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비평 32호 신작 평론 1편〉
김병근 『풀잎 이슬』
-자연과 사람의 행복한 관계 유지-
예시원 시인․문학평론가
■ 들어가며
화가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방식도 쓸 때가 있지만 머릿속 상상력을 동원해서 화폭에 옮길 때도 있다. 초현실주의 전위예술을 할 때 오브제(objet)를 작품에 활용하여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현대에 와서 사진 영상 예술이 활발해지면서 대상을 포착할 때도 있는 그대로의 표현방식 보다는, 작가의 의도가 마치 화가들처럼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활용하는 기법을 많이 활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의 숙명은 창조적 파괴이고 안주는 예술의 사망선고라는 말도 있다. 예술인의 의도와 목적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만 표현하는 사실주의 보다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낼 줄 아는 창조적 개발에 더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물론 그건 보다 창조적인 작품 활동을 개성 있게 열정적으로 하려는 작가들의 치열한 정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작가 정신의 기본은 인간애를 중시하는 인본주의(humanism)에 있다.
생애 첫 시집을 내는 김병근 시인의 『풀잎 이슬』120편의 작품을 접하면서 느낀 시인의 작품세계는 치열함 보다는, 어쩌면 사람으로부터 자유롭고 편안해지려는 힐링(healing)을 선택하고 있고,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주변 사람들과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인본주의(humanism)와 자연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주옥같은 시편 하나하나에는 '문학을 왜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해 본인 스스로가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며 표현의 자유, 즉 작가가 가진 상상력이나 삶의 체험을 통해 느낀 감정을 진정성 있게 잘 살려낸 작품들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그의 세계관과 시선은 늘 '자연과 사람의 행복한 관계 유지'에 머물고 있으며 때론 사적 대상의 관찰을 통해 느낀 상상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저편 너머의 세계를 그려내는 낯설기까지 사적 기교를 보여주고 있지만, 김병근 시인의 시편들은 대부분 순수 서정시가 주류라고 할 수 있다.
순수시라 함은 맑고 깨끗함과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의 시세계는 느림의 미학과 함께 우리의 삶을 회복하는 에너지 충만의 힐링(healing)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중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 의지를 둘러싼 물음이라는 이유에서다. '인격(persona)'이 '가면'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페르소나(persona)' 기법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은 명징한 순수 서정시 120편의 시세계 속으로 들어가 본다.
1. 망개떡
청미래덩굴잎 사이에
내려앉은 반달아
꽃 피면
달 생각하고
절구에 거피 팥소
망개가 새 옷 갈아입었다
내 마음속 가득
각골난망(刻骨難忘)이로다
1연에 '청미래덩굴잎 사이에/내려앉은 반달'로 묘사해놓은 망개떡 모양이 참으로 재미가 있다. 최초 개발할 때의 떡 모양은 하나였지만 수요가 급증하고 생산하는 업체가 많아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고유의 맛은 변하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망개떡의 생명은 떡이 서로 달라붙지 않고 오랫동안 쉬지 않게 망개나무 잎으로 떡을 쌈처럼 싸서 만들고 보관하는 것이다. 망개떡에 관한 에피소드나 추억은 많겠지만 화자도 4연에서 '내 마음속 가득/각골난망(刻骨難忘)'으로 마무리한 것도 시인이 살아온 삶이나 현재의 심리상태도 그렇게 실속 없이 허허롭지는 않다는 것이다.
또한 부드러운 겉피와 속이 꽉 찬 팥소처럼 부실하게 허약하거나 시들하지 않은 떡처럼 시인의 인생도 은혜로운 날들이었음을 작품을 통해 시사하고 있다. '망개떡'은 시인의 의도를 배제한 자기 소멸의 허구적인 시도가 없고 <탈>을 쓴 페르소나(persona)의 작법도 구사하지 않은 맑은 느낌의 서정시에 해당된다.
작품에서 화자는 현대시에서 쓰는 요란스러운 치장이나 극적인 아이러니(irony) 없이 담담하게, 인생을 하나의 망개떡으로 함축시켜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며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21세기 지구촌은 빠르게 역동적으로 변해가고 있지만 2019년에서 2022년까지 3년여에 걸쳐서 이어진 코로나19의 길고 지루한 감염병과 2022년에 터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지구촌 전체를 공포와 함께 도탄에 빠트려버렸다.
세계화의 틀 속에서 다시 한 번 제국주의 패권전쟁에 내몰려 신냉전시대로 접어든 현재 시점이지만, 그렇게 공황(panic)으로 빠져들 수는 없는 일이다. 충돌과 다원화 시대 속에서 김 시인은 시인답게 넉넉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말하기'와 '보여주기'로 생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나가고 있다.
유비쿼터스 시대에도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왜장치던 떡장사의 ''망개떡~메밀묵~'' 소리가 아련하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가끔씩 도시의 밤을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떡은 결코 조바로움이 아니라 넉넉한 느림의 미학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식품이기도 하다.
