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Cult // 2006. 8. 25. // 여국현
The Rise of the Novel, Ian Watt, (Penguin Book, 1957)
Ch. 2. The Reading and the Rise of the Novel (38~65)
18세기 영국에서 소설이 이전의 문학형식과 단절을 가져오도록 한 데는 형식적 리얼리즘 못지 않게 독서 대중의 변화도 큰 영향을 미쳤다. 레슬리 스티븐의 지적, “책 읽는 계급의 점차적인 증대는 문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이 장에서 이언 와트는 이 부분에 대해 보다 면밀한 실증적 자료들을 통해 과연 현상이 그러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I.
많은 이들이 18세기가 독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현저하게 증가한 시기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와트는 18세기가 이전 시기와 비교해 독서 대중이 증가했다고는 하나 그 독서 대중이 오늘날의 독서 대중과는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38). 사실 구체적인 독서 대중의 수에 대한 추정치는 18세기 늦게서야 등장하는데, 버크는 1890년대에 그 수치를 8만명으로 추산한다. 하지만 적어도 6백만이 넘는 전체 인구를 감안하면 이 수치는 많다할 수 없다. 신문과 정기간행물의 발행과 판매 수치는 이보다 좀 더 신뢰할만한 증거들을 제시해준다. 1704년 주당 4만 3천부가 판매되었다고 하나 이는 백 명 가운데 한 명도 채 구독하지 않는 수치이다. 1753년에는 그 판매부수가 매일 23,673부가 증가하여 전체 부수는 엄청나게 늘었지만 이 또한 그만큼 증가한 전체 인구에 비교해보면 많은 부수가 아니다. 당대 최대의 독자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되는 Addison의 Spectator의 기록을 인정하더라도 50만도 채 안 되는 신문 구독 독자수는 전체 인구에 비례해볼 대 11명당 1명꼴에 불과했다.
이 시기에 가장 인기있는 책의 판매고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책을 구입하는 독자는 수천 가운데 불과 몇십명에 불과했다(39). 당대 최고의 판매부수를 기록한 책은 Sherlock 추기경의 Letter from the Lord Bishop of London...으로 10만 5천부가 판매되었다. 하지만 세속적 작품들의 판매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독서 대중의 수적 증가를 나타내는 수치들보다는 그 규모를 가리키는 수치들이 보다 신뢰할만하다. 기록에 따르면 1724년 런던의 인쇄소는 70곳이었던 반면, 1757년경에는 150~200여 곳으로 늘어나 있었으며, 18세기 동안 연간 신도서 출판 또한 거의 4배가량 증가했다. 1781년 존슨이 ‘독서 민족’을 언급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상당부분 1750년 이후 발생한 어떤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서 대중의 구성에 영향을 준 이러한 요소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만해도 결국 현재의 기준에 비추어 그 수가 그리 작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이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면서도 명확한 사항은 대단히 제한된 문자해독력(literacy)의 보급이었다. 제임스 렉킹턴(J. Lackington)의 보고에 따르면 세기말에 이르러 “농부와 자녀들, 그리고 가난한 이들 가운데 75% 이상이 읽지 못했”(41)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완전한 문맹자보다는 그래도 불완전하게나마 글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이 보다 흔했으며 런던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기호보다 글자를 사용한 간판이 늘어나 1782년 런던을 여행했던 한 스위스 여행객은 그런 간판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랄 정도였다.
여러 증거들은 대중교육이 여전히 우연히 간헐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글을 읽을 수 있는 배움의 기회는 확연히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처럼 읽고 쓰는 대중 교육체계는 아직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뢰할만한 통계치를 얻을 수 있는 첫해인 1788년 영국의 전체 교구들 가운데 4분의 1에는 여전히 교육기관이 없었으며 절반 정도의 지역에는 아동교육 기관도 갖춰지지 않았다. 교육기관이 있는 곳에서도 가난한 지역의 아이들이 교육을 받는 것은 극히 짧은 기간인데다 불규칙해서 초보적인 글읽는 수준 이상을 교육받기는 어려웠다. 하층계급의 아이들은 6-7세면 학교를 떠나거나, 계속 공부를 한다해도 그 시간은 농한기나 공장에 일거리가 없을 때 뿐이었다(41). 주당 2-6펜스하는 교육비는 빈곤한 이들에게는 만만한 비용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런던을 비롯한 몇몇 대도시에서는 자선학교들이 무상교육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그곳에서의 교육은 종교와 훈육과 관련된 것이었을 뿐 읽고 쓰고 셈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물론 사회 전반에서 이런 현상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18세기 내내 가난한 이들에게 문자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반대하는 공리주의자들과 상업주의자의 입장이 증가해 왔다. “가난한 이들에게 읽고 쓰고 셈하는 교육을 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Bernard Mendeville)라는 입장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런 결과로 몇몇 제조업이나 공장 지역에서 대중의 문자교육 수준은 18세기 내내 하향세였을 개연성이 크다. 자연히 적극적인 독서대중으로 편입해 들어간 이들은 기술적으로 문자를 취급했던 소수의 노동계급뿐이었을 것이다. 많은 요소들이 독서대중을 제한하는 데 기여했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경제적인 문제였다. 1696과 1709년의 통계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기본적 생존의 필수품을 구입하기에도 부족한 상황에 처해있음을 보여준다. 왕은 “전체 5,550,550인구 가운데 2,825,000명이 국가의 부를 축내는 도움이 되지 않는 다수”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들 가계의 연 평균 수입은 6파운드에서 20파운드에 불과했다. 이들이 책이나 신문같은 사치품을 위해 돈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이들보다는 좀 나은 형편에 있지만 역시 책이나 신문들 사보기에는 어려웠던 계층들이 1,990,000명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당시 연수입을 계층별로 보면, 42-55파운드(자영농/상업자, 1,410,000명), 45파운드(상점주인, 225,000명), 38파운드(장인, 수공업자) 등이었다. 결국 이들을 제외하고 신문이나 책을 구입할 정도의 경제적 여유를 가진 이들은 부유한 농부, 상점주, 상인들이었다. 바로 이들 내에서의 변화가 18세기 독서대중의 증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에서 변화가 발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골의 농부들 숫자와 수입이 격감한 반면, 상점주, 자영상인, 행정과 서기직 고용인구와 부는 18세기 내내 두드러지 증가세를 보였다. 바로 이들이 책을 구매하는 대중의 증가에 가장 중요한 주인공들이었던 것이다(45).
8세기의 비싼 책값은 독서인구를 제한하는 경제적 요소로 작동했다. 주당 1파운드의 수입은 숙련고용노동자나 소규모 상점주에게는 상당한 수입이었다. 책 가격에도 편차가 있었다. 부유한 상인들과 행반 계층을 위한 도서관에서 구입하는 화려한 2절판들은 권당 1기니 이상의 가격이었다. 반면 같은 내용, 같은 분량의 12절판 서적은 1-3실링정도였다. 가격이 세트당 6기니였던 포프의 Iliad는 독서대중이 구입하기는 어려운 책이었다. 곧 네덜란드판 12절판 해적판이 나오게 된 이유가 달리 있었을까.
같은 이유로 통상 값비싼 2절판으로 출간되는 프랑스의 로망스 문학은 대중들이 구입하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소설들은 중간 정도의 가격이었다. 소설들은 장정본은 2-3권 분량에 권당 3실링 가격을 하는 12절판으로, 페어퍼본으로는 2실링 3펜스의 가격으로 출판되었다(45). [톰 존스]는 여섯권 분량으로 출간되었는데, 여전히 비싼 가격으로 노동자의 일주일 급여와 맘먹는 가격이었다. 따라서 소설의 독자는 광범위한 사회적 계층으로부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소설 한권의 가격은 한 가족의 일 이주 생활비가 될 수 있었다. 18세기의 소설은 기존의 다른 어떤 문학과 학문 형식보다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계층을 독서대중에 추가시키기에 근접한 것이었다.
