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탄생 백주년 기념 평론/ 이선/ 2018 한국문학비평가협회 국립한글박물관 세미나 발표 평론
<박남수 탄생 백주년 기념 평론>
산새울음소리로 형상화한, 절제와 공명의 비가(悲歌)
이 선
그리운 얼굴 하나 잡고 날을 밝혀본 이별은 안다. 이별의 깊이는 맑고 투명하여 울음소리를 지나 동굴에 갇힌다는 것. 필자는 박남수의 시를 읽고, 어둠의 동굴을 거꾸로 돌아온 이별과 만난다.
박남수(朴南秀)(1918-1994)는 33세 꽃다운 젊은 나이, 6·25 사변 중에 평양에서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가족과의 마지막 생이별이다. 필자는 박남수의 8권의 시집에서 새에 관한 시편을 골라 <산새울음소리로 형상화한, 절제와 공명의 悲歌>라는 제목을 붙였다. 박남수 시에 나타난 비가(悲歌)의 시들은 <이별의식 통과의례>라고 본다.
평안남도 평양 출생의 박남수는 1940년 정지용 추천으로 문장지로 등단하였다. 박남수는 1954년 《문학예술》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8년 조지훈, 유치환 등과 한국시인협회 창단 멤버가 된다. 1959년 《사상계》 상임편집위원을 맡고, 1975년 미국이민을 떠나기 전까지 20여 년 간 문단활동을 하였다.
박남수의 8권의 시집을 기준으로, 아래와 같이 연대기를 8단계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초기 『초롱불』 시집의 시와 『갈매기의 素描』 중기 시집의 시들이 후기 시집 『小路』에 실리는 등 중복되어, 시대별 연대기를 만드는데 한계성이 있음을 밝혀둔다.
1. 『초롱불』(1940, 동경 삼문당)
2. 『갈매기의 素描』(1958, 춘조사)
3. 『神의 쓰레기』(1964, , 모음사, 28편)
4. 『새의 暗葬』(1970, 문원사)
5. 도미 6년 후 나온 『사슴의 冠』(1981, 문학세계사, 66편)
* 1982년 선시집 지식산업사 간행
* 1991년 선시집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미래사)
6. 1975년 58세의 나이에 도미 후 『서쪽 그 실은 동쪽』(1992, 인문당)
* 재미 3인 시집 새 소리(박남수, 고원, 마종기, 1992, 삼성출판사)
7. 미국에서 아내의 사망 후 1993년 『그리고 그 以後』(1993, 문학수첩)
8. 별세하던 해 『小路』(1994, 시와 시학사)
2018년은 박남수 탄생 백주년이 되는 해다. 필자가 박남수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주지주의 시세계를 조명한다는 것은, 그의 불운한 삶에 대한 위로며 문학사적으로도 의의있는 작업이다.
박남수는 1957년 아세아 자유문학상 수상, 1993년 공초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평양 출신 지방시인으로 중앙문단에서 소외되었으며, 부산 피난시절부터 중앙문단과 비로소 교류하게 된다. 1975년 도미로 인하여 공백기가 또 생긴 것도 소외의 원인이다. 김춘수의 <박남수론―시집 『신의 쓰레기』를 중심으로>와 李健淸의 <박남수 시 연구―도미 이후에 발간된 시집들을 중심으로> 외에는 살아생전 그의 시가 논의되지 않은 점이 안타깝다.
본 장에서는 박남수가 새의 시인으로 불리는 만큼, 새를 주제로 한정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1. 새에 대한 직관과 사유―객관화된 문장표현
박남수의 시에 나타난 새의 특징은 객관화이다. 직관과 사유가 객관화되어 문장은 빛나며 짜릿하고 통쾌한 지적 쾌감을 준다. 아래 시를 살펴보자.
종달새는 어디까지 오르려나. 꺼질 듯 꺼질 듯 하늘로
點져가는 종달새는 하늘 그 너머가 보고 싶은가 보오.
나도 잠시면 地球를 좀 떠나보고 싶소. 어쩌면 成層圈
쯤에서 家鄕이 그리워지고, 사람이 보고 싶어질는지
도 모를 일이오.
―「無題 2」 전문
박남수의 시는 새의 투명한 울음소리를 닮았다. 투명한 목관악기의 공명소리를 낸다. 숨죽여 억눌린 울음소리가 아니다. 설움에 복받쳐 통곡을 하지도 않는다. 산새소리처럼 맑고 투명한 소리는 슬픔과 한을 여과시켜 박남수 시의 주지주의를 완성시킨다. 수십 년 동안 기다림을 녹인, 면역력이 생긴 슬픔이 향기롭다. 읽을수록 문장은 은은하게 의미와 감미가 우러난다. 고광나무 꽃차 같다.