2. 산
저 형형한 산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산도 칼이고
바람도 칼이다
운무가 피어 오른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산이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오늘도 허물없이
하루가 접혀진다
산이 여전히
비를 맞고 누워있다
누군가 말했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고. 그 산의 새벽엔 어둠의 장막을 헤치고 숨은 별빛이 얼굴을 내민다. 야음을 틈탄 도둑처럼 슬며시 나타나 이내 개선장군이 되어 번개 같이 주먹별을 번쩍인다. 거기서 수천 수 만년의 제국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희붐한 회색빛 산허리에 하나 둘 넘어가는 별빛들, 저기서 어제는 여기서 오늘이 되고 여기서 내일은 저기서 오늘이 된다. 그저 산 너머 해와 달, 별들이 혼자서 궤도를 돌며 왔다 갔다 한다.
2연에서 '산도 칼이고/바람도 칼이다'는 것은 1연의 '저 형형한 산들의/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고 그 산세가 칼바위처럼 예리하고 날카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천 년에 걸쳐 칼바람 맞으며 풍화작용으로 완만했던 산세도 칼바위처럼 우뚝 솟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연에서 '산이 하루 종일/아무 말도 안 했다'는 것과 6연의 '산이 여전히/비를 맞고 누웠다'는 것도 사실은 세상사에 등 돌리고 무심하게 산에만 깊이 생각이 잠겨있는 화자의 마음인 것이다.
세상 일 중에서 섭섭하고 억울하고 쓸쓸했던 기억들이 아직도 화자의 마음 한 곁에 눅진하게 남아있기에 애써 털어내려고 하지만, 바닷가 포말처럼 생긴 구름이 잔뜩 저기압으로 내려앉아 산을 덮고 있듯 화자의 마음을 내리 누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 창작에서 중요한 것은 창조적 상상력과 의미의 재발견인데 김 시인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넉넉한 자연에서 가져온 지적 상상력을 기본 베이스로 해서 만든 기발한 발상과 시적 이미지의 연결이다.
김 시인의 시는 불가사의한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씌우지 않아 '하이퍼시'를 읽는 것처럼 그렇게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단순한 관찰에서 깊은 묵상으로 몰입해 자연과 화자가 합일되어 낯설지 않은 낯설기 기법으로 선시(禪詩) 같은 묘한 느낌을 주고 있다.
새장 속에 갇힌 새에겐 유리창에 비친 하늘도 하늘이듯 산을 바라보는 시 작품 속 화자도 자유가 그리운 것이다.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달빛, 파란 하늘 조차도 그리운 대상이듯 화자는 이미 저 높은 산중 깊은 곳에 가 있는 것이다.
안과 밖 경계선 하나에 자유로움과 통제된 일상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비록 박제된 일상을 보낼지라도, 영혼이 자유로운 시인은 이미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자연과 함께 교감하며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3. 분꽃
아린
기다림으로
울 밑
햇살 머물고
뉘 기다리는가
백옥같이
분칠하여
가녀린 몸짓
너를 부른다
애달파
여리고 여린
한 송이 분꽃이여
예전에는 얼굴에 바르는 분단장용으로 사용했던 분꽃은 수줍음과 소심함을 의미하는 꽃이다. 4월에서 5월 사이에 하얀색의 꽃이 피는데 얼핏 보면 그 시기에 개화하는 찔레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동유럽 폴란드 성주가 늦동이 딸을 한 명 얻어서 남장을 하고 아들처럼 키웠지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순 없었는지 멋지고 용감한 부하 기사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 밖으로 떠나며 자신이 항상 지니고 있던 칼을 성문 옆에 꽂아 두었는데, 그 자리에 피어난 꽃이 바로 '분꽃'이라고 한다.
얼굴에 분칠을 한다는 의미는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여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위장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이 얼굴에 흰 분칠을 하고 여러 가지 무늬를 그리거나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쓰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분꽃' 작품에서도 1연 '아린/기다림으로' 3연 '늬 기다리는가' 하고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 이유는 5연 '가녀린 몸짓'과 6연의 '애달파/여리고 여린' 감성으로 분칠하고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수줍은 남장 여성을 다시 한 번 되새김으로 언술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화장술에는 여러 가지 기법으로 분칠이 활용되기도 한다. 격투기나 레슬링 같은 과격한 운동경기에선 아주 거칠거나 화려한 이미지의 가면을 사용하기도 하고, 연극 무대에서는 무서운 표정이나 영웅호걸의 모습으로 분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분장술에서 사용하는 기법은 수줍거나 예쁘게 보이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용어도 예술 분야에서 심리적으로 관객과 배우 또는 문인과 독자의 관계에서 상호 긴장과 이해, 복귀와 화해 등의 묘한 해소 기법에 활용되는데, 그 사이에 분장술이 등장하기도 한다.
문학적으로 '낯설기'에 해당하는 그 부분이야말로 시적 상상력을 통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작품 속으로 유도하는 심리기법이기도 하다. '분꽃'에서의 화자와 독자와의 '심미적審美的 거리(Aesthetical distance)'는 그렇게 멀지 않은 적절한 긴장관계를 가지며 사랑과 그리움의 상호 거리를 좁히고 있다.
