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계서원향례홀기 (氷溪書院享禮笏記)
○諸執事禮先詣位
모든 집사자는 제자리에 서시오
○謁者引初獻官點視陳設
알자는 초헌관을 인도하여 진설한 것을 살펴보시오
○執事 開櫝 開蓋 (點燭)
집사는 독과 함을 여시오
○謁者及贊引各引獻官就外位
알자와 찬인은 헌관을 모시고 문밖자리에 나아가시오
○ 贊引引祝及諸執事入就拜位
찬인은 축관을 인도하고 집사자는 절하는 자리에 서시오
○再拜○鞠躬拜○興○拜○興○平身
두 번절하시오 허리를 굽히고 두 번절하고 일어서시오
○贊引引祝及諸執事詣盥洗位
찬인은 축관을 인도하고 집사자는 손씻는 자리에 서시오
○盥洗○各就位
손을 씻고 각자의 자리에 나아가시오
○謁者及贊引各引獻官入就拜位
알자와 찬인은 헌관을 절하는 곳으로 인도하시오
○獻官以下皆再拜
헌관이하 모두 두번 절하시오
○鞠躬拜○興○拜○興○平身
허리를 굽히고 두 번절하고 일어서시오
○謁者引初獻官詣盥洗位
알자는 초헌관을 손을 씻는 자리로 인도하시오
○盥洗 손을 씻으시오
○引詣慕齋先生神位前
알자는 헌관을 모제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시오
○跪○三上香○俯伏興
꿇으시고 세 번향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引詣晦齋先生神位前
알자는 헌관을 회제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시오
○跪○三上香○俯伏興
꿇으시고 세 번향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引詣西厓先生神位前
알자는 헌관을 서애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시오
○跪○三上香○俯伏興
꿇으시고 세 번향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引詣鶴峯先生神位前
알자는 헌관을 학봉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시오
○跪○三上香○俯伏興
꿇으시고 세 번향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引詣旅軒先生神位前
알자는 헌관을 여헌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시오
○跪○三上香○俯伏興
꿇으시고 세 번향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引詣鶴洞先生神位前
알자는 헌관을 학동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시오
○跪○三上香○俯伏興
꿇으시고 세 번향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引降復位
알자는 헌관을 제자리로 인도하시오
◉ 行初獻禮
○謁者引初獻官詣慕齋先生尊所
알자는 초헌관을 모제선생 술잔 올리는 곳에 인도하시오
○引詣 神位前○跪
알자는 초헌관을 모제선생 신위전에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俯伏興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晦齋先生尊所
다음은 회제선생 술잔 올리는 곳에 인도하시오
○引詣 神位前○跪
알자는 초헌관을 회제선생 신위전에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俯伏興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西厓先生尊所
다음은 서애선생 술잔 올리는 곳에 인도하시오
○引詣 神位前○跪
알자는 초헌관을 서애선생 신위전에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俯伏興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鶴峯先生尊所
다음은 학봉선생 술잔 올리는 곳에 인도하시오
○引詣 神位前○跪
알자는 초헌관을 학봉선생 신위전에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俯伏興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旅軒先生尊所
다음은 여헌선생 술잔 올리는 곳에 인도하시오
○引詣 神位前○跪
알자는 초헌관을 여헌선생 신위전에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俯伏興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鶴洞先生尊所
다음은 학동선생 술잔 올리는 곳에 인도하시오
○引詣 神位前○跪
알자는 초헌관을 학동선생 신위전에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俯伏興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少退 ○堂中跪 뒤로 물러나 당가운데 꿇으시오
○祝 ○讀祝
축관은 축을 읽으시오
○俯伏興
헌관은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引降復位
알자는 헌관을 제자리로 인도하시오
◉ 行亞獻禮
○贊引引亞獻官 ○詣盥洗位
찬인은 아헌관을 손을 씻는 자리로 인도하시오
○盥洗 ○引詣尊所
헌관은 손을 씻고 모제선생 술잔 올리는 곳에 인도하시오
○引詣慕齋先生神位前 ○跪
찬인은 헌관을 모제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 ○俯伏興
헌관은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晦齋先生神位前 ○跪
찬인은 헌관을 회제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 ○俯伏興
헌관은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西厓先生神位前 ○跪
찬인은 헌관을 서애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 ○俯伏興
헌관은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鶴峯先生神位前 ○跪
찬인은 헌관을 학봉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 ○俯伏興
헌관은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旅軒先生神位前 ○跪
찬인은 헌관을 여헌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 ○俯伏興
헌관은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鶴洞先生神位前 ○跪
찬인은 헌관을 학동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 ○俯伏興
