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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
1-11절, 땅엣것을 죽이고 위엣것을 찾으라
[1-2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본문은 위엣것을 찾고 땅엣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주된 관심과 삶의 목표를 위엣것에 두고 땅엣것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하나님의 뜻이다.
‘위엣것’이란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29). 또 성경은 우리의 거룩한 삶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살전 4:3). 그러므로 우리가 위엣것을 찾는 것은, 우리의 주된 관심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두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순종하는 데 두고 천국에 두고 믿음의 일, 전도하는 일, 거룩한 삶을 사는 일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삶의 목표이다.
땅엣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 일, 육신의 일, 의식주에 관한 일, 썩는 양식의 일이 우리의 삶의 주된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것들은 일시적이며 지나가는 것이고 불경건과 부도덕으로 더럽혀져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은 다 선하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성도에게 정당한 일이지만, 성도들은 그것들을 우리의 삶의 주된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땅엣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산 자들이다. 우리의 죄악된 옛 자아(自我)는 죄와 세상과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우리는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 다시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된 관심은 땅의 것들이 아니고 하늘의 것들이어야 한다.
[3-4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가 위엣것을 찾고 위엣것을 생각해야 할 이유는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이라고 표현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며 우리의 생명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고 장차 그가 다시 오실 때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20-21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했다.
[5-6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不淨)과 사욕(邪慾)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전통본문)6) 임하느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땅에 있는 지체’는 우리의 몸을 가리키지 않고 우리 몸의 죄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다음에 열거된 음란, 부정(不淨),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등이다. 단순히 몸의 학대인 금욕(禁慾)과 고행(苦行)은 성화를 위한 바른 방법이 아니다(골 2:18-23).
‘음란’은 정당하지 않은 모든 성행위를 가리킨다. 성(性)은 정상적 부부 관계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부정’(不淨)은 생각과 말과 행실에 있어서 더러운 것을 가리킨다. ‘사욕’(邪慾)과 ‘악한 정욕’도 정당치 않은 감정과 욕망을 가리킨다. 이 네 가지의 말들은 주로 성적인 죄악에 관계된다. 이 세상은 언제나 음란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는 텔레비젼이나 인터넷 등을 통한 음란물들이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의 음란한 풍조들을 조심해야 한다. 성도들은 남녀관계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 성도들의 옷차림도 단정해야 한다(딤전 2:9). 미니 스커트나 앞이 파진 옷이나 소매 없는 옷이나 옆이 갈라진 치마나 딱 들러붙는 바지 등은 피해야 한다.
‘탐심’은 주로 물질에 관한 말이다. 탐심은 이미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마음이다. 탐심은 하나님 대신 물질을 최고 가치로 두는 우상숭배이다. 우리는 탐심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의 환경여건에 감사하고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느니라”고 말했다. ‘이것들’은 음란, 부정(不淨),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을 가리킨다. 이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성도는 이런 죄악들을 회개했지만, 회개치 않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음란과 탐심의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다.
[7-8절]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忿)과 [노(怒)와](원문)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우리도 과거에 음란과 탐심 가운데 살았을지라도 이제는 예수님 믿고 죄씻음 얻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의 옛 죄악성들을 다 죽이고 그 행위들을 다 벗어버려야 한다. 본문은 우리가 버려야 할 죄악들을 또 열거한다. 분과 노와 악의와 훼방과 입의 부끄러운 말 등이다. ‘악의’(惡意)는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리키고 ‘훼방’은 남을 말로 비방하는 것을 가리킨다. ‘부끄러운 말’이라는 원어(아이스크롤로기아)는 더러운 욕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
[9-10절]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이는 너희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입었음이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위에 열거한 악들에 더하여, ‘거짓말’은 매우 나쁜 악이다. 거짓말은 마귀가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속일 때에 사용한 것이다. 마귀의 근본적 특징은 거짓과 속임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특징은 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이 버릇이 되지 않도록 사소한 일에서부터 진실 훈련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를 미워하시며 진실한 자를 사랑하신다.
