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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고려 중기 법상종의 대표적인 고승인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 : 1038, 정종 4~1097, 숙종 2)의 생애를 기린 비로 보물 제 24호이다.
혜덕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정종 4년(1038)에 태어나 11세에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에 승려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그를 법주(法主)로 삼자 왕에게 불교의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59세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시호를 ‘혜덕’, 탑이름을 ‘진응’이라 내리었다.비는 혜덕왕사가 돌아간 이듬해인 1111년(숙종 3)에 세웠다
현재 비의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비문은 심하게 닳아 읽기가 매우 힘든 상태이다. 비의 받침돌에는 머리가 작고 몸통이 크게 표현된 거북을 조각하였고,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받침돌에 비해 커보이는 듯하며, 주위에 덩굴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문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문하시랑을 지낸 이오(李䫨, 1050~1110)가 지었고, 해서로 비문을 쓴 사람은 『대동금석서』에는 채유탄(蔡有誕)이라 하였으나 『해동금석원』과 『조선금석총람』등에서는 정모(鄭□), 『한국금석전문』에는 정황선(鄭晃先)이라 하고있다.(당대의 명필 정윤(鄭允) 설) 비 전면 끝에 이효전(李孝全)이라는 이름이 있어 새긴 이로 추정된다.
비문 글씨는 구양순의 글씨보다 더욱 활달하여 명쾌한 맛이 있다. 신라나 조선에 비하여 고려시대의 글씨가 훨씬 뛰어남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비신은 크며, 두부가 작은 귀부(龜趺)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신높이 2.77m, 너비 1.49m이다.
비문의 내용은 대표적인 문벌가문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서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유식 전적을 간행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음기에는 왕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스승인 지광국사비와 같이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와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와 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와 사지전후몰세자(師之前後沒世者)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부류마다 승통, 수좌, 삼중대사, 중대사, 대사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인이고 언급된 인명은 1천 8백 인에 이른다. 고려의 승려·문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한 좋은 예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판독문>
贈諡慧德王師眞應之塔碑銘(題額)」
高麗國全州大瑜伽業金山寺普利了眞精進饒益融慧廣祐護世能化中觀 贈諡慧德 王師眞應之塔碑銘幷序
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
章事判尙書禮部翰林院事文德殿太僕射脩國史上柱國▨▨▨▨」
學士▨▨▨ ▨▨」
登仕郎尙書都官郎中賜緋魚袋(臣)鄭晃先 奉 敎撰」
(臣)聞釋氏出世立敎也爲化群機故其說有權實漸頓之殊半滿偏圓之別繇是五天高士諸夏名堕空緇堕空堕有者寔繁宗性宗相者甚衆惟性與相泯合爲一而已▨▨道妙理者今贈諡慧德王師」
師諱韶顯字範圍俗姓李氏其先慶源郡人也曾高以降積累彌深乃子乃孫列鉉司而挺秀爲姊爲妹公 掛壺以聯芳王父諱翰光祿大夫同知樞密院事贈太子太傳尙書左僕射▨▨▨」
公孝以克家忠以許 國契先朝之際會叅顯列以仟翔衆協六符鶚立乎鈞衡之秩慶綿十葉翼飛乎閥閱之聲功與世而莫京裕垂昆而不絶者焉顯考諱子淵守太史門下侍中贈中書侍郎文
和公以文章擢 御簾高第有籌略爲 聖域聞人力賛萬機首居四輔豈止伊尹作殷家右相天下取以保安孔光拜漢室上公海內畏其威振而已哉外祖諱▨▨▨▨侍郎平章事候▨▨」
▨王室名(臣)守誠節以不踰歷夷險而一致出則秉旄杖鉞四方無擊析之入則論道經邦 萬乘有垂蒙之暇其世家遠系信牒備文故略焉母金氏累贈鷄林國太夫人性禀柔嘉長成▨▨▨」
四德蔚爲公族之嬪繼念三歸求得法王之子果蒙應也乃有娠焉以太平紀曆十有七年歲在戊寅七月哉生明誕師于 闕南佛嶺之私第師生而特異"659;齔▨▨▨▨▨▨▨額廣眉長▨▨▨▨▨」
