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가족행복의 샘물이 되어
여행 하루. 우리의 여행은 각자의 일상보다 아름답다
며칠 전부터 우리 집 단풍분재에 붉은 잎 하나둘 가을이 들어서더니, 사무실 가는 길 울타리 넘어 진궁나무와 정원 안 단풍나무에도 붉은 가을이 어느새 살짝 찾아왔다. 아무리 비가 오래 많이 온다 해도, 이러다 여름을 놓칠 것만 같아서 마음이 바빠진다.
부랴부랴 여름여행길을 떠난다. 구례 화엄사 사찰여행.
6남매 중 2,3,4,5번이 함께 한다. 나는 4번이다. 처음으로 내 아이가 함께 따라왔다. 몇 년 만에 함께 한다.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내겐 행복한 여행이다.
고속도로 휴게소 커피가 달다. 9명이 두런두런 그간의 얘기를 나눈다. 자주 만나지만 만날 때마다 얘깃거리는 새롭다. 얘기 속엔 깊은 양념이 담겨있다. 반백년 묵은 된장 같은 정.
그리고 가장 중요한 얘깃거리로 진지해진다. '오늘 뭘 먹을까?'
아침을 각자 간단히 해결하고 이른 출발을 한지라 배가 고프다. 만장일치로 결정한 구례군 가까이 순천의 맛집을 향해 출발이다.
서대회비빔밥집. 도착 11시, 아뿔싸 너무 일찍 왔다. 문패 옆 주인장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저 멀리 충청도서 온 식객들 거두어 달라고 조른다. 야박하지 않다. 서대회비빔밥 대령이요. 내 아이, 연신 사진 찍기 바쁘다. 정결한 나물반찬에 비빔밥 맛은 천하일품이다.
비빔밥이기에 나물 밑반찬 함께 비비고 싶은 습관이 작동된다. 주인장이 말린다.
“반찬은 서대비빔밥에 살짝 곁들여 드세요.” 서대회비빔밥의 제 맛을 놓일 뻔했다.
낙안읍성으로 향한다. 사또가 죄인에게 벌을 하는 사무당에서 기념단체사진. 내 아이는 커피를 마시겠다고 인근 혼행을 택한지라 기념사진자리에 빠졌다. 아쉽다.
수라간을 안내하는 아주머니의 손길에 끌려간다. 왠지 옛집과 할머니가 생각난다.
아궁이와 놋쇠그릇, 다락방이 정겹다. 어릴 적 선화동 날맹이 집 부엌이 떠오른다.
3대가 함께하는 여행객들이 제법 많다. 옛 마을 정경만큼이나 간혹 들려오는 손주와 할아버지간의 대화도 정겹다.
순천만습지로 향한다. 비가 많이 와서 습한데, 습지인지라 차에서 내리자마자 습한 기운이 안경을 덮는다. 잠시 걷다가, 대부분 습지를 한두 번 여행 온 경험이 있는지라 인근 커피집으로 향한다. 자연스레 처음으로 여행에 함께 온 내 아이에게 질문이 폭주한다. 남자친구이야기, 결혼이야기... 연이어 진다. 나는 새삼 알았다. 내 아이가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겐 이렇게 친절하고 웃으며 재미있게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나한테도 좀 살갑게 하지,’ 잠시 야속한 생각이 든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 아이의 긍정의 발견에 대견해진다.
어느덧 어둑어둑해진다. 숙소를 향한다. 화엄사 옆 금정암. 짐을 풀러 방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모두가 놀랜다. 방의 시설이며, 가구, 족자, 소품 하나하나 모든 것에 더해 절에서 준비해준 과일에 곡차까지 그 정성마저 섬세하게 감동이다. 의자에 잠시 누어 문밖을 본다.
갑자기 비가 폭우로 변한다. 기상청 근무하는 조카딸의 실시간 예보중계에 귀 기울이며,
우리는 잠시 절에서 준비한 곡차를 나누며 순천만에서 끊긴 대화를 이어간다.
