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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죽으심
1-10절, 빌라도에게 넘겨줌, 가룟 유다의 자살
[1-2절]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본디오]62)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고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세운 유대의 총독이었다(눅 3:1).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목표는 예수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로마 총독에게 넘겼다. 죄인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결박하였다. 그들은 새벽에 그 일을 했다. 그 악한 자들은 악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밤늦게도 이른 새벽에도 분주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까닭은, 그들에게 죄수를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18:31에 보면, 빌라도가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또 그들은 예수를 죽임에 있어서 백성들의 비난을 피하려 하였다. 즉 그들은 이 일을 위해 로마 총독을 이용했다. 저 타락한 종교인들은 로마 총독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악을 행했던 것이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지혜로웠으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3-5절]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에게도 양심은 있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양심이 마비되었을 때는 3년간 따르던 주님을 배반하였지만, 그 양심이 깨어났을 때 그는 자기 행동을 후회하였다. 은 30으로 인한 잠시 동안의 기쁨보다 양심의 고통은 더 컸다. 그것이 범죄한 자의 후회와 고통이다. 유다는 그 돈을 쓸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었다. 그는 쓰지도 못할 돈 때문에 주님을 팔아넘긴 헛된 수고를 하였던 것이다.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은 이처럼 무지하고 어리석다.
유다는 예수님의 정죄 당하심을 ‘무죄한 피’라고 증거하였다. 그는 이 말을 통해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거하였다. 이 배신한 제자까지도 주님의 무죄함을 증거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화인 맞은 양심, 즉 완전히 무감각한 양심을 가졌고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나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죄는 매우 컸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다. 또 사도행전 1:18은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고 증거하였다. 이 증거는 그의 자살에 대한 보충적 설명이라고 보인다.
유다가 자살한 것을 보면, 그의 후회는 회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악된 행위를 슬퍼하는 것만이 아니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 또 참으로 회개한 자는 이제 자신의 남은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그러나 자살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고 단지 자기의 행위에 대해 후회하고 절망하는 행위일 뿐이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후 7:10).
[6-10절]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定價)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유대 지도자들의 행위는 마치 불쌍한 나그네들을 위하는 것 같은 위선적 행위이었다. 위선자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칭찬을 얻기 위해 선을 행하지만, 그들의 중심에는 의와 선과 진실이 없다.
마태는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定價)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이 섭리적 사건은 이미 구약 스가랴 선지자의 글에 예언된 바이었다(슥 11:13). 마태가 스가랴의 예언을 예레미야의 예언이라고 증거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주석가 라이트푸트는 유대인 학자 데이빗 김치의 글을 인용하여 예레미야가 선지자들 가운데 첫 번째 지위를 가졌고 그의 책이 선지서들 중에 첫 번째로 놓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브라운). 구약성경의 예언은 이와 같이 놀랍게 성취되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합심하고 열심을 품고 일해야 한다. 악한 지도자들은 새벽부터 악한 일을 위해 모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그렇게 하자.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와 실수를 깨달을 때 단순히 후회에 그치지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와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여 받고 남은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기를 결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의 초자연적 성격을 확신해야 한다. 성경은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 후의 일을 예언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11-26절, 빌라도의 판결
[11절]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 죄목을 씌웠다. 그들은 공회에서 예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냐?”고 물었었으나, 이제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고소했다. 그들은 간교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총독에게 “네 말이 옳도다”(쉬 레게이스)[네가 말하는도다]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총독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증거하셨다. 구약성경은 왕이신 메시아를 예언하였다. 예레미야 30:9, “[너희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에스겔 37:24,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12-14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지만 아무 대답도 안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자기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빌라도에게 끌고 왔고 그가 자신을 변명한다고 바뀔 일이 아니었음을 아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저 모든 것을 아버지께 의탁하셨을 것이다. 빌라도는 그것을 매우 기이히 여겼다.
[15-19절]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前例)가 있더니 그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前例)가 있었다. 그때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었다. 마가복음은 그가 민란을 꾸미고 민란에 살인한 자였다고 증거한다(막 15:7). 그들이 모였을 때, 빌라도는 그들에게 예수와 죄수 바라바를 나란히 석방후보자로 제시하였다. 그는 그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을 알았고 예수가 사형 당할 만한 죄가 없었음을 알았다. 시기는 욕심에서 나오고 미움과 살인을 만드는 무서운 악이다. 총독의 아내도 예수님을 ‘저 옳은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를 상관치 말라고 말했다.
[20-23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선동하고 설득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다. 그들은 예수께 대해 공의로 판단하려 하지 않았고 어떻게든지 그를 죽여 버리려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죄함에 대한 백성의 판단력을 흐려놓았고 그를 죽이자고 설득하고 선동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악한 행동이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라는 빌라도의 질문은 재판관으로서 매우 무책임한 말이었다. 객관적 사실들과 증거들을 종합하여 법률적으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재판관이 사람들의 의견이나 여론에 이끌려 재판하려 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잘못된 일이었다.
