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진표율사(眞表律師) 행적(行蹟)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에서 초출(招出)〕
법상종조(法相宗祖)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전주(全州) 벽골군(碧骨郡) 나산촌(那山村),
현(現) 김제군(金堤郡) 만경면(萬頃面) 대정리(大井里) 인(人)이다.
부(父)는 진내말(眞乃末)이오 모(母)는 길보랑(吉寶嫏)이니,
속성이 정씨(井氏)로, 나이 12세에 출가(出家)하여 입산(入山)하고자 하니, 아버지가 허락했다.
15세에 금산사(金山寺)에 들어가서, 순제(順濟,일명 崇濟)법사에게
강하 낙방 (講下落방 )하여 수도업(修道業)을 제(濟)에게 청(請)하니,
제(濟) 말하되,
“내가 일찍이, 당(唐)나라에 들어가 수업어선도삼장(修業於善道三藏) 받은 뒤에,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서, 문수(文殊)보살께서 현신(現身)하여 오계(五戒)를 줌에 감동하여,
표(表)가 말하되,
‘계(戒)를 얻기를 위하여, 얼마나 근수(勤修)하여야, 합니까?’ 하고 말하니
바로 제(濟) 말하되, “정성하게 이르르면 일년이 지나지 않는다.” 고했다.
진표(眞表)가 사(師)의 말씀을 듣고
명산악(名山嶽)에 두루 돌아서 선계산(仙溪山, 一云 邊山)의 불사(不思)의 의암(議菴)에
지석(止錫)하여 삼장(三藏)을 해련(該練)하고 몸을 잊고 참회하니,
처음에 칠야(七夜)로써 기한하였다가 오륜박석(五輪搏石)하여
무릅과 팔을 함께 상해서 바위 낭떨어지에 비쏟아지듯이 피를 흘렸다.
만일 현성(顯聖)하는 감응(感應)이 없으면 생명을 내걸겠다고 결사적(決死的)인 뜻을세우고,
다시 칠일(七日)을 기(期)하니,
종야(終夜)에 지장(地藏)보살이 나타나 정계(淨戒)를 령수(靈授)하니
당현종개원(唐玄宗開元) 이십팔년(二十八年)이요.
신라효성왕(新羅孝成王) 4년(年) 경진(庚辰) 3월(月) 15일(十五日) 진시(辰時)라. 시년 23세(歲)였다.
그러나 뜻이 자씨(慈氏) 미륵존불(彌勒尊佛)을 뵙는데 있었으므로 감(敢)히 중지(中止)하지 못하고
또 금산사(金山寺)로 옮기어 부지런히 용맹정진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니,
과연 미륵 부처님이 감동하시어 나타나셔서
「점찰경(占察經)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介)」를 주시며 말씀하시되
“포중(抱中) 제팔간자(第八簡子) 유신득소(踰新得少) 계(戒) ㅇㅇ
계유증등진계사(戒喩增得眞戒斯) 2간자(簡子)는 시아수(是我手)의 지골(指骨)이요,
여개(餘皆) (二字無) 목조(木造) (以下, 二字無)는 전법어세(傳法於世)라.」하니
이미 성전(聖前)을 수(受)하고 금산(金山)을 래왕(來王)하여,
해마다 개단(開檀)하여 법시풍화(法施風化)를 회장(灰張)하고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 강릉)의 섬사이를 주유(周遊)하니 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이뤄
수중(水中)에 맞어들어 법(法)을 강론하고 계(戒)를 주시니 바로 천보십일재(天寶十一載)라.
임진(壬辰) 2월(月) 보름이라.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이 말을 듣고 궁중에 맞어 들여 보살 계(戒)를 받으시고,
공양 및 법시(法施)를 하게 하시고, 나라(벼) 7만 7천석과 비단 5백필과 황금 오십량을 내리시니
모다 받어서 모든 사찰에 나누어주어 넓게 부처님 일을 일으키니,
그 골석(骨石)이 일찍이 금강산 발연사(鉢淵寺)에 있었고
그 법(法)을 전한 것을 영심보종(永深寶宗)이라고 하며
신방(信芳) 체진(体珍) 진해(珍海) 진선(眞善) 석충(釋忠) 등은 모두다 산문령수(山門領首)로
그 깊은 뜻은 진전간자(眞傳簡子)에 있으니 속리산(俗離山)에 머물러 극가자(克家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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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운(一說云)하되 사년(師年)이 27(二十七)이오.
숙종(肅宗) 상원(上元) 원년(元年) 신라경덕왕(新羅景德王) 19년(年) 경자(庚子)에
진표율사(眞表律師)의 나이 43이라.
