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마득히 먼 옛날, 지구에는 온통 어둠이 가득했다. 한마디로, 무질서한 원료 덩어리로 이루어진 신비로운 혼돈, 그 자체였다. 식물도, 계절도, 땅도, 빛도 없는 상태였다. 성경은 당시의 상태를 “혼돈하고 공허했다”고 묘사한다.
하지만 성령이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 바람이 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순간, 성령은 어둠을 몰아내시고 혼돈 위를 운행하시며 마음에 계획하신 대로 공허함 속으로 의미의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창 1:2).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는 “운행하다, 움직이다, 내리덮다”를 의미한다. 성령이 운행하시자, 형체가 없던 물질이 다양한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한갓 원료 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 온갖 아름다운 형상을 빚어냈다.
하나님은 그 후에 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빚으시고 생명이 없는 존재에게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 하나님이 얼굴과 얼굴, 입과 입을 맞대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순간, 창조의 절정인 인간이 탄생했다. 인간이 최초로 느꼈던 감각은 하나님의 따뜻한 숨결이었고, 그의 눈에 비친 최초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었다.
인간의 주변 환경은 빼어난 아름다움과 풍요로운 생명을 지닌 생명체들로 넘쳐났다. 피조물은 모두 창조 질서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상태였다. 하나님은 마치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글을 쓰시듯이 창조세계에 경이로움과 웅장함을 더하셨다. 혼돈 위를 운행했던 하나님의 숨결은 강력하고, 완전하고, 상상력이 뛰어났다.
아담은 창조세계의 청사진을 보거나 설명을 듣거나, 또는 복잡한 암호체계를 발견한 적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따뜻한 숨결을 느끼며 태어나는 순간부터 오감을 통해 아름다운 광경, 소리, 냄새, 맛, 서늘한 미풍 등을 의식했다. 그에게 주어진 감각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예민해져 창조세계의 상호관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성령의 창조사역은 규칙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분은 창조의 지침서를 따르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틀에서 벗어난’ 생각으로 모든 일을 행하셨다. 사실, 그분에게는 생각해야 할 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류의 첫 조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력을 부여받았으며, 그분의 상상력을 물려받았다. 그 덕분에 하나님이 제공하신 원료와 도구를 이용해 무엇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들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을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제시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유는 그분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다.
인간은 생각과 의지와 감정은 물론, 얼굴 표정, 음성, 몸짓 등, 의사소통에 필요한 수단을 모두 갖추고 있다. 우리의 하나님은 상상력이 무한히 뛰어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인류의 첫 조상이 죄를 짓는 바람에 인간의 잠재력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그 비극적인 결말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날이 서늘할 때에(이 말은 직역하면 ‘저녁의 숨결’이라는 뜻이다. 즉, 수면 위를 운행하시며 혼돈상태에 생명을 불어넣으셨던 성령의 숨결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오셨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몸을 감추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못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하고 감추는 순간, 그들의 창조력은 내면으로 깊이 움츠러들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의 창조력은 심하게 왜곡되었다. 이는 살인자의 후손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도 살인자의 후손이기는 마찬가지였다(창 4:21~22). 그 후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우상에게 노래를 지어 바치고, 우상의 형상을 조각하고,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해 바벨탑을 쌓는 등, 온갖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데 창조력을 사용했다. 인간의 창조력과 독창력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지만, 심하게 왜곡된 상태로 변질되었다.
인간은 그 후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신 뒤에 광야로 내보내셨고, 모세에게 언약궤를 비롯해 성막에서 사용할 각종 예배 도구를 만들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세상 창조 이후, 두 번째로 어떤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에게 자신의 영(즉, 수면 위를 운행했던 창조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는 바로 브살렐이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그늘 아래”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은 단순한 그늘이 아니라 “공중을 운행하는 그늘”을 뜻하는 어근에서 유래했다.
하나님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숨결을 불어넣으셔서 훌륭한 예술품을 만들게 하셨다(출 31:1~11). 신약성경은 그들이 만든 예술품(즉, 성막에 있던 다양한 예배 도구)을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말했다(히 8:5). 이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증거다.
그로부터 오랜 후에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 물론, 성육신은 단지 보이지 않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현신이었다.
