠언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교훈하였다(잠 4:23).
‘탐욕’은 좀더 가지려는 마음이다. 이것은 주로 돈에 대한 욕심이다. 그러나 돈뿐 아니라, 또한 세상 영광, 명예, 권세에 대한 욕심도 있다. 이것들은 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근본이 다르다. 탐욕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다. 하나님 없는 자들에게는 세상과 돈이 그들의 바라는 것의 전부이다.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말씀은, 실질적으로 마음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이런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죄를 미워하고 그런 것에 대해 말하는 것도 꺼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마땅한 바’이다. ‘성도’라는 말(하기오스)은 ‘거룩한 자’라는 뜻이다. 거룩은 모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행위들을 떠나는 도덕적 성결이다. 성도는 말과 행위에서 거룩해야 한다.
[4절]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누추함’이라는 원어(아이스크로테스)는 ‘더러움, 추잡함’이라는 뜻이다. ‘희롱의 말’은 저속하고 상스러운 농담을 가리킨다. 더럽고 추잡한 말, 어리석은 말, 저속하고 상스러운 농담은 다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것들이며 성도답지 못한 말들이다. 성도는 이런 말들을 버려야 하고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여 감사해야 하고 또 우리에게 호의와 선을 베푼 사람들에게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5절] [이는]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못할 것임이니라].
우리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버리고 더럽고 추잡한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탐하는 자를 우상숭배자라고 표현한 것은 탐하는 자는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돈이 신이다. 도덕적으로 더러운 자들과 탐욕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 하지 않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9-10에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동성애자)나 남색하는 자(동성애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탐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욕하는] 자나 토색하는[강제로 남의 것을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 5:19-21에서도 육체의 일들인 여러 가지 죄악들을 열거한 후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22:15에서,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했다. 우리가 이런 분명한 진리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천국 확신과 소망을 가진 자들로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등 모든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게 선하게 의롭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6-7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임함이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헛된 말’이란 율법과 복음의 진리에 맞지 않는 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웬만큼 죄를 지어도 괜찮다,’ ‘그 정도 죄를 지어도 천국은 갈 수 있다’는 등의 말이다. 그것은 헛된 말, 속이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며 우리가 죄를 떠나는 것이다. 계속 죄 가운데 사는 자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모든 죄악을 버리려 할 것이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애쓸 것이다. ‘이를 인하여’라는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죄악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심 등의 죄악들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런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끝까지 참고만 계시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이 세상에 가득한 죄악들에 대하여 일어나셔서 그것들을 범한 죄인들에게 진노하시며 그들을 심판하시고 징벌하실 것이다. 영원한 지옥 불못은 그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
우리도 과거에는 불순종하던 자들이었으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후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죄 가운데 살다가 그들과 함께 그들이 받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과 의식주로 만족하며 오직 천국을 소망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더러운 것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음행, 온갖 더러운 것,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 탐욕을 버려야 한다.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있을 것이다. 특히 더러운 말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우리는 거룩한 말을 하고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
8-14절, 빛의 자녀들
낮과 밤, 빛과 어두움은 누구든지 분간할 수 있듯이, 영적 세계에서도 의와 불의,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은 밝히 분간할 수 있다.