이윽고 비가 그치자, 나는 홀로 방문을 나선다. 비갠 후의 지리산 운무가 신비감을 더해준다. 운무 뒤 산자락이 웅장함을 발한다. 사람의 손길로 빚은 금정암 곳곳의 건축물 하나하나가 자연의 풍취와 어우러져 세련됨을 뽐낸다.
대웅전에 들어서 삼배를 올린다. 이 귀한 곳을 인연으로 받아주심에 감사 올린다. 두 팀은 빠졌지만 6남매 행복한 인연으로 영원하길 기도드린다. 그리고 내 아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앞으로도 잘 살아가기를 간청 올린다. 그리고 마지막 반배엔, 내가 꿈꾸는 일들이 결실로 맺도록 살짝 소원을 늘어놓는다. 욕심이 과했나? 금정암 부처님은 웃으며 너그러이 이해해주실 것같다.
저녁을 먹으러 차를 타고 나간다. 일지매식당 닭구이. 세상에나. 도시 닭의 세배는 되어 보이는 토종닭을 숯불에 굽는다. 부각에 가재미, 다양한 밑반찬 하나하나가 정성이다. 내가 요리사가 되어 정성을 다해 굽는다. 자주 뒤집는 것이 맛의 비결이라는 주인장의 지시에 따라 뒤집고 또 뒤집는다. 드디어 첫 작품이 입속으로. 역시나이다. 닭요리의 신세계다.
자연스럽게 잔을 든다. “금정암과의 인연, 닭구이의 감동.. 강씨 집안에 장가온 25년 이래 가장 감동스런 막내사위의 모습에 경의를 표한다.”라는 진심어린 나의 건배사와 함께
지리산자락의 밤은 우리 6남매의 웃음으로 저문다.
순천과 지리산자락 금정암, 우리의 2박3일 여행의 첫날은 이렇게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며 행복으로 가득하다.
여행 또 하루. 빗물만큼 떨어지는 눈물
새벽 산사에 비가 내린다. 밖의 큰 빗소리에 그저 인간은 미물임을 본능으로 느끼는 것인지
잠자는 내내 몸이 움츠러든다. 큰 빗소리 사이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새벽예불소리인 듯한데, 몸에 귀차니즘이 작동되는 듯하다. 알람을 저 멀리 던져둔다. 그리곤 애써 잠을 청한다. 세상 가장 편안한 침구에서의 잠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그러나 빗소리 물러서지 않는다. 계곡수 모아진 문밖 바로 옆 폭포수와 함께 더 큰 빗물 이중주를 펼친다. 가끔 하늘의 천둥소리가 박자를 맞춘다. 누워있는 나는 단잠으로 전날 여행의 곤함을 달래는 여행객이 아니라 빗소리, 작슨 폭포소리, 독경소리, 그리고 하늘의 천둥소리가 어우러진 산사음악회를 입체음향으로 누리는 새벽음악회의 청객이 된다.
몸을 일어세울 수밖에 없다. 간단히 씻고 밖을 나선다. 하늘은 온통 먹구름에 눈앞엔 굵은 장대비가 한 가득이다. 대웅전 부처님께 삼배 올린다. 어제의 기도가 자동재생이다.
삼배 후 법당입구계단에 앉아 경내를 둘러본다. 비를 바라보며 빗소리에 빠지고, 작은 폭포를 바라보며 폭포소리에 빠진다.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향내가 은은히 코를 자극한다.
‘비를 맞으며 어디로 바삐 가는 걸까?’새 한마리가 나를 부르는 듯 맑은 소리로 인사한다.
이 입구는 어느덧 나의 아지트가 된다. 새벽이후 독경 시간까지 오전, 틈이 나는 대로
나는 이곳에 앉아 빗속 여름을 즐긴다. 글을 쓰고, 함께 온 내 아이와 톡도 하고, 무엇보다 비의 천하에 감싸인다.
여수 바다에 비가 내린다. 한 시간 이상을 달려 가족여행객이 함께 찾은 여수항 상아식당.
