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춘천교구 본당과 북강원도 지역 57개 본당 결연
해안본당 결연본당 - 평안북도 금강군 정주본당
▸본당 설립 연도 : 1936년
▸소재지 옛 지명 : 평안북도 정주읍 성외동
▸현 지명 : 평안북도 정주시 성남동
▸마지막 주임 : 강영걸(1944.4~1944.11)
청천강 하류에 끝자락을 걸친 평북 정주는 경의선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평양과 신의주의 중간 지점에 있다. 그랬기에 인근 평야와 산악지대에서 나오는 농산물과 임산물, 광산 자원의 집산지로 유명했다.
평북 선천ㆍ정주ㆍ구성군 등 평양교구 정주본당(1936~44년) 관할 구역은 본래 천도교 교세가 컸던 지역이다. 정주는 본래 천도교의 교세가 큰 지역이었지만 1928년 3월 서울에서 이주해 온 임기수(가누토) 등이 복음을 전하면서 천주교 공동체가 만들어졌고, 박천공소 출신의 민 요세피나와 남편 유화봉이 교회 설립에 산파역을 맡았다. 안주본당에서 파견한 김 모니카 전교사의 활동으로 본당 설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1934년 안주본당 주임이던 에드워드 보론(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가 김 모니카 전교사를 파견, 전교에 박차를 가하며 본당 설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1937년 5월에 닷새 동안 정주에서 열린 농기구박람회 때는 성화전이 열리기도 했다. 수천 명이 동원된 박람회 행사에 성화전을 열어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높였는데, 길거리 선교에 진저리를 내던 정주 사람들에게 성화전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39년 들어 정주본당은 신자 수가 200명에 육박하고, 예비신자도 300명에 이르는 성장세를 보였다. 이에 정주역 앞에 세 들어 쓰던 성당을 새로 짓기로 하고, 읍내 높은 곳에 구매해 뒀던 땅에 공사비 1만 3000여 원을 들여 성당을 신축했다. 신심 강화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1939년 2월엔 남녀 전교사와 신자들을 대상으로 묵상회를 개최, 신앙을 돈독하게 했다.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비현본당 공소로 격하됐다가 1944년 8개월간 강영걸 신부가 사목한 것을 마지막으로 침묵의 교회가 됐다.
- 2016.05.01. 가톨릭평화신문에서 발췌
▲ 1937년 5월 6~10일 정주본당사에 특기할만한 행사가 열렸다. 바로 '천주교 성화 전람회'. '성화' 내용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주민들이 나날이 늘어 전시는 대성황을 이뤘다. 사진은 초대 주임 페티프렌 신부와 함께한 정주본당 신자들의 모습이다. 커다란 한글 글씨로 '천주교 성화 전람회'라고 씌어있고, "생명의 오아시스인 천주교회로 오라"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사진 2016-04-24 가톨릭신문
▲ 1929년 5월 정주 일대를 비현본당에서 관할하고 있을 당시, 비현본당 5대 주임 스테판 하논 신부와 함께한 정주 '박천공소' 신자들의 기념사진이다.
▲ 1942년 2월 25일 '묵상회'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는 정주본당 신자들. 3대 주임 강영걸 신부가 주임으로 재직하던 때로, 그해 2월 태평양전쟁으로 비현본당 관할공소로 됐다가 1944년 4~11월 강 신부가 주재한 것을 마지막으로 정주본당은 침묵의 교회가 됐다.
▲ 1938년까지 역 앞 사가(私家)에 세를 얻어 성당으로 쓰던 정주본당은 같은 해 성당을 신축한다. 성당이 신축된 터는 초대 주임 로이 페티프렌 신부가 1936년에 구입해 뒀던 대지로, 당시 화폐로 1만 3,000여원을 들여 신축했다.
정주본당 마지막 주임 강영걸 바오로 신부
-교회에 자립 정신 심고 고난 속 공동체 격려 -
▲ 대신학생 시절 양기섭(왼쪽), 홍용호(가운데) 신학생과 함께한 강영걸 신학생.
‘순명(Oboedientia)의 사제’.
평양지목구의 두번째 한국인 사제인 강영걸(바오로) 신부를 특징짓는 표현이다.
그만큼 그는 하느님께 자신의 의지를 봉헌하고, 자신을 제물로 바쳤으며, 인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에 확실히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 순명은 맹목적, 기계적 순명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순명이었으며, 신앙과 사랑을 토대로 한 순명이었다.