증미(蒸米) 20두(斗)로 쇄건위량(晒乾爲糧)하야
예부안변산부사의방(詣扶安邊山不思議房)하야
이오합미(以五合米)로 위일일비(爲一日費)하고,
제일홉(除一合)으로 양서(養鼠)하야 근구계법어미륵상전삼년(勤求戒法於彌勒像前三年)에
미득수기(未得授記) 할새, 발분이사신암하(發憤而捨身岩下)하니
홀유청의동자(忽有靑衣童子)가 받들어 암상(岩上)에 올리니
다시 분발(分發)하야 삼칠일(三七日)을 일야근수(日夜勤修)함에
지장맹근금석(地藏萌根金錫)이 내위가지수비(來爲加持手譬)를 여구맹수지(如舊萌遂之)하고
가사급발사장기령계(袈裟及鉢師藏其靈桂)를 배가정(倍加精) ㅇㅇㅇ 삼칠일(三七日)에
즉득천안(卽得天眼)하야 견도솔천중(見兜率天衆)이 내(來)하니
불상(佛相)에 지장(地藏) 미륵(彌勒)이 동시현전(同時現前)하와
자씨(慈氏 彌勒尊佛)爲先이어늘 미륵이 말씀하되,
[착하도다 대장부(大丈夫)〜 계(戒)를 구함이 이와 같이 불석신명(不惜身命)하는구나~] 하시고
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계(戒)를 주되,
「일제왈구자(一題曰九者)요 일제왈팔자(一題曰八者)라」고 말하되
「이 두 간자(簡子)는 이것이 나의 수지골(手指骨)이라.
비유하건대 시본이각(始本二覺)이니
구자(九者)는 법이(法爾)오, 팔자(八者)는 신훈성불종자(新薰成佛種子)니
이차당지과보(以此當知果報)로 여사신후(汝捨身後)에 생어도솔(生於兜率)하리라.」 하고
여시어이(如是語已)한 양승즉임시(兩聖卽臨時)는 상원(上元) 삼년(三年) 임인(壬寅) 4월 27일이라.
(眞表)사수교이(師受敎已)하시고 금산사(金山寺)를 창건(創建)하고자
향래(向來)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르니
홀연히 용왕이 있어서 옥(玉)가사를 내어 헌납하고
장제권속(將諸眷屬)으로 시왕금산수(侍往金山藪)하니
사방자래(四方子來)에 불일성지(不日成之)하고
다시 자씨미륵존불(慈氏彌勒尊佛)이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구름을 멍에하고 나려와서
(眞表)師에게 계(戒)를 주고 바로 권단총(勸檀塚)하야 미륵 장육상(丈六像)을 주성(鑄成)하고
다시 하강(下降)하야 계(戒)를 주는 위의지상(威儀之相)을 미륵전(彌勒殿)의 남벽(南壁)에 그리니,
당대(唐代) 광덕이년(廣德二年) 신라경덕왕(新羅景德王) 23년(年) 갑진(甲辰) 6月 7日이요.
병오(丙午) 5月 1日에 주성(鑄成)하고
당대(唐代) 대력원년(大歷元年) 신라혜공왕(新羅惠恭王) 2年 미륵전중(彌勒殿中)에 봉안(奉安)하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金山寺)에서 나와서 속리산(俗離山)으로 향할새,
모든 소를 타고 우거(牛車)를 탄 사람들을 만나니,
그 소들이 사(師)앞에 무릎을 꿇고 울으니,
소와 우거(牛車)를 탄사람들이 내려서 묻되,
“무슨까닭으로, 이 소들이 화상(和尙)을 바라보고 울으며,
또, 화상(和尙)은 지금 어느곳으로부터 오십니까?” 하니,
(眞表)사(師)가 말하되,
“나는 금산수(金山藪)의 진표승(眞表僧)입니다.
내가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에 들어가,
미륵, 지장보살이 나타난 앞에서 계법진성(戒法眞性)을 받고
기리 수도(修道)하는 곳을 창건하고자 오는 것입니다.
이 소들이 밖으로 어리석으나,
안으로 나의 계법(戒法)을 밝게 알어서, 이같이 하는 것입니다.” 고하니,
그 사람들이 말하되,
“짐승도, 오히려, 믿는 마음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가 사람이 되어서, 어찌 무심 하겠습니까?”하고,
바로, 낫으로써, 자기들의 머리털을 끓고, 계(戒)를 받었다.
속리산 동학중에 길상초(吉祥草)가 生하는 곳을 알어놓고,
도로 명주(溟州) 바닷가에 이르르니,
고기와 자라와 미역이들이 바다에서 나와서,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앞을 향해서, 몸을 맛대어, 육지같이 만들거늘,
진표율사(眞表律師) 바다를 육지같이 밟고 들어가서, 계법(戒法)을 창념(唱念)하고,
도로 고성군(高城郡)으로나와, 개골(금강)山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어, 7년이 되었다.
이때에 명주(溟州)에, 여러해 흉년이 들어, 굶주림이 심함에도 불구하고,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계법(戒法)을 강설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마다 삼보(三寶)를 치경(致敬)하니,
삽시간에 고성 바닷가에 무수한 고기떼가 죽어 떠올라와서,
백성들이 이것을 팔어 양식을 구해서 죽음을 면했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발연사(鉢淵寺)로부터 나와서,
다시, 불사의방에 이르른 연후에 엄친(嚴親)에게 가서 뵙고,
도 진문대덕방(眞門大德房)에 이르러 살때에,
속리산(俗離山)의 대덕(大德)인 영심보(永深寶) 융종불타(融宗佛陀) 등으로 더부러 함께,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있는 곳에 와서 신청하되,
“우리들이 천리길이 멀다않고 와서,
계법(戒法)을 구하오니, 원컨대, 법문(法文)을 주시옵소서.“ 하니,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잠잠히 대답을 아니할새,
세사람이 복숭아나무에 올라가, 땅에 떨어저, 용맹하게 참회하니,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이내, 관정(灌頂)함을 가르치고,
드듸어, 가사와 바릿대와, 공양차제(供養次第)와,
비법(秘法) 1권(一卷)과 일찰선악업보경(日察仙樂業報經) 2권(卷)과
189종부여(種復與) 미륵 진주구자팔자(眞柱九者八者)를 주고, 계(戒)하되,
“구자법이(九者法爾), 팔자신훈성불종자(八者新熏成佛種子) 등(等)을 너의들에게 부족하노니,
너의들은 이것을 갖이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하여 돌아갔다.