통장어탕이 반긴다. 내 아이는 안 먹는단다. 장어탕이 싫어서? 아니다. 이미 아침밥을 두둑이 먹었단다. 젊은 애들끼리 먹은 대나무통밥상을 사진 찍어 보내 삶은 계란으로 요기한 아빠를 약 올린 지 오래다.
역시 이곳 통장어탕은 내 입과 내 배를 배신하지 않는다. 두툼한 장어에 시래기, 된장 풀어 끓인 탕에 청양고추 살짝 넣어 먹을라치면 밥 한 공기는 바로 뚝딱이다. 멍게무침에, 하얀 갓김치가 별미다. 막걸리가 빠질 수 없다. 가족여행객의 머리는 점심을 먹는 내내 밥상과 가깝다. 이렇게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탕여일체’,통장어탕에 빠진다.
여수를 왔으니 돌산을 가봐야겠다. 내 아이는 케이블카를 태운다. 어른들은 대부분 여수 케이블카를 경험했기에 전망 좋은 곳에서 커피를 마신다. 커피집 들어올 때 잠깐 빗님이 쉬시더니 바로 다시 큰 빗님이 찾아오셨다.
가족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덧 나는 내 아이 이야기밖에 없다. 많이 철들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아이가 쓸 때 없는 미래걱정이 많다는 이야기까지.. 그 걱정이 일자리나 미래의 꿈에 관한 것이 아니다. 결혼해서 남자아이를 낳으면 집 나가면 골치라는 걱정, 노인이 되면 시골서 살겠다는 계획 등. 딸아이의 너무 먼 이야기이기에 우리는 한참을 웃는다.
비가 더욱 거세다. 밖을 여행하기엔 무리다. 광양의 아웃렛을 가기로 결정했다.
누이들이 "아웃렛가면 서율 아빠는 피곤하겠네"하며 웃는다.
"왜?"
"딸이 이것저것 사달라고 하지 않을까?"
"맞아..”
대비를 해야겠다. 머릿속에 대략 쇼핑아웃라인을 그려놓는다.
아웃렛에서 1시간 각자 자유롭게 움직이기로 하고 흩어진다. 30분후 전화벨소리. 올 게 온듯하다. 역시다.
"아삐 어디야?”
"어... 1층...”
"나는 2층인데 내가 1층으로 갈께”
"그래 알았어”
내 아이가 나타났다. 웃는다. 나도 멋쩍게 웃는다. 그런데.. 그런데.. 눈물이 솟는다. 그러나 내 아이에게 눈물을 보여줄 순 없다.
내 아이가 예쁜 봉투를 내민다.
"이게 뭐야?"
"아빠 줄 선물"
"엥?"
작은 지갑과 티셔츠다. 30분 동안 골랐단다. 이런 아이를 두고 나는 딴 생각을 했으니.
"내가 화장품 사줄께.. "
"아냐.. 난 살것없어.."
"너 아빠가 사준지 오래됐잖아"
"아니. 난 화장품 많아"
"그럼 뭐 사줄까? 옷? 구두?"
"놉. 돈 아껴써.."
또다시 흐르려는 눈물을 참는다. 애써 말을 돌려,
"아빠 운동회하나 살까 하는데 살까?"
"그래 사자"
"골라줄래?"
"오케이"
돌아오는 길, 앞좌석에 앉아 속으로 많이 울었다. 오늘의 빗물만큼 더 거센 눈물이 가슴 안으로 흐른다. 정말 다 키웠다는 안도의 눈물이. 너무 예쁘게 생활하고 있다는 흐뭇한 눈물이. 이 아이가 내 아이라는 행복한 눈물이...
순천 시내, 낙지 탕탕이 비빔밥으로 유명한 순광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쉽게도 낙지 탕탕이는 지금 안 된다고 한다. 낙지복음과 연포탕을 시킨다. 무엇을 시켜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탕탕이 못 먹어 아쉬워도 나는 하나도 아쉬울 것이 없다. 나는 이미 배부르다.
눈물로 배부르다. 행복으로 배부르다.