勁其骨黔其膚若應眞之相也年甫十一就海安寺麟公所落髮麟公卽故法泉寺國師諡智光諱海麟也先是公應詔入內夜方一鼓夢見瑞鳥似鳳而紫▨▨▨紫▨▨▨▨玩深恐失之▨▨▨」
和公擕師而至請爲弟子麟公見師貌雄傑而衣紫謂曰昨夢瑞鳥之兆豈誣也哉初學金光明經唯識論夙殖聞薫日新懸鮮故麟公意甚愛之迺云賢哲之才俟時▨▨▨▨桃李應韶▨▨陽▨」
發顯故以韶顯爲名焉明年受於福興寺官壇超世之戒珠自潔匪假磨礱生塵之心鏡本淸豈勞拂拭于時麟公移住玄化寺師甞高棲絳帳親受金言則何異仲尼▨▨▨▨▨回善光▨▨▨▨▨▨」
哉淸寧七年赴王輪寺大選塲一捷爲大德咸雍五年加重大師洎乎六年夏五月文宗金輪啓統玉扆凝休廣斯文而旣致化成向彼佛而兼修喜捨 聆師之才▨▨▨蔭眷六年」
延德宮第六 王子投師門而出家卽今俗離山法住寺住持導生僧統是也是年十月十四日 上幸師之所隷玄化寺齋佛僧以慶之仍 賜磨衲袈裟蔭眷七年初住海安寺加授三重大」
師太康五年秋 上命有司於 內殿大張法席 請師充說主者爲大宋回使利涉大洋故也仍加普利二字爾後累加一十六字爲法號者皆所以旌其德行也是年 詔住全州金山寺九年又」
加首座是歲 文宗昇遐 順宗嗣位未幾而王崩卽 宣宗承纂之元年也 上以端拱無爲坐見中興者豈非師福利之功耶下枇署爲僧統其時 師年四十七也始師爲首座求▨▨」
僧統位由德進不其偉歟矧 國初已來凡爲法王者非有年德罕能居此職而師以壯年見 擢緇素榮之又其年 王命師移住玄化寺仍於開國慈雲兩寺選塲有再爲都▨▨▨▨▨又赴內賜法」
會洎大藏道塲主張講席幷蒙 賜法服者其數非一師降眞戚里作主空門其儀也燦然可觀其志也確乎不拔凡所爲事有異於人甞在燕居少選閒手無釋卷每於講會一▨次之不▨」
物以思恭或誨人而忘倦故得趍廊廡者盡是崐琮藍璧盡是殊珍持瓶盂者孔羽翠毛無非佳瑞大寂之學徒累百僧俗智顓學之聽衆盈千豈可同日而語哉大安初師以手校唯識開發意四衆▨▨▨▨▨▨」
初失其本積有年矣旣得之尊尙者衆矣師曾於金山寺選勝于寺之南走六十許步地創設一院額號廣敎仍筆刻雕經板置于院院之中別造金堂一所幷繪畵盧舍那及奬基二師像其」
堂自太康九年至師之末年搜訪慈恩所撰法華玄賛惟識述記等章䟽三十二部共計三百五十三卷考正其本募工開板私紙墨印布流通以廣法施也謹案大宋高僧傳云奬▨存惟」
識開創之祖基迺守文述作之宗奘苟無基則何祖張其學乎是知凡將入於性相義門者捨慈悲之學則罔臻其極矣頃自唐 文皇以新羅 王表請 宣送瑜伽論一百卷於是無應理圓實之學」
漸盛于玆土曁乎曉法師導之于前賢大統踵之於後燈燈傳世世嗣興然而去聖寥遠遺文訛舛者多矣師甞疾于懷以其祖門章䟽大行於世使學者知本宗之有坦途惟師之力也可謂扶」
曉賢方軌齊鶩焉可勝道哉其光揚本敎也如此復於傳法之外雅好仁義之術博 覽經史至于詩篇筆札靡不精究爲人歎詠者徃徃有焉故於首座告身云內檀師明訓領徒弟於蘭菊」
結詩社於江山其才兼外學也又如此師以爲欲資感果於未來莫若植因於現在上生懇願遠則追無着之蹤內院脩行近則慕基公之躅迺評題逐月畵成慈氏尊像每歲取七月十四日開法筵」
集徒侶禮懺敀依及明設齋施䞋以罷席自太康元年乙卯至壽昌二年丙子 首尾凡二十有二稔而止大康末癸亥宣宗聞其事特 賜諸般彩畵幷 御書一通其書曰▨當來不▨▨▨▨▨▨」
盛會謹隨喜吾師功德其於月日下 國銜稱弟子有以見師心奉法繼年修香火之緣 御手飛文隨喜 賜丹靑之飾苟非願力甚深▨何▨宸襟信重之如是耶師居玄化寺時▨▨▨▨」
完補爲急務尋狀聞 上可其奏仍置繕理宮大安四年肇其役壽昌二年畢其功締葺宏模雖因舊址莊嚴勝槩宛若新成師又於中外本宗諸寺施納淨財許設每年兩度法會以爲常式募得虎頭」
名手畵成釋迦如來及奘基二師海東六祖像都一各安于其寺欲令義學者覩像生敬自敬生信自信得慧日以勸焉壽昌元年乙亥冬十月 聖考肅宗慶襲宗社心歸佛法▨▨▨▨」
召師爲法主講仁王經者祈天 祚業故也洎二年十二月十八日師於寺之奉天院深夜看經次有斯疾旣以聞卽 遣御毉診視之未回續 差中使押送尙乘鞍馬施納其寺以▨▨▨▨▨▨▨」
內侍少卿池澤厚奉傳 聖旨今欲封師爲 王師師頓首言德簿行庸豈堪 聖奬夜將深嚼楊枝漱訖念彌勒如來名號洎四弘願戒與門弟等囑累蕩蕩然無憂色中夜更嚼楊枝俄而遷化」
先一日白虹夜見識者以爲師終之䜟也山僮野老無不號咷走獸飛禽互相悽慘遙明以入寂聞 上乃 震悼遣入 內奉御王嘏 吊慰之翌日命右街僧錄繼通攝司天監知太史局事文」
象等監護葬事二十七日 遣使尙書右僕射陳謂使副尙書左丞右諫議大夫金沅等賷持璽書封爲 王師諡曰慧德塔號眞應幷 贈紫地繡袈裟洎諸衣對器玩茶香等物▨伸時▨▨▨▨」
未茶毗于寺之西南隅明年丁丑正月旬有一日丙申遷葬于寺之西北隅安其骨遵像法也嗚呼毗尼園內始則現無生之生跋提河邊終則示不滅之滅其餘終也自初七洎二祥凡十齋所▨▨▨▨▨」
給其在 朝延也猶若是焉况其門人乎哉時有祐世僧統大覺國師實華嚴之宗匠也聞師之卒方盡哀而致祭其文略云方期沒齒交臂弘眞今也卽亡吾誰與親其他宗之見重也皆是歎道人有華僧▨▨」
大師慧珎度海而來屬于師之講下珎之於師也欣然如舊相識居兩年矣無何先於師三旬而滅其滅也結跏印手而坐化盖出於尋常焉其爲遠人依慕也又如是類其▨累朝凡所賜▨▨▨」
他等避繁故不書及諸貴臣盛族豪商大賈各盡其所可爲而致敬者無虛日矣俗壽五十九夏臘四十八奧有門弟上首導生僧統而下凡一千餘人等狀先師行涕淚伏 闕而奏其書曰▨▨」
於珊兜知哀慕勒龜趺於寶界願永傳聞爰 命下臣俾揚遺烈臣表讓云臣本性孤陃加以老衰况無賈勇於操觚曷副屬辭於寫琰願回▨中旨移授通人仍降 制曰以碑聯▨之▨▨▨▨▨」
之景行勿煩曲讓勉旃眞書旣 阻示於 都兪敢不顓於論譔文非無質然慙作者之求道可强名庶續高僧之史摭其實而謹述銘云」
能仁出現爲大因緣度衆生界說諸敎詮或云權實或云偏圓起從西域漸被東壖(其一)祖祖闡揚師師提唱談有談空曰性曰相苟泯二道有何偏尙其誰融通唯我宗匠(其二)萬行▨我生而▨▨▨▨▨」
鷲嶺譽藹 龍塀應 王臣護爲 帝子師聖墻疊仞覺樹添枝(其三)締構梵宮莊嚴佛氏日振法衣講宣微旨請益如雲攝齋成市道豈遠而行之卽是(其四)欲圓妙果須種善業像像補處▨▨▨▨▨▨」
如水月福也河沙年踰二紀念玆靡它(其五)廣敎起院購書周徧多葉鏤文貫花增線法雨均沾慈風益扇擬彼曉賢重生辰卞(其六)對賓命筆探景成詩垂露騰彩碧雲騁奇業之所感作▨▨▨▨▨▨」
▨所名滿證爲期(其七)白虹告祥雙林變色奄促化緣復歸淨域 大君澍恩微臣叙德刻以貞珉 流美萬億(其八)」
校尉(臣) 李孝全 奉詔 撰
天慶元年歲在辛卯孟夏月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해석문>
