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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태극기가 국기로 된 사연
법공양 추천 0 조회 125 16.11.16 22: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국기 만들려고 국제회의까지 열렸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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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초“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가 좋은 반응을 얻어서 많은 관객을 모은 적이 있다. 그 영화에서 실제 태극기가 휘날리는 장면은 별로 많지 않지만, 그래도 그 영화 덕분에 사람들에게 “태극기”라는 말이 오랜만에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이 기회에 태극기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친일파 박영효가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 사실일까?

박영효가 일본 가는 배 위에서 태극기를 만들어서 배에다 게양한 것은 사실이나,
박영효가 태극기의 최초 발명자는 아닌 것 같다는 증거가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있다.

태극기 그림과 그 설명까지 함께 소개한 1882년의 일본 신문에서 박영효가 최초의 창안자는 아니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이미 발견되었고,(1882. 10. 2. 일본 시사신보)

박영효가 일본 가는 배 타기 전에 미국 해군성 항해국에서 발간한 세계국기도감이라는 책에서 이미 태극기 그림이 수록된 것이 발견된 상황에서..(1882년 7월 발행 책자라고 이규태 코너의 이규태 씨가 공개)

“하얀 바탕 가운데에 청홍의 태극 무늬가 있고 사방에 4괘가 둘러싸고 있는 이 태극기 모양을 과연 누가 제일 먼저 고안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하여 다시 한번 진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국기의 필요성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

우리 나라 사람들이 국기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라고도 함. 공식명칭은 조일수호조규)이 체결된 1876년부터였다.

1875년 강화도 초지진 앞에 나타난 일본 군함 운요오<雲揚>호에 우리 포병들이 대포를 발사한 사건도 따질 겸, 이 참에 아예 수호조약까지 체결해 버리자고 온 일본 사람들이,

“운요오 호가 귀국 국경을 지날 때에 국기를 달아 일본 군함이란 것을 표시했는데 왜 포격을 가했느냐”

라고 따진 것이 우리 나라 공식 기록에 나타난 첫 국기 관련 기록이었다.
일본 대표들이 정색을 하고 국기 어쩌고 하며 따지니 우리 나라 조정에서는 국기가 무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대로 답변을 할 사람도 없어, 일본의 페이스대로 회담이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 이 때 대원군 시절의 대신이 조정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 “5년 전, 10년 전에도 프랑스, 미국 군함이 국기 달고 와서 총싸움 하다 간 적 있었지만
-- 그 이후 국기에 대하여 거론하는 것을 본 적이 없거늘 일본 따위가 무슨 잡소리냐”
-- 하고 말았겠지만 당시에는 조정이고 군대고 모두 민씨네 일색이어서 그냥 벙어리였다.

일본은 이 강화도조약의 제1조에서 과감하게 “조선은 독립국이다”라는 구절을 집어넣고.....
(이 구절은 계획적으로 집어 넣은 것으로, 조선 측에서 자꾸 청나라에게 물어 보고 조약 같은 것을 맺어야 한다고 하자 일본이 청나라의 간섭을 피하려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강조해 준 것임)

일본은 또. “정식 국제 조약을 체결할 때는 양국 국기를 달아야 하니 국기를 가져 오시오”라고 했지만, 우리 조정에서는 국기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그걸 가져 오라니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일본도 사실은 일장기를 자기네 배 꽁무니에 달고 다닌 게 얼마 안 되었다. 20년 전 미국 군함에게 당한 꼴을 우리에게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 중이었다 --

그래서 일본의 ‘하나부사’란 수행원이 조선 측 수행원들과 이것저것 상의하더니 그러면 이게 어떠냐 하면서 내 놓은 것이 청-백-홍의 삼색기였다. 임금의 붉은 옷, 관리의 푸른 옷, 백성의 흰 옷의 색깔이 모두 들어 있으니 조선의 실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부사의 말도 일리가 있기는 했으나, 조선을 대표한다는 국기의 모양을 일본 사람의 말만 듣고 결정한다는 것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것이라 하여, 이번 조약에는 양국 모두 국기 없이 그냥 조약을 체결하자고 했고 일본 측에서도 국제관례는 아니지만 이번이 처음이니 봐 준다면서.... 강화도에서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에서는 국기 없이 그냥 진행되었다.

