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1장 12-18절 고난의 유익.
오늘 본문은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죄로 인해 징계를 받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2. 둘째로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고난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난을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1) 바울이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 아무 잘못도 없이 순전히 오해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판받을 때에 천부장,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했습니다.
“이처럼 사슬에 매인 것 외에는 나와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행 26:29)
(2) 죄수의 몸으로 결박당하여 로마로 호송되어 가면서도, 풍랑을 만나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보호해주시고, 다 나에게 맡겨주셨다고 담대히 전도했습니다.
그래서, 배 안에 있는 276명에게 모두 전도했습니다.
심지어 배가 파선하고 조난당했어도, 멜리데 섬 추장 부친을 치료해주시고 원주민들을 치료하고, 같이 간 사람들을 모두 구조하고 전도했습니다.
(3) 지금은 로마 감옥에 갇혀서, 황실 경호원들에게 전도하여, 오히려 일반사람은 만날 수도 없는 황실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도했습니다.
12절.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I want you to know, brethren, that my circumstances have turned out for the greater progress of the gospel,
형제들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Γινώσκειν δὲ ὑμᾶς, βούλομαι, ἀδελφοί,
to know now you, I want, brothers,
직역하면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는 뜻입니다.
‘알기를’(Γινώσκειν)은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know), ‘원하노라’(βούλομαι)는 현재형입니다(I want).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ὅτι τὰ κατ’ ἐμὲ, μᾶλλον εἰς προκοπὴν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ἐλήλυθεν,
that the things concerning me, really to advancement of the gospel have turned out
직역하면 ‘나에 관한 일들이 실제로 복음의 진보로 드러난 것을’이란 뜻입니다.
‘드러난’(ἐλήλυθεν)은 완료형으로서(have turned out) 결과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을 대적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된 것을 가지고, 바울의 복음 전도가 실패작이고, 바울의 사도성과 메시지가 거짓된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로마 투옥이 로마 황실 전도에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밝힘으로써, 반대자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당한 일’이란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보’(προκοπή)라는 말은 ‘앞에’라는 접두어(πρό)와 ‘자르다’(κόπτω)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서,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베어냄으로써 전진하는 것(advancement by chopping down whatever impedes progress)을 가리키고, 군대나 개척자가 장애물을 베어내고 숲의 나무를 잘라내면서 전진하여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pioneers and armies–cutting through obstacles, chopping down forests in order to reach their destination)
따라서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은 로마 전역에 복음을 전하는 개척자로서 전진하는 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2. 10년 전에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 전도시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옥문이 열리고, 통치자가 바울에게 와서 사과하고, 모셔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지 2년이 지나도, 아무런 기적이 나타나지 않고, 전과 같이 통치자가 찾아와서 바울에게 사과하고 모셔가는 모습이 보이질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을 통해서 믿게 된 자기들의 신앙에 대해서 회의할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이 복음 전도에 실패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고, 복음 전도에 진보가 되고, 효과적인 황실 전도가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3. ‘도리어’가 중요합니다.
인간의 생각에는 고난이 하나님의 일에 손해가 될 것으로 생각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방법을 통해서 더욱 빨리 하나님의 일을 처리해가십니다.
4. 인간의 고난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에 진보가 된 사례
(1) 바울의 경우-
바울 사도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로마서 15장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이 죄수로서 무료로 호송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황실 경호부대에 투옥됨으로써, 로마 황실에 효과적으로 전도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비량하면서 고생하지 않고, 국비로 여행하면서, 또한 배 안에 함께 승선한 사람 276명을 고스란히 전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멜리데 섬의 추장과 원주민들에게까지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2) 요셉의 경우-
요셉은 형제들과 부모와 세상 사람들이 자기에게 구원에 대해 감사하며 절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꿈은 요셉이 노예로 팔리고, 또 감옥에 갇히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겸손의 훈련을 통해서 요셉이 높은 지위에 올라가도 교만하지 않도록 고된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을 통해서 세상 모든 불쌍한 사람들의 고난을 다 이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할렐루야!