3-5행 ‘어쩌면 成層圈/ 쯤에서 家鄕이 그리워지고, 사람이 보고 싶어질는지/ 도 모를 일이오.’ 부분을 살펴보자. 이상의 문체와 김소월의 「진달래」 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의 역설적 문장기법이다. 짐짓 아닌 척, 시침을 떼는 아이러니다. 진실은 너무나 그립다는 역설이다.
박남수의 문장은 먼저 울음을 토로하거나 사변적이지 않다. 상투적이지도 않다.
손을 잡고 울던 할머니와는 반대로 의연하게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지성과 의지가 돋보이는 울음을 삼킨 문장이다.
아래 소개하는 시는 박남수 시집, 『신의 쓰레기(1964)』에 발표된 「새」 작품 1-4 중 1이다. 부록 형태로 몇 개의 연들이 이어진다. 시의 감각적 미의식을 주기 위한 새로운 시형태와 구조를 실험한 의도성을 가진 문장으로 필자는 본다.
『신의 쓰레기』에는 <종달새, 열쇠, 해토, 땡볕의 그늘, 나무, 조어, 새, 음악, 악기, 바람, 꽃, 국화, J. A. 프루프록의 戀歌, 밝은 正午, 微熱, 접시에 놓인 自然, 마을> 등 28편의 시가 게재되어 있다.
朴南秀 詩集, 46판 96면, 값 150원. 「초롱불」과 「갈매기 素描」 이후의 詩篇 중에서 가려 뽑은 力作의 시편을 모았다. 近 三十年의 詩作生活을 통해서 젊은이 못지 않는 세련된 感性과 言語가 주는 미묘한 뉘앙스를 살려 實驗하고, 精進하는 이 자욱을 보라! <母音社刊>
위의 글은 이라는 문예지에 실린 『신의 쓰레기』 시집 줄글 광고문이다. 신기하고 재미있다. 그때 박남수 시집 가격이 150원하던 것이, 지금은 인터넷에서 30만원에 거래된다는 것도 아이러니 하다. 예술가는 가난에 찌들려 죽어가지만, 예술작품은 살아서 후대에 비싸게 거래된다. 미술은 가격 편차가 더 심하다.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새 壹」 전문
박남수의 주지주의 시는 한국시단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시의 특성을 <감성ㅡ심미적 미의식인 이미지ㅡ직관과 사유로 재해석된 내용>으로 정의할 때, 위의 시는 그 모든 조건을 함의하고 있다.
1연의 서정적 감성, 2연의 직관적 사유, 3연의 재해석은 눈물을 녹여 만든 진주알 같다. 빼거나 더할 군더더기가 없다. 미려한 문장이 주는 진정성이 감동적이다.
1연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부분을 살펴보자. 미려하고 섬세한 감각적 문장과 상상력이 심장을 쫄깃하게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이는 바람에게 공간을 부여하고 있다.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는 어떤 곳일까? 상상력의 공간이 확대되어 이동하며 감각적 미의식을 준다.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 새는 어떤 노래를 부를까? 두 문장은 객관화를 획득한 직관적 문장이다. 억지스러움이 없다.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라는 문장은 사랑을 다른 수직어로 각설할 필요가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상투어가 없다. 설명적이지 않다. 억지스럽거나 가식적이지도 않다. 지식자랑이나 나열도 아니다. 그러나 사랑을 진지하게 진실하게 ‘극명하게 보여주기’하고 있다.
2연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살펴보자. 객관적으로 새의 울음소리를 오랫동안 깊이 관찰한 후에 사유에 이른 문장이다. 새의 울음과 여자의 울음을 비교하여 보라. 새의 울음과 사랑은 여자의 거짓눈물이나 과장에 비하여 얼마나 솔직한가? 직관과 해석적 시각이 돋보인다.
위의 시 3연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부분을 분석하여 보자. ‘순수’라는 낱말은 3연을 가장 시적이게 하는 문장이다. ‘그 순수’는 무엇일까? 새를 쏘는 포수의 마음은, 정말 맑은 새소리를 얻고 싶은 순수한 마음만 있는 걸까? 포수가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역설한다. 포수는 새의 가볍고 투명한 정신인 울음소리를 원하는 것이지만, 새를 죽이고도 그 정신의 투명함은 가져가지 못한다. 죽은 육신만 가져갈 뿐이라는 <아이러니> 기법이다.