-- 그 때 하나부사란 일본 사람 말 듣고 그대로 안 하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 만약 그대로 했다면 조선의 국기는 프랑스나 네덜란드 국기와 똑 같아질 뻔 했다.
-- 프랑스는 이 삼색이 세로로 나란히 되어 있고, 네덜란드는 가로로 되어 있다

여하튼 이 1876년의 국기에 대한 언급이 우리 나라에서의 국기에 대한 첫 언급이었다.

★ 국기의 제작 ★

조선이 청나라의 허락도 생략한 채 일본과 국제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청나라 측에서는 “아, 조선이 얼마나 우리 청나라에게 미안해 했을까?” 하면서 “앞으로의 모든 국제 조약은 자기네 청나라가 반드시 챙겨 주어야지” 하면서 사명감을 다시 다졌다.

그래서 소급해서나마 “조선의 국제조약 표준 진도표”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황쭌셴의 <조선책략>이었다. 그 내용은 <조선은 일본과 묶고 미국과 손잡아야 산다>는 내용이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러시아는 나쁜 놈이니 같이 놀지 말라>는 암시가 담겨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조선에 들어가서 조선의 외국 조약을 도와 주어야지” 하고 있는데 먼저 들어 간 일본이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아서 조선에 들어 갈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앞세운 청나라는 마건충을 보내 조선의 외교 정책을 책임지도 조언하기 시작했는데, 몇 년 전부터 일본의 중재로 조선과 접촉을 시도하려다 계속 실패한 미국 슈펠트 해군 제독을 일단 불러서 미국과의 외교부터 중재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또 국기 문제가 거론되었다. “국기를 나란히 걸어 놓고 회담을 하자”는데 우리 조정은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거-- 참, 이상한 놈들이네.. 지난 번에 일본 놈들도 국기 갖고 뭐라 그러더니 저 파란 눈깔 놈들도 또 국기를 갖고 오라 그러네.. ”

그래서 마건충과 우리 나라 통역관 이응준이 조선의 국기에 대하여 두어 번 논의하였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마건충은,
“청나라 천자의 깃발이 긴 삼각형 모양의 황색 천에다가 커다란 용의 그림을 그린 것이니, 조선의 임금은 중국의 동쪽이란 의미로 바탕 색을 청색으로만 바꾸고 용의 그림을 그냥 쓰면 어떨까? 참참, 천자와 임금이 같을 수는 없으니 용의 발가락은 4개로 줄이고 말이야..”
(황색은 음양5행에서 중앙을 의미하니 중국에서 쓰고, 중국에서 볼 때 조선이 동쪽이니 청색을 쓰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용을 집어 넣은 마건충의 이 깃발은 “조선”의 국기라기보다는 “조선 임금”의 깃발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발가락 4개 어쩌고가 조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지난 번 병자년에 청나라에 말도 않고 해서 미안한 마음에 말 좀 들어 주려고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것 같애... 발가락이 4개가 뭐야... 누가 뜯어 먹었남? 원 세상에... 일본은 그래도 우리에게 삼색기를 추천하면서 나름대로 성의를 보였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요즈음은 일본이 조금 더 이쁜 것 같단 말야...”

사실, 우리 나라에는 조선의 임금이 행차할 때나 중앙 정부에서 임금이 직접 관리하는 부대에서 쓰던 삼각형 바탕에다 태극 무늬를 넣은“조선 임금의 깃발”이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이미 있는 우리 임금님의 깃발을 조선의 국기로 쓰자는 의견이 우리 쪽에서 제시되었다.

“태극”무늬는 우주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대원리를 한번에 아우르는 것으로써, 이 태극 무늬가 우리 나라 임금의 고매함을 한껏 높일 수 있는 무늬였다.

“임금님과 대신들의 옷 색깔인 청색과 홍색이 서로 맞물려서 태극 모양을 이루면서 가운데에 위치하고 바탕 색은 백성을 의미하는 흰 색으로 합시다. 그리고 바탕은 다른 나라처럼 사각형으로 하고...”

