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묘갈명 [ 墓碣銘 ]
글/錦城 吳繼洙
번역/羅千洙
世必有非常之人(세필유비상지인)/세상에는 반드시 비상한 사람이 있는데
然後必建非常之功(연후필건비상지공)/그런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비상한 공(功)을 세운다.
而不幸爲奸軌娟嫉輩之所構誣(이불행위간궤연질배지소구무)/그런데 불행하게도 간약하게 시기(猜忌)하는 무리들에게 무(誣)함을 받아
未克大用(미극대용)/크게 쓰이지를 못하고
中道殞生者(중도운생자)/중도에서 죽은 자가
於史往往有之(어사왕왕유지)/역사에 가끔 있는데
雖隔千載之下(수격천재지하)/비록 천년이 흘러 멀어졌어도
尙爲之不平(상위지불평)/아직도 불평을 갖게 되는데
況身親經歷(황신친경력)/하물며 자기 몸으로 친히 경력(經歷)하고
耳目之所見聞(이목지소견문)/자기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이야
感憤之親切(감분지친절)/그 감개와 분통의 절심함이
又豈與覽史書比耶(우개여람사서비야)/또 어찌 사서(史書)를 본다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此不侫於故都統將海南郡守鄭公之事(차불녕어고도통장해남군수정공지사)/이것은 제가 죽은 도통장 해남군수 정공(鄭公)의 일에
未始不慨然而歎(미시부개연이탄)/처음부터 개연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澘然而涕者也(산연이체자야)/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公諱錫珍字台完(공휘석진자태완)/공(公)의 이름은 석진(錫珍)이요 자(字)는 태완(台完)으로
以哲廟辛亥八月九日生(이철묘신해팔월구일생)/철종 신해년[1851년] 8월9일 태어났는데
體貌豊偉(체모풍위)/체격이 융장하고 용모가 풍부하고
器局宏遠(기국굉원)/기국(器局)이 크고 심오하여
屹然有需世之望(흘연유수세지망)/우뚝한 모습으로 세상에 쓰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歲甲午東匪煽亂(세갑오동비선란)/1894년 갑오년 동학 비적들이 난리를 선동하여
在枉蜂屯(재왕봉둔)/사곡한 사람들이 벌떼처럼 진을 치고
這這豕突(저저시돌)/낱낱이는 돼지처럼 돌격하였으니
自古阜直下長城之際(자고부직하장성지제)/고부(古阜)로부터 곧바로 장성(長城)으로 내려올 때
賊殺吏侵虐生民(적살리침학생민)/적들은 벼슬아치를 죽이고 백성들을 침범하여 포학하게 행동하니
其害甚於洪水猛獸(기해심어홍수맹수)/그 해(害)가 홍수나 맹수의 해(害)처럼 심하였는데
而獨州牧閔公種烈(이독주목민공종열)/오로지 나주목사 민종열(閔種烈) 공은
秉義守城(병의수성)/의(義)를 가지고 성(城)을 지켰으며
推君爲都統將(추군위도통장)/그대를 도통장으로 삼도록 추천하여
大小軍務悉委任之(대소군무실위임지)/크고 작은 군무(軍務)를 모두 위임하였으므로
將軍登壇(장군등단)/장군으로 단에 오르자
吏士聳氣(이사용기)/아전과 병사들은 기운이 솟아
遂益勵忠義協贊(수익여충의협찬)/마침내 더욱 충의에 힘쓰도록 협찬 하였다.
方略八朔防守(방약팔삭방수)/바야흐로 대략 여덟 달 동안 성(城)을 방비하고 지키면서
凡六戰六捷(범육전육첩)/무릇 6전6승을 하였으니
約束之申明(약속지신명)/약속을 거듭 밝힌 것이며
行伍之嚴整(행오지엄정)/군대를 편성하는 대오도 엄히 정돈하였다.
雖不求合於法度(수불구합어법도)/비록 법도(法度)에 맞는 것을 구하지 않았으나
而自不失奇正之術(이자부실기정지술)/스스로 임기응변의 계략을 잃지 않았다.