광야의 성막은 하늘나라를 반영하며, 성자의 강림을 예고하는 역할을 했다. 하나님이 성막의 예술품을 만들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내면의 진리를 밖으로 표현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어둡고 부패한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빚어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과 예배 언약을 세우시고, 다시금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 목재와 금속을 다루는 두 장인은 신성한 창조력을 부여받았다. 그들은 구속과 재창조, 즉 창조주에게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성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물건들을 제작했다. 한마디로 새로운 영적 부흥이 일어나서 혼돈이 질서를 찾은 시기였다.
하나님은 이 두 예술가에게 사명을 주셨다. 인간의 육신에 다시 거룩한 숨결이 주어졌다. 그들이 만든 언약궤는 영적 현실을 구체화시킨 형상이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암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딴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서로 생각과 감정을 교류하는 데서 그림, 상징, 찬양의 소리, 희생 제사의 냄새, 생생한 예언과 비유가 생겨난다. 그런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공식화시킬 수 없다.
멀티미디어와 같은 하나님의 표현방식
하나님은 공식이 아니다. 인간의 종교 본능은 하나님을 공식화시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공식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다양한 표현방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는지 몰라도,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셨다.
오래 전,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우리처럼 음식과 의복을 필요로 하셨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거하시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셨으며, 우리처럼 감정과 고통을 느끼셨다. 그분은 철저히 인간의 삶을 살아가셨다.
물론, 하나님은 성육신 이전에도 우리에게 의사를 전달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고, 불이 붙었는데도 멀쩡했던 가시떨기의 형상으로 모세 앞에 나타나셨다. 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도 하셨다. 그분의 음성은 큰 우레가 되어온 산을 진동시켰고, 천사들은 그분의 종들에게 말로 그분의 뜻을 전했다. 하나님의 영, 즉 그분의 숨결은 많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에게 영감을 주어 말씀을 전하고,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게 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순간, 그분의 의사표현은 훨씬 더 구체적인 양상을 띠었다.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셨다. 그분의 말과 행동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방법을 일깨워준다.
예수님의 의사소통 방식을 보면 그 방법이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소경들을 고쳐 주신 일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는 능력의 말씀만으로(막 10:51~52 ; 눅 18:40~43), 어떤 경우에는 간단히 눈을 만져 주시는 동작만으로(마 9:29~30, 20:34), 또 어떤 경우에는 침으로 진흙을 이겨 바르시고 손으로 만져 주심으로써 소경의 눈을 치유하셨다(막 8:22~25 ; 요 9:1~7). 그밖에도 진흙을 이겨 바르신 뒤에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신 적도 있었다(요 9:6~7). 예수님은 똑같은 일을 행하면서도 매번 다른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셨고, 획일적인 방법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으셨다.
실제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그 무엇 하나도 공식에 들어맞는 것이 없다. 예수님은 때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셨고, 때로는 뜻을 파악하기가 애매한 비유를 사용하셨다. 또, 어떤 이방인의 믿음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셨지만(마 8:5~18), 또 다른 이방인에게는 매우 까다롭게 반응하셨다(마 15:21~28).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당시의 지도자들을 크게 질책하셨지 만(예를 들면, 눅 11:42~52),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일체의 항변을 자제하셨다(막 14:60~61,15:4~5).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도움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셨고, 또 어떤 때에는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도 먼저 다가가셨다.
이렇듯, 예수님은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면서도 어렵고,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고, 심오하면서도 명료하고, 공적이면서도 사적이고, 어떤 때는 말씀을 잘 하셨다가도 또 어떤 때는 침묵을 지키시는 등,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똑같은 태도를 취하시는 법이 거의 없으셨다.
예수님의 의사전달 방식도 명백하고 직접적인 말에서부터 수수께끼를 방불케 하는 행동- 예를 들면, 땅에 무엇을 그리신 일, 해변에서 물고기를 요리하신 일, 비유로 가르치신 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 배신자와 함께 떡을 잡수신 일, 물 위를 걸으신 일, 폭풍우를 잠잠케 하신 일, 산에서 모습이 변형되신 일, 하늘의 음성을 들으신 일, 비둘기처럼 임하는 성령을 받으신 일, 제자들과 영원한 의미가 담긴 만찬을 잡수시던 일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예수님의 행동 가운데는 당시 사회의 평범한 일상사와는 사뭇 다른 것이 많았다. 예수님의 행동은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 인간의 오감을 모두 자극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멀티미디어를 방불케 하는 표현방식을 사용하신 셈이다. 예수님의 표현방식은 다채롭고 창조적이었다. 만일 예수님이 「효과적인 의사전달을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저술하셨다면, 아마도 그 책에는 결론이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방법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도 마찬가지셨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생명체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창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력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웅장한 산, 장엄한 폭포,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아름다운 해변, 다채로운 풍경, 정교한 생태계, 우아한 꽃, 세밀한 모양을 갖춘 곤충, 다양한 생김새를 지닌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런 시각적인 것뿐 아니라 온갖 소리를 만들어내는 피조물을 세상에 가득 채워놓으셨다. 우렁찬 소리를 내는 급류,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 울려나는 우레,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가 그 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에서 들려오는 놀라운 소리를 감지할 수 있는 귀를 주셨다. 또한, 향기로운 냄새와 역겨운 냄새를 분별할 수 있는 후각을 주셨다. 향기로운 냄새는 우리를 아름다움에 취하게 만들고, 역겨운 냄새는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한다.