'분꽃'을 통한 시인의 '창조적 상상력'은 도피와 추적의 술래잡기 놀이처럼 과도한 긴장감을 제시하고 있진 않지만, 적절한 거리두기와 페르소나(persona)를 통해 독자들도 함께 묘한 상상력의 세계로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분장의 대상이 남장 여자인지 여장 남자인지 아니면 진짜 남자 또는 여자인지 알 수가 없지만 짧은 작품에서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4. 책 한권 바랑 하나
산도 첩첩
골도 첩첩
하늘이 숨겨둔 땅
산과 구름 빼면
아무도 없다
외로운 절벽 위 암자 하나
둘도 없는 극락 정원
채워지면 비우고
비워야 채워지고
나 아닌 남을 위한 삶이
진정한 수행임에
산 위에서 길을 묻는다.
산으로 가는 길은 절망과 희망, 분노와 환희가 묘하게도 교차하는 걸음이 많다. 산을 찾는 이의 상황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제목에서부터 '책 한권 바랑 하나'로 시작하니 1인칭 화자의 입장이면 세상의 번잡함에서 잠시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어 '마음 정리'를 하는 '마음공부와 챙김'의 수행 과정일 수 있다.
여기서 2인칭 혹은 3인칭의 승려를 바라본 입장이라면 이타적인 삶을 살려는 수행승의 길이 위태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하겠고, 중생을 구도하려는 위대하고 광대무변한 세계의 깨달음에 다가서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4연에서 '채워지면 비우고/비워야 채워지고'라며 득도와 버림의 반복 체험과 수행과정을 말했지만, 사실은 설산고행(雪山苦行)처럼 그 길은 그리 호락호락하거나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1연 '산도 첩첩/골도 첩첩'처럼 골 깊은 산사에서의 시간은 외골수의 고집이 없다면 그 고독하고 쓸쓸한 산의 살림살이와 험한 수행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산 생활을 오래 했고 깨달음을 통해 득도한 이들은 세상 이치에 통달하고 삶을 관조하는 시선과 함께 마음이 너그러울 것 같지만 기실은 전혀 반대일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독하게 편협하고 외고집으로 골질이 세며 불 같이 화를 잘 내는 이들도 있다. 물론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그런 완고한 고집이 없으면 수행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혹독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산 위에선 길이 없지만 산 위에선 길이 보이는 법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산 밑에서 고만고만한 인생들이 도토리 키재기하며 아귀다툼을 벌이지만 산 위에선 그 존재들이 한낱 개미에 불과해 보인다.
되는 대로 살아온 인생도 산사에서 수행하다보면 속절없이 허무하거나 인생무상이었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문득 떨어지는 낙엽이나 겨울 계곡에서 얼음이 '쩡' 하고 갈라지는 소리 하나에도 깨달음을 얻어 득도한다면, 무아(無我)의 경지로 들어 마치 선계(仙界)에서 사는 것 같은 철학적인 의미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온 세월도 3연의 '외로운 절벽 위 암자 하나/둘도 없는 극락 정원'처럼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한걸음 더 내딛어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뒤의 시원한 카타르시스(catharsis)처럼 길 없는 속에서도 길을 찾아내었다면 '책 한권 바랑 하나'가 결코 가볍지 않은 엄청난 세상 무게로 다가올 것이다.
그 엄청난 무게감은 역설적으로 결코 무겁지만은 않은 가벼운 깃털처럼 세상 모든 것이 얹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결코 자기 기만적이지 않은 심리적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자기 항복을 통해 건전한 쪽으로 승화(sublimation)시켜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무게감은 이 작품을 통해 얻어진 작은 진리라고도 할 수 있다.
5. 다랭이논, 눈물 한 방울
아름답다 못해 슬픈 곳
자식입, 음식 들어가는 것과
다랭이 논, 물들어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고
한 폭 휘감은 수채화 풍경화
미려한 곡선 아름다움 붉게 물든
황금빛 다랭이 지겟길
한 뼘 논, 눈물 한 방울에
서러움 가득 거기 숨어운다
다랭이논은 한자로 제전(梯田)이라고 하며 깊은 산골이나 바닷가에 인접한 황무지를 개간하여 만든 계단식 논을 말한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 나라에서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도 있는데, 물이 부족하고 척박한 곳을 개간한 곳이 많아 천수답(天水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1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중국 윈난성 홍하 하니족(红河哈尼族)의 다랭이논과 한국의 경남 남해군에 있는 바래길 다랭이논이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다랭이마을은 손바닥만한 논이 언덕 위에서부터 마을을 둘러싸고 바다까지 이어져 있어, 가난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옛날의 슬픈 기억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찾아보면 한국을 비롯한 세계 어느 곳이나 시골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김병근 시인은 1연 첫 구절부터 '아름답다 못해 슬픈 곳'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수심이 깊고 물이 맑아 청정해역인 일본 대마도에 가 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물이 너무 맑아 슬픈 느낌이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다랭이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지역의 풍경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마치 잘 빚어놓은 예술품처럼 '미려한 곡선'이 '한 폭 휘감은 수채화 풍경화'처럼 휘영청 늘어져 있으니 무수히 많은 버드나무 가지를 보는 듯하다.