(十三字無) 광도인(廣度人) (六字無) 等 길상생초정(吉祥生草井) (一字無) 길상(吉祥) (二十三字無)
도업이종효지궐후(道業而終孝之厥後)에 진표율사(眞表律師) 동대암상(東大岩上)에 올나서, 열반하니,
제자들이 불훈진체이거우해골산낙이하장(不勳眞体而去于骸骨散落以霞莊)하여
이내 유궁(幽宮)을 삼으니, 문득 푸른 솔이 그곳에서 자라나서
세월이 오랜지나 간뒤에 '말너 죽었다 다시 나니,'
그 뿌리가 한곳에서 나온 것을 알수 있었다.
이제, 두 나무가 남어 있어서, 무릇 공경하는 자가 왕왕히 뼈를 찾으니,
당대(唐代) O대력(大歷) 12年 신라혜공왕(新羅惠恭王) 12年 정사(丁巳) 9月에
무극옹(無極翁)이라는 이가, 특히, 소나무 아래에 예도(詣到)하여,
뼈를 주어서, 큰 바위위에 성간(成簡)하고 두 소나무 아래에 돌을 세웠다.
새법 노래
새법왔네, 새법왔네, 양심번개 새법왔네,
만세동락 맑은 운수 세계광명 불빛일세.
만세동락 밝은 운수 유리같이 빛났도다.
양심번개 불밭되어 온한길로 힘돌린다.
세계를 벼리하실 빈개벼리 잡으시을 거룩한
우리대표 도성인(都聖人)이 나오셔서,
세계광명 줄을쥐고 세계광명 줄을느려,
진득히 잡아 당기니 세계일시 굴복일세.
※ < 새법 노래 >는
※ (원문)에 오류가 많아서
<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 > (원본)을 참조하여
(원문) 글을 최대한 살리면서~
다시 번역, 정리해서 올립니다.
<참고자료>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 |
철면자(鐵面子) : 조선 중기 승려인 중관 해안(中觀海眼 1567~?)의 별호. 전라남도 무안 출신.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이라 불렸다. 처음에 처영(處英)을 은사로 하여 득도하였으나, 뒤에 휴정(休靜)의 문하에서 참학(參學)하여 심인(心印)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영남 지방에서 의승을 일으켰고, 전공을 세워 총섭(摠攝)이 되었다. 전란 후 지리산 화엄사에 있으면서 대화엄종주(大華嚴宗主)로서 법화(法化)를 폈다. 저서로는 『中觀大師遺稿』 1책, 『竹迷記』 1책, 『華嚴寺事蹟』 1책, 『金山寺事蹟 (1705년)』 1책 등이 있다. |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불교학보(佛敎學報)』 3·4 합집 에 실려있다. |
眞表律師 全州 碧骨郡 都那山村 大井里人也. 父曰眞乃末, 母曰吉寶娘, 俗姓井氏 年十二志求出家 父許之 十五投金山寺 順濟(一云 崇濟)法師 講下落𩬽請業 濟謂之曰 吾入唐受業於善道三藏 然後 入五台山感文殊菩薩現授五戒 表啓曰, 勤修幾何得戒耶, 濟曰 精至則不過一年. 表聞師之言 遍遊名嶽止錫仙溪山 (一云楞伽, 一云邊山) 不思議庵 該鍊三藏忘身懺悔初以七夜爲期五輪撲石膝腕俱碎 雨血岩崖. 若無聖應決志捐𨈬 更期七日 終見地藏菩薩現授淨戒即 玄宗 開元 二十八年 新羅 孝成王 四年 庚辰三月十五日 辰時 時年二十三也. 然志存慈氏不敢中止 又移靈山寺 勤勇如初 果感彌勒 現授占察經卷 幷證果簡子一百八十九介 謂曰, 於中第八簡子 喩新得妙戒 第簡子喩增得具戒 斯二簡子是我手指骨也. 餘皆沈檀木造喩諸煩惱 汝以此傳法於世作人津筏 缺 旣受聖[艹+別]來住金山 每歲開壇 㤆張法施風化 既周遊涉到阿瑟羅州(江陵)島嶼間 魚鱉成橋 迎入水中講法 授戒即 天寶十一載 壬辰二月望日也. 新羅景德王聞之迎入宮 闈受菩薩戒 嚫(供僧兼施曰嚫)租七萬七千石 椒庭列岳皆 受戒品施絹五百端 黃金五十兩 皆容受之分施諸山 廣興佛事. 其骨石曾在金剛山鉢淵寺 其傳者曰 永深寶宗信芳體环 环海眞善釋忠等 皆爲山門領首祖深則直傳簡子住俗離山爲克家子. |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전주(全州) 벽골군(碧骨郡) 나산촌(那山村) 마을(都) 현(現) 김제군(金堤郡) 만경면(萬頃面) 대정리(大井里) 사람(人)이다. 부(父)는 진내말(眞乃末)이오, 모(母)는 길보랑(吉寶嫏)이니, 속성(俗姓)이 정씨(井氏)로, 나이 12세에 출가(出家)의 뜻을 아버지께 청(求)하니 허락했다. 15세에 금산사(金山寺)에 들어가서, 순제(順濟, 일명 崇濟) 법사(法師)에게 강하(講下)에서 낙보(落𩬽)하여 수도업(修道業)을 제(濟)에게 청(請)하니, 제(濟) 말하되, “내가 일찍이, 당(唐)나라에 들어가 삼장(三藏)에게서 업어선도(業於善道)를 받은 연후(然後)에, 오태산(五台山)에 들어가서, 문수보살(文殊菩薩)께서 현신(現身)하여 오계(五戒)를 전수 받았다”함에 감동하여, 표(表)가 아뢰길, ‘계(戒)를 얻기를 위하여, 얼마나 힘써 닦아야(勤修) 합니까?’ 