증시(贈諡) 혜덕왕사(慧德王師) 진응지탑비명(眞應之塔碑銘) (題額)
고려국(高麗國) 전주(全州) 대유가업(大瑜伽業) 금산사(金山寺) 보리료진(普利了眞) 정진요익(精進饒益) 융혜광우(融慧廣祐) 호세능화중관(護世能化中觀) 증시(贈諡)
혜덕왕사(慧德王師) 진응지탑비명(眞應之塔碑銘) 병서(幷序)
삼중대광(三重大匡) 개부의동(開府儀同)삼사(三司) 검교(檢校)태사(太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평장사(平章事) 판상서예부(判尙書禮部) 한림원사(翰林院事) 문덕전(文德殿)대학사(大學士) 수국사(修國史) 상주국(上柱國) ▨▨▨▨학사(▨▨▨▨學士)인 이오(李䫨)가 조칙(詔勅)에 의하여 비문(碑文)을 지었고,
등사랑(登仕郞) 상서도관낭중(尙書都官郎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정황선(鄭晃先)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쓰다.
신(臣)이 듣건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여 불교를 창립한 것이 군기(羣機)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의 설법(說法) 중에는 권실(權實)과 점돈(漸頓)의 다름과 반만(半滿)과 편원(偏圓)의 차별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오천축국(五天竺國)의 모든 고사(高士)와 제하(諸夏)의 이름 높은 스님들이 공(空)에 집착하고, 유(有)에 떨어진 이가 매우 많으며, 또한 성종(性宗)에 국집하거나, 상종(相宗)으로 치우치는 자도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성종과 상종이 민합(泯合)하여 오직 하나뿐인 지극한 도(道)이며, 미묘한 진리인 것이다. (결락) 우리 혜덕왕사(慧德王師)의 휘는 소현(韶顯)이요, 자(字)는 범위(範圍)이며, 속성은 이씨(李氏)요, 그의 선조(先祖)는 경원군(慶源郡) 사람이다. 증조(曾祖)와 고조(高祖) 이후로 선행을 적루(積累)함이 심히 많아서, 자자 손손(子子 孫孫)으로 내려 오면서 현사(鉉司)의 높은 관직에 서열(序列)되어 크게 빼어났으며, 자(姊)가 되고 매(妹)가 된 여식(女息)들은 괘호(掛壺)의 집안으로 시집가서 왕후(王后), 국태부인(國太夫人), 음부인(陰夫人), 숙부인(淑父人) 등 연방(聯芳)에 오르게 되었다. 왕부(王父)의 휘는 한(翰)이니 광록대부(光祿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증태자태부(贈太子太傅)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공(▨▨▨▨▨▨公)이니, 효도로써 힘을 다하고, 충성으로써 생명을 바쳤다. 선조의 제회(際會)에 계합하고, 현열(顯列)로써 회상(佪翔)함에 참여하였다. 상징적으로 육부(六符)를 도왔으며, 균형(鈞衡)의 질(秩)에 악립(鶚立)하였고, 가문의 경사(慶事)가 칠대(七代)의 후손에까지 면면히 이어져서 벌열(閥閱)의 명성이 온 천하에 퍼졌으며, 공적은 세상에서 비길 데 없고, 쌓은 적덕(積德)을 먼 후손에까지 드리워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현고(顯考)의 휘는 자연(子淵)이니, 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증중서시랑(贈中書侍郞) 문화공(文和公)이니, 문장으로써 어렴(御簾)고제(高第)에 발탁되었다. 남다른 주략(籌略)이 있어, 독보적인 지모(智謀)로 많은 사람을 힘껏 돕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며, 만기(萬機)를 돕는 사보(四輔) 중에 으뜸이었으니, 어찌 이윤(伊尹)이 은(殷)나라의 우상(右相)이 되어 천하를 태평성세로 이룩한 것에 그칠 뿐이며, 공광(孔光)이 한(漢)나라의 상공(上公)에 임명되니, 해내(海內)가 어찌 그의 위엄(威嚴)에만 두려워 함이겠는가? 외조부(外祖父)의 휘는 ▨▨ ▨▨시랑(▨▨侍郞) 평장사(平章事) (결락) 왕실의 명신(名臣)이며, 충절(忠節)을 지켜 변하지 아니하고, 평탄함과 험난함을 겪어도 마음이 한결 같았다. 밖으로 나간 즉 장군으로서 모(旄)과 장(杖)과 부월(鈇鉞)을 잡아서 사방이 격탁(擊柝)의 근심이 없고, 궐내(闕內)로 들어오면 도(道)로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논하며, 만승(萬乘)께서 수상(垂裳)할 한가로운 여가가 있었다. 그의 세가(世家)의 먼 계보(系譜)는 신첩(信牒)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여러 차례에 걸쳐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으로 추증(推贈)받았다. 성품은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아름다움을 타고 났으며, 장성(長成)해서는 (결락) 부인(婦人)의 사덕(四德)을 갖추어 영광스럽게 공족(公族)의 부인이 되고, 마음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법왕(法王)의 제자가 될 아들을 간구하였더니, 과연 부처님의 성응(感應)을 입어 임신하였다. 