뿐만 아니라, 자기로서는 절망적인 고비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넘기면서, 심지어 형들이 자기를 파는 죄악조차도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3) 그래서, 시편 119편 67절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습니다.
고난은 신앙의 훈련소와 같습니다.
로마서 5장 3-5절에는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고 했습니다.
군인이 훈련소에서 고난과 훈련을 받지 않으면, 군사로서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미디안 광야 40년의 훈련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양치는 목동생활과 사울에게 쫓기는 훈련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미디안 광야 3년과 고향 길리기아 다소의 11년간의 연단이 있었습니다.
(4)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통해서 마음이 낮아지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배웠습니다.
신명기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4)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예수님이 벳세다 광야에서 남자 장정만 5천 명이 되는 사람들이 굶주렸을 때,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써 기적을 행하시고 배불리 먹게 하신 후,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광야 세상에서 육신이 떡을 아무리 먹어도 죽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생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63).
예수님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부요나 건강이나 출세가 아니라, 죄와 죽음과 마귀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 죄와 죽음과 마귀에게서 해방받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를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요, 죄인과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아들도 아끼지 않고 우리 죄인을 위해서 죽도록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혜로 거저 주십니다( 로마서 8:32).
우리 인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하게 이루어주십니다(롬 8:28).
세상의 그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라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영원무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6-7절에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시편 50편에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 50:23)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고난 당할 때에 원망하지 마십시오!
사랑의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감사하면서 예배하고, 감사하면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평안케 하실 것이며, 환난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가 죄 없이 매맞고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할 때에, 옥문이 활짝 열리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 같이, 여러분의 고난의 현실도 축복의 앞길로 환하게 열릴 것입니다.
13절.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 that my imprisonment in the cause of Christ has become well known throughout the whole praetorian guard and to everyone else,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ὥστε τοὺς δεσμούς μου φανεροὺς ἐν Χριστῷ γενέσθαι ἐν ὅλῳ τῷ πραιτωρίῳ, καὶ τοῖς λοιποῖς πᾶσιν,
so the chains of me clearly known in Christ to have become in all the palace guard, and to the rest all
’나타났으니’(φανεροὺς--γενέσθαι)는 직역하면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clearly known--to have become)란 뜻으로서, 앞의 단어는 형용사이고, 뒤의 단어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have become)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려지게 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나의 매임이--나타났으니’란 말의 의미는 바울의 투옥이 형사적인 죄 때문이 아니라, 오직 복음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뜻입니다.
즉 사도행전 25장 24-25절에서 가이사랴의 총독 베스도가 재판정에서 바울이 형사적인 범죄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6장 31-32절에서도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형사적인 범죄가 없으므로 석방 가능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로마 감옥에서 2년이 지난 현재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황실 자제인 병사들과 로마 황실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온 시위대 안에’(ἐν ὅλῳ τῷ πραιτωρίῳ, in all the palace guard)에서 ‘시위대’(πραιτωρίῳ)란 로마의 브라이도리움(praetorium)을 가리키고, 당시 로마 황실 경호부대로서 약 2만 명의 로마 최강 정예부대원이었고, 대부분 로마 원로원 자재들과 고관들 자재들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위대 모든 군사들이 바울의 투옥과 복음 전도를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정예부대원들이 바울에게 복음 전도를 받고, 자기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로마 황실에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중에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수님을 믿고, 아들에게 전도하여 결국 로마가 기독교를 용인하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2. 본 절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이 정치적 소요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복음 전도 때문임이 온 시위대 사람과 모든 사람에게 입증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시위대’란 로마 황실 경호부대로서, 오늘날 수경사와 같은 곳으로서, 정치적으로 믿을 만한 로마 황실 자제나 원로원 자제나 집정관 자제들이 근무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를 감독하는 황실 자제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기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전도했는데, 특히 엄마와 누나와 여동생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22절에는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이미 로마 가이사 황제 가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빌립보 교회에 문안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때로부터 약 250년 후에는 로마 황실이 완전히 기독교로 복음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그동안 박해하던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바울이 당한 고난은 주님을 위한 고난임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이 고난이 죄로 인한 징계인가 주님을 위한 연단인가 분별해보아야 합니다.
