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行狀) 풍양豐壤 조익趙翼 찬撰
공은 휘(諱)는 정귀(廷龜), 자는 성징(聖徵)이며, 호는 월사(月沙)이다. 젊을 때 호는 추애(秋崖), 또는 습정(習靜) 또는 치암(癡庵)이며, 만년의 호는 보만정주인(保晩亭主人)이다. 선조는 당(唐)나라 중랑장(中郞將) 이무(李茂)에서 나왔다. 이무가 소정방(蘇定方)을 따라와 백제를 평정하고 신라에 남아 벼슬하며 연안(延安)을 관적(貫籍)으로 하사받았다. 여조(麗朝)에 소부감(少府監) 현려(賢呂)와 문림랑(文林郞) 영군(暎君)이 있었고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판도판서(版圖判書) 효신(孝臣)과 호조 전서(戶曹典書) 종무(宗茂)가 있었다. 문강공(文康公)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휘 석형(石亨)은 문학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으며 일찍이 세 번의 과거에서 연이어 괴과(魁科)에 급제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고(考) 의정공(議政公)은 문장과 기의(氣誼)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으며, 모두 21차에 걸쳐 과거에 응시해서 괴과에 급제하기도 하고 제이(第二), 제삼(第三)을 차지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대과(大科)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과문(科文)으로 제술(製述)한 글들은 모두 전송(傳誦)되었다. 고문(古文)을 잘 지어 당시 사대부들의 묘도문(墓道文)을 많이 지었다. 공이 약관에 고과(高科)에 급제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글을 배우던 동자 시절부터 사단(詞壇)을 내려다보면서 항상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턱수염을 뽑는 것처럼 손쉽게 여겼건만 지금 녹사(祿仕)에 고달프니, 이는 운명이다. 너는 반드시 선업(先業)을 크게 현양(顯揚)할 수 있을 터이니, 우리 집안의 구물(舊物)을 너에게 전해 주겠다.”라고 하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저술로는 《상제예요(喪祭禮要)》, 《강목집석(綱目輯釋)》, 《문계방담(文溪厖譚)》이 있다.
비(妣)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金氏)는 신라 왕자 흥광(興光)의 후손으로, 현감(縣監) 표(彪)의 따님이요 기묘명현(己卯名賢) 첨지(僉知) 이홍간(李弘幹)의 외손인데, 대의(大義)를 알아 고금의 치란(治亂)과 일의 시비(是非)와 사람의 사정(邪正)을 능히 분변하였다. 그래서 조부인 첨지공이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며 말하기를, “우리 손녀가 사내였다면 우리 가문을 크게 빛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계부(季父)인 전한(典翰) 규(虯)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질녀는 여성 중에 어진 달사(達士)이다.”라고 하였다.
가정(嘉靖) 43년(1564, 명종19) 10월 8일에 공을 낳았다. 그날 아침부터 범이 방문 밖을 지키고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피했는데 공이 태어나자 범이 떠나갔다. 그때가 사시(巳時)였다. 공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일어나 걸었고 말을 배울 때부터 문자를 알았다. 6세 때 유모가 공을 안고 문밖에 앉아 있는데 술 취한 사람이 앞 시내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 보였다. 그때 버들개지가 날리고 피리 소리가 들렸다. 공이 그 광경을 말하는데 그 말이 마치 가곡(歌曲)과 같았다. 유모가 기이하게 여겨 의정공에게 알렸다. 의정공이 묻기를, “네가 이 일을 가지고 시구를 지을 수 있겠느냐?” 하니, 공이 즉시 응답하기를, “부축받아 건너는 작은 다리 저편에, 버들개지 다투어 어지러이 날리네. 어디서 들려오나 몇 가락 피리 소리, 불어와 술 취한 귀를 깨우네.〔扶過小橋外 楊花爭亂飛 何處數聲笛 吹來醒醉耳〕” 하였다. 또 공자(公子)가 술에 취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시구를 짓기를 “금수레 바퀴는 향초를 밟고, 백마 탄 낭군은 술 취해 가네.〔金輪踏香草 白馬郞醉去〕” 하니, 세상에서 신동(神童)이라 하였다.
7세 때이다. 한동네에 사는 기자헌(奇自獻)이 공과 나이가 비슷하였는데 공의 허리띠가 해진 것을 보고 자기의 비단 허리띠를 풀어서 주니 공이 받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붕우가 주는 의복을 입는 것은 본디 좋은 일이나, 그의 허리띠는 받을 수가 없다.” 하였으니, 이는 대개 그의 바르지 못한 점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8세에 벽에 걸린 산수화를 보고 제(題)하기를 “산기운 저물녘에도 걷히지 않아, 침침하게 높은 나무 가리네. 시냇물 깊어 건너지 못하니, 밤새 앞산에 비가 내렸구나.〔山靄晩不收 沈沈隱高樹 溪流深不渡 夜來前峯雨〕” 하였다.
9세에 《당시초(唐詩抄)》 및 한시(韓詩 한유(韓愈)의 시)를 읽었고, 10세에 《소학(小學)》과 사서(四書)를 읽었다. 〈남산시(南山詩)〉를 두 번 읽고는 곧바로 암송하니, 사람들은 공이 이 시를 익힌 적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 또한 그러하였다. 11세에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를 읽었다. 〈남산시〉에 차운(次韻)한 뒤에 다시 7언(七言)으로 차운하였고 또 〈원도(原道)〉를 모방한 작품을 지었는데, 모두 사람들에게 전송(傳誦)되었으며 같은 마을의 사인(舍人) 홍적(洪迪)과 대제학 김귀영(金貴榮)도 베껴 갔다.
이해에 모부인(母夫人)의 상(喪)을 당하여 슬피 곡읍(哭泣)하며 마치 성인(成人)처럼 집상(執喪)하였다. 그러다 병으로 건강을 해쳐 뼈만 앙상하였으므로 의정공이 껴안고 울며 타일러 한 해를 넘겨서야 비로소 권도(權道)에 따라 몸을 보살폈다. 이때 건강을 해친 것이 일생 동안 병의 뿌리가 되었다.14세에 승보시(陞補試)에서 장원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18세에 판서 권공 극지(權公克智)가 공을 사위로 맞았다. 일찍이 산사(山寺)에서 독서하다가 조정에서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낼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소장을 지어 불가함을 극언하고 돌아와 장인인 권공을 뵙고 말하기를, “찬역(簒逆)한 왜추(倭酋)와 우호를 맺을 수 없음은 대의(大義)가 매우 분명한데도 조정에서는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으니, 제가 상소하여 말할까 합니다.” 하였다. 권공이 당시 대사헌이었는데 그 소장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의논이 지극히 옳다. 그러나 유생이 굳이 상소할 필요는 없다. 내가 이런 뜻으로 논계(論啓)하겠다.” 하고는 ‘왜적 사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등의 몇 마디 말만 삭제하고 나머지는 모두 공의 글을 그대로 써서 차자(箚子)를 지어 올리니, 선묘(宣廟)가 답하기를, “묘당(廟堂)에서 어찌 우연히 계획해 이와 같이 의정(議定)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의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뜻이 바로 공과 합치되었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경인년(159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신묘년(1591) 봄에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보임(補任)되었다. 가을에 추천을 받아 사국(史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홍여순(洪汝諄) 등이 공이 일찍이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유임을 청하는 소(疏)를 지었다는 이유로 추천을 삭제할 것을 논하였다.
임진년(1592) 4월에 가주서(假注書)로 입직(入直)하였다. 당시 왜적이 침입한다는 경보(警報)가 급박하여 상이 비국(備局)의 신하들을 소견(召見)하니 신하들이 번갈아 아뢰는 말이 분분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귀로 듣고 손으로 받아 쓰는 것이 마치 물이 흐르듯 민첩하니, 상이 자주 그 광경을 내려다보느라 용상(龍床)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어연(御硯)이 떨어져 먹물이 공의 옷을 적셨다. 상이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공의 옷을 닦아 주게 하였다. 소대(召對)가 끝난 뒤에 승지가 기록한 내용을 가져다 살펴보니 한 글자 한마디도 착오가 없기에 정원(政院)의 신하들이 모두 놀라 혀를 내둘렀다.
왜적이 경기까지 쳐들어와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게 되었다. 그 하루 전에 장인 권공(權公)이 갑자기 졸(卒)하였는데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공이 남아 치상(治喪)하고 양주(楊州)에 가매장을 한 뒤 샛길로 행재(行在)로 갔고 성천(成川)에서 광해(光海)를 배알하였다. 10월에 설서(說書)에 제수되었다. 계사년(1593, 선조26)에 광해를 따라 정주(定州)에 가서 대가를 영접하고, 검열(檢閱)에 제수되었다. 선묘가 하교하기를, “지금은 강관(講官)이 더 중요하다.” 하고 공을 도로 설서에 두었다.
명(明)나라 경략(經略)인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이 의주(義州)에 와서 주둔하며 막중(幕中)에서 도학(道學)을 강론할 문학(文學)의 선비를 뽑아 보내게 하였다. 선묘가 엄선할 것을 명하여 공과 황공 신(黃公愼)이 함께 선발되었는데 병부 시랑이 매우 극진하게 예우하고 함께 《대학(大學)》을 강론하며 장(章)마다 그 뜻을 해설하게 하는 한편 주석(註釋)을 답습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명나라의 학술이 모두 육씨(陸氏 송(宋)나라 육구연(陸九淵))를 숭상하고 주자(朱子)를 배격하였는데 병부 시랑 역시 육씨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누구를 숭상하는지 보고자 했던 것이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소방(小邦)은 오직 정주(程朱)의 학술을 본받을 줄만 알 뿐 다른 학설은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오로지 주자의 뜻에 입각해 해의(解義)를 지어 올렸다. 병부 시랑이 그의 막료인 통판(通判) 왕군영(王君榮)을 시켜 화답하는 설을 짓게 하고 이를 간행하여 《대학강어(大學講語)》라고 하였다. 순안 어사(巡按御史) 주유한(周維翰)이 이르자 통군정(統軍亭)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제독(提督) 이하 여러 장수는 모두 밖에서 기다리고 정자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병부 시랑과 순안 어사가 정자 위에서 마주 앉고 공과 황공이 참여하였다. 순안 어사가 매우 지성스럽게 위로하고 칭찬하며 “본국의 흥망성쇠는 세자에게 달려 있고, 세자의 현부(賢否)는 바로 공들에게 달려 있다.” 하고는 악수하고 헤어졌다.6월에 사서(司書)로 승진하였다.
9월에 병부 시랑이 중국으로 귀환하니, 공은 행재로 돌아와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중국 사신 사헌(司憲)이 올 때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했는데, 병으로 가지 못하였다.
11월에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대신해 원접사가 되어 다시 공을 종사관으로 지명했는데, 비국이 중국 조정에 수응(酬應)할 문서를 공이 맡고 있다는 이유로 보내지 않았다. 정공 곤수(鄭公崑壽)가 또 대신해서 원접사가 되었는데, 출발하기 하루 전에 아뢰기를, “중국 사신과 수창(酬唱)하게 되면 신은 글을 잘하지 못하니, 이모(李某)를 종사관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하여, 윤허를 받았다. 그런데 그날 밤에 정원이 또 공은 중국어를 잘하니 조정을 떠나 밖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어 교체하였다.
12월에 삼등 현령(三登縣令)으로 있던 부친 의정공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다가 토산(兔山)에 이르러 부음(訃音)을 듣고 말에서 떨어져 기절했다. 한참 뒤에 깨어나서는 도보로 빈소에 가서 항상 얼음 위에 거처하며 눈보라도 피하지 않았다. 이듬해 2월에 운구하여 돌아와 용인(龍仁) 선영에 장사 지냈다. 이때 삼등 사람 40여 명이 상여를 메고 묘소 아래까지 이르렀는데 도중에 도망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들이 나무를 베어 여막(廬幕)을 짓고 떠나면서 말하기를, “현령께서 끼친 은택을 잊을 수 없지만, 상주의 효성에도 감동하였다.” 하였다.
복(服)을 벗자 당로자(當路者)가 공이 다시 전조(銓曹)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 공을 승천(陞遷)시켜 예조 정랑에 제수했고 다시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했다. 그 뒤에 세 번 병조 정랑이 되고 두 번 직강(直講)이 되었는데 모두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승문원이 문학에 능한 사람 10여 명을 뽑아 겸관(兼官)을 시켰는데 공이 그 속에 들었다.
병이 나은 뒤 서울에 가서 병조정랑 겸 승문원교리에 제수되었으며, 중국어를 할 줄 안다 하여 어전전역 겸 한학교수(御前傳譯兼漢學敎授)에 임명되었다. 당시 사역원 도제조(司譯院都提調)인 윤공 두수(尹公斗壽)가 공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처럼 큰 인재를 어느 때에나 쓸 것인가. 한학 교수를 겸임하게 한 것은 내 손에서 나왔으니, 누가 다시 막으리오.” 하였다.
그해 9월에 명나라의 경리(經理)인 양공 호(楊公鎬)가 평양(平壤)에 도착해서 우리나라의 군병과 성지(城池)와 무기의 현황을 묻고 3조(曹)의 상서(尙書)로 하여금 와서 대답하게 하였다. 조정이 매우 근심하다가 공에게 가서 각 조의 일을 답변하도록 하니, 공이 길을 떠나 봉산(鳳山)에 이르러 경리를 만나 맡은 일을 수행하고 돌아왔다.
이때 왜적이 직산(稷山)까지 쳐들어왔다가 중국 장수 마 제독(麻提督 마귀(麻貴))에게 패하여 돌아갔다. 마 제독이 왜적을 추격하니, 마 제독의 접반사인 장공 운익(張公雲翼)이 종사관을 지명하면 사람들이 모두 꺼려서 피했다. 최후로 공을 지명하자 공이 즉시 그날로 길을 떠나 전주(全州)에 이르니 승문원이 또 공이 문서를 맡아야 한다는 이유로 소환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양 경리(楊經理)에게 보내는 게첩(揭帖)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상이 그 글을 보고 이르기를, “이 글이 매우 잘되었다. 누가 지은 것인가?” 하였다.
10월에 성균관사예 겸 시강원필선(成均館司藝兼侍講院弼善)에 제수되었다. 공이 입직하고 있는데 중국 장수인 양 안찰(梁按察)이 갑자기 궐하(闕下)에 이르러 선묘가 황급히 나가서 영접하느라 미처 어전 역관(御前譯官)을 부르지 못했다. 사정이 급하니 이모(李某)를 입시하게 할 것을 정원이 계청하였다. 선묘가 공에게 하문하기를 “그대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사정이 급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그 일을 맡아 자리를 파할 때까지 능숙하게 통역하였다. 안찰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춘방(春坊)의 학사가 어쩌면 이렇게도 화어(華語)를 잘하는가.” 하였고, 선묘도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모가 이렇게도 다재다능할 줄은 내가 생각지도 못하였다.” 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당로자의 미움을 받아 늘 산직(散職)에 있었는데 단지 문학으로 임금의 인정을 받아 하루아침에 3품의 준직(準職)을 제수하라는 명을 받아 장악원 정(掌樂院正)이 되었다. 당시에 공의 자급(資級)이 통덕랑(通德郞)이었으니 무려 일곱 등급을 뛰어오른 것이다. 무술년(1598, 선조31)에 사헌부 집의를 거쳐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승문원이 아뢰기를, “승지는 예전에 본원의 제조(提調)를 겸할 수 없었으나 문재(文才)에 능한 사람이 있다면 이에 구애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여, 마침내 공을 부제조(副提調)로 삼았다.
관왕묘(關王廟)가 처음 낙성되어 중국 장수가 제전(祭奠)을 올리러 가면서 출발할 즈음에야 상에게 함께 제전을 올릴 것을 청하였다. 상이 창졸간에 행행하게 되었는데 제전에는 제문이 있어야 했다. 승여(乘輿)를 대령한 상황에서 유사(有司)가 지제교(知製敎)를 불러올 것을 청하니, 선묘가 특명을 내려 공에게 짓도록 하였다. 이에 공이 명을 받아 즉시 지어 올렸는데, 그 글에 “봉황의 눈이요 규룡의 수염이라 실제로 풍모를 뵙는 듯하며, 타는 적토마와 쓰는 언월도는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듯해라.〔鳳眼虯鬚 森然若見 赤兔偃月 新回酣戰〕” 등의 구절이 있었는데 선묘가 보고 크게 칭찬하며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그 뒤에 상이 양 유격(楊遊擊)을 친제(親祭)할 때의 제문과 경리(經理)에게 답하는 게첩도 모두 공에게 명하여 지어 올리게 하고는 매양 비단을 하사하였다.
병으로 체직(遞職)되어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는데 상이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마다 공이 어전 전역(御前傳譯)으로 입시하였다. 당시 중국 장수들이 도성 안에 가득하여 접견하는 일이 날마다 있었으며, 대제학의 자리가 오래도록 비어 있던 터라 괴원(槐院)이 수답할 일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졌는데 모두 공에게 위임하였다. 그래서 공은 분주히 중국 장수들을 만나는 한편으로 문서를 작성해 주고받아야 했는데, 글을 짓는 일을 대부분 어수선한 공청(公廳)에서 하였다. 때로는 서서 쓰고 입으로 불러 주느라 밤을 새고 새벽에 이를 때도 있었다. 언젠가 공이 병들어 며칠 동안 예궐하지 못하자 선묘가 “요즈음 이모(李某)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물었으니, 공을 총애함이 이와 같았다. 내구마(內廐馬)와 마장(馬裝)을 특별히 하사하니, 공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양하였다.
형 군문(邢軍門 형개(邢玠))의 생일에 공이 왕명을 받고 하첩(賀帖)을 지어 올렸는데, 그중에 “마침 생신 날이요 시절은 구월이라, 원문(轅門)의 고요한 낮에 북해(北海)의 술동이가 늘 가득 차고, 막부(幕府)의 맑은 가을에 남루(南樓)의 흥이 얕지 않으리.” 등의 구절이 있었다. 선묘가 이 글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한 본(本)을 베껴 들이도록 명하고 비단을 하사하였다. 삼공(三公)이 상에게 아뢰어 비국(備局)의 제조를 겸임하게 하였으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자급으로 제조가 된 것은 예전에 없던 새로운 규례였다.