태평기력(太平紀曆) 17년 세재무인(歲在戊寅) 7월 재생명(哉生明)에 궁궐 남쪽 불령(佛嶺)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스님은 날 때부터 특이하였고, 초츤(齠齔) (결락) 이마는 넓으며 눈썹은 길고, 코는 높고 곧으며, (결락) 골격은 건장하고 피부색은 검어서 마치 응진(應眞)의 상(相)과 같았다. 나이 겨우 11살 때 해안사(海安寺)의 해린(海麟)스님을 찾아가서 그를 은사로 하여 낙발득도(落髮得度)하였는데, 해린은 이미 입적(入寂)하신 법천사(法泉寺)의 국사(國師)이니, 시호는 지광(智光)이요, 휘는 해린이다. 이보다 앞서 인공(麟公)이 왕의 부름을 받아 궐내에 들어가서 어느날 밤 삼고(三鼓)의 꿈에 서조(瑞鳥)를 보니, 봉(鳳)과 비슷하나 자색(紫色)이며, (결락) 자(紫) (결락) 완심(玩深) 공실지(恐失之) (결락) 화공(和公)이 스님을 데리고 와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인공이 스님의 모습을 보니, 웅걸(雄傑)하고 자색(紫色) 옷을 입고 있었다. 인공이 이르기를, “어제 밤에 서조를 보는 꿈을 꾸었으니, 어찌 이것이 거짓이겠는가”라 하고 받아 들였다. 처음부터 『금광명경(金光明經)』과 유식론(唯識論)을 배웠는데, 숙세(夙世)로부터 많이 문훈(聞薰)하였으므로, 날마다 식견(識見)이 증승(增勝)하였다. 그리하여 인공이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이르기를, “현철(賢哲)의 재질(才質)이 때를 기다려,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 마치 도리(桃李)나무가 봄 빛을 받아 점점 자라는 것과 같으므로, 소현(韶顯)으로써 법명(法名)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다음해인 명년(明年)에 복흥사(福興寺)의 관단(官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세간을 초월하는 계주(戒珠)가 스스로 청결(淸潔)하여 마롱(磨礱)을 빌리지 않았다. 출진(出塵)의 마음 거울이 본래로 청정한 것이어늘, 어찌 수고롭게 불식(拂拭)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무렵 인공이 현화사(玄化寺)로 이주하여 높이강장(絳帳)에 앉아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왕사(王師)도 그곳으로 따라가서 금언(金言)을 수학하였으니, 어찌 중니(仲尼)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는 안회(顔回)와 다를 것이며, 선광(善光) (결락) 재(哉)아!
청령(淸寧) 7년 왕륜사(王輪寺)의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 일첩(一捷)에 대덕법계(大德法階)에 합격하였다. 함태(咸泰) 5년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가 첨가되었고, 6년 5월에 이르러 문종이 금륜왕(金輪王)과 같이 나라를 통어(統御)하고, 옥의(玉扆)으로부터 저절로 상서(祥瑞)가 응집(凝集)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풍(文風)이 널리 퍼져 이미 화성(化成)을 이루었고, 저 성불(成佛)의 단계를 향하여 대희대사(大喜大捨)의 6도만행을 겸수하였다. 문종 임금께서 왕사의 뛰어난 법재(法才)를 듣고,흠모하는 마음으로 마납가사(磨衲袈裟)와 음척(蔭脊)을 선사하였다. 또 그 해 연덕궁비(延德宮妃) 이씨(李氏) 소생인 문종의 여섯째 왕자 훈(塤)을 왕사의 문하에 보내어 출가하여 시봉토록 하였으니, 지금의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주지인 도생(導生) 승통(僧統)이 바로 그 분이시다. 이 해 10월 14일에는 문종 임금이 왕사가 소속되어 있는 현화사(玄化寺)에 행행(幸行)하여 불승(佛僧)에 공양하며 경축하고는 마납가사와 음척을 하사하였다. 7년 초부터 해안사(海安寺)에 주석(住錫)하였는데, 10년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가수(加授)하였다. 태강(太康) 5년 가을 문종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내전(內殿)에서 크게 법석(法席)을 베풀고, 왕사를 초청하여 설법주(說法主)로 모신 것은 대송(大宋)에서 왔다가 돌아가는 사신(使臣) 일행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가도록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보리(普利)라는 이자(二字)의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 후 십육자(十六字)의 법호(法號)를 누가(累加)한 것은 모두 그의 덕행을 현창한 것이다. 다시 그 해에 전주 금산사로 왕명에 따라 이주하였다. 9년에 이르러 수좌(首座)의 직계(職階)를 더하였는데, 이 해에 문종이 승하(昇遐)하고, 순종(順宗)이 즉위하였으나, 4개월만에 순종도 승하하고, 선종(宣宗)이 보위(寶位)를 승계한 원년(元年)이다.