(1) 죄로 인한 고난의 예를 들어봅니다.
요나가 당한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로 인한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 앗수르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전도하라고 요나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저 원수 나라가 망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회개하라고 전도시키시는 것을 보니, 저들이 회개하면 살려주시려고 하는구나. 나는 죽어도 원수 나라가 멸망되는 것을 보고 싶다. 에라 전도 않고 도망가자”
그러고서, 앗수르와는 반대편인 서바나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랬더니, 요나가 가는 곳마다 야단이 났습니다.
바다가 풍랑으로 요란하고, 배가 파선할 지경이고, 선원들이 죽을 지경이고,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니, 그 물고기가 뱃속이 괴로워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이 요나의 고난은 불순종의 죄로 인한 고난이었습니다.
드디어 요나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마침내 요나는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 죄 때문이 아니라, 신앙의 연단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욥은 아무 죄도 없었으나 무서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욥은 연단을 받고, 더욱 성장된 신앙을 얻었습니다.
욥기 42장 5절에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고 했습니다.
14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at most of the brethren, trusting in the Lord because of my imprisonment, have far more courage to speak the word of God without fear.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καὶ τοὺς πλείονας τῶν ἀδελφῶν ἐν Κυρίῳ πεποιθότας τοῖς δεσμοῖς μου,
and the most of the brothers in Lord having trusted the chains of me,
‘그리고 주 안에 있는 형제들 중 대다수가 나의 매임을 신뢰했으므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나, 한글성경처럼 ‘주 안에’를 ‘신뢰하므로’에 연결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라고 번역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신뢰하므로’(πεποιθότα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trusted) 이미 신뢰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περισσοτέρως τολμᾶν ἀφόβως τὸν λόγον τοῦ Θεοῦ λαλεῖν.
more abuntantly to dare fearlessly the word of the God to speak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τολμᾶν--λαλεῖν)에서 앞의 단어는 현재 부정과거로서(to dare) ‘담대히--을 하다’는 뜻이고, 뒤의 단어도 역시 현재 부정사형 동사인데(to speak) 두 단어를 합하여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로 번역한 것입니다.
현재형인 것은 현재도 계속해서 담대히 말씀을 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처럼 핍박을 받고 있었지만, 바울의 투옥이 복음 전도에 진전이 된 것을 알고, 자신들도 핍박을 이기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1.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을 때, 황실경호부대 군사들이 매일 네 명씩 4교대로 바울을 지켰기 때문에, 바울은 이 황실 경호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도 황실 경호부대원들에게 전도함으로써, 로마 황실에 복음이 전파되자, 많은 성도들이 바울의 투옥이 복음 전도에 실패가 아니라, 복음 전도에 더욱 진보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성도들이 낙심하지 않고, 더욱 담대히 복음 전도를 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2. 여기 “형제 중 다수”란 로마 교회의 형제들을 가리킵니다.
특히 이방인으로 있다가 바울의 복음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다수’(τοὺς πλείονας, the most)란 헬라어 어법상 절대다수를 가리키는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이 대다수의 로마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투옥이 형사적인 죄 때문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한 복음 전도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투옥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도 핍박과 고난을 무서워하지 않고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주님을 신뢰함으로 더욱 겁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35-39.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3. 히브리서 11장에서, 모세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25절).
또 어떤 성도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핍박도 당했습니다.
히브리서 11:36-38.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다윗은 너무나 평안한 중에 방탕하고 범죄했습니다.
이 세상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터입니다.
물론 마귀들은 우리의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귀에게 종이 되어 있는 뭇 영혼들을 위해서,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의 군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이러한 복음 전도는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신 그런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장 소중한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목숨까지 바쳐서 사랑하셨습니다. 할렐루야!