무리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다고 말하자, 빌라도는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다. 예수께서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거짓증거를 하셨는가?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셨고 사랑과 거룩과 진실을 가르치지 않으셨는가?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죄목을 제시하지 못하고 더욱 소리만 질렀다.
[24-25절]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옳은]63)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빌라도의 심문은 아무 효험이 없었고 도리어 민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 무리의 외침만 정의인 것 같았으나, 그것은 정의가 아니고 유대 지도자들의 계산된 작전이었다. 과격한 데모도 비슷하다. 그런 곳에는 이성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여지가 없고 오직 선동과 폭력만 있다. 그런 것은 사회를 개선시키기보다 혼란시키고 더 악화시킨다. 그러므로 혁명이나 과격한 폭력적 데모는 거부되어야 한다.
“이 옳은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는 총독 빌라도의 말은 책임회피의 악을 더했다. 그는 예수를 놓을 권세도, 십자가에 죽게 할 권세도 가지고 있었다(요 19:10). 판결은 그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손을 씻는다고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
백성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 핏값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의 형벌을 과연 그들이 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무지한 대답대로, 하나님께서는 후에 그 죄에 대해 보응하셨다. 그는 주후 70년 로마 군대로 예루살렘 성을 처참히 짓밟게 하셨다.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은 무섭다. 최종적으로 그것은 영원한 지옥형벌이다. 그러나 죄를 회개해도 때때로 훈련의 과정이 있다. 그것은 정확한 죗값은 아니지만 죄 때문에 주시는 고난의 훈련 과정이다. 우리에게 가장 최상의 길은 죄를 안 짓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범했을 때는 즉시 또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26절]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죽어야 할 죄인 바라바는 놓여났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죽음에 내어준 바 되셨다. 빌라도의 판결은 불의했다. 그 자신도, 그의 아내도 예수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노력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리들의 여론을 두려워하여 법과 이성과 양심의 판단에 반대되는 불의하고 무책임하고 비겁한 판결을 내렸다.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공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할 그가 그 지위와 권세를 오용하였다. 그는 의로우시고 선하신 예수님께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인 사형을 선고했다.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불의한 판결로 정죄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자신이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해야 한다. 그는 유대인의 공회에서도, 로마 총독의 법정에서도 자신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우리는 그가 자신에 대해 엄숙히 증거하신 대로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따르자. 빌라도는 예수께서 죄가 없음을 알았고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 함도 알았으나 무리의 여론을 두려워하여 법과 이성과 양심의 판단에 반대되는 불의하고 무책임하고 비겁한 판결을 내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 우리는 그 고난의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고난을 각오하고 따라야 한다.
27-44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심, 십자가에 달리심
[27-31절]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Praetorium)(NASB, NIV)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께서는 로마 군병들, 죄 많은 이방인들에게 조롱을 받으셨다. 그들은 조롱을 다한 후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조롱과 침 뱉음과 갈대로 침을 당하셨다.
[32-34절]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64)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신포도주 혹은 포도식초](전통본문)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군병들은 사형집행을 위해 예수님을 데리고 나가다가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자를 만나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웠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친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에 나오셨다(요 19:17). 그렇다면 십자가 형틀이 무거워 예수께서 혼자 지기에 힘드셨고 함께 져 줄 제자들도 없었으므로 지나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들어 그의 십자가를 함께 지웠던 것 같다.
군병들은 골고다(라틴어, calvaria)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신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했으나 마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사형수로 고통을 덜 느끼게 하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고 한다(NBD). 그러나 그는 이미 십자가의 고난을 각오하셨다.
[35-38절]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누가복음 24:39-40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그의 상하신 손과 발을 보이신 것을 보면, 그는 십자가 위에서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히신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피흘림은 물론,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경험하셨고 그 고통은 여러 시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후 그의 옷들을 제비뽑아 나누었다. 요한복음 19:23-24는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었고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어서 제비뽑아 취했다고 자세히 증거한다. 이것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는 시편 22:18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주께서는 부끄럽게도 겉옷과 속옷까지 벗기운 채 십자가에 달리셨다.
군병들은 그런 후 십자가 옆에 앉아 지켰다. 그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죄패가 있었다. 누가복음 23:38의 전통본문과 요한복음 19:20은 그 죄패가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이 죄패는 예수님의 신분을 바르게 증거하였고 그 내용은 온 세계의 각 언어로 알려져야 할 내용이었다.
그때에 그와 함께 강도 둘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십자가에 못박혔다. 예수께서는 강도들과 같은 죄인으로 취급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범죄자 중 하나로 간주될 것이라고 예언한 이사야 53:12의 예언대로 된 것이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 죄인이 되셨다.
[39-44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왕이라면].65)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희롱의 말은,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한 시편 22:7-8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본문은 또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욕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강도는 누가복음에 증거된 대로 곧 회개하였다(눅 23:39-43). 그는 죽기 직전에 구원을 받았다.
