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부경(地符經) | |
地球化 煥 乾定坤定 人時之遇 一口動靜 止於當 義建 典之言 典之言 玉書 動之靜 靜之變 理與精 源而承 利在衆生 願爲願爲 | 지구화하니 환 건정곤정 인시지우 일구동정 지어당 의건 전지언 전지언 옥서 동지정 정지변 이여정 원이승 이재중생 원위원위 |
인정상관님 효(포)덕천하 무자 11월 10일 기망 |
인정상관님의 지부경(地符經)과는 다른
지부경(地符經)이 있음을 상기 하는 의미와
이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고 해서
천부경, 지부경, 인부경을 올립니다.
(지부경(地符經)의 表(table) 하나, 제대로 그려 놓은게 없군요.^^
인부경(人符經)) 그림은 시각화되면 만들어 보죠.
환단고기 서문에
"신교의 경전으로는 천부경과 지부경과 인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366사) 등이 있고,
계율로는 환국의 5훈, 신시의 8훈, 단군조선의 7천범과 9서가 있고, 소도의 5상이 있고,
법률로는 단군조선의 금8조가 있다."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볼때,
천부경과 지부경과 인부경이 다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천부경은 환단고기 <소도경전본훈>에 실려 있다.
해설은 다른 분들이 하신거 참고하시고,
여기서는 그냥 소개와 개략적인 설명 만 하려고 한다.
때가 되면, 깊은 의미의 해석은 다시 할것 입니다.
해석은 단순해야 제맛이죠.ㅎ
힌트~~!
천부경은 하(1)나(2)에서 시작해 열(열린다, open)에 가서, 대 광명 천지가 열린다는 말이고
지부경은 열(십, 씹)에서 시작해~~(생)
인부경은 천지의 사명을 이루는 11성도와 15진주의~~(략)
이는 천지의 사명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을껍니다.
지부경 (地符經) 100字 | 천부경(天符經) 81字 |
인부경 (人符經) 108字
天地大本中正人 天十地一地九天二天八地三地七天四天六地五 天地合十一 天地合德人 天地合道人 天十地三地九天四天八地五地七天六人地天十三 天十地五地九天六天八地七 十乾天 五坤地 十五眞主 三極三神會六歸二 道家眞靈大寶 性命精三三六六定矣 | 천지의 大本은 中正人이라. (10+1=9+1=8+3=7+4=6+5=11) 천(十)지(一)합덕, 十一성도하니 悳人, 道人 (10+3=9+4=8+5=7+6=13) (10+5=9+6=8+7=15) (10)乾天 (5)坤地하니 十五眞主라. 3極과 3神의 6位께서 2바퀴 돌아보니 道家眞靈大寶, 性命精 삼삼육육이 定位로다 |
* 인부경 (人符經)은 미완성 경전인바, 완전한 해석과 표로 만들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책으로 발표 할것 입니다.
인부경의 입수경위:
삼부경은 『천기요』 상∙하 필사본에 수록되어 있다.
그 발견의 경위는
현 중국북경자수대학교 총장이며 오백나한종총본원 종정 대보 임완수 스님이
1987년 북경에서 발견한 것으로 아직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자료이다.
참고로 '천부삼경'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말하기도 합니다.
용부경
無 人 化 二 九 妙 動 人 一
極 二 人 八 一 不 明 終
三 一 無 三 七 七 變 昻 無
一 一 十 地 六 環 來 太 一
始 一 積 三 合 成 十 本 一
無 天 一 二 三 四 往 心 地
始 本 三 天 大 三 十 本 天
一 盡 一 三 三 運 衍 本 中
「지부경」」과 『인부경』과 『갑골천부경』의 등장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신상구
박병채 선생은 원불교 성주포교소에 근무하는 분으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에서 2016년에「천부경 수용과 철학적 이해 -고유역학의 가능성을 겸하여」란 논문을 발표하여 국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박병채 박사는 박사학위논문에서 천부경을 논하면서 「지부경」 과『인부경』도 함께 소개하여 국학 연구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지부경」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치는 않다. 박병채가 조사한 바로는 1978년에 박상화가 정역과 한국에 발표한 것이 최초인 것 같다.1) 역학자인 박상화에 의하면 후천성모(後天聖母)로 사명 받았다는 박계림이 계시로 받았다고 한다.
