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C 역사 속의 주력운동
제23차 학원대표자 모임 자료집에서 발췌
최근들어 학신 안에 주력운동 존폐에 대한 첨예한 대립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무거운 마음으로 이 발제를 준비한다. 그러나 저의 발제의 초점은 주력운동에 대한 존폐문제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력운동이 우리 학신 안에 어떻게든 자리 매김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실 작년 한 해 동안 주력운동에 대한 존폐문제가 활발하게 논의 되었지만 결국에는 주력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합의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 그 실효성 여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 주력운동의 태동
SFC 역사를 추적해보면 주력사업(주력운동)이 우리 학신 속에 등장하는 것은 1992년 부터다(용어 자체는 1993년부터 회의록에 기록됨). 1992년은 우리 학신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전국SFC 조직의 변화를 가져온 해로 지방SFC를 중심한 교회연합, 대학SFC와 USFC를 중심한 학원연합으로 조직이 양분화 되어졌던 때이다. 이렇게 학신협이 학원연합으로 인준되는 과정에서 주력운동을 전국SFC가 채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미 1990년 각 지역 USFC의 연합인 학신협이 출범하면서 주력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중범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고 있었고, 이 중점운동이라는 말은 전국SFC 조직개편과 함께 사라지고, 1993년부터 주력사업, 계속사업이라는 말로 대체되며, 주력운동이라는 용어는 공식적으로 1998년에 가서야 나타난다(주력사업에서 주력운동으로의 용어변경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1997년 학원엽합 위원장인 손만석 운동원이 학원연합사업을 보고하는 중에 주력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주력운동을 논함에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학신협이다. 즉, 학신협의 태동과 주력운동이 맞물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먼저 그 당시 SFC 내부적인 상황들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SFC 내부적으로는 1988년 7월에 오병욱 목사님이 해임되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성구 목사님 해임 이후 또 한번의 충격을 받은 SFC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지도위원회의 이해할 수 없는 결정, 오목사님 해임 이후의 우리 운동의 불확실성, 게다가 전국SFC, 간사회, 지도위원회의 끊임없는 갈등이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80년대 후반의 민족사적 위기 앞에 우리가 존재해야 할 이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냐?등 끊임없는 정체성 질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때이다.
이러한 형편 가운데 대학SFC를 주도하는 리더그룹들이 중심이 되어 우리 운동에 대한 반성작업이 일어 났는데, 이념의 정지작업에 대한 강한 필요성, 우리시대의 개혁주의에 대한 고민들, 교회 건설과 개혁, 학원복음화를 위한 구체적인 전략에 대한 고민, 강력에 대한 새로운 해석, 방향성, 개체성을 넘어서서 공통분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통일성 있는 운동체로 전환, SFC시스템(틀)에 대한 고민을 실질적으로 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1989년에 언약문을 통해 우리 운동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나름대로 정리해 내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0년 2월 15~17일(서울영동교회) 대학학생신앙운동 전국대회로 모여 7개지역 학원연합이 하나로 뭉쳐 ‘학생신앙운동 협의회’라는 전국적인 모임(유영업 담당간사, 신우용 초대 학신 협의장으로 선출)을 결성하였고, 그 해 6월부터 교회건설지 발간(자료집 형식)하였다. 이때 학원대표자들은 자주(월2회씩) 모여 이념과 정신을 공유하는 작업을 하였고, 이념과 운동이 함께 가야 한다는 자기반성과 함께 중점운동이 생겨나게 된 것 같다. 이렇게 학신협 출범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때 주력운동(중점운동)은 전국 대학SFC의 통일성 있는 운동을 담아내기 위함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 가운데 개혁주의 학생운동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시작한 것 같다.
그런데 당시의 역사를 살펴보면 상당히 학신의 중요한 분기점에 지방SFC와 전국SFC가 등장하지 않고 뒷전에 밀려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오히려 전국SFC의 인준을 받지 않은 학신협이 전면에 서서 역사를 주도한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다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학신협의 지도부가 그 당시에 판단하기로는 교회조직으로는 SFC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 같다. 그것은 초창기 교건지의 논조 자체가 상당히 지방조직과 전국SFC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이미 교회학신은 고신교단의 학생회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단지 명칭만 학생신앙운동이라고 칭하고 강령과 학신가만을 가지고 있을 뿐 운동으로서의 성격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위원들 마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혹은 소요리문답을 읽지 아니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은 학신의 현실태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교회건설 창간호 시론에서 인용) 따라서 학신협은 학원을 중심한 새로운 SFC틀을 만들려한 것 같다. 즉, 기존의 SFC 시스템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학신협을 생각한 것 같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중점운동, 주력운동의 전국적인 공유가 없었고 전국 SFC의 보편적인 운동이 될 수 없었다.