만일 위의 시를 항일 투쟁시로 해석한다면, 의도를 잘 숨긴 상징시다. 위의 시를 읽으면 박남수라는 시인은 어떤 인물일까 경외심이 든다. 모든 과즙을 짜서 껍질은 버리고, 마지막 액기스만 남긴 시의 정수를 본다. 포수는 육고기만 원했을 테지만, 시인은 포수의 마음에 ‘순수’라는 과녁을 심어준다. 그 상상력의 공간이 시의 역할이며 시가 갖는 감각이다. 내용이 있는 주지적 유미주의의 극치다.
2. 자폭 이미지, 마조히즘(masochism)의 새
박남수의 시에는 자폭 이미지가 있다. 여과된 슬픔이 녹아 있다. 늘 새는 당하는 약자로 마조히즘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그 문장 표현은 미려하고 절절하게 아름답다. 자폭 이미지를 이토록 아름답게 치장한 시적 기교가 놀랍다. 아래 시를 읽어보자.
이른녘에
넘어오는 햇살의 熱意를
차고,
散彈처럼 뿌려지는 새들은
아침놀에
黃金의 가루가 부신 解體.
머언 記憶에
投企된 純粹의 그림자
― 「새 貳」 전문
제목을 어루만지다가, 이미지를 더듬다가, 통곡을 삼킨 문장들과 악수를 하다가, 필자는 목이 멘다. 얼굴도 모르는 박남수라는 시인에 대한 애정이 생긴다. 언어의 힘이다.
‘이른녘에/ 넘어오는 햇살의 熱意를/ 차고,’에서 보여주는 ‘햇살’과 ‘아침’에 대한 낯설게하기를 실현한 문장을 읽어보자. 햇살에게 의인화를 하여 의지를 부여한다. ‘햇살의 열의’라는 표현은 압권이다. 뜨거운 열기와 색채감까지 연상작용을 한다.
‘산탄처럼 뿌려지는 새들’과 ‘황금의 가루가 부신 해체’라는 표현을 눈여겨보자. 대조법이 극명하게 아름답다. 자폭 이미지를 이토록 미려하게 치장한 기교법을 보았는가? 박남수는 손이 희고 작은 남자일 것 같다. 노동자의 손으로 저런 섬세한 문장이 어찌 만들어질까 의문이 든다. 남과 다투고 투쟁하는 손이 아니다. 늘 죽임을 당하고 공중에서 산화된다.
다음 행 ‘머언 기억에/ 투기된 순수의 그림자’로 연결되는 표현을 주목하여 보자. 보통의 시인들이 상투어와 사변적 어투로 고향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것과 비교하면 세련되고 지적이다. ‘투기된 순수’라는 표현만으로도 감탄스러운데, ‘투기된 순수의 그림자’에 대하여 주목하여 보자.
융의 그림자 이론이 있다. 집단 무의식으로 형성된 ‘그림자’는 낱말에 각각의 이미지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각 낱말들은 지역, 나라, 풍습에 따라 다른 이미지로 해석된다. 아마도 물체나 사물의 ‘그림자’도 아닌, ‘순수’의 그림자라는 표현은 박남수가 최초로 시도한 교유한 표현일 것이다. 이미지 합성과 단어 합성을 고심한 뒤에 얻는 시창작 결과물에 박남수 자신도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필자도 새로운 표현법을 처음 사용할 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북방 분계선을 넘어 박남수는 새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었을까? 날아가다가 총알에 산탄처럼 흩뿌려지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상상한 것일까? ‘머언 記憶에/ 投企된 純粹의 그림자’가 ‘散彈처럼 뿌려지는 새들은/ 아침놀에/ 黃金의 가루가 부신 解體,’ 로 <낯설게하기>의 백미다. 눈부신의 ‘눈’을 일부러 뺀 것인지, 출판사 실수인지 모르겠다. 다른 시에서도 앞 글자 한 자를 뺀 것이 몇 차례 있다.
위의 시를 발표할 당시는 북한에 가족이 있으면, 공무원 시험에 응시도 못하던 시절이다. 시적 거리가 먼 심미적 문장표현이다. 언어의 기교를 최대한 살리면서, 감정을 배제한 객관화된 문장이다.
바람에 갈대가 우는
발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포인타는 코를 저으며
갈밭을 허비다가 코를 들었다.
코의 方向으로 뚫린
砲手의 銃口,
새는 投網처럼 하늘에 뿌려지고
펑,
울린 맑은 공기의 구멍.
구멍에서 그려나가는 파동의 끝에
날개는 너울
너울 기울며, 떨어져 간
한 마리의 새.