박계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부경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나 「지부경」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고 한다. 박상화에 의하면 천부경과 「지부경」은 내외의 관계가 있으며, 전자는 체, 후자는 용이고, 전자는 선천 후자는 후천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또 전자는 시(始)에서 종(終)으로 후자는 종에서 시로 되었다. 전자는 일(一)을 후자는 십(十)을 주관(主觀)으로 했는데, 일은 원리를 십은 실현을 의미한다. 천부경은 81자이니 9×9를, 「지부경」은 100자이니 10×10을 말함이니 9는 양이요, 10은 음이니 각각 문왕팔괘와 정역팔괘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2)
그러나 「지부경」의 유래에 대해 다른 설들도 있다. 한 설에 의하면 「지부경」이 1987년 북경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당시로서는 아직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자료라고 한다.3) 이 「지부경」이 어떻게 북경에 있었으며 어떤 자료의 형태였는지는 설명이 없어서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10년 전에 박상화씨에 의해 공개되었고 해석과 설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100자로 된 「지부경」외에도 천부경을 줄인 36자 「지부경」이란 것도 있고, 또 108자로 이뤄진 별도의『인부경』도 등장하고 있다.4) 조금은 다르지만 안동에 있는 김생의 굴속에서 발견되었다는 정춘화의『천부상경(天符上經)』이란 글도 전해지고 있다.5)
1970년대 초 안동 와룡탯골(台里)에 살던 유학자 설영필(薛永馝,1902-1991)이 “청량산에 갔을 때 김생굴 안에 지은 토굴방안에서 남루한 의복에 눈빛이 형형한 노인이 알수 없는 경전(經典)을 소리 내어 반복해서 읽는 것을 보고, 그 노인에게 무슨 글인지 궁금하여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아서 수차 간곡하게 물으니 드디어 ‘환인천제(桓因天帝) 환국구전지서(桓國口傳之書)인 『천부상경(天符上經)』이다.’라고 하였다.” 하면서 어렵게 노인으로부터 알아서 적어온 『천부상경』을 인근의 와룡면 나소리에 사는 유학자 백아 정춘화(白雅 鄭春和, 1925-1987)에게 해석해 보라고 주는 것을 그의 아들 정진호(鄭辰皓,1953~)가 직접 목격하였다고 한다. 정춘화는 일제말기 안동농림학교를 다닌 수재(秀才)였다고 한다. 선비였던 그의 부친 정한영(鄭漢永, 1909-1961 )은 아들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들어 놓고 몇 달을 지낸 어느 날 아들을 조용히 불러 앉히고 천(天), 불(佛),조물(造物), 인연(因緣)이란 글자를 받아쓰게 하고 “네가 60이 되면 『중용(中庸)』을 알 것이다.”라는 선문답(禪問答)을 하였다고 한다.6) 그러나 대부분 고대로부터 전해진 진본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라, 최근에 계시에 의한 기록이라거나, 개인이 창작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인부경』이란 개념이 역학자 이찬구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정조11년 1787년 문원보불에 ‘천부보전’에 관한 일을 비록 징험할 수는 없으나 신성한 분들이 서로 이어와서 우리 역사에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찬구는 여기에서의 ‘천부보전’이 천부경의 경문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다. 특히 그는 고운선생사적에서 일컬은 “전비문이 몹시 어렵고 읽기가 힘들어서 고운이 그것을 번역하였다.”고한 내용을 근거로, 원래의 전비문과 최치원의 번역본이 똑같지 않다고 보았다. 천부경은 몇자인지 알 수 없으며 최치원이 번역해서 첩(帖)으로 만들었다는 현전하는 81자를『인부경』이라고 불렀다. 이찬구에 의하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본 천부경도 있고, 이 원본을 보고 최치원이 번역해서 전한 현전하는 천부경 즉 『인부경』도 있다는 것이다.7)
묘향산에 있다는 석각부터 발견되지 않은 이상, 천부경의 원본을 알지 못한 상태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동안 알려진 천부경이란 이름 외에『인부경』이란 이름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왜 우리가『인부경』이라 불러야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아무튼 이상에서 보면 이런 「지부경」,『인부경』등의 별본이 등장함으로써,『천부경』․ 「지부경」 ․『인부경』 이란 삼재의 구도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는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천부경이 등장했다. 고려시대의 농은 민안부의 문집인 농은유집속에서 발견된 『갑골천부경』의 존재이다. 이는 민안부의 후손이라고 하는 민홍규에 의해 발견되었고 송호수의 책 한민족의 뿌리사상에서 인용됨으로써 세상에 공개되었다.8)
농은 민안부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수은 김충한 등과 더불어 6은(六隱)으로 불리었던 충신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신하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농은유집에서 발견되었다는 『갑골문 천부경』은 묘향산 석벽본과 4곳에서 차이가 있다. 첫 번째는 일석삼극(一析三極)이 아니라 신(新)자를 쓴 일신삼극(一新三極)이며, 두 번째는 거무궤화(鉅無櫃化)가 아니라 종(從)자를 쓴 거무궤종(鉅無櫃從)이고, 세 번째는 삼대삼합(三大三合)이 아니라 기(氣)자를 쓴 삼대기합(三大氣合)이고, 네 번째는 운삼사성환오(運三四成環五)이 아니라 충(衷)자를 쓴 충삼사성환오(衷三四成環五)이다.