그래서 김홍집이 다시 청나라 마건충을 만나 상의를 하였는데, 마건충은 “태극 무늬만 있으면 일본의 국기와 혼동되어 곤란하다. 아까 내가 말한 용 깃발을 좀 바꾸되, 삼각형 푸른 바탕 대신 흰색 바탕으로 하고, 안에 푸른 구름, 붉은 용이 있는 청운홍룡기는 어떠한가?”라고 하면서 계속 4발가락의 용 깃발을 주장했다.

이 말을 들은 김홍집이 “저희 조선의 임금에게 용의 그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은 고마우나.... 용을 그리는 것이 너무 시간이 걸려서... 이번에 당장 사용하기에는 아무래도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그냥 태극 무늬를 쓰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마건충은 “그럼 태극 마크 주위에 주역 팔괘를 넣기로 하지.” 라고 재수정안을 내 놓았다. 주역 팔괘가 우주 운용의 원리라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복잡한 것 같아서 우리끼리 다시 논의한 끝에 4괘로 줄인 태극 모양을 조선 국기로 삼기로 하였다.

아직 확인은 못했지만, 고종 임금 명의로 정식으로 국기의 문양에 대한 하교(下敎)까지 내렸다고 한다.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시사신보에도 그랬다고 보도된 바 있다. 그 신문의 기자에게 말해 준 사람이 친일파 박영효인지, 친일파 김옥균인지, 친일파 서광범인지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래서 화도진에서의 미국 조약 때부터 태극 무늬 깃발을 조선의 국기로 사용하기로 했다.

★ 최초의 태극기 게양 ★

1882년 5월 22일 인천 화도진 공원.

미국 해군의 슈펠트 제독과 조선 정부의 신헌, 김홍집이 수호통상조약을 사인하는 자리에 태극 모양의 국기도 함께 있었다. 이 때 4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것까지는 미처 확인을 못하였다. (현재 인천 화도진 공원의 당시 조약 설명 그림에는 양국 국기가 안 그려져 있다)

-- 이 태극 무늬의 조선 국기는 곧장 미국으로 건너 가서 7월에 발간된 미 해군성 항해국의 “세계국기도감”에 수록된다. ---

그리고 잇달아서 6월 6일, 6월 30일에 영국, 독일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화도진에 태극 무늬 조선 국기가 게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나라의 마건충은 노련한 외교관이었다.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임을 분명히 하여, 조선과 미국, 영국, 독일의 외교 문서에 약간(?)의 장난을 쳐 놓았는데...

그것은 조선과 서양 열강들의 외교 관계를 대사보다 한 등급 아래인 영사 급으로 내려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과의 중요한 외교 관계 사무는 중국에 와 있는 대사와 처리하고 조선에 파견하는 영사와는 그저 일반적인 잡일만 처리하라는 내용의 조약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1905년이 되면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가져 가는 그 짓을 하게 되지만, 청나라가 한 발 앞서서 조선의 미국, 영국, 독일과의 외교권을 은근슬쩍 가져가 버린 것이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임오군란이라는 난리가 발생하였다. 조선 왕비인 민비의 오빠가 쌀을 일본에 다 팔아 먹고서는 조선의 구식 군대 군인들에게 봉급을 13개월치나 안 주고 있다가 겨우 한 번 준 게 쌀 반 모래 반이었다는 것이 직접적인 이유라고 한다.

-- 이 때에 일본장교가 지도하는 신식군대에게는 대우를 엄청 잘해 주었는데... 최근의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에서는 1860년대 일본에서 미국 군인이 지도하는 신식군대는 대우가 좋고 일본의 전통적 사무라이 구식 군대는 완전 찬밥 신세였다... --

그리고 그 당시에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쌀을 40전에 사다가 일본에서 16원에 팔아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는데, 민씨네 일파들은 그 쌀을 일본인들에게 구해다 주는 일이 취미 생활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세금으로 거두어 들인 쌀마저도 금방 없어져 버려서 군인들에게 봉급으로 줄 쌀까지 없었다고 한다 --