사물의 재질과 온도를 느낄 수 있는 촉각도 주셨다. 그 덕분에 따뜻하고, 부드럽고, 차갑고, 외롭고, 피곤하고, 아프고, 황홀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등, 온갖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미각은 또 어떤가? 세계 여러 나라의 주요 도시에 있는 레스토랑을 방문해 보라. 분명히, 그 냄새에 이끌려 결국 한 번쯤 맛을 보지 않고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표현방식은 아무리 열거해도 끝이 없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표현방식은 참으로 다양하다. 물론, 영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음성이나 행동은 물리적인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과는 달리 포착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더라도 얼마든지 성경을 통해 다양한 영적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노아의 무지개, 불붙은 가시떨기, 우레와 같은 음성, 낮과 밤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비롯해 엘리야의 제단에 내린 불, 성막과 성전에서 타오르는 향불, 번제의 향기, 유월절의 피와 쓴 풀, 심판의 유황 냄새, 구원을 상징하는 성만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음성과 시각과 촉각을 비롯해 여러 가지 감각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신다.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 창의적인 의사전달자로서의 특성을 드러내신다. 출애굽 사건, 약속의 땅에 이르는 여정, 성전 예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다니엘과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묵시적 환상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우리의 감각을 돋우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성경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탁월한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력을 묘사한 책을 다 수용할 수 있는 도서관은 세상에 없다. 사실, 그런 책을 모두 읽을 시간도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굳이 글로 된 책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주위를 돌아보자. 하나님의 인격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나타난다.
하나님의 감정
이 모든 창조력은 어디에서 비롯할까? 하나님이 감각과 감정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감각과 감정을 지니고 계신다. 우리는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시고, 사랑하는 자들에 대해 질투하시며,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며, 선택 받은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며,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이하시고, 자신의 뜻을 열정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강렬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말을 너무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만드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변화나 상황에 따라 감정의 기복을 느끼신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역사적인 사건들이나 인간의 마음을 보시고 감정적으로 반응하시는 듯이 보인다. 그런 식의 묘사는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존재가 아니라 매우 유약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감정을 신학적으로 이론화시킨다. 즉, 성경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의인화시켜 묘사하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실제로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으시는데 마치 그러시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 그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나 같다.
하나님의 감정은 진짜고 사실이다. 단, 하나님의 감각과 감정은 인간에게서 비롯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인간과 비슷한 감각과 감정을 느끼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본주의 입장에서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를 전도시켰다. 그들은 마치 인간이 모든 것의 기원이며, 하나님의 감정이 인간의 발명품인 것처럼 말한다. 종종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유사성을 꼭 우상숭배의 차원으로 격하시킬 필요는 없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 자신이 그러한 유사성을 만들어내신 장본인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력은 바로 이와 같은 진리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를 표현하시는 이유는 감각과 감정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다양한 상징, 표적, 냄새, 소리, 말 등은 하나님이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존재라는 증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과 감정을 드러내고 싶은 강한 내적 충동을 지닌다. 우리가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와 같은 충동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다.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으면 불만만 쌓인다.
하나님의 감정 표현은 비단 성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경이 완성된 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전달하신다. 열정과 사랑과 굳은 의지로 충만하신 하나님이 1세기 이후부터는 기록된 말씀으로 만족하시고, 더 이상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 가?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신다.