아무튼 공개된 『갑골문 천부경』을 연구한 박대종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까지 발견된 갑골문에도 없는 글자가 천부경에는 여러 자가 있으니 천부경문에 기록되어 있는 중복 된 자를 제외한 총 46개의 문자 중 은허갑골문에서 이미 발견된 글자들은 총32자(69.6%)이다. 또 금문(金文)에서도 천부경 내에 포함된 글자들 중 五, 六, 七, 八, 九를 제외한 41자 중 11자(26.8%)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환단고기』를 보면 태백일사에서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 범세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했으니 천부경을 주해한 이색과 깊은 관련을 가진 민안부가 쓴 천부경이 있다면 『환단고기』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해도 틀림없는 일이다. 또한 『후조선기』에는 기자(箕子)가 부여의 법학자였던 왕수긍(王受兢)을 초빙해 박달나무에 은문(殷文)으로 『삼일신고』를 쓰게 하여 그것을 읽었다.”라고 기록이 있다.9) 은문이란 갑골문일 가능성이 높으니 이 부분도 역시『환단고기』의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내용이다. 그런데 갑골문은 은왕조 (B.C 3400-3100) 때 도성의 유적지인 은허에서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한다.
한편 천부경은 1917년에 존재가 드러나면서 최치원이 단군 신지의 천부경을 묘향산에 새겨놓은 것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나, 1979년에 공개된 환단고기에 의하면 환국(桓國)에서 구전되어 오던 중 환웅(桓雄)의 명에 따라 신지(新誌) 혁덕(赫德)에 의해 최초로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되었고 후에 신라의 최치원이 옛 비석에서 신지(新誌)가 쓴 전자(篆字)로 된 고각본(古刻本)을 찾아내어 그것을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650년 전의 인물인 민안부가 무슨 연유로 갑골문으로 천부경을 작성했을지는 의문스런 일이다.
사실 중국에서도 원명시대에는 갑골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고, 청 말기인 광서 25년(1899) 금석학자인 왕의영에 의해 처음으로 연구되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민안부가 어떻게 갑골문을 알고 있었을지 자체가 의문이다. 어쩌면 그동안 중국 대륙에서는 알지 못하는 그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전승되어온 다른 계통이 있었다고 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이 문서의 소유자인 민홍규는『갑골천부경』을 송호수를 통해 공개하면서 일본의 전문학자들에게 감정을 받은 진품이라고 밝힌 뒤에 더 이상의 감정 등을 받지 않고 공개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10)
사실 국내에서 나온 사서를 보면 천부경과 갑골문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환단고기』에 의하면 환웅의 명에 의해 신지혁덕이 녹도문으로 기록되었다고 했고, 이외에도 우리 고유의 문자는『환단고기』에 의하면 가림토 문자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갑골문은 은 왕조(B.C3400~3100)때에 쓰이던 문자이니, 환웅시대 보다는 수천년뒤에 중국에서 쓰여지던 문자이기 때문이다.
<각주>
1) 박상화,『정역과 한국』, 공화출판사, 1978, 382-388쪽 참조.
2) 박상화,『정역시대』, 우성문화사, 1987, 219-225쪽 참조.
3) 현 중국북경자수대학교 총장이며 오백나한종 총본원 종정 대보 임완수 스님이 발견했다고 한다. 2015.8.28.
4) 2015.8.28.
5) 이동수,「배달민족의 우주론 『천부상경』과 유학」,안동신문, 2012.12.11.
6) 이동수,『배달민족의 우주론. 천부상하경과 유학』, 2011.9.20.
7) 이찬구,『인부경 81자 집주』, 동신출판사, 1993, 131-132쪽.
8) 뉴스피플, 200년 1월 17일자 참조.
9) 일요시사, 2002년 9월 29일자 제350호.
10) 민홍규는 민안부의 후손으로서 옥새 전각장으로 대한민국 국새를 2번이나 제작한 화제의 인물이다. 2006년 노무현 정부 때에 공모되어 제작된 대한민국 제4대 국새 제작에는 북한산을 비롯한 전국 9개 명소의 흙으로 거푸집을 만들었고 내함을 싸는 겹보자기는 금실 자수를, 국새 받침대는 전통한지 200장을 1800겹으로 배접하는 등 대한민국 전통공예와 전통예술의 결정판이라고 칭송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원천기술이 없으면서 전통 기술을 가진 것처럼 속이고 국새제작에 사용하고 남은 금을 착복했으며 국가를 상징하는 국새에 자기 이름을 몰래 새겨 넣는 등의 사기행위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가 기술을 갖고 있었으나 당시 여론 몰이에 의해 억울하게 처벌받았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우나, 아무튼 민홍규의 처신은 천부경과 관련해서 볼 때에도 매우 불행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정진, 누가 국새를 삼켰는가, 글로세움, 2014, 참조.
<참고문헌>
1. 박병채,「천부경 수용과 철학적 이해-고유역학의 가능성을 겸하여(Acceptance and Philosophical Understanding of Chonbukyung-The Possibility of Indigenous Korean Thoughts of Changes)」,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박사학위논문, 2015.10. pp.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