― 「새 四」 전문
위의 시 「새 四」에서도 새 시리즈에서 보여주는 마조히즘적 성격이 노출된다. 박남수의 새는 총에 맞아 죽고, 허공에 육체가 파편으로 흩어진다. 시적 화자는 늘 새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 새를 또 자신이 죽이고 만다.
‘펑,/ 울린 맑은 공기의 구멍./ 구멍에서 그려나가는 파동의 끝에/ 날개는 너울/
너울 기울며, 떨어져 간/ 한 마리의 새.’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펑―구멍―파동―날개―새>로 이어지는 낱말의 확산적 효과는 물결처럼 퍼져나간다. 이미지 증폭을 시키고 있다. 시창작의 효과적인 기법이다.
언제 가장 시가 잘 써질까? 정신과 육체의 갈등구조가 대립의 각으로 날서 있을 때다. 뇌 속이 복잡하고 불안정할 때 시가 날렵하게 써진다. 시는 상처와 갈등에서 피는 꽃이다. 갈등이 깊을수록 폭력적 시어가 합성된다.
누군가 당신을 미워하는가? 그것은 시를 잘 쓸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사람에 연연하지 말라. 당신의 아드레날린을 일깨워 밤새워 시를 쓰라. 아픔을 소모품으로 소비하지 말고, 생산 전환하는 뇌장치가 필요하다. 아픔과 고통은 시의 자료다. 시인은 천형적으로 슬픔과 고독을 타고 태어났으며, 그것을 즐기는 DNA가 몸속에 존재한다.
펑,
소리의 에코.
새들의 Vie는
眞空地帶에 울린 銃소리 속에 있었다.
*
갈밭이 갑자기 물결치더니
머리를 내어민
포인타의 입에 물리인
피 묻은 銃소리
키가 넘는 갈대가 우는
발 밑으로는
역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 부분을 읽어보자. ‘펑,/ 소리의 에코./ 새들의 Vie는/ 眞空地帶에 울린 銃소리 속에 있었다.’ 부분은 <펑―에코―Vie―眞空地帶―銃소리 > 등 짧은 문맥 안에 여러 나라 언어가 혼용되어 있다. 낯설게하기와 시각적 효과를 주기 위한 심미적 표현이다. 한문의 ‘悲哀’를 ‘Vie’라고 한 부분은 새로운 발상이다. 빗소리의 ‘비에’로도 읽히는 다중구조다.
위의 시는 에필로그 형태, 또는 추신 형태의 「새」 시리즈 마지막 부분이다. 필자는 부록이라고 위에서 명명하였다.
토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 작품을 소환하여 보자. 소설의 맨 뒤에 <에필로그> 부분이 있다. 필자도 한 때, 토스토에프스키와 푸시킨, 러시아 문학에 열광하였다. 소설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실험한 작품이다. 위에 소개한 문예지 광고문에서도, 박남수가 젊은이처럼 실험적인 시를 쓴다고 강조했던 부분이다.
‘포인타의 입에 물리인/ 피 묻은 銃소리/ 키가 넘는 갈대가 우는/ 발 밑으로는/ 역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발 밑으로는 역사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라고 읽히는 것은 필자의 착각일까?
박남수의 새는 상처받은 새다. 포인타에 물린 약하고 여린 새다. 자폭 이미지의 마조히즘의 새다.
3. 새와의 동일시, 자화상
박남수 시의 새 이미지는 박남수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 시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자.
나의 內部에도
몇 마리의 새가 산다.
隱喩의 새가 아니라,
기왓골을
쫑,
쫑,
쫑,
옮아 앉는
實在의 새가 살고 있다.
새가 뜰로 나리어
모이를 쫓든가
나무 가지에 앉든가,
하늘로
날
든가,
새의 意思를
죽이지 않으면, 새는
나의 내부에서도
족히 산다.
새는 나의 내부에서도
쫑, 쫑, 쫑,
기왓골을 옮아 앉으며
조그만 自然이 된다.
― 「새 參」 전문
박남수는 1941년 일본 쥬오 대학을 졸업한 당대 최고의 지성이다. 1932년부터 신문, 동인지에 희곡을 발표하다가 1939년 <문장>지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시 「심야」, 「마을」, 「주막」을 발표하며 등단, 작가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울중앙문단 출신이 아닌 지방 출신으로 인맥과 지연이 없어 정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강사로 전전하며 생활고를 겪었다. 새처럼 종종걸음 치며 살았다.