임오군란 때 궁궐 문 앞에서 대원군이 못 본 척해 준 덕분에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던 민비가, 도망 가는 그 와중에도 잔머리를 굴려,
“대원군을 불러 와 일단 응급 조치를 취하였으면,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여 대원군을 잡아 가게 하라”
는 내용의 문자 메세지를 고종 임금에게 보내는 바람에.... 청나라도 드디어 일본처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구실이 생겼다. 청나라 측에서 볼 때는 친일파 조선정부의 부정부패가 고마웠고, 잔머리 잘 굴리는 민비가 엄청나게 이뻐 보였다. “아이-- 이뿐 것!”

---이 때 청나라 군인들을 따라 왔던 청나라 상인들이 지금의 인천역 앞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의 화교 진출의 시초였다. 지금은 화교 학교도 있고 최근에 다시 중국인촌의 부활을 위하여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관리들 부패로 인해 발생한 임오군란이 고맙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기회에 손해 배상이나 왕창 챙겨야지... 흐흐흐... 또 거기에다가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사신단도 보내 달라 그래야지...”

그래서 제물포조약이란 것을 맺어 사죄 사신단을 보내게 하고, 우리 조정에서는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 당시 조정의 친일파 인사들만 대충 모아서 일본에 “사죄 사절단”으로 보내게 된다.

★ 배 위에서의 최초 태극기 게양 ★

1882년 9월 21일 인천을 출발한 배는 일본 정부에서 영국의 배를 임대한 것인데.... 배 이름은 메이지마루(明治丸)였다.

그 배에는 일본 공사 하나부사도 같이 탔고, 배 주인의 나라인 영국의 공사 아스톤도 같이 탔다.

영국인 선장 제임스가 박영효에게 국기 있으면 배 뒤에 달아 줄테니 달라고 했다. 박영효가 국기를 갖고 왔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며칠 전에 국기 논의할 적에 다들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라 그 모양은 모두들 대충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일제히 갑판 위에서 열심히 태극 무늬를 그려서 적당한 크기의 국기를 만들었는데...(3개를 만들었다고 함)
1882년 9월 21일부터 25일 사이의 그 어느 날에, 영국 선적의 일본 배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이것이 배 위에서의 최초의 태극기 게양으로 기록된다.

물론 이 내용은 추후에 고종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앞으로도 조선 국왕의 사신이 타는 배에는 이 태극 깃발을 반드시 달도록 하였다.

★ 외국에서 최초의 태극기 게양 ★

1882년 9월 25일, 박영효의 배가 일본 고베에 도착하여 일본 호텔에 묵었는데, 그 호텔 옥상에 태극 무늬 조선국기를 게양했다. 그 호텔 이름은 니시무라야<西村屋>이었다.

일본 신문에서는 이 박영효 일행을 조선 최고의 엘리트들이라 추켜 세웠고, 이 때에 박영효, 김옥균 일행은 “친일을 하는 것만이 우리 조선을 살리는 길”이라고 더욱 마음을 굳힌다.

또 일본 신문에서는 그림과 함께 조선국기(朝鮮國旗)라는 특집기사를 대대적으로 소개하고...
“조선의 임금이 청나라 마건충의 청룡기 제의에 대단히 분개하였고, 과감히 태극 무늬의 조선 국기를 창안해 내었다”라고 쓰면서,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하는 고종 임금의 굳은 의지를 널리 홍보하였다.

-- 자기 의견이라고 제대로 뭐 하나 내놓지도 못했던 고종 임금이 정말로 그토록 분개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일본으로서는 조선의 임금이 중국에 반기를 들었다고 강조하는 것이 앞으로 작전 수립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특히 이 부분을 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야 어쨌든 중국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일본으로서는 대단히 반가운 사건이었던 것이다 --

그래서 일본은 이 참에 조선을 황제의 나라인 “제국”으로 독립시켜 주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조선을 중국이나 일본과 똑같은 “황제의 나라”로 독립시켜 준다는 데야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단 하나, 중국만 좀 떨떠름해 하겠지만...