2. 지난 10년 동안의 주력운동
1990년 - 1991년 “중점운동” 대학문화 변혁을 위한 대학문화 5적 추방운동
“컨닝추방, 음란퇴폐, 개인주의, 도덕성 상실, 과소비”는 학신의 역사에 실로 오랫동안 남아 있는 운동
1992년 - 기도운동, 전도운동, 공명선거운동(주력운동 혹은 주력사업이라고 명명하지는 않았음) : 전국 상임위원회에서 안건을 상정하여 전국SFC위원회(3월)에서 결정.
1993년 - 말씀사랑실천운동, 기도운동, 전도운동 - 주력사업이라고 명시함.
이때 학원연합에서 별도로 ‘다움운동’을 주력사업으로 채택하여 전국SFC 이름으로 공문을 보냄으로 혼선이 일어남(알고보니 어느 신문사에서 취재해감으로 일어난 일종의 해프닝)
1994년 - SFC 다움운동, SFC 확장운동
1995년 - 전도운동, 기도운동
1996년 - 신조공부하기, 기도와 회개운동, 우리교회 잘 섬기기
교회연합에서 가장 활발하게 주력사업을 펼침.
1997년 - 변화와 확장
1998년 - 영적각성을 통한 민족사랑운동
영적각성/성경읽기
민족사랑운동/복음화 운동, 헌혈카드 모으기, 통일 통장 갖기
대학생대회 기간 동안에 발표
1999년 - 영적각성을 통한 민족사랑운동
2000년 - 개혁신학, 개혁신앙, 개혁생활
세부적인 행동지침 없이 주력운동에 대한 존폐문제가 대두됨
3. 평가
지난 10년간의 주력운동을 돌아보면 먼저, 주력운동이 어떻든 통일성 있는 운동을 담아내기 위하여 시작되었고, 집중성과 지속성이 있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주력운동을 채택함에 있어서 충분히 이념적이고 이론적인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위원선에서만 주력운동이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 학신협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대학문화 5적추방운동과 이후의 다움운동은 전국적인 공감대를 충분히 형성할 정도록 전략적인 논의가 활발했고, 교건지와 전국SFC의 문건을 통해서 운동의 이론적 토대와 구체적인 방법론이 제시되어 효과적인 운동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교회연합이 주력운동에 대해 상당히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SFC의 성격규정’이라고 할 까,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현장과 역사 현실문제만을 취급하는 학원연합의 운동성향에 대한 견제와 균형에 매진하다보니 적극적으로 주력운동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연합이 채택하는 주력운동의 실천적 방안을 보면 대부분 이념적이고 신학적인 주제에 머무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철저한 운동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4. 주력운동을 위한 제안
1) 우리운동에 대한 성격규정이 필요하다.
우리 운동에 대한 성격규정이 중요하다. 이 작업 없이는 주력운동을 논하기가 힘들지 않나 생각된다. 소위 우리 운동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주의에 대한 이해 또한 중요하다고 하겠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SFC의 개혁주의’가 역사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혁주의를 다 포괄하거나 다 담아낼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교회사 속의 모든 전통적인 흐름을 다 통합해내는 개혁주의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운동의 과거 역사로부터, 지금의 사역자들과 운동원들이 함께 적극적으로 “SFC의 개혁주의”를 만들어가야 하며 그렇게 내려진 규정에 의해 SFC가 움직여 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SFC가 한국에서 태동하면서 가지는 독특한 특성과 함께 보편적으로 교회사속에 나타난 개혁주의의 모습을 통해 한국적 개혁주의를 창출해야 한다.
먼저 보편적으로 교회사속에 나타난 개혁주의적 모습은 신조 중심적 운동, 경건주의적 분위기, 문화적 개혁주의이다. 우리 SFC에도 이러한 교리주의적, 경건주의적 성향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신조로 하고 있고, 주력운동에 신조공부하기를 할 정도로 신조 중심적운동이다. 또한 경건주의적 분위기도 무시 할 수 없다. SFC는 수양회의 역사, 수련회를 통해 영적으로 새로움을 경험하고 삶의 경건을 회복하는 기회를 삼는다. 또 한가지는 무노하적 개혁주의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어야 할 진정한 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사이에만 아니라 그 분이 주신 문화적 공간 전영역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표준문서가 중요한, 아무리 영적 각성과 부흥이 절실하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문화적 삶 자체를 무시하거나 덜 중요시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우리의 개혁주의가 될 수 없다.