‘옛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정죄되었던 옛 자아를 가리킨다. ‘새 사람’은 구원받은 새 자아를 가리킨다. 그 새 사람은 ‘우리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이다. 구원의 두 요소는 지식과 도덕성이다.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때는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었을 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을 때이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버렸고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모든 죄악과 거짓을 버려야 한다.
[11절]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野人)[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Scythian)[거칠고 무례한 자]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거기’는 ‘새 사람의 세계’를 가리킨다. 거기는 이방인이나 유대인, 할례 받은 자나 할례 받지 않은 자, 야만인이나 문명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요’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와 의(義)가 충족하며 그 외에 무엇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구원의 충족한 원인과 조건이시다. 예수님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치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에 있어서 ‘모든 것’이시다. 또 그리스도께서 ‘만유 안에 계신다’는 말은 그가 구원받은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모든 죄를 씻음 받고 그와 함께 다시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땅엣것들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땅엣것들은 이 세상의 헛된 일들과 죄악된 일들을 가리키며,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살며 이 세상의 일들을 행하고 이 세상의 죄악 되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즐기기도 하지만, 우리는 일시적이며 허무하고 많은 경우 죄악으로 더럽혀 있는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하고 그것들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한다. 실상, 이 세상 것들은 다 지나가는 허무한 것들이다(전 1:2).
둘째로, 우리는 위엣것을 찾아야 한다. 위엣것은 하나님과 그의 뜻과 그의 일에 관한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의 주된 관심을 하나님께 두며 천국에 두고 하나님의 일에 두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데 두고 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데 두어야 한다. 우리가 힘써야 할 일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일이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일이며 성화(聖化)를 이루는 일이며 전도하는 일이며 교회의 일들이며 참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치 있는 선한 열매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관심을 두고 그런 일들을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특히 땅에 있는 지체, 곧 육신의 죄성을 죽여야 한다. 우리는 음란과 탐심과 분노와 악의와 훼방과 더러운 욕설과 거짓말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온유함을 품어야 하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덕스러운 말을 하며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와 성도가 되었으므로 성도답게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버리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것으로 옷을 입어야만 한다.
12절, 긍휼과 겸손과 오래 참음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성도들이 옛 사람을 벗어버렸고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즉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성도의 도덕적인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구원에 근거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와 거룩을 단번에 입혀주신 후 거기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우리를 권면하시고 격려하신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라고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해 말한다. 선택의 가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에 있다.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특별한 사랑과 복을 받은 자들이다. 여기에 선택의 가치가 있다.
선택의 목적과 증거는 거룩함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그 죄로부터 건져내시고 그 죄들을 씻어 깨끗케 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택하셨다(엡 1:4). 성도(聖徒)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하여진 자들이다(고전 1:2). 그러므로 사람이 죄와 불신앙 가운데 사는 것은 버려두신 증거이며,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씻음을 받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은 선택받은 증거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을 열거한다. 먼저 ‘긍휼과 자비’를 말한다. ‘긍휼’이라는 원어(스플랑크나 오이크티르무)는 ‘긍휼의 심정’이라는 말이다. ‘긍휼과 자비’는 비슷한 단어이다. 긍휼과 자비는 멸시, 학대, 악행과 반대되는 말이다. 그것은 택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다.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향해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가지셨다.
죄의 결과들을 보면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하다. 건강하고 평화롭고 안전하고 사랑이 넘쳐야 할 사람들에게 죄로 인하여 고생스럽고 불행한 일들이 많다. 거기에는 온갖 질병들과 전염병들과, 가뭄, 홍수, 태풍, 폭설, 지진, 화산, 해일 등 자연 재해들이 있다. 또 인간 사회에는 미움과 싸움, 위협과 납치, 폭행과 살인이 있고 배신과 이혼이 있고 각종 사고들이 있고 비참한 전쟁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아니라도, 사람은 늙고 쇠약해지고 마침내 죽고 만다. 이 불행이 다 죗값이다. 긍휼과 자비는 이런 불행들을 안고 사는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심정이며, 구원받은 자들이 본받아야 할 마음이다. 우리는 죄 때문에 저주받은 이 세상에서 불행을 안고 사는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며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또 우리는 구원받은 형제들을 향해서도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본문은 또 ‘겸손과 온유’를 말한다. 겸손과 온유는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가진 자들이 가지는 덕이다. 겸손과 온유는 교만, 높은 마음, 자랑, 멸시, 거친 말에 반대되는 말이다. 교만은 마귀가 정죄 받은 죄이며(딤전 3:6) 사람이 멸망으로 나아가는 악이다(잠 16:18).