[8절] [이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빛이기 때문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 교인들이 불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들이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들은 어두움에 속해 있었고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온갖 부도덕에 빠져 있었다. 즉 그들은 앞부분에서 말한 음행, 온갖 더러운 것, 탐욕, 단정치 못함,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 등을 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다. 그들은 빛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므로 빛 안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그들은 빛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어두움과 반대로, 빛은 지식과 도덕성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또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세상에 있으며 또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이것이 성도들이 가지게 된 지식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는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로 단장되었고 오직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빛의 자녀처럼 행해야 하고, 지식과 도덕성을 가진 자들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사는 불경건한 생활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제일의 목표로 삼고 날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첫째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고, 또 오직 그의 계명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9절] [이는] 빛의[성령의](전통사본)6)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있음이니라].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는 성령께서 거하시며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맺혀지는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그것은 도덕적 인격과 행위의 열매이다. 그것은 빛의 열매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으며(롬 8:14), 그 열매는 빛의 삶, 즉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이다.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주님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보아야 한다. 빛의 자녀다운 삶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은 우리가 주의 기쁘신 뜻을 잘 깨닫지 못할 때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처한 현실 속에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확인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고(암 5:6), 또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암 5:14), “오직 공법[공의]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라고 말씀하셨다(암 5:24). 하나님을 찾고 경외하고 섬기는 경건한 삶, 또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11절] [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사도는 7절부터 계속 명령어로 교훈했다. 7절, ‘저희와 함께 참여하지 말라.’ 8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이라는 말은 어두움의 일들이 열매 없는 일들임을 보인다. 어두움의 행위들은 유익한 열매들이 없는, 사람답지 못한 행위들이다. 죄악을 사랑하고 죄악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런 헛된 행위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해야 한다. ‘책망하다’는 원어(엘렝코)는 ‘폭로하다, 책망하다’는 뜻이다(BDAG). 우리는 어두움 즉 음란과 더러움과 탐욕의 일들의 헛됨과 무가치함과 사악함을 폭로하고 책망해야 한다.
[12-13절]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휘포 투 포토스)[빛에 의해]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죄인들은 악을 은밀히 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일들, 즉 어두움의 일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다. 그러므로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부끄러워한다. 공공연하게 뻔뻔스럽게 악을 행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악을 행할 때 그 행위의 악함을 느끼면서 행하며 그들의 악이 혹시 드러날 때면 자기 얼굴을 가리우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들이 빛에 의해 나타날 것이다. 죄의 죄악됨과 헛됨과 사악함이 책망될 때, 그것과 대조해 무엇이 옳은 것이며 무엇이 선한 것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는 성도들 중에 바로 살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죽었던 영혼이 거듭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야 한다. 그들은 깨어 불경건한 세상 속에서 빛된 삶을 살아야 한다. 즉 그들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에 합당하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도덕성의 빛을 비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불경건과 불의와 죄악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 우리가 전에는 세상 사람들처럼 어두움이었다. 그것은 무지하고 불경건하고 악하고 거짓된 삶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주 안에서 빛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다. 우리는 참 빛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기며 그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치 말고 도리어 책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성도들은 이제는 열매 없는 헛되고 무가치한 어두움의 행위들에 참여치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런 행위들을 드러내고 책망해야 한다. 7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6:17,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우리는 범죄치 말고 죄를 책망해야 한다.
셋째로, 잠자는 자들은 깨어 일어나야 한다. 누가 잠자는 자들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진심으로 믿으면서도 아직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이 그런 자들이다. 깨어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회복을 진심으로 간구하고 결심하는 것이다. 그는 멸망할 세상과 함께 멸망할 자가 아니다. 그는 멸망할 자들과 구별되어야 하고 회개하고 새로운 삶으로 자신을 증거해야 한다.