始於四城之勝(시어사성지승)/처음 성(城) 네 곳에서 승리를 하고
鏖戰一塲(오전일장)/한바탕 싸움을 하여 무찌르면
匪黨就捕(비당취포)/비적들의 무리들이 체포되었다.
次於砧山之役(차어침산지역)/이어서 침산(砧山) 싸움에서는
飛砲急擊(비포급격)/돌쇠뇌를 날리며 급히 돌격하여
斬獲無筭(참획무산)/셀 수 없을 정도로 참획하였으며
又於古幕聳珍之戰(우어고막용진지전)/또 고막(古幕)과 용진(聳珍)의 전투에서는
鳴鼓作氣(명고작기)/북을 울리며 기운을 돋우니
賊膽破落終於南山之捷(적담파락종어남산지첩)/적들의 간담이 떨어져 마침내 남산(南山)에서 승리하였다.
巨魁伏法餘黨悉平(거괴복법여당실평)/적(賊)의 괴수가 법에 따라 처형되니[伏法]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평정되었다
閔侯大加稱詡曰(민후대가칭후왈)/민(閔) 목사가 더 크게 칭찬하고 자랑하며 말하기를
不料幕部之中有此干城之才也(불료막부지중유차간성지재야)/“뜻밖에 장군의 군막 안에 이처럼 훌륭한 군인의 재능을 가진 자가 있구나.
第念人謀旣協於下(제염인모기협어하)/다만 생각하건대 사람의 계략이 이미 아래에서 협조하고
則天眷必應於上(칙천권필응어상)/임금의 사랑이 반드시 위에서 응답한다.”라고 하였다.
我軍始以器仗之小爲憂(아군시이기장지소위우)/아군은 처음 군기(軍器)와 의장(儀仗)이 적음을 근심하였는데
而南庫之利兵出於幾百年秘藏之後者一也(이남고지이병출어기백년비장지후자일야)/그런데 남쪽의 창고에서 날카로운 무기들이 수 백 년 동안 몰래 감추어 진 것이 후에 나온 것이 첫 번째 이유요
賊欲夜襲(적욕야습)/적(賊)들이 저녁에 습격을 하려는데
而東門之鬼火棊布星列(이동문지귀화기포성열)/동문(東門)에서 귀신불이 별처럼, 바둑판처럼 널려져
使彼疑懼而退軍一舍者二也(사피의구이퇴군일사자이야)/저 적(賊)들이 의심하여 두려워하므로
而退軍一舍者二也(이퇴군일사자이야)/30리를 퇴군케 한 것이 두 번째 이유요
又欲火攻(우욕화공)/또 (賊들이) 불로 공격하려 했는데
而大雪適下壓城數尺(이대설적하압성수척)/큰 눈이 때마침 내려 성(城) 을 두서너 자로 압도하고 있어
賊不敢售計者三也(적불감수계자삼야)/적들이 감히 계략을 실현할 수 없었던 것이 세 번째 이유로
斯豈非神助之異耶(사개비신조지이야)/이 어찌 귀신의 도움과 다르다고 부정하겠는가.
是歲十一月(시세십일월)/이 해 11월에
朝家除閔侯爲招討使(조가제민후위초토사)/조정에서는 민(閔)목사를 초토사(招討使)로 제수하고
王師繼而南下(왕사계이남하)/임금을 지키는 경군(京軍)들이 잇달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將軍率千餘人(장군솔천여인)/장군은 천여 명의 군사들을 인솔하여
出陣于靈巖長興等地(출진우영암장흥등지)/영암(靈巖), 장흥(長興) 등지로 출진하자
匪徒聞風夜遁(비도문풍야둔)/비적들의 무리들은 풍문만 듣고도 저녁에 달아나버리니
漠無影響(막무영향)/막연하지만 아무런 영향이 없었으며
回抵南平郡人(회저남평군인)/남평으로 돌아와 도착하니 군(郡) 사람들이
以牛二錢百繈犒師(이우이전백강호사)/소 두 마리와 돈 2백량을 포대기에 담아 군사들에게 주어 위로하였는데
將軍辭不受曰(장군사불수왈)/장군은 사양하며 받지 않고 말하기를
軍需吾自豫備(군수오자예비)/“군대의 필요한 물자는 우리들 스스로 미리 준비해 놓으니
無費該郡爲也(무비해군위야)/해당 군에서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追捕散兦(추포산망)/추격하여 사로잡으면 흩어지고 도망하여
唱凱而還(창개이환)/개가(凱歌)를 부르며 귀대(歸隊)하였다.