여기에다 우리 자신들의 특유의 개혁주의적 성격을 더 할 필요가 있다. 즉, 신사참배 회개운동이라는 역사적 정황속에서 생겨난 개혁주의 학생운동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으로 그것은 회개운동이다. SFC는 교회의 회개운동이 만든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기성세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을 몸부림치며 회개할 때에 이를 보고서 자신들도 그 죄악의 동참자임을 인정하며 함께 눈물을 흘린 이들, 그 시대의 회개하는 일에 동참한 참여 젊은이들을 통해 SFC는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SFC의 개혁주의는 교리적, 경건적인 베이스 위에 문화적 변혁자로서의 개혁주의적 요소를 담아내는 것이라 하겠다.
2) 개념정의
주력운동이 뭐냐?
ⓐ 현장(사회적-역사현실, 캠퍼스, 교회적 현장)의 특별한(?) 상황에 대한 개혁주의 신앙운동으로서의 답변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즉, 현장의 필요성으로부터 우리운동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 우리운동의 역량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을 동반하는 명제화된 선언이다.
3) 주력운동의 필요성
SFC는 개혁주의 신앙운동체이다. 그래서 우리시대의 개혁주의를 드러내는 것은 당위성이다. 그런면에서 주력운동은 개혁주의를 구체적으로 다양한 현장에 실현해내는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분은 개혁주의를 교회, 국가, 사회와 가정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개념으로 이해했다. 개혁주의 전통을 연구해보면 개혁주의자들은 그 시대에 그 당대에 복음으로 말씀으로 그 시대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 답변들에 충실했다. 즉, 개혁주의는 오직 신적 권위의 상징인 성경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것을 뜯어고치고 새로운 신적통치를 실현하는 것으로, 삶의 모든 영역이 성경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입장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시대의 개혁주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효율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면에 있어서 통일성 있고 집중적인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주력운동이라 하는 틀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4) 발전적인 제안
ⓐ 주력운동을 2가지로 병행하자.
첫째, SFC의 역량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운동, 즉, 기본적인 신앙증진을 위한 신앙운동이 필요하다. 예를들면 말씀사랑, 기도하기, 주일새벽기도회 참석하기 등
둘째, 회기중에 일어난 issue를 주력운동으로 채택하는 문제(다른 조직 필요 없이 전국위원회로 모이거나 본부가 제안하는 방식)
ⓑ 현장을 분석하고 issue화는 작업-사실 주력운동은 현장성과 기동성이 있어야 한다. 예) SOFA문제, 이승헌이라는 작자의 단군상 건립 등
ⓒ 전문가 집단이 필요하다.(think tank/idea bank)
우리 운동의 정체성과 이 시대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통일된 신학적 신앙적 frame을 끊임없이 공급해줄 기구가 필요하다.(학생사역연구소-현장을 지켜가기가 바쁜 일정의 간사, 운동원들의 상황판단에 대한 신학적, 지적, 통찰력의 한계) 간사회가 이 일을 담당하고 있다.
예) 영국의 UCCF(IVF) /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필두로 좌경화되기 시작, 대학의 신학 교수들이 대부분 비평주의적 입장에서 영감설을 반대, 대부분의 교회들이 좌경화됨. 이때, 유일하게 좌경화 되지 않은 단체가 캠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의 UCCF -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을 지킴. 신학적 전통성을 지켜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때, D.J.Wiseman이라는 고고학자가 좌경화되어가는 신학자들과 영국교회를 보면서 Tyndle house를 세우고 복음주의 신학박사를 50년 이후에 60여명을 길러내어 신학적 신앙적 반전을 기함. 대표적 인물 - J.Stott, J.I.Packer
ⓓ 단기적인 목표가 달성 될 때까지 지속한다.
ⓔ 철저한 평가작업
(본 글은 제23차 학원대표자 모임 자료집에서 발췌)
(객관적 평가를 위해 지방보다는 U중심의 주관적 평가가 강함을 유념해서 받아들여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