하니 바로 제(濟) 말하되, "정성(精誠)이 지극하다면 일년을 넘지 않으리라.(精至則不過一年)” 했다. 진표(眞表)가 법사(師)의 말씀을 듣고 이름있는(名) 험한 산(嶽山)에 두루 돌아서, 석선계산(錫仙溪山, 一云 邊山)의 부사(不思)의 의암(議菴)에 그치어(止) 삼장(三藏)의 수련법을 받아(該練) 몸을 잊고 참회(亡身懺悔)하길 처음에 칠야(七夜)로써 기한하여 오륜(五輪, 兩手足頭)을 돌로 치니(搏石) 무릅과 팔(膝腕)이 부서지고(俱碎) 피(血)가 바위 낭떨어지에 비오듯이 흘러내렸다. 만일 현성(顯聖)하는 감응(感應)이 없으면, 몸을 버리겠다(捐𨈬)는 결연한 의지(決志)로 다시 칠일(七日)을 기한(期)하여 마침에 지장보살(地藏菩薩)께서 현신(現身)하사 정계(淨戒, 五戒)를 령수(靈授)하니 당현종(唐玄宗) 개원(開元) 이십팔년(二十八年)이요. 신라(新羅) 효성왕(孝成王) 4년(年) 경진(庚辰) 3월(月) 15일(十五日) 진시(辰時)라. 그때 나이(時年) 23세(歲)였다. 그러나 뜻이 자씨(慈氏) 미륵존불(彌勒尊佛)을 뵙는데 있었으므로 감(敢)히 중지(中止)하지 못하고 또 령산사(靈山寺)로 옮기어 부지런히 용맹정진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니, 과연 미륵 부처님이 감동하시어 현신(現身)하사, 「점찰경(占察經)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介)」를 주시며 말씀하시되 「제8간자(第八簡子) 가운대에서 유신득묘계(於中第八簡子 踰新得妙戒), 제(9)간자(第(九)簡子) 유증득구계(喩增得具足戒)라.(喩新得妙戒 第簡子喩增得具戒) 이(斯) 2간자(簡子), 이(是)는 내손(我手)의 손가락 뼈(指骨)요, 나머지 모두는(餘皆) 침단목(沈檀木)으로 만들었나니(造) 모든 번뇌(煩惱)를 깨우치리라. 너는 이로써 법(法)을 세상에 전하여(汝以此傳法於世) 사람을 제도(濟度)하는 뗏목(津筏)을 만들라.」하니(作〔濟〕人津筏) (缺) : ‘삼국사기’ 등에서는 “表”로 나온다 진표(眞表) 이미 성별(聖莂, 法文)을 받(受)으시고 금산(金山)에 와서 살았다(來往). (表旣受聖莂來住金山) 해마다 단을 열어(開檀) 뉘우치도록 베풀고(㤆張) (每歲開壇) (㤆張法施〔法施壇席精嚴末季未之有也〕) 풍습을 교화(風化)하도록 법을 펼치시다(風化) * 점찰경(占察經): 占察善惡業報經≫의 약칭 * 간자(簡子): 占察에 사용되는 문자가 기록된 패쪽 풍습을 교화(風化)함은 이미 펼쳐지니(風化) 그러는 동안에(旣) 아슬라주(阿瑟羅州, 江陵)의 섬사이(島嶼間)를 주유(周遊)하니 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魚鱉成橋) 수중(水中)으로 맞이하여 들어가(迎入) 법(法)을 강론하고 계(戒)를 주시었다. 바로 천보(天寶) 11년(十一載) 임진(壬辰) 2월(月) 보름날(望日)이라.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들으시고, 궁궐(宮闈)으로 맞아 들여(迎入) 보살계(菩薩戒)를 받으시고, 나락(벼 租) 7만 7천석(七萬七千石)을 시주(嚫)하였다. 〔스님께 공양을 겸하여 베품을 시주(嚫)라함, 供僧兼施曰嚫)〕 산초나무 뜰(椒庭)에 나열해(列) 대신(大臣, 岳)들 모두가 계와 품(戒品)을 받고, 비단 5백필(絹五百端)과 황금 오십량(黃金五十兩)을 보시하였다. 모다 받어서 모든 사찰에 나누어주어, 널리 불사(佛事)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의 사리(骨石)가 일찍이 금강산(金剛山) 발연사(鉢淵寺)에 있었고 그를 전한 것을 영심보종(永深寶宗)이라고 하며 신방(信芳) 체배(體环) 배해(环海) 진선(眞善) 석충(釋忠) 등(等)은 모두다 산문(山門)에서 령수조심(領首祖深)되다가 간자(簡子)을 전하여 속리산(俗離山)에 머물러 극가자(克家子)가 되었다. |
一說云, |
일설(一說)에 이르길(云), |