招討使抄軍功報于政府(초토사초군공보우정부)/초토사(招討使)는 군공(軍功)을 베껴 정부에 보고를 하였는데
以將軍爲首(이장군위수)/장군을 맨 먼저 하였다.
乙未臘月特除海南郡守(을미납월특제해남군수)/을미년[1895년] 음력12월 특별히 해남군수[海南郡守]로 제수하였기에
翌年二月初九日赴任(익년이월초구일부임)/이듬해(1896년) 2월 초9일(음력/양력으로는 3월24일)에 부임하였는데
甫下車先訪邑之賢士詢(보하차선방읍지현사순)/부임해서 수레에서 내리자 먼저 고을의 어진 선비들을 방문하여 자문하고
及閭里疾苦革祛舊瘼(급여리질고혁거구막)/향리에서 질병으로 고생하는 오래된 병을 고치게 하였다는
口碑載路(구비재로)/입으로 칭송하는 것이 길에 쌓였었다.
先是安參書宗洙攝郡(선시안참서종수섭군)/이에 앞서 참서관 안종수(安宗洙)가 군(郡)을 다스리면서
事勒行薙髮勢甚鴟張(일사륵행치발세심치장)/억지로 상투를 자르는 일을 올빼미 날개 펴듯 매우 심한 기세로 행하였다.
觀察使蔡奎祥旣見迫逐招討令公(관찰사채규상기견박축초토령공)/관찰사 채규상(蔡奎祥)은 이미 초토령공(민종열 목사가 상투를 자르도록)을 몰아세움을 보았고
又遭困逼次及於將軍(우조곤핍차급어장군)/또 이어서 (상투를 자르도록) 고달프게 핍박하는 것이 장군에게 까지 미쳤는데
將軍厲聲曰(장군려성왈)/장군은 준엄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吾頭可斷髮不可斷(오두가단발불가단)/“내 머리를 자를 수 있으나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라고 하였다.
由是忤宗洙意(유시오종수의)/이로 말미암아 안종수(安宗洙)의 뜻을 거스르게 하더니
及松沙奇參奉宇萬之擧義(급송사기참봉우만지거의)/더불어 송사 기우만(奇宇萬) 참봉이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道內縉紳章甫擧皆響應(도내진신장보거개향응)/도내 모든 벼슬아치와 유생들도 모두 일어나 향응하였는데
而將軍寔先之也(이장군식선지야)/장군은 이보다 먼저 향응하였던 것이다.
方完府隊長金炳旭之領軍下來(방완부대장금병욱지영군하래)/바야흐로 완주부의 대장 김병욱(金炳旭)이 군사들을 이끌고 내려왔는데
因奸軌指嗾構陷義兵禍機叵測(인간궤지주구함의병화기파측)/인하여 간교자들이 달래고 꾀어서 부추겨서 의병들을 무고로 얽는 재앙의 기미를 예측할 수 없었다.