15-21절, 지혜, 성령 충만, 찬송, 감사
[15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정확히]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자세히’라는 원어(아크리보스)7)는 ‘[표준에 맞게] 정확히’라는 뜻이며 전통본문에는 ‘행할 것’이라는 말에 붙어 있다.8) 우리는 표준에 맞게 정확히 행할 것을 주의해야 한다. 성경말씀은 우리의 행위의 표준이다. 성경말씀에 맞는 것이 의이다. 의롭게 행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렇지 못한 것이 어리석음이다.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성경의 요점은 우리가 모든 죄를 버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만 믿고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고 기도에 힘쓰고, 성경의 교훈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16-17절] 세월을 아끼라. [이는] 때가 악하니라[악함이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세월을 아끼라’는 원어(엑사고라조메노이 톤 카이론)는 ‘시간을 사서 건지라’는 말인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가장 잘 사용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죄악된 유행과 풍조는 교인들을 죄에 빠뜨리려 하며, 물질적 탐욕과 육신적 쾌락은 교인들을 유혹하며, 세상의 염려들은 교인들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세상의 바쁜 일들은 교인들로 점점 교회의 일에 참여치 못하게 만든다. 또 악한 시대는 때때로 성도들을 핍박한다. 또 이 세상은 전도를 방해한다. 오늘날 공영 방송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 외의 거의 모든 것을 다 전달하고 있다. 헛된 사상들과 이념들, 헛된 오락들, 불륜과 외도, 술취함, 폭력, 음란성 있는 복장, 노래, 춤, 심지어 귀신 이야기들까지 전달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다 전달할 수 있으나,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진리만은 제외되고 있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처럼 세월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사람의 생애는 한 번뿐이다. 우리는 주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밝히 계시되어 있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은 첫째로, 택함 받은 자들의 구원이며, 둘째로, 성도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은 육신적 기쁨을 위하고 세상의 근심과 고통을 잊으려고 사용된다. 그러나 술 취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제력을 잃게 만들고 실수하게 하며 방탕에 떨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술 취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고전 6:10; 갈 5:21). 그러므로 술을 끊는 것은 성도의 좋은 전통이다. 잠언 23: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성도는 술 취함 대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큰 복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위로자’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풍성한 위로를 얻는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원어(플레루스데 엔 프뉴마티)는 ‘계속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뜻이다. 원문에서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어(플레루스데)(현재수동태)는 반복적 행위를 가리킨다. 성령의 충만은 한 번만 가지는 일이 아니고 계속 반복적으로 가져야 하는 일이다. 또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수동적 의미를 가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주체가 아니고 대상이며 성령께서 주체이시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충만히 거하시고 큰 위로와 힘을 주신다.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도의 정상적인 삶은 성령 충만한 삶이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의 행위로 나타난다. 본문의 ‘시’는 시편을 가리킨 듯하고, ‘찬미 혹은 찬송’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속성들과 그의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높이는 노래를 가리킨다. ‘영적인 노래들’은 성도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나오는 간증적 노래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감사와 죄의 회개와 선한 결심 등의 내용이다.
‘서로 화답하라’는 말은 ‘서로들에게 말하라’는 뜻인데, 이것은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들이 하나님께 드려질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성도들에게도 들려짐으로써 그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주게 하고 그래서 다 함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선한 삶을 살게 하라는 뜻이다. 본절과 비슷한 교훈인 골로새서 3:16의 원문은 “모든 지혜로,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번역할 수 있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는 말씀은 찬송과 영적 노래들이 우리의 입이나 목에서만 나와서는 안 되고 마음 중심에서 나와야 함을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찬송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 찬양대는 일반 합창단들과 다르다. 찬양대의 의미와 가치가 다를 뿐만 아니라 찬양의 내용이나 방법도 다르다. 세상 노래들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 중심의 노래들이다. 그러나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 중심의 노래들이다.
시편 33:1-2,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시편 96:1-2,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시편 100:1-4,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20절]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만드신 창조자이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주시는 섭리자이시다. 해마다 늦가을이 되면 우리는 올해도 우리의 육신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건강과 직장과 가정과 사회적 안정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무엇보다, 죄와 허물로 죽었었고 지옥 가야 마땅했던 우리를 값없이 주신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구원하셨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고 복된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드린다.
비록 우리가 지금 고난 중에 있다 할지라도, 지금 우리 자신이나 우리 가족이 무서운 병과 싸우고 있고 경제적 곤란 가운데 있고 자녀 문제로 염려하고 있고 또 우리 사회가 이념의 대립과 갈등, 경제의 파탄, 안보의 불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혹시 우리 자신의 부족과 죄가 없는지 반성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훈련의 현실을 달게 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처한 현실의 혹독함이 아니고, 우리가 참된 믿음과 참된 회개와 간절한 기도가 있는가 여부이다.