보다 값싼 인쇄물들이 경제적 여유가 뒷받침되지 않는 계층들을 위해 존재했다. Ballads들은 1페니면 구할 수 있었고, 축약된 로망스와 새로운 범죄 이야기들은 6페니 이하의 가격으로 사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페니였던 신문이 있었다. 신문은 1712년 세금이 부가되면서 2펜스에서 3.5펜스의 가격으로 구할 수 있었다. 많은 신문들이 단편소설이나 소설들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로빈슨 크루소]도 the Original London Post에 연재되었다. 하지만 발생기 소설의 독서대중을 살펴보는 데 이 같은 하층 계급의 빈곤한 독자들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당시 소설가들은 이 같은 출판 형식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요인들이 특히 소설을 읽는 독서대중의 확대를 지연시켰다는 것은 공립 순회도서관의 급속한 성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순회도서관들은 1725년부터 존재해 왔지만 런던에 최초의 순회도서관이 등장한 1740년 이후 급속히 확대되기 시작하여 10년만에 적어도 7개소가 더 생겼다. 이용비용은 년간 0.5~1기니 사이였으며 도서대여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대여비용은 권당 1페니 혹은 통상 3권짜리 소설의 경우 3펜스였다. 순회도서관은 모든 유형의 문학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었지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역시 소설이었다. 이런 순회도서관이 이 시기 동안 독서 대중의 두드러진 증가 현상을 주도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문학 구멍가게the slop-shop in literature”가 학생들, 어린 농부들, 조금 형편이 나은 하녀들, 푸주한, 제빵사 등등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1740경까지 비싼 책값으로 인해 독서대중의 경계선은 문학영역을 업으로 삼은 이들이 보유했다면 이후 이 경계영역은 잠재적 독자들, 주로 여성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 여가의 확산도 독서대중의 증가에 기여했다. 여성독자들이 증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47). 귀족계급과 향반계층들이 점차 야만적이 되어가는 반면 문학은 점차로 여성들이 추구하는 영역이 되어 갔다. Addison은 이러한 경향의 대변자였다. “학문이 여성들에게 적합한 영역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그들은 더 많은 여가시간을 갖고 앉아있는 시간이 많다....게다가 남성들은 점점 더 그들에게는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다.”
중상류층의 여성들이 사냥과 사업으로 대표되는 남편들의 사업에서 점점 더 소외되는 시간만큼 여가는 늘었으며 그 시간은 고스란히 다양한 독서에 투여되었다. 이보다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많은 여성들 또한 더 많은 여가시간을 누리게 된 점에 있어서는 동일했다. 1694년경에 이르면 일반적 가정에서도 남편들은 아내들을 일하도록 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졌으며, 영국을 방문한 한 이방인은 “상인의 아내들이 대부분 게으르고, 바느질을 하는 이도 거의 없다”고 쓸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은 경제적 변화가 가져온 여성들의 여가시간의 변화를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었던 실 잣고, 옷 만들고, 빵 굽고 하던 가사일들이 대부분 제조업의 형태로 제공되어 상점에서 구입가능하게 됨으로써 여성들의 가사 노동시간은 현저하게 줄어든 것이다. 물론 모든 시골지역에까지 이러한 현상이 일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18세기 초반에 여성들의 여가시간이 현저하게 증가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록 그것이 런던과 그 주변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발생한 것이긴해도 말이다(49).
물론 와트는 여가시간이 그대로 독서에 활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게다가 연극, 오페라, 가면극 등의 오락거리들이 여전히 런던에는 존재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독서시간은 분명히 존재했다(50). 그러나 가난한 이들에게 독서의 기회란 여전히 많지 않았다. 그들의 하루는 대부분 노동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런던에서조차도 노동자들은 아침 6시부터 저녁 8-9까지 일을 했다. 일반적으로 휴일은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심강림축일, 미카엘 축제, 이 4일에다 공채처형일이 있는 8일뿐이었다. 일요일을 쉴 수 있는 좋은 조건의 노동자들은 주중의 일에서 벗어난 휴일은 독서보다는 사교적인 일을 원했다. 18세기 노동자들의 휴일한 여가 활동은 음주라고 인식되기도 했을 정도이다. 독서를 좋아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사생활 공간이 부족하다는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런던의 경우 주거공간은 너무 붐비고 조명은 부족했으며 17세기말의 유리창세는 유리창의 수를 최소화했다. 밤에는 불켜기가 문제였다. 양초는 사치품으로 간주되었다. 리차드슨은 도제시절 스스로 초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대견해 하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그럴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51).
이런 상황 속에서 가난하지만 상대적으로 독서할 기회와 기산을 지닌 대규모의 중요한 집단이 존재했다. 도제들과 가정의 하인들, 특히 하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독서할 기회와 충분한 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일하는 집에는 통상 책이 비치되어 있었으며, 없을 경우 자신들의 급여로 살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일을 해주는 상류계급 주체들의 (책을 읽는) 본에 전염되어 있었다. 이들 집단의 문학적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야말로 18세기 최대 규모의 단일 직업군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파멜라야말로 이들의 강력한 문화적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독서대중의 상당한 증대에도 불구하고 도제와 하인들을 제외하면 상인과 상점주인 아래로는 독서대중이 내려가지 않았다. 더 늘어난 독서대중은 점점 더 부유해지고 수적으로도 늘어난 상업과 제조업과 관련된 사회계급이었다. 18세기 문학이 계속 확장되는 독자층에 호소했다는 사실은 충분한 교육과 여가를 통해 고전과 현대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독자들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감소시켰다. 이는 동시에 보다 손쉬운 형식의 문학을 갈망하는 독자들의 상대적 중요성을 증대시켰다. 사람들은 언제나 즐거움과 휴식을 위해서 독서를 해왔지만 18세기에는 다른 어떤 기능보다도 훨씬 우선해서 오직 즐거움과 휴식을 위해 독서를 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53). 스틸(Steel)은 이런 경향의 만연을 비판하는 글을 실을 정도였다. ‘자신이 하고있는 일에 대한 순간적 만족감’이야말로 18세기의 새로운 두 문학 형식인 소설과 신문을 읽는 방식에 대한 적절한 묘사라 할 수 있다. 이제 새로운 문학적 세력의 균형은 전통적인 비판적 기준에 따르는 것을 버리고 손쉬운 오락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디포와 리차드슨의 성공을 허락해준 본질적인 요인은 이러한 변화임은 확실하다. 상업계급의 견해는 경제적 개인주의와 다소 세속화된 청교도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디포의 소설에 드러난 것이 바로 이런 면이었다. 공적인 삶에서 점점 더 부각된 여성적 요소의 중요성은 리차드슨의 소설에 의해 표현되었다.
II.