강영걸 신부는 1904년 평안남도 평원군 노지면 추흥리(현 문흥리)에서 태어났다.
▲ 메리놀외방선교회원들과 피정을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하는 강영걸(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신부
그러나 강 신부의 유년 시절이나 성장기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훗날 서울대목구장에 임명되는 노기남 대주교나 서울대목구 윤형중 신부, 평양지목구 첫 사제 양기섭 신부와 대신학교 동창이었다는 단편적 사실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다녔고, 졸업 뒤 1931년 5월 30일 서울대목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뮈텔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본래는 서울대목구 소속이었지만, 1927년 평양지목구가 설정돼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평안남ㆍ북도 선교지를 맡게 되면서 평양지목구 사제로 사제품을 받았다.
강 신부는 성품이 무척 강인했던 사제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와 주교의 명이라면 절대적으로 순명했고,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끝까지 완수해냈으며,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잘 유지했던 사제이기도 했다. 후배인 홍용호 신부가 평양대목구장 서리 직무대행에 이어 주교로 임명되자 강 신부의 동창인 양기섭 신부는 서울대목구로 소속을 옮겼지만, 강 신부는 끝까지 홍 주교에게 순명하면서 남모르게 홍 주교를 지원하고 협력했다.
수품 뒤 서포지목구청에 주재하던 강 신부는 메리놀회가 일본 교토지목구 포교지를 맡게 되면서 메리놀회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5년간 선교사들을 돕는다.
교무금 곡식으로 내도록 해 자립심 강화
이어 1937년 7월 귀국, 중화본당 주임으로 첫 발령을 받는다. 사제로서 ‘첫 본당 사목구 주임’이라는 자리가 주는 각별한 느낌만큼이나 중화본당에 그는 사랑을 쏟았다. 더욱이 의사소통이 어려운 메리놀회 사제가 아니라 한국인 사제였기에 본당 공동체 분위기 또한 활기를 띠었다. 강 신부는 우선 농촌 본당이라는 점을 참작해 교무금을 봄, 가을로 거둔 곡식으로 내도록 함으로써 교회에 자립정신을 심었다. 부임 1년 만인 1936년 8월 가난한 아동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성심학원을 개원했으며, 다음 달 유치원을 개원(건물은 이듬해 신축)하는 등 문맹 퇴치에 앞장섰고, 청년회 활동에도 역점을 둬 80여 명의 회원을 중심으로 전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울러 1937년 김리신 회장이 대지와 건축 자재를 희사하자 평남 중화군 신흥면 삼응리(현 평양시 강남군 고천리) 공소에 99㎡(30여 평) 규모 의 강당을 신축했다.
1939년 1월 재일교포 사목을 위해 다시 일본에 건너간 강 신부는 1942년 귀국, 이듬해 4월까지 의주본당 주임을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의 총동원령으로 착취가 가혹했지만, 일본 고등계 형사들을 잘 무마해 의주본당을 보호했다. 일제의 무기헌납 요구로 모든 교회가 수난을 겪을 때도 의주본당만은 강 신부의 노력과 높게 지은 종각 덕분에 1919년 성당 신축 당시 정 마리아가 헌납했던 종을 지켜낼 수 있었다.
1943년 6월에는 일본인들이 개간한 농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농민들이 대부분인 운향시본당에 부임, 11개월간 사목하며 농민들이 용기와 인내심을 갖도록 돌보며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했다. 이어 1944년 4월부터 8개월간 정주본당에서 사목한 뒤 그해 11월 마산본당에 전임됐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고 일제의 학정과 침탈, 생필품 부족이 만연한 상태여서 교회 운영 또한 큰 지장을 받았으나 강 신부는 본당 공동체가 내적으로 충실하도록 힘을 쏟았다.
공산당의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지도
8ㆍ15 해방 후는 기쁨과 함께 공산당의 박해가 찾아온 수난의 시기였다. 교구 사제가 부족했기에 마산본당에 강서본당 주임까지 겸직한 강 신부는 신자들이 무신론자들의 감언이설에 흔들리지 않도록 신자들의 지도에 애를 써야 했다.
1949년 5월 북한의 모든 성직자가 수난기에 들어가면서 강 신부에게도 어려움이 미쳤다. 마산본당이 자리 잡고 있던 강서군 성태면(현 평남 증산군) 인민위원회에서 성모학원 건물을 양도하라고 요구했으나 강 신부가 이를 거절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성당을 드나들며 괴롭히고 감시했다. 사제와 신자들의 접촉도 자유롭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도 위협을 받았다.
