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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셰 랑리 탕빠의 <마음을 닦는 여덟 편의 노래>
모든 생명 가진 존재들을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보다도 더 뛰어난 존재로 여겨
최고의 목적을 이루려는 결심을 지니고 나로 하여금 언제나 중생을 사랑하게 하소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언제나 나 자신을 가장 낮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내 가슴속 깊이 그들에게 애정과 존경을 보내게 하소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번뇌가 마음속에 들어오는 순간
당당히 맞서 물리치게 하소서.
악한 본성을 가진 이들이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행동에 사로잡혀 고통 받은 것을 보면
마치 귀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다른 사람들이 질투심에서 나를 비난하고 터무니없이 욕을 퍼부어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패배를 받아들이고 승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게 하소서.
큰 기대를 품고 내가 은혜를 베푼 사람이 나를 심하게 상처 입힐지라도
나는 그를 거룩한 영혼의 친구로 여기게 하소서.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나의 어머니인 모든 중생에게
행복과 이익을 함께 바칠 수 있게 하소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주는 모든 것을 남몰래 내가 대신 받을 수 있게 하소서.
생각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모든 것이 환상임을 깨닫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집착에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하소서.
결론적으로,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 자비심과 자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 다른 이들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덜 이기적인 마음을 함양하고자 노력해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신을 믿든 안 믿든, 부처님을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선한 가슴과 따뜻한 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근본입니다.
수행자는 어떤 적을 상대로 싸우겠습니까? 내부에 있는 적입니다. 무지, 분노, 집착, 자만심이 궁극적인 적입니다. 이들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입니다. 지혜와 선정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 이타심이야말로 종교의 참된 진수이며 불교의 참된 본질입니다.
마음을 이타심으로 가득 채우고 수행을 마음에 새기게 하는 수단으로써, 게셰 랑리 탕빠의 <마음을 닦는 여덟 편의 노래>라는 경전.
모든 생명 가진 존재들을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보다도 더 뛰어난 존재로 여겨
최고의 목적을 이루려는 결심을 지니고 나로 하여금 언제나 중생을 사랑하게 하소서
중생을 일시적인 목적과 궁극적인 목적을 가져다 주는 보물로 받아들이고 한마음으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처음 단계에서는 중생에 의지해야 최고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이타심을 일으키게 되고, 중간 단계에서는 중생과의 관계에서 선한 마음을 고양시켜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수행을 할 수가 있고, 궁극적으로는 중생을 위해야 성불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진보의 목적이자 기반이 중생이기 때문에 여의주보다도 더 중요한 존재이고, 따라서 항상 존경과 자애와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언제나 나 자신을 가장 낮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내 가슴속 깊이 그들에게 애정과 존경을 보내게 하소서
자만심을 치료하는 해독제에 의지하고, 누구를 대하더라도 자신을 그 사람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손한 태도를 취하면 덕성이 늘어납니다. ...교만함을 버리고 스스로를 낮추어 생각하라는 것이 올바라지 않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의 지배를 받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강력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하더라도 존중하는 마음만큼은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번뇌가 마음속에 들어오는 순간
당당히 맞서 물리치게 하소서.
이타심을 기르려는 수행을 할 때 번뇌를 그대로 놓아둔다면, 그것들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분노와 자만심 등의 번뇌들은 이타심의 발달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번뇌를 방치하지 말고 번뇌를 물리치는 해독제에 의지해서 곧장 번뇌를 끊어야 합니다. 우리의 진짜 적은 분노, 자만심, 경쟁심 등과 같은 번뇌입니다. 우리의 전장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여러가지 번뇌의 실상을 알게 되면 아무리 사소한 번뇌가 일어나도 '이 정도는 괜찮아'하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번뇌는 점점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작은 불꽃이 집 전체를 태우는 것과 같습니다. ... 모든 잘못된 마음 상태를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해독제는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입니다. ....번뇌가 커지기 전에 철저히 멈추어야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할 때는 적어도 마음의 방향을 그 번뇌에서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합니다. 산책을 하거나 호흡의 들숨과 날숨에 의식을 집중하는 등의 방법이 그것입니다.
악한 본성을 가진 이들이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행동에 사로잡혀
고통 받은 것을 보면 마치 귀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그런 사람들을 대함으로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이타적인 의지를 키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내심과 고통의 무상함을 배우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질투심에서 나를 비난하고 터무니없이 욕을 퍼부어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패배를 받아들이고 승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게 하소서.
누군가가 질투심이나 혐오감에서 부당하게 대하거나 폭력을 휘두른다 해도 똑같이 대응하지 않고 스스로 패배를 떠맡고 상대방에게 승리를 양보해야 합니다.