어쩌면 가난은 지독한 유폐적 삶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발목을 잡고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작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김병근 시인은 시를 통해 인생의 강에서 가난을 유폐적 삶이 아닌 탈출 가능한 해방으로 활용해내고 있다.
다랭이논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던 우리의 부모님 세대의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난 자녀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나 현재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4연의 '서러움 가득 거기 숨어 운다'던 거기서 벗어난 현재의 삶에서 시인은 언어를 통해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이미지를 합성시켜 정리를 하고 잘 함축된 시로 형상화시켜내고 있다.
그것은 가난을 가난으로 객관화시키지 않고 시를 통해 현실을 타계할 수 있는 출구를 만들어내고, 막연한 과거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눈물 한 방울'로 묘사하면서 알레고리(Allegoria)를 통해 상황을 객관화시켜주고 있다.
'다랭이논, 눈물 한 방울'에서 '서러움 가득 거기 숨어 운다'는 과거의 서러움이고 눈물일 뿐, 이제 더 이상 거기서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시공간의 이동을 한 이미지를 통해 다랭이논 자체를 과거시제인 '오래된 울음'으로 확실히 묶어놓고 있다.
6. 연곡으로 오시거든
골 자락 이어진 동네마다
연분홍 진달래 곱게 피거든
연곡으로 오시라
살다 살다가 눈물겹게
내 살던 곳 그립거든
송사리 떼 부산하게
연곡천 오를 때
오롯이 너를 품어주는
연곡으로 오시라
바람도 쉬어가고
구름도 쉬어가는
파도소리 가슴으로 와 닿는 곳
그 옛날 묵은 이야기 그리운 날
내 고향 긴 제방 둑 거닐며
휘바람이라도 불자
여기는 연곡천이 있는 연곡이다. 제방둑 따라 송사리 떼가 자유롭게 유영하고 '바람도 쉬어가고/구름도 쉬어가는/파도소리 가슴으로 와닿는 곳' 시인의 고향이 연곡이다. 오래된 현실의 추억은 이미 시인의 확장된 자아를 통해 대상을 객관화하여 화자와 타자 모두 내면의 세계에 담아둘 수만 없어 시인은 '연곡으로 오시거든'으로 시작된 초대의 문을 열고 있다.
여기서 독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문고리를 잡아당길 것인가 보고만 있을 것인가를 결정하여 초대에 응할 필요가 있다. 그 시적 장소인 연곡은 이제 대상을 객관화하여 사유의 지평을 연지 오래된 곳이다. 즉 상호간에 동질감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연곡으로 가면? 시인은 5연에서처럼 '내 고향 긴 제방 둑 거닐며/휘파람이라도 불자'고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연곡천에 대한 기억은 가난의 고통이나 허기진 결핍 타위는 없다. 그저 즐거운 추억뿐이다.
시간 속 추억의 기차가 8시에 떠나던, 밤 11시에 떠나가던 시적 이미지나 떠나간 사람들의 추억이, 시인의 앨범 속에 곱게 보관되어 있으면 그것으로 아름다운 것이 된다.
작품에서도 김병근 시인은 고향 연곡에 대한 추억을 허기진 그리움으로 가져오지 않고 누구든 초대하고 싶은 즐거움의 장소로 설정해놓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진정한 자아(自我)는 허구와 상상의 욕망과 허기, 고통에서 벗어나 깃털처럼 가벼운 내면과 외면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김병근 시인의 전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듯 이 시에서도 유폐적인 사유의 프레임에 갇혀있지 않고, 자유롭게 벗어나서 화자와 독자가 진정으로 소통하며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마지막 행에서의 '휘파람'도 짙은 페이소스(pathos)의 쓸쓸한 휘파람이 아닌 재첩 국물이나 홍합 국물처럼 시원함이 느껴지는 그런 카타르시스의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낯설기' 같은 기법으로 상황을 비틀지도 않으며, 시인의 내면과 장소를 자연스럽게 투영시켜내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거부감이나 난해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진솔함과 담백함이 드러나고 있다.
시인은 시로 말하고 함께 즐기며 놀 수 있는 '시토피아'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으며, 시를 쓸 때 비유와 상징으로 빙빙 돌려 난이도를 높이지 않고도 시를 가지고 제대로 놀 줄 안다고 할 수 있다.