到羅州陰遣兵伍潛入海衙(도나주음견병오잠입해아)/나주에 도착하여 몰래 병사들을 보내어 해남(海南) 관아에 잠입하여
縛公載車(박공재차)/공(公)을 묶어 수레에 실으니
該郡吏士出(해군리사출)/그 군(郡)의 아전과 선비들이 나와
死力欲救之(사력욕구지)/죽을힘을 다해 구원하려고 하였으나
公麾止之曰(공휘지지왈)/공(公)은 손을 흔들어 저지하며 말하기를
我是命吏(아시명리)/“나는 명령을 받은 벼슬아치로
設有過誤事(설유과오사)/설령 잘못된 일이 있더라도
當推鞫(당추국)/마땅히 추국[訊問]을 하면
而況毫無所犯乎(이황호무소범호)/하물며 조금도 범한 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旣至炳旭無一辭(기지병욱무일사)/김병욱(金炳旭)에게 이르자마자 한 마디 말도 없이
供招卽發梟令(공초즉발효령)/범죄 사실을 진술케 한 즉시 효수의 명령을 발령하자
公大喝曰(공대갈왈)/공(公)은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爾非司寇(이비사구)/“네가 형조판서[司寇]도 아니면서
我有胡大罪(아유호대죄)/내가 무슨 큰 죄가 있다고
爾敢擅殺乎(이감천살호)/네가 감히 마음대로 죽이려 하느냐.”라고 하였다.
炳旭俯首無語(병욱부수무어)/김병욱(金炳旭)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麾軍竟害之(휘군경해지)/군사들에게 손짓하여 마침내 해(害)하였으니
卽三月十一日也(즉삼월십일일야)/곧 3월 11일이었다.
風雲慘惔(풍운참담)/바람 구름은 불타듯 참혹하였고
天日無光(천일무광)/하늘의 해는 빛을 잃었다.
滿城士女莫不奔走號哭絶火者三日(만성사녀막불분주호곡절화자삼일)/성안 가득 선비와 여인들은 달려와 울부짖지 않은 자가 없으며 3일 동안 밥을 지어 먹은 자가 없었으며
而遠近行旅之知不知(이원근행여지지부지)/멀고 가까운 곳의 나그네가 알던지 모르던지
亦齎咨涕洟曰(역재자체이왈)/모두 탄식하고 눈물을 쏟으며 말하기를
斯人也至於斯矣(사인야지어사의)/“이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라고 하였다.
羅州之鄭始著於高麗文靖公雪齋先生諱可臣(나주지정시저어고려문정공설재선생휘가신)/나주의 정씨(鄭氏)가 처음 드러난 것은 고려 문정공 설재 선생으로 이름은 가신(可臣)으로
而入我朝以示慕齋(이입아조)/조선 조에 들어와 영모재에서 보여주는 것은
景武公諱軾爲中祖(경무공휘식위중조)/경무공의 이름은 식(軾)으로 중시조가 되며
六傳而進士樂天齋諱善卿卽其九世也(육전이진사낙천재휘선경즉기구세야)/6세대를 전하여 진사이시며 낙천재의 이름이 선경(善卿)인데 곧 그의 9세이시다.
高祖諱楚明壽階同知(고조휘초명수계동지)/고조의 이름은 초명(楚明)이며 壽階[壽職]로 동지중추부사였고
曾祖諱壽民贈參議(증조휘수민증참의)/증조의 이름은 수민(壽民)이며 증직으로 참의였으며
祖諱啓華贈參判(조휘계화증참판)/조부의 이름은 계화(啓華)이며 증직으로 참판이었으며
考諱讚基贈承旨(고휘찬기증승지)/아버지의 이름은 찬기(讚基)이며 증직으로 승지였다.
妣贈貞夫人海州崔氏師崙女(비증정부인해주최씨사륜녀)/어머니는 증직으로 정부인(貞夫人)이며 해주최씨 사륜(師崙)의 따님이며
配光山金氏洪權其考也(배광산금씨홍권기고야)/부인은 광산김씨로 홍권(洪權)이 그 아버지이다.
痛夫非命矢欲下從(통부비명시욕하종)/애통(哀痛)하게도 지아비가 제 목숨대로 다 살지 못하여 따라 죽으려고 맹세 하였는데[矢]
而旋念老姑在堂(이선염노고재당)/돌이켜 생각하면 늙은 시어머니께서 집에 계시고
諸孤滿室(제고만실)/집안 가득한 고아가 된 여러 아들들이
忍而不死(인이불사)/차마 죽지 말라고 하였는데
終能成立家計(종능성립가계)/마침내 능히 집안을 헤아려 세울 수 있었으니
可謂賢矣(가위현의)/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有三男三女(유삼남삼녀)/3남 3여가 있는데
男長遇燦議官(남장우찬의관)/장남 우찬(遇燦)은 의관(議官)을 지냈으며
次男遇卿參奉(차남우경참봉)/둘째 아들 우경(遇卿)은 참봉이며
次男遇權(차남우권)/셋째 아들 우권(遇權)이다.