교만은 사람이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생긴 어리석은 죄악이다. 사람은 자신을 바로 알 때 겸손해질 수 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과 같은 나’라고 표현하였다(창 18:27). 더욱이, 사람은 완전하지 않고 죄와 부족이 많은 자이다. 완전히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의 마음에는 악과 거짓이 있어서 때때로 그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을 높이거나 자신의 선함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겸손해야 한다. 죄와 부족이 많은 인생은 그렇게 존귀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부르셨다(사 41:14).
겸손과 온유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고(눅 2:21) 인간 부모에게 복종하셨고(눅 2:51)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눅 2:41-42). 그는 30세쯤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마 3:13-17). 그는 사람들과 함께 33년 동안 사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지극한 겸손의 사건이었다.
겸손과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과 교회 직분자들에게 꼭 필요한 덕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겸손과 온유를 본받아야 한다. 교만은 마귀의 죄악이요, 겸손은 주 예수님의 덕이다. 모세는 겸손하고 온유하였다(민 12:3). 신명기 17장에 보면, 왕이 되는 자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곁에 두고 늘 읽음으로써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교훈되어 있다(신 17:18-20). 오늘날도 성도들과 교회 직분자들은 겸손과 온유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마 20:26-27).
본문은 또 ‘오래 참음’을 말한다. 오래 참음은 조급함과 반대된다. 조급한 자는 자기의 마음과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는 자제심이 적고 쉽게 성질을 내고 오해와 잘못된 판단을 잘한다. 그러나 오래 참는 사람은 모든 일을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처리할 것이다. 그는 비록 자기에게 잘못을 행한 자에 대해서도 그들이 바른 생각과 깨달음을 가질 때까지 기다려 주는 여유를 가질 것이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 상대의 잘못은 아마 과거의 나의 잘못이었고 또 미래의 나의 잘못일 수도 있다. 사람이 다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생각한다면, 성급하게 남을 정죄하고 격노할 것은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했다(13:4). 우리가 상대방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잘못으로 인해 상한 우리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고 그가 그의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무엇보다 오래 참는 것이다. 그것이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사람은 반복해 하나님을 대항하고 범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고 노하기를 더디 하셨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도 오래 참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본문은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열거한다. 첫째는 긍휼과 자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들이므로 하나님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웃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도록 교회로 인도해야 하고, 또 구원받은 성도들 간에도 서로 사랑하고 상대방의 부족과 연약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둘째는 겸손과 온유이다. 우리는 피조물인 인생, 특히 죄인인 인생에게 합당치 않은 교만과 높은 마음을 다 버리고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인정하는 가운데 겸손과 온유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 특별히 우리 주 예수께서는 친히 겸손과 온유의 마음을 교훈하셨고 본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그의 마음을 본받아 겸손과 온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셋째는 오래 참음이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아는 자는 상대의 부족을 볼 때도 오래 참을 수 있다. 또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에 대해 오래 참을 수 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가지신 사랑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도 연약한 형제들을 향해 오래 참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13-15절, 용서, 사랑, 평안, 감사
[13절] 누가 뉘게 혐의[비난할 일]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그리스도]7)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 그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치 않는 자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혼란만 가져올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마 18:15-17).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긍휼과 자비와 오래 참음에서만 나올 수 있다. 잘못은 잘못이고 악은 악이다. 그러나 우리가 긍휼과 오래 참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자를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고 불완전하여 이런 저런 실수와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서로 용서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많은 죄와 부족을 용서하셨다. 우리의 죄가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을 때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형제의 작은 죄에 대해 더 잘 용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합당한 일이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8:21-35에서 우리가 이웃의 허물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한 비유로 말씀해주셨다. 그 비유에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용서는 1만 달란트 빚진 종이 그 빚을 탕감받은 것과 같고,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의 죄는 1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빚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1만 달란트와 1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므로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다. 당시에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한 데나리온을 약 10만원으로만 보아도, 1만 달란트는 약 6조원 가량이며, 거기에 비해 1백 데나리온은 약 1,000만원 정도에 해당한다. 6조원과 1,000만원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이다.