밤새 기도와 심문으로 잠을 자지 못하신 예수께서는 무거운 십자가 형틀을 지고 사형장으로 나가셨고 겉옷과 속옷을 벗기는 수치를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피흘림과 큰 고통을 당하셨고 지나가는 자들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다.
본문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받을 각오를 하며 살아야 함을 교훈한다.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인 로마 군병들에게 조롱을 받으셨다. 밤새 기도와 심문으로 잠을 자지 못하신 예수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나가셨다. 그 십자가는 무거워 그가 혼자 지기에 힘 드셨고 함께 져 줄 그의 제자들도 없었으므로 군병들은 지나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같이 가게 하였고 그의 십자가를 함께 지웠던 것 같다. 그는 겉옷과 속옷을 벗기우는 수치를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피흘림과 큰 고통을 당하셨다. 그의 겉옷과 속옷은 제비 뽑아 나뉘었다. 지나가는 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조롱하고 멸시했다.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처음에는 욕하였다. 그러나 한 강도는 누가복음에 증거된 대로 회개했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고난의 길을 가셨다. 예수님 믿는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주를 따라야 한다.
45-66절,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무덤에 장사되심
[45-46절] 제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더니 제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리마](전통사본)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제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였다. 이것은 유대인의 시간으로 말한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시간으로는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이다. 요한복음 19:14는 제6시(그것은 로마 시간 곧 오늘 우리의 시간과 같다고 본다) 즉 오전 6시에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았다고 말하고, 마가복음 15:25는 제3시 즉 오전 9시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가장 악한 죄를 범하는 이 시간 하나님께서 심히 노하심을 잘 나타낸다.
제9시 즉 오후 3시 즈음에 예수께서는 “엘리 엘리 리마 사박다니” 하시며 크게 소리지르셨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그것은 육신적인 고통의 부르짖음이며 또 택자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영의 고통이었다. 갈라디아서 3:13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말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시려고 자기 아들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우셨다. 사람들의 죄의 용서는 이처럼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택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한다.
[47-50절]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예수께서는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 요한복음 19:30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 머리를 숙이고 영혼이 돌아가셨다고 증거했고, 누가복음 23:46은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다고 증거했다. 그는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버지께서 명하신 택자들을 위한 구속(救贖) 사역을 다 이루시고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51-54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몇 가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하나는,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음을 보인다. 히브리서 10:19-20은,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
다른 하나는,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성도들이 장차 부활할 것을 예시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또 하나는,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군병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증거하였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을 잘 모르던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때에 되어진 일들을 보면서 예수께서 죄가 없는 의인이시며(눅 23:47)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다.
[55-56절]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 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들은 십자가 근처에서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잡힐까봐 두려워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은 비록 멀리서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주를 믿고 따르며 주의 멍에를 짊어지는 데에는 여자와 남자의 구별이 없다. 여자들은 일차적으로 가정적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얼마든지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협력하며 주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
[57-61절]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날이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다. 마가복음 15:43은 그가 존귀한 공회원이라고 말한다. 그도 예수님의 제자이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고, 빌라도는 내어주라 명하였다. 아무도 예수님을 동정하거나 도우려 하지 않는 것 같은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아리마대 요셉을 예비하셨고 그의 마음을 감동하셨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갔다. 거기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다. 예수님은 이사야 53:9의 예언대로 부자의 무덤에 묻히셨다. 무덤은 죄인들이 그 죗값으로 들어가는 감옥과 같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셔서 무덤에 내려가신 것이다.
[62-64절]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유대 지도자들은 충성된 증인 예수 그리스도를 ‘저 유혹하던 자’라고 악평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는다”고 고백하였다(고후 6:8).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예수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했다고 증거하였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가 그 말을 했다는 것은 믿었다. 그들은 적어도 오늘날 자유주의자들보다는 더 나았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예수께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제자들이 후에 그것을 삽입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상상치 못하였다. 그들이 상상한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선생의 시체를 도적질한 후 그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시체가 도둑질 당하면 문제가 더 복잡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어도 사흘은 그의 무덤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것을 빌라도에게 요청한 것이다. 그들의 계획은 완전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완벽해 보이는 계획을 헛되게 만드실 것이다.
[65-66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숫군[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빌라도는,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고 말했다. 그들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했다. 실상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생님의 시체를 도적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것은 오히려 그의 부활을 더욱 힘있게 증거한다. 예수께서 실제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이 그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악의 세력이 크고 모든 선을 압도하는 것같이 보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권능의 기적을 행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시려고 자기의 외아들을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모든 악한 죄를 멀리할 것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인도하셨음을 보인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이것은 성도들이 주의 대속 사역으로 장차 부활할 것을 예시하였다.
넷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시체를 훔쳐 간 후 만들어낸 신화일 수 없었다. 빌라도는 파수꾼들이 예수의 무덤을 적어도 삼일 동안 지키는 것을 허락했다. 파수꾼들은 무덤문을 막는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다. 이런 상황은 그의 부활을 더욱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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