女長適密陽朴正錫(여장적밀양박정석)/큰 딸은 밀양박씨 정석(正錫)에게 시집가고
次適濟州梁周煥(차적제주양주환)/둘째 딸은 제주양씨 주환(周煥)에게 시집갔으며
次適昌寧曺道基(차적창녕조도기)/셋째 딸은 창녕조씨 도기(道基)에게 시집갔다.
蘭坡其自號也(난파기자호야)/난파(蘭坡)는 그가 스스로 호(號)로 하였으며
性篤孝母夫人夙抱貞疾(성독효모부인숙포정질)/성품이 도탑고 효성스러워 모부인께서 일찍이 고질병에 든지
積以歲月(적이세월)/세월이 오래되었는데
夜以禱天(야이도천)/밤에는 하늘에 기도를 하고
晝以醫治(주이의치)/낮에는 의원의 치료를 하여
竟得復常(경득복상)/마침내 회복하게 되었다.
友諸弟有無共之(우제제유무공지)/벗과 여러 동생들과 있고 없는 것을 같이 하였으며
俾盡和湛之樂(비진화담지락)/더하여 화평함이 가득 찬 즐거움을 다하였다.
書塾之甚貧(서숙지심빈)/글방이 매우 빈한하여
而未學者出力而勸獎之(이미학자출력이권장지)/배우지 못한 자들에게 재력을 내어 배우기를 권장하였으며
闔境之遇荒(합경지우황)/온 고을이 흉년을 만나면
而告飢者(이고기자)/주린 자에게 알려서
設賑而賙給之(설진이주급지)/구휼을 베풀어 넉넉하게 진휼하였는데
其隱德陰功(기은덕음공)/그 숨은 덕(德)과 그늘에 가려진 공(功)은
又有人不知者(우유인부지자)/또한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觀此數件事(관차수건사)/이러한 여러 건의 일을 보건대
豈非加人一等耶/어찌 남보다 한층 낫다고 할 만하지 않겠는가?
嗚呼(오호)/오호
東匪之亂古未嘗有也(동비지란고미상유야)/동학 비적들의 난(亂)은 옛날에도 일찍이 있지 않았던 것인데
蠱人心術(고인심술)/사람을 미혹케 하는 심술로
蕩民財産(탕민재산)/백성들의 재산을 쓸어버리고
連陷州郡(연함주군)/잇달아 주와 군을 함락하여
貽憂君父(이우군부)/임금에게 근심을 끼쳤으며
雖以完府之鞏固(수이완부지공고)/비록 완주부가 공고하였지만
而半入灰燼(이반입회신)/절반정도 불탄 잿더미에 들어가고
兵營之險阻(병영지험조)/병영은 험하여 막힌 곳에 있었는데
而猶爲巢穴(이유위소혈)/오히려 적들은 소굴로 삼았으니
以至八路(이지팔로)/8도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皆然而惟洪州與羅州得全/모두 그러하나 오직 홍주(洪州)와 나주(羅州)는 보전 되었다.
羅民之至今(나민지지금)/나주 백성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日耕吾田讀吾書者)(일경오전독오서자)/날마다 나의 밭을 갈고 나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罔非將軍之力也(망비장군지력야)/장군의 힘이 아닐 수 없다.
以朝家褒賞之道(이조가포상지도)/조정에서는 포상의 방도를
言之固當(언지고당)/말을 함이 진실로 지당하고
銘功鼎彛書名竹帛(명공정이서명죽백)/공(功)을 솥에 새기고 이름을 사서(史書)에 쓰는 것이 떳떳한데
雖有罪犯(수유죄범)/비록 죄를 범한 것이 있어도
宥及永世(유급영세)/사면(赦免)이 영세토록 미치지만
而猶未貸將軍之身(이유미대장군지신)/오히려 장군의 몸은 사면(赦免)도 빌리지 못하였으니
萋斐之錦(처비지금)/여러 소인이 입을 모아서 참소(讒訴)하였으니
胡至於此(호지어차)/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으며
吁其慘矣(우기참의)/그 참혹함에 탄식하노라.