임금이 단정히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무위태평(無爲太平)을 이루었으며, 편안히 앉아 중흥(中興)을 이룩한 것이 어찌 왕사가 끼친 복리(福利)의 공(功)이 아니겠는가? 비서(批署)를 내려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는데, 그 때 왕사의 나이는 47세였다. 비로소 수좌가 되고 (결락) 이어 승통이 되었는데, 지위(地位)란 덕으로 말미암아 진계(進階)되는 것이니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국초(國初) 이래로 무릇 법왕(法王)이 된 이는 연덕(年德)이 있지 않으면 능히 이 직위에 오른 이가 드물었으나, 스님은 장년(壯年)에 이미 치소중(緇素中)에서 발탁되어 영광을 차지하였다. 또 그 해에 왕명으로 스님을 현화사에 이주케 하였고, 개국(開國)과 자운(慈雲) 양사(兩寺)의 선장(選場)에서 다시 도승통(都僧統)이 되었다. (결락) 또 내사법회(內賜法會)에 나아갔으며, 대장도량(大藏道場)에서 강석(講席)을 주관하고 아울러 법복(法服)을 하사받았으니, 그 수가 한 둘이 아니었다. 왕사께서는 척리(戚里)의 가문에 태어나서 공문(空門)을 주관하는 지도자가 되었으니, 그 위의(威儀)가 찬연하여 우뚝해 보이며, 그 의지는 확고하여 누구도 감히 움직일 수 없다.
무릇 하는 바의 일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함이 있었다. 항상 고요한 곳에서 연거(燕居)하되, 잠깐 사이에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고, 항상 강회(講會)마다 질서가 정연하여 조리(條理)를 잃지 아니하였다. (결락) 물건을 얻기 위해 비굴하지 아니하며, 혹은 후학을 가르치되 피곤함을 잊었다. 낭무(廊廡)에 나아가서 얻은 것이 모두 곤종(崐琮)과 남벽(藍璧)이니, 다 특수한 보배이다. 왕사를 모시며 병우(甁盂)를 시봉하는 자로는 공작(孔雀)의 깃과 푸른 털을 가진 봉황(鳳凰)까지도 가서(佳瑞)로운 시자(侍者) 아닌 것이 없었다. 대적(大寂)의 회상에 학도(學徒)가 수백명이며, 지의(智顗)의 문하(門下)에 청중(聽衆)이 천명을 넘었으나, 어찌 동일의 선상에 놓고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안(大安) 초에 스님께서 직접 유식론(唯識論) 등을 교정하여 깊은 뜻을 개발하고, (결락) 사권(四卷)을 지었다. (결락) 그 초본을 유실한지 이미 오래되었다가 다시 얻었으므로 이를 존상(尊尙)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스님은 일찍이 금산사의 남쪽 60보쯤 되는 지점에 승지(勝地)를 골라 광교원(廣敎院)을 창설하고, 유식종에 관한 경론(經論)을 각조(刻雕)하여 광교원에 진장(鎭藏)하였다. 그리고 원중(院中)에 일금당(一金堂)을 따로 두어 노사나불(盧舍那佛)과 현장(玄奘)과 규기(窺基) 두 스님의 상(像)을 (결락) 봉안하였다. 태강(太康) 9년으로부터 스님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은대사(慈恩大師)가 지은 법화현찬(法華玄贊)과 유식술기(唯識述記) 등 장소(章䟽)를 찾아서 32부(部) 공계(共計) 353권을 그 본(本)을 고정(考正)하고 각공(刻工)을 모집하여 판각(板刻)하고는 개인적으로 지묵(紙墨)을 갖추어 인경(印經)하여 유통함으로써 널리 법포시(法布施)를 행하였다. 자세히 상고해 보니, 대송고승전(大宋高僧傳)에 현장은 유식론을 개창한 시조이며, 규기는 이에 유식론문(唯識論文)을 보수(保守)하여 술작(述作)한 종조(宗祖)라고 하였다. 현장이 만약 규기가 없었다면 어찌 그의 학(學)을 조술(祖述)하여 확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만약 성상(性相)의 의문(義門)으로 들어가고자 할진대, 자비(慈悲)의 학(學)을 버리고는 그 진극(盡極)한 경지에 이르러 갈 수 없다. 과거 당(唐)나라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신라왕의 요청으로 유가론(瑜伽論) 100권을 보내옴으로부터 그때까지 응리원실(應理圓實)의 교학(敎學)이 없었으나, 이때부터 점점 이 땅에 왕성하였다. 그리하여 원효법사가 앞에서 인도하였고, 태현대통(太賢大統)이 뒤를 따랐으며, 등(燈)과 등이 등불을 이어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 중흥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과의 상거(相去)가 더욱 멀어진 말세에 있어서 유문(遺文)에 그릇되고 어긋남이 많았으므로 스님께서는 일찍부터 이를 바로 잡으려고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법상종조사(法相宗祖師)의 초소(草䟽)를 크게 세상에 유행토록 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본종(本宗)의 탄도(坦途)가 있음을 알게 한 것은 오로지 스님의 공력(功力)이었으니, 가히 원효와 태현(太賢)을 부호(扶護)하고 바야흐로 함께 달리도록 하였으니, 어찌 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본교(本敎)를 더욱 빛나게 선양한 것은 이와 같았고 전법(傳法)하는 일 밖에도 인의(仁義)의 학술(學術)을 아호(雅好)하였으며, 경사(經史)를 박람(博覽)하고, 시편(詩篇)과 필찰(筆札)에 이르기까지 정미롭게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사람들로부터 탄영(歎詠)을 받은 적이 자주 자주 있었다. 