18세기까지도 최대 규모의 출판된 서적을 범주별로 보자면 종교서적들이었으며 대중들에게 인기도 있었고 판매량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18세기의 독자들이 점점 더 세속적 취향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논박하지는 못한다. 우선, 종교서적의 출판부수는 인구증가와 또 다른 독서물의 판매량과 비교해 볼 때 그 비율이 증가한 것 같지는 않았다. 종교분야의 독서대중은 세속문학의 대중들과는 별개의 존재들이었다. 다른 한편, 특히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많은 독자들은 종교적 독서로 시작해서 보다 광범위한 문학적 관심 분야로 옮아갔다. 디포와 리차드슨이 이런 경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선조들은 17세기에 경건한 독서에 몰두했다. 하지만 이들은 종교적 관심과 세속적 관심을 결합했다(55). 디포는 소설과 종교적 경건성을 지닌 글을 쓰기도 했지만 리차드슨은 자신의 윤리와 종교적 목표를 당시에 유행하는 전적으로 세속적인 분야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지식인과 교육수준이 좀 더 낮은 이들, 순문학과 종교적 교훈 사이의 타협은 18세기 문학의 가장 중요한 경향이었는데, 이러한 경향이 최초로 드러난 것은 1709년의 Tatler와 1711년의 Spectator의 창간이라는 유명한 문학적 혁신을 통해서였다. 이 두 정기간행물의 ‘유용한 지식 만들기 프로젝트’는 지식인들뿐 아니라 독서대중들에게도 성공적인 효과를 거두어서 세속적 문학에 눈살을 찌푸리던 이들로부터도 존경받았다. 또한 이 잡지들은 교육받지 못한 시골의 문학 지망생들이 접한 최초의 세속적 문학이기도 했다. 이들은 소설이 제시하는 취향을 형성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린Green은 “Spectator야말로 대중들에 대해 대중들에게 하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특수한 스타일의 문학, 즉 우리 시대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대중문학의 대변자이다”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소설로의 변환은 직접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뒤이은 언론인들이 동일한 흥미로운 인물군들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언론의 두 번째 혁신이라 할 Gentleman's Magazine이 1731년 창간되고 나서야 이전의 흐름들은 이어져 갈 수 있었다.
본질적으로 월간지였던 이 잡지는 정치적 저널리즘과 ‘다양한 주간 에세이에 대한 공정한 시각’에서 ‘시선’에 이르기까지 보다 다양해진 문학의 양식을 결합했다. 이것뿐만 아니라 이 잡지는 요리법에서 수수께끼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것들을 제공했다. 이 잡지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741년 이 잡지의 창간자인 Edward Cave는 ‘영어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이 잡지는 읽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 잡지의 두 가지 특징인 가정생활에 대한 실용적 정보와 오락과 개선은 나중에 소설 속에서 구현되었다. 이전의 두 잡지에서 GM으로 옮겨온 것은 전통적 문학적 기준에서 자유로운, 따라서 기존의 비평적 정전들에 의해 신성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한 문학 형식의 잠재적 대중 독서대중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잡지는 그 자체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오락물’이었다. 이전의 두 잡지들과 이 잡지의 시도와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보도 주고 개선도 가져오면서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손쉬운 읽을거리는 아직 적절한 허구적 형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57).
III
GM은 독서대중의 형성에 또 다른 중요한 변화를 상징한다. Spectator는 당대 최고의 작가들에 의해 생산되었으며 일종의 문학적 박애주의를 통해 문학적 중간계층의 취향에 영합했다. 하지만 GM은 아주 다른 사회적 지향점을 보여주었다. 이 잡지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언론인과 서적판매상이 운영했으며, 책을 구입해서 운영에 도움을 주는 이들은 주로 삼류작가와 아마츄어들이었다. 이러한 변화야말로 리차드슨으로 대표되는 발전, 즉 인쇄물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일에 관여하는 이들이 문학의 장에 등장하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된 가장 주된 이유는 명확하다. 궁정과 귀족들에 의한 문학적 후견인의 감소가 저자와 독자들 사이에 진공상태를 만들어 버렸는데 이 빈 공간을 문학시장의 중간자, 즉 출판업자 혹은 서적판매상들이 채웠다. 이들은 저자와 인쇄자, 그리고 이 둘 모두와 대중들 사이에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8세기가 시작되면서 특히 런던의 서적판매상들은 이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재정적 지위, 사회적 지명도, 그리고 문학적 중요성을 를 획득했다. 몇몇 인쇄업자들과 함께 그들은 의견, 신문, 잡지와 자신들의 상품에 대한 비평적 시각과 평론의 모든 주요 통로를 장악했다(58). 실질적인 의견 창구의 독점이 작가들에 대한 독점까지도 가져왔다. 작가와 독자들에게 미치는 서적판매상들의 권한이 큰 것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한 권한이 소설의 발생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인가.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는 이들의 새로운 영향에 대해 염려하면서 문학을 단순한 시장 상품으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글쓰기는...이제 영국 상업의 몹시 중요한 한 분야가 되고 있다. 서적판매상들은 제작과 고용의 주인들이다. 몇몇 작가들과 저자들, 모사가들, 하류작가들을 포함한 펜과 잉크로 먹고사는 모든 이들은 명령하는 주인에게 고용된 노동자들이다”(디포). 골드 스미스, 필딩 또한 이러한 경향에 대해 한탄한 바 있다(59).
Grub Street는 치명적 혁명의 또 다른 이름이었으며 동시에 하나의 신화였다. 서적판매상들은 이전의 어느 후견인보다 더 넉넉하게 더 많은 작가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러는 가운데 포프와 동료들은 문학이 자유방임 경제원칙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했다. 소설은 서적판매상들이 대중들에게 선동한 타락한 유형의 글쓰기의 전형적 예로 간주되었다. 필딩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James Ralph는 “서적 제작이 서적판매상이 확실하게 돈을 벌 사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랄프의 주장은 리차드슨과 필딩의 성공에 이어 순회도서관의 확산 이후에 쓰인 글이다. 이전까지 서적판매상들의 관심은 주로 대규모의 정보를 제공하는 서적--체임버스의 [백과사전], 존슨의 [사전]과 [시인의 생애] 등--이나 과학적 역사적 저작의 편찬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서적판매상들이 소설의 발생에 직접적으로는 거의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후견인의 통제로부터 문학을 분리시켜 시장법칙의 통제 하에 놓이게 한 그들의 간접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흔적들은 존재한다(61). 이 두 요소들은 새로운 형식의 특징적인 기교적 혁신--풍성한 개별적 묘사와 설명--의 하나가 발전하는 데 기여했으며, 디포와 리차드슨이 고전적 비평 전통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일단 작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더 이상 후견인과 문학적 엘리트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게 되자 다른 고려사항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나는 아주 명확하게 심지어는 동어반복적으로 글을 써서 교육을 덜 받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에게 보상을 주는 이는 후견인이 아니라 서적판매상이기 때문에 속도와 양적 풍성함이 최상의 경제적 미덕이 된 것이다. 이 같은 경제적 요소가 문학생산에 적용된 가장 명확한 결과는 운문보다는 산문을 선호하게 된 점이다(62). 이제 Grub Street의 거주자들은 잡지에 게재할 시를 쓰는 것을 포기하고 소설생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로망스 쓰기가 그들이 추구해야할 유일한 사업 분야였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손쉬운 일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디포 자신의 경력은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초기에 시적 풍자라는 당대의 방식을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산문만 쓰기 시작했다. 시적인 기법이 많은 시간을 요하는 반면 산문은 손쉽고 풍성한 글쓰기 방식이자 자신의 노고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제공해 주었다. 리차드슨에게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63).
디포와 리차드슨은 단순히 산문적 문체의 문제에서만 고전적 문학 범주와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삶에 대한 비전, 그것을 구현하는 기교 등에서도 이전과 단절했다. 그들은 문학의 사회적 맥락 내의 현저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 변화는 기존의 비평적 기준들이 지닌 특권들을 점차 약화시켰다. 디포와 리차드슨의 사고와 훈련은 이전의 문학적 권위자들에게 호소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그들의 문학적 혁신의 본질적 조건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디포와 리차드슨은 그 이전의 어떤 작가들보다도 ‘자연대상’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데 자유로웠다. 그때까지도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문학적 문화는 궁정을 향하고 있었던 반면, 영국에서는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이 영국에서 이전의 허구적 작품의 주제와 방식과 보다 일찍 보다 완전하게 단절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서적판매상들에 의한 후견인들의 경질, 디포와 리차드슨의 과거로부터의 독립 등은 궁극적으로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중요한 그 시대 삶의 특징, 즉 중산계층 전체의 대단한 권력과 자기 확신의 반영일 뿐이다. 인쇄, 판매, 저널리즘과의 다양한 접촉들 통해 디포와 리차드슨은 독서대중의 새로운 관심과 능력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들이 그러한 대중들의 새로운 핵심을 대변하는 이들이라는 점이다. 중산계층의 런던 상인들인 그들은 자신들이 쓰는 것이 많은 군중들에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 자신들의 형식과 내용의 기준을 참고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변화한 독서대중의 구성과 소설의 발생에 대한 서적판매상들의 새로운 지배의 가장 중요한 효과일 것이다. 디포와 리차드슨은 독자들의 새로운 요구에 반응하기보다는 그들의 욕구를 훨씬 더 자유롭게 내면으로부터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65).