2연 ‘새의 의사를 죽이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절에 주목하여 보자. 이런 직관적 표현은 박남수만의 주지주의 문장이다. 의미와 표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새의 意思를/ 죽이지 않으면, 새는/ 나의 내부에서도/ 족히 산다.’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은유의 새가 아닌 실재의 새가 자신의 내부에 산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마음이 곧 정화된 자연이다. 새의 둥지인 나무이며, 자신이 새다. 박남수의 자화상이다.
박남수 시의 분위기도 작은 새의 지저귐처럼, 절제된 언어의 공명이 있다. 박남수 시인의 목소리를 그의 시에서 듣는다. 자신을 새로 인식한 것처럼, 새의 목소리로 지저귈까? 노래처럼 아름답게 기교와 화음을 넣어서. 그 음성은 속삭임처럼 절제되고 지적일 것 같다.
박남수 평론을 쓰면서 느낀 점 하나는 오늘 동시대를 사는 시인을 눈여겨보고 살펴주자는 깨달음이다. 우리가 살아서 서로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본다는 건 기쁨이며 축복이다. 박남수를 사랑하고, 그 목소리가 궁금한 오늘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작품론을 숭배하고 시인론을 배제한 것인가 의문이 들고 미안해진다. 지적 자만심을 버리고, 시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시를 생산한 주체자인 시인을 기억하자는 의미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 시인의 나라와 마을, 자연, 문화, 음식까지 좋아하게 만드는 강한 힘이 있다.
4. 세계와의 소통과 비상을 꿈꾸는, 새
박남수의 새는 소통을 원한다. 비상을 꿈꾼다.
새가 꿈꾸는 최상의 삶은 무엇일까? 자유롭게 멀리 날고, 더 신선한 먹이를 구하는 것일까? 더 아름다운 목소리로 지저귀는 천상의 악기소리를 내는 것일까? 아래 시를 읽고 그 답을 찾아보자.
새 울고
벌레가 운다
어찌 빈 소리이겠는가.
글자 한자 가지지 않았어도
뜻을 호소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 「교감」 전문
박남수의 새는 소통을 원한다. 짝을 부르는지, 동료를 부르는지, 자신의 위기를 알리고 싶은 거다. 새는 뜻을 가지고 노래를 한다. 범인들은 그냥 아름다운 새소리라고 뭉뚱그려 표현한다. 그러나 박남수 시인은 오랜 관찰과 직관으로 새소리들이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 각각 의미있는 소리의 음절들의 연결과 집합을 해독한 시인의 모습을 상상하여 본다.
58세 늦은 노년기에 선택한 미국 이민생활에서 새 소리를 충분히 즐겼기를 바란다. 한국처럼 공해가 심하지 않은 넓은 미국 땅에서, 자연과 친교하였기를 바란다. 미국에서도 3인 시집을 낸 것을 보면, 적막한 노년기에 자연은 최상의 위로였을 것 이다.
아래 시 「새」 전문을 읽어보자. 소통을 갈구하는 외로운 시인의 심정을 유추할 수 있다.
새는
진정으로 가서
닿고, 부딪히고, 울고
싶어서, 항상
날갯짓을 한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기인 나그네길을 지나
그 고된 끄트머리에서, 진정
만나고 싶어서
두리번 두리번 찾고 있지만
매양 헛딛는 연약한 발가락이
마디가 부러지게 위태롭다.
눈언저리에
설움을 안경처럼 끼고
세상을 지우고 있다.
― 「새」 전문
1연 ‘새는/ 진정으로 가서/ 닿고, 부딪히고, 울고/ 싶어서, 항상/ 날갯짓을 한다.’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시적화자는 주변과 소통하며 관계성을 회복하기를 원한다. 날개짓은 새의 애착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2연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기인 나그네길을 지나/ 그 고된 끄트머리에서, 진정/ 만나고 싶어서/ 두리번 두리번 찾고 있지만/ 매양 헛딛는 연약한 발가락이/ 마디가 부러지게 위태롭다.’ 박남수의 타국생활은 외국어, 외국사람 등 낯선환경과 소통 부재를 겪었을 것이다. 또한 시인들 성향은 외골수가 많다. 사회화를 거부당한 소외의 공간을 시가 대신한다.
3연 ‘눈언저리에/ 설움을 안경처럼 끼고/ 세상을 지우고 있다.’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관념에 옷을 입혀 이미지화한 전형적인 구절이다. 시창작 공부를 하면서 초기에 관념과 관념 아닌 것, 시가 되는 것과 시가 되지 않는 것을 구별하기 어렵다. ‘관념 벗기기’의 교과서적인 표현이다. 평양을 지우고, 서울을 지우고, 너무나 그립다는 역설적 문장이다.
지지눌려
숨 가쁜
갈매기 하나
있었다.
