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쪼르릉- 산 속의 봄은 아직 쌀쌀한 한기를 다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산 아래쪽의 봄은 만개한 꽃송이와 함께 활짝 피어있었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볼을 스치는 바람은 점점 부드러워졌고, 그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꽃향기도 점차 짙어지고 더 이상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그야말로 춘삼월 호시절이란 말이 실감나게 해 주었다. 추방을 당한지 며칠이 지나 수많은 기암거송으로 이루어진 황산의 산자락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때로는 산짐승들을 잡아먹기도 하고, 때로는 인가에서 장작 한 무더기를 패준 대가로 나물죽 한 그릇을 얻어먹으며 온갖 고생을 했지만 서서히 멀어져 가는 황산은 바위처럼 무딘 그의 감성에도 한 가닥 감회를 어리게 했다. 그러나 십 년이 넘게 단 한 순간의 틈도 없이 용무에만 매달렸던 진우청은 그 감회의 색채를 세세히 잡아내지 못하고 이내 입술을 움직였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내쫓기고 보니 이거야말로 사고무친의 고아가 된 기분에, 끈 떨어진 연 신세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산에 있을 때는 몰랐다. 시키는 대로 굶으라면 굶고, 먹으라면 걸신들린 듯 사부께서 내어 준 음식을 목구멍 속으로 쑤셔 넣으면 되었으니까……. 그러나 산을 내려오고, 산짐승들보다는 인간들을 더 많이 접하면서부터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 주먹밥 한 개를 구하려 해도 돈이 필요했고, 나물 죽 한 그릇도 대가 없이는 얻어먹기 힘들었다. 모두들 눈이 퀭하니 들어갔고, 영양가 없는 나물죽만 들이킨 어린 아이들은 배만 볼록한 채 아사 직전의 모습이었다. 돈이 있는 나그네들은 고갯마루 아래에 자리한 객점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 할 수도 있었고, 풍찬노숙을 면할 수도 있었다. 다시 한 번 사부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봇물처럼 가슴을 타고 흘렀다. 기암절벽생활 십 년이면 산삼이 세 뿌리라 했는데 사부는 산삼은커녕 땡전 한 푼 쥐어주지 않고 쫓아 보낸 것이다. 그런다고 속절없이 굶어죽을 자신은 아니었지만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노인네란 생각이 거듭 들었다. 저곳에서는 더더욱 돈이 필요할 것이고, 땡전 한 푼 없는 자신은 그야말로 거지신세가 될 것이다. 당장 어디서 자고, 무얼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일단은 앞에 보이는 세상 속에 파묻혀 봐야 할 일이었다. 어스름이 내리는 시간인지라 완전히 어둠이 깔리기 전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관도를 따라 성읍까지 달려가는 일도 만만치 않아 보였는데 마침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달려오는 마차는 더없이 반가운 마음이 들게 했다. 빠르게 치달리다 갑자기 멈춘 것은 아니지만 한 마리 곰처럼 떡 버티고 서서 통나무 같은 팔을 마구 흔드는 진우청의 모습에 앞에 선 말 두 마리가 양 앞발을 번갈아 치켜들며 투레질을 했다. 산 속에서 십여 년을 지내며 심심찮게 맹수들과 마주치고 그 눈들을 보아왔던 진우청이었다. 야생 짐승들의 눈빛에는 인간에게서는 볼 수 없는 흉맹함이 섞여 있었다. 특히 밤이 되면 그 흉맹함은 도깨비 불 같은 두 개의 불빛으로 쏘아졌다. 어스름 달빛을 타고 등잔만하게 쏘아져 나오는 두 개의 불빛을 도깨비불로 착각하여 오금이 저린 적도 있었다. 좀 더 지나 그것들의 실체를 알고 익숙해지며 잊고 있었던 느낌이 죽립을 쓴 마부의 눈빛으로 뇌리 속에서 되살아났다. 조금 전 죽립 사이로 뻗어 나온 마부의 눈빛은 이제껏 마주친 가장 흉맹한 맹수의 눈빛보다 더한 흉포함이 담겨져 있었다. 인간의 눈도 저런 빛을 낼 수가 있는 모양이구나 하며 재차 눈을 마주쳐가던 진우청은 이제는 착각인 듯 순식간에 가라앉아 있는 마부의 눈빛에 잠시 혼란을 느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이 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뚜렷하게 각이 진 턱과 날카롭게 꼬아진 세 가닥 수염에서 완고함과 단호한 기운이 절로 풍겨 나왔다. 