Ch. 6. Private Experience and the Novel (197~235)
리차드슨의 소설은 여성독자들에게 특히 어필하기는 했지만 남성독자들에게도 못지않게 관심을 끌었다. 와트는 이 장에서 그 이유를 살펴봄으로써 소설에 투사된 사적 경험을 살펴보고자 한다.
리차드슨의 소설은 당대의 ‘감상주의’sentimentalism을 반영하고 있다. 18세기의 감상주의는 박애적 행위나 관대한 눈물의 묘사로 대표되지만 리차드슨의 소설의 감상주의는 이런 측면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리차드슨의 감상주의의 특징은 표현되는 감정의 종류만이 아니라 그 표현의 진정성에서 두드러지는 측면이 있다(197). 리차드슨 또한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공감의 눈물’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는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방식을 그렇게 했다. 프랜시스 제프리의 언급은 리차드슨의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작가들은 필수적인 것이나 인상적인 요소들을 피하는 반면....리차드슨은 그의 인물들의 은밀한 사적 공간으로 독자들을 인도하여 그들 사이의 모든 말과 행동을 듣도록 해준다. 그것이 흥미있는 것이건 아니건, 우리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건 아니건 말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마치 군주나 역사서에 공감하듯이 다른 작가들의 인물에게는 공감하지만 리차드슨의 인물들에게는 친밀한 친구나 지인들에게 갖는 느낌을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는 리차드슨을 능가하는 작가는 없다.”
리차드슨이 그저 세부사항들을 많이 보여주기만 함으로써 이러한 효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서사 세세함의 규모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서사의 지향점인데, 그 지향점은 인물들의 가정생활과 사적인 경험의 묘사를 향해 있다. 리차드슨이 소설의 전통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같은 서사적 관점의 재정향이라고 할 수 있다(198). 그가 디포와 차이를 보이는 점도 바로 이 점이다. “디포의 세세한 묘사는 사물을 향해 있다면 리차드슨의 그것은 사람들과 감정을 향해 있다”(Mrs. Barbauld). 리차드슨의 [파멜라]가 최초의 소설이라 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George Saintbury가 언급한 것처럼 그의 인물들만큼 일상의 사고와 감정을 독자들인 우리가 친숙하게 알 수 있는 인물들이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차드슨의 소설에 이 같은 주관적이고 내적인 방향성을 부여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은 서간체라는 서사의 형식이었다. 편지는 그 자체로 고전문학적 관점으로부터의 의미심장한 벗어남을 의미한다. 행위보다는 감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서간체 형식이라는 리차드슨의 서사는 고전문학의 객관적, 사회적, 공적 지향성은 삶과 문학의 주관적, 개별적, 사적인 것을 지향하는 지난 2세기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199).
이러한 변화의 요소는 사실 기독교 일반의 내적, 사적, 자의식적 특징에서 이미 배태되어 있었으며, 그 경향은 청교도주의에서 특히 강력했다. 특히 17세기 철학을 통해 발생한 사고의 세속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중심적인 세계, 개인이 자신의 사회적 도덕적 가치를 책임지는 관점을 선호했는데, 소설은 이러한 영향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개인주의의 등장 또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공통의 전통적 관계들이 약화됨으로써 사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정신적 삶을 촉진시키고 이것은 다시 개인적 관계의 중요성을 중시했는데, 이 둘은 현대사회와 소설 모두의 특징이다. 개인주의는 리차드슨이 사적 경험을 강조하는 데 두 가지 측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내면적 의식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과정들에 관심을 지닌 독자들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도시적 삶의 방식을 생겨나게 한 경제적 사회적 발전이었다.
I.
어느 도시보다도 10배 이상 큰 규모의 도시였던 18세기의 런던은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당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곳이었다. 경제적 개인주의, 노동분할의 증대 등의 현상에서부터 모든 현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적 변화는 바로 그곳에서 발생했다. 독서대중 또한 이곳에 밀집해 있어서 1700~1760 사이에 영국 전체의 서적판매상의 절반 이상이 런던에 거주했다.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로 진행된 런던의 개발과 확장은 한편으로는 서부와 북부의 신흥경제 지역과 동부의 노동계층의 거주지역으로의 뚜렷한 분할 효과도 동시에 가져와서 Addison은 마치 관습과 삶의 방식, 관심이 다른 몇 개의 국가로 나뉜 듯한 인상마저 받았다고 고백할 정도였다(201-2). 이처럼 런던의 성장은 사회적 직업적 분할을 수반한 것이었으며 현대 도시화의 뚜렷한 심리적 특징들도 이미 당대에 등장하고 있었다(202).
이 같은 물리적 복합성과 엄청난 사회적 거리감은 도시화의 특징이었으며, 그 결과 도시 거주자들은 삶의 외적인 물질적 가치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물론 경제적 가치였으며 그 속에서 종교적 가치들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런던대화재 이후 런던의 재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은 세인트 폴 성당이 아니라 증권거래소였다(203). 이러한 환겨의 변화는 너무 광범위하고 다양해서 개인들의 이러한 변화의 일부만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었는데, 이 경험들이 소설에 가장 특징적인 두 가지 주제를 제공해 주었다. 하나는 미국과 프랑스의 리얼리즘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대도시에서 자신의 운명을 찾아나서는 개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연관된 것으로 졸라, 발작, 드레이저 등에서 볼 수 있는 환경에 대한 연구였다. 이 두 주제는 18세기 문학의 특징이기도 했기 때문에 소설이 언론과 팜플렛이 하던 일을 보충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디포와 리차드슨은 물론 필딩에게서도 이런 특징들은 낯선 것이 아니다. 대도시에서의 성공의 쟁취는 개인의 세속적 순례에 있어서 성배와 같은 싱징이 되었다.
런던 생활의 화려함과 비참함을 디포만큼 강렬하게 참여하여 본 참가도 없었다. 런던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런던의 모든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지만(204), 그의 소설들은 도시화의 긍정적 측면들도 많이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경쟁적이고 비도덕적인 대도시에서 운명을 찾아 분투해 나가는데, 이들을 따라가다보면 독자들은 런던 환경의 많은 모습들을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디포가 그려내는 런던이라는 대도시는 현대적 도시와는 다르다. 그의 런던은 수많은 다양성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여전히 적어도 열마간은 유사성을 보이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공동체이다. 그의 런던은 규모은 크지만 다소 지역적인 특성을 간직하는 장소이며, 디포와 그의 인물들은 그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이해받기도 하는 그 공간의 일부이다. 이것은 디포 자신이 런던이라는 도시의 환경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참여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자리잡은 어수선한 토대 위에서 그러한 삶의 방식과 하나가 되어 있던 주체였다.