중국의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주본(奏本)을 올려 왜적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 했다고 무함하고 터무니없는 말들을 주워 모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하였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우리나라가 조(祖)ㆍ종(宗)이란 임금 칭호를 쓰는 것을 대죄(大罪)라고 하였다. 이에 황상이 오부(五府), 구경(九卿), 과도관(科道官)에게 명하여 함께 토의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선묘가 피전(避殿)하여 석고대죄(席藁待罪)하며 한 달이 넘도록 조회를 보지 않으니, 온 조정이 황망하여 분개하고 원통해하였다. 선묘가 진주사(陳奏使)를 가려 차임하는 한편 글을 잘하는 몇 사람을 뽑아 각자 주문(奏文)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마침내 공의 글이 채택되었다.
공은 정응태의 무함에 대해 일일이 해명하였고 우리나라가 조ㆍ종이란 임금 칭호를 썼다는 조목에 이르러서는 “소방은 해외의 먼 나라로, 삼국 이래 예의(禮義)의 명호는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서로 비슷한 것이 많았습니다. 우리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 태조(太祖))에 이르러서는 무릇 분수에 넘치는 것들을 일체 고치고 바로잡아 이를 자손에게 전하여 금석처럼 굳게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유독 이 칭호만은 신라와 고려 때부터 이러한 잘못이 있어 왔는데 국내의 신민(臣民)들이 잘못된 옛 습속을 그대로 이어받아 외람되이 존칭을 계속 사용하면서 고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는 실로 무지하여 모르고 저지른 죄이니, 이를 두고 참칭(僭稱)했다고 한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하였다. 당시 재상인 유공 성룡(柳公成龍)이 “조(祖)ㆍ종(宗)이라는 칭호를 쓴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사실대로 밝히면 아마도 불측한 화를 당할 우려가 있으니, 이 부분은 빼 버리고 거론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조정의 의논이 오래도록 결정되지 못하니, 선묘가 수교(手敎)를 내리기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다. 어찌 숨길 일이 있겠는가. 이 일로 죄를 받게 된다면 내가 진실로 달게 받겠다. 이 주문의 내용을 그대로 진달하라.” 하였다.
진주사인 우상(右相)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응교(應敎) 신흠(申欽)이 글을 잘한다고 하여 서장관(書狀官)을 삼아 줄 것을 계청하니, 선묘가 답하기를, “내 생각에 오늘날 사명(詞命)을 잘하기로는 이모(李某)만 한 이가 없다. 그의 글을 보면 간폐(肝肺)에서 나와 곡진하고 간절하며, 게다가 그 사람됨이 자못 지모가 있으니, 부사(副使)로 승격시켜서 특별히 대동해 가라.” 하였다. 이공도 아뢰기를, “신도 본디 이모와 함께 가고자 했습니다만 이모가 현재 승문원의 제조로 문서를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신흠을 청했던 것입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는 신등이 원하는 바이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공을 승진시켜 공조 참판에 임명하고 부사로 차임할 것을 명하였다. 공이 연소한 나이에 단계를 뛰어넘어 승진한다는 이유로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임금이 인재를 쓰는 도리가 어찌 연령이나 자급에 있겠는가. 이 부사의 직책은 경이 아니면 안 된다. 국가의 일이 매우 급하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북경(北京)에 이르러 상주(上奏)하고 구경(九卿)ㆍ육과(六科)ㆍ십삼도(十三道)ㆍ육부(六府)의 아문에 정문(呈文)을 올렸는데, 하루 동안에 지은 정문이 39본(本)이나 되었다. 또 각로(閣老) 이하 여러 관아에 출입하면서 모두 정문을 올렸는데, 모두 공이 지은 것이었다.
천자가 주문(奏文)을 조정 신하들에게 하달해 토의하게 하니, 그들이 주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조ㆍ종의 칭호에 대해 해명한 대목에 이르러 모두 탄복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진실하구나. 임금에게 고함에 숨김이 없으니, 조선은 과연 예의의 나라이다.” 하였다. 그리고 헌의하기를, “주문이 명백하고 통쾌해서 읽다가 눈물이 떨어지려 하였습니다.” 하니, 천자가 유지(有旨)를 내리기를, “짐이 어찌 일개 소신(小臣)의 사사로운 분노와 망녕된 고자질 때문에 속국의 군민(軍民)이 눈물로 호소하는 간절한 마음을 생각해 주지 않으리오. 정응태는 거동이 괴상하고 위세로 감과(勘科)를 제압하여 자칫 대사를 그르칠 뻔하였으니, 관적(官籍)을 회수하고 사감(査勘)을 받게 하라. 조선 국왕에게는 너의 부(部)에서 자문을 보내 위유(慰諭)하여 시종 보살펴 주는 짐의 덕의를 알게 하라.” 하였다.
보고가 사행보다 먼저 이르자 조야가 환호하였고, 우리나라에 온 중국의 장관(將官)들은 대궐에 들어와 축하하면서 모두 그 주문의 문장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호남(湖南)의 사인(士人)인 노인(魯認)이 표류하여 소주(蘇州)와 항주(杭州) 지역에 이르렀다가 돌아와서는 말하기를, “그 지역의 선비들이 그 주문을 많이 전사(傳寫)하더라.” 하였다. 공이 복명(復命)하니 선묘가 편전에서 접견하고 어명을 내려 가자(加資)하고 노비와 전결(田結)을 하사하고 비국의 유사 당상을 겸임하게 하였다.
조정이 북병사(北兵使)가 올린 계책에 따라 야인을 정벌하려고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의 정예병을 뽑게 하니, 중외가 크게 소란해졌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그 불가한 점을 극력 진달하니, 선묘가 답하기를, “경이 재주가 있다는 것은 내가 다소 알고 있었으나 지혜가 이토록 비상하여 적의 실정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훤히 헤아릴 줄은 몰랐다. 더구나 남이 듣기 싫어할 직언(直言)을 극력 말하였으니, 이 또한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인재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으로 여길 것이다.” 하고, 비국에 유지를 내려 그 일을 정지하게 하니, 조야가 모두 기뻐하였다.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전조(銓曹)가 공을 경기 감사에 의망하니, 선묘(宣廟)가 그 망단자(望單子)를 내리며 하교하기를, “이모는 대제학에 추천된 사람이니, 제학에 제수하라.” 하여 드디어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였다.
상이 경리(經理)를 접견할 때 하교하기를, “이번 접견은 일이 심상하지 않으니 이모를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그 뒤에도 공이 연이어 입시하니, 상이 또 하교하기를, “전에 이모를 입시하도록 한 것은 경리가 혹 국가의 기사(機事)를 물을까 염려해서였다. 다른 중국 장수들을 접견할 때에는 매번 입시할 필요가 없다.” 하고 비단을 하사하였다.
뒤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까지 겸임하였다. 호조 판서가 결원(缺員)되자, 전교하기를, “이러한 때에 탁지(度支)의 장관은 재기(才器)가 합당하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우니 직질(職秩)을 따지지 말고 묘당에서 십분 엄선해 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을 제수하니, 공이 사직해도 허락하지 않았고 다시 병으로 연이어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의인왕후(懿仁王后)가 훙서(薨逝)하니 대신(大臣)이 회계(會啓)하기를, “이러한 때에 탁지의 장관은 다른 사람이 해낼 수가 없으니 이모를 그대로 임명하소서.” 하였다. 공이 황망히 입궐하여 곡림하고 나서 곧바로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를 겸임하였다.
당시 국가의 비축 물자가 고갈되어 염빈(斂殯)에 쓸 의복과 비단 등을 모두 시장에서 사들여야 하였다. 공은 관(官)에서 물품을 구입할 때마다 시장 백성들이 물품을 납부하려 하지 않는 것은 즉시 값을 지불하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해사(該司)에 비축해 둔 은을 꺼내어 먼저 시장 백성들에게 지급하니, 시장 백성들이 기뻐하여 다투어 납부하겠다고 나섰다. 국장도감에 필요한 물품이 매우 많았는데 하리(下吏)가 조종하여 시장 백성들을 날마다 도감에 모이게 하니 백성들이 괴로워했다. 이에 공이 시장 백성들에게 모일(某日)에 각자 도감에 필요한 물품을 가지고 일제히 모이고 다른 날은 와서 기다리지 않게 하였다. 기약한 날에 공이 도감에 앉아서 의궤(儀軌)의 예전 장부를 열람하고 백성들이 납부하는 물품을 살펴보아 쓸 만한 것은 받고 쓸 수 없는 것은 바꾸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나절 만에 허다한 물품을 모두 조처해 구비하니, 해조는 비용을 절감하고 시장 백성들도 기뻐하였다.
8월에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10월에 예조 판서로 자리를 옮겼고 발인(發引)할 때 명을 받들어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국장도감 제조로서 산릉(山陵)에 갔는데, 장사 지내기 전날 밤 영악전(靈幄殿)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재궁(梓宮)은 다행히 모시고 나왔으나, 호행(扈行)한 백관들이 황망히 놀라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이 사람들에게 각종 의물(儀物)을 주어 각자 자기가 맡은 물건을 가지고 불길을 피하고 다른 사람의 의물은 손대지 말게 하였다. 이날 밤 이미 자정을 지났고 현궁(玄宮)에 하관할 시각은 인정(寅正 오전 4시)으로 잡혀 있었다. 불을 진화한 뒤 각종 의물을 맡은 사람들을 소집하여 장부와 대조해서 점검해 보니 하나도 유실된 게 없었다. 즉시 낭관으로 하여금 조정에 아뢰어, 세자가 백관을 인솔하여 곡림하고 위안제(慰安祭)를 지내는 절목을 정한 뒤에 광해(光海)의 악차(幄次)와 총호사(摠護使)인 이상 헌국(李相憲國)의 처소에 가서 보고하였다.
이상(李相)은 애초에 공이 이와 같이 조처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애를 태우며 공을 만나려 하였으나 많은 사람이 모여서 불을 끄느라 소란스러워 지척에서도 공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공을 보고는 손을 붙들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였다. 공이 사실대로 자세히 대답하니 이상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와 같은 사람을 예판(禮判)으로 얻었으니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소.” 하고는 삼공과 상의하여 재궁이 있는 곳에 악차(幄次)를 만들고 광해에게 백관을 인솔하여 곡림하고 위안제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현궁에 하관하는 일을 제 시각에 맞춰 거행할 수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오늘 불행히도 변고를 당했으나 길흉사(吉凶事)의 의물들은 모두 손상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혹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뒷말을 할 우려가 있으니, 삼사와 육경 등 여러 관원에게 점검해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삼공이 모두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관원들을 모이게 해서 자세히 살펴보게 한 뒤에 의례(儀禮)대로 봉분을 조성했다.
신축년(1601, 선조34) 1월에 세자시강원 우빈객(世子侍講院右賓客)을 겸임하였다.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김공 상용(金公尙容)이 대사간으로서 아뢰기를, “궁금(宮禁)이 엄하지 못한 탓에 청탁이 자행되어 관작(官爵)과 형옥(刑獄)까지도 외인들이 함부로 개입하고 있는 실정이며 왕자(王子)가 옳지 못한 일을 자행하고 있다.”라고 극론하니, 상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그대는 간관(諫官)인데 어찌하여 숨김없이 말하여 탄핵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두려워 떨며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고 혹자는 “김공이 오활하고 우직하여 실언(失言)했다.” 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김상용의 말이야말로 참으로 강직한 신하의 말이지 실언이 아닙니다. 상께서는 응당 체념(體念)하여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간관에게 ‘어찌하여 숨김없이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하교하셨으니, 역시 훌륭한 말씀입니다. 신하가 충직한 말을 아뢰자 임금이 능히 포용해 주시고 게다가 숨김없이 말하게 하셨으니, 간관의 직언은 바로 그의 직분이니 누군들 성심을 다하여 모두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의 마음이 조금 풀려 이르기를, “나는 그와 같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궁중을 단단히 경계시키겠다.” 하였다.
5월에 병으로 체직되었고, 8월에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고 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경서(經書) 언해(諺解)를 임진왜란 이전에 시작했다가 마치지 못하였는데, 선묘가 다시 청(廳)을 설치하고 경학(經學)에 밝은 신하들을 널리 선발하여 찬정(撰定)해 올리도록 하니, 공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10월에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공이 세 차례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문형(文衡)의 직임은 선비들의 의표(儀表)가 되고 나라의 종장(宗匠)이 된다. 경의 문장과 재덕이 어찌 이를 감당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조사(詔使) 고천준(顧天俊)과 최정건(崔廷健)이 황태자 책봉을 반포하는 조서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올 때 공을 원접사로 삼았는데 공이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이에 박동열(朴東說)ㆍ이안눌(李安訥)ㆍ홍서봉(洪瑞鳳)을 종사관으로 삼고, 김현성(金玄成)ㆍ차천로(車天輅)를 제술관(製述官)으로 삼았으며, 권필(權韠)은 백의(白衣)로 따라가게 하고, 한호(韓濩)는 가평 군수(加平郡守)를 체직하고 따라가게 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막부(幕府)의 성대한 문회(文會)가 옛날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였다. 공이 하직 인사를 하자 선묘가 인견하고 호피(虎皮) 등의 물품을 하사하는 한편 머리에 쓰고 있던 초모(貂帽)를 손수 벗어 주기까지 하였다. 공이 무릎을 꿇고 받들어 물러나니 그때까지도 상의 땀이 초모에 배어 있었다. 공이 이 초모를 종신토록 머리에 쓰고 다 해져도 바꾸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나던 날에도 착용하고 있었다.
도성을 나가는 즉시 ‘예조는 업무가 많은 부서라 오래 비워 둘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하니, 공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이배(移拜)하였다. 용만(龍灣)에 도착하니 조사가 제때에 오지 않아 석 달을 머물며 기다렸다. 영남 사람 문경호(文景虎)는 정인홍(鄭仁弘)의 당인이다. 그가 상소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를 공격하면서 우계의 여당(餘黨)이 아직도 관작을 지니고 있다고 헐뜯으니, 제공이 연이어 견책을 받고 파면되었다. 이에 공이 잇따라 소장을 올려 해임을 청하자 체직되어 평양 영위사(平壤迎慰使)가 되었다. 그리고 조정에 돌아와 문형을 사직하였는데 누차 사직하여 체직되었고, 또 경연의 빈객(賓客)도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임인년(1602, 선조35) 8월에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효경전(孝敬殿)의 재기(再朞) 뒤의 제사에 태묘(太廟)의 음악을 사용하고 희생은 태묘의 생체(牲體)를 나누어 썼다. 공이 말하기를, “상기(喪期) 3년이 지난 뒤라도 아직 부묘하기 전에는 별묘를 세워 문소전(文昭殿)에서 생전에 썼던 물품으로 제사 지내는 규례를 따라야 한다. 어떻게 태묘의 음악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생체를 나누어 쓰는 예법이 어디에 있는가.” 하니, 대신이 모두 옳다고 하여 마침내 개정하였다.
전대 충현(忠賢)의 묘소에 치제하는 제문의 양식을 의정하며 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에 대해 ‘고려 시중 정공의 묘〔高麗侍中鄭公之墓〕’라고만 일컫고 이름은 부르지 말게 할 것을 청하니 선묘가 난색을 표하였다. 이에 공이 또 아뢰기를,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공경하는 것을 존현(尊賢)이라 하니, 현자를 위해 몸을 굽히는 것은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의 성대한 일입니다. 정모(鄭某)는 사문(斯文)에 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조에 대해 신하로 섬기지 않은 의리가 있었으니, 어찌 그의 묘소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공이 또 노산(魯山)과 연산(燕山)의 후사를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논의가 끝내 채택되지 못하였다.
공이 일찍이 ‘세자가 오래도록 중국 조정의 책봉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사신을 가려서 주청(奏請)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대신이 공의 주장에 따라 주청사(奏請使)를 보낼 것을 청하였다. 주청사로 갈 사람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가 결국에는 공이 명을 받고 가게 되었다. 이때 천재(天災)가 생겨 상이 구언(求言)하였기에 공이 응지(應旨)하여 만언(萬言)의 봉사(封事)를 올려 군정(軍政)을 정비하여 무비(武備)를 강화하고 기강을 진작시켜 국체(國體)를 존엄하게 하며, 인심을 결속시켜 화기(和氣)를 불러오고 언로를 열어 많은 계책이 모여들게 하며, 공도(公道)를 넓혀 인재를 널리 거두고 실덕(實德)을 닦아 하늘의 견책에 응답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중국으로 떠날 때 조정이 이자(移咨)하여 밀운(密雲) 군문(軍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승문원이 역관 1인을 더 보내도록 요청하였다. 그런데 공이 환국하자 대관(臺官)이 권신(權臣) 유영경(柳永慶)의 뜻을 받들어 ‘공이 제멋대로 역관을 더 데리고 갔다’고 논계(論啓)하였는데 선묘가 당초에 승문원의 계청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답하기를, “지혜로운 사람도 천 가지 생각 중에 한 가지 실수는 반드시 있는 법이다. 어찌 우연한 실수를 가지고 경솔하게 재신을 죄책(罪責)할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이 일로 마음이 편치 못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힘써 요청하여 을사년(1605, 선조38) 3월에 경기 감사에 제수되었다.
선묘가 사신(詞臣) 6, 7인을 선발하여 찬집청(纂集廳)을 설치하고 동국(東國)의 시문(詩文)을 가려 뽑을 것을 명하였다. 윤공 근수(尹公根壽)와 이공 호민(李公好閔) 등이 아뢰기를, “이모(李某)가 이 일에 참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기백(畿伯)은 비록 외관(外官)이지만 늘 도성 안에 있으니, 파격적으로 찬집청 당상에 임명하여 함께 참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정포은(鄭圃隱)의 묘소가 용인(龍仁)에 있었는데 공이 뜻을 같이하는 제공 및 유생들과 의논하고는 감영의 봉록(俸祿)을 출연하여 서원(書院)을 세웠다. 그 일이 알려지니 상이 ‘충렬(忠烈)’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이 난리를 겪은 뒤 퇴락하여 목주(木主)가 담장 사이에 버려졌는데 공이 또 봉록을 출연하여 수선한 다음 향축(香祝)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후손인 왕곤(王鵾)을 전감(殿監)으로 삼게 해 줄 것을 계청하였다. 그리고 죽산산성(竹山山城)과 수원산성(水原山城)을 보수하였다.