7. 봄날의 고래를 본 적 있나요
거친 파도 사이로
비릿한 해풍의
날갯짓이 퍼득인다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픈
아주 작은 색바램
꿈을 꾸고 있다
속절없는 한 방울 눈물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 버겁다
세월 앞의 불멍이다
작품 초입에서부터 중반까지 대체로 짙은 페이소스(pathos)를 느끼는 내용들이지만 기실은 더 이상 내면의 질문과 대답 속에 갇혀 유폐적 사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은 이미 일정한 리듬과 장단에 몸과 마음을 실어 해방된 자아(自我)와 자유를 만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연에서 '속절없이 한 방울 눈물/등에 짊어진/삶의 무게 버겁다'고 토로하며 눅진함을 드러냈지만 그것은 이미 마음 정리한 단계에 해당된다. 그 모든 것은 5연에서 확실하게 방점을 찍으며 '세월 앞의 불멍이다'라며 댄스 리듬 같은 불춤 속에 내면의 탁류를 씻어내고 함께 춤을 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품을 통해 창조 근원의 진리인 무아(無我, Anatman)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시인이 불멍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변적 허구의 자아를 밝히고 외연 바깥으로 사라지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멍을 통해 바라본 내면의 붉은 마음이며 그 붉어진 마음은 세월 앞의 불멍을 에로스적인 감성으로 접근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은 스스로 내면의 패러다임을 정화시키며 변화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봄날의 고래'라는 거대한 프레임을 설정해놓고 '거친 파도'와 '비릿한 해풍', '날갯짓'으로 삶의 과정을 전개하다 '등에 짊어진/삶의 무게 버겁다'며 짓눌리는 무게감으로 괴물과 같은 고래로 둔갑되었지만, 결국 시간 속에서 그 무게감을 듵어내며 세월 건너 저편으로 부드럽게 밀어내고 '가벼운 그림자'의 고래로 변화시켜 내었다.
그 모든 과정이 이미 제목에서부터 화두로 제시된 상태였다. '봄날의 고래를 본 적 있나요'라고 독자에게 문(門)을 연 것은 혼자만의 비밀이 아닌 함께 동질류로서 공감대를 가져보자는 열린 마음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이미 늬엇늬엇 노구라지는 시간 속의 자아와 피곤한 육신을 챙기며, 그림자 고래는 시간이라는 열차를 타고 과거시제로 넘기고 있고, 현재 시점엔 불멍과 교감을 나누며 넘실넘실 창조적 에너지를 생성해내고 있다.
이탈리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체스가 끝나면 왕王도 졸卒도 함께 체스통에 담겨진다.'' 솔로몬의 어록에 있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영원할 수는 없고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이다.
8. 잠적
혼자만이 떠난 그 길
나를 찾아 떠난 그 길
샛바람 소리길에서 만난
시릿대 숲 자연의 소리
고요를 삼킨 풍경소리
세상을 등 진 산사가 거기 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매어진 나룻배 한 척
<잠적>은 도피의 의미일 수도 피신의 의미일 수도 있다. 시적으로 겉으로 나타내거나 밖으로 밀어내는 것을 표현(expression)이라고 한다. '크로체'의 표현 이론으로 직관은 사물에 대한 심상인데 그런 심상을 통해 시적 표현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문학은 반드시 어떤 심리적 모티브가 발현되어 창작되는 것들이 많다. <잠적>도 마찬가지로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세상을 등진 채 산사로 향했을 것이다. 창작품은 무의식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일상에서 어떤 좌절, 억압, 미해결의 반동기제에서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
작가들은 무의식을 표현을 통해 일상에서 의식적으로 이루지 못한 바를 작품에서 실현시키는 것인데, 심리학과 정신의학에서는 그것을 심리적 자위에 해당한다고 본다. 어쩌면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행위 자체는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을 극복해낸 승리감의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잠적>은 종적을 아주 감추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과의 인연을 아예 끊어버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일시적인 '잠적'은 오히려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심신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회복의 기간이 될 수도 있다. <잠적>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항상 둔 채 걸어가야만 일상 회복이 가능하다. 세상에는 '무의미'한 것은 없다.
이 시에서는 <잠적>이 아주 떠난 '잠적'은 아닌 것으로 표현돼 있다. '혼자만이 떠난 그 길'이 '나를 찾아 떠난 그 길'이란 것도, 세상을 등진 고요한 산사에서의 꿀맛 같은 휴식을 통해 자아(自我)를 찾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목적을 가진 '잠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에서 '매어진 나룻배 한 척'은 화자의 감정이입이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흔들림 없이 나란히 서며 공감할 수 있는 풍경을 끌어와 마무리해놓은 것이다. '매어진 나룻배 한 척'은 마음먹기에 따라 <잠적>의 시간이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고, 아니면 영영 돌아오지 않고 산사에서 주저앉을 수도 있는 선택의 조건이 그 나룻배를 바라보는 행인에게 주어져 있다.