리차드슨이 그리는 런던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의 작품은 완전한 공통체의 삶이 아니라 도시환경에 대한 깊은 개인적 불신과 심지어는 두려움까지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나는 도시와 그 속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다”고 말한다(205). 한 익명의 작가는 리차드슨의 주인공, 클라리사의 몰락의 원인을 전형적인 도시화의 결과로 보기도 할 정도이다. “Lovelace, mother Sinclair 같은 (악한) 인물들은 강력한 제국처럼 지나치게 성장하고 광범위한 상업이 지배하는 런던같은 대도시에나 존재한다. 모든 타락은 그와 같은 세상사의 필연적이고도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대도시의 삶을 바라보는 디포와 리차드슨의 차이는 18세기 중엽에 발생한 많은 변화에 따른 것이다. 이 시기에는 집의 번지가 상징을 대체하고 도시 성벽이 사라졌으며, 도로포장과 가로 밝히기, 물과 오수 등을 관리하는 중앙기구가 설치되었으며 경찰체제에 대한 변화도 발생했다(206). 하지만 둘의 결정적 차이는 이런 변화때문만은 아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세대였다. 디포는 1660년에 리차드슨은 1689년에 태어났다. 도시의 삶을 이들이 서로 다르게 묘사한 것은 그 둘이 물리적, 정신적으로 동떨어진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둘의 차이는 확실한 재현적 특성을 지닌다. 디포는 부분적으로는 작물과 가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시골사람이었지만 상점이나 회계사사무실 만큼이나 산에 말을 타고 오르내리는 것에 익숙했다. 디포가 시민의 영웅적 독립의 시대에 귀기울인 반면, 리차드슨은 다가올 중산계급 상인들을 힐끗 보여주었다.
런던은 리차드슨이 참여할 그 어떤 삶의 방식도 제공해 주지 않았다. 그는 런던의 상인들과 웨스트민스터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특성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자기가 속한 계급에 대한 디포의 확신에 찬 편애조차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리차드슨은 “우리들 사이엔 장애물이 존재하지”라고 썼다. 다른 한편, 리차드슨은 자신의 환경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군중을 견딜 수 없어서” 교회가는 것까지도 그만둘 정도였다(207).
리차드슨이 도시화의 덜 유익한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라면 필딩은 그와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두 작가의 삶과 소설의 차이는 영국 문명사에서 삶의 방식의 근본적인 갈라섬을 보여주는 예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속에서 승리하게 될 방식을 보여주는 이는 도시적인 리차드슨이었다. 나중에 로렌스D. H. Lawrence는 이러한 혁신의 도덕적 문학적 영향력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보여주게 된다. 그는 경제적 변화와 청교도주의가 결합하여 자연적 삶과 동료들과 맺는 조화로운 인간 인식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그로 인해 “고립 속의 실존이라고 하는 개인주의 감정과 인물들을 만들어냈다”고 보았다. 고대에 존재했던 이러한 조화는 18세기 중엽까지는 존재했던 것이다. 로렌스에 따르면, “디포와 필딩에게서는 이 조화를 느낄 수 있었으나 제인 오스틴에 이르러 이 조화는 사라졌다. 오스틴은 인물대신에 개성을 전형화했다.”
로렌스는 ‘개성’과 개인적 관계, ‘오직 사람들만의 세계’로부터 도피한 이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소설로부터도 도피한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현대적 도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소설과 현대도시는 자연이나 사회와의 보다 거대한 교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개인이 사적이고 은밀한 관계 속에 몰두하는 세계에 대한 그림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결별에 대한 예리한 인식을 제시하는 모든 경향들이 명백하게 두드러진 최초의 작가는 오스틴이 아니라 틀림없이 리차드슨이다(210).
도시화와 소설이 개인적 관계에 초점을 두는 것 사이에 연관이 있는 궁극적 이유는 도시 거주자들의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특징적인 경험도 한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특징적 경험이란 그는 수많은 사회집단에 속해있긴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그 모든 역할을 행하는 그를 알지 못하고 그 자신 또한 타인들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영속적이고 의존가능한 사회적 유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공동체에 대한 지배적인 인식이나 공통된 기준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감정적 안정과 이해에 대한 많은 필요가 발생한다.
디포에게서는 이러한 욕구의 암시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몰 플렌더스가 만나는 인물들은 일시적이며 피상적인 관계일 뿐이다. 그런 속에서 몰 플렌더스가 유일하게 추구하는 안정은 경제적 안정이다. 당시 런던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진정한 친구를 찾아 사적 접촉은 금전적이며, 덧없으며 믿음도 없는 무정부적 환경 속에서 런던과 웨스트민스터 전역을 주의 깊게 여행하는 그런 환경이었다(210).
리차드슨이 이러한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이와 매우 유사해 보이곤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대책이 존재한다. 도시화는 나름의 교정, 즉 외곽지역을 제공한다. 교외는 붐비는 거리로부터 벗어나 있는데, 그 상이한 삶의 방식이 디포의 소설에서 묘사된 다양하면서도 인과적 관계와 리차드슨이 제시해 보여준, 수적으로는 작지만 보다 강력한 내향적 소설 사이의 차이를 상징한다. 교외 지역은 새로운 도시적 유형에서 계급간 차별의 가장 의미심장한 양상이다(211). 이 지역에서는 부자도 빈자도 모두 배제된 채 중산계급의 양식이 발전할 수 있었다. 교외 지역의 내밀함은 본질적으로 여성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성의 정숙함을 대단히 상처입기 쉬워서 방어적 은둔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는 점증하는 경향을 반영하기 때문이다(212).
중세에 거의 모든 가정의 삶은 거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점차 사적인 공간이 생기기 시작해 18세기에는 가정에서의 사생활의 최종적 단계가 생겨났다. 개인의 독자적 침실 등 내밀한 공간에 대한 강조가 더욱 많아졌고 이로 인해 이제 모든 이들은 원하는 곳에서 홀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까지만해도 보기 드물었던 문열쇠는 고상한 이들이 강조하던 근대화 과정의 품목 가운데 하나였다.
이 당시 주택의 또 다른 특징적 기능은 침실에 딸린 옷장, 혹은 자그마한 사정 장소였다. 이곳에는 통상 책과 책상과 잉크스텐드가 놓여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울프가 말했던 여성해방의 필수항목이었던 ‘자기만의 방’의 초기 형식이었다. 동시에 이곳은 여성들의 자유의 영역이었다. 리차드슨은 바로 이 같은 여성적 예민함의 새로운 온실을 전파하는 작가였다. 그의 여주인공은 거리나 대로 혹은 몰 플랜더스나 필딩의 여성들의 무대였던 공적 유흥공간의 삶을 공유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213).
이러한 공간을 통한 익숙한 편지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리차드슨의 여주인공들은 18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유행을 반영하고 있다. 그 유행의 토대는 중산계층 여성의 여가와 문자활용의 엄청난 확장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체신설비의 대단한 확장이라는 물리적 도움도 받게 되었다. 싼 비용의 우체국은 1680년 런던에 처음 등장했으나 디포에 따르면 그 다음 세기의 20년쯤 무렵에 우편시설의 값싸고 빠르면서도 뛰어난 효율은 유럽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그리하여 사회적인 계급이 다른 이들끼리도 일상적인 일들에 관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일상적이 일이 되었다(214).
하지만 1740년경 파멜라 같은 하녀가 정기적으로 부모들과 서신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파멜라의 능숙한 편지쓰는 솜씨는 파멜라가 그녀 자신이 처한 신분보다도 상층계급의 사람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드러난 것처럼 도시화와 사적 경험에 대한 리차드슨의 강조 사이의 주요 연관은 보다 명백해졌다. 리차드슨으로 하여금 도시의 삶을 거부하게 했던 바로 그 이유들이 그에게 친숙한 편지쓰기라는 형식을 발견하도록 해 주었다. 이 편지쓰기야말로 도시근교 지역이 상징하는 삶의 방식에 가장 적합한 사적 교감의 형식이었던 것이다. 오직 그와 같은 관계 속에서 리차드슨은 그로하여금 침묵하게 만들었던 금지를 피해갈 수 있었으며 인쇄소의 일꾼들과, 심지어는 가족들과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글을 쓸 때면 그는 언제라도 이 모든 도시적 삶의 금지들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그가 손에 펜을 들고 있지 않을 때 뿐이었다. 펜이야말로 사회로부터 멀어져 감정적 토로를 하고자 하는 자신의 가장 깊은 심리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는 물론 고독으로부터 도피해 이상적인 사적 관계로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Lovelace의 말처럼, “익숙한 편지쓰기야말로...서로 답하기cor-reposdence라는 말이 의미하는 그대로 마음으로부터 쓰는 것이다...편지에는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들어있었다.” [to be continued]
II.