헌관은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引降復位
알자는 헌관을 제자리로 인도하시오
◉ 行終獻禮
○贊引引終獻官 ○詣盥洗位
찬인은 종헌관을 손을 씻는 자리로 인도하시오
○盥洗 ○引詣尊所
헌관은 손을 씻고 모제선생 술잔 올리는 곳에 인도하시오
○引詣慕齋先生神位前 ○跪
찬인은 헌관을 모제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 ○俯伏興
헌관은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晦齋先生神位前 ○跪
찬인은 헌관을 회제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 ○俯伏興
헌관은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西厓先生神位前 ○跪
찬인은 헌관을 서애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 ○俯伏興
헌관은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鶴峯先生神位前 ○跪
찬인은 헌관을 학봉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 ○俯伏興
헌관은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旅軒先生神位前 ○跪
찬인은 헌관을 여헌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 ○俯伏興
헌관은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鶴洞先生神位前 ○跪
찬인은 헌관을 학동선생신위앞으로 인도하고 헌관은 꿇으시오
○奠爵 ○俯伏興
헌관은 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引降復位
알자는 헌관을 제자리로 인도하시오
◉ 飮福受胙
○執事詣尊所 ○以爵酌福酒
집사는 술따르는 자리에 나아가 작으로 복주를 따르시오
○執事進減神位前胙肉
집사는 신위전에 고기를 덜어오시오
○謁者引初獻官詣飮福位 ○北向跪
알자는 초헌관을 음복위로 인도하고 헌관은 북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으시오
○執事進獻官之左 집사는 헌관의 왼쪽으로 나아가시오
○以爵授獻官 집사는 복주를 헌관에게 올리시오
○獻官飮卒爵○執事受虛爵
헌관은 복주를 모두 드시고 빈잔을 집사에게 주시오
○執事北向以胙授獻官 집사는 북쪽에서 고기를 헌관에게 드리시오
○獻官受胙○授執事 헌관은 고기를 받아 집사에게 주시오
○俯伏興○引降復位 헌관은 엎드려다가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오시오
○獻官以下皆再拜
헌관이하 모두 두번 절하시오
○鞠躬拜興○拜興○平身
허리를 굽히고 두 번절하고 일어서시오
○祝入撤籩豆 축관은 들어가 제기를 거두시오
◉ 望瘞
○謁者引初獻官詣望瘞位○北向立
알자는 초헌관을 인도하여 망예위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서시오.
○祝取板降自西階 ○瘞坎
대축은 축판과 폐를 취하여 서계로 내려가 구덩이에 묻으시오.
○引降復位 제자리로 돌아오시오
○謁者引初獻官贊引引獻官以次出
알자와 찬인은 헌관을 인도하여 나가시오
○閤櫝○祝及諸執事皆復拜位
집사자는 주독을 닫고 절하는 자리로 가시오
○再拜○鞠躬拜興○拜興○平身
허리를 굽히고 두 번절하고 일어서시오
○以次出
모두 나가시오
빙계서원 배향
文敬公 慕齋 金安國 1478~1543 의성(義城) 예조판서, 판중추부사 기묘사화
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 여강(驪江: 현 경기도 여주) 이조판서 을사사화
文忠公 西厓 柳成龍 1542~1607 풍산(豊山) 임진왜란
文忠公 鶴峰 金誠一 1538~1593 의성(義城) 조선시대 통신부사 임진왜란
文康公 旅軒 張顯光 1554~1637 인동(仁同) 임진왜란
鶴洞 李光俊 1531~1609영천(永川)성균관전적 예천군수 강원도관찰사
묘지명을 여헌이 쓰다.민성,민환은 여헌의 문인이다
慕齋 金安國 1478~1543 본관 의성(義城) 예조판서, 판중추부사 기묘사화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김연(金璉)의 아들이며, 김정국(金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평·장령·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農書諺解)』·『잠서언해(蠶書諺解)』·『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圖諺解)』·『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정속언해(正俗諺解)』 등의 언해서와 『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 등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水苔]와 닥[楮]을 화합시켜 태지(苔紙:가는 털과 같은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모재집』·『모재가훈(慕齋家訓)』·『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성리대전언해(性理大全諺解)』·『농서언해』·『잠서언해』·『여씨향약언해』·『정속언해』·『벽온방』·『창진방』 등이 있다.
晦齋 李彦迪 1491~1553 여강(驪江: 현 경기도 여주) 이조판서 을사사화
경상북도 경주 출신. 본관은 여강(驪江: 여주(驪州)). 초명은 이적(李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회재라는 호는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할아버지는 참군 이수회(李壽會)이고, 아버지는 생원 이번(李蕃)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명종 2)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이언적은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후에 이이(李珥)는 이언적이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이언적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학문세계와 저서
이언적은 1517년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었고,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언적이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되었다.