임기가 차자 지중추부사 겸 실록청춘추관지사 의금부지사〔知樞兼實錄知春秋館事知義禁府事〕가 되었다. 당시 반궁(泮宮) 곁채 벽에 당로자(當路者)의 숨겨진 악행을 쓰고 ‘탁란조정방(濁亂朝政榜)’이라는 제목을 붙여 놓은 사건이 발생하니, 상이 진노하여 성균관의 관원과 노비 10여 인을 국문(鞫問)하여 벽에 이 글을 써 붙인 사람을 찾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선비 3인이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목에 걸려 옥사가 일어나니 사람들이 저마다 두려워하여 중외가 불안에 떨었다. 성균관의 관원과 노비가 많이 죽었는데도 끝내 방을 붙인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 옥사 때 공이 누차 구속된 사람들을 구해 주었다. 선묘가 추관(推官)에게 명하여 각자의 소견을 진달하게 하자 공이 또 이 옥사에 억울하게 걸려든 사람들의 정상을 극력 진달하니, 상이 마침내 모두 석방할 것을 명하였다.
일본이 사형수를 묶어 우리나라에 보내고 임진년(1592, 선조25) 당시에 능침(陵寢)을 범한 도적이라 사칭하면서 화의(和議)를 청하였다. 유영경(柳永慶)이 종묘에 이 사실을 고하고 진하(陳賀)하려고 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권신(權臣)이 권력을 전횡하여 자기 마음대로 나쁜 짓을 자행하니 공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겸대한 직책을 모두 사체(辭遞)하고 서추(西樞)의 관직만 지닌 채 한 해가 다 가도록 침묵을 지키며 두문불출하였다. 오랜 시일이 지난 뒤 다시 지춘추관사를 겸임하고 호조 판서가 되었다.
무신년(1608) 2월 1일, 선종대왕(宣宗大王)이 승하하였다. 공이 호조 판서로서 관례에 따라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직책을 겸임하였으며, 또 행장찬집청(行狀撰集廳)의 당상을 겸임하여 행장을 찬술(撰述)해 올렸다.
3월에 병조 판서로 자리를 옮겼다. 막 국상이 났을 때부터 곧바로 장수와 사졸을 두어 궁성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노숙하며 고생한 탓에 원망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무도 궁성 호위를 그만둘 것을 감히 청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반복해서 진달하니 그날로 즉시 호위를 그만두게 하였다. 난리를 겪은 뒤 군공(軍功)을 세우거나 곡식을 헌납하여 부장(部將)이 된 사람 이하가 번갈아 상번(上番)하였는데 이들을 ‘일삭 금군(一朔禁軍)’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군병은 누구를 막론하고 군보(軍保)가 있었는데도 이들은 군보가 없어서 자기 양식을 싸 가지고 상번하였기 때문에 매우 고달프게 여겼다. 그래서 공이 아뢰어 그들을 해산시켜 보내고 단지 집에 있으면서 조련(操鍊)을 받다가 유사시에 부방(赴防)하게 하고는 이름을 의용대(義勇隊)라 하였다. 그리고 내삼청(內三廳)의 참하관(參下官)들이 적체되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의 인원을 더 두어서 그들이 승천(陞遷)할 길을 더 넓혀 주었다.
사제(賜祭)하는 중국 사신 웅화(熊化)가 나올 예정이라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고, 뒤에는 또 세자시강원 우빈객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를 겸임하였다. 발인 때에 필요한 군인이 무려 6000여 명에 달했는데 으레 외방에서 징발하였으므로 원도(遠道)의 농민이 왕래하느라 제때 일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공이 경중(京中)의 방리(坊里)에서 백성을 동원하여 그들을 대신하게 하고는 이를 정식으로 삼아 그 뒤로 국상 때마다 모두 이를 준행하였다. 행장을 찬술해 올린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웅화가 와서 공을 만나고는 시를 지어 주니 공이 즉시 차운하였다. 웅화가 공의 시를 보고 크게 찬탄하고 소첩(小帖)에 써서 역관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글자 하나하나에 당인(唐人)의 혼백이 들어 있다.” 하였다. 관소(館所)에 머무는 10여 일 동안 공에게 편복(便服) 차림으로 술자리에 들어오게 하여 시주(詩酒)를 즐기며 간담을 토로하였는데 말할 때마다 반드시 공을 선생이라고 불렀으며, 작별할 때에는 애틋한 정에 차마 헤어지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황화집(皇華集)》의 서문은 난봉(鸞鳳)이 나는 것 같은 공의 글을 얻고 싶으니, 공이 지어 주시오.” 하니, 공이 ‘국왕의 명이 있어야 하니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다가 결국에 왕명을 받들어 서문을 지었다.
태감(太監) 유용(劉用)이 뒤이어 우리나라에 왔다. 김수(金睟)가 호판(戶判)으로 관반이 되었는데 광해가 특별히 공을 불러 접대의 일을 함께 의논하게 하였다. 태감이 오는 도중에 재물을 터무니없이 많이 요구하니, 좌우 신하들은 모두 민간에 비축된 은(銀)을 긁어모으는 한편 관창(官倉)의 미곡을 내어 그 은을 사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웅 조사(熊詔使)가 은과 삼(蔘)을 가지고 가지 않아 도감에 비축해 둔 것이 있으니, 유용이 아무리 형편없는 자라 할지라도 비축해 둔 은으로 충분히 접대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가뭄의 재앙이 참혹해서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이니, 묘당이 서둘러 강구해야 할 것은 굶주리는 백성들을 진휼하는 데에 있습니다. 유용을 접대하는 일은 너무 우려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관례에 의하면 제주(濟州)에서 전복을 사들이는 것이 수천 첩(貼)에 이르렀는데, 차인(差人)이 반값만 지불하고서 사 왔다. 공이 아뢰기를, “절도(絶島) 백성들의 원망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예전에 사들여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접대에 쓸 수 있으며, 게다가 조사가 꼭 전복을 찾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설사 조사가 전복을 요구하더라도 다른 것을 대신 주면 될 터이니, 더 사들이는 일을 중지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미 보낸 절반의 전복값 역시 환수하지 말게 하여 전일에 억지로 팔게 했던 일을 보상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광해가 따랐다. 그 뒤에 과연 접대에 쓸 전복이 부족하지 않았다. 제주 백성들이 깊은 바다 속에서 전복을 따다가 왕왕 죽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전복을 더 사들이라는 명이 내려오면 목을 매 죽을 작정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명을 도로 취소하고 절반의 전복값도 환수하지 않게 했다는 말을 듣고는 온 섬 백성들이 고무되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접대도감(接待都監)의 방자(幇子) 등의 인원을 으레 외방에서 조발하는데 수천 명에 이르렀고 말도 100여 필이었다. 이에 공이 계청하여 외방에서 조발되어 올라올 사람들에게 포목을 약간 거두어 경성(京城)에서 사람을 고용하게 하니, 중외가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쓰고 남은 포목이 또한 매우 많았으므로 이것을 가지고 외병조(外兵曹)의 건물을 지었다.
누차 정고(呈告)하여 체직을 허락받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휴가를 청하여 선영에 가서 성묘하였고, 돌아와 기전(畿甸)의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상황을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백성들에게 이전해 주는 곡식은 예전부터 충실하지 못해, 부패해서 먹을 수 없는 것도 있고 흠축이 나서 실제 수량에 차지 않을 때도 있는데 백성은 많고 곡식은 적어 백성들이 받는 양이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곡식을 받는 곳이 멀어 4, 5식(息 1식은 30리)이나 떨어진 곳도 있어 양식을 싸 가지고 왕래하는데 걸핏하면 며칠이 걸리곤 합니다. 게다가 간악한 아전들이 그들을 침탈하기 때문에 끝내는 빈 자루를 들고 돌아오는 백성이 태반입니다. 곡식을 옮겨서 기민(飢民)을 진휼하는 일이야말로 왕정의 급선무인데 그 폐단이 도리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단지 잡다한 부역과 터무니없는 세금을 죄다 없애 백성들의 힘을 펴 주어 백성들이 비록 도토리와 콩잎이라도 편안히 앉아서 먹을 수 있게만 해 준다면 이것이 바로 기민을 구제하는 상책일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을 흔들어 힘들게 한다면 구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선혜청이 거둘 곡식을 지금 납부하라고 독촉하고 있는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 곡식을 내기가 필시 어려울 것입니다. 가을인 지금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내년 봄은 어떠하겠습니까. 통영(統營)의 둔조(屯租) 수만 섬(石)과 제반 작미(作米)하여 진휼할 것들을 지금 선운(船運)해 오게 했습니다. 이 곡식들은 우선 분급(分給)하지 말고 선혜청으로 옮겨 경기 백성들이 금년 가을과 내년 봄에 납부해야 할 곡식을 모두 감면해 준다면 곡식을 받느라 왕래하며 헛수고하는 폐해도 없을 뿐 아니라 곡식을 마련하여 납부하는 고통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광해가 따랐다.
실록청(實錄廳)의 도청 당상(都廳堂上)을 겸임하고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공이 아뢰기를, “병란 때 사절(死節)한 사녀(士女)가 매우 많습니다. 충신, 열부, 효자에 대해 각 도(道)에서 보고한 문서가 쌓여 권축(卷軸)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이 신축년(1601, 선조34)에 본조에 재직하면서 선왕의 하교를 직접 받들고 등급을 나누어 책자를 만들었는데 그중에 절부(節婦)가 특히 많았습니다. 그 보고한 바는 모두 한 고을의 공론에 의한 것이니, 혹 잘못 알려져 이름이 실제보다 지나친 경우도 있겠지만 사람은 미천해도 실제 사적은 그 이름보다 더한 경우도 필시 있을 것입니다. 왜적의 칼날이 거의 나라 안에 다 미쳤으니 사절한 사녀가 수백 명을 넘는다고 할지라도 많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새로 정치를 열어 교화를 펴는 이때 이들에게 똑같이 정표(旌表)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노산군(魯山君)의 분묘가 영외(嶺外)의 먼 지방에 있는데, 비록 사절(四節)마다 본관(本官)이 품관(品官)을 보내 제사를 지내지만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인의 분묘는 양주(楊州)에 있는데 벌채와 방목을 금하지 않고 있으며 향화(香火)도 끊어졌습니다. 예로부터 제왕은 비록 전대의 망한 나라 임금일지라도 모두 숭봉(崇奉)하여 향사(享祀)하는 법을 두었습니다. 지금 따로 사우(祠宇)를 세워 신주를 받들게 하고 매년 한식 및 두 기일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며, 사절에는 수령이 직접 분묘가 있는 곳에 가서 제사 지내게 하는 한편 특별히 봉식(封植)해 주고, 분묘를 지키는 사람을 증원하소서.” 하니, 광해가 모두 따랐다.
선묘(宣廟)의 삼년상을 마치고 부묘할 때 관례에 따라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휘호(徽號)를 가상(加上)하고자 하였다. 심상 희수(沈相喜壽)가, “이미 생시의 존호(尊號)가 있으니 휘호를 가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왕후는 부묘할 때에 으레 네 글자의 휘호를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선종대왕(宣宗大王)에게 존호를 두 차례 올린 일이 있어도 시호를 올렸는데, 의인왕후에게만 생시의 존호가 있다고 하여 으레 올리는 휘호를 올리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공의 말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광해가 공빈(恭嬪 광해군의 생모)을 추숭(追崇)하고자 하여 예관에게 절목을 강정하게 하고 또 유신에게 옛날의 예법을 널리 상고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그 위호(位號)와 절목은 알맞게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너무 높이면 예제를 넘게 되어 두 분의 모후(母后)가 있게 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고, 너무 가벼우면 사은(私恩)을 소홀히 하여 세상을 떠난 뒤 효도하려는 정성을 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의 예법을 본받아 따르려고 한다면 중자(仲子)의 사당을 세운 일과 성풍(成風)에게 수의(襚衣)를 보낸 일이 모두 《춘추(春秋)》에서 비판받았고, 한(漢)ㆍ당(唐)ㆍ송(宋) 때에 추숭했던 일도 모두 성인이 예법을 제정한 뜻에 위배됩니다. 더구나 의인왕후께서 전하를 아들로 삼은즉 전하께서는 사친(私親)에 대해 본래 강복(降服)하는 예가 있으니 모후와 일체로 높일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황조의 효종황제(孝宗皇帝)는 생모인 귀비(貴妃) 기씨(紀氏)를 추존하여 봉자전(奉慈殿)에서 별도로 제사하였습니다. 황조의 법가(法家)가 바르기로는 효종이 가장 으뜸이니, 이것이 바로 시왕(時王)의 제도이고 사례가 또 지금의 경우와 같습니다. 의당 이를 근거로 하여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 위호로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위로 천자가 있는 만큼 사세가 중국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본래의 위호를 그대로 쓴다면 추숭하는 실질이 없게 될 듯하고, 위로 모후와 똑같게 한다면 지존을 두 분 두는 혐의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존해 계실 때에는 비(妃)라고 부르고 승하하신 뒤에는 후(后)라고 부르는 것이 이미 조종의 관례가 되었으니, 후와 비는 등급에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추존하여 비(妃)라 부름으로써 조금 강등하여 차별을 두는 뜻을 보이고 휘호를 더하여 별묘에서 향례(享禮)를 올리고 기타 절목은 모두 홍치(弘治 명나라 효종의 연호)의 고사를 따름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광해가 답하기를, “단지 비(妃)의 명호만 올리는 것으로는 추숭의 전례(典禮)에 부족하다. 그리고 효종황제도 이미 자신을 낳은 귀비 기씨를 효목황태후(孝穆皇太后)로 삼았으니, 이번에도 후(后)의 명호를 올려야 할 것이다. 별묘를 세우고 책보(冊寶)를 올리는 의례(儀禮)와 봉릉(封陵)의 절목을 다시 더 상세히 의논하라.” 하였다. 공이 다시 불가함을 극력 진달하였으나 광해의 뜻이 더욱 확고하고 답이 더욱 엄하여 뜻을 돌릴 수 없었다. 공이 마침내 사직하고 다시 경연에서 힘써 진달하는 한편 체면(遞免)을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받지 못하였다.
봉자전의 제례를 태묘의 제례에 따라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공이 또 아뢰기를, “이미 태묘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으니 제례에 시선(時膳)을 써야지 태묘와 같이 희생을 써서는 안 됩니다.” 하며 중국의 봉자전과 본조의 소경전(昭敬殿)의 제례를 인용하여 증거를 대었다. 그리하여 모두 여덟 차례 계청하고서야 윤허를 받았다. 광해가 사묘(私廟)에 친제하고자 하니, 공이 또 아뢰기를, “신주(神主)의 제목을 아직 고치지도 않았는데 친제하신다면 모든 절차의 일들이 온편치 못하게 될 터이니, 별묘에 봉안한 뒤에 거행하소서.” 하였는데, 세 차례 아뢴 뒤에야 윤허를 받았다.
선종대왕(宣宗大王)의 상을 마치고 부묘할 때 유생과 기로(耆老)가 가요를 바치는 관례가 있었는데 공이 아뢰기를, “이는 비록 신하가 송축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원래 헛된 형식에 불과합니다. 지금 민생이 고달프고 국가에 일이 많으며 게다가 남은 슬픔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번다한 형식을 다 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광해가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축문(軸文)을 올리는 일만 거행하고 결채(結彩) 등의 일은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동궁의 관례(冠禮)를 행할 때 찬관(贊冠)의 소임을 맡았고, 동궁이 입학할 때 박사(博士)의 소임을 맡았다. 찬관으로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유생들이 선묘 때부터 상소하여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청하기에 공이 경연에서 적극적으로 주장하니, 광해가 대신과 의논하여 시행하라고 윤허하였다. 이조 판서로 천직(遷職)되자 세 차례 정고하고 또 사직 차자를 올렸으나 온유한 내용으로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신해년(1611, 광해군3) 4월에 정인홍(鄭仁弘)이 차자를 올려 선현(先賢)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와 퇴계(退溪 이황(李滉))를 비방하니 태학생(太學生)들이 상소하여 논변하고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하였다. 이에 광해가 크게 노하여 의논을 주도한 유생을 삭적(削籍)하고 금고(禁錮)할 것을 명하니 유생들이 마침내 공관(空館)하고 떠났다. 공이 대궐에 나아가 제생을 변론하니 광해가 하교하기를, “의논을 주도한 유생의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좌상과 대제학이 연이어 극력 청하니 삭적하고 금고하는 일은 거행하지 말고 단지 장무관(掌務官)을 파면하고 대사성을 체직하라.” 하였다. 공이 또 상소하여 불가하다고 극력 진달하며 자신에게도 같은 처벌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고, 그 뒤에도 연이어 해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몇 개월이 지나서야 전조(銓曹)에서 체직되고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그 이듬해에 관례에 따라 창덕궁(昌德宮)의 도감(都監)을 겸임하고, 상(賞)으로 가자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였다. 명을 받고 어사(御史) 양호(楊鎬)의 송덕비를 지었는데, 양호가 이 글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이 상서(李尙書)가 나를 위해 좋은 문장을 지어 주었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기자(箕子)는 우리 동방에 문명의 교화를 열었는데, 그 덕을 기리고 그 공에 보답하는 전례(典禮)에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기자의 후손인 선우식(鮮于寔) 등에게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며, 기자의 사당을 숭인전(崇仁殿)이라 하고 선우식을 전감(殿監)으로 삼되 직질은 6품 정도로 하고, 자손들이 대대로 관례에 따라 지키게 하소서.” 하였다. 또 신하를 보내 치제하고 봉묘(封墓)하고 사우(祠宇)를 수축하고 제전(祭田)과 수복(守僕)을 늘려 주는 한편 선우 성을 가진 사람들을 복호(復戶)하고 군적에서 제외시켜 사우 아래에 모여 살면서 제사를 함께 봉행하게 할 것 등을 청하니, 광해가 따랐다. 본도가 비석에 새겨 이 사실을 기록할 것을 청하니, 공에게 명하여 그 비문을 짓게 하였다. 본도의 선비들이 일찍이 기자의 서원을 세웠는데, 이때에 와서 인현(仁賢)이라고 사액하였다.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이 상소하여 교하(交河)로 천도(遷都)할 것을 청하니, 광해가 예조로 하여금 의계하게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풍수지리설은 본래 신빙하기 어렵습니다. 한양 도읍의 빼어난 형승(形勝)은 온 나라 안에서 으뜸입니다. 성조(聖祖)께서 창업을 하시고 몇 년 동안 경영하다가 이곳에 국도(國都)를 정하셨는데, 그 뒤로 200년 동안 나라는 태평하고 민생은 안정되었으며 선치(善治)는 융성하고 풍속은 아름다웠으니 만세토록 패망하지 않을 견고한 터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일개 필부의 황당무계한 말을 대뜸 믿고서 200년 기업(基業)과 백만억의 생령을 단번에 머물 곳 없이 표류하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광해가 크게 노하였다. 그러나 공이 재차 아뢰며 극론하니, 대신과 의논하라고 명하여 마침내 천도하자는 논의가 중지되었다.