화자는 나룻배를 통해 모든 암시를 드러내며 여운을 남기고 있다. '세상을 등진 산사'처럼 화자 역시 세상을 등진 채 영영 주저앉고 싶은 마음도 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는 그런 마음의 번 아웃(burnout) 상태이기에 휴식을 위해 산사를 찾은 것이다. <잠적>은 혼자 떠나 나를 찾는 명상을 하는 것이 어쩌면 일상 회복에 더 많은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고 싶기에 '잠적'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9. 감자 심는 날
산비탈 너머 경사진 밭 가장자리
키 큰 봉철 아재
막걸리 한 사발에
육자배기 한 자락
괭이 춤춘다
등진 봄볕밭이랑 사이사이
씨눈 감자 덮이고
이마에 맺힌 송글송글 땀방울
이내 불어온 솔바람이 정겹다
<감자 심는 날>은 가장 경건한 일을 하면서 가장 즐거운 날이다. 씨감자를 칼로 자르고 재를 묻혀 흙 속에 심는 행위는, 늘 자연을 경배하며 하늘에 올리는 제천의식(祭天儀式)처럼 숭고한 순간이면서도, '막걸리' 한 사발에 '육자배기 한 자락'의 즐거움이 따르는 그런 날이기도 하다. '괭이가 춤춘다'는 것도 밭 갈고 씨 뿌리는 농부의 즐거움이요 경건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감자 심는 날>은 일상의 짧은 에피소드를 '얽어짜기'로 옮겨놓은 작품인데, 잡다한 이야기들 중 가장 단순한 표현들만 가져와 한편의 서정시로 구성해놓은 작품이다. 이것을 택할까 저것을 택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바람처럼 지나가는 일상의 행위에서 건져 올린 '감자'라는 주제로 '괭이춤'을 추고 나면 '이내 불어온 솔바람이' 정겨워지는 것이다.
서정시와 전원문학의 전형적인 작품일 수 있는데, 전원문학은 농업활동이 주된 배경이고 화자나 등장인물도 농업에 종사하거나 농업을 이해할 수 있는 농촌 출신일 경우가 많다. 전원문학에서 주로 등장하는 도구와 행위도 괭이, 삽, 낫, 소몰이, 삽질, 써레질, 거름주기, 지게 작대기 등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괭이'가 주된 도구로 등장하고 있다.
'괭이'는 정직한 도구이다. 괭이를 쥔 손에 바투 힘이 쥐어지기도 하고 때론 농사일에 지쳐 힘에 부치기도 한다. '이마에 맺힌 송글송글 땀방울'에도 '괭이춤'을 출 수 있는 것도 '막걸리 한 사발에/육자배기 한 자락'이 힘을 북돋워 '감자 심는 날'이 즐거운 '키큰 봉철이 아재'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달건이 아재'나 '학근이 아재'처럼, 수더분하고 텁텁한 인심 좋게 생긴 이웃들의 모습 중에서 한 인물을 차용했을 수도 있고 실존 인물일 수도 있다.
오랜 역사를 통해 내려온 우리의 '농경문화'이면서 일상에서 작은 '텃밭 가꾸기'일 수도 있는 '감자 심기'는 문학밭에 존재하는 '은근'과 '끈기'라고도 할 수 있다. 짧은 에피소드를 가져와 창작한 이 시는 사물을 이해하기 위한 복잡한 분석이나 도구가 따로 필요 없고, 선택 조건이 단순하고도 명쾌한 순수 서정시라서 매우 깔끔하게 마무리가 잘 되었다.
좋은 시는 복잡한 기교와 난해한 암시성이 강한 작품이 아니라 맑고 깨끗한 느낌이 드는 그런 간결함이 있어야 한다. <감자 심는 날>은 짧지만 그 어떤 시 보다도 힘이 있고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10. 삼악산 의암호 빠지던 날
의암호 내려앉은 삼악산
잠 덜 깬 호수 위 고깃배 한 척
미끄러지듯 물안개 속 사라진다
시간의 흐름 정지된
펼쳐진 화선지에
먹물 한 방울 붓 끝으로
일렁이는 물결 속 흩뿌린다
조금씩 번지는 파장 속으로
아름다운 한 폭 수묵화 그려졌다
잔잔한 의암 호수
묵묵히 바라만 보았는데,
삼악산 내려앉은 아침
애틋한 그리움 하나 스며든다.
이 시는 먼저 제목부터가 <돼지가 물에 빠진 날>처럼 무척 이채롭다.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과는 다르게 가을 날 맑은 호수 위에 비친 산의 모습에 반한 화자는 가을 심상에 다가오는 '애틋한 그리움' 한 자락에 몸을 떨고 있다.
1연에서 호수가 잠을 깬다는 것은 짙은 물안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시간 아직도 는적거리며 물이 물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연에서 '잔잔한 의암 호수'에 '삼악산이 내려앉은 아침'은 비 개인 청명함이 서서히 물안개를 밀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길 산꾼들은 ''산이 거기 있으니 산에 간다''고 표현을 한다. 스페인 격언에 ''산은 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유럽인들의 성향이 드러나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들은 여러 사람이 대화를 할 때도 얼굴을 바짝 붙여서 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동양인 특히 한국인들의 성향은 대화를 할 때 너무 얼굴을 가깝게 하거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 '건방지다'고 하거나 '쏘아본다' 또는 '좀 떨어져라'면서 불쾌한 반응을 보일 때가 많은 게 사실이다.
한국인들의 성향답게 한국인들은 '산이 거기 있으니 산에 가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회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한국인들의 성향은 개인주의 또는 이기주의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동양적 철학과 사색, 명상을 즐기는 한국인들은 산이 좋아 산에 가고 물이 좋아 강이나 호수 또는 바다를 찾는 이들이 많다.