지옥 갈 우리의 죄악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과, 우리가 우리 동료의 잘못들을 용서하는 것과는 이런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용서를 받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은 너무 합당한 일이다. 더욱이,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지금까지 크고 작은 많은 실수와 잘못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계속 용서해주신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자의 잘못을 한두 번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주 예수님의 교훈과 같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마 18:22) 용서해주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용서는 사랑의 첫걸음이요 또 참된 사랑의 기초이다. 용서 없이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부족이 많은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용서로 표현되었듯이, 우리의 사랑도 이웃을 위한 용서로 표현되고 증거되어야 한다. 그것이 요한복음 13장에 증거된 대로 주께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뜻이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단지 봉사의 정신을 가르치시기 위함이 아니고, 서로 진심으로 용서함으로써 참된 사랑의 교제를 나누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주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던 것이다.
[14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은 참 중요하다. 주께서는 사람의 생활 규칙인 십계명을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하셨다(마 22:37-40). 그 첫 번째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우리 이웃을 우리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또 그는 우리의 생활 지침을 한마디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표현하셨다(요 13:34). 사도 바울도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하였다(롬 13:8-10).
본문은 사랑을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표현한다. ‘온전하게 매는 띠’라는 원어는 ‘완전함의 띠’(KJV)라는 뜻이다. 사랑이 완전함의 띠라는 말은, 사랑 자체가 완전한 덕이라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사랑을 통해 완전한 일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용서로 표현되는 사랑만이 교회가 서로 연합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하였다(벧전 4:8).
[15절] 그리스도의[하나님의](전통사본)8) 평강[평안]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평안]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다(요 14:27). 사도 바울도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살후 3:16).
“하나님의 평안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는 말씀은 때때로 우리가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때때로 염려하며 근심하며 불안해하고 낙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즉시 우리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은혜를 간구할 때,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케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6-7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교훈하였다.
개인의 마음의 평안은 또한 서로간의 화평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평안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이 마음으로 평안을 누릴 뿐 아니라, 또 모든 성도가 한 몸이 되어 서로 거룩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큰 가족이며 또 우리는 사랑과 화목함으로 그 사실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러나 진리와 거짓이 혼합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고린도후서 6:14-16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말했다. 특히, 요한계시록 18:2는 말세에 나타날 바벨론 곧 적그리스도의 나라의 특징이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 즉 혼합주의적 세계일 것을 예언했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사랑이나 교회의 하나 됨의 이름 아래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포용하고 심지어 이방종교까지도 포용하려는 움직임은 성령의 일이 아니고 미혹의 영인 사탄의 일인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바른 지식과 믿음 안에서 사랑으로 교제하고 하나 됨을 나타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성경을 배우고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또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배우고 확신하고 실천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 감사와 찬송을 올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그를 찬송하며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셨고(사 43:7, 21), 또 그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것도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었다(엡 1:6, 12, 1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20에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옥 갈 만한 큰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의 잘못을, 만일 그들이 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몇 번이든지 용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십계명의 정신이며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이다. 이것은 율법의 완성이며 우리를 완전함으로 묶는 띠이다. 참된 교회와 미래의 천국의 모습은 사랑의 교제이다.
셋째로,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을 소유해야 하고 또 서로 간에도 화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평안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말미암은 평안이다. 그것은 실상 몸의 건강과 경제의 안정과 환경적 평안까지도 포함한다. 또 평안을 소유한 자는 서로 간에도 화목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늘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믿음 없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범사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16-17절, 말씀 충만, 피차 권면, 찬양과 감사
[16-17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주를](전통본문)9)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과 그에 관한 말씀들을 다 포함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들은 네 권의 복음서들과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들은 사도들의 서신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너희 속에’라는 말은 ‘너희 마음 속에, 즉 너희 생각과 사상 속에’라는 뜻이다. 목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로 충만해져야 한다.