1950년 6월 24일 아침, 마산본당 밭에서 일하던 강 신부는 성태면 인민위원회로 연행됐다가 강서군 인민위원회를 거쳐 평양 인민교화소에 투옥됐으며, 1950년 9월 23일께 유엔군의 북진으로 다급해진 공산군에 의해 같은 감방에 갇혀 있던 8명과 함께 총살형에 처해졌다. 당시 강 신부의 나이는 47세였다.
강 신부의 순교 사실은 1ㆍ4 후퇴 때 월남한 현용국(비오) 마산본당 회장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전쟁 당시 강 신부와 같은 감방에 갇혀 있다가 총살형을 받았지만, 유엔군에 발견돼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인물이 거제포로수용소에 포로로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현 회장이 직접 찾아가 들은 내용을 20여 년이 지나 1979년 5월 7일에 채록한 것이다. - 2017.04.16 발행 [1410호] 가톨릭평화신문 발췌
강영걸 신부는
△1904년 평남 평원군 노지면 추흥리 출생
△1931년 5월 30일 사제 수품
△1950년 6월 24일 마산본당 인근 밭에서 일하다가 성태면 인민위원회로 연행
△1950년 9월 23일께 평양인민교화소 수감 중 총살형
△소임 : 서포 평양지목구청 주재, 메리놀회 일본 선교 지원, 중화본당 주임, 일본 교포사목, 의주ㆍ정주ㆍ마산(강서 주임 겸임) 본당 주임
▲ 1942년 2월 25일 '묵상회'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는 정주본당 신자들. 3대 주임 강영걸 신부가 주임으로 재직하던 때로, 그해 2월 태평양전쟁으로 비현본당 관할공소로 됐다가 1944년 4~11월 강 신부가 주재한 것을 마지막으로 정주본당은 침묵의 교회가 됐다.
▲ 1938년까지 역 앞 사가(私家)에 세를 얻어 성당으로 쓰던 정주본당은 같은 해 성당을 신축한다. 성당이 신축된 터는 초대 주임 로이 페티프렌 신부가 1936년에 구입해 뒀던 대지로, 당시 화폐로 1만 3,000여원을 들여 신축했다.
정주본당 마지막 주임 강영걸 바오로 신부
-교회에 자립 정신 심고 고난 속 공동체 격려 -
▲ 대신학생 시절 양기섭(왼쪽), 홍용호(가운데) 신학생과 함께한 강영걸 신학생.
‘순명(Oboedientia)의 사제’.
평양지목구의 두번째 한국인 사제인 강영걸(바오로) 신부를 특징짓는 표현이다.
그만큼 그는 하느님께 자신의 의지를 봉헌하고, 자신을 제물로 바쳤으며, 인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에 확실히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 순명은 맹목적, 기계적 순명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순명이었으며, 신앙과 사랑을 토대로 한 순명이었다.
강영걸 신부는 1904년 평안남도 평원군 노지면 추흥리(현 문흥리)에서 태어났다.
▲ 메리놀외방선교회원들과 피정을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하는 강영걸(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신부
그러나 강 신부의 유년 시절이나 성장기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훗날 서울대목구장에 임명되는 노기남 대주교나 서울대목구 윤형중 신부, 평양지목구 첫 사제 양기섭 신부와 대신학교 동창이었다는 단편적 사실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다녔고, 졸업 뒤 1931년 5월 30일 서울대목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뮈텔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본래는 서울대목구 소속이었지만, 1927년 평양지목구가 설정돼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평안남ㆍ북도 선교지를 맡게 되면서 평양지목구 사제로 사제품을 받았다.
강 신부는 성품이 무척 강인했던 사제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와 주교의 명이라면 절대적으로 순명했고,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끝까지 완수해냈으며,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잘 유지했던 사제이기도 했다. 후배인 홍용호 신부가 평양대목구장 서리 직무대행에 이어 주교로 임명되자 강 신부의 동창인 양기섭 신부는 서울대목구로 소속을 옮겼지만, 강 신부는 끝까지 홍 주교에게 순명하면서 남모르게 홍 주교를 지원하고 협력했다.
수품 뒤 서포지목구청에 주재하던 강 신부는 메리놀회가 일본 교토지목구 포교지를 맡게 되면서 메리놀회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5년간 선교사들을 돕는다.