시인도 이 작품을 통해 2연에서 펼쳐진 '화선지에/먹물 한 방울 붓 끝으로' 한 폭의 수묵화를 그린다며 '의암호가 내려앉은 삼악산'을 시로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정서와 시인의 내면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화의 특징은 화려하게 꽉 채움에 있다면 동양화 특히 한국화는 넉넉한 여백에 있다. 그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게 한국인의 정서이기도 하다.
'애틋한 그리움'에 젖은 화자는 아마도 의암호와 눈이 맞아 바람난 삼악산인 듯하다. 는적이며 서서히 잦아드는 는개비에도 불구하고 의암호에 몸을 담근 삼악산은 침묵 속에 꿈쩍도 않고 명경지수(明鏡止水)는 느릿느릿 하늘로 오른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감각적 체험을 심상으로 파악하는 시적 상상력이 풍부하고, 시라는 매개체를 통해 즐기는 언어적 유희능력이 뛰어나다. 여기서 화자는 산과 호수의 사랑을 사실주의에 입각한 사실보다 더 독특하게 사실주의 환영을 제시함으로서, 그 시적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마력에 힘이 있다. 산이 된 강과 강이 된 산은 진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
11. 꽃
저절로 붉어지는 꽃이 어디 있으랴
저 안에 빗방울 몇 개
저 안에 바람 몇 점
저 안에 이슬 몇 방울
저 안에 보름달 몇 날
저 꽃이 저 혼자 어찌 피어났으리.
세상의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는 온통 붉기만 하다. 어제 본 그 일출은 여전히 오늘 아침에도 붉기만 하고, 어제 사라진 그 석양도 한 바퀴 돌아 여전히 붉기만 하다. 1연에서도 '저절로 붉어지는 꽃이 어디 있으랴'며 꽃의 예찬을 관계성에서 출발하는 화두로 시작하고 있다.
불타는 석양과 같이 매번 돌아오는 가을산의 만산홍엽(滿山紅葉)도 붉기만 하고, 어제 마신 와인과 그제 마신 복분자 술도 붉기만 하고 항구의 밤을 밝히던 홍등과 신혼부부의 침실 조명도 붉기만 하다. 4연에서는 '저 꽃이 저 혼자 어찌 피어났으랴'고 여전히 반문하고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를 해 놓고 그 관계성에 진한 방점을 찍고 있다.
이 작품에선 시인의 평소 글버릇과 글솜씨인 '글투'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고, 짧은 문장을 통해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여 '화살기도'처럼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마치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았더래요>와 <앞마을에 순이 뒷마을에 용팔이>처럼 그 대상의 관계 설정을 확실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저절로 붉어지는 꽃'과 '저 혼자 어찌 피어났으리'에서 보면 주어진 사물의 모방이 아닌 작가 자신의 뚜렷한 사고가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관계성을 강조하며 메시지를 던진 시인은 자연과학을 인정하는 메카니즘 체계에 핵심을 두지 않고, <꽃>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 체험을 통해 느낀 철학적 통찰력으로 화자 자신과 독자에게 반문하며 확신에 찬 꽃 예찬을 하고 있다.
2연과 3연에서 '빗방울 몇 개'와 '바람 몇 점', '이슬 몇 방울'과 '보름달 몇 날' 등의 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을 제시하며, 꽃에게 기여한 대상들에게 감사하는 표현으로 '저 혼자 어찌 피어났으리'라고 하였다. 그것은 관계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삶의 방식과도 일맥상통 한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은 관계유지가 존재하는 이상 절망적이진 않다. 불 꺼진 광야에서도 어두운 밤에 불춤은 추게 마련이다. 삶에 대한 불안한 마음은 생각하기에 따라 사막 속으로 낙타를 타고 갈 수도, 지나가는 바람에 실려 초원 한복판으로 또는 남태평양이나 북대서양으로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관계와 관계에서 2022년 신냉전 시대의 서막을 연 사건도 있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를 무력으로 침공하며 화염과 불꽃을 작열시켰고, 시대의 악마 사탄의 무리들이 무고한 인명을 살상시키며 전 지구촌을 공포와 극심한 경제 불황으로 내몬 최악의 막장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그 또한 관계성에서 우리와 전혀 무관한 일이 아닌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쪽 모두 한국인들에겐 <갑돌이와 갑순이> 또는 <순이와 용팔이>일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인 것이다. <꽃>은 세상 만물의 관계성을 함축하며 등 돌리고 외면할 수도 없는 관계 예찬의 시라고 할 수 있다.