계축년(1613, 광해군5) 5월에 은적(銀賊) 박응서(朴應犀)가 이이첨(李爾瞻) 등의 사주를 받고 옥중에서 상변(上變)하여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과 그 가속이 모두 체포되었다. 적당(賊黨) 정협(鄭浹)이 또 몰래 사주를 받고 공과 황공 신(黃公愼), 신공 흠(申公欽), 김공 상용(金公尙容) 등 10여 인이 연흥(延興)의 집에 모여서 연회를 열었다고 고발하니, 마침내 광해가 친국하기에 이르렀다. 공이 공초(供招)하기를, “김제남과 평소에 서로 친하게 지내던 터라 그가 초청해서 연회에 참석했을 뿐입니다.” 하니, 광해가 공과 황신과 김상용을 어전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말하기를, “경등은 모두 내가 믿고 의지하는 신하들이니, 어찌 역적의 편을 들 리가 있겠는가. 주모자가 경등의 명망을 빌리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적당의 입에서 말이 나왔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고 방송(放送)하였다. 공이 여섯 차례나 소를 올려 자신을 탄핵하였으나, 광해가 허락하지 않았다.]
옥사가 종결되고 종묘에 고할 때 공에게 그 글을 짓도록 명하였는데, “스스로 부귀를 도모할 줄 어린 동생이 어찌 알았으랴.〔自圖富貴 稚弟何知〕”라는 구절이 있으니 광해가 그 말을 고치라고 명하였다. 또 저주에 관한 일을 첨가해서 써넣으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쓴 글에 또 “정신이 혼미한 자의 공초에서 나왔다.〔出於亂招〕”라는 구절이 있으니 광해가 또 난(亂) 자를 고치라고 명하였다.
연흥이 죽었을 때에 대비(大妃)의 복상(服喪) 여부를 놓고 의논을 하였다. 참판 오백령(吳百齡)이 공에게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김제남이 비록 반역죄로 죽었다 하더라도 부자(父子)의 인륜은 고금의 떳떳한 법이니, 대비가 어찌 복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공이 사직하고 있던 터라 예조의 일에는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판이 물었던 것이다. 대신이 마침내 이러한 내용으로 헌의하여 상복(喪服)과 소선(素膳)을 올리게 하였다. 당시에 공이 내국 제조의 직책은 해면되지 않았던 터라 부제조인 정공 엽(鄭公曄)에게 말하기를, “대비전(大妃殿)에 조알(朝謁)하는 일이 폐지되었지만 지금 어찌 차마 위문하는 예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대비전에 가서 문안을 올렸다.
이이첨의 무리가 공이 지은 종묘에 고하는 제문의 조어(措語)와 대비의 복상, 내국에서 대비전에 문안을 올린 일 등을 가지고 트집 잡아 죄안을 만들고 중한 형률을 적용하려고 하였다. 그 뒤에 헌부(憲府)가 논계하여 공을 파직할 것을 청하여 예조 판서의 직책만 체직하였다. 공이 또 대제학을 사체(辭遞)한 뒤에 다시 겸대한 모든 직책을 체직해 줄 것을 청하면서 네 차례나 소차(疏箚)를 올리니, 광해가 답하기를, “이미 종백(宗伯)도 그만두었고 문형(文衡)도 그만두었으니, 영예롭고 번다한 직책을 사양한 것이 매우 많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공이 또 겸대한 직책과 지중추부사의 직책을 사직하였다.
이때 변무(卞誣)할 일이 있어 공을 상사(上使)에 차임하면서 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또 형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양사가 연흥의 집에 가서 연회에 참석한 일을 트집 잡아 논계하며 파직을 청하였는데 광해가 허락하지 않았으나 공이 즉시 정고하여 체직되었다. 공이 또 상소하여 진주사(陳奏使)의 직임을 체직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세 차례 소를 올린 뒤에야 체직되었다. 뒤에 대신의 천거에 의해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공이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에 창덕궁과 창경궁(昌慶宮)의 여러 전각에 부시(罘罳)를 설치한 철망(鐵網)이 없었으므로 주성청(鑄成廳)을 설치하려고 하니, 그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다. 공이 역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수십 금(金)을 가지고 중강(中江)에 가서 무역을 하게 하자 몇 달이 채 못 되어 돌아왔다. 이 자금으로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도 여러 전각의 부시를 모두 설치하였다.
공이 또 호조에 보관된 예전의 장부를 열람하면서 매년 포부(逋負)한 액수를 계산해 보니 무려 수천 동(同)에 이르렀다. 그래서 해당 관리들을 조사하여 신문하자 모두 자복하였으므로 이것을 가지고 경비에 보태 쓰고 세금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줄여 주려고 하였는데 얼마 뒤에 공이 체직되고, 후임자가 공이 마련한 자금을 별비(別備)라고 하면서 토목공사 비용으로 보조하여 광해에게 아첨하였다.
병진년(1616, 광해군8) 겨울에 또 관복주청사(冠服奏請使)로 북경(北京)에 가서 중국 조정의 허락을 받고는 아직 귀환하지 않았는데 판중추부사에 제수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정사년(1617) 8월에 복명하였다. 이때 웅화(熊化)가 감찰 어사(監察御史)로 있었는데 공을 만나자 반가워하면서 예전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시를 수창(酬唱)하였다. 웅화는 청직(淸直)하다는 중한 명망이 있는 데다 직책이 대헌(臺憲)이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오대(烏臺)의 개석(介石)에 비겼다. 하루는 그가 공을 초청하여 그의 저택에서 연회를 베풀면서 예모가 매우 공손하니 그 자리에 참석한 중국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길로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신의 일을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웅화의 도움이 많았다.
계축년(1613) 이후로 흉악한 무리가 대비를 폐출할 음모를 꾸며서 정조(鄭造)와 윤인(尹訒) 등이 맨 먼저 임금과 대비가 각각 별도의 궁(宮)에 거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오래지 않아 광해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고 대비는 서궁(西宮)에 유폐되기에 이르렀다. 병진년(1616) 봄에 큰 가뭄이 든 재이(災異)로 인해 남대문(南大門)을 폐쇄한 적이 있었다. 공이 정공 엽(鄭公曄)과 함께 중추부에 새로 제수된 데 사은하려고 서궁에 갔다가 궁의 뜰이 잡초로 덮인 것을 보고는 궁문을 바라보고 울며 말하기를, “문을 닫지 말고 닫힌 문을 열면 하늘이 곧 비를 내려 줄 텐데.” 하였다. 이이첨이 그 말을 전해 듣고 임금께 아뢰어 국문하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해명하기를, “농담으로 한 말이니 굳이 따질 것이 못 된다.” 하니, 이이첨이 노기를 띠며 말하기를, “농담하면서 우는 법도 있는가.”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공에게 죄를 주지는 못하였다.
당시에 위태로운 상황이 날로 급박하던 터라 공은 장차 큰 화란(禍亂)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병든 몸을 이끌고 독음촌(禿音村)으로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이공(李公)을 찾아가 다시 못 볼 이별을 하였다. 오성과 헤어지며 지어 준 시에 “석양에 몇 줄기 눈물 흘리며, 목릉 마을에 말을 세우노라.〔斜陽數行淚 立馬穆陵村〕”라는 구절이 있다.
흉악한 무리가 다투어 모후를 폐출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광해가 그 소장을 정부(政府)에 내려 정의(庭議)를 두루 수합하게 하였는데 공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가 정의에 불참한 자는 집에서 헌의하라고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이모(李某)는 국가를 위해 수고한 사람인데 지금 병이 들었으니, 내의를 보내 병을 살피고 약을 처방해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그 이튿날 나주(羅州) 유생인 진호선(陳好善)이 상소하여, 정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먼저 공을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또 그 이튿날에는 전창(全昶) 등이 상소하여 공과 김공 상용(金公尙容), 오공 윤겸(吳公允謙), 김공 권(金公權)이 헌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논죄하였는데, ‘주찬(誅竄)하라’는 말도 들어 있었다.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도당(都堂)에 백관을 모으고 수의할 때에도 공은 또 병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고 주의(奏議)를 지어 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친척인 재신이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주의가 들어가면 화(禍)가 반드시 갑절이나 커질 것이다. 게다가 유생들이 중신을 청죄하는 상소를 올렸으니 어떻게 태연히 헌의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공이 마침내 내용을 고쳐서 보내기를, “신이 듣건대 유생들이 서로 잇따라 상소하여 먼저 주찬할 것을 청했다고 하기에 사실(私室)에 거적을 깔고 엎드려 삼가 처벌을 기다리는 터라 감히 뻔뻔스럽게 헌의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유생 전영(全瑩)이 또 상소하여 먼저 공을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전영은 호서(湖西)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공과 친족이었는데 공이 죄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전영을 보내 위문하게 하였다. 그런데 경성에 도착했을 때 허균(許筠)에게 핍박을 받고는 영문도 모른 채 이 소장을 올렸다. 전영이 명함을 드리며 공에게 인사를 올리자 그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실색(失色)하고 하인들이 놀라서 피하였다. 전영이 그 까닭을 묻고 나서 사실을 알고는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는 본래 공에게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제저녁 객사(客舍)에 도착하니 허 판서(許判書)가 소장 한 통을 꺼내 나에게 바치게 하면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기에 바쳤고, 상소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전해 가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무오년(1618, 광해군10) 2월에,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공과 오윤겸(吳允謙), 이시언(李時彦), 송영구(宋英耈)는 삭출하고 김권(金權)과 이신의(李愼儀)는 찬적(竄謫)하라고 합계(合啓)하니, 광해가 답하기를, “형률은 마음대로 낮추고 서너 사람만을 논하여 색책(塞責)하려 한다.” 하였다. 이에 모두 원찬(遠竄)할 것을 청하는 한편, 김상용(金尙容)과 윤방(尹昉)과 정창연(鄭昌衍)까지 아울러 논죄하였는데 광해가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았다. 공은 양포(楊浦)로 나가서 대명(待命)하였다.
기미년(1619) 겨울, 북경에 조회하러 간 사신의 보고에 의하면 한림 검토(翰林檢討) 서광계(徐光啓)가 본국을 무함하여 중국에서 장차 조선을 감호(監護)하러 나온다고 하였으므로 광해가 크게 우려하여 비국에 재촉하여 변무의 일을 서둘러 의논하게 하며 하교하기를, “무릇 일에는 기회가 있으니, 한번 그 기회를 잃으면 만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 어찌 상규에 얽매일 수 있겠는가.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비록 죄가 되지만 이번 변무에는 반드시 나라를 빛낼 문장 솜씨가 있는 이를 선발해야 할 터이니 이모(李某)를 진주 상사(陳奏上使)로 차출하라.” 하고 이어 공을 판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경신년(1620, 광해군12) 4월에 북경에 도착하여 무함한 일을 명백히 해명하여 모든 의심이 완전히 풀렸다. 그리고 귀환할 즈음에 천자가 승하하니, 사신들을 관소(館所) 안에 머물게 하고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여 말하기를, “대행 황제(大行皇帝)가 승하했다는 부음이 본국에 전해지면 국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는 의식을 행합니다. 그런데 직(職) 등은 경사(京師)에 와서 황궁 아래에 있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곡림(哭臨)하는 반열을 따라 참가하도록 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니, 각로 방종철(方從哲)이 예부에 이르기를, “조선은 외국으로 치부하면 안 된다. 이 말이 이치에 맞으니, 참으로 예의의 나라라 할 만하다.” 하고는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의주(儀註) 절목에 이 항목을 첨가하고 공부(工部)로 하여금 상복을 만들어 주게 하였는데, 그 복식이 《가례(家禮)》의 법도와 조금 달랐다. 그래서 공이 다시 정문하여 개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반열을 따라 들어가 무영전(武英殿)의 좌측에서 성복례(成服禮)를 행하였고, 문화전(文華殿)에 나아가 황태자를 권진(勸進)하는 의식에 참여하였으며, 또 진향제(進香祭)에 참여하였고, 태창황제(泰昌皇帝 광종(光宗))의 등극에 대한 하례에 참여하였다.
본국으로 귀환하여 연서(延曙)에 도착했을 때 양사가 합계하였다. 그 내용은 공이 김제남(金悌男)의 당인(黨人)으로서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북경에 있을 때 사서(私書 월사의 시집)를 간행하고 배포하여 나라 안의 숨겨야 할 일을 퍼뜨렸으니 나국(拿鞫)하여 형률대로 처벌할 것을 청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광해가 윤허하지 않으면서 하교하기를, “이번에 변무한 일이야말로 백관이 모두 나아가서 경하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양사가 아무 관계없는 일을 가지고 조칙(詔勅)을 맞이하기도 전에 공(功)이 있는 사신을 저격하여 막중한 대례(大禮)를 낭패로 만드니, 내가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이모(李某)가 김제남과 혹 알고 지낸 사이라 하더라도 어찌 역적을 도울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북경에 있을 때 문인과 학사들 중에 공의 사고(私稿)를 보여 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춘방(春坊)의 좌유덕(左諭德)인 주하(柱河) 왕휘(汪煇)가 서승(署丞) 섭세현(葉世賢)을 통해서 매우 간곡하게 요청해 왔다. 공이 원집(原集)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도중에 지은 기행시 100여 편을 기록하여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이라고 명명하여 주니, 왕휘가 크게 기뻐하면서 직접 서문을 지은 다음 섭 서승과 의논하여 간행하였다. 훗날 섭 서승이 반애 조사(頒哀詔使)로 운남(雲南)에 갈 때 그 판본을 싣고 갔다. 이이첨의 무리가 평소 공이 광해에게 칭찬과 은총을 받아 온 터에 이번에 또 변무의 공을 세우자 더욱 시기하여 기필코 모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 일을 빌미로 삼아 ‘나라 안의 숨겨야 할 일을 퍼뜨렸다’고 무함한 것이었다.
공이 연서에 머물면서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자 광해가 누차 들어오게 하라고 재촉하여 대론(臺論)이 마침내 우선 정지되었다. 공이 여러 차례 감히 복명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으나 광해가 허락하지 않고 교외에서 조칙을 영접하고 하교하기를, “정성을 다해 주문(奏文)을 올려 오랜 무함을 시원하게 해명하였다. 그리하여 황상이 조칙을 내려 억울한 누명을 깨끗이 씻어 주시니,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금수(禽獸)의 강역이 바뀌어 의관(衣冠)의 강역이 되게 하였으니, 경은 훌륭한 사신이라고 할 만하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기뻐하노라.” 하였다. 조칙을 맞이한 뒤에 양사가 다시 잇따라 논계하며 오래도록 시일을 끌었으나, 광해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신유년(1621, 광해군13) 2월에 등극 조사(登極詔使) 유홍훈(劉鴻訓)과 양도인(楊道寅)이 우리나라에 온다는 보고가 이르자, 이이첨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이때 박승종(朴承宗)이 아뢰어 공을 의주 영위사(義州迎慰使)로 삼았으나, 공이 세 차례 사양하여 체차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사가 두 길로 나뉘어 온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아뢰어 원접사로 차출하였으나, 뒤에 조사가 함께 온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모(李某)처럼 문한(文翰)의 숙망(宿望)을 지닌 사람이 양관(兩館)의 제학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때 박승종과 이이첨이 서로 대립하며 알력을 일으키고 있었다. 박승종이 공의 중망에 힘입을 요량으로 공을 수용(收用)할 것을 매번 청하니, 이이첨이 갈수록 더욱 노하여 양사를 사주하여 합계하여 공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할 것을 청하게 하였다. 그 합계의 내용 중에는 심지어 서궁(西宮 인목대비(仁穆大妃))을 세우려고 모의하였다고 하였으나 광해가 답하기를, “서서히 처리할 것이다.” 하였다. 양사가 또 서성(徐渻)이 공과 은밀히 모의하였다고 논계하였다
임술년(1622, 광해군14) 2월에 안찰사(按察使) 양지원(梁之垣)이 감군 어사(監軍御史)의 신분으로 우리나라에 선유(宣諭)하러 오기에 접반사(接伴使)를 선발할 것을 명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러한 때에 접빈하는 신하로는 이모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명(待命)하고 있는 터라 감히 계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광해가 답하기를, “지금 접반하는 임무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니 속히 계하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이어 하교하기를, “김제남이 너희들의 좋은 구실거리가 된 지 오래다. 남을 모함하는 계책을 꾸밀 때마다 반드시 김제남을 이용해 함정을 만들곤 하니, 그 말이 지루하고 듣기에도 피곤하다. 이런 말은 이제 그만하라. 이모는 중신으로서, 선왕께서도 나라를 빛내는 문장력을 가상히 여겨 그를 발탁해서 문형의 임무를 맡기니, 정응태(丁應泰)의 무함을 시원히 해명하였다. 내가 왕위를 이은 뒤에도 문형을 맡아 중국 조정에 가서 상주하여 매번 황은(皇恩)을 입었다. 그에게는 기록할 만한 공훈은 있고 치죄할 만한 죄과는 없다. 일이 있으면 기용하고 일이 끝나면 짓밟는 짓을 같은 조정에 있는 동료의 의리상 어찌 차마 할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다.” 하니, 양사가 즉시 정계(停啓)하였다. 공이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즉시 접반사로서 길을 떠나 중국 사신을 영송하는 일을 마쳤다. 접반하는 동안 중국 사신이 공을 매우 좋아하였다.
겨울에 합계하여 이귀(李貴)와 김자점(金自點)이 서궁(西宮)을 부호(扶護)한 죄를 논하였다. 이날 밤 참판 남이공(南以恭)이 유희분(柳希奮)의 집에 있다가 공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화기(禍機)가 조만간 발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급히 해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공이 매우 경악하면서 즉시 유희분을 찾아가서 “이귀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니 필시 다른 정상은 없을 것이다.”라고 극력 말하였다. 그러자 유희분이 측은하게 여기며 그 말을 들어주어 사태가 무마되었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3월 12일에 금상이 반정(反正)하였다. 이날 밤에 이공 귀(李公貴)가 서자(庶子)를 보내 의거를 일으킨 일을 말하였고, 얼마 뒤에 명패(命牌)가 이르렀고 이어서 이시백(李時白)과 장신(張紳)이 와서 말하였다. 공이 대궐 안에 변고가 발생했다는 말을 처음 듣고는 황망히 놀라 일어났으며, 의거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서도 감히 곧바로 대궐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옛 임금이 어떻게 되었는지 듣지 못한 터라 가인(家人)이 술을 올려도 울기만 할 뿐이고 고기도 먹지 않았다. 그러다가 쪽지에 글을 써서 이공 귀에게 보내기를, “먼저 대비를 모시고, 대비의 명으로 백관을 소집해야 체통을 갖출 수 있다.”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야 창덕궁에 나아가니, 상이 공에게 명하여 경운궁(慶運宮) 서청(西廳)으로 가게 하였다.