墓在州之西(묘재주지서)/묘는 고을의 서쪽에 있는데
葛馬村東麓甲坐之原(갈마촌동록갑좌지원)/갈마촌 동쪽 산록 갑좌 방향의 언덕이다.
長胤遇燦謁余而泣曰(장윤우찬알여이읍왈)/큰아들 우찬(遇燦)이 나에게 여쭈며 울면서 말하기를
先人討匪之功(선인토비지공)/“돌아가신 아버지의 비적 토벌의 공(功)은
可以有辭於後(가이유사어후)/뒷날에도 할 말이 있다 하겠으나
而抱寃入地伸雪無梯(이포원입지신설무제)/억울함을 품고 땅속으로 들어갔지만 억울함을 펴고 씻을 실마리가 없고
不肖匪莪之痛(불초비아지통)/불초한 자식이 부모를 잘 봉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애통한 마음은
於是益切(어시익절)/이에 더욱 절실 합니다.
俯垂一言之惠(부수일언지혜)/굽어 살피시어 한 마디 고마운 말씀을
庸表三尺之碣(용표삼척지갈칙기사)/석자 비석에 떳떳이 표시하면
則其賜當如何哉(칙기사당여하재)/그 은혜가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余愴然應之曰(여창연응지왈)/내가 몹시 슬퍼하면서 응하여 말하기를
吾於子之先君(오어자지선군)/“나는 그대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相知殆三十載(상지태삼십재)/서로 안지 거의 30년으로
未嘗見一毫不可於意者(미상견일호불가어의자)/일찍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터럭만큼도 보지 못하였으며
而智勇俱備戰勝功取(이지용구비전승공취)/지혜와 용맹을 구비하고 싸움에서 승리의 공(功)을 취하였으니
今之良將也(금지양장야)/이에 지략이 뛰어난 훌륭한 장수였다.
佩紱南爲聲譽遠聞(패불남위성예원문)/관인(官印)을 찬 해남에서 명예가 멀리까지 소문 난 것을 보면
古之循吏也(고지순리야)/옛날 법을 잘 지켜 백성들을 위하는 관리라 하였으며
謙謙自牧(겸겸자목)/겸손하게 자신을 길러서
有功不伐(유공불벌)/공(功)이 있지만 자랑하지 않고
粹然是君子人也(수연시군자인야)/ 순수함이 바로 군자였다.
次第登庸若將展其負抱(차제등용약장전기부포)/차제에 등용되어 그 포부를 펴게 한 것 같았지만
而媒孼橫生(이매얼횡생)/남을 모함함이 횡행(橫行) 할 때 태어나
中道殞絶(중도운절)/중도에서 목숨이 끊어졌으니
譬如圖海之鵬遽折其翼(비여도해지붕거절기익)/마치 붕새가 바다를 건너는 것을 도모하다가 갑자기 그 날개가 꺾이는 것에 비유되고
長楸之驥(장추지기)/큰 가래나무 길을 달리는 천리마가
旋蹶其蹄是(선궐기제시)/바른 발굽임에도 도리어 넘어진 것이니
豈徒將軍之不幸而已哉(개도장군지불행이이재)/어찌 장군의 불행일 뿐이겠는가.
雖然將軍之實蹟備載於錦城之討平碑(수연장군지실적비재어금성지토평비)/비록 그러하지만 장군의 실제 자취는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에 실려 있고
又祥於招討閔公啓文斯(우상어초토민공계문사)/또 초토사 민공(閔公)이 (정부에) 아뢰는 글에서 이 같은 것이 자세하여
可以徵後矣(가이징후의)/뒤에 삼가 증명할만한데
何待余言之有無也(하대여언지유무야)/어찌 내 말의 있고 없고를 기다리겠는가. ”라 하였다.