조선을 명실상부한 독립국인 “제국”으로 승격시키는 게 좋겠다는 이 기막힌 아이디어는 당시 일본의 수상이었던 이토오 히로부미였다.
(이 사람은 정년퇴임 후에도 우리 나라로 넘어 와서 한일합방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마지막 애국심을 불사른다... 그러다가 안중근에게 총 맞아 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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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조선 국기 관련 내용을 기자 인터뷰 형식으로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모 기자의 가상 질문
각국 대표께서는 1882년 태극4괘 깃발을 조선국기로 정한 것에 대한 소감을 말해 주세요.

■ 중국 측 대표 답변
수백 년 전 조선의 인조 임금이 중국 천자에게 땅바닥에서 큰 절한 이후로 조선이 중국의 신하 국가임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이번에 조선에서 우리가 제의한 “청색 바탕에 용이 그려진 청룡기”를 “발가락 하나 빼서 신하국임을 분명히 하라”고 했다 해서 거절한 것은 솔직히 좀 서운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대신 조선과 미국의 외교 조약 문서를 약간 손질하여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분명히 해 놓았으니, 우리 중국으로서는 아무 불만이 없다. 조선의 국기 모양이야 어떻게 되었든 상관없이 우리 중국이 얻을 건 다 얻었다... 흐흐흐.... 조선 태극 국기 하오, 하오!

■ 일본 측 대표 답변
수백 년 동안 조선은 안방에서만 북벌정책을 외치면서 실제는 중국에 절절 매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조선은 훌륭한 독립정신을 가지고 중국의 요구를 모처럼 당당히 거부하였다. 우리가 제안한 모양과 좀 다르기는 하지만, 중국의 청룡기를 거부한 것은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제 조선도 빨리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소리를 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앞으로 조선이 정치적, 문화적 모든 면에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이 독립만 한다면 독립협회 결성도 도와 주고, 독립문 만드는 것도 도와 주겠다. 참, 그리고 조선의 일반 백성들이 많이 쓴다는 한글의 신문활자도 무제한 제작하여 공급해 줄 용의가 있다. 조선이여 제발 독립만 해 주시오! 흐흐흐... 조선 국기 기레이데스네..

■ 조선 측 대표 답변
겉으로는 조선이 중국에 매여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중국의 간섭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겉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위장한 것은 우리 나라의 기본 외교 정책 때문이다. 우리의 기본 정책은 언제나 주위에서 가장 강한 국가의 속국인 것처럼 행세하여 우리 백성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우리 백성의 안전이 보장될 수만 있다면 겉으로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그게 약소국이 살아 가는 지혜이다. 이번 국기 무늬 결정 과정에서는 모처럼 우리의 목소리를 한번 내 보았다.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현재 기분은 되게 좋다. 하하하... 그리고 우리는 중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최강자가 누군지 판가름 나면 언제든 그 쪽으로 붙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야 사니까... 조선 국기 만세, 만만세...

□ 기자의 최종 정리 발언
그러니까... 조선에서 국기를 태극4괘의 깃발로 정하는 데에 대해서는 세 나라 모두 만족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겠군요. 태극 마크가 의미하는 대로 조선이 영원히 끝없이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참, 요즈음 국제 외교가에는, 주변 강대국들 중 어느 하나가 조선국을 식민지로 접수할 지도 모른다는 괴소문이 떠돌고 있다고 하네요... 조선국 대표께서는 이 점을 각별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인터뷰에 모두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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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 제국 시절의 국기 ★
갑오경장 이후 임금의 나라 조선은 막을 내리고 갑자기 황제의 나라 대한 제국이 되었다.
고종 임금은 황제로 승격되고 몇 년 전 죽은 왕비 민씨도 “명성황후”로 소급하여 승격된다

일본이 갑자기 바빠졌다.
이완용이 모금한 돈에다 조금 더 보태서 기존의 영은문(중국 사신 영접용)을 헐고 독립문을 세우는 데에 적극 도움을 주었다. 독일에서 건축설계사를 불러 프랑스 개선문을 본떠서 독립문을 만들게 하였다.