15일에 공을 예조 판서와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임명하였다. 명을 받들고 어압(御押)을 서진(署進)하였고,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경연에서 우계(牛溪)를 신원하고 복관(復官)할 것을 청하고 율곡(栗谷)을 추증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예관을 보내어 사묘(私廟)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선조(宣祖)의 생부)의 사당에 고제(告祭)를 올릴 때 공이 이에 관한 절목을 강정(講定)하였다. 공이 아뢰기를,“성상께서 선묘(宣廟)의 손자로서 궐내에 들어와서 대통을 이으셨으니, 사묘에 응당 행해야 할 전례가 있지만 감히 갑작스레 품재(稟裁)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제문의 두사(頭辭)와 관련하여 유신이 널리 상고하고 대신이 헌의하였으나 모두 절충한 논의는 아니었습니다. 신들이 천박한 학식으로 어떻게 경솔히 강정할 수 있겠습니까. 예(禮)에 ‘인후(人後)가 된 사람은 본생부모를 위해 기년(朞年)으로 강복(降服)하고 호칭을 백숙(伯叔) 부모라 부른다.’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실로 고금에 공통된 이치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선묘의 뒤를 이었고 보면 본생에 대해서는 대원군으로 봉호(封號)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원래 덕흥군(德興君)의 고사가 있으니, 이에 의거해서 행하면 다시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속칭(屬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한 전거가 없습니다. 송(宋)나라 영종(英宗)과 인종(仁宗), 우리나라 선묘와 명묘(明廟)는 항렬이 모두 숙질(叔姪)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 윤서(倫序)가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영종은 인종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본생인 복왕(濮王)을 다시 부친으로 모실 수가 없었고, 선묘는 명묘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본생인 덕흥을 다시 부친으로 모실 수가 없었으니, 호칭을 백숙으로 부르는 것은 그 사리가 매우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위로 선묘의 뒤를 이었으니, 손자로서 조부의 뒤를 잇는 것이 예에 맞지만 고위(考位)가 비게 되었습니다. 정통(正統)은 진실로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되지만 천륜의 고위도 비워 둘 수 없습니다.
무릇 사람은 부친의 부친이 조부가 되고 부친의 형제가 백숙이 됩니다. 지금 소후(所後)에 대해 고(考)라고 부를 수 없는데 소생(所生)에 대해 또 백숙이라고 부른다면 정의(情意)로 보나 예법으로 보나 모두 어긋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한 선제(漢宣帝)의 경우와 대략 같습니다. 선제는 소제(昭帝)의 뒤를 이었으니, 이는 질손(姪孫)으로서 종조(從祖)를 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생인 사황손(史皇孫)에 대해서 고(考)라고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니, 도고(悼考)라는 호칭에 대해 누가 불가하다 하였겠습니까. 다만 본생의 침원(寢園)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고, 또 뒤에 고(考)라는 호칭을 쓰고 다시 황(皇) 자를 더하여 명위(名位)가 너무 높아져 이존(貳尊)의 혐의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 부자(程夫子)가 예법을 어기고 인륜을 어지럽혔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실로 과오를 미연에 방비하려는 뜻이었지 고(考) 자를 붙인 것을 잘못이라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만약 고(考)라고만 부르고 황(皇) 자를 더하지 않고 자(子)라고만 부르고 효(孝) 자를 더하지 않으며, 따로 지자(支子)를 세워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되 사전(祀典)과 봉호를 모두 덕흥군의 전례대로 따른다면 종통을 중히 하고 본생에게 보답하는 두 가지 일 모두가 극진하게 될 듯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본생의 호칭을 백숙으로 부르는 것은 복의(濮議)에 이미 정론이 있고, 한 선제가 본생을 황고(皇考)라고 부른 것에 대해 정자(程子)가 예법을 어겼다고 했으니, 백숙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는데, 이 주장도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덕흥군의 제문 두사(頭辭)에도 혹 종증조(從曾祖)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합니다. 신들의 의견으로는 덕흥이 선묘에 대해 이미 백숙이 되었고 보면 전하의 입장에서도 강쇄(降殺)하는 의리가 있어야 할 터이니, 지금 제문에 덕흥대원군이라고만 쓰고 속칭은 굳이 쓸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하였다. 대신이 모두 이 의논이 옳다고 하니, 상이 그대로 따르라고 하교하였다.
원자(元子)의 보양관(輔養官)을 선발하라고 명하여 공과 오공 윤겸(吳公允謙), 정공 엽(鄭公曄), 정공 경세(鄭公經世), 김공 장생(金公長生)이 함께 선발되었다. 상의 명을 받고 원자의 휘(諱)를 정하였다. 9월에 판중추부사로서 예조 판서를 겸하였다. 10월에 폐중궁(廢中宮 광해군의 부인 유씨(柳氏))의 부음이 전해졌다. 밤에 예궐하여 의절을 정하고 예조의 당상과 낭청을 보내 치상(治喪)하고 그 친속을 보내 왕자(王子) 부인의 예로 장례를 행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치제하게 할 것을 아뢰었고, 또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즉위하면 곧바로 유사(有司)가 후계자를 세울 것을 계청하니, 이는 국가의 근본에 관계될 뿐 아니라 실로 원자 보양(輔養)을 일찍부터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자의 나이가 지금 10세가 넘었으니 서연(書筵)을 열어 학문을 강론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예법에 의거하여 원자를 책봉하는 일을 길일을 가려 거행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원자의 관례(冠禮)를 책례(冊禮) 이전에 행해야 합니다. 원자가 책봉을 받은 뒤에 곧바로 입학하고 알묘(謁廟)하는 등의 예식이 있는데, 관례를 행하지 않은 채 그러한 예식을 행하는 것은 절차상 구애되는 점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제왕은 10세가 되기 전이라도 관례와 책례를 행하였습니다. 한 문제(漢文帝)가 막 즉위했을 때 그 아들인 경제(景帝)의 나이가 겨우 10세였는데도 유사가 건의하여 책례를 행하였으며, 아조의 인묘(仁廟 인종(仁宗))도 8세 때에 관례를 행하였습니다. 노 양공(魯襄公)이 진(晉)나라에 있을 적에 진후(晉侯)가 그 나이를 묻자 12세라고 대답하니, 진후가 ‘12년이면 세성(歲星)이 하늘을 한 바퀴 돌 기간이니 관례를 행할 수 있다.’ 하고 마침내 성공(成公)의 사당에서 관례를 행하였습니다. 지금 세자의 나이가 12세가 되었으니, 관례를 어찌 내년까지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 1월에 이괄(李适)이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곧장 경성으로 향하니, 관군이 방어하지 못하였다. 상이 공에게 명하여 자전(慈殿), 중궁(中宮), 동궁(東宮)을 호종하여 먼저 강화(江華)로 가게 하였다. 공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신이 비록 재략은 없으나 대가(大駕)를 수행하여 혹 책응(策應)하고 호위하는 노고를 다할까 합니다.” 하니, 대사헌 정엽(鄭曄)이 아뢰기를, “신은 노모가 있으니 양전(兩殿)을 따라 먼저 강화로 가고자 합니다. 이모(李某)는 재국(才局)과 주략(籌略)이 있으니 대가 곁을 떠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상이 이르기를,
“예판(禮判)이 나를 수행하고자 하니 매우 가상하게 여겨 탄복하노라. 다만 자전의 행차에 대신과 중신이 없어서는 안 되고, 원자를 보도(輔導)하는 책임도 중하니 예판은 강화로 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2월 7일에 임진(臨津)이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이르자 대가가 몽진해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다. 공이 아뢰기를, “경성은 크니 적(賊)이 성곽을 다 포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적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합니다. 서로(西路)가 곳곳마다 무너진 탓에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경성은 쉽사리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적들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충청 병사(忠淸兵使)가 거느린 군대와 수원(水原)의 군대와 도감의 군대가 대략 적의 10배나 됩니다. 상께서 중외에 효유(曉諭)하여 경성을 떠나지 않고 사수하겠다는 뜻을 보여 주시는 한편 대장을 나누어 보내 동쪽과 서쪽의 교외에 진을 치게 하십시오. 장만(張晩)의 군대도 반드시 적을 추격해 올 것이고 적의 군사들은 모두 오합지졸로 협박을 받고 따라온 자들이니 앞뒤로 공격을 받으면 절로 무너져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 만약 종사(宗社)를 버리고 창황히 달아나 피하면 한강을 건널 즈음에 필시 전복되어 변고가 생길 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도성을 나가면 모든 일이 군박(窘迫)해질 터이니 적이 만약 경기(輕騎)로 뒤쫓아 온다면 도상(途上)의 정비되지 않은 군대가 어떻게 그들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면 망극할 뿐입니다.” 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상도 마음속으로 감동하였다. 그러나 여러 훈신(勳臣)들이 ‘적이 이미 간첩을 보내 도성 안에 내응하는 자들이 매우 많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공도 강하게 쟁집(爭執)하지 못하였다.
8일 날이 저문 뒤에 상이 도성을 나왔고, 자전, 중궁, 원자는 처음 어가와 나뉘어 강화로 가기로 의논하여 이미 출발했는데 다시 대가와 동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공과 우상(右相) 신공 흠(申公欽)이 양화도(楊花渡)까지 뒤따라가서 어가를 모시고 돌아왔다. 어가가 천안(天安)에 이르렀을 때에 안현(鞍峴)의 첩보(捷報)가 이르렀다. 상이 공에게 명하여 먼저 공주(公州)로 가서 산성의 형세와 묘사(廟社)의 처소를 살피게 하였다. 적장인 기익헌(奇益獻) 등이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의 머리를 베어 공주의 행재소에 바치자, 상이 행궁으로 거둥하여 그들의 수급(首級)을 받았다. 이때 예조의 관리가 한 사람도 온 자가 없어 공이 손수 의주를 기안하고 승첩을 고하는 글을 지어 올렸다. 이에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친제(親祭)를 올렸고 밤에 백관이 진하하였다. 이튿날에 상이 과장(科場)에 친림하여 인재를 뽑고 환도하였다. 공이 명을 받들고 과천(果川)에서 먼저 경성에 들어가 종묘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을축년(1625, 인조3) 1월에 세자시강원 좌빈객(世子侍講院左賓客)에 임명되었다. 원자의 관례 때에 찬관(贊冠)이 되고 세자를 책봉할 때에 강학관(講學官)이 되었으니, 두 차례에 모두 가자(加資)되어야 했다. 그러나 공의 원래 자급(資級)이 보국숭록대부라는 이유로 공의 친속 중 한 사람을 6품의 관원에 승진시킬 것을 명하였다.
4월에 의정부의 동벽(東壁)에 임명하여 공을 좌찬성(左贊成)으로 삼고 세자시강원 이사(世子侍講院貳師)를 겸하게 하였다. 6월에 황제의 조칙을 반포하는 사신인 태감(太監) 호양보(胡良輔)와 왕민정(王敏政)이 경성에 들어왔는데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다. 7월에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할 때 호패청 당상(號牌廳堂上)이 되었다. 병으로 사직하니, 판의금부사만 체차하도록 명하고 내의를 보내 약을 하사하게 하였다.
병인년(1626) 1월에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이 대궐 안에서 졸(卒)하니, 공이 밤중에 대궐에 들어가서 곡림(哭臨)하였다. 상이 삼년상을 행하려 하니, 공이 대신을 따라 복합(伏閤)하며 간쟁하였다. 이때 공이 이미 예조 판서에서 체차되었으므로 해조(該曹)가 다른 사람을 예조 판서에 의망(擬望)하였다. 상이 명하여 공을 판중추부사로 삼고 예조 판서를 겸하게 하였다. 공이 상장(喪葬)에 관한 절목을 의계(議啓)하니, 상이 준엄한 비답을 내렸다. 그 비답에 “근일에 예조가 군상(君上)을 어린애처럼 보아 예제에 관한 일을 매번 자기 뜻대로 단정하여, 이것은 예제를 벗어났다 하기도 하고 이것은 비례(非禮)라 하기도 하고 이것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없다 하기도 하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이며 또한 무슨 도리인가. 인묘(仁廟) 이상의 조종(祖宗)은 발인할 때에도 모두 친히 산릉(山陵)에 갔었다. 그런데 지금 문외(門外)에서 곡송(哭送)하는 것에 대해서도 제도를 벗어났다고 한다. 《국조오례의》에 단지 조부모를 위한 복상의 예만 기재한 것은 아마도 조부모의 상이 모두 국상(國喪)이기 때문인 듯하다. 막중한 상례를 이렇게까지 기만하고 소홀히 하다니, 해관(該官)을 추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에 공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발인할 때 《국조오례의》에 백관을 거느리고 배왕(陪往)하는 의절이 있는데 이는 대왕과 왕후의 상(喪)에 신하가 임금을 장사 지내는 예(禮)입니다. 그러나 연대가 오랜 일은 비록 상세히 알지 못하지만 인묘(仁廟)께서 산릉에 가고자 하시니 대신과 예관이 쟁집(爭執)하여 성문 밖에서 곡하고 상여를 보내는 데 그쳤으며, 선묘조(宣廟朝)의 세 차례 국장(國葬) 때에는 모두 궐문 안에서 곡하고 상여를 보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구전하고 있습니다.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의 발인 때 선묘께서 대궐 밖에 나가 곡하고 보내려 하자 예관이 쟁집하여 단지 대전 뜰에 내려와 망곡(望哭)하였으니, 이는 상신(相臣)이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서연(書筵)의 복색을 천담복(淺淡服)으로 하고자 한 것으로 말하자면, 《국조오례의》에 전하와 왕세자는 외조부모의 상에 거친 삼베로 만든 띠〔麤布帶〕를 띠다가 5일 만에 벗는다 하였으니 제왕의 복제(服制)는 본래 사대부와 같지 않은데 하물며 막중한 삼년상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종통(宗統) 때문에 강복(降服)하는데 왕세자의 복(服) 또한 어찌 변제(變除)의 절차에 따라 낮추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왕세자의 기년복(朞年服)은 전하의 기년복과 절로 경중의 차이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졸곡(卒哭) 전에 백포(白袍)를 입고 시사(視事)하셨으니 왕세자는 서연에서 시사할 때 응당 천담복을 입고 졸곡 후의 복색도 차차 낮추어야 할 것입니다.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들고는 너무도 두렵고 떨려 땅속을 파고 들어가고 싶을 뿐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6월에 황태자의 탄생을 반포하기 위한 조사(詔使)로 강왈광(姜曰廣)과 왕몽윤(王夢尹)이 경성에 들어올 때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고 명을 받아 《황화집(皇華集)》의 서문을 지었다. 겨울에 다시 좌찬성, 이사(貳師)가 되었으며, 특명으로 예판을 그대로 겸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5) 1월에 달적(㺚賊)이 의주(義州)를 함락했다는 보고가 이르니, 공을 병조 판서로 삼고 찬성의 직임은 그대로 맡게 하였다. 공이 상을 뵙고 고사(固辭)한 뒤에 다시 차자를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재략으로 이 난국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이 아니고는 이 임무를 감당할 수가 없다.” 하였다. 호병(胡兵)이 잇따라 성들을 함락하고 평양(平壤)에 이르자 대가(大駕)가 강화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적이 계속 글을 보내어 강화(講和)를 청하였다. 대가가 통진(通津)에 이르렀을 때에 대신을 불러 계책을 하문하니, 모두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큰 번진(藩鎭)이 차례로 함락되고, 각 지방의 근왕병은 아직 이르지 않고 있습니다. 적이 경성을 점거하면 강화는 고립무원의 섬이 되어 지켜 낼 계책이 전혀 없으니, 그들이 강화를 요청하는 기회에 허락해 주는 것도 상황에 따라 변통하는 계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대가가 강화에 도착했을 때에 적이 이미 평산(平山)까지 와서는 유해(劉海)와 강홍립(姜弘立)과 박난영(朴蘭英) 등을 보내어 우호 동맹을 맺자고 요구하였다. 조정이 이들을 빈접(儐接)하는 것을 어려운 일로 여겼다. 상이 신하들을 불러들이니, 신하들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 일에는 병판(兵判)이 가장 적합합니다.” 하였다. 공이 사양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과 수답하는 사이에 종사의 안위가 달려 있다. 경에 대해서는 그들 중에서도 필시 이름을 알고서 추중(推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신은 죽음도 피하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때에 어찌 감히 노고를 꺼리겠습니까. 다만 신은 일을 보는 것이 늦고 둔하여 대사를 그르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신이 중국 조정에 몇 차례 다녀왔으니 중국 조정에는 혹시 신의 이름을 아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호인(胡人)이 어찌 신의 이름을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해 같은 사람은 원래 중국인이니 어찌 경의 이름을 듣지 못했겠는가.” 하였다. 공이 동행할 사람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재신(宰臣)을 막론하고 경이 직접 천거하라.” 하였다. 이에 공이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 이조 참판 장유(張維)와 함께 갈 것을 청하여 연미정(燕尾亭)으로 가서 호차(胡差)를 만났다.
호차와 약조(約條)를 논정(論定)하면서 ‘평산에서 한 발자국도 넘어오지 않는다’, ‘맹약을 정한 다음 날 철군하여 돌아간다’, ‘앞으로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다’, ‘철군한 뒤에는 압록강(鴨綠江) 연안을 다시 넘어오지 않는다’, ‘중국은 부자(父子)의 관계를 맺은 나라로 200년 동안 공경히 섬겨 왔으니 지금 너희 나라와 강화를 맺었다고 해서 배반할 수 없다’는 등을 주장하니, 유해와 용골대(龍骨大) 등이 연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다가 유해가 문득 손을 모으고 공경히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조선은 예의의 나라라고 하더니, 지금 제공의 말을 듣고 보니 예의와 충신(忠信)이 천하에 으뜸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어가가 외로운 섬으로 피란하여 국가가 위기일발인 상황이라 우리 군대가 한 걸음만 앞으로 내디디면 개성(開城)과 왕경(王京)이 곧바로 잿더미가 될 것이요, 군사의 창칼이 온 나라를 뒤덮을 터이니, 망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신의를 지켜 시종 중국을 배반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존경할 만합니다. 내가 이러한 뜻으로 두 분 왕자에게 보고하겠습니다.” 하고 곧바로 글을 써서 밤중에 일기(一騎)를 급히 보내 문의하니, 두 왕자가 답하기를, “조선이 중국 조정을 배반하지 않음은 그 뜻이 좋으니 그 뜻대로 하게 하고, 우리와 우호를 맺을 것만 굳게 약정하고 오라.” 하였다.