칼라사진 같은 하나님을 향한 흑백사진 같은 대화
이 책의 주제는 기도다. 그런데, 우리의 의사전달 방식보다 하나님의 의사전달 방식에 대해 이처럼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도에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그분이 들으시는 방법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표현 방법이나 그 감정적인 원천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기도는 장거리 전화를 이용한 대화처럼 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오감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어 오는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차단하고, 마치 수도원을 떠올릴 법한 영성의 관점이나 스스로 고안한 경전의 원리에 국한된 표현 방식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가 이미 설정한 채널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온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면, 마치 교향악단의 연주가 울려 퍼지고 있는데 이어폰을 끼고 앉아 있는 사람이나 미술관을 방문하고도 전시된 위대한 작품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저 열심히 안내책자만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처럼 될 공산이 크다. 그런 경우, 하나님은 스테레오포닉이 아닌 모노포닉, 칼라사진이 아닌 흑백사진 같은 존재로 전락한다. 우리가 말에 귀를 기울이며 표적을 구하는 동안, 하나님은 풍부한 상상력을 거침없이 쏟아 놓으신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 만다.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분과 의사소통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하나님이 인간은 물론, 창조세계를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하나님의 의사소통 방식은 색깔로 비유하면 충천연색에, 소리로 비유하면 서라운드 사운드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해야만 기도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과 의사를 소통할 수 있다.
레위기의 재발견
오래된 성경책을 보면, 필경 다른 부분보다 덜 닳은 부분이 눈에 띌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깨끗한 부분은 출애굽기 마지막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부분일 것이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조차도 그 부분은 대충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모든 내용이 정결 의식과 제사 의식에 관한 복잡한 율법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성막에 관한 정확한 치수와 제작 재료에 관한 율법, 희생 제사에 관한 율법, 육체의 온갖 질병에 관한 규례, 입에 담기조차 불결한 비행에 관한 처벌 규정, 낯설기만 한 음식법, 시대에 맞지 않는 인구 조사 등이 내용의 주를 이룬다. 처음 창세기를 펼쳐 읽을 때는 열정만으로 충분하지만, 출애굽기 20장 이후부터는 열정보다는 인내심이 요구된다.
나도 젊었을 때 성경을 통독하기 위해 여러 번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항상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창조 기사, 족장들의 생애, 세실 드밀 감독이 영화로 제작한 출애굽의 역사까지는 줄줄 꿰었다. 하지만 십계명을 제외한 나머지 율법조항은 늘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병환자에 관한 율법에 이를 무렵이면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주석을 참고해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간단히 요약된 지식에만 익숙한 세대에서 자라난 나에게 성경 주석은 너무 복잡하고 난해했다. 율법에 관한 내용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분명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에는 성경을 이해하기가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이해하려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 안에 깊이 잠겨야 한다. 심지어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성경의 사건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트콤이 끝나고 야구경기가 시작되기 전의 15분은 뉴스의 헤드라인을 소화하기에는 충분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몇 년 전, 나는 다시 성경 통독을 시작하면서 단어와 단어를 연구하는 방법보다 당시의 사건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묵상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언젠가 읽은 한 나이든 선교사에 관한 책에서, 그는 성경 각 권을 읽을 때 한 권을 일곱 번 읽기 전에는 다음 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성경 각 권을 최소한 일곱 번 읽어야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방법을 따르기로 했다.
물론, 그를 똑같이 모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그의 원리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나는 레위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자, 참 실망스러웠지만 나는 꾸준히 읽기를 계속했다. 그러자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낯설기만 한 율법을 거듭해서 읽는 동안, 희생 제사의 냄새가 나의 후각을 자극하고, 제단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는 광경이 연상되기 시작했다. 향불 냄새, 양과 염소의 울음소리, 제물에서 타오르는 연기 등이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분주히 의식을 준비하는 광경이 떠오르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한때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괴리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순간,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조되었다.
광야의 바람과 공중에 휘날리는 먼지는 내가 처해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상징하는 의미로 다가왔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끊임없이 여행을 계속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고달픔은 삶의 경험을 일깨워 주었다. 방랑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내가 하나인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가 되었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새롭게 와 닿았다. 그 순간, 두려우면서도 친근하고, 장엄하면서도 자비롭고, 초월적이면서도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 마음에서 느껴졌다.
아울러, 타락한 인간의 실상과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에덴동산의 행복한 삶으로부터 멀리 쫓겨난 이유가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반역이 하나님이 “괜찮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라고 가볍게 말씀하실 수 없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율법을 성취하신 주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던 번거로운 행위 언약을 우리 대신 성취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율법의 목적은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율법을 친히 허락하실 정도로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것 은 진정 놀랍기만 하다. 그런 율법을 허락해 주신 은혜도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이루신 은혜에 못지않은 은혜다.