律師年二十七於肅宗 上元元年 新麗景德王十九年 庚子 師年四十三 蒸米二十斗曬乾爲糧 詣保安縣一云, 扶安入邊山不思議房 以五合米爲一日費 除一合米養鼠 勤求戒法於彌勒像前三年而未得授記 發憤而捨身岩下 忽有青衣童手捧而置於石上 更發志願約三七日 日夜勤修扣石懺悔 手臂折落至七日 地藏[艹+艹]振金錫 來爲加持手臂如舊 [艹+艹]逐之袈裟 及鉢 師感其靈應 倍加精進 滿三七日 即得天眼 見兜率天 衆來儀之相 地藏彌勒同時現前. 慈氏爲先摩頂曰, 善哉 大丈夫求戒如是 不惜身命耶 地藏亦授戒 本慈氏 復令二栍, 一題曰九者, 一題曰八者, 謂之曰, 此二簡子是吾手指骨也. 喩始本二覺 九者法爾 八者新薰 成佛種子 以此當知果報 汝捨此身後生於兜率 如是語已兩聖 即隱時 上元三年 壬寅四月二十七日. |
율사(師)께서 나이(年) 27(二十七)이라. 숙종(肅宗) 상원(上元) 원년(元年),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9년(年) 경자(庚子)에 율사(師)의 나이 43이라. 찐쌀(蒸米) 20두(斗)를 볕에 말려(晒乾 쇄건) 식량으로 하야(爲糧) 부안변산(扶安邊山) 부사의방(不思議房)에 이르러(詣) 5홉의 쌀로(以五合米) 하루 소비(爲一日費)하는데 한홉(一合)을 제하여 쥐에게 주고(養鼠) 미륵불상 앞에서 삼년을 삼가 계(戒)를 구함에(勤求戒法於彌勒像前三年) 아직 수기를 받지 못할새(未得授記), 발분(發憤)하여 몸을 바위 아래로 투신하니(發憤而捨身岩下) 홀연히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받들어 암상(岩上)에 올리니 다시 분발(分發)하야 삼칠일(三七日)을 밤낮으로(日夜) 삼가 수행(勤修)함에 지장보살(地藏菩薩)께서 풀[艹+艹]과 금석(金錫)을 가져와서,(地藏[艹+艹]振金錫來) 가지(加持: 부처의 大慈大悲한 힘)로써 손과 팔(手臂)이 예전과 같이(如舊) 되니(爲加持手臂如舊) 풀[艹+艹]로는 가사(袈裟) 및 바리때(鉢)를 율사(師)께서 그 신령(靈)스럽게 응(應)함에 감동하사 배가(倍加)해 정진(精進)하여 삼칠일(三七日)이 마침에 곧바로 득천안(得天眼)하야 도솔천(兜率天)의 무리들이(衆) 오는(來) 의식(儀式)의 모습이 보이고 지장(地藏)과 미륵(彌勒)이 동시(同時)에 앞에 나타나시와(現前) 자씨(慈氏, 彌勒尊佛)께서 먼저 정수리를 쓰다듬으시고(摩頂) 말씀하되, [착하도다! 대장부(大丈夫)여, 계(戒)를 구함이 이와 같이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는도다(不惜)~!] 하시니 지장보살(地藏菩薩)께서 또한 계(戒)를 주시도다(地藏亦授戒) 자씨(慈氏, 彌勒尊佛)께서 다시 2개 간자(二栍 2생)로 하여금,(復令二栍) 「일제왈구자(一題曰九者)요 일제왈팔자(一題曰八者)라」 명하시고 〔하나는 九字, 하나는 八字가 쓰여 있었다.〕 「이 두 간자(簡子)는 이것이 나의 수지골(手指骨 손가락뼈)이라. 시각(始覺)과 본각(本覺), 이각(二覺)을 깨쳐야 하나니 구자(九者)는 법이(法爾)오,〔법(法) 자체일 뿐(爾)〕 팔자(八者)는 신훈(新薰)이니, 성불종자(成佛種子)라. 이로써 마땅히 과(果)•보(報)를 알지니 (以此當知果報) 너는 몸을 버린 후(汝捨身後)에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리라(生於兜率)」 이같이 말씀 뿐이시고(如是語已), 양성(兩聖)께서는 곧 잠시 계시더라(卽臨時) 상원(上元) 삼년(三年) 임인(壬寅) 4월 27일이라. |
師受教已 欲重創金山寺也 而來至大淵津 忽有龍王出 獻玉袈裟 將諸眷屬侍往金山寺藪四方來 不日成之 復感慈氏從兜率駕雲而下去師 授戒師因勸檀緣 鑄成彌勒丈六像, 復畫下降授戒 威儀之相於殿之南壁 唐代宗廣德二年 新羅景德王二十三年 甲辰六月九日 鑄成. 丙午五月一日 安置殿中 是歲唐代宗 大歷元年 新疆恵恭王二年也. |
율사(師)께서 가르침을 받으시고(受敎已), 금산사(金山寺)를 중창(重創)하고자 대연진(大淵津)에 와서 이르르니 홀연히 용왕(龍王)이 나타나사 옥가사(玉袈裟)를 헌성하다. 한편, 제권속(諸眷屬)이 금산사(金山寺) 늪(藪)에 사방(四方)에 와서 모시니, 몇일 지나지 않아 완성하였다(不日成之) 다시(復) 자씨미륵존불(慈氏彌勒尊佛)께서 강응하사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구름을 타고 율사(師)에게 내려와서(駕雲而下去) 율사(師)에게 계(戒)를 주시난대 율사(師)에게 시주(檀緣 단연)를 권하시며,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주성(鑄成)하라” 하시고 거듭(復) 하강(下降)하야 “계(戒)를 주는 예식(威儀)의 모습(相)을 미륵전(彌勒殿)의 남쪽 벽(南壁)에 그리라” 하시어 당대(唐代) 광덕이년(廣德二年)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23년(年) 갑진(甲辰) 6月 9日 주조(鑄造)하여 완성(完成)하였다. 병오(丙午) 5月 1日에 미륵전(彌勒殿) 가운데(中)에 안치(安置)하니 당대(唐代) 대력원년(大歷元年) 신라혜공왕(新羅惠恭王) 2年이라. |