독립 대한제국을 축하하기 위하여 독립협회의 결성도 도와주고,
일본에서 신문 인쇄용 한글 활자를 대량으로 만들어 와서 한글로 된 독립신문도 발행할 수 있도록 해 주고 한글판 옛날 이야기 책도 만들게 해 주어 대한제국의 한글 시대를 활짝 열어 주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어떻게든 한자를 덜 쓰게 하여 중국과 대한제국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우리 백성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쏟아지는 한글 인쇄물에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연이야 어떻든 우리 나라는 이 때부터 한글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이 세워졌음에도 새로운 나라의 국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차피 일본의 각본에 의하여 세워진 “인공 지능도 없는 고장난 로봇 정부”였던 대한제국이었던 만큼, 대한제국에게 새로운 국기를 챙겨 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국기이든, 황제의 깃발이든 뭔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졌어야 마땅한데,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때 만든 독립문에 태극무늬 조선의 국기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국기는 최근에 만든 태극 무늬 국기를 그냥 쓰기로 했던 것 같다.

일본이 작성한 표준진도표에 의하여 1905년에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 가면서 외국과의 행사에는 일장기만 있으면 되었고, 대한제국의 국기는 아예 쓸 일이 없어져 버렸다.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지방 순시 갈 때에 사용했을 수도 있겠으나 그런 기록은 아직 확인이 안 된 상태이다.

일본으로 외교권이 넘어간 지금, 미국도 영국도 독일도 유사시의 조선을 도와 준다는 1882년 수호조약들의 내용도 이제는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1906년 미국 데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 수상 가쓰라와 미 국무장관 태프트로 하여금 “조선과 필리핀 갈라 먹기” 비밀 조약을 체결하도록 한 뒤에..
그 1주일 뒤에서야

자신에게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탄원하려고 6개월 씩이나 기다리고 있던 우리의 이승만 특사를 형식적으로 면담해 주는 것으로 우리와의 공식, 비공식 외교관계를 거의 완전히 끝내 버린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이러한 국제질서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고종 임금은 아버지와 부인에게... 또 나중에는 일본에게 정치를 모두 떠맡겨 버리고..
와중에 무려 40명이나 되는 민씨 일파들이 궁으로 들어와 자기네들 이득만 챙겨 가고...
대신들은 친청파, 친로파, 친일파, 반일파로 나뉘어져서 서로들 애국자라며 싸움이나 하고...

러시아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언젠가 누군가는 먹어 치울 것이라는 내용의 시사만화가
유럽의 신문에도 게재될 정도였으니, 어찌 이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은 새로운 국기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한 채,
일본의 치밀한 장기계획에 의하여...
1910년에 간단히 M&A 방식으로 흡수 통합되어 버리고 만다.

이런 총체적인 난국 속에...
나라 뺏긴 것은 당시 위정자 모두가 공동책임을 져야 마땅할 것 같은데...
을사오적을 비롯한 일부 친일파 세력에게만 나라 멸망의 책임을 돌리려는 자칭 애국자 후손들의 역사의식이 그저 안타깝기만 할 따름이다.

친일파 처단도 좋지만, “일본의 조선정복 성공사례”를 심층연구하여 우리가 다시는 그런 꼴을 또 당하지 않도록 방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근데..
아까 박영효라는 분... 일본을 등에 업고 크게 한탕 하려다가 계속 실패만 하곤 했는데..
아예 이름도 “야마자키"로 자발적인 창씨개명을 하는 등 열심히 양국의 눈치만 보다가...
(이 때만 해도 조선인의 일본식 창씨개명은 일본도 싫어하는 일이었음)
한일합병 후에는 일본 천황으로부터 “후작”이라는 높은 귀족 칭호까지 하사 받고...
잘 먹고 잘 살다가 1939년에 아주 행복하게 죽었다지요...

박영효가 그렸던 그 조선국기를 들고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가 총 맞아 죽은 사람도 많지요
그러나 그 모든 걸 지금 따져서 무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저 골치만 아프지요..