15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me, to be sure, are preaching Christ even from envy and strife, but some also from good will;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Τινὲς μὲν καὶ διὰ φθόνον καὶ ἔριν,
some indeed even from envy and strife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τινὲς δὲ καὶ δι’ εὐδοκίαν τὸν Χριστὸν κηρύσσουσιν·
some but also from good will the Christ are proclaimig
‘전파하나니’(κηρύσσουσιν)는 현재형으로서(are proclaimig) 현재 전파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바울에 대해서 질투심과 경쟁심으로 전도한 사람들은 아마 바울이 도착하기 이전에 베드로를 추종하던 로마교회 성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 절의 대다수 성도들이 겁 없이 전도하게 된 그 성도들중에 질투심과 경쟁심으로 전도한 성도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2. 즉 “어떤 사람들”이란 바울이 로마에 오기 전에 이미 유대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예수를 믿은 로마 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이미 자기들이 확보한 지위가 바울의 전도 때문에 흔들리게 되자, 시기심과 질투심과 경쟁심으로 순전치 못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안에도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하고, 전도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착한 뜻으로 전도했습니다.
16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 latter do it out of love, knowing that I am appointed for the defense of the gospel;
이들은---사랑으로 하나
οἱ μὲν ἐξ ἀγάπης,
the (ones) indeed from love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εἰδότες ὅτι εἰς ἀπολογίαν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κεῖμαι,
having known that for defence of the gospel I am appointed
직역하면 ‘복음의 변호를 위해서 내가 세움받은 줄을 알고’란 뜻입니다.
‘내가 세움받은 줄’(κεῖμαι)은 현재수동태 동사이고(I am appointed), ‘알고’(εἰδότε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known)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세움을 받았다’는 말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특별히 지정하여 세웠다는 뜻입니다(specially appointed, destined).
즉 바울은 복음 변명을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정하여 세우신 분임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1. ‘복음을 변호’하는 일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다릅니다.
즉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것이고, 복음을 변호하는 일은 유대교인이나 율법주의 기독교 신자들에 대해서 올바른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는 일입니다.
예컨대 로마서나 갈리디아서 같은 경우에는 율법주의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참된 복음을 변호하는 내용의 책입니다.
실제로 바울의 서신 대다수는 이단에 대해서 참된 복음을 변호하는 책들입니다.
에베소나 골로새서 같은 경우에도 영지주의 이단에 대해서 변호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2. '이들'은 앞 절에서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분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세움을 받은 것임을 확신하고, 바울의 투옥도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3. 여기서 '사랑으로'란 '바울을 향한 사랑으로' 전도했다는 말씀입니다.
17절.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 former proclaim Christ out of selfish ambition rather than from pure motives, thinking to cause me distress in my imprisonment.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οἱ δὲ ἐξ ἐριθείας τὸν Χριστὸν καταγγέλλουσιν,
the (ones) but from selfish ambition the Christ are proclaiming
‘다툼’(ἐριθείας)이란 단어는 ‘다툼, 야망, 이기심, 불화, 파벌싸움’ (rivalry, ambition, rivalry, self-seeking, feud, faction)등을 가리킵니다.
‘전파하느니라’(καταγγέλλουσιν)는 현재형으로서 전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are proclaiming).
순수하지 못하게
οὐχ ἁγνῶς,
not purely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οἰόμενοι θλῖψιν ἐγείρειν τοῖς δεσμοῖς μου.
supposing tribulation to add to the chains of me
‘더하게’(ἐγείρει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add), ‘생각하여’(οἰόμενοι)는 현재분사입니다(supposing).
1. ‘그들’이란 15절에 말씀한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주의 그리스도인들로서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자, 자기들의 율법주의 복음을 전하는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투기와 분쟁심으로 전도했던 것입니다.