[참고자료] <삼국사기>에 나오는 끝부분 첨가 |
其骨石今在鉢淵寺, 即爲海族演戒之地. 得法之䄂領曰 永深·寳宗·信芳·体珎·珎海·真善·釋忠 䓁, 皆爲山門祖. 深則眞傳簡子住俗離山爲克家子, 作壇之法與占察六輪稍異, 修如山中所傳夲䂓. |
그 사리(骨石)는 지금 발연사(鉢淵寺)에 있으니, 곧 해족(海族)들을 위해 계를 펼쳐준 곳(地)이다. 법을 얻어 유령(䄂領)을 하는 제자는 영심(永深), 보종(寶宗), 신방(信芳), 체진(體珍), 진해(珍海), 진선(眞善), 석충(釋忠) 등이고 모두가 산문(山門)의 조사(祖師)가 되었다. 영심(永深)은 곧 진표의 간자(簡子)를 전하였는데, 속리산(俗離山)에 살면서 법통을 계승하였고 단(壇)을 만드는 법은 점찰육륜(占察六輪)과는 조금은 다르나, 산중(山中)에서 전하는 본규(夲䂓)와 같이 닦았다. |
* 점찰육륜(占察六輪)은 ≪점찰경≫ 상권에 나오는 목륜상법 중 1에서 18까지의 숫자를 세 개씩 새긴 6개의 목륜으로 三世 중에서 받는 업보의 차별을 점치는 육륜상법을 말하는 것이다. * 송고승전(宋高僧傳) ‘백제국금산사진표전(百濟國金山寺眞表傳)’에서는 미륵보살께서 삼법의(三法衣)와 와발(瓦鉢)을 주고 진표(眞表)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무릎 아래로 부터 아(牙)도 아니고 옥(玉)도 아닌 두 개의 첨자(籤子:첨은 일종의 예언 도구)를 내어 주었다 한다. 그 첨의 하나에는 구자(九者), 다른 하나는 팔자(八者)라는 제(題)하여 있었다 하며 이를 주며 미륵보살은 표사에게 "계를 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죄를 참회하여야 한다. 여기(2첨)에 다시 108첨을 더하여 첨상(籤上)에 108번뇌의 이름을 써서 계를 구하려는 사람이 혹은 90일이나 40일, 3•7일 행첨(行籤)하여 지극히 정진하고 그 기한이 다 차는 날 9와 8의 이 첨을 108첨과 합하여 불전에서 공중을 바라고 던져 그 첨이 땅에 떨어진 것으로서 죄가 멸하였는지 멸하지 않았는지를 알아본다. 만약 108첨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오직 8, 9의 2첨만이 단의 한 가운데에 서 있으면 곧 ‘상상품계(上上品戒)’를 얻게 되며, 만약 많은 첨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 두어개의 첨이 8, 9 첨에 부딛혀 있으면 그 첨이 무슨 번뇌명인가를 보고 다시 참회한 뒤에 그 번뇌첨과 8, 9자를 함께 던져서 그 번뇌참이 떨어져 가면 ‘중품계(中品戒)’라 하고, 만약 그것들이 8, 9자를 덮게 되면 곧 죄가 멸하지 않은 것이므로 계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시 참회를 행한지 90일이 지나서 얻으면 ‘하품계(下品戒)’가 된다 하였다." |
師出金山 向俗離山 路逢牛乘車者 其牛等向師前 跪膝而泣 乘車人下問, 何故此牛等見和尚泣耶 尚從何而來師曰, 我是金山藪眞表儈也. 我曾入邊山不思議房於彌勒地藏前現授戒法 眞栍欲覔期在鎭長 修道之處故來爾牛等外愚内明知我戒法故如此是也. 其人曰, 畜生尚有信心 況我爲人豈無心乎. 即心鎌自斷頭髮 師爲祝髮授戒 |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金山寺)에서 나와서 속리산(俗離山)으로 향할새,
모든 소를 타고 우거(牛車)를 탄 사람들을 만나니,
그 소들이 사(師)앞에 무릎을 꿇고 울으니,
소와 우거(牛車)를 탄사람들이 내려서 묻되,
“무슨까닭으로, 이 소들이 화상(和尙)을 바라보고 울으며,
또, 화상(和尙)은 지금 어느곳으로부터 오십니까?” 하니,
율사(師)가 말하되,
“나는 금산수(金山藪)의 진표승(眞表僧)입니다.