12. 산문山門
오욕 칠정 한 보따리 버리고
산문을 나서는데
아적까정 눈짓 한번
맞춰주지 않던
바람 하나 휑하니 따라 나온다
문득 산새 소리가 그립고
온 산의 짙은 녹음 골골마다
계절이 접경으로 누워있다
텅 빈 고요함의 공허는
몸과 마음의 조화인 것을
오욕칠정(五慾七情)은 바람의 길 한복판에 서 있는 장애물일 수 있다. 산문山門을 들어올 때도 백팔번뇌(百八煩惱) 오욕칠정을 한 보따리 짊어진 채 왔지만 산문에 들어온 보람도 없다면, 여전히 놀부가 흥부 집에서 빼앗아 온 무거운 화초장(花草欌)을 낑낑대며 짊어지고 산문을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4연에서처럼 '텅 빈 고요함의 공허'와 '몸과 마음의 조화'를 느낄 수 있었다면 쑥변까지 배설한 뒤의 유쾌 상쾌 통쾌함처럼 날아갈 듯이 가벼울 것이다. 그러니 오욕칠정(五慾七情)은 바람의 길 한복판에 서 있는 장애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욕칠정은 어쩌면 암수 교미를 하며 굴풋한 비린내를 풍기고 쾌락의 열매를 맺는 은행나무의 몸짓과 그 모습에 침을 질질 흘리며 서 있는 소나무의 부질없는 애욕(愛慾)인지도 모른다.
오욕칠정의 번뇌를 끊은 소나무는 짙은 향기를 남긴다. 향 싼 종이엔 향내가 나듯 소나무에선 솔바람 거문고 소리와 솔향기가 풍긴다. 4연의 '텅 빈 고요함의 공허'와 '몸과 마음의 조화'는 멀리서 찾지 않아도 일상에서 가깝게 있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느낄 수 있으며 득도(得道)를 할 수 있다.
화장실 전깃불이 '터엉' 하고 나갔을 때 순간 칠흑 같은 암흑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아랫배와 엉덩이에만 집중한다면 '푸우덕 푸우덕' 소리만 들리며 그 보다 더 고요한 순간이 어디 있을까. 그 보다 더 청정함이 어디 있을까. 불이 다시 켜지는 순간 명징함이 찾아올 것이다.
바닥이 드러나면 그곳엔 바닥이 있고 산 밑에도 길이 없고 산 위에도 길이 없을 때도 산에선 길이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곳엔 길을 내는 목어(木魚)가 살기 때문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오늘을 '돼지가 물에 빠진 날'이라거나 '오늘은 좋은 날'이라고 하기에 따라 하루 일상의 운기조식(運氣調息)이 달라질 수가 있다. 개밥그릇을 발로 차면 그걸 좋아할 개가 없듯이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밥그릇 건드리면 가만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병근 시인의 세계관은 산문山門에 기대어 있고 언제든 자유롭게 그 산문을 제 집 드나들듯 가볍게 여기고 있다. 그만큼 그의 세계관과 마음 집은 무겁지 않은 자유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에드가 엘렌 포우의 <검은 고양이>나 색정과 타락으로 둔갑한 보들레르의 암고양이처럼 그로데스크(grotesco, 괴이함)한 시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다면, 시의 계단 자체가 굴풋하고 비릿함을 보이겠지만 김 시인의 집으로 향하는 길엔 바람결에 들리는 풍경소리만 명징하게 들릴 뿐이다.
■ 나가며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려는 인간해방은 사람들로부터의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것을 전제로 상호간에 어떻게 하든지 관계를 엮으려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의 언어공동체 내에서 동일한 개념들을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공통선(common line) 인지와 체험들을 강요할 때가 많다. 인지적 체험을 가진다는 것은 곧 현상적 의식을 가진다는 의미로 관계성 속에서 조직공동체의 규범과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사고의 틀을 경직구조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전체 120편의 시를 통해 김병근 시인의 시세계를 체험해본 결과 그는 이리저리 표류하거나 정체성이 흔들리며 타자들의 논리나 의도에 끌려 다니지도 않고 자기만의 삶의 방식과 철학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것은 타자들의 삶의 방식에 함몰된 일종의 로보트처럼 '행위자' 또는 '인격'이 인공물이 아닌 자아(自我)의 본체(本體)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공물로서의 문학적 표현은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도덕적 행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이 때의 인공물과 인간과의 관계는 망치 같은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김병근 시인의 작품은 대부분 '1인칭 시점(first person perspective)'이 전제되어 있다. 문학 작품에서 도덕적 행위의 제시된 조건이 1인칭이라면, '타자'들을 인식하지 않은 모든 것은 '나'로부터 성립되고 시작된 것이기에, 작품에 대해 철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된다.
김병근 시인의 작품 출발점은 '내 삶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그 이어진 시선은 늘 세상 밖으로 연결되어 주변 타자(他者)들의 삶의 이야기까지 전개되고 있다.
그의 서정(抒情)과 심상(心象)은 인격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 1인칭 시점을 제시하기에 극적으로 스펙터클(spectacle)한 대서사적 드라마 같은 광대무변함은 없지만, 소박함에서 인간을 다시 묻는 인격으로서의 동일성과 자유의지가 분명히 살아있는 작품들이다.
아무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설령 더 나은 사회제도가 제시된다고 해도, 인간의 양심과 인간으로서 해방의지가 담보되지 않은 상태로 이뤄진 사회에선 장밋빛 미래가 없으며, 그런 세계관으로 출발한 문학 작품에선 생명력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병근 시인의 서정성과 자유로운 시적 세계에서는 생명의 영속성과 함께 고향집 토담 위의 호박넝쿨이나 가마솥의 누룽지 같은 순수한 인간미가 진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