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더러운 영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 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12:43-45
이 비유에서처럼, 성서에서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더러운 영 들(unclean spirits)’ 이란 표현 대신에 '엘리멘탈(elementals)'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그리스도도 역시 '공허하고 무의미한'의 뜻으로 더러운 영들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을 악령들(evil spirits)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것 모두를 '엘리멘탈'로 부르고 있으며, 우리의 레슨에서는 그것들을 두 그룹들로 분류한다. 하나는 우리가 감정적인 사념체들(emotional thought-forms)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것들 안에서 감정, 욕망, 심지어 약점들까지도 지배적 역할을 한다. 그 감정의 포로들은 오히려 그 욕망들이 마음(mind)을 노예화하도록 돕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엘리멘탈은 하나의 '더러운 영'이고, 그것은 특정한 욕망들, 소망들, 감정들을 섬기는 영인데, 이 영은 불결하고 건설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엘리멘탈(념체)의 또 하나의 그룹을 감정이 아닌 이성(理性:reason)에 의해 창조된, 순수 사념체(pure thought-forms)로 분류한다. 우리는 내부써클의 멤버들에게 이 두 번째 종류의 엘리멘탈을 만들어 투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영(spirit)'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영'은 절대적 존재를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의 존재를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복음 4:24)." 그래서,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감정적 념체이든 혹은 순수한 념체이든 이러한 사념체들을 '엘리멘탈'이라고 부른다.
모든 엘리멘탈은 에너지를 가진 하나의 명확한 형상(form)를 가지고 있다. 모든 생각과 모든 감정과 모든 욕망은 각기 상념체, 감정적 사념체 , 또는 순수한 사념체를 창조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이러한 영들 또는 엘리멘탈들을 ‘더러운 것’이라 불렀을 때 그러한 차이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멘탈이 자신들의 '집'(home)을 떠나는 순간 어떻게 창조되는지를 비유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집이란 바로 인간의 인격(인성:personality)이다.
하나의 엘리멘탈이 생각이나 감정에 의해 창조될 때, 그것은 자신을 창조한 사람과 똑같은 진동수로 진동한다. 그래서, 비유에서는 엘리멘탈이 바로 그 인격을 떠날 때, 물 없는 '사막'로 들어간다고 말하는데, 바로 그것은 흡수하여 재활할 새로운 생각들(사념체)이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엘리멘탈은 자신의 힘을 빼앗기지 않는 4차원 세계를 지난다. 하지만 그것은 나름의 생명과 정체성은 물론 일종의 지성도 가지고 있다.
그 엘리멘탈은 말한다. “ 나는 에너지를 얻기위해 나의 창조자에게로 즉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그러나 그것은 돌아오면서 '또다른 일곱의 더욱 사악한 영들'을 데리고 온다. 왜 우리는 그러한 '영들', 그러한 ‘엘리멘탈들’을 끌어오는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찾는다.’는 법칙이 있으며, 그 엘리멘탈은 '사막'을 배회하는 다른 엘리멘탈들과 똑같은 진동수로 진동하여 그것들이 만나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엘리멘탈은 자신과 똑같거나 더 나쁜 진동수로 진동하는 존재들을 끌어들여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제 그것들이 다시 돌아올 때, 그들은 어떤 깨끗한 집(home, 고향)을 가지는 사람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항상 악한 방식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때때로 그는 착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 그를 얼간이처럼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불러보자. 이 대목이 바로 비유에서 엘리멘탈이 그의 집이 '청소된 깨끗한' 집을 발견하는 때를 말하는 것이다. 엘리멘탈은 또한 그 사람이 점유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가 무얼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그 엘리멘탈에게 활력을 주지 않게 될 때, 그 사람은 엘리멘탈 대신 또 다른 선한 엘리멘탈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엘리멘탈은 그 사람에게로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내부 써클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대립적인 엘리멘탈들을 창조적인 엘리멘탈들로 대체하여 나쁜 엘리멘탈이 다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나쁜 엘리멘탈은 자신에 저항할 수 있는 선한 엘리멘탈이 없이 '점유되어 있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찾았을 때, 그 존재에게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일곱', 왜 일곱인가? 한 부류의 엘리멘탈들이 한데 결합될 때 그것들은 하나가 된다. 염력이나 에너지를 가진 일곱 엘리멘탈들. 그렇다. 그런데 왜 하나의 엘리멘탈이 일곱의 다른 것들을 불렀을까? 왜냐하면 인간의 출입문들이 일곱 개이기 때문이다.
이런 출입문들은 우리가 한 사람의 에테르 복체(에텔체, etheric double)에 있는 에너지 중심점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 엘리멘탈들이 그 사람의 몸에 도달할 때, 그것은 인체에 있는 일곱 개의 문을 통해 들어간다. 그것은 생식기(genitals), 태양신경총(solar plexus), 비장(지라, spleen), 간(liver), 심장(heart), 갑상선(thyroid) 그리고 머리(head)를 통해 들어간다. 이것들이 일곱 문들이다. 그것이 들어가면, 그 사람의 현재-인격(present-day personality)에 대한 통제력을 얻게 되며, 그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계속 되풀이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다시 활력을 얻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 파워풀한 통제력을 얻어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엘리멘탈들에 의해 빙의된(possessed)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에 관한 또 다른 경우에 대해 말했다. 어떤 경우의 한 엘리멘탈은 그 자신을 군단(Legion)이라고 불렀는데, 그 군단은 한 인격을 점유했었거나 빙의했던 존재인데, 우리는 그 엘리멘탈의 인격이 바뀌는 현상 (phenomenon of mobility)을 보았었다. 성서에서 그리스도는 그런 엘리멘탈들이 어떻게 태어나고 창조되고 투사되며, 그것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그것들의 창조자(originator)에게로 어떻게 귀향하는가를 명료하게 묘사했다.
성경은 또한 그런 종류의 영들은 금식이나 기도를 하지 않으면 쫓아낼 수 없다고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금식'(fasting)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배가 가득 부르다면, 그는 잘 집중할 수 없으며. 침착한 사고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위장에 과부하를 주지 않음으로써 그런 마음의 상태를 성취하는 것은 더 쉬운 일이다. 여기서 금식이란 어떤 다른 의미가 아니라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러면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새로운 엘리멘탈을 창조하는 것을 말하며, 단 새로운 순수한 상념체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신과 신성을 품음으로써 대천사들과 로고스, 신 자체의 도움을 얻는 것은 물론 그들에 대한 믿음의 도움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기도로써 다른 사람에게 순수한 상념체 엘리멘탈을 보내어 그에게서 사악하거나 나쁜 엘리멘탈을 내쫓는 방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