유해가 서면으로 요구한 세폐(歲幣)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공이 두 재신과 강력하게 반대하여 세폐는 모두 취소하고 단지 ‘예물로 보내 호군(犒軍)할 거리로 삼게 한다’는 명목으로 약간의 물품만을 보내겠다고 하니, 호차가 따랐다. 적이 회맹할 때에 백마(白馬)를 잡고 상도 직접 회맹에 참석시켜 삽혈(歃血)하게 하고자 하니, 조정의 의논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러한 인심과 병력과 군율을 가지고 과연 이 적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일단 그들을 토벌하지 못하여 저들과 우호를 맺고 하늘에 맹서하는 터에 내가 회맹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지금 세상에서 이 일을 비난하고 후세에 이 일을 기롱한다 하더라도 나는 회맹에 참석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공이 이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이는 실로 국가를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 다만 상께서 바야흐로 거상(居喪) 중이시라 친히 삽혈을 할 수 없다는 뜻을 호차에게 극진히 말하였으니, 이 문제는 신이 목숨을 걸고 감당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상은 단지 본부(本府)의 대청(大廳)에서 분향(焚香)만 하고 승지로 하여금 맹세하는 글을 읽게 하였으며, 공이 오윤겸(吳允謙), 김류(金瑬), 이귀(李貴), 신경진(申景禛) 등과 함께 서교(西郊)의 맹단(盟壇)이 설치된 곳에서 회맹하였다. 그 이튿날 적이 철군하여 돌아갔다. 그 뒤 유해가 도로 중국 조정에 귀순하여 본국이 중국 조정을 배반하지 않은 실상을 극력 말했다.
공이 아뢰기를, “적이 비록 맹약을 청하고서 물러갔으나 우리가 저들을 한 번도 징계하지 못했으니, 그들이 무엇이 두려워서 다시 오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는 군대가 없는 나라입니다. 지금 적이 물러간 것만 믿고서 전철을 그대로 따른다면 적이 다시 쳐들어올 경우에 다시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습니다. 신이 예전에 병조 판서의 직책을 맡고 있을 때, ‘각 도(道)와 각 읍(邑)에 참장(參將)ㆍ유격(遊擊)ㆍ수비(守備) 등과 같이 군대를 거느리는 장관(將官)을 둔 중국의 제도에 의거해서 각 읍에 있는 속오군(束伍軍)의 구안(舊案)을 근거로 삼아서 늙고 잔약한 자들을 걸러 내고 새로 군대를 결성하여 군적(軍籍)을 만든 다음 평상시에는 조련시키고 유사시에는 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적과 싸우게 하며, 수령은 각 고을에서 그들을 위한 장비와 물자를 준비하여 지급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청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군사들은 장수를 알고 장수는 군사를 알아 급박한 상황에서 쓸 수가 있으며, 수령들은 군사들을 통솔할 책임이 없어 변고를 만났을 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고을을 비우게 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이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재가하여 마침내 각 도에 영장(營將)을 두게 되었다.
환도한 뒤에 유해와 용골대 등이 또 오자, 상이 하교하기를, “적병이 아직도 의주(義州)에 있으니, 찬성 이모(李某)는 유해를 만나 보고 속히 철수하라고 타이르라.” 하였다. 공이 명한 대로 타이르니, 즉시 철군하겠다고 허락하였다.
명을 받들어 대원군의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니 숙마(熟馬)를 하사하였다. 황제의 등극을 반포하는 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다시 공을 명하여 관반으로 삼았다.
무진년(1628, 인조6) 7월에 승진하여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공이 차자를 올려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본래 보필의 직임에 적합하니, 반드시 국가를 다스려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속히 나와서 나를 바르게 보좌하여 여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재차 사양하니, 상이 또 답하기를, “경은 재덕이 평소에 드러났으니 이 직임에 실로 적합하다. 근력이 비록 쇠했다고 하나 정신은 아직도 쇠하지 않았으니,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부족한 나를 힘써 보좌하라.” 하였다.왜국(倭國) 사신 현방(玄方)이 우리나라에 오자 공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현방은 본래 관백(關伯)이 보낸 자가 아니며, 지금 온 것은 단지 자기 섬의 절박한 우환 때문에 도주(島主)가 사신을 상경시킴으로써 그 권위를 빌려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관백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해 오는 것은 진실로 사신의 상경을 허락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중론이 상경을 반드시 허락하고자 하는 것은 허술한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침공을 받는 실정이니 저자들이 하루아침에 행장을 꾸려 돌아간 뒤에는 무슨 간특한 꾀를 낼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기유년(1609, 광해군1)의 조약을 지금 만약 변경한다면 과거처럼 다시 주방(廚房)을 빌려 주고 당우(堂宇)를 빌려 주어 종국엔 반드시 예전대로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물력을 지탱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천조(天朝)에도 보고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특별히 불러들인다.’라는 명목으로 현방과 지광(智廣)이 약간의 수행원만 대동하고 서둘러 올라와서 예조에 국서(國書)를 바치게 하고 그 나머지는 규례대로 부산(釜山)의 관사(館舍)에서 접대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분명히 효유하여 새로운 규례를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저들의 계책을 미연에 꺾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노적(虜賊)이 보내온 국서는 지난날과는 다른 듯하며 그 글 중에 ‘사(詐)’ 자 등의 말은 극히 무엄하고 거만합니다. 좋은 말로 책망하여 저들로 하여금 뉘우치게 하는 동시에 답서에서 제외된 내용은 말로 진달하는 한편 저들의 정세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박난영(朴蘭英)이 가벼운 차림으로 말을 달려가면 아마도 잘못되는 일이 없을 듯합니다.
한편 생각건대, 오랑캐와 적절히 친선을 유지하는 것은 진실로 이민족을 대하는 제왕의 상도(常道)이지만 자기 나라의 방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서 화친을 유지할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국 사신이 공갈로 협박한 것과 노적(虜賊)이 거만하게 국서를 보낸 것은 모두 우리에게 방비할 능력이 없다고 경시한 것입니다.
정묘년(1627, 인조5) 강도(江都)에서 적이 물러나고 맹약한 뒤에 신이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군병을 양성할 방책을 진달하여 각 도에 영장(營將)을 두게 하였습니다. 원려(遠慮)가 없는 수령과 재망(才望)이 없는 영장들은 처음에는 비록 반대의 의견을 보였지만 지금은 일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진실로 좋은 장수를 얻어서 잘 훈련하고 통솔하게 한다면, 이 8만의 유용한 병력이 어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혹 위급한 상황을 만나면 공문 한 장을 발송하여 군사를 징발할 수 있을 터이니, 비록 기세를 떨치며 횡행하지는 못하더라도 수비를 하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본래 변변한 군병이 없어 이 군병 외에 달리 군병을 얻을 곳이 없으니, 오직 사목(事目)을 신칙하여 착실히 준행하도록 하고 근거 없는 의논으로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군병의 제도는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훈련도감의 군병은 급보(給保) 2명에 월급이 10여 말(斗)이고 또 상을 받고 승진하는 길도 있는 반면, 이 군병은 평상시에는 군량을 지고 다니면서 조련을 받다가 변고가 생기면 창을 메고 전쟁터로 달려가야 하며 이미 공사(公私) 간의 신역(身役)이 있고 또 가호(家戶)의 잡역(雜役)이 있으니 어찌 원망하고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빈곤하여 본래 양병(養兵)의 제도가 없으니, 비록 중국처럼 안가(安家)와 염채(鹽菜)와 월은(月銀)의 규례를 만들 수는 없지만 전세(田稅) 외에 50복(卜)의 세금을 면제하여 그들의 고생을 덜어 주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조강(朝講)에 입시하여 교화를 밝히고 풍속을 바르게 할 것,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현재(賢才)를 양성할 것, 《소학(小學)》을 많이 인쇄하여 중외에 널리 배포할 것을 청하였다. 그 후에 상이 명하여 교국(校局)과 성균관(成均館)에서 간행한 《소학》을 팔도에 나누어 보내게 하는 한편 정시(庭試)를 거행할 때에 입등(入等)한 유생 수백 인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교화의 근본은 유술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과 장자(長者)가 세상을 떠난 뒤로 사우(師友)의 도가 끊어진 지 오래되었으니, 이는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김장생(金長生)과 장현광(張顯光)은 성심껏 대우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그들이 오지 않고 있다. 지금 불러올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만약 이 두 사람을 예우하여 상규를 넘는 파격적인 대우로 부른다면 그들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을 지급하고 교자(轎子)를 타고 올라오게 하라.”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유현(儒賢)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으레 추증하는 전례가 있는데 성혼(成渾)만은 유독 추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생시에 본디 벼슬에 뜻이 없었는데 선묘께서 발탁하여 참찬으로 삼으셨고 심지어 재상으로 삼으려고까지 하셨으니, 지금 추증하여 유술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여 주심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도 추증을 받지 못했단 말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아직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성혼을 좌의정으로 추증하였다. 또 아뢰기를, “상께서는 아랫사람들을 경시하고 자신의 총명을 과시하기를 좋아하여 세세한 데 얽매이는 병통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 점을 경계하는데 나도 그 말이 옳음을 알고 있으나 기질의 병통이 이와 같아 아직 고치지 못하고 있다. 세세하게 따지는 병통은 대도(大道)에 매우 방해가 될 것이다. 옛날에 임금이 밥에 벌레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아랫사람이 알까 두려워하여 감추고 꺼내 보이지 않았으니, 이것이 매우 성대한 덕이다. 내가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매양 내 뜻대로 일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인내하지 못한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명실(名實)을 종합해서 고찰하는 것도 명주(明主)의 일입니다. 그러나 한(漢)나라 선제(宣帝)는 밝게 살피는 임금이었으나 역사에서는 한나라의 왕업이 선제 때 쇠미해졌다고 평가합니다. 이는 정치를 할 때 너무 세세히 살피는 일만 중시하면 기상이 경박해져 점차 남의 약점을 고자질하고 적발하는 데 이르러 인심이 충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치를 할 때 너무 세세히 살피는 일을 중시하면 한갓 번잡한 형식이나 말단의 일만 일삼는 나머지 성실성이 부족하게 될 것이니 도리어 명실을 종합하여 고찰하지 못하고 치도(治道)가 날로 낮아지게 될 것이다.”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중간 수준 이하의 임금에게는 감히 이런 말씀을 올리지 못합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기질이 밝고 슬기로우나 너무 자세히 살피는 병통을 면치 못하시기 때문에 감히 전하의 덕이 극진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다시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조강을 마치고 사관(史官)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이 성대한 도유(都兪)는 근래에 없던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김공 류(金公瑬)가 탑전에서 나만갑(羅萬甲) 등이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른다고 말하니, 상이 대로하여 하교하기를, “이들의 죄상을 영상과 우상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공이 영상과 함께 아뢰기를, “연소한 자들이 사사로이 만나서 한 말에 대해서는 신등은 들어 아는 바가 없습니다. 나만갑은 본성이 선량하고 계려(計慮)가 있으며 관직을 맡아서는 직분을 다하고 남의 원망을 아랑곳하지 않아 비록 다소 우직한 듯 보이지만 장점도 자못 많기에 조만간 사공(事功)에 쓰일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시론(時論)을 주장하고 취사(取捨)를 마음대로 독단하였다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가 말단의 소관(小官)으로서 비록 그렇게 하고자 하더라도 그 누가 그의 말을 들어주겠습니까.
대개 연소한 사람이 설혹 언어에 신중하지 못하여 시비를 함부로 논하는 일이 있었을지라도 ‘자취가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죄를 인정하기 어렵다.’라고 말하였으니, 지금 만약 말을 잘못한 것을 가지고 견벌(譴罰)을 시행하면 인심이 불안해할 것이며, 역시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김세렴(金世濂)은 이미 그를 비난하는 의논이 있었고 보면 우선 청망(淸望 청환(淸宦))에의 의망을 중지하는 것은 불가할 게 없지만, 곧바로 그 실정을 알아본즉 곧 흠이 없는 사람이니 전에 의망한 대로 그를 수용(收用)하는 것이 진실로 무방하다 하겠습니다. 김육(金堉)이 처음에는 스스로 비난하는 발언을 해 놓고 뒤에는 끝내 그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역시 전후로 들은 말이 다른 데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모쪼록 조정의 의논을 진정시키고 억제하여 신료들이 서로 공경하며 화합하도록 하소서.”하였다.
상이 당시 크게 노하여 나만갑은 멀리 유배 보내고 김육은 나국(拿鞫)하라고 명하니, 공이 영상과 함께 아뢰기를,
“신들이 비록 못난 사람이지만 대신의 반열에 들어 있으니 조정의 분란을 진정시키고 부박(浮薄)한 풍조를 억제하는 것이 바로 직분입니다. 만약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붕당을 짓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마음속 깊이 미워하여 통렬히 끊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예로부터 말을 잘못한 것을 가지고 사람을 처벌해서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상이 즉시 인견하니 또 극력 진달하였다. 그러자 상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서 나만갑은 유배하는 벌을 감하여 중도부처(中途付處)하고 김육은 문외출송(門外黜送)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영상과 함께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제학 장유(張維)가 상소하여 나만갑을 변호하니, 상이 노하여 특명으로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하였다. 공이 영상과 함께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장유는 문장과 재학(才學)이 오늘날 제일류(第一流)가 됩니다. 현임 대제학을 고을 수령으로 강등시키는 것은 실로 예전에 듣지 못한 일입니다. 더구나 근년 이래 사대교린(事大交隣)의 문서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는데 기의(機宜)를 익숙히 알아 조리가 분명합니다. 이렇게 시국이 어려운 때 외교상의 진변(陳辨)과 수응(酬應)에는 사명(辭命)이 특히 중요하니, 신등의 우려는 단지 인사 발령상의 잘못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가도(椵島)의 유흥치(劉興治)가 난리를 일으켜 부총병(副摠兵) 진계성(陳繼盛)을 살해하자, 조정이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려고 하였다. 공은 유흥치가 진계성을 살해한 것은 바로 자중지란(自中之亂)이고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에 이자(移咨)하여 죽이지 말라고 하였는데 중국 조정에 품명(稟命)하지도 않은 채 우리 마음대로 토벌하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대(引對)할 때 토벌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진달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 부원수(副元帥) 정충신(鄭忠信)으로 하여금 수군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다. 유흥치가 군사를 이끌고 떠났다는 말을 듣고도 텅 빈 섬을 공격하려고 하다가 공이 영상과 함께 또 파병(罷兵)을 계청하여 군대가 마침내 철수하여 돌아왔다.
신미년(1631, 인조9) 4월에 상이 대신을 명초(命招)하여 추숭(追崇)에 관한 일을 하문하니, 저마다 불가하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옥당(玉堂)이 차자를 올려 상의 뜻을 거스르니 상이 이행원(李行遠) 등 5인을 나추(拿推)하라고 명하고 또 조경(趙絅)을 멀리 유배 보내라고 명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그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을 위해서 그 명을 중지한다.” 하였다.
공이 영상과 함께 빈청(賓廳)에 나아가 아뢰기를,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아버지가 사(士)이고 아들이 천자나 제후이면 천자나 제후의 예(禮)로써 제사하고 그 시동(尸童)은 사의 복장을 입는다.’ 하였으니, 복장도 더 높일 수 없는데 하물며 명위(名位)를 더 높일 수 있겠습니까. 《의례(儀禮)》에는 ‘제후의 아들이 공자(公子)가 되는데 공자의 자손이 국군(國君)이 되었을 경우 대대로 그 사람을 조(祖)로 삼고 공자를 조로 삼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이 책봉(冊封)을 받은 임금을 조(祖)로 삼고 그 생부인 별자(別子)를 제사하지 못한다.’ 하였으며, 또 ‘공자로서 대부가 된 자는 선군(先君)의 사당에 부묘(祔廟)할 수 없다.’ 하였으니, 이는 경전(經傳)에 보이는 명문(明文)입니다.
탕(湯)의 태갑(太甲)과 주 평왕(周平王)의 손자 환왕(桓王)은 모두 손자로서 조부를 이었으나 그 생부를 추숭하고 입묘(入廟)했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한 선제(漢宣帝)가 도고(悼考)를 추존한 것을 두고 정자(程子)는 ‘예(禮)를 잃었고 인륜을 어지럽혔다.’라고 하였고, 범진(范鎭)은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에 합하였다.’라고 기롱하였으며, 애제(哀帝)가 정도공왕(定陶恭王)을 추존하려 하자 사단(師丹)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작위를 주는 의리는 없다.’ 하였습니다. 광무(光武)가 용릉(舂陵)에 사친(四親)의 사당을 세우고 명호(名號)는 더 높이지 않은 것을 두고 주자(朱子)가 칭찬하였는데 제자 하숙경(何叔京)이 ‘이렇게 한 것도 진실로 좋지만 백승(伯升)의 아들을 후사(後嗣)로 삼느니만 못합니다.’ 하자 주자가 ‘이 말이 매우 정당하다.’ 하였습니다. 이상이 전대(前代)의 득실입니다.
정자는 복의(濮議)에서 ‘요컨대 사체(事體)를 잘 헤아려서 사당을 따로 세우고 호칭을 달리하여 그 자손으로 하여금 작록을 이어받아 제사를 받들도록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대통(大統)에 있어서도 둘로 나뉘는 잘못이 없게 되고 본생부(本生父)에 있어서도 존숭의 도를 극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사마광(司馬光)은 ‘진(秦)ㆍ한(漢) 이래로 방손(旁孫)이나 지자(支子)로서 대통을 이어받아 그 본생부모를 추존하여 제왕의 후사로 삼은 이들은 모두 당시에 비난을 받고 후세에 기롱을 받았으니,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단지 고관대작으로 존숭해 주면 됩니다.’ 하였으니, 소종을 대종에 합치지 못하는 것이 이처럼 엄절합니다. 그리고 이미 ‘자손이 작록을 이어받아 제사를 받들도록 한다.’라고 하였고 보면 사묘(私廟)를 위해서는 지자가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분명하며, 이미 ‘비난을 받고 기롱을 받는다.’라고 하였고 보면 사친(私親)을 추숭하여 입묘(入廟)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상이 선유의 정론입니다.
