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글쓰기 93 ㅡ 집 (사소)
어릴 적 밤이 되면, 늘 엄마와 아빠가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소릴 듣고 잠이 들었다. 방 한 칸은 할머니를 드리고, 나머지 한 칸에선 엄마와 아빠 그리고 여섯 남매가 같이 잤다. 아빠께 야단을 맞은 날도, 오빠랑 싸운 날도 어디 마땅히 갈 버릴 곳이 없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와 다섯 자매 이렇게 여덟 명이 함께 잠에 들면 아무렇지도 않게 부산한 아침을 맞았다.
방에는 항상 같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영역이 있었다. 부엌문 가까이는 부엌 일은 주로 하는 나와 언니 엄마가 그리고 가운데는 동생들이, 문지방 바로 옆에는 오빠 그리고 아빠 베개가 놓였다. 엄마랑 아빠는 같이 눕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날도 우리가 다 잠들 때까지 이쪽에서 저쪽까지 들리게 서로 천정에 대고 이야기를 나누셨다.
아빠는 장흥중학교 선생님이셨는데, 몇 달째 월사금을 못 낸 학생은 이번 달 아빠 월급에서 내줘야 한다거나, 반장이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는데, 요새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 부모님이 이혼을 하는 과정인 것 같다거나, 주로 아빠가 가르치는 학생들 얘기를 하였다.
어느 날 밤 대화는, 아빠네 반 환경 정리에 대한 얘기였다. 학부형들 손을 빌리지 않게 어떻게 하자는 일종의 의논이었다. 환경정리 부담을 학생에게 주면 자주 학부형이 학교에 화분 등을 사들고 오게 되고, 의도치 않게 아이들을 차별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교실 광목 커튼을 뜯어와 빨간 대야에 빨아 풀을 쑤고 다리미 질을 하셨다. 그러면 아빠는 집에서 키운 국화 중에 가장 예쁜 것을 두어 개 가져가시곤 했다. 아빠는 여러 용도로 봄에는 화분마다 진분홍 연분홍 철쭉을 참 예쁘게 가꾸셨고 가을에는 잔잔한 노란 소국과 주먹보다 크고 탐스러운 하얀 국화를 피우셨다.
대가족을 거느린 아빠는 광주로 이사를 오며 계획선에 걸린 낡은 양옥집을 아주 싸게 샀다. 박봉에 첫 월급마져 버스에서 날치기 당했던 오래되고 튿어진 양복주머니. 오후 다섯 시면 자주 신문지를 깔고 식구대로 모여 앉아 밀가루 반죽을 밀어 가족의 배를 채워주신 엄마의 도톰하고 투명한 손마디. 나의 집의 기억은 그랬다. 아빠는 며칠이고 원리를 공부하신 후 엄마와 함께 낡은 집을 개축하면서 거의 모든 것을 손수 만드셨다.
어느 날은 엄마와 아빠가 직접 마당을 파고 뽐뿌 옆에 수도를 들여 놓은 대 공사를 하셨다. 흙탕물에 이어 콸콸 쏟아지던 수돗물. “어허!어허~” 보일러를 깔며 고개를 좌우로 기웃하시며 실험을 하던 아빠의 진지한 눈동자와 마른 입술. 손보다 큰 목장갑을 끼고 며칠 간 온 가족과 동원되어 모래를 치고 자갈을 골라내던 나의 어린 손. 쇠손이 지나가면 시멘트 반죽에 고이던 물기.
자라면서 가끔은 옥상이 꿈에서 나왔다. 엄마 아빠가 파란대문 옆 화장실 옆에 목욕탕을 만들고, 그 위로 계단을 만들어 옥상을 올리던 날, 첫 건축은 그랬다. 옥상에 연초록 조롱박이 조렁조렁 열리고 손톱 자욱에 초록이 초록초록해지자 하필 콤파스로 어디 초등학교 누구라고 새겨버려 쫒겨날 뻔 해던 그날 밤 혼자만 밝은 달빛. 부자인 친 엄마 아빠가 언젠가 나타날 지도 모른다는 공상이 존재 했던 시절. 없는 게 더 많았던 가난한 시절. 노역으로 고단하기도 하고, 그날이 그날 같아 마냥 지루하였으나, 지금은 귀하고 그리운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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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대문근처 화장실, 옥상
방 하나의 부엌쪽, 거실쪽.
그리고 지루한 ‘도란도란’
사소 님의 자매들이 우애가 깊고 부모님께 깊은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모두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왜 손자나 손녀를 데리고 주무시지 않았을까요!
이곳에 쓰지 않았지만 할머니 방에는 이혼하신 작은아빠와 작은아빠 딸내미가 같이 잤어요. 집근처에도 부모님이 건사하신 일가 친척이 꽤 있었어요.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섬세한 디테일 묘사에 마치 제가 그때 그 일을 보고 듣는 것 같습니다. 그때 우리들 대부분의 집 모습 같습니다.
돌아 가고 싶은 그립고 정겨운 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