내가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미륵(彌勒),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타난 앞에서 계법(戒法)과 간자(眞栍)를 받고
오래토록(鎭長) 기약하고 수도(修道)할 만한 곳이 있는지 찾고자 오는 것일 뿐입니다.
이 소 등(等)이 밖으로 어리석으나,
안으로 나의 계법(戒法)을 밝게 알는 고(故)로, 이같이 하는 것입니다.” 고하니,
그 사람들이 말하되,
“축생(畜生)도, 오히려, 신심(信心)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가 사람이 되어서, 어찌 무심(無心) 하겠습니까?”하고,
즉심(卽心)으로, 낫으로 자기들의 머리털을 자르고, 계(戒)를 받었다. * 鎌: 낫 겸
俗離洞中山 吉祥草生處而識之還向 溟州海邊 魚鱉黿鼉出海向前綴身如陸師踏入海 唱念戒法還出 至高城郡 入皆骨山 始創鉢淵藪 開占察法會住 七年. 溟州界穀不登 人民飢饉 師爲說戒法人 人奉之致敬省三寶 俄然於高城海邊有無數魚類 自死而出人民賣而爲食得免死焉 |
속리산(俗離山) 마을 산중(洞中山)에 길상초(吉祥草)가 자라는 곳(生地)을 알아놓고,
돌아와 명주(溟州) 바닷가에 이르르니,
고기와 자라와 미역이들이 바다에서 나와서,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앞을 향해서, 몸을 맛대어, 육지같이 만들거늘,
진표율사(眞表律師) 바다를 육지같이 밟고 들어가서, 계법(戒法)을 소리내 창(唱念)하고,
되돌아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러, 개골산(金剛山)으로 들어갔다.
비로소,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고 연수(淵藪)에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고
머무신지 7년이 되었다.
이때에 명주(溟州) 부근에, 곡식이 여물지 못하여(穀不登),
백성들이 굶주림이 극심함에도 불구하고,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계법(戒法)을 강설한다하니,
사람들이 삼보(三寶)를 성찰하고 경의를 표하여(致敬) 받들으니,
갑작스레(俄然) 고성(高城) 해변(海邊)에 무수한 고기떼가 스스로 죽어 떠오르니
백성들이 팔아 식량을 얻어서 죽음을 면했다.
師出鉢淵 復到不思議房 然後 往嚴親. 又到眞門大徳房居住 時俗山大徳永深與融宗佛陀等同 詣律師所伸請曰, 我等不遠千里 來求戒法願授法門 師默然不答三人者乘桃樹上倒墮於勇猛懺悔 悟師乃傳敎灌頂逐與娑袈及鉢供養 次第秘法一卷曰, 察善惡業報經 二卷一百八十九 栍復與彌勒眞栍九者 八戒曰 九者法爾八者 新熏成佛種子 我己 付囑汝等持此不歸俗離山吉詳 草生處 (缺) 立精舍依此多年 廣度人天流布後世永深等 奉敎直往 吉祥草生處剏在名曰, 吉洋庵永深 (缺) 始設占察法會 律師陪其父親 更至鉢淵同修道業而終孝之厥後 師登在東大碞上示滅弟子等 不重眞體而供養之 會于骸骨散落 以土覆藏乃爲幽宮 忽有青松即出於其處 歲月久遠枯而後生後更生 一樹其根一也. 至令雙樹存焉 凡有致敬者比 比松下覔骨 唐代宗大歷十二年 新羅 恵恭王十三年 丁巳九月 有無極翁者 特詣松下拾骨 盛簡於大岩 上雙松下立石。 |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발연사(鉢淵寺)로부터 나와서,
다시, 불사의방에 이르른 연후에 엄친(嚴親)에게 가서 뵈었다.
또한, 진문(眞門)인 대덕방(大德房)에 이르러 거주(居住)할때에,
속리산(俗離山)의 대덕(大德)인 영심(永深)과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으로 더부러 함께,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있는 곳에 이르러 (뜻을) 펼쳐 청하길(伸請),
“저희들이 천리길이 멀다않고 와서,
계법(戒法)을 구하고자 왔사오니, 원컨대, 법문(法文)을 주시옵소서.“ 하니,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묵연(默然)히 대답을 아니할새,
세사람이 복숭아나무에 올라가, 떨어져 뒤집히며 용맹하게 참회하니,
진표율사(眞表律師)께서
이내, 관정(灌頂)하여 낫낫히 깨우치게 하시었다,
一百八十九 栍 復與彌勒眞栍九者 八戒曰
더불어, 가사(娑袈)와 바릿대(鉢)와 공양차제(供養次第)와 비법(秘法) 1권(一卷)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仙樂業報經) 2권(卷)과 189종(種) 간자(栍)와
다시, 미륵(彌勒)의 진간자(眞栍) 구자(九者), 팔자(八者)를 전하시고,
경계(戒)하길,
구자(九者)는 법이(法爾)오, 〔법(法) 자체일 뿐(爾)〕
팔자(八者)는 신훈(新薰)이니 성불종자(成佛種子)라.
