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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형제를 사랑함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1-11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1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에이 에크 투 데우 에스틴)[하나님께로서 나왔나](NASB, NIV)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우리는 영들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영은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말과 교훈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사람의 사상과 가르침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는지 시험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상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거짓 목사들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 사상이나 따라간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넘어가는 자가 될 것이다.
[2-3절]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하나님께로서 난] 것이요, 예수를[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8)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영을 분별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여부이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라는 말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일, 즉 성육신(成肉身)을 말한다(요 1:1, 14).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독특한 인격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는 영은 하나님께로서 난 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하나님께로서 나오지 않은 영이며,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성육신의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이며 단지 그 교리뿐 아니라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영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며 거짓된 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근본교리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거짓 목사들은 주의 예언하신 대로 사도 요한 당시에 벌써 세상에 왔다(마 24:5, 11, 24). 이미 말세가 시작되었다.
[4절]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하나님께로서 났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말은 중생(重生)하였다는 뜻이다. 또 중생한 저들은 저 거짓 목사들에게 미혹되지 않았고 그들을 배격하고 이겼다. 왜냐하면 성도들 안에 계신 이, 즉 성령께서 세상에 있는 이, 즉 사탄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거짓 사도요 거짓의 역군이라고 말했다(고후 11:4, 13-15). 또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다(갈 1:6-8). 오늘날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은 적그리스도의 영 즉 이단들이 많다.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신천지 등 많은 사이비 이단 종파들과 천주교회와,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목사들과 성경 교훈을 넘어서는 은사주의자들 등이 그러하다.
[5-6절]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저 거짓 교사들은 세상에서 나왔고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온 혹은 세상에 속한 말을 하며 세상 사람들이 저희 말을 듣는다.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교회에 다니기도 하며 예배에 참석하기도 하며 또 심지어 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고 교회의 직분을 가졌을 수도 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았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으므로 바른 교훈, 역사적 기독교를 듣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자들은 그의 교훈에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5: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셨고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신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 곧 주의 사도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즉 중생한 자들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우리의 말 곧 바른 말,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듣는다. 이로써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은 구별된다. 진리의 영은 주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복음 진리의 말씀, 곧 전통적 정통 교리를 듣고 믿고 인정하고 고백하지만, 미혹의 영은 우리의 바른 말과 바른 교리를 듣지 않고 인정치 않고 고백하지 않는 것이다.
[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임이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함을 계속 강조한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육신적 사랑이 아니고 거룩한 사랑을 가리킨다. 미움과 싸움은 마귀에게서 나온 성질이다.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중생(重生)한 표가 된다.
[9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일에서 밝히 나타났다. 하나님께는 독생자가 계시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독생하신 아들(獨生子)]9)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는 시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적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은 사람의 본질을 취해 사람으로 보내셨다는 의미 즉 성육신(成肉身)의 의미일 뿐 아니라, 또한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는 의미이다. 성육신은 신비 중의 신비요 기적 중의 기적이지만, 성육신하신 그가 속죄제물로 죽으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아담의 자손인 온 인류의 영혼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었으나(엡 2:1),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죄씻음과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힐라스몬)[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실에서 우리는 참 사랑을 발견한다.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같은 사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주셨다. 그것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게 하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성경의 속죄 개념에는 유화(宥和)라는 개념이 있다. 죄인은 속죄가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다.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이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의 뿌리깊은 죄악성은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1만 달란트 빚진 것 같은 우리의 큰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마 18:23-35).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큰 구원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과 이웃들의 부족과 실수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짓 목사들이 많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영을 분별하는 기준은 바른 교리이다. 특히 성육신의 교리는 매우 기본적인 교리이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은 명백히 이단적이다. 또 바른 교리에서 볼 때, 교회연합운동이나 타협적 복음주의나, 은사주의도 매우 잘못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 죄를 위한 유화제물로 세상에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밝히 깨달아야 한다. 유화제물은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힌다는 뜻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하나님의 이 지극히 높고 깊고 넓은 사랑을 우리는 조금이라도 깨닫기를 원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벌레와 같은 우리를 위해 자기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의 부족을 덮어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12-21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
[12-13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물질적 형체를 갖지 않으신 영이시므로(요 4:24)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시다. 그러므로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딤전 6:16).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놀라운 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것은 큰 불행이며,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큰 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로 그의 선한 품성과 그의 능력과 평안을 누리게 하며 기도의 응답을 얻게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이런 복된 하나님과의 연합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케 된다는 뜻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이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우리 속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칭의(稱義)로 이루어지는 것뿐 아니고 또한 성화(聖化)로도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칭의가 구원이지만, 그것이 성화의 과정에서 더 구원답게 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도 요한은 3:24에서도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과 감화,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심을 느끼며 체험하게 되고 또 그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더욱 잘 행하게 된다.
[14-16절]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기독교 복음의 확실성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직접 보고 증거하였다는 사실에 있다(눅 24:46-48; 요 21:24; 행 5:32).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죄인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가장 기본적 진리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신자의 참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는 하나님과 정신적으로 일체가 된다. 즉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에 증거된 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은 것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 것이요 믿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시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도는 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다시 반복하기를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 ‘그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자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이다. 참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함의 실천은 참 신앙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증거 즉 하나님과의 연합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17절] 이로써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로써’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함으로써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케 되었다는 뜻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구원이 법적인 구원인 칭의(稱義)뿐 아니라 새 생활로 나타나는 성화(聖化)를 통해 우리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 세상에서는 성화까지가 하나님의 뜻이다. 영화(榮化)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다.
이렇게 형제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요일 3:21).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 13:8) 사랑 안에 담대함이 있다. 이 담대함은 또한 심판날에 가질 담대함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왜 이런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가? 그 이유는,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즉 주께서 세상에서 고난 당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죽기까지 형제를 사랑하면, 그가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영광 가운데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은 이 소망의 담대함, 미래의 영광의 확신을 가질 것이다.
[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어린 아기는 엄마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그 품안에서 평안할 수 있다. 그러나 아기가 다른 이에게 가면 울 것이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왜냐하면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형벌’이라는 원어(콜라시스)는 ‘고통’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그 뜻이 본문에 더 적절해 보인다(KJV).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은 자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을 소유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며, 그때 그는 두려움과 고통이 없고 평안과 기쁨이 넘칠 것이다.
[19절] 우리가 [그를]10)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실상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10).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깨달은 자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것이다.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기본적인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이 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들 곧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보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절]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절의 ‘이 계명’은 주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가리킨다(요 13:34).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를 믿는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요한복음 14:21에 보면, 주께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가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나타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고 성도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영적 연합의 증거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바른 신앙고백이 있고 서로 사랑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함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성령을 통해, 즉 성령의 감동과 감화,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느끼며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였는가? 참된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표시이다. 둘째로,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또 계속 그러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야 하고 또 그의 명령대로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미움은 구원받지 못한 표이며 사랑은 구원받은 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과 서로 사랑함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할 때 담대함을 얻고 모든 두려움을 버리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그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가 칭의(稱義)뿐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 있음을 여실히 증거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때 우리는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되고 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모든 두려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믿음과 순종은 우리 마음에 큰 평안과 담대함을 줄 것이다.
셋째로, 우리가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증거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을 포함하며 그의 계명의 내용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명령을 실천해야 하며 그의 명령을 실천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지 않는 자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비록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그의 말은 거짓말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함이 없이 그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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