★ 태극기란 이름 ★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 때에 조선의 국기라 하면 일본이 눈치챌까 봐 “태극기”라는 명칭으로 배포하였다. 이 때에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서 이 이후 계속 “태극기”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선언서 쓴 최남선을 비롯하여 민족대표 33인이란 분들 중 대부분이 나중에 철저한 친일파가 되어 버리는 비극을 맞이한다. 결국 태극기를 휘날리며 뛰어 다니는 학생들만 많이 희생되었을 뿐이었다.

짧은 기간에 우리 나라 국기가 태극기라는 사실이 전 국민에게 홍보되는 효과는 있었으나, 많이 잡혀 들어 가는 통에 태극기가 수난을 많이 겪었다. 3. 1운동 때문에 국내의 독립운동 거점이 대부분 노출되어 독립운동의 주체가 해외로 쫓겨 가게 되었는데...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이 태극기를 그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기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광복군들은 이 태극기 아래에서 훈련을 하고 각종 전투에서 죽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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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에 이승만이 서울로 귀국할 때에도, 김일성이 평양으로 귀국할 때에도 우리 국민들은 모두 이 태극기를 걸어 놓고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다가 1948년에 남북한이 별도의 국가가 세워지면서...
남쪽의 대한민국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사용하던 옛 조선국기인 태극4괘 깃발을 그대로 쓰기로 하였고,
북쪽의 김일성은 별도로 새로운 국기를 만들어 쓰기로 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두 나라에 국기가 두 개가 되어 버렸는데....
올림픽할 때에만 한반도 깃발을 공동으로 만들어서 같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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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48년에 결정한 태극기 모양은 상세한 내용이 빠진 것이어서...
1949년 1월 4일 국기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4가지 모형을 놓고 집중토의에 들어 갔는데

안재홍, 이규남, 이병도, 이선근, 정인보, 최현배 등 12명의 특별심사위원회에서 정밀심사한 결과를 가지고 동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 “국기제작방법”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 그런데, 이 중 국사학자인 이병도 박사는 이완용의 형님의 손자였고, 최현배는 일제시대 때 일본의 내선일체에 적극 호응하여 세계동포주의를 강조했던 친일파 혐의가 있던 사람이었다. 사실 친일파를 구태여 따진다고 한다면 당시 국내에 남아 있던 국민 거의 대부분이 친일파에 해당될 수도 있어서... 친일파 논쟁은 아직도 상당히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

또 그 이후 여러 가지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여 외교적 관례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규정을 만들어서, 현재는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서 태극기에 관한 모든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정부 수립 이후 가장 큰 변화는 깃봉에 대한 규정도 태극기 규정에 첨부했다는 점이다.
외국과는 달리 깃봉에 대한 내용을 특별하게 두어서 그 색은 황금색으로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나라 국기는 청, 홍, 황, 백, 흑 5색을 모두 사용하는 국기가 되었는데....
그 상세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청(靑) = 태극 모양 아래 부분, 음양5행에서 동쪽을 의미함
홍(紅) = 태극 모양 위 부분, 음양5행에서 남쪽을 의미함
황(黃) = 깃봉 봉오리의 황금색, 음양5행에서 중앙을 의미함
백(白) = 국기의 바탕 색, 음양5행에서 서쪽을 의미함
흑(黑) = 4괘의 색깔임. 음양5행에서 북쪽을 의미함

-- 참, 깃봉을 특별하게 따지는 나라로는 또 로마 카톨릭의 바티칸 공화국이 있다 ---

그리고 태극기에 있는 4괘는 주역 8괘 중 우주원리의 가장 기본적인 4가지를 뽑은 것인데
건, 곤, 감, 리의 괘가 각각 하늘, 땅, 물, 불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정리해서 다시 말하자면,
태극기가 국기가 된 사연은 별로 자랑스러운 게 없지만...
태극기 그 자체만으로는 그 의미나 디자인에 있어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올림픽 선수촌에서 국기 뱃지 서로 교환할 때 우리 태극기 뱃지는 다른 나라 것 10개, 20개를 갖고 와야 교환해 줄 정도로 엄청나게 인기가 좋다고 한다

누가 뭐래도
태극기는 최고다
대한민국 국기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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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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