스스로는
가지 못하는
方向에 밀리는
갈매기는
흰 갈매기는
不安한 물 面에서
꺄륵꺄륵 기울면서
꿈이 꾸고 싶은
갈매기는
흰 갈매기는
永遠한 來日을
꿈처럼 그려 사는 것인지도
기실은
― 「갈매기 素描」 전문
위의 시는 「갈매기 素描」 시집에 실린 대표 시다. 박남수 시인이 꿈꾸는 갈매기는 어떤 갈매기일까? 박남수 자신이 현실에서 느끼는 자신은 <지지눌린 갈매기-스스로는 가지 못하고 밀리는 갈매기- 불안한 물 면에서 꺄륵꺄륵 기울어지는 갈매기>이다. 그러나 박남수가 꿈꾸는 실상은 정 반대이다. 영원한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떠난 것이, 절대고독 속으로 뛰어든 것이라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들여 온 이민의 땅이 외로움으로의 질주였다면? 캄캄 절벽일 것이다. 박남수는 <영원한 내일을 꿈꾸는 갈매기> 조나단이다. 시인은 이상주의자다. 그 꿈은 시인이 꿈꾸는 절대 절명의 가치다.
5. 원생의 새― 불교의 윤회사상과 인연론
박남수의 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토템신앙과 무속인들은 새를 영혼으로 간주한다. 박남수 시에서 보여지는 불교의 윤회사상이나 인연론을 찾아보자.
사람은 모든 원생의 새
어느 기억의 숲을 날며 가지 무성한 잎 그늘
에
잠깐씩 쉬어가는 원생의 새
지평과 하늘이 맞닿는 곳에서 새는
땅으로 꺼져들던가 하늘은 증발되어 그 형상
을 잃는다.
당신 눈에 낀 안개 같은 것.
산새가 죽어, 눈에 끼던 흰 안개 같은 것,
커피를 마시며
아침 두시, 분명 어딘지 모를 어느 숲의 기억
에서
당신은 날아왔다. 나의 내벽에 메아리가 되어
―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에서 3」
1행 ‘사람은 모두 원생의 새’라고 노래한다. 불교의 ‘윤회사상’이나 ‘새 토템’ 신앙이 묻어난다. 북에 두고 온 부모의 안부가 궁금했을 것이다. 윤회사상이나 새 토템 사상에서 위로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중앙아시아 북방유목민족들은 새를 숭배하였다. 인간의 영혼이 새의 머리에 있다고 믿었다. 유목민은 조장을 하여 독수리나 까마귀가 시체를 뜯어 먹도록 한다. 새의 몸에는 자신이 먹은 모든 인간의 육신과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새는 하늘 높이 날아가서 영의 세계와 접촉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유일한 존재로 믿고 숭배한다.
박남수가 무속인을 찾아가서 언제 남북통일이 될지? 부모의 생사를 점괘에 의지하였는지 알 수 없다. 박남수가 유독 새에 집착하고 새 시를 많이 창작한 이유는 아마도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새라면 북방한계선 너머 멀리 멀리, 고향으로 날아가서 부모 형제 친구를 만나고 올 수 있다는 기원문으로 필자는 해석한다. 새는 그 수단으로 차용한 시적 상관물이다.
한국의 무속인들도 새를 신의 영신으로 접신하였다. 무당은 새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손님에게 말을 전한다. 새의 전언은 조상의 전언으로 무당은 매개자 역할을 한다.
하늘의 병풍 뒤에
뻗은 가지, 가지 끝에서
포롱
포롱
포롱
튀는
天上의 악기들.
보리밭에 서렸던
아지랑이의 靈身들이, 지금은
하늘에서
얼굴만 내어밀고.
群鐘이 울리는 음악의 잔치가 되어
고운 갈매의 하늘을
포롱
포롱
포롱
날고 있다.
흐르고
있다.
포롱
포롱
포롱
시냇물 위에 날리는 잔바람에
하늘이 떨어져
破顔의 즐거운 파문.
― 「종달새」 전문
위의 시는 ‘포롱, 포롱, 포롱’이 주는 시각효과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은 시다. 후대 시인들이 박남수 시의 시각화 요소를 자신의 시에 응용하기도 하는 대표적인 시다.
2연 ‘보리밭에 서렸던/ 아지랑이의 靈身들이, 지금은/ 하늘에서/ 얼굴만 내어밀고.’ 부분에 주목하여 보자. 영신은 무속용어이다.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방편인지, 박남수 시인의 뇌에 각인된 종교색채인지 알 수 없지만, 위의 시가 불교의 윤회사상과 무속신앙의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기독교 색채가 농후한 21세기 현대와 대조적으로, 위의 시가 생산된 시대배경은 사회 전반에 불교색채가 농후한 때였다.