교무금 곡식으로 내도록 해 자립심 강화
이어 1937년 7월 귀국, 중화본당 주임으로 첫 발령을 받는다. 사제로서 ‘첫 본당 사목구 주임’이라는 자리가 주는 각별한 느낌만큼이나 중화본당에 그는 사랑을 쏟았다. 더욱이 의사소통이 어려운 메리놀회 사제가 아니라 한국인 사제였기에 본당 공동체 분위기 또한 활기를 띠었다. 강 신부는 우선 농촌 본당이라는 점을 참작해 교무금을 봄, 가을로 거둔 곡식으로 내도록 함으로써 교회에 자립정신을 심었다. 부임 1년 만인 1936년 8월 가난한 아동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성심학원을 개원했으며, 다음 달 유치원을 개원(건물은 이듬해 신축)하는 등 문맹 퇴치에 앞장섰고, 청년회 활동에도 역점을 둬 80여 명의 회원을 중심으로 전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울러 1937년 김리신 회장이 대지와 건축 자재를 희사하자 평남 중화군 신흥면 삼응리(현 평양시 강남군 고천리) 공소에 99㎡(30여 평) 규모 의 강당을 신축했다.
1939년 1월 재일교포 사목을 위해 다시 일본에 건너간 강 신부는 1942년 귀국, 이듬해 4월까지 의주본당 주임을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의 총동원령으로 착취가 가혹했지만, 일본 고등계 형사들을 잘 무마해 의주본당을 보호했다. 일제의 무기헌납 요구로 모든 교회가 수난을 겪을 때도 의주본당만은 강 신부의 노력과 높게 지은 종각 덕분에 1919년 성당 신축 당시 정 마리아가 헌납했던 종을 지켜낼 수 있었다.
1943년 6월에는 일본인들이 개간한 농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농민들이 대부분인 운향시본당에 부임, 11개월간 사목하며 농민들이 용기와 인내심을 갖도록 돌보며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했다. 이어 1944년 4월부터 8개월간 정주본당에서 사목한 뒤 그해 11월 마산본당에 전임됐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고 일제의 학정과 침탈, 생필품 부족이 만연한 상태여서 교회 운영 또한 큰 지장을 받았으나 강 신부는 본당 공동체가 내적으로 충실하도록 힘을 쏟았다.
공산당의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지도
8ㆍ15 해방 후는 기쁨과 함께 공산당의 박해가 찾아온 수난의 시기였다. 교구 사제가 부족했기에 마산본당에 강서본당 주임까지 겸직한 강 신부는 신자들이 무신론자들의 감언이설에 흔들리지 않도록 신자들의 지도에 애를 써야 했다.
1949년 5월 북한의 모든 성직자가 수난기에 들어가면서 강 신부에게도 어려움이 미쳤다. 마산본당이 자리 잡고 있던 강서군 성태면(현 평남 증산군) 인민위원회에서 성모학원 건물을 양도하라고 요구했으나 강 신부가 이를 거절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성당을 드나들며 괴롭히고 감시했다. 사제와 신자들의 접촉도 자유롭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도 위협을 받았다.
1950년 6월 24일 아침, 마산본당 밭에서 일하던 강 신부는 성태면 인민위원회로 연행됐다가 강서군 인민위원회를 거쳐 평양 인민교화소에 투옥됐으며, 1950년 9월 23일께 유엔군의 북진으로 다급해진 공산군에 의해 같은 감방에 갇혀 있던 8명과 함께 총살형에 처해졌다. 당시 강 신부의 나이는 47세였다.
강 신부의 순교 사실은 1ㆍ4 후퇴 때 월남한 현용국(비오) 마산본당 회장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전쟁 당시 강 신부와 같은 감방에 갇혀 있다가 총살형을 받았지만, 유엔군에 발견돼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인물이 거제포로수용소에 포로로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현 회장이 직접 찾아가 들은 내용을 20여 년이 지나 1979년 5월 7일에 채록한 것이다. - 2017.04.16 발행 [1410호] 가톨릭평화신문 발췌
강영걸 신부는
△1904년 평남 평원군 노지면 추흥리 출생
△1931년 5월 30일 사제 수품
△1950년 6월 24일 마산본당 인근 밭에서 일하다가 성태면 인민위원회로 연행
△1950년 9월 23일께 평양인민교화소 수감 중 총살형
△소임 : 서포 평양지목구청 주재, 메리놀회 일본 선교 지원, 중화본당 주임, 일본 교포사목, 의주ㆍ정주ㆍ마산(강서 주임 겸임) 본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