사대부가의 경우는 조부와 손자 사이에 후사 관계가 성립될 수 없으나 제왕가의 경우에는 종통(宗統)을 중시하므로 비록 형으로서 아우를 잇고 숙부로서 조카를 잇더라도 후사가 되어 즉위한 뒤에는 곧 군신(君臣)의 의리와 부자(父子)의 도리가 있게 됩니다.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민공(閔公)은 아우로서 먼저 즉위하였고 희공(僖公)은 형으로서 민공의 뒤를 이었다.’ 하였는데, 선유는 민공과 희공이 문공(文公)에 있어 각각 조묘(祖廟)와 예묘(禰廟)가 된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희공은 아우인 민공을 예묘로 삼고 문공은 숙부인 희공을 조묘로 삼은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지은 〈주묘소목도(周廟昭穆圖)〉에, 효왕(孝王)은 의왕(懿王)을 소(昭)로 삼았으니 이는 숙부가 조카를 예묘로 삼은 것이고, 이왕(夷王)은 효왕을 목(穆)으로 삼았으니 이는 종손(從孫)이 종조(從祖)를 예묘로 삼은 것입니다. 예묘의 정위(定位)가 없음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공자가 ‘그 자리〔位〕를 밟아 그 예(禮)를 거행하고 그 음악을 연주한다.’ 하였으니, 그 자리를 밟지 않고는 그 종통에 끼일 수 없고 그 종통에 끼일 수 없으면 그 종묘에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만약 사사로운 은정(恩情)으로 대원군을 대위(大位)에 추숭한다면 종통에 눌리는 바가 있을 뿐 아니라 묘제(廟制)에도 구애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소목(昭穆)의 순서는 승진(陞進)하는 쪽이 있으면 반드시 조천(祧遷)되는 쪽이 있게 마련이니, 승진해서는 안 되는 사친(私親)을 승진하고자 조천해서는 안 되는 조위(祖位)를 지레 조천한다면 혹 존조경종(尊祖敬宗)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덕종대왕(德宗大王)은 비록 즉위하지는 못했지만 황명(皇命)을 받고 책봉되어 일찍이 세자가 되었으니, 예(禮)에 이른 바 ‘마땅히 임금이 되었어야 할〔合立爲君〕’ 경우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사례와는 다릅니다. 혹자는 ‘성상께서는 선묘(宣廟)의 손자로서 선묘의 뒤를 이었으니 남의 후사가 된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라고 합니다. 우리 성상께서 발란반정(撥亂反正)하신 뒤 천조(天朝)에 상주(上奏)되어 대통을 이어받아 위로 조체(祖體)를 이어 종묘의 원자(元子)가 되었으니 남의 후사가 된 경우와 그 이치가 실로 같고 그 의리는 더욱 중하며 명분은 바르고 예에 맞아 그 일이 전고(前古)에 빛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례(典禮)를 강정하여 준행해 온 지가 지금 이미 8, 9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본래 의논이 많은데 예를 의논하는 것은 본래 취송(聚訟)과 같아서 혹 다른 주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큰 예인데 경솔히 고칠 수 있겠습니까. 송 호부(宋戶部)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에서도 의기(義起)했다고 하였으니, 막중한 예를 의기하여 결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지금 사대부에게 의논하지도 않고 나라의 여론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결행하여 천조(天朝)에 주청하면 천조는 외번(外藩)의 일에는 필시 자세히 상량하지 않을 터이니 혹 마지못해 주청을 들어줄지라도 이 소문이 천하에 퍼지면 구안자(具眼者)의 기롱을 어이하겠습니까.”하였다.
겨울에 이조가 이행원(李行遠) 등을 청직(淸職)에 의망(擬望)하였다. 이에 상이 진노하여 이조의 삼당상(三堂上 판서, 참판, 참의)을 파직할 것을 명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힘써 간쟁하였다. 임신년(1632, 인조10) 1월에 좌의정에 승진되고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상이 예관에게 추숭하는 예식을 속히 거행하라고 명하기에 공이 영상과 함께 차자를 올려 누차 간했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2월에 “사간 권도(權濤)는 국문하고 참찬 박동선(朴東善)은 삭탈관작하라.”라고 명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추숭하는 휘호의 글자 수에 대해 논란한 일 때문이었다. 정원과 옥당과 양사가 모두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공이 동료 재상과 함께 차자를 올려 논하니, 상이 답하기를, “권도가 기의(譏議)하고 모만(侮慢)한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박동선은 경들이 청하니 파직만 하라.” 하였다.
6월에 자전(慈殿)이 승하하였다. 공이 총호사(摠護使)가 되어 산릉에 가서 장례에 관한 일을 처리하다가 풍현증(風眩症)이 와서 하현궁(下玄宮 하관(下棺))하는 날에도 일을 볼 수 없었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상이 내의를 보내고 동궁이 궁관(宮官)을 보내 문병을 하였으며 약물을 내리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 공이 무려 20차례나 정고(呈告)하니, 그제야 상이 체차하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계유년(1633, 인조11) 7월에 인정전(仁政殿)에 벼락이 치니 상이 삼공, 육경, 삼사의 관원을 소견(召見)하였다. 공이 진언하기를, “근래에 성상께서 일을 계획하고 설행할 때에 형식은 많고 실질은 적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신하가 봉행하는 것도 착실히 되는 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는 전에 없던 변고이니, 하늘의 뜻에 부응하기를 실질로써 하고 형식으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상께서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에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만약 구언(求言)을 하면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실질이 없고, 백성을 구휼하면서 은혜롭게 보살피는 실질이 없고, 폐해를 제거하면서 진작하는 실질이 없다면 어떻게 하늘의 견책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이 변고는 무슨 일에 대한 응보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대적(大敵)이 변경에 주둔하여 아침에 군사를 출동하면 저녁에 우리나라에 도착하는 상황인데 우리는 방비가 전혀 없고 병력과 군량이 모두 부족하니, 강토가 유린되는 화란이 반드시 없다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오랑캐가 달콤한 말을 하고 있지만 이 또한 계략입니다. 그래서 늙고 병든 신은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며 모든 일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여 실덕(實德)을 닦는 데 힘쓰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의 노여움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갑술년(1634) 7월에 차자를 올려 공의 선조인 문강공(文康公) 석형(石亨)이 지은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 6권을 바쳤다. 문강공은 성묘(成廟) 때,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인데 그 권질이 너무 많고 논설이 잡다해서 임금이 날마다 복잡한 정무를 처리하는 여가에 열람하기가 쉽지 않음을 염려하여 번다한 내용을 추려 내어 정리하였다. 그리고 절실한 감계(鑑戒)로는 우리 동방의 사적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고려의 사적(事蹟)을 뽑아 각 조목의 아래에 편입한 뒤에 《대학연의집략》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바치니, 성묘가 명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난리를 겪은 뒤에 그 책이 분실되어 공의 집에 오직 한 질이 남아 있었다. 공이 이때에 이 책을 바치며 내용을 첨가하여 편집한 뜻을 진달하고, 이어 《대학연의》를 진강할 즈음에 이 책을 함께 보아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 책에서 논한 경외심을 높일 것〔崇敬畏〕, 일욕을 경계할 것〔戒逸欲〕, 내치를 엄히 할 것〔嚴內治〕, 민정을 살필 것〔察民情〕 4개 조목을 경계할 것으로 진달하였다. 이에 상이 답하기를, “지금 올린 《대학연의집략》은 내가 예전에 그 이름만 들었고 아직 그 책을 보지는 못했다. 지금 다행히 이 책을 얻어서 보니, 실로 수신(修身)ㆍ제가(齊家)의 중요한 도리요 사욕을 막고 자신을 경계하는 밝은 거울이며, 차자에서 진달하며 열거한 4개 조목도 모두 오늘날 약석(藥石)이 될 만한 말이다. 내가 비록 불민하나 유념하여 힘껏 실행함으로써 경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겠다.” 하고 모포 담요 한 장을 하사하였다.
상의 생부를 부묘(祔廟)하라는 명이 내려오자 양사가 합계하여 간하니, 대사헌 강석기(姜碩期), 대사간 조정호(趙廷虎) 등 8인을 삭출할 것을 명하였다. 그 뒤에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이 논계를 정지하려고 하자 부제학 김광현(金光炫) 등이 유백증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진노하여 또 김광현 등을 절새(絶塞)에 정배할 것을 명하였다. 이 일에 대해 공이 모두 차자를 올려 논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 공의 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아 집 안에 칩거하며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으나 임금이 득실을 크게 범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근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처럼 간절히 진언하였던 것이다.
을해년(1635, 인조13) 4월 29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춘추가 72세였다. 이날 마른번개가 밤새도록 치고 하늘에 뻗친 붉은빛이 밤이 이슥해서야 흩어졌다. 그 며칠 전에 세자가 공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두 차례나 액정(掖庭)에 있는 사람을 보내고 다시 궁관을 보내어 병세를 물었으며, 상이 내의를 보내 병세를 살피게 하고 약물을 보내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가 공이 졸하니 상이 애도하면서 철조(輟朝)하고 3일 동안 소선(素膳)을 올리라고 명하였으며 특별히 제사와 부의(賻儀)를 예법대로 하사하게 하였다. 세자는 백관을 거느리고 별전(別殿)에서 거애(擧哀)하는 한편 7일 동안 소선을 올리라고 명하고 조부(弔賻)를 특별히 더 하사하였으며, 친히 임곡(臨哭)하여 애도의 뜻을 다하고 공의 자제들의 손을 잡고 위무(慰撫)하였다. 그리고 환궁하여 강관(講官)에게 말하기를, “경상(卿相)의 지위에 오래 있었는데도 그 집이 그토록 비좁고 누추한 것을 보니 진정 귀인(貴人)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
위로는 경상으로부터 백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의 빈소에 와서 곡하고 조문하였으며, 아래로는 하인과 천민에 이르기까지 며칠 동안 와서 곡을 한 사람이 무려 수백 명이나 되어 사람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성균관 유생 180여 인도 모두 와서 조문하였다. 그해 7월 모일에 용인(龍仁) 문수산(文秀山) 선영의 사좌해향(巳坐亥向)의 둔덕에 안장하였다. 학문에 근면하고 묻기를 좋아했다는 것과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임금을 받들었다는 두 가지 시법(諡法)을 적용하여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은 자태가 영이(穎異)하고 음성이 청랑(淸朗)하였으며, 풍도가 호상(豪爽)하고 풍류가 영발(映發)하여 바라보노라면 신선 중의 사람처럼 보였다. 남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즐겁게 담소하며 종일토록 즐거운 기색을 띠었고, 평생토록 급한 언어나 조급한 기색이 없었고 나태한 모습도 보인 적이 없었으며, 진심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고 격의를 두지 않았다. 그래서 공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노소와 존비를 막론하고 모두 마음에 만족하여 떠나곤 하였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가릴 적에는 비록 흔적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경위가 절로 분명해서 항상 옳음을 따르고 그른 데에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문숙공(文肅公) 정엽(鄭曄)이 당세의 인물을 논할 때에 공을 으뜸으로 꼽으면서 “온화한 중에 소신이 확고하다.” 하였다.
내외의 족속에 대해서는 친소(親疎)와 원근(遠近)을 따지지 않고 모두 골육처럼 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족첩(族牒)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 중에 먼 지방에 사는 사람이 일이 있어 상경할 때면 언제나 공을 먼저 찾아와 의탁하며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편안히 지냈다. 과거 시험으로 인재를 뽑을 때면 반드시 지필묵을 미리 준비해 놓고서 응시하러 오는 향족(鄕族)을 기다렸다.
빈궁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힘이 닿는 대로 반드시 진휼해 주었으며, 죄수를 심리(審理)하여 의논을 올릴 때에는 반드시 평번(平反)을 주장하여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많았다.
경상의 지위에 있은 40년 동안 전장(田莊)을 경영하거나 집을 넓히고 꾸민 적이 없었다. 집안의 생활이 군색하여도 형편을 따지지 않고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과 음식을 대접하게 하였는데, 실정대로 음식을 마련하고 정성을 다해 대접해 보냈다.
항상 대체(大體)를 견지하고 형식적이고 번다한 일은 생략하였으며, 남의 과오를 보면 오직 덮어 주려고 애썼다. 매번 조당(朝堂)이나 공회(公會)에 나아가 계차(啓箚)를 입으로 불러 줄 때 신진 낭속(郞屬)이 글자를 잘못 받아써도 결코 꾸짖지 않고 더러는 잘못 쓴 곳을 고쳐 주기도 하였다. 자제가 과오를 범해도 노하여 꾸짖은 적이 없고 느긋한 말로 타일러 스스로 반성할 길을 열어 주었으며, 작은 과실에 대해서는 아예 묻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대하거나 동복(僮僕)을 부릴 때에도 모두 그러하였다.
효우(孝友)의 행실이 매우 독실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공이 부친 의정공(議政公)을 모시고 뒤따라 행재(行在)로 가다가 양주(楊州)에 이르러 적에게 길이 막혀 며칠 동안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다. 이때 의정공이 워낙 허기가 져서 풀과 나무 열매를 먹으려 하자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산을 내려와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당시 적병이 사방을 에워싸 촌락이 잿더미가 되고 인가의 연기가 끊어진 상황이라 막막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문득 보니 한 노인이 바위 위에 앉아서 밥이 가득 든 상자를 앞에 놓고 있기에 공이 그 앞에 나아가 절을 하였다. 공이 사연을 말하고 구걸을 하니 노인이 상자를 내주었다. 공이 사양하면서 절반만 나눠 가겠다고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가지고 돌아가서 며칠 동안 밥을 드리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또 누님이 고양(高陽)에 살고 있었는데 생사를 알지 못하여 의정공이 공에게 찾아가 보라고 명하였다. 성산(城山 파주(坡州))에 이르렀을 때 한 무리의 왜적이 졸지에 들이닥치자 산 위에 피신한 사람들이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할지 몰랐다. 공이 대중에게 말하기를, “어차피 죽을 바에는 응당 항거해야 할 것이다.” 하니, 대중이 공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았다. 왜적이 개미 떼처럼 산을 타고 올라오자 무인(武人)인 신거관(愼居寬)과 신거용(愼居庸) 형제가 모두 공의 옆에서 왜적을 향해 활을 쏘았다. 이들 형제는 원래 재관(材官) 출신으로 무용(武勇)이 뛰어났기 때문에 왜적을 매우 많이 죽였다. 서로 대치한 채 거의 한나절이 지나는 동안 공은 우뚝 서서 동요하지 않고 사람들을 독려하였는데, 왜적의 탄환이 세 번이나 공의 몸에 날아왔다. 그러나 하나는 모자에 맞고 하나는 왼쪽 겨드랑이를 스쳐 지나가고 하나는 바지 아래를 뚫고 지나가서 모두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왜적이 또 탄약을 장전하여 공을 겨누자 공은, ‘천행(天幸)으로 세 발의 탄환은 피할 수 있었으나 다시 모면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라고 생각하였다. 또 신거관 형제 등 여러 사람이 잇따라 적의 탄환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깊은 골짜기를 뛰어넘고 벼랑을 타고 올라 피신하였다. 의복을 살펴보니 바지에 탄환 구멍이 있었고 왼쪽 겨드랑이에도 탄환이 스쳐 불에 탄 흔적이 보였다. 이런 위험을 뚫고 마침내 누님을 찾아뵙고 돌아오니, 사람들이 신명의 보우(保佑)를 받았다고 말하였다.
삭녕(朔寧)에 도착하였을 때에 감사 심대(沈岱)가 징파도(澄波渡)에 진을 쳤다는 말이 들리니, 그 고을 사람들이 이를 믿고 동요하지 않았다. 의정공 역시 먼 길에 지친 나머지 하루라도 그곳에 머물고 싶어 하였다. 공이 심대의 영루(營壘)에 가서 살펴보고는 심대가 반드시 패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공이 돌아와 의정공에게 말하고 즉시 밤중에 서둘러 출발하여 겨우 몇 리쯤 갔을 때 왜적이 과연 심대의 영루를 습격하여 한 고을을 도륙(屠戮)하고 말았다. 기전(畿甸)에서 행조(行朝)에 도착할 때까지 이처럼 위태한 상황에서 다행히 벗어난 것이 몇 차례나 되었다.
선인(先人)의 기신(忌辰)이 돌아오면 반드시 목욕하고 재계하기를 엄동설한에도 그만두지 않았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였다. 가묘(家廟)에서 삭망(朔望)에 제전(祭奠)을 올리는 일 역시 병이 들었어도 반드시 몸소 행했다. 5대조의 묘소에 향화(香火)가 끊겼는데 공이 제식(祭式)을 정하여 자손으로 하여금 번갈아 제사를 올려 향화가 끊기지 않게 하였다. 언젠가는 경성에 있는 자손 30여 인과 함께 가서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문강공(文康公)의 옛 집터에 사우(祠宇)가 없기에 애써 사우를 건립하고 주사자(主祀者)로 하여금 신주를 모시고 와서 거처하게 하였다. 집에 방루(房樓)가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였으나 선세(先世)의 구거(舊居)라 하여 끝내 철거하거나 개수하지 않았다.
과부가 된 누님이 옆집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도 찾아가서 서로 만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반드시 자질(子姪)을 침방(寢房)에 모아 놓고 학업을 점검하고 뜻을 말하게 하며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시를 읊으며 즐겁게 보냈는데, 혹 새벽닭이 울 때에 이르러서야 자리를 파하기도 하였다.
공은 인재를 칭찬하고 천거하기를 특히 좋아하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재주나 기능을 지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밀어 주고 이끌어 주었다. 조정에 지나친 거조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매양 근심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임금이 훌륭한 거조나 정사를 한 것을 보았을 경우에 혹 등대(登對)했다가 마치고 나와서 반드시 기뻐하며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믿을 분은 우리 전하뿐이다.” 하였다. 비록 병환이 위독한 상태에 있을 때일지라도 잠시도 나랏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집안일에 대해서는 이처럼 소루하고 오활했지만 나랏일에 이르러서는 터럭만 한 일도 감히 허술히 보아 넘긴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을 시행할 것이 있으면 그 조목들이 밤중에도 반드시 눈앞에 삼삼하였다.” 하였다.