6. 이별예감, 새의 비가(悲歌)
박남수의 시는 <이별예감>의 시다. 새의 습관처럼, 이별의 슬픈 색조가 시의 전반에 흐른다. 새의 아름다운 비가(悲歌)는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며 힐링시킨다. 슬픈 영화를 보고 실컷 울고 나면 개운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박남수 시는 슬픔 속으조용히 침잠하게 한다.
새가 앉아있는 나뭇가지는 출발점이며, 종점이다. 새는 오랫동안 나뭇가지에 앉아있지 않는다. 포식자의 먹이가 될까 불안한 걸까? 아니면, 조금씩 먹기 때문에 계속 먹이를 찾아 헤매야 하는 걸까? 가만히 정지하고 있는 새는 알을 품고 있는 어미새 외에는 없다.
박남수의 새 주제 시에는 객관화되지 않은 표현이나, 시적 논리에 맞지 않거나, 비과학적인 표현이 전혀 없다. 필자는 그 신기함은, 박남수의 필력의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시를 읽어보자.
나는 떠난다. 청동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 「종소리」 전문
위의 시는 시인들이 쓰는 시적 표현의 모든 기교가 압축된 시다. 또한 시낭송으로 가장 좋은 아름다운 시다. 쉽고 아름답고 내용도 있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딱 알맞은 분량이다.
1연은 이별을 예측하고 있다. 예언과 예견과 예측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측은 바로 다음 실행에 옮겨질 행위를 일컫는다. 이별은 박남수의 시 전편을 관통하는 중심어다. 현재 시점의 이별이든, 예언된 이별이든, 죽음을 예견한 약속된 이별이든,
1연 1-4행 ‘나는 떠난다. 청동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부분을 소리내어 읽어보라. 시낭송용으로 이보다 더 좋은 시가 있을까? 슬프고, 아름답고,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준다. 가요, 가곡, 드라마, 영화 등 여러 예술장르에서 우리는 이별을 경험한다. 그러나 시인의 이별은 절절하여 뇌를 울게 한다.
2연을 살펴보자.
‘인종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종소리에서 파생된 확장된 이미지가 크다. <종―쇠―역사―인종―감방―어둠>으로 확장된 해석적 시각은, 박남수의 박학다식한 지성을 짐작하게 한다. 시적 깊이와, 역사의식, 지식의 깊이를 유추할 수 있다.
3연은 소리의 전이를 시각화하여 표현하였다.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고 노래한다. 박남수의 시를 가장 자신이 잘 표현한 자평이다. 박남수의 시는 천상의 악기소리를 낸다. 들에서는 푸른 초목과 풀잎이고, 꽃에서는 웃음이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표현주의 미학의 진수를 보여주면서, 내용 측면에서도 확장된 의미의 파장이 크다. 좋은 시적 표현의 샘플이다.
4연의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트럼펫소리처럼 울려퍼지는 소리의 파장이 느껴지지 않는가? 청각 이미지를 시각화하여 공감각적 이미지로 전환한 문장이 압권이다.
아래 시를 읽어보자. 망향의 한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내 옆구리에는
하나씩 날개가 달렸다.
나는 천사는 아니지만
마음 따라 날아다닐 수가 있다.
평양에서 부산으로
서울로,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뉴욕으로
플로리다, 뉴저지로, 나는
족쇄를 차지 않았다.
가산은 많지 않지만
어디에 정주하든 구속은 없다.
내 옆구리에는
하나씩 날개가 달려 있나봐.
― 「驛馬」 전문
위의 박남수의 시에는 그의 일대기가 적혀 있다. 이별예감과 이미 겪은 이별 스토리가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다. 비애스런 이별이 객관화되어 표출되어 있다. <평양―부산―서울―로스앤젤레스―뉴욕―플로리다―뉴저지>로의 긴 이동거리가 고스란히. 한편의 대하드라마다.
박남수의 시는 이별여행의 기록이다. 새가 온 하늘을 자유롭게 날면서 아래 세상을 굽어보듯이. 박남수의 새는 큰 날개를 펴고, 찬찬히 객관적으로 온 세상을 조망한다. 흥분하지도, 통곡하지도 않는 새의 울음으로. 악기의 공명처럼, 박남수 시에 내재된 산새울음소리는 절제된 공명의 아름다운 비가(悲歌)다.
절제한다고 아픔이 삭거나 없어지는 건 아니다. 드러내지 않고 아픔을 참고 있을 뿐. 절절한 시인의 울음이 아프다.