욥은 고난 중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다(욥 1:21).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말했다. 참된 성도들에게는 고난은 있으나 보호하심과 회복하심도 있고 합력하여 선을 이룸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21절] 그리스도를[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주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교훈하셨다(마 20:26). 사도 바울은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교훈했고(롬 12:10) 또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다(빌 2:3).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정신이다.
본문의 교훈들을 다시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지혜자로서 주의하며 성경말씀에 맞게 정확히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때가 악하므로 세월을 아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술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진심의 찬송을 올려야 한다. 여섯째로, 우리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일곱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
22-33절, 아내와 남편의 의무
[22-24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알)[그런즉, 그러므로]9)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복종하되 주께 복종하듯이 해야 한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의 말에 대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아내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은 남편들이 자기 아내들의 머리라고 가르친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명령과 순종의 관계이다. 남편들이 아내들의 머리이기 때문에,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자신을 속죄제물로 내어주셨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께 범사에 복종해야 하듯이, 아내들은 범사에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아내들의 복종은 거의 절대적이어야 한다. 단지 한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 즉 죄 되는 일의 경우이다. 그러나 죄 되는 일 외에는 언제든지 무엇에든지 아내들은 그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골로새서 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디도서 2:3-5,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전서 3:1-6,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남편 순종은 거룩한 부녀들의 본이었다.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남편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어 보인다.
골로새서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베드로전서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
[26-27절] 이는 [그가 그것을]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남편들의 의무를 설명하다가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 말한다. 교회의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교회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리셨다.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영혼들이 그 구원의 복음의 말씀을 믿음으로 깨끗함과 거룩함을 얻게 하시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다 성취되었다. 주의 피로 구속(救贖)받고 복음으로 깨끗하게 된 교회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 곧 구원받은 성도들은 실제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즉 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비록 지상에서 이런 노력은 불완전하며 우리의 의와 완전은 여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 없지만, 우리는 교회들 곧 성도들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위해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성화와 온전함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살전 4:3). 성도들이나 교회가 사상이나 생활에 있어서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지극히 성도답지 못하며 교회답지 못한 것이다.
[28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자기의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즉 아내는 남이 아니고 남편의 몸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29-30절] [이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주께서](전통사본)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함이니 이는] 우리는 그 몸의[그 몸과 살과 뼈의]10) 지체임이니라.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자기의 몸을 사랑하며 자기의 몸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먹고 적절한 운동을 하고 또 옷을 입혀 몸을 보호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몸의 지체인 교회를 이처럼 보살피시고 공급하시고 양육하시고 보호하신다.
[31-32절]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결혼이란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일이다.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부모를 떠난다’는 말씀은 결혼이 독립 가정을 이루는 일임을 나타낸다.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말씀은 부부의 관계는 인간 관계 가운데 가장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낸다. 부부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사도 바울은 결혼 관계의 비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성경은 과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결혼의 비유로 종종 표현한다.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요한계시록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풍성한 생명(요 10:10)과 힘을 얻는 것(요 15:4-5)은 영적인 연합의 신비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다.
[33절]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존중하라, 존경하라].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하고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다시 정리해보자. 첫째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에 밝히 교훈된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성경은 남존여비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와 가정의 질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돕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셨다. 그러므로 아내는 자기 남편을 자기의 머리로 여기며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교회 곧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는 자기의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본문은 아내들이 범사에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교훈한다. 그것은 죄 되는 일 외에는 항상 복종하라는 뜻이다. 또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둘째로,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도 성경에 밝히 교훈된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아내는 남편의 몸의 한 부분, 즉 그의 갈빗대이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십자가에 속죄제물로 자신을 내어주심같이, 남편은 자기 아내를 무조건적으로,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순종생활로 나타나야 한다. 아내의 순종과 남편의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순종할 때 우리 자신도 우리 가정도 평안하고 복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말고 억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과 그의 계명들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았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속죄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셨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게 하셨다. 우리는 그 은혜를 잊지 말고 억만분지 일이라고 보답하는 양으로 모든 죄를 멀리하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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