2박3일 여행 중 2일차, 내 눈엔 내 마음엔 온통 눈물과 빗물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빗물여행에, 딸아이의 모습에 반한 행복한 눈물여행이다.
여행 마지막 하루. 우리의 여행에 비는 훼방꾼이 아니다
산사에서 곡차를 마시며 밤을 보내니 머리가 맑고 몸이 가볍다. 게다가 대웅전 법당을 기대어 비에 젖은 산사의 아침을 맞으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심호흡을 크게 할 때마다, 비에 젖은 자연의 내음과 향내 가득 고인 법당의 묵은 내음이 내 호흡기 안에서 섞이고 섞여
내 몸 안을 자연스레 돌아 돌아, 몸속 구석구석을 말끔히 정화하는 듯하다.
나는 산사에만 오면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DNA를 지녔나 보다. 고모들이 들려주는 '너의 아빠와 절 이야기'를 듣는 내 아이의 표정을 보니, 그 DNA는 대를 이은 듯도 하다. 그도 그럴 법도 하다.
나의 엄마는 딸딸딸의 3남매를 낳은 뒤 60년대, 그저 아들 하나를 기도하며 석교동의 복전암에서 백일불공으로 나를 낳았다. 그리고 좋은 대학교 가라고 사회 나가서 성공하라고, 멀리 경주 칠불암까지 버스 갈아타며 불공드리러 다닌 기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내 아이의 엄마 역시 천주교 신자이지만, 아이를 갖기 위해서라면 스님이 전해주는 민간요법에 무척이나 귀 기울였다. 내 아이의 엄마는 산에 갈 때면 언제나 나보다 앞장서 법당에 향을 드리우며 내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 불자인 나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지금 이 아이가 법당에서 삼배를 올린다. 소위 '기도발이 엄청 세다'는 구례의 사성암에서.
살짝 샛눈으로 보니 절하는 폼은 다소 어색하지만 일 배 일 배 정성을 다한다.
'내 아이는 무엇을 기도할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묻지는 않는다. 기도할 때의 편안한 입과 눈과 기도가 끝난 후의 맑은 미소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법당을 지나 '소원바위'에서도
내 아이의 기도는 이어진다. '부처님, 내 아이의 기도가 모두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의 오늘의 3배는 이걸로 족하다. '꼭 들어 주소서'
오늘 우리 가족은 마지막 일정으로 웅장한 화엄사를 기도하며 여행했다. 섬세한 사성암을 기도하며 여행했다. 우리의 여행은 오전의 산사기도여행을 끝으로 이제 마쳐야 한다.
계속되는 장마 때문에? 아니다. 기상청 근무하는 조카딸이 야간근무로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이젠 돌아가야 한다. 게다가 여행기간 중에 승진 소식이 전해졌다. 승진한 조카딸의 첫 출근 날인데 소홀할 수 없다.
구례읍내에서 아점식사가 마지막 이벤트다. 인터넷으로 찾은 백반 집 유성식당. 나물과 우리 일상의 식재료로 만든 토속반찬에 조기새끼, 미역국이 일품이다. 게다가 오랜만의 계란 반숙이 영락없이 집밥이다. 내 아이가 예쁘게 생기고 예쁘게 밥 먹는다고 주인장이 갓 긁은 누릉지를 선물하신다. 밥맛만큼 주인의 인심 또한 진하게 달다.
대전으로 가는 길, 여전히 폭우가 내린다. 우중천하 3일의 여행, 그러나 비는 우리가족 여행에 절대 훼방꾼이 아니었다.
산사의 비는 일상에서 빠져나온 우리들에게 마음을 차분하게, 휴식의 시공간을 선물하였고,
여행의 비는 그때그때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우리들에게 마음을 진하게, 그 가족의 울타리를 더 강하게 조여 주었다.
그리고 아빠와 내 아이가 함께 쓴 우산 바깥에 내리는 비는 이 세상 가장 달콤한 꿀물이 되었고, 내일을 위해서 끝없이 솟을 행복의 샘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