박남수는 문단의 조명을 받지 못한 불운한 천재시인이다. 그 이유는 고향을 떠난 실향민으로 생계에 시달리고, 일본유학파인데도 인맥, 지연이 없어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였다. 시간강사로 전전하며 철새처럼 이동하였다. <평양―부산―서울―미국> 등 세계로 이사를 다닌, 이동경로가 긴 철새다. 1994년 미국 뉴저지 주 자택에서 향년 77세로 고단한 날개를 접는다.
박남수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활발하게 그의 시가 논의되기를 바란다. 필자는 사명감을 가지고, 잊혀진 천재시인의 시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후배 시인으로서, 독자의 마음으로 접근하여, 평자의 마음으로 시를 조명하면서 마음으로 여러 번 울었다.
박남수는 40년대~90년대까지 꾸준히 시작활동을 하며 시집을 발간하였다. 그러나 박남수는 한국시단에 큰 획을 그은 대표적 주지주의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김춘수와 이건청을 제외하고 박남수의 시를 주목하지 않았다. 김춘수도 『神의 쓰레기』 발간기념 평론으로, 단 한권을 문예지에 짧게 평하면서, 냉정한 평가자의 눈으로 해체하여, 이미지 시로 완성되지 못한 구절을 낱낱이 지적하였다.
물론 필자도 『갈매기의 素描』, 『小路』, 전편과 『神의 쓰레기』 , 『초롱불』 , 『새의 暗葬』 , 『사슴의 冠』,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서쪽 그 실은 동쪽』, 『그리고 그 以後』 에 실린 시와 인터넷에 있는 여러 시편을 복사하여 읽었다. 초기 작품과 후기 작품은 짧고 단순하여, 작품성이 떨어지며 설명적인 것 인정한다. 주변 일상을 쓴 평이한 작품도 많다. 그러나 다른 유명 시인의 작품도 대표 작품을 빼면 수준미달인 경우가 많다. 거기 비하면 박남수의 시는 필자가 아끼는 시가 40여 편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이 많다.
필자는 『갈매기의 素描』, 『새의 暗葬』 등 중기 작품에 심취하였다. 그러나 후기 작품은 미국에서 쓴 박남수의 역사기 때문에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40여 편의 시를 껴안고 작품과 사랑에 빠졌다. 어느 작품도 빼고 싶지 않아 고심하다가, 새의 주제로 한정하였다. 40여 편의 주지주의 이미지 시들을, 시집발간 연대별로 8개의 장으로 시대적 분류를 하여 집중조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시가 마지막 시집에 또 실리는 등 중복이 있어 주제별로 방향을 바꾸었음을 밝혀둔다.
박남수의 새 시리즈는 한꺼번에 듣는 새소리처럼, 여러 소리가 섞여도 시끄럽지 않고 각각 소리의 특징이 선명하다. 1·4후퇴 때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니와 할머니, 동족 상잔의 전쟁이 끝난 뒤 남겨 둔 부산 피난시절의 기억, 서울을 남겨두고 떠난 미국생활, 미국을 버리고 떠난 먼 우주로의 긴 이별여행. 멀리 나는 갈매기 조나단처럼. 더 멀리 나는 새, 박남수의 삶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시의 자료가 되었을 것이니, 평론을 쓰는 내내 가슴 먹먹한 기분도 잠깐 내려놓기로 한다. 날개를 달고 힘껏 천상에 날아올라 시의 꼭대기에 도달한 지금.
새의 울음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필자는. 산속에서 듣는 새의 울음소리도 빛깔과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소프라노, 베이스, 테너 한꺼번에 울어도 시끄럽지 않다. 비브라토 섞어 저녁까지 울어도 새는 목이 쉬지 않는 걸까? 유명 성악가는 발성연습을 많이 하여 공명이 크다. 공명이 큰 소리는 목이 쉬지 않는다. 박남수의 새소리가 천상의 악기소리로 세상에 멀리 울려 퍼져 공명되기를 바란다. 복원된 위상에 하늘나라에서 박남수 시인도 위로를 받을 것이다.
박남수의 시는 여러 번 읽을수록 향기가 난다. 설레임 반, 슬픔 반, 감동으로 촉촉해진 마음으로 시를 여러 번 탐독하였다. 독자의 마음으로 박남수를 그리워한다. 필자의 글은, 불운한 천재 시인과 그의 시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다. 고단했던 외로운 시인에게 겸허하게 바치는 직접 만든 향기로운 효소차 한 잔이다. 다음 기회에 나머지 역작들을 조명할 것을 과제로 남겨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