그 턱이 움직이며 메마른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그런 낌새를 전혀 못 느끼는지 진우청은 빙글거리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채찍을 듯 손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부의 소매가 천천히 부풀고, 늘어져 있던 채찍 한쪽 끝이 독사의 대가리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는다면 눈치 채지 못할 변화였지만 마부는 채찍을 든 손에 공력을 주입하고 있었다. 채찍을 휘둘러 당랑처럼 겁도 없이 마차를 막은 건방진 인간을 단번에 처치하려고 했던 마부는 나직한 호흡과 함께 왼쪽 손에 모았던 공력을 회수했다. 단 한 번의 손놀림이면 깨끗이 마무리하고 다시 마차를 전진시킬 수 있겠지만 대로변에서의 살인은 전음을 날린 여인의 말처럼 귀찮은 일을 만들지도 모른다. 당분간은 가장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할 입장이었다. 차후에 벌어질지도 모를 귀찮은 일의 싹은 잘랐지만 승차 허락이라도 받은 듯 당당하게 마차를 향해 다가오는 진우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은 마부는 면사 여인 쪽을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처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태워 줄 입장도 아닌 사정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마차 지붕위로 훌쩍 솟아올랐다. 갑작스런 진우청의 행동에 마부는 물론이고 주렴안으로 상체를 끌어들이며 자리에 앉던 여인도 흠칫 신형을 굳혔다. 단지 네 마리의 말들만이 마차를 끌고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허리춤에 있던 검이 검갑에서 세 치 정도의 검신을 드러내며 새하얀 검광을 마차 안에 뿌렸다. 죽립인의 상체가 미미하게 움직임과 동시에 검은 가장 뽑기 좋은 상태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립인의 몸이 한번만 더 움직인다면 검은 순식간에 천장을 향해 찔러들 것 같았다. 외양은 다른 마차와 같았지만 화살이나 도검이 침입하지 못하게 강철로 덧대어진 지붕은 자신의 검이라 해도 꿰뚫기는 불가능했다. 그것을 잠시 망각한 것이다. 그런 속도로 달려가며 좌우로 흔들어 버리면 잡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큰 공처럼 동그랗게 만들어진 매끄러운 지붕 위에서 거머리가 아닌 이상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떨어지는 충격에 목뼈라도 부러져 죽으면 조금 귀찮아 질 소지도 있겠지만 넓은 어깨 위에 달린 굵은 목이 쉽게 부러질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우수한 품종의 말들은 바람처럼 질주했고 마부의 고삐 질에 따라 마차는 관도의 좌우 쪽을 금새라도 벗어날 듯 뱀 꼬리처럼 요동치며 치달리기 시작했다. 마차의 질주가 점점 더 거칠어지고 마차 안에 앉은 사람들의 자세마저도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 할 즈음에도 마차 지붕 위에 버티고 선 진우청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조금 전에 검을 뽑으려 하던 죽립인이 면사 여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더욱 크게 요동을 쳤고 안에 있던 사내들도 머리 위에 있는 손잡이를 잡기 시작했다. 흑단목에 강철로 덧대어진 마차 지붕까지 뚫고 모든 상황을 쳐다 볼 수는 없었지만 세찬 폭풍우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신형을 흔들며 둥근 지붕 위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진우청의 움직임이 마지막 한줄기 노을에 비친 어렴풋한 그림자와 함께 확연히 느껴졌다. 관도의 바닥이 다른 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평하다 하지만 빙판처럼 매끄러울 리 없다. 넓게 깔아 놓은 돌판 사이로 움푹 들어간 틈도 있었고, 깨어진 돌이 불쑥 튀어나온 곳도 있었다. 