이 수행의 목적은 작은 패배를 참고 견디어서 커다란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작은 패배를 취해도 커다란 결과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분노하는 마음 없이 오히려 자비심을 가지고 강한 태도로 응수해도 관계없습니다.
부처님이 선장이었을 때, 다른 사람을 죽이려는 선원이 있었습니다. ... 그리하여 선장은 '다른 방법이 없어. 이 사람에게 499명을 죽이는 업을 쌓게 하느니 내가 그 사람을 죽이고 살생의 업을 짓고 말겠다.'라고 결심하고는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비록 살인을 했지만 선장은 자비심이라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공덕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보살이 다른 사람의 악행을 막기 위해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예입니다.
큰 기대를 품고 내가 은혜를 베푼 사람이 나를 심하게 상처 입힐지라도
나는 그를 거룩한 영혼의 친구로 여기게 하소서.
영적인 스승에게 의지해 인내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는 있으나, 실제로 인내를 실천할 기회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적을 만났을 때가 바로 인내를 실천할 기회입니다. ... 여러분을 해치려는 동기를 가진 적에게까지 자비심으로 대해야 하고, 그러한 의미에서 여러분은 적을 만나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야말로 진정한 경험과 내적인 힘을 기르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나의 어머니인 모든 중생에게
행복과 이익을 함께 바칠 수 있게 하소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주는 모든 것을 남몰래 내가 대신 받을 수 있게 하소서.
이 시송에는 ‘주고 떠맡는 수행’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보살에게는 주로 두 가지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염려하는 자비심과 다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애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가짐을 연마한 상태일 때, 여러분은 고통을 겪는 사람을 만나면 곧장 ‘주고 떠맡는’ 행동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 생각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없애고 그것을 떠맡으려 하는 것은 내면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고 결과적으로 현실에서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심을 키워 줍니다.
이러한 수행은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맞추어 행해져야 합니다. 즉 숨을 들이마실 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이마시고, 숨을 내쉴 때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준다고 명상해야 합니다.
생각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모든 것이 환상임을 깨닫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집착에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하소서.
이타적인 마음가짐을 지니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여덟 가지 세속적인 행위, 즉 즐거움과 고통, 얻음과 잃음,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뒷부분은 지혜라는 요소와 관련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비 그 자체와, 자비심을 지닌 수행자, 자비심의 대상, 이 세 가지는 마치 마술사가 만들어 낸 환상 같은 것이기에 자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환상 같은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성을 가진 존재로 보이는 이러한 요소가 실제로는 그러한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킨 여러분 자신도, 여러분이 성취하려는 깨달음도, 깨달음의 대상인 중생도 자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현현하는 방식과 진정한 본연의 상태가 다르다는 의미에서 환상과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것들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주로 명명(이름 붙임)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마음에 나타날 때는 사람들이 이름이나 용어에 의해 지칭된 힘을 통해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고, 마치 자력으로 존재하는 듯 보입니다. 현상이 그 자체로서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지해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일 현상이 드러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 현상을 분석할 때 현상의 자성이 분명하고 확고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명명된 대상을 들여다 보면 분석을 통해서는 그 실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고 카르마를 축적하는 등의 인습적인 ‘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나’를 분석해 보면 우리는 ‘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현상이 마음과 몸에 나타나지만 여러분이 막상 몸과 마음에서 ‘나’를 찾으려고 하면 그때는 ‘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전체로서의 몸은 몸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집합체에 의존해 명명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몸을 부분들로 해체해 살펴본다면 그 어떤 것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현상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과 분석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현상의 실상이 다르다는 것은 곧 그토록 확고해 보이던 것이 사실은 우리 마음의 오류에 의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찰이 어떤 도움을 주겠습니까? 탐욕, 미움 등의 번뇌는 우리들이 현상에 대해서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이상의 좋음이나 싫음을 덧붙임으로써 생겨납니다. … 우리가 현상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에다 좋음이나 싫음을 덧붙이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 바로 지혜의 힘이고 효과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분노나 탐욕을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편과 지혜를 통합하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방편이란 자애와 자비라는 이타적 마음가짐을 기르는 것이며, 지혜란 모든 현상에서 자성이 없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로 결합되어야 합니다. (==> 상대적 보리심은 방편이며, 절대적 보리심은 지혜이라. -[아티샤의 명상요결])
저는 이 여덟 가지 노래를 날마다 외우며,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그 의미를 반추합니다.
http://blog.daum.net/saegilmindfulness/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