撫念疇昔(무염주석)/예전 일을 더듬어 생각하니
不忍終辭(불인종사)/차마 끝까지 사양할 수 없어서
呂東萊之書有曰(여동래지서유왈)/여동래(呂東萊[呂祖謙의 호가 동래])의 글에 이르기를
百世之下(백세지하)/“백세 아래에서도
每念岳武穆之寃(매염악무목지원)/늘상 악비(岳飛)의 원통함을 생각하여
直欲籲天而無從(직욕유천이무종)/곧바로 하늘에 호소하려고 해도 할 길이 없다.” 라고 하였으며
又文簡公奇先生(우문간공기선생)/또 문간공 기정진(奇正鎭) 선생은
題孤松崔公之墓有曰(제고송최공지묘유왈)/고송 최찬(孤松 崔纘)공의 묘문(墓文)을 쓰면서 이르기를
宵少之誣正直(소소지무정직)/“얼마간의 작은 거짓말을 정직이라 한다면
自謂厄其人矣(자위액기인의)/절로 그 사람이 불행하다 하고
其終乃所以顯其人也(기종내소이현기인야)/끝내 그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라고 하였다.
余三復二書(여삼복이서)/내가 세 번을 되풀이하여 읽고 두 번을 썼으니
深有感於中者(심유감어중자)/마음 속에 느낌이 깊을 것이다.
故抆淚而書之如右銘曰(고문루이서지여우명왈)/진실로 눈물을 닦으며 우(右)와 같이 기록한다.
銘曰(명왈)/명문은 다음과 같다.
未嘗爲智也(미상위지야)/일찍이 지혜롭지 못하지만
而能覩人之所未覩(이능도인지소미도)/남을 볼 수 있어야하는데 보지 못하였으니
不自爲勇也(불자위용야)/스스로 용(勇)이라 할 수 없고
而能服人之所不服(이능복인지소불복)/남을 복종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복종시키지 못하였으니
何功之高而位之卑(하공지고이위지비)/공(功)이 높다면 무슨 지위가 낮겠으며
何予之豊而奪之速(하여지풍이탈지속)/내가 넉넉하다면 어째서 빨리 빼앗으려 하는가?
理則有屈而必伸寃(리칙유굴이필신원)/굴(屈)함이 있어야 반드시 억울함을 펴는 이치가 있고
亦無往而不洩(역무왕이불설)/또한 어디서나 누설(漏洩)하지 않아야 하네.
願借丹筆鑱諸石巋(원차단필참제석)/바라건대 단필(丹筆)를 빌려 빗돌에 새기면
巋然立於山之麓(규연립어산지록)/높이 솟아 우뚝하게 산록에 서있겠네.
上章閹茂臘月上澣 錦城吳繼洙撰(상장엄무납월상한 금성오계수찬)/경술년[1910년] 음력12월 상순 금성 오계수 짓다.
<해설>
◯司寇(사구)는 조선 시대, 형조의 정2품 으뜸 벼슬.
◯卽三月十一日也은 음력의 표현으로 양력으로는 1896년 4월23일에 해당한다.
본 묘갈명에서
“翌年二月初九日赴任(익년이월초구일부임)/이듬해(1896년) 2월 초9일(음력/양력으로는 3월24일)에 부임하였는데”라 하고
동년 4월23일(음력 3월11일)에 죽었으니, 해남군수로 부임해 간지 약 한 달만의 일이다.
그런데 난파유고 권지2의 宗人 鄭源中의 祭文에서 보면
1896년 5월25일이 제삿날이었다.
만약 이날이 양력이라면 음력으로는 4월13일이다.
묘갈명에 죽은 날과 제문에 나타나는 죽은 날이 서로 다르다.
이 문제는 추후 더욱 밝히고자 한다.