그러므로 수좌(首座) 승계(僧階)를 받을 때의 고신(告身)에 이르되 내단사(內檀師)인 명훈(明訓)이 도제(徒弟)를 난국(蘭菊)에서 거느리고, (결락) 시사(詩社)를 강산(江山)에서 맺었으니, 그의 재주가 외학(外學)을 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스님을 도와서 미래에 감과(感果)코자 할진댄, 그 인(因)을 현재에 심는 것만 같지 못하니, 도솔천 내원정토(內院淨土)에 상생(上生)하기를 발원(發願)함에는, 멀리로는 무착(無着)의 자취를 추모하여 내원수행(內院脩行)을 하고, 가까이로는 규기(窺基)의 행적을 흠모하여 마음에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자씨(慈氏)의 탱화를 그려서 봉안하고 해마다 7월 14일에 법연(法筵)을 열어 도려(徒侶)를 모아 예참(禮懺)하며 귀의(歸依)하고, 또한 크게 재(齋)를 베풀어 시친(施䞋)하고 법석(法席)을 파하였는데, 태강(太康) 원년 을묘(乙卯)로부터 수창(壽昌) 2년 병자(丙子)에 이르기까지 수미(首尾)의 기간이 무릇 22년만에 끝났다. 태강말(太康末) 계해년(癸亥年)에 선종(宣宗)이 그 미륵불의 탱화불사를 듣고, 특히 여러 가지 채화(彩畵)와 아울러 어서(御書) 일통(一通)을 하사하였는데, 그 어서에 이르기를, “당래불(當來不) (결락) 성회(盛會)하여 삼가 우리 스님의 공덕을 수희(隨喜)하라” 하였다. 그달 그날에 왕이 국함(國銜)을 내려 제자(弟子)로 일컫대 왕사의 마음을 보고 불법(佛法)을 받들면서 계속 여러해 동안 향화(香火)의 인연을 닦았으며, 어수(御手)로 쓴 친서(親書)를 보내어 수희(隨喜)하는 마음으로 단청(丹靑)할 장식물을 하사하였으니, 진실로 원력(願力)이 심히 깊은 이가 아니면 어찌 능히 신금(宸襟)의 신중(信重)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스님께서 현화사에 거주할 때, (결락) 완전히 보수하는 것이 급무(急務)라고 생각하여 곧 상계(狀啓)를 갖추어 왕에게 주문(奏聞)하였더니, 임금께서 주청한 것을 가하다고 인가하시고, 선리궁(繕理宮)을 설치하였다. 대안(大安) 4년 기사(己巳)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수창(壽昌) 2년 병자(丙子)에 준공하였는데, 그 규모가 굉장히 웅대하였다. 비록 구지(舊址)에 복원하였으나, 장엄한 승개(勝槩)가 완전히 새로 건축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또 중외(中外)의 각지에 산재해 있는 본종(本宗)의 모든 사찰에 정재(淨財)를 시납(施納)케 하여, 매년 양회(兩會)에 걸쳐 법회(法會)를 여는 것을 연례화(年例化)하였다. 호두명수(虎頭名手)인 뛰어난 화가(畵家)를 모집하여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탱화와 장기이사(獎基二師)와 해동육조(海東六祖) 등의 영정을 일당(一㡧)에 모두 그려서 각각 그 절에 봉안하였다. 의학자(義學者)들로 하여금 성상(聖像)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공경함으로부터 신심(信心)을 내고, 신심이 견고함으로부터 지혜를 발하게 되는 것이라고, 날마다 상생정토(上生淨土)를 발원하도록 권장하였다. 수창원년(壽昌元年) 을해(乙亥) 10월에 성고(聖考)인 숙종께서 경사스럽게 종사(宗社)를 계습하였으며, 마음으로 깊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결락) 왕명으로 스님을 청해 법주(法主)로 모시고, 잉왕경(仁王經)을 강설한 것은 천조(天祚)의 성업(聖業)을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수창 2년 12월 18일에 이르러 왕사께서 금산사 봉천원(奉天院)에서 심야에 경을 보다가 미질(微疾)이 있게 되었다. 이를 숙종 임금께 알렸더니 곧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였으나 회복되지 아니하였다. 이어 중사(中使)를 보내어 친서(親書)와 함께 왕사가 전용으로 타도록 상승국(尙乘局)의 마차를 그 절에 헌납하였다. 이(以) (결락) 내시소경(內侍少卿) 지택후(池澤厚)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전하고, “스님을 봉(封)하여 왕사로 추대코자 합니다”라고 고하였다. 스님이 돈수(頓首)하고 이르되, “덕이 박하고 수행도 용렬하니 어찌 성장(聖獎)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밤이 장차 깊어져 가는데 스님은 양지(楊枝)를 씹어 양치질한 다음, 미륵여래(彌勒如來)의 명호를 염(念)하고 사홍원계(四弘願戒)에 이르러 발원하여 마치고, 문제자(門弟子)들과 더불어 간곡히 부촉하되, 탕탕연(蕩蕩然)하여 얼굴에 조금도 근심하는 빛이 없었다. 중야(中夜)에 이르러 다시 양지를 씹은 다음, 조용히 입적하였다. 열반에 들기 하루전에 흰 무지개가 밤에 나타났으므로 식자(識者)들은 스님께서 임종하실 예고를 보인 것이라고 하였다.