‘순전하지 못하게 다툼으로’란 순수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자기들의 권력과 세력을 더욱 높이려고, 이기적인 목적과 야망으로 전도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이기적인 야망을 높이려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님이 맡기신 일을 다 행한 후에 ‘나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라는 겸손한 자세로 교회의 직분을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런 겸손한 자세로 사역하는 직분자가 얼마나 될지 염려스럽습니다.
2.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전도를 못할 때, 자기들이 전도를 많이 하여 제자들을 많이 확보하면, 바울이 배가 아프고, 괴로워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은 불순한 동기에서 경쟁적으로 전도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전도하여 교인을 얻으면 자기 당에 소속시켜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확보하려는 순전히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전도하였습니다.
18절.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at then? Only that in every way, whether in pretense or in truth, Christ is proclaimed; and in this I rejoice. Yes, and I will rejoice,
그러면 무엇이냐
τί γάρ;
what then?
무슨 방도로 하든지
πλὴν ὅτι παντὶ τρόπῳ,
except that in every way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εἴτε προφάσει εἴτε ἀληθείᾳ,
whether in pretext or in truth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Χριστὸς καταγγέλλεται,
Christ is preached
직역하면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란 뜻입니다.
‘전파되고 있으니’(καταγγέλλεται)는 현재 수동태로서(is preached) 지금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καὶ ἐν τούτῳ χαίρω·
and in this I rejoice
‘나는 기뻐하고’(χαίρω)는 현재형으로서(I rejoice) 지금 나는 기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기뻐하리라.
ἀλλὰ καὶ χαρήσομαι·
yes and I will rejoice
‘기뻐하리라’(χαρήσομαι)는 미래형으로서(I will rejoice) 앞으로도 기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1.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 율법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게 경쟁적인 자세로 전도하는 것도 기뻐했습니다.
물론 갈라디아 지방 교회들에 율법주의 신자들이 침투해서 믿는 신자라고 하더라도, 믿은 후에는 이방인 신자라도 율법과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율법주의 신자들에 대해서 엄청난 분노로 저주까지 하면서 대항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서 율법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게 가서 전도하는 것은 바울이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 신자라고 하더라도 불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은 기뻐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로마 교회 안의 율법주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전도해서 자신들을 따르는 신자들이 많아지면, 바울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그러면 바울이 감옥의 괴로움에 더해서 마음이 심히 괴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바울은 참된 마음으로 전도하든지 경쟁심으로 전도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자신은 지금도 기뻐하고, 앞으로도 기뻐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로마 감옥 중에서도 기뻐하는 바울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2. 바울을 반대하면서 복음을 전하든지, 바울을 지지하면서 복음을 전하든지, 바울 자신은 자신과의 이해타산을 계산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파에 대해서 기뻐하고 앞으로도 기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이해타산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영광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헌신하는 위대한 바울 사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상 현실 교회 안에서는 심각한 권력 대립이 있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국가에서도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복지만을 추구하면서, 자신은 낮아지는 애국자들이 얼마나 존경을 받습니까?
이순신 장군이 높이 추앙을 받는 것도 간신들에 의해서 조정에서 버림을 받았으나, 백의종군하여 나라를 왜군으로부터 지킨 것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에서도 교권 싸움을 하지 않고, 주님께 충성한 직분자들은 주님이 칭찬하시고, 교인들에게 진정한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3. 바울은 세상에서 자기의 정치적 세력 형성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비록 자기를 대적하려는 목적으로라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참으로 감옥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매장되는 것도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쁘게 감수하는 참된 하나님의 일꾼의 모습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자기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0-21절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고난을 당할 때, 더욱 담대한 믿음으로써, 주님을 굳게 믿고 소망하는 굳센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기를 바라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당하는 고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하늘의 상이 크다고 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는 복된 것입니다.
죄로 인해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받는 것을 영광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20-21.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라.
베드로전서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15-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빌립보서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은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게 만들어서, 더욱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우처럼, 고난이 믿음 생활에 더욱 진보가 될 줄로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의 풍랑으로 인하여 더욱 큰 은혜를 체험하시고, 더욱 견고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