마부 노인은 고삐를 흔들어 마차의 바퀴가 교묘하게 그것들을 밟고 지나가게 했지만 그때마다 지붕 위에 선 진우청은 두 다리와 허리로 마차가 요동치며 전해지는 충격들을 모조리 흡수하고 춤을 추듯 흔드는 두 팔로 남은 진동들을 허공으로 흩뿌리며 버티고 서 있었다. 그 현란하고 기묘한 움직임에 면사 여인은 일순 모든 걸 망각한 채 지붕위로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지붕 위의 낮도깨비에게는 지금까지 달려온 길 중 가장 험하고, 마지막 시험대가 될 것 같았다. 이 곳 마저 버틴다면 더 이상 마차를 흔드는 방법으로는 떨어뜨릴 수가 없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마차는 그만큼 반대쪽으로 쏠리며 급기야 한쪽 바퀴 두 개가 들리기 시작했다. 말에 의해 앞으로 끌려가는 힘과, 급회전에 의해 밖으로 쏠려나가려는 힘이 위태롭게 균형을 이루어 두 개의 바퀴만으로 마차가 굴러가는 상황에서 그 팽팽히 균형을 이룬 힘의 한 요소가 된 마차안의 사람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급히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런 마차 하나쯤 허공에서 떨어져 덮친다 하더라도 여유 있게 대처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었기에 최악의 경우엔 마차를 포기하고 밖으로 훌쩍 날아 나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때는 말 그대로 마차는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마차 바닥 밑에 숨긴 모든 물건들도 아울러……. 그런 복잡한 생각들이 다섯 사람들의 행동을 순간적으로 굳어지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그 방향이 반대쪽으로 돌려졌다. 굽은 관도 밖으로 휩쓸려 나가려던 마차는 기우뚱하며 중심을 잡았고, 번쩍 들려졌던 두 개의 바퀴를 가까스로 지면에 붙이며 다시 직선으로 뻗은 관도 위로 달려 나갔다. 마차 지붕을 한발로 강하게 내려찍고 허공으로 솟구쳤던 진우청이 저만치서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마부의 고삐 질에 따라 한 치 오차 없이 움직이는 네 마리의 말들은 마부와 면사여인의 의중을 짐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발굽소리조차 죽이며 마차를 끌고 나갔다. 여인의 작고 흰 손이 무심결에 들려져 면사를 젖히고 볼을 쓰다듬었다. 왼쪽 볼 아래에 자리한 작은 점 하나가 여인의 손끝에 닿았다. 여인은 흠칫 놀라며 얼른 손을 아래로 내렸다. 무심결에라도 이질감을 느끼며 지금처럼 손을 갖다 대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제껏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왼쪽 볼 아래의 점에 뚜렷한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눈빛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여인은 빠르게 지나간 상황들을 반추(反芻)했다. 무심결에 느껴지는 왼쪽 볼 아래의 이질감이 그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러나 오(吳) 노야가 의도적으로 거칠게 모는 마차 지붕 위에서 정말 낮도깨비처럼 견디고, 오 노야의 평정심까지 흔든 인간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여인의 뇌리에 진우청의 마지막 목소리가 강하게 울려왔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감사 합니다
잼납니다
즐독! 늘 고맙습니다.
즐감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ㅈㄷ ㄳ
잘보고 갑니다. 늘 고맙습니다!
즐감 ~~~~~~~~
왠지 재밌을 것 같은... 잘읽겠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ㄳ
즐감합니다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
잘봤습니다
^*^
즐감 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합니다
즐독이랍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