요한복음 15:7에 보면, 주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실 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8:2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들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딤후 3:16) 성경에는 불필요한 말씀들이 없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가르치고 배우기를 힘쓰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과 그에 관한 사도들의 말씀들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 특히 신약성경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할 수 있다. 시편 1:2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되다고 말했다. 성경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는 말씀의 충만함을 얻게 될 것이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한다고 고백했고 그 말씀을 종일 묵상하며 새벽 전에 바라고 묵상한다고 말했다(127, 97, 147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함을 얻었을 것이 분명하다. 사도행전 17:11-12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고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성경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자는 말씀의 충만함을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이다. 시편 119:98-100,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이 지혜를 가진 자는 남을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다.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우리는 성경말씀의 충만함과 지혜를 얻어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은 성도의 신앙생활이나 교회 생활에 한 중요한 요소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1, 14,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히브리서 3:13,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라는 구절은 원문에서 “모든 지혜로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라고 번역할 수 있다(KJV, NASB).
본문은 찬송을 통해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라고 말한다고 보인다. 찬송시로 가르치고 권면하라는 말씀은 얼른 보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예언적 노래를 기억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구약의 시편들에는 이렇게 가르치고 권면하는 내용들이 있다. ‘시’는 구약의 시편을 가리키고, ‘찬미’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찬송들을, 또 ‘영적인 노래들’은 기타 회개와 간증과 권면의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찬송가의 노래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송의 내용들뿐 아니라, 또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며 믿음에 유익을 주는 내용들이다.
또 우리는 마음에 감사함으로 주를 찬양해야 한다. 우리의 찬송의 대상은 하나님뿐 아니라,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계시록 5:13은,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말하였다.
‘마음에’라는 원어(엔 테 카르디아)는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찬양이 목소리로만 해서는 안 되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함을 보인다. 참된 찬송은 마음의 찬송이다.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 찬송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찬송이 되지 못한다.
‘감사함으로’라는 원어(엔 카리티)는 ‘은혜로’(KJV) 혹은 ‘감사함으로’(NASB, NIV)라는 뜻이다.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 곧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은혜에 관한 것이며, 또 그 은혜를 받은 자들만이 참으로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다.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다.
찬송은 성도의 의무이며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신다(시 22:3). 시편은 우리가 ‘새 노래’ 곧 구원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교훈하며(시 96, 98편) 또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시 150:6). 히브리서 13:15는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교훈한다. 우리는 찬송할 때 우리의 육신적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또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시 96:9) 하나님께 찬양해야 하며,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빌 1:10) 아름답고 조화롭고 질서 있게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우리는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과 그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며 그의 이름으로 기도도 찬송도 올리며 선한 봉사의 일도 행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와 생명이시며 기쁨과 힘이 되신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대속 사역을 이루시고 우리의 의가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말씀의 충만함을 얻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피차 가르치고 권면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말씀으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올리는 시와 찬미와 영적 노래들이 서로에게 교훈이 되고 권면과 격려가 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찬송은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믿음의 증진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다.
셋째로,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하며 범사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인해 하나님께 항상 찬송하며 감사해야 한다.
18-21절, 가정 윤리
본문은 가정 윤리, 즉 가족들이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 교훈한다.
[18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첫째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 안에서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에베소서 5:22-2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이 교훈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에 근거한 것이다(창 2:18; 딤전 2:11-13).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을 만드실 때 남자를 만드신 다음,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를 돕는 자를 만드시기 위해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로 여자를 만드셨다. 여자는 남편을 돕는 자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인간 창조의 본래의 질서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녀평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 풍조에 근거하여 성경의 교훈을 부정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의 교훈은 옛 시대에 제한되지 않는다. 사도들은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다(살후 2:15).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복을 누리는 일들에는 남녀나 사회 신분이나 민족의 차별이 없지만, 가정과 교회에서의 남녀의 역할과 위치는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다.
[19절]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둘째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그를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에베소서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베푸셨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이었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고전 13:4). 그러므로 남편은 자기의 아내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거칠게 대하거나 괴롭히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아내는 남편의 몸의 귀한 한 부분인 갈빗대로 만들어진 자이다. 그는 남편이 사랑의 품으로 품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아내를 학대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몸을 학대하고 자기의 행복을 깨뜨리는 어리석은 일이며,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몸을 사랑하고 자기의 행복을 가져오는 지혜로운 일이다.