편지의 단점--펜에 대한 끝없는 의지에 대한 불신, 편지쓰기 방식이 부가하는 반복과 장황함--또한 명확하다. 물론 편지의 가장 중요한 장점은 현존하는 작가의 내적 삶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물적 증거라는 점이다. 존슨 박사의 언급. “편지는...그의 마음의 거울이다. 그의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편지쓰기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가장없이 드러난다. 어떤 것도 뒤바뀌지도 왜곡되지도 않으며, 편지라는 요소들의 체계도 볼 수 있으며, 동기들 속에서 행위들도 발견할 수 있다.”
내적 삶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시간적 차원의 문제이다. 개인의 일상적 경험은 끝없는 사고, 감정, 감각의 흐름으로 구성되는데, 모든 문학형식은 그 현실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도 순간적인 거친 그물에 불과하며, 따라서 대부분 기억이 된다. 하지만 개인의 실제 현실을 구성하고 타인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매순간의 의식의 내용이다. 독자가 허구적 인물의 삶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런 의식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일상생활의 의식에 가장 근접한 기록은 내밀한 편지이며 리처드슨은 바로 그와 같은 ‘순간에 대한 글쓰기’ 기술이 지닌 장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모든 편지들은 그 편지를 쓰는 이들의 마음이 쓰고자 하는 주제에 완전히 몰두해 있을 때 쓰인다...따라서 편지는 비판적 상황뿐 아니라 즉각적인 묘사와 반영으로 충만하다.”--<클라리사>의 서문(217). 그는 행동에 대한 현재적 기록이 통해 디포와 마리부Marivaus가 서사기법으로 이용했던 자서전적인 기억보다 더 큰 장점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리처드슨의 방법을 통해 “사건과 (그 사건에) 참여하는 이들의 감정과 대화의 세세한 개별 사항들은 바로 그 순간 지배적이라 간주되는 열정이 보여주는 온기와 영혼을 드러낸다”--<클라리사>의 후기. 반면, “모든 로망스, 특히 마리부의 로망스는 전체적으로 비개연적이다. 왜냐하면 로망스는 일련의 사건이 파국에 의해 종결된 다음에 역사가 기록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망스는 모든 사례들과 개연성을 초월하는 기억의 힘을 함의하는 것이다.”
(위 주장에서 제기된) 비개연성에 대한 주장은 꼭 정당한 것은 아니다. 편지쓰기 방식 또한 그런 비난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로망스나 편지는 결국 문학적 관습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편지쓰기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작가는 사건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대한 주인공의 주관적인 반응에 대한 자발적 묘사라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생산하도록 추동되며 따라서 (그런 방식을 사용한 작가인) 리처드슨이 디포보다 더 완전하게 선택적이며 요약하는 경향의 고전적인 글쓰기 방식과 결별하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건이 일어난 한참 후에 사건들을 기록하게 된다면 기억은 의미있는 행동에만 집중되며 일시적이고 실패한 것은 무엇이건 망각하면서 다소 유사한 기능만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파멜라>의 ‘편집자 서문’에서 자신이 “모든 환경에 대한 즉각적인 인상”이라 언급한 것을 성취하고자 한 리처드슨의 시도는 상당부분 명확하게 사소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그를 인도했다(218). 사소한 일상에 대한 파멜라의 반복과 혼잣말은 명백한 게임이다. 하지만 파멜라의 수다가 우리들을 파멜라의 내면 의식에 상당히 근접하게 데려다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연속된 생각은 때로 일시적이고 투명해져서 그 어떤 것도 억제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들로 하여금 묘사된 사건과 감정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우리는 실제 삶의 일상적 흐름 속에서 의미를 포착하려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묘사된) 풍부한 세부사항들로부터 인물과 행동에 대한 중요한 항목들을 집어내어야만 한다. 이러한 종류의 참여는 소설이 전형적으로 유발시키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문학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마음속에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삶의 원재료들과 접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이전의 편지쓰기 전통이 권장하던 방식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같은 편지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 릴리Lily의 <Euphues> 경우, 작가인 릴리는 당시의 문학적 전통과 편지쓰기 전통을 고수한 채 새로운 수사법의 모델을 생산하는 데 초점을 두었을 뿐 인물들과 사건들은 부차적인 중요성밖에는 지니지 못했다. 하지만 <파멜라>가 나올 시점의 독자들 대부분은 궁중의 수사학의 전통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편지를 자신들의 일상의 생각과 행동을 지인들과 나누는 목적으로만 이용할 뿐이었다. 친숙한 편지쓰기에 대한 애호는 리처드슨에게 사적인 경험의 어조에 이미 조율된 마이크를 제공해 준 것이었다.
리처드슨이 본질적으로 여성적이며 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아마추어적인 편지쓰기 전통을 활용했다는 사실은 전통적인 산문적 관습decorum과 단절하고 자신의 서사가 관심을 가진 정신적 과정을 구체화하는 데 적절한 문체를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자신의 문학적 목표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고 세련되어 있었다(219).
다른 한편, 리처드슨과 덜 교육받은 그의 여성 독자들 모두에게 익숙한 편지는 보다 단순하고 덜 의식적이었다. 만사는 편지를 쓰는 그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을 표현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이것은 리처드슨의 소설뿐 아니라 실제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편지에 나타나는 오거스턴 시대의 산문과의 단절의 경향은 리처드슨이 충동과 금지의 내적 드라마를 기술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본질적 조건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리처드슨의 언어 사용은 등장인물들이 처한 조건 속에서 쓸법한 그런 내용을 생산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리처드슨이 대중들의 언어와 구절들을 사용한 것을 통해 이런 점이 드러난다. <파멜라>에서의 ‘살찐 얼굴fat-face’ ‘깃털 하나만으로도 나를 넘어뜨릴 수 있었을텐데’와 같은 구절들이 그런 것인데, 이는 희극이나 풍자극에서 사용될 만큼 우아하지도 신랄하지도 않고 그저 그 책의 도덕적 사회적 환경을 암시하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리처드슨의 가장 특징적인 언어혁명은 어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목적은 심리적 과정을 보다 정확하게 기술하는 문학적 장치를 창안하려는 것이었다(220). 한 익명의 논평가는 리처드슨이 “후대의 번역자들의 공들인 노력을 통해 사전 속에나 담기게 될지도 모를 너무 많은 신조어와 구절들을, 예를 들어 Grandison의 ‘곰곰이 생각하며meditatingly’, Uncle Selby의 ‘꼼꼼함scrupulosities’같은, 사용했음”에 대해 불평했다. 어쨌건 이 모두는 리처드슨의 특징적인 문학적 지향점을 보여준다. ‘곰곰이 생각하며meditatingly’라는 말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톤을 정확하게 묘사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꼼꼼함scrupulosities’은 인물의 내적 세계를 지배하는 크고 작은 제약들을 언급하는 유용한 지름길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체스터필든Lord Chesterfield는 리처드슨이 언어학적 관습과 단절했다는 것과 그의 시선이 새로운 문학적 대상에 머물렀다는 사실 사이의 연관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리처드슨의 무지한 ‘잡담small talk’과 ‘내면을 그려내고 흥미롭게 만드는 놀라운 지식과 기술을 연관시키면서 리처드슨이 그 사소한 비밀스런 움직임을 위한 표현들을 주조해 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존경할만한 일임을 인정했다(221).