이언적은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인 인(仁)에 대한 이언적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이언적은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을 통해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이언적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보여준다. 이언적은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고,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언적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 도학자들의 학문 태도에 비해 훨씬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미완성 저술로 주희의 『중용장구』와 『중용혹문』의 체계를 벗어나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인 9경(九經: 수신(修身)·존현(尊賢)·친친(親親)·경대신(敬大臣)·체군신(體群臣)·자서민(子庶民)·내백공(來百工)·유원인(柔遠人)·회제후(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의 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는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 체계를 통치 원리의 구체적 실현 방법에 응용했던 것에 상응하며, 후에 이현일(李玄逸)이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이언적은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家禮)』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 저술은 이언적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언적이 왕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進修八規)」는 군주 사회의 통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늘의 도리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했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는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을 근본 강령으로 규정하고, 가정 법도의 엄숙, 국가 근본의 배양, 조정 기강의 정대, 인재 취사의 신중, 하늘 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 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1517년 저술한 「오잠(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이언적은 하늘[天道·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상훈과 추모
1569년(선조 2) 종묘(宗廟)의 명종(明宗)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文忠公 西厓 柳成龍 1542~1607 풍산(豊山) 임진왜란
임진왜란중 민정(民政)·군정(軍政)의 최고관직을 지내면서 전시 조정을 이끌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왕조를 재정비·강화하기 위한 응급책으로서 각종 시무책(時務策)을 제기했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운암(雲巖).
할아버지는 군수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승지 중영(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에 올랐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대교, 전적을 거쳐 1569년(선조 2) 공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1570년 부수찬·수찬을 거쳐 정언·이조좌랑에 오르고, 1571년 병조좌랑, 1575년 부교리·이조정랑·헌납, 1577년 검상·사인·응교, 1579년 직제학·이조참의·동부승지 등을 두루 지냈다.
1581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무빙차십조 無氷箚十條〉를 올리고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초진(抄進)했다. 이듬해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대사헌 등을 지내고, 1583년 왕명으로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었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대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584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다음해 〈포은연보 圃隱年譜〉를 교정하고 1586년에는 〈퇴계선생문집〉을 편차(編次)했다. 그뒤 형조판서·대제학·병조판서 등을 거쳐 1590년 우의정에 오르고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책록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추천하는 한편 〈제승방략 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을 예전처럼 진관제도(鎭管制度)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한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했다. 그는 스승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다.
또한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그는 이황처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이기로 분석하지 않았지만, 도심을 한결같이 지켜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일찍부터 양명학을 연구했으나 정통 성리학자로서 이를 수용하지는 않았으며, 양명학이 불교의 선학(禪學)에서 연유한 것으로 간주하고 맹렬히 비판했다.
유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지(知)로,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을 행(行)으로 병립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어느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서애집〉·〈징비록 懲毖錄〉을 비롯하여 〈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운암잡기〉 등이 있으며, 편서로 〈대학연의초〉·〈포은집〉·〈퇴계선생연보〉·〈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 精忠錄〉·〈효경대의 孝經大義〉 등이 있다.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병산서원(屛山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군위 남계서원(南溪書院), 용궁 삼강서원(三江書院), 의성 빙산서원(氷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文忠公 鶴峰 金誠一 1538~1593 의성(義城) 조선시대 통신부사 임진왜란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아버지는 김진(金璡)이며,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왜란 초에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경상도초유사로 임명되어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556년(명종 11) 동생 김복일(金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으로 이황을 찾아가 『서경』·『역학계몽(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堯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 해 정자가 되었으며, 이어서 검열·대교 등을 거쳤다. 1572년 봉교(奉敎)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단종의 능)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채용할 것을 진언했으며, 임금의 덕과 당시의 잘못된 폐단에 대하여 논했다.
이듬 해 전적과 형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고, 이어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친 후 정언의 신분으로 변장(邊將)에게 초피덧저고리[貂裘]를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이듬 해 이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중국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가계를 고쳐 달라고 사신을 보내 주청하던 일)를 위해 노력했으며, 돌아와 이듬 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의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 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임씨(林氏)·나씨(羅氏) 사이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고,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자성록(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에 이어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 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했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되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였고,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 조선시대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과 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하여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김성일은 동인(東人)에 가담하였고,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
학문세계와 저서
학문적으로 김성일은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김성일은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으며, 김성일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으로 전해졌다.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家禮)』에 따라 행했으며, 『두씨통전(杜氏通典)』·『구씨의절(丘氏儀節)』·『향교예집(鄕校禮輯)』 등을 참고하여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었다. 그 밖의 저서로는 『해사록(海傞錄)』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학봉집(鶴峰集)』이 간행되었다.
상훈과 추모
1664년(현종 5) 신도비가 세워졌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文康公 旅軒 張顯光 1554~1637 인동(仁同) 임진왜란
경상북도 인동 출신.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장열(張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이팽석(李彭錫)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부터 진사 장순(張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1571년(선조 4)