성경의 교훈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 즉 여성을 인격적 존재로 존중하지 않고 학대하는 사상과는 다르다. 남존여비 사상은 일방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섬기라는 사상이지만, 성경의 교훈은 쌍방적이다. 성경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교훈하지만, 또한 동시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실제로 아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실제로 남편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으로 행복을 느끼며 산다. 아내 사랑은 아내에게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주고 그것은 곧 남편을 위한 봉사와 수고로 이어진다. 부부가 싸우면 사랑이 식어지고 행복도 사라지지만, 서로 사랑하면 가정은 피곤한 세상 생활에서 안식처가 될 것이다. 부부 사랑은 결국 가정의 행복이 된다.
[20절]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셋째로, 자녀는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모든 일에’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일, 즉 죄 되는 일 외의 모든 일을 가리킨다.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은 영어성경들의 번역처럼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주 예수께서는 그 모친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셨다(눅 2:51). 믿음의 여인 에스더는 부모처럼 자기를 길러준 친척인 모르드개에게 항상 순종하였고 왕후가 된 후에도 그러하였다.
부모를 멸시하고 그들의 말을 순종치 않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신명기 21:18-21은, 그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그 부모가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성읍 장로들에게 고발하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 죽임으로 그들 중에서 악을 제하라고 교훈하였다. 신명기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잠언 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21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가정 윤리에 있어서, 넷째로, 부모는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아야 한다. ‘아비들아’라는 말씀은 자녀 교육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아버지에게 있음을 보인다. 물론 어머니에게도 책임이 있다.
‘자녀를 격노케 말라’는 것은 교훈과 교육을 전제한 것이다. 무관심하면 격노케 할 것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교훈하려고 할 때 그를 격노케 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격노케 한다는 것은 성질을 나게 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보통 부당한 명령이나 처분에서 일어난다. 부모의 정당한 명령과 처분에 화를 내는 것은 불순종이지만, 부모라고 해서 자녀에게 부당한 명령을 해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녀에게 무리하게 또는 감정적으로 대하면 자녀의 마음이 상하게 되며 그것은 자녀 교육에 유익보다 해가 된다.
자녀는 마음이 상하면 마음 문을 닫고 낙심하고 의욕을 잃고 열등감을 가지고 자포자기하거나 반항적이게 되기 쉽다. 감정을 상하게 하는 교훈과 교육은 유익보다 해가 된다. 자녀 교육은 성경의 교훈 안에서 사리에 맞게 이루어져야 하며 자녀를 격노케 하거나 낙심케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자녀가 잘못했을 때 책망하고 또 필요하다면 체벌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그러나 그때에도 무엇이 잘못이며 왜 잘못인지 충분히 이해시킨 뒤 매를 들어야 하고 감정적으로 행하여서는 안 된다. ‘자녀를 격노케 말라’는 교훈은 체벌도 미운 감정으로가 아니고 사랑의 심정으로 해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효과가 없고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하듯,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것은 주 안에서 마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내를 남편을 돕는 자로 만드셨고 남편을 그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아내가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셨듯이, 남편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해야 한다. 그는 아내를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기희생적인 온전한 사랑이다. 남편은 그런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아내의 복종, 남편의 사랑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일 뿐 아니라, 아내나 남편 자신에게도 행복이 된다.
셋째로, 자녀는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의 정신이며 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것은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의 형통의 복이 약속된 의무이다.
넷째로, 부모는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바른 교훈으로 교훈하고 자녀가 잘못하였을 때 책망하고 체벌도 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때도 감정적으로 하지 말고 사랑의 심정으로 해야 한다.
3:22-4:1, 직장 윤리
[22절]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하나님]10)를 두려워하여 성실한(하플로테스)[단순한, 진실한] 마음으로 하라.