결국 편지형식은 리처드슨에게 마음에 이르는 지름길을 제공해 주었으며 마음 속에서 그가 발견해 낸 것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독자들은 리처드슨의 소설 속에서 자신들의 내적 감정의 완전하고도 동일한 정식기록engrossment과 일상적 삶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친숙하게 만족스러운 사적 관계들이 진동하는 상상의 세계로의 환영할만한 퇴각을 발견했던 것이다. 작가와 독자 모두는 <파멜라>라는 작품의 서사 양식의 형식적 토대의 발전으로 향한 경향과 관심들을 유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III
무대였거나 구술 서사였다면 친숙하고도 사적인 편지 형식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인쇄문학만이 이러한 유형의 문학적 효과를 위한 유일한 매체였다. 인쇄문학은 또한 현대 도시문화의 유일하게 가능한 의사소통 형식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적정한 도시의 규모로 전체 시민이 한자리에서 자신들의 현안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정도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보다 큰 규모가 되면 구술적 전통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고 글쓰기가 의사소통의 주요 수단이 된다. 이후 인쇄의 발명과 더불어 Lewis Mumford가 ‘종이라는 유사 환경the pseudo-environment of paper’--이를 통해 가시적이고 현실적인 것은...종이로 전달되는 것뿐이다--이라 칭한 전형적인 현대도시화 기능이 등장하게 된다.
새로운 매체의 중요성을 분석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문학적 형식들이 원래 구술적이었고 이러한 사실이 인쇄가 등장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시대에도 여전히 시와 산문은 모두 인간의 목소리로 공연된다는 관점 하에 지어졌다. 문학이 궁극적으로 인쇄되어야 된다는 것은 구술적 양식에 익숙해 있던 후원자의 취향을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는 점에 비교해보면 사소한 문제였다. 전적으로 인쇄에 기반한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가 등장하게 된 것은 언론이 등장하고 나서였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인쇄매체와 결합한 유일한 장르이다. 따라서 최초의 소설가가 인쇄업자였어야 했다는 사실은 적절하다.
“리처드슨 글의 인쇄형식은 실제 사실에 충실하려는 그의 열정을 나타낸다. 그 어떤 영국 소설가도...실제 대화의 억양과 리듬을 위한 구두점들의 문학적 가능성들을 그보다 더 잘 이해하지는 못했다”(F. H. Wilcox). 리처드슨이 불완전한 문장을 표시하기 위해 이탤릭체, 대문자, 대쉬 등을 자유롭게 사용한 것은 틀림없이 현실에 대한 문학적 기술로서의 인상을 심어주는 데 기여했다.
문학적 소통양식으로서 인쇄는 그 자체의 완전한 몰개성성으로부터 야기되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특성들은 인쇄의 권위와 환상이라 불리면서 소설가에게 서사적 접근의 엄청난 유연성을 부여해준다. 그 특성들이 소설가에게 아무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공적 목소리에서 사적인 목소리로, 증권거래소의 현실에서 백일몽의 현실로 음조를 바꾸도록 해주기 때문이다(223).
인쇄의 권위, 즉 인쇄된 모든 것은 진실이다라는 인상을 주는 권위는 아주 일찍 형성되었다. 이전의 많은 전사와 마찬가지로 디포 또한 이러한 인쇄의 권위를 활용한 작가이다. 그의 이야기들은 순수하게 몰개성적이고 역사적인 서술--언론과 르포의 방법이기도 한--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몰개성적인채 하는 것이야말로 신문의 정수이다.
인쇄의 몰개성적 권위는 독자의 주관적 삶에 대한 완전한 침해를 확증하게 됨으로써 보충되었다. 기계적으로 생산되어 동일한 편지들은 그 어떤 원고보다도 몰개성적이지만 동시에 언제라도 훨씬 더 자동적으로 읽힐 수도 있다. 우리 눈앞에서 인쇄기를 더 이상 인식하지 않게 됨으로써 우리는 인쇄된 소설이 묘사하는 환상의 세계에 완전히 굴복한다. 독서할 때 주로 홀로 있게 된다는 점, 책은 잠깐 동안이긴 하지만 우리의 사적인 삶의 확장이 된다는 점, 그리고 일상적인 삶에서는 그 누구도 큰 소리로 떠들어대지 않는 친숙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 등등에 의해 이런 현상은 더욱 강화된다(225).
소설 양식의 사적인 특성은 <파멜라>와 <클라리사>의 작가와 독자들 모두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리처드슨이 심리적인 이유로 스스로를 감추는 편집자로서의 특성을 지닌 작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자기 스스로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은 개연성 있는 이야기이다. 반면, 독자들로서는 독자 자신들 집단의 반응이 (그 집단을 구성하는 동일한 개인들이) 혼자서 반응할 때와는 다르다는 것은 흔한 이야기이다. 리처드슨은 바로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처드슨이 소설의 수행 양식에 의존한 가장 큰 이유는 가장 사적인 경험의 양상, 즉 성적 삶의 양상에 대한 관심이었다. 적어도 서유럽의 무대는 성적 습관에 대한 묘사에서 크게 나아진 바 없었던 반면, 리처드슨은 다른 어디에서도 청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을 자신의 소설에서 제시할 수 있었다. (<클라리사>가 적절한 예가 된다. 이 소설에서 리처드슨의 몰개성적이고 익명적인 역할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비밀스런 환타지를 신비로운 옆방에 투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인쇄의 사적 특성과 익명성은 독자를 열쇠구멍 뒤에 데려다 주었다. 거기에서 독자는 들키지 않은 채 엿보면서 겁간의 준비과정과 시도, 그리고 마침내 성공하게 되는 것을 목격한다. 하지만 독자도 저자도 그 어떤 예법decorum도 위반하지는 않았다.)
인쇄는 공적 태도에 대한 검열에 무대보다는 덜 민감하면서 동시에 사적인 감정들과 환타지들을 전달하는 데 더 잘 어울리는 문학 매체를 제공해 주었다. 그 결과 가운데 하나는 소설의 이후 발전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리처드슨 이후 많은 작가, 출판인, 순회도서관 사서들이 벡일몽의 기회를 제공하는 소설의 대량생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226). “순회도서관에 헌신하는 이들과는 달리 나는 그들의 시간보내기 혹은 시간축내기를 독서라는 이름으로 경하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그것은 일종의 구걸하는 듯한 백일몽이라 부르겠다. 그 꿈을 꾸는 동안 꿈꾸는 이의 정신은 오직 게으름과 역겨운 감수성만으로 장식될 뿐이다.
하지만 리처드슨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비록 리처드슨의 ‘인생에 대한 열쇠구멍적 시각’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사적인 경험들을 문학적으로 탐구하는 새로운 영역을 열어주는 기반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 용어 자체는 그저 내적인 삶에 대한 또 다른 헌신적 탐구자였던 헨리 제임스가 작가의 객관성과 초연함의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표했던 바로 그 비유에 대한 비하적 용어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에게 소설이라는 저택에서 소설가의 역할은 열쇠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적어도 ‘창가의 감시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227).
IV
다양한 사회적 기술적 발전이 결합하여 리처드슨으로 하여금 인물들의 내적 삶과 개인적 관계들의 복잡성을 재현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독자와 인물들 사이의 보다 심오하고도 불균질한 동일시를 초래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독자들은 행동과 상황이 아니라 그 속의 행위자들과 동일시하며, 이전 그 어느 때도 리처드슨이 파멜라와 클라리사의 편지를 통해 보여준 의식의 흐름에 의해 제시된 만큼 등장인물들의 내적 삶과 동일시할 기회를 가진 적이 없다. (리처드슨의 소설이 당대에 수용되던 것을 통해 이러한 점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물들과의 동일시를 경험하는 사례들의 예시. 심지어 프랑스에서조차 리처드슨의 인물들은 완전히 현실적인 존재들로 인식되었다.)