師出鉢淵 復到不思議房 然後 往嚴親. 又到眞門大徳房居住 時俗山大徳永深與融宗佛陀等同 詣律師所伸請曰, 我等不遠千里 來求戒法願授法門 師默然不答, 三人者乘桃樹上 倒墮於勇猛懺悔 悟師乃傳敎灌頂逐 與娑袈及鉢 供養次第 秘法一卷, 占察善惡業報經 二卷 一百八十九 栍 復與彌勒眞栍九者八者 戒曰, 九者法爾 八者新熏 成佛種子 |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발연사(鉢淵寺)로부터 나와서,
다시, 불사의방에 이르른 연후에 엄친(嚴親)에게 가서 뵈었다.
또한, 진문(眞門)인 대덕방(大德房)에 이르러 거주(居住)할때에,
속리산(俗離山)의 대덕(大德)인 영심(永深)과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으로 더부러 함께,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있는 곳에 이르러 (뜻을) 펼쳐 청하길(伸請),
“저희들이 천리길이 멀다않고 와서,
계법(戒法)을 구하고자 왔사오니, 원컨대, 법문(法文)을 주시옵소서.“ 하니,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묵연(默然)히 대답을 아니할새,
세사람이 복숭아나무에 올라가, 떨어져 뒤집히며 용맹하게 참회하니,
진표율사(眞表律師)께서
이내, 관정(灌頂)하여 낫낫히 깨우치게 하시었다,
一百八十九 栍 復與彌勒眞栍九者 八戒曰
더불어, 가사(娑袈)와 바릿대(鉢)와 공양차제(供養次第)와 비법(秘法) 1권(一卷)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仙樂業報經) 2권(卷)과 189종(種) 간자(栍)와
다시, 미륵(彌勒)의 진간자(眞栍) 구자(九者), 팔자(八者)를 전하시고,
경계(戒)하길,
구자(九者)는 법이(法爾)오, 〔법(法) 자체일 뿐(爾)〕
팔자(八者)는 신훈(新薰)이니 성불종자(成佛種子)라.
我己付囑汝等 持此不歸俗離山吉詳 草生處 (缺) 立精舍 依此多年 廣度人天流布後世 永深等 奉敎直往 吉祥草生處剏在名曰, 吉洋庵 永深 (缺) 始設占察法會 律師陪其父親 更至鉢淵同修道業而終孝之厥後 師登在東大碞上示滅. |
내 몸은 너희들에게 부탁해 맡기노니(付囑),
너희들은 이것을 갖이고 속리산으로 돌아가지 말고
길상초(吉詳草)가 자라는 곳에서 (缺) 정사(精舍)를 세우고,
이에 의지해 여러해 동안 넓은 도량(廣度)을 세우고 후세 사람들에게 유포(流布)하라하니
영심(永深) 등(等)이 가르침을 받들어 곧바로 가서(直往)
길상초(吉祥草)가 자라는 곳에 개창(改剏)하고, 이름을 길상암(吉洋庵)이라 하였다.
영심(永深)은 (缺) 비로소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설단(設壇)하니
율사(律師)께서 그 부친(父親)을 모시고(陪),
다시 발연사(鉢淵寺)에 이르러 함께 도업(道業)을 닦으시어,
끝까지 효(孝)를 다한 연후(厥後)에
율사(律師)께서 동쪽 큰 바위(大碞)위에 올라 시멸(示滅)하시다.
* 시멸(示滅) ① 중생(衆生)이 도(道)를 닦지 않으므로 중생(衆生)을 위(爲)하여 석가(釋迦)가 돌아간 사실(事實).
②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 보이는 일. ③ 부처, 보살, 또는 고승의 죽음. 입적(入寂). 시적(示寂).
弟子等 不重眞體而供養之 會于骸骨散落 以土覆藏乃爲幽宮 忽有青松即出於其處 歲月久遠枯而後生後更生 一樹其根一也. 至令雙樹存焉 凡有致敬者比 比松下覔骨 唐代宗大歷十二年 新羅 恵恭王十三年 丁巳九月 有無極翁者 特詣松下拾骨 盛簡於大岩 上雙松下立石。 |
제자(弟子) 등(等)이 진체(眞體)가 무겁지 않아 해골(骸骨)을 흩어 떨어뜨린 곳을 향하여
공양(供養)의 집회를 하고 흙을 덮어 감추니 이내 유궁(幽宮)에 거하시게 되었다.
홀연히 청송(青松)이 있는데 곧, 그 처하는 곳에서 나온 세월이 몹시 오래된 고목(枯)으로
후생(後生) 후(後)에 갱생(更生)한 한그루 나무로, 그 뿌리가 하나더라.
더욱이 두 나무가 남아 있더라.
무릇 공경하는 자가 이곳 저곳(比比)에 이르러 소나무 아래에서 뼈를 찾으니,
당대종(唐代宗) 대력(大歷) 12年 신라(新羅) 혜공왕(恵恭王) 13年 정사(丁巳) 9月에
무극옹(無極翁)이라는 이(者)가, 특별히 소나무 아래에 이르러 뼈를 수습하여,
큰 바위 위에 성간(盛簡)하고 두 소나무 아래에 돌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