성경은 주인과 종의 존재를 인정한다. 우리가 그것을 노예제도라고 부른다면, 성경은 노예제도를 인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예제도 자체는 악이 아니다. 옛 시대에는 경건한 성도들에게 종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종들이 있었고(창 12:16), 욥에게도 종들이 있었다(욥 1:3). 사람이 빚을 많이 졌을 때나, 전쟁 포로가 되었을 때, 흔히 종이 되었다. 그러므로 노예제도는 그 자체보다, 주인들이 종들에게 어떻게 대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보인다.
인류 역사상 노예제도는 많은 폐해가 있었다. 종들에 대한 비인격적인 학대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노예제도는 달랐다. 성경에는 종들에 대한 많은 배려가 있었다. 물론 종은 종이므로 주인에게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고 자유와 권리의 많은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안식년이라는 법을 통해 히브리 종들이 6년간 일한 후에 제7년에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다(출 21:2). 또 여종을 취한 주인은 평생 그에게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을 끊지 못하게 하셨다(출 21:10). 또 종의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아주게 하셨다(출 21:26). 잠언 12:10에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짐승에 대해서도 그렇다면, 하물며 선한 사람들이 종들에게 잔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옛날과 같은 노예제도는 없지만, 새로운 형태의 주종의 관계가 있다. 그것은 고용주와 피고용인 간에 계약에 의한 지시와 순종 관계이다. 직장에서 고용주와 피고용인들 간에는 약속된 주종의 관계가 있다. 그것은 강제적 노예제도는 아니지만, 새로운 형태의 주종 관계이다. 물론 이 관계는, 어느 한쪽이 원치 않는다면 또 합당한 이유들이 있다면, 해지할 수 있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한 본문의 교훈은 현대 사회에서 고용주와 피고용인 간의 관계나 상사와 직원 간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
본문은 종들이 모든 일에 육신의 주인들에게 순종하라고 말한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 즉 죄 짓는 일 외의 모든 일을 가리킨다. 그 모든 일은 합리적인 일뿐 아니라 때때로 불합리하거나 무리한 일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육신의 주인들’이라는 말은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대조된다. 우리의 참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세상에서 종들에게는 육신의 주인이 있다. 그들은 그 주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거역하지 않고 잘 따르는 것을 말한다. 순종에는 말대꾸나 말대답이 합당치 않고 단지 ‘예’라는 대답이 필요하다. 종은 자기의 잘못에 대해 많은 변명을 할 필요도 없다. 다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시정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꼭 필요한 말이 있으면, 기회를 보아서 겸손한 태도로 주인에게 조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외모만 보기 쉽다. 그래서 나쁜 종이라도 주인이 볼 때에는 일을 잘한다. 그러나 주인이 보지 않을 때는 자기 일에 충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종은 주인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자기 일에 충실한 종이다. 주인이 안 보는 데서도 잘해야 참으로 잘하는 것이다. 성도는 직장에서 이런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윗사람이 보는 데서만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 말고, 그가 보든지 안 보든지 자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가 주를 두려워하여 단순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고 교훈한다. ‘주를 두려워하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다 판단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을 징벌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라는 뜻이다. 자신에게 무엇이 유리할지 이것저것을 계산하지 않고, 요령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임무, 맡겨진 직무를 다하는 것 그것이 단순함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성도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단순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23-25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편애함, 불공정함]이 없느니라.
종은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쉬운 일이나 어려운 일이나, 합리적인 일이나 무리한 일이나, 죄짓는 일만 빼놓고는 무슨 일이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해야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주께 하듯 순종하듯이, 종은 주인에게 주께 하듯 순종해야 한다. 그 이유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알기 때문이다. ‘유업의 상’은 천국에서의 상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의 삶의 현실에서 주 하나님을 섬긴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또 고용인은 고용인대로, 피고용인은 피고용인대로,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목사는 목사대로, 일반 성도는 일반 성도대로, 우리는 다 세상의 직업에서나 교회의 직분과 직책에서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또 그 결과로 우리는 장차 영광스런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때 우리가 땅 위에서 우리의 처한 현실에서 의롭고 선하게 일한 대로 거기서 하나님께 상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불의를 행하는 자는, 비록 그것을 은밀히 행했을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편애함이나 불공정함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의 삶의 현실에서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심정으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일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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