율법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복잡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하나님은 결국 친히 그 비밀을 감당하셨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은 복잡한 율법의 요구를 단번에 이루셨다. 우리는 그 때문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이런 율법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물론, 아직도 레위기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성경의 어느 부분도 온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많은 주석을 읽고 연구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레위기의 핵심을 파악했다고 생각한다. 레위기에 나오는 수치와 수량, 재료, 희생 제사는 모두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로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십자가를 암시한다(히 8:5 참조), 레위기의 율법 가운데는 고대 히브리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또한,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야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날 내용도 있다 (히 10:10). 그런 내용은 언젠가 하늘나라에 가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레위기의 일부 내용은 현재로서는 신비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점에 대해 나는 하등 불만이 없다. 하나님은 나의 유한한 머리로 영적 진리를 모두 분석하고 설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나는 하나님을 해석하기보다 단순히 받아들이고 싶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실 것이다.
레위기의 복잡한 율법을 당시의 광경과 냄새와 소리 등을 마음으로 상상하며 반복해서 읽어 나가자, 레위기를 비롯한 구약의 율법서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하나님의 지혜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장엄한 것임을 깨달았다. 구약성경이 신약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구원 계획 이 점차 신비로우면서도 단순하게 다가왔다. 구세주의 은혜가 더욱 귀하게 여겨지면서 그분이 나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지극히 합당하신 존재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전보다 더욱더 열심히 성경을 탐독했다.
나의 경험은 하나님의 의사전달 방식이 지성적인 과정보다는 감각적인 경험과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물론, 구문과 어의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본성을 지성적으로 탐구함으로써 레위기를 이해해 갈 수도 있다. 그런 방법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와 그의 기질을 묘사한 전 기를 읽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그와 인격적인 교감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 설명과 묘사에는 인격이 개입할 틈이 없다.
하나님은 선택된 백성들의 삶 속에 굳이 개입하지 않고, 멀리서 자신을 설명하고 묘사하는 내용의 책을 툭 던져 주실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역사적 상황과 무관한 율법전서나 12단계의 과정, 또는 8가지 원리 등을 게재한 성경을 내밀 수도 있으셨다.
어쩌면, 원리와 방법을 끄집어내는 데는 지금의 성경보다 그런 성경이 훨씬 더 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더 선호하신다. 나는 레위기를 비롯한 율법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냄새와 소리와 생생한 현실이 담긴 생명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성경, 역사, 상황, 자연, 신앙의 공동체를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
공식을 뛰어넘어
나는 해외에 살 때 그 나라의 문화에 깊이 젖어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곳의 언어를 배우고, 관광객이 거의 찾지 않는 장소에서 음식을 먹고, 동네 옷가게에서 옷을 사고, 그곳의 문화적 상황에 맞는 몸짓과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그 이유는 그 동안의 훈련과 경험을 통해 1)일체감이 형성될 때 효과적인 의 사전달이 가능하다는 것과 2)그 문화 속에 깊이 젖어드는 것이 일체감 형성의 비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의 문화에 깊이 들어오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언어로 말씀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일체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우리의 문화에 적응하셨다. 성경의 목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문화에 젖어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구원받은 자들에게 불어넣으시는 숨결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 에덴동산의 흙이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인간이 되었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인간이 된다.
우리는 그분의 언어를 배우고 하늘나라의 관습과 가치에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깊은 유대를 맺어야만 비로소 그분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러려면 과거에 사용하던 공식으로 새로운 상황을 해석하려 들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 창조적인 표현 방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공식이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이 무척 기쁘다. 하나님이 상상력이 없는 창조주셨다면 혼돈 상태의 우주를 아름답게 재배열하거나 오늘날과 같은 세상을 만들지 못하셨을 것이며, 한 줌의 흙에 숨결을 불어넣어 다차원적인 관계가 가능한 생명체를 탄생시키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인조인간만 가득한 기계 같은 세상이 창조되어 자동시계처럼 혼자서 돌아갔을 것이고, 설혹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프로그램에 변형이 생긴 데 그 원인이 있기 때문에 하등 놀랄 만한 일이 못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팔레트를 손에 드시고, 다채로운 색깔로 이 우주를 그려내셨다. 하나님은 다양한 생명체를 조각하셨다. 그 가운데는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도 있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 그 덕분에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인간은 하나님 의 인격을 반영해야 한다. 인간은 창조력을 부여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