공은 소싯적부터 문사(文詞)에 힘써서 마침내 당대의 종장(宗匠)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일찍이 〈태극문변서(太極問卞序)〉와 〈회재답망기당서오잠발(晦齋答忘機堂書五箴跋)〉을 저술하여 성리(性理)의 요체를 논하였으니 공의 뜻이 성현의 학문을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공의 문장도 기실은 경전(經傳)에 근본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오도(吾道)와 관계되는 일이면 반드시 힘써 주장하고 담당하여 오도를 진작하고 부식(扶植)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공이 문장을 짓는 것은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자연스러워 퇴고(推敲)하고 신고(辛苦)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금석(金石)의 글이나 응제(應制)의 글과 같은 중요한 글일지라도 모두 남에게 붓을 쥐게 하고 입으로 불러 주어 완성할 뿐 윤색하지 않고 별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아도 문장이 나오면 매양 인구에 회자되었다. 저술한 시문으로는 《조천록(朝天錄)》 4권, 《권응록(倦應錄)》 2권, 《폐축록(廢逐錄)》 2권, 《습유록(拾遺錄)》 2권, 비지(碑誌)ㆍ행장(行狀)이 15권, 소차(疏箚)ㆍ계의(啓議)ㆍ자주(咨奏)ㆍ게정(揭呈)이 10권, 표전(表箋)ㆍ서기(序記)ㆍ잡저(雜著)가 4권이며, 《서연강의(書筵講義)》 1권, 《대학강어(大學講語)》 1권, 일기(日記) 25권이 있다. 공청(公廳)에서 지은 계사(啓辭)와 연석(宴席)에서 읊은 작품들은 산실(散失)된 것이 매우 많으며,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것들은 모두 분실되었다.
공은 일찍부터 선묘(宣廟)의 지우(知遇)를 입어 낭서(郞署)를 거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육경의 지위에 뛰어올랐다. 이 모두가 상이 친히 발탁한 것이었으니, 그 군신의 계합(契合)이야말로 세상에 드문 만남이라 할 만하다. 광해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공이 의리를 지키고 동요하지 않으니 흉적들이 몹시 미워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모함하여 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가 공의 재주를 인정하여 중국 조정의 의혹을 해소시키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공이 사신으로 나가기만 하면 중국 조정의 본국에 대한 의혹을 풀 수 있었다. 그래서 광해가 공을 친구처럼 신임하여 시종 공을 저해하는 음모가 있어도 공을 보전해 주었다. 만년에는 당저(當宁 인조(仁祖))의 지우를 받고 병조 판서와 예조 판서를 거쳐 늘 이공(貳公 찬성)을 겸임하였고 마침내 재상의 지위에 오르는 등 은수(恩數)가 갈수록 융숭하였다. 공은 전후에 걸쳐 아홉 차례나 예조 판서를 맡고 문형(文衡)을 두 차례 맡았으며, 네 번이나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중국 사신을 네 차례나 접빈하였다.
국가의 예악(禮樂)과 전장(典章), 문물(文物)과 의도(儀度) 중에는 공이 제정한 것이 많고,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에 관한 크고 작은 자주(咨奏)와 게정(揭呈)도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국가가 간난(艱難)하고 위태하거나 난리로 파월(播越)할 때에도 몸소 큰일을 떠맡지 않은 적이 없었고 위험한 상황도 피하지 않으며 주선하고 응대하여 충성을 다함으로써 번번이 국가의 화란과 간난을 해소시켰다. 그리하여 국가의 일이 끝내 안정을 되찾게 하였으니, 공이 국가에 끼친 공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도하(都下)의 아동이나 주졸(走卒)로부터 궁향(窮鄕)과 초야(草野)의 어리석고 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의 별호를 일컬었으며, 우리나라 사신이 중국에 갈 때마다 중국의 학사와 대부들도 번번이 공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전년에 절사(節使)가 중국에 갔을 적에 옥전(玉田)의 유사(儒士)가 무술년(1598, 선조31)에 공이 변무한 주문(奏文)을 꺼내어 보여 주었고 영원사(寧遠寺)의 승려도 공이 지어 준 시를 외고 공의 별호를 일컬으면서 안부를 물었다 한다. 공이 중국 사람들에게 칭모(稱慕)를 받음이 또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은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 명한(明漢)은 대사성(大司成)이고 소한(昭漢)은 병조 참지(兵曹參知)이다.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모두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소한은 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장녀는 참판 홍영(洪霙)에게 출가하였는데, 그 역시 문과 출신이다. 차녀는 유학(幼學) 정현원(鄭玄源)에게 출가하였다.
명한은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딸을 아내로 맞아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일상(一相)은 수찬인데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둘째 가상(嘉相)은 진사이다. 셋째는 만상(萬相)이고, 넷째는 단상(端相)이다. 딸은 어리다. 소한은 좌찬성 이상의(李尙毅)의 딸을 아내로 맞아 4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은상(殷相)이다. 둘째 홍상(弘相)은 진사이다. 셋째는 유상(有相)이고, 넷째는 익상(翊相)이다. 딸은 모두 어리다.
홍영은 5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주원(柱元)은 정명공주(貞明公主)를 아내로 맞아 영안위(永安尉)가 되었다. 둘째 주후(柱後)는 진사이다. 셋째는 주신(柱臣)이고, 넷째는 주한(柱韓)이고, 다섯째는 주국(柱國)이다. 장녀는 이준구(李俊耈)에게 출가하여 1남 2녀를 낳았고, 둘째는 진사 이시술(李時術)에게 출가하여 3남 3녀를 낳았고, 셋째는 이항진(李恒鎭)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나머지는 어리다. 정현원은 3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일상은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의 딸을 아내로 맞아 2녀를 낳았고, 가상은 전 참의 나만갑(羅萬甲)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은상은 장령(掌令) 박안제(朴安悌)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홍주원은 4남을 낳았고, 주후는 경력(經歷) 유석(柳碩)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 1녀를 낳았고, 주신은 유학 홍간(洪柬)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의 자제인 명한 등이 공의 사적(事蹟)을 서술하고서 내가 일찍이 공에게 수학(受學)하면서 매우 깊은 대우와 인정을 받았다는 이유로 행장을 써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삼가 서술한 사적을 바탕으로 삼아 대략 산절(刪節)하여 이상과 같이 정리해서 세상의 역사를 기술하는 사관(史官)들이 채택할 자료로 삼게 한다.
[주1] 과거에 …… 여겼건만 : 과거에 손쉽게 급제함을 비유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기최이십육입지(寄崔二十六立之)〉에 “해마다 과거에 급제하기를 마치 턱 밑의 수염을 뽑는 것처럼 한다.〔連年收科第 若摘頷底髭〕” 한 데에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5》
[주2] 우리 집안의 구물(舊物) : 가업을 뜻한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밤에 서재에서 자다가 도둑이 들어 방 안의 물건을 다 훔쳐서 짐을 꾸리는 것을 보고 “푸른 모포〔靑氈〕는 우리 집안의 오랜 물건〔舊物〕이니 그것만은 놓아두라.”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80 王獻之列傳》
[주3] 남산시(南山詩) : 《한창려집韓昌黎集》 권1에 실려 있는 한유(韓愈)의 시로, 종남산(終南山)에 올라가 뛰어난 경치를 읊은 204구(句)의 장편 오언시(五言詩)이다. 두보(杜甫)의 〈북정(北征)〉 시와 쌍벽을 이루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주4]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 : 《한창려집》 권1에 실려 있는 한유의 시로, 매우 긴 장편 사언시(四言詩)이다.
[주5] 당시 …… 하였다 : 한학 교수가 중국어를 가르치는 낮은 직책인데 월사와 같은 큰 인재를 이 자리에 앉힌 것이 자기의 실책이었다고 탄식한 것이다.
[주6] 북해(北海)의 술동이 : 북해는 후한(後漢) 때의 사람인 공융(孔融)을 가리킨다. 그가 북해상(北海相)이라는 벼슬을 역임했으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는 빈객을 좋아하여 좌중에 항상 빈객이 가득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자리에 빈객이 항상 많고 술두루미에 술이 비지 않으면 나는 근심이 없으리라.〔座上客常滿 樽中酒不空 吾無憂矣〕”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70 孔融列傳》
[주7] 남루(南樓)의 흥 : 진(晉)나라 정서장군(征西將軍) 유량(庾亮)이 태위(太尉)로 무창(武昌)에 있을 때 하속(下屬)인 은호(殷浩) 등이 달밤에 남루에 올라 막 시를 읊고 있는데, 그가 왔다. 이에 하속들이 일어나 자리를 피하려 하자 그가 “제군들은 잠시 더 머물라. 이 늙은이도 이러한 일에 흥이 얕지 않다.” 하고는,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함께 시를 읊으며 놀았다 한다. 《晉書 卷73 庾亮列傳》
[주8] 피전(避殿) : 옛날에 천재(天災)나 급난(急難) 등 재앙이 있을 때 임금이 거처하던 정전(正殿)을 떠나 다른 곳에 거처함으로써 자책(自責)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다.
[주9] 의인왕후(懿仁王后) : 선조(宣祖)의 비(妃) 박씨(朴氏)이다. 1569년(선조2)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1600년에 소생(所生)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주10] 문소전(文昭殿) : 태조(太祖)와 그 비(妃) 신의왕후(神懿王后), 태종(太宗)의 위패를 봉안한 전각이다.
[주11] 숭의전(崇義殿) : 고려 태조(太祖) 이하 8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주12] 중자(仲子)의 …… 일 : 중자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 효공(孝公)의 첩이자 혜공(惠公)의 어머니이다. 중자의 손자인 은공(隱公)이 중자의 사당을 세운 것을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은공(隱公) 5년에 기롱하는 뜻에서 “중자의 사당이 완성되었다.〔考仲子之宮〕”라고 기록하였다. 그 까닭은 중자의 아들인 혜공이 임금이 되었지만 중자는 정부인(正夫人)이 아니기 때문에 제사는 아들 대(代)까지만 지내야 하는데 손자인 은공이 사당을 세워 제사한 것은 예(禮)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13] 성풍(成風)에게 …… 일 : 《춘추(春秋)》 문공(文公) 9년에 “진나라 사람이 노나라에 와서 희공과 성풍의 수의를 전하였다.〔秦人來歸僖公成風之襚〕” 하였다. 성풍은 노나라 장공(莊公)의 첩으로 아들 희공(僖公)을 낳았다. 성풍이 정실부인이 아닌데 수의를 준 것은 잘못임을 《춘추》에서 기롱한 것이다.
[주14] 결채(結彩) : 임금이나 사신의 행차가 지나가는 곳의 성문, 다리, 지붕, 문 위 등에 색실, 색종이, 색헝겊 등을 내걸어 장식하던 것으로, 일종의 환영을 표시하는 것이다. 채붕(彩棚)이라고도 한다.
[주15] 은적(銀賊) : 조령(鳥嶺)에서 은(銀)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도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주16] 저주에 관한 일 : 계축옥사 때 모반 혐의로 심문을 받던 박동량(朴東亮)이 앞서 선조(宣祖)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능인 유릉(裕陵)에 저주했던 사실을 묵인한 일을 말한다. 박동량은 김제남(金悌男)과 역모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자 역모 사건을 부인하면서, 대북파가 조작한 이 유릉 저주 사건을 시인함으로써 폐모(廢母)의 구실을 제공하고 감형되어 풀려났다.
[주17] 오대(烏臺)의 개석(介石) : 오대는 어사대(御史臺)의 이칭이다. 개석은 개우석(介于石)의 준말로 매우 개결한 절개를 뜻한다. 《주역》 〈예괘(豫卦) 육이(六二)〉에 “육이는 절개가 돌과 같아 하루를 마치지 않고 떠나가니, 정하고 길하다.〔六二 介于石 不終日 貞吉〕” 하였다. 즉 어사대의 매우 강직한 신하라는 뜻이다.
[주18] 목릉(穆陵) : 양주(楊州) 구리(九里)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의 하나로, 선조(宣祖)의 능호(陵號)이다.
[주19] 대행 황제(大行皇帝) : 황제가 죽고 나서 아직 시호를 올리지 않은 때 쓰는 호칭인데, 여기서는 명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를 가리킨다.
[주20] 복의(濮議) :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복안의왕(濮安懿王) 조윤양(趙允讓)의 아들 조서(趙曙)로 뒤를 잇게 하니 그가 영종(英宗)이다. 영종이 즉위한 이듬해에 조칙을 내려 생부인 복안의왕을 숭봉(崇封)하는 문제를 의논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복의라고 한다. 이때 여회(呂誨)ㆍ범순인(范純仁)ㆍ여대방(呂大防) 등은 인종(仁宗)을 황고(皇考)라고 부르고 복안의왕을 황백(皇伯)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기(韓琦)ㆍ구양수(歐陽脩) 등은 복안의왕을 황고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한기 등의 주장이 채택되어 여회 등은 조정에서 쫓겨났다.
[주21] 노 양공(魯襄公)이 …… 행하였습니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9년과 《사기(史記)》 권33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에 보인다. 진후(晉侯)는 진나라의 도공(悼公)이고, 성공(成公)은 노나라와 동성(同姓)인 위(衛)나라의 제후이다.
[주22]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 : 인조의 사친(私親)이다. 대본은 ‘聯珠府夫人’으로 되어 있는데, 《인조실록》에 의거하여 ‘聯’을 ‘連’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23] 강홍립(姜弘立)과 박난영(朴蘭英) : 두 사람은 1619년(광해군11)에 명나라의 원병 요청으로 후금(後金) 정벌에 나섰다가 부차(富車)에서 대패하여 후금의 군대에 투항하였다. 그 이듬해에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두 사람은 김경서(金景瑞) 등 10여 명과 계속 억류되어 있다가 정묘호란 때에 후금 군대의 선도로 입국하여 강화(江華)에서의 화의를 주선하였다.
[주24] 기유년의 조약 :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일본에서 해마다 보내는 사절의 횟수와 인원 등에 대하여 일본과 맺은 약조인데, 전문(全文) 11조로 되어 있다.
[주25] 안가(安家)와 염채(鹽菜)와 월은(月銀) : 안가는 집을 지어 주어 가정을 꾸릴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염채는 부식비(副食費)이고, 월은은 월급이다.
[주26] 도유(都兪) :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정사를 토론함을 뜻한다. 도유는 우불도유(吁咈都兪)의 준말로, 우불은 반대, 도유는 찬성을 뜻한다. 요(堯)ㆍ순(舜)ㆍ우(禹) 등 성왕(聖王)이 신하들과 정사를 토론할 때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기탄없이 개진하였던 데서 유래한다. 《書經 堯典, 舜典, 大禹謨》
[주27] 공자(公子) : 세자(世子)가 아닌 서자(庶子)를 이른다.
[주28] 광무(光武)가 …… 하였습니다 : 백승(伯升)은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의 맏형인 유연(劉縯)의 자이다. 이 내용은 《회암집(晦庵集)》 권47 〈답하숙경(答何叔京)〉에 나온다.
[주29] 복의(濮議) :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복안의왕(濮安懿王) 조윤양(趙允讓)의 아들 조서(趙曙)로 뒤를 잇게 하니 그가 영종(英宗)이다. 영종이 즉위한 이듬해에 조칙을 내려 생부인 복안의왕을 숭봉(崇封)하는 문제를 의논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복의라고 한다. 이때 여회(呂誨)ㆍ범순인(范純仁)ㆍ여대방(呂大防) 등은 인종(仁宗)을 황고(皇考)라고 부르고 복안의왕을 황백(皇伯)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기(韓琦)ㆍ구양수(歐陽脩) 등은 복안의왕을 황고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한기 등의 주장이 채택되어 여회 등은 조정에서 쫓겨났다.
[주30] 주묘소목도(周廟昭穆圖) : 《주자대전(朱子大全)》 권69 〈체협의(禘祫議)〉 내에 주칠묘도(周七廟圖)와 주구묘도(周九廟圖)가 보인다.
[주31] 효왕(孝王)은 …… 것입니다 : 주(周)나라는 공왕(共王), 의왕(懿王), 효왕(孝王), 이왕(夷王)의 순서로 이어지는데, 의왕은 공왕의 아들이고, 효왕은 공왕의 아우로서 의왕의 숙부이고, 이왕은 의왕의 아들이다.
[주32] 그 자리〔位〕를 …… 연주한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9장에 보인다. 후왕(後王)이, 선왕(先王)이 밟았던 자리를 밟고서 선왕의 예(禮)를 거행하고 선왕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제왕의 지극한 효(孝)를 말한다.
[주33] 덕종대왕(德宗大王) : 조선 성종(成宗)의 부친이다. 세조(世祖)의 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1471년(성종2)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주34] 취송(聚訟) : 여러 설(說)이 분분히 서로 다투어 정론이 없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권35 〈조포열전(曹褒列傳)〉에 “속담에 이르기를 ‘길옆에 집을 지으면 3년이 걸려도 완성할 수 없고 예(禮)를 따지는 사람이 모인 것을 이름하여 취송이라 한다.〔作舍道邊 三年不成 會禮之家 名爲聚訟〕” 하였다.
[주35] 송 호부(宋戶部) : 명나라의 호부 낭중(戶部郞中) 송헌(宋獻)을 가리킨다. 《인조실록(仁祖實錄)》 8년 12월 4일 조에, 부교리(副校理) 최유해(崔有海)가 사행 길에 중국인 송헌과 예에 대해 문답한 내용을 상소했다는 기사가 있다. 송헌은 최유해에게 인조의 친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추숭하더라도 의리에 해가 될 것이 없다고 하였고, 최유해는 그로부터 이와 관련된 예설(禮說)을 받았다고 한다.
[주36] 의기(義起) :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예라는 것은 의의 실질이니, 의에 맞추어서 맞으면 예는 비록 선왕 때에 없는 것일지라도 의로써 새로 만들 수 있다.〔禮也者 義之實也 協諸義而協 則禮雖先王未之有 可以義起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예문(禮文)에 없더라도 이치에 맞으면 새로운 예를 만든다는 것이다.
[주37] 평번(平反) : 옥사(獄事)에서 원통하고 억울한 사안(事案)을 바로잡는 것이다.
[주38] 태극문변서(太極問卞序) : 《월사집》 권40에 실려 있다.
[주39] 회재답망기당서오잠발(晦齋答忘機堂書五箴跋) : 원래의 제목은 〈회재선생오잠망기당서후발(晦齋先生五箴忘機堂序後跋)〉로, 《월사집》 권41에 실려 있다.
[주40] 중시(重試) : 문과(文科)에 급제한 당하관(堂下官)을 대상으로 치르는 과거로 10년에 한 차례씩 시행하였으며,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상관(堂上官) 정3품으로 품계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