◯絶火者(절화자)는 아궁이에 불을 못 땐다는 뜻으로 양식이 떨어졌다는 말,
여기서는 밥을 지어먹지 못한다는 뜻
◯壽階(수계)는 壽職과 같은 의미로 벼슬을 하고 있는 자가 80세를 넘게 되면 픔계를 한 단계 올려주는 것으로,
벼슬을 하지 못한 양반은 80세가 넘으면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로 올려 주고,
일반 백성도 90세가 넘으면 壽階를 하였다..
◯萋斐(처비)는 처비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항백장(巷伯章)의 ‘처(萋)하고 비(斐)함이 이 패금(貝錦)을 이루도다.’에서 나온 말인데, 처비는 조그마한 무늬요, 패금은 찬란한 무늬로서, 곧 작은 일이 참소를 입으면 크게 된다는 뜻임.
◯呂東萊(여동래)는 여조겸(呂祖謙)의 號,
呂祖謙은 송(宋)나라 사람으로 주희(朱熹)ㆍ장식(張栻)과 더불어 동남 3현(東南三賢)이라 하였음.
저서에 《동래박의(東萊博議)》ㆍ《동래집(東萊集)》 등이 있음.
《근사록(近思錄)》은 송(宋)나라 주희(朱熹)·여조겸(呂祖謙)이 함께 편찬한 책.
◯武穆(무목)은 岳飛의 諡號
岳飛는 중국 남송(1103~1142)의 명장,
중국 남송의 충신. 자는 붕거. 하남 탕인 사람. 고종 때 강회의 반적을 토벌한 공으로 '정충 악비'의 사자기를 하사받았다. 자주 金軍을 무찔러 공을 세웠으나 秦檜의 참소로 옥사하였다.
◯崔纘(최찬)은 1554-1624 (명종9-인조2), 字: 伯承‚ 號: 孤松‚ 本貫: 水原으로, 鄕人중에 金佑成이란 자가 李爾瞻의 무리에 붙어 음험한 행동을 일삼았는데‚ 새롭게 관직에 진출한 자들이 태반 그를 좇았다.
崔纘이 항상 ‘간특한 무리는 끝내 패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金佑成이 싫어하였는데‚ 마침 金佑成이 崔纘이 <耘田歌>를 지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가지고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金佑成은 崔纘의 <耘田歌>는 漢의 楊惲의 <南山歌>와 같이 임금을 원망하고 비방하는 내용이라 하여 그를 고발했다.
이에 崔纘은 ‘나의 복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지‚ 金佑成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의연히 대처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간신들의 중상 모략이 심해짐에 따라 崔纘은 禁府에 갇히게 되었다.
1620년(광해군 12) 어머니가 아들 걱정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갇힌 신세가 되어 달려가 보지도 못하다가 1623년(인조 1)에 仁祖反正을 계기로 사태가 바뀌어 드디어 출옥을 하였다.
仁祖反正후 崔纘에게 禮賓寺直長에 제수되었으나 교지가 도착되기 전에 1624년(인조 2)에 세상을 떠났다.
◯丹筆(단필)은 죄인의 刑을 기록하는 붓,
◯上章(상장)은 고갑자(古甲子)에서, 천간(天干)의 일곱째인 경(庚)을 이르는 말
◯閹茂(엄무)은 육십갑자가 생겼던 초기에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고갑자에서, 십이지의 ‘술’을 달리 이르는 말
그러므로 上章閹茂는 경술년을 말하니 1910년을 지칭한다.
◯오계수(吳繼洙)는
1843(헌종 9)∼1915. 근대의 학자·항일지사. 자는 중함(重涵), 호는 난와(難窩).
아버지는 갑선(甲善)이며, 어머니는 나주정씨(羅州鄭氏)로 시혁(時爀)의 딸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처음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이 일어나 일본인들에 의하여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이를 토평하기 위하여 기우만(奇宇萬)이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그에 가담하였다.
경술국치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두문불출하던 중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한 일로 장성 헌병부대에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았다.
그 뒤로는 영사재(永思齋)에 들어가 오직 독서만으로 생애를 보냈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 이(理)는 본성(本性)이고, 기(氣)는 기형(器形)으로, 둘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표리와 같이 불리부잡(不離不雜)한 하나라는 일물론(一物論)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난와유고》 17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