어느 정도 동일시는 모든 문학의 필연적 요소이기는 하다. 인간은 역할을 행하는 동물인 것도 사실이다(228).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도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도 다른 많은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동일시가 발생하는 정도를 제한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공적 연극공연장이라는 환경, 고귀한 주인공, 그 운명의 예외적인 공포 등은 모든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삶이 아니라 예술일 뿐임을 상기시킨다. 예술은 일상의 경험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소설은 달랐다. 소설은 동일시를 가로막는 요소들을 선천적으로 제거하고 있었다. 독자들의 의식에 미치는 소설의 절대적인 힘이 소설 양식의 독특한 승리와 타락을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다른 한편, 위대한 소설가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개성과 개인적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소설이 보여주는 탁월한 섬세함의 능력이다. 로렌스D. H. Lawrence에게 소설이 중요한 이유는, 소설이 우리의 공감하는 의식의 흐름이 우리를 새로운 공간으로 인도하고 또 알려주기도 한다는 것이며...우리 삶의 가장 비밀스런 부분들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편, 다양한 성적 경험과 사춘기 소망 충족의 대중적 전달자로서 소설의 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의식에 미치는 그 영향력이다.
리처드슨은 이 두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 시도를 했기 때문에 소설의 전통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발견들에서는 아이러니가 풍부하게 사용되었다(229). 특히 리처드슨의 초기 소설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필딩은 <파멜라>가 인기 있었던 이유는 대리적 성적 충동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필딩의 조소는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파멜라>의 어떤 부분들은 <데카메론> 보다 더 암시적이기도 하다. 리처드슨과 당대의 사회에서 성에 대해 보이던 훨씬 더 광범위한 은밀함이 한 이유이다. <데카메론>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성적 감정들을 인정한다. 하지만 리처드슨의 세계는 달랐다. 당시의 성적 삶의 은밀함은 Mr. B가 행한 모든 행동이 독자들의 충격을 가져오게 했다.
또다른 이유는 리처드슨의 묘사의 외형적 체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로렌스는 이를 두고 리처드슨이 ‘여성적 순결과 의복 속의 열정’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바 있다(230).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리처드슨의 에로틱한 감각들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보다 그토록 암시적으로 제시된 가장 주된 이유는 그와 연관된 행위자들의 감정들이 그만큼 더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데카메론>의 인물들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쾌한 환경을 재현하기 위한 장치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 리처드슨의 인물들을 우리는 안다. 리처드슨이 각각의 사건들에 대한 그 인물들의 반응을 남김없이 철저하게 다룸으로써 우리는 모든 황홀한 경과에 참여하면서 그 사건을 파멜라의 흥분된 감수성 속에서 반영된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파멜라>에 대한 주된 반대는 그 작품이 낡은 현혹인 로망스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이다. 물론 <파멜라>는 낡은 신데렐라 주제의 현대적 변이형이다(231). 독자들은 스스로를 여주인공의 위치에 투사함으로써 실제 세계의 몰개성과 따분함을 흥분과 존경과 사랑을 주는 유쾌한 환경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로망스의 매력이 바로 그런 것이며 리처드슨의 소설은 어느 곳에서건 그런 로망스의 흔적을 두르고 있었다. Sidney의 “Arcadia”에 나오는 여왕의 이름을 딴 주인공의 이름, 사회적 경제적 현실로부터 자유를 찾는 목가적 여주인공의 이미지 등. 하지만 <파멜라>는 좀 다른 로망스이다. 요정 대모, 왕자, 호박이 도덕, 재산 많은 지주, 실제 여섯필의 말이 끄는 마차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정작 리처드슨 자신은 자신의 소설이 로망스가 부여하던 만족감과 얼마나 유사한 만족감을 주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그 어떤 허구적 글쓰기보다도 정교한 재현의 기술을 개발하는 데 집중되어 있어서 그것이 제공하는 내용은 쉽사리 간과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서사 기술이 실제로는 백일몽이라는 사이비 리얼리즘을 재창조하는 데 사용되고 있음을, 모든 장애물을 물리친 승리, 모든 기대와 모순되는 승리, 최종적으로 보자면 로망스의 그것만큼이나 개연성 없는 승리에 진정성을 부여하는 데 사용되고 있음을 잊고 있었다.
외적인 행동과 내적인 감정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된 이 같은 로망스와 형식적 리얼리즘의 조합은 대중소설의 힘을 설명하는 공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문학적 안내를 통해 독자들의 낭만적 열망을 만족시킨다. 그 문학적 안내는 매순간의 세세한 사고와 감정에 대한 너무도 충만한 배경과 너무도 완벽한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근본적으로 독자의 백일몽에 대한 비현실적인 아첨인 바로 그것이 문학적 진실처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대중소설은 가혹한 도덕적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된다. 동화나 로망스는 그럴 이유가 없지만 말이다. 소설은 무언가 다른 것이 되고자 하지만 리처드슨이 부여한 주관적 방향의 결과로 형식적 리얼리즘에 자연스럽게 생긴 새로운 힘으로 인해 소설은 현실과 꿈의 차이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전의 어느 허구적 장르보다 더 혼란스럽게 뒤섞어놓게 되었다(232). (이언 와트는 그러한 뒤섞음이 물론 새로운 현상은 아니라며 <돈 키호테>, <마담 보봐리>를 비교하면서 간략하게 설명한다. 233.)
사적 경험과 개인적 관계에 대해 소설이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것은 일련의 역설과 연관이 있다. 허구적 인물들의 감정과 독자들의 가장 강력한 대리적 동일시는 인쇄라고 하는 가장 몰개성적이고 객관적이며 대중적인 의사소통 매체의 특성을 활용함으로써 가능해졌다는 사실은 역설이다. 도시화 과정은 교외지역에서 이전보다도 더 격리되고 덜 사교적인 삶의 방식을 낳았으며, 동시에 공적인 측면에는 관심을 두면서 사적인 부분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문학형식을 유발시켰다는 점은 더한 역설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두 경향이 결합하여 보다 명백하게 현실적인 문학장르로 하여금 이전보다 더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의 완전한 전복을 가능하게 하도록 도왔다는 것 또한 역설이다.
하지만 소설은 엄청난 계몽의 능력 또한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소설이라는 장르와 그 사회적 맥락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뒤섞여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마도 그 문제를 가장 재현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리처드슨이 처음 선보였던 형식적 경향의 최상의 정점을 보여주는 이, 즉 조이스의 <율리시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책도 의식의 상태를 기술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 작품보다 멀리 가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는 가운데 인쇄 매체에 이보다 더 완벽하게 의존한 작품도 없다. 그 작품의 주인공이야말로 우리 시대 도시 의식의 완벽한 상징이다. 전형적으로 도시인인 Bloom은 그 어떤 사회적 집단에도 속하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과 피상적인 접촉만을 행할 뿐이다.
블룸에게는 영웅적인 측면이라고는 없다. 첫눈에 도대체 그런 인물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을 이유가 무엇인지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소설을 보편적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이유가 존재한다. 우리가 블룸에 대해 어떤 반감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우리가 제대로 된 판단력을 지니고 본다면 그의 내면의 삶은 무한히 다양하며 보다 흥미롭고 틀림없이 보다 내면의 삶 그 자체에 대해 의식하며 내면의 삶의 개별적 관계들을 의식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블룸은 이 장에서 살펴본 경향의 정점에 서있는 존재이다. 리처드슨이 설명되고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까닭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