산동(山僮)과 야로(野老)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으며, 새와 짐승들도 서로 처참하였다. 이른 새벽에 입적하시니, 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입내봉어(入內奉御)인 왕하(王嘏)를 파견하여 조문(弔問)과 위로를 표하고, 다음날 우가승록(右街僧錄) 계통(繼通)과 사천감(司天監)이며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인 문상(文象) 등을 보내서 장사(葬事)를 감호(監護)토록 하였다. 27일에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진위사(陳謂使)와 부상서(副尙書) 좌승(左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인 김통(金統) 등을 보내어 새서(璽書)를 지참하고 가서 왕사로 진봉(進封)하고, 시호를 혜덕(慧德), 탑호를 진응(眞應)이라 하고, 아울러 자색(紫色) 바탕에 수를 놓은 가사(袈裟)와 여러 가지의 옷과 대기완(對器玩) 다향(茶香) 등 물류를 증사(贈賜)하였다. 신시(申時) (결락) 말에 절 서남쪽에서 다비(茶毗)하였다가, 다음 해 정월(正月) 11일 병신(丙申)에 절의 서북쪽으로 천장(遷葬)하여 유골을 안치하였는데, 이는 상법(像法)을 준수한 것이다. 오호라! 비니원내(毗尼園內)에서 비롯하였으니, 곧 출생할 것이 없는 데서 생(生)을 나타냈고, 발제하변(跋提河邊)에서 임종하였으니, 이는 곧 입멸(入滅)할 것이 없는 데서 입멸을 보인 것으로, 일생(一生)의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이다.
초재(初齋)인 7일로부터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인 이상(二祥)에 이르는 무릇 십재(十齋)에 이르기까지의 소요되는 경비 (결락) 를 공급함이 조정(朝廷)에 있었다. 국가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거든, 하물며 문인(門人)이야 더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의 우세승통(祐世僧統) 대각국사는 실로 화엄종장(華嚴宗匠)이었지만, 스님의 입적을 듣고 바야흐로 극진히 애도하여 그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생략하여 말한다면 “바야흐로 몰치(沒齒)를 기약하여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진교(眞敎)를 홍포(弘布)하여 왔는데, 이제 스님께서 사망하였으니, 내 누구와 함께 친할 것인가”라 하였다. 타종(他宗)에서도 왕사를 존중하였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중화(中華)의 도인(道人) 성총(省聰)과 혜진(慧珎) 양대사(兩大師)가 있어 바다를 건너 고려에 와서 왕사의 강하(講下)에서 수학하였다. 혜진이 처음 스님을 보고 흔연히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있는 구면(舊面)과 같다면서 2년 쯤 주석하다가 갑자기 병이 생겨나서 스님보다 20일 앞서 입멸하였다. 입멸할 때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선정인(禪定印)을 수인(手印)하고는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비상(非常)함이 아니어서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도 의지하고 흠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종류가 심히 많았다. 여러 조정(朝廷)에 걸쳐 무릇 하사받은 (결락) 타등(他等)은 번거로움을 피하는 까닭으로 기록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모든 귀신(貴臣)과 성족(盛族), 호상(豪商)과 대고(大賈) 등은 각기 정성을 다하며,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날이 없었다. 속수(俗壽)는 59요, 하납(夏臘)은 48세였다. 이에 상수(上首) 제자인 도생승통(導生僧統)이 있고, 그 이하에 무릇 일천여인(一千餘人)이 함께 뜻을 모아 선사(先師)의 행장(行狀)을 갖추어 눈물을 흘리면서 궐하(闕下)에 엎드려 임금께 주달(奏達)하였다. 그 올린 글에 이르기를, “(결락) 산두사다천(珊兜史多天)에서 공연히 미륵(彌勒)을 애모(哀慕)하는 것이옵니다만 귀부(龜趺)를 보계(寶界)에 새겨 미래에 영원토록 널리 전문(傳聞)케 하기 원하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왕사의 유열(遺烈)을 천양하도록 비문을 지으라 하시므로, 신(臣)이 사양을 표하여 이르되, “신은 본성(本性)이 고루할 뿐 아니라, 노쇠(老衰)를 더하였으며, 하물며 조고(操觚)를 잡을 용기조차 없음이온 어찌 속사(屬辭)를 사염(寫琰)에 부합할 수 있겠나이까? 원하옵건대 중지(中旨)를 회수(回收)하여 다른 통인(通人)에게 당부하소서”라고 간절히 사양하였다. 다시 제지(制旨)를 내려 이르시기를 “이비련(以碑聯) (결락) 지(之) (결락) 왕사의 비문을 지어 경행(景行)을 선양토록 하되, 더 이상 번거롭게 사양하지 말고, 직서(直書)에 힘쓰라” 하였고, 이미 도유(都兪)에 지시하였으므로 감히 비문을 짓는 일에 전력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장(文章)에 질(質)이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작자(作者)의 요구에는 부끄러움이 없지 않다. 도(道)라는 말도 억지로 붙인 이름이니, 고승(高僧)의 사전(史傳)이 후대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적(行跡)의 사실만을 주워 모아 삼가 명(銘)을 서술하여 이른다.
능인(能仁)이 출현함은 중생(衆生)을 위함인 것
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 사파(娑婆)에 출현했네.
십이류(十二類) 중생(衆生)들을 모두 다 제도코자
팔만(八萬)과 사천법문(四千法門) 갖가지 연설하다.
때로는 방편법문(方便法門) 유시(有時)엔 진실교리(眞實敎理)
어느땐 편설(偏說)하고 혹시(或時)엔 원설(圓說)하다
서역(西域) 발상(發祥)여 사오년(四五年) 교화(敎化)하고
이 법(法)이 동점(東漸)하여 근역(槿域)에 두루하다.
서천(西天)의 이십팔조(二十八祖) 동토(東土)엔 육대조사(六代祖師)
조조(祖祖)가 천양(闡揚)하고 사사(師師)가 제창(提唱)하다
유(有)와 공(空) 주창하여 저마다 국집하고
성(性)과 상(相) 상치(相値)하여 성상(性相)이 적대(敵對)하나
성상(性相)을 초월하면 이도(二道)가 따로 없어
이 어찌 편견(偏見)으로 저마다 옳다 하랴!
이러한 차별견(差別見)을 그 누가 융통(融通)할까?
금산사(金山寺) 왕사(王師)만이 이 일을 감당했네.
만행(萬行)을 (결락) (결락) (결락)
숙세(宿世)에 훈습(薰習)하여 생지(生知)의 천재(天才)일새
(결락) (결락) (결락) 취령(鷲嶺)
그 칭송(稱頌) 두루하여 용병(龍塀)에 가득했네!
도덕이 숭고하여 왕신(王臣)이 외호(外護)하고
덕망이 고매하여 임금의 스승되다.
그 경지(境地) 높고 높아 엿볼길 전혀 없고
보리수(菩提樹) 잘 길러서 가지에 가지로다.
비보(裨補)를 하기 위해 옛터에 절을 짓고
불씨(佛氏)를 장엄하여 유식종(唯識宗) 도량(道場)되었네!
날마다 법의(法衣) 입고 법좌(法座)에 높이 앉아
오묘(奧妙)한 그 진리(眞理)를 사자후(獅子吼) 진동하다.
법문(法門)을 들으려는 사부중(四部衆) 운집(雲集)하고
옷깃을 여미운 이 장터를 이루었네!
도(道) 어찌 멀다 하랴. 평상심(平常心) 그것이며
실천(實踐)만 한다면 이 또한 도(道)인 것을
구경(究竟)의 원묘과(圓妙果)를 이루려 할진대는
반드시 인행(因行)에서 선업(善業)을 닦을지다.
삼라(森羅)의 만상(萬像)들이 모두가 보처(補處)인데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지혜(智慧)가 교결(皎潔)함은 청담(淸潭)의 달과 같고
복덕(福德)이 구족(具足)함은 항하사(恒河沙) 모래같네.
해마다 유식참법(唯識懺法) 이기(二紀)를 계속하여
도솔천(兜率天) 상생(上生)코자 그 일념(一念)밖에 없네.
법상종(法相宗) 홍포(弘布)코자 광교원(廣敎院) 열어놓고
곳곳에 다니면서 장소(章疏)를 구(求)하여서
제본(諸本)과 교정하여 목판(木板)에 새겼으니
흩어진 꽃송이를 노끈에 꿴 것 같네!
이 법문(法門) 인경(印經)하여 골고루 법시(法施)하니
자비(慈悲)한 진리(眞理) 바람 천하(天下)에 두루 불다
원효(元曉)와 태현대통(太賢大統) 이 나라 불교(佛敎) 위해
진한(辰韓)과 변한(卞韓) 땅에 재현(再現)이 아닐런지.
문장(文章)이 도도하여 운자(韻字)만 떨어지면
정경(情景)을 감상하여 구구(句句)가 성시(成詩)일새
은총(恩寵)을 드리우니 찬란한 그 광채(光彩)여!
벽운시(碧雲詩) 좋다지만 비할 바 전혀 없네
동작(動作)의 느낀 바로 토운(吐韻)이 주옥(珠玉)일새.
작(作)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소명(所名)
수행을 쌓고 쌓아 만증(滿證)을 기약(期約)하다.
열반전(涅槃前) 흰 무지개 입적(入寂)을 예고했고,
쌍림(雙林)의 사라나무 흰 빛이 나타나다
양지(楊枝)로 양치하고 미륵(彌勒)을 부른 다음
도솔천(兜率天) 정역(淨域)으로 소요(逍遙)히 상생(上生)하다
임금께서 스님에게 보은(報恩)을 위해서
고루(孤陋)한 미신(微臣)에게 찬비(撰碑)를 명(命)하시어
사부중(四部衆) 정성모아 정민(貞珉)에 각자(刻字)하여
위대(偉大)한 그 홍덕(洪德)을 억만세(億萬歲) 전하리다.
교위(校尉) 신(臣) 이효전(李孝全)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새기다
천경(天慶) 원년(元年) 세재신묘(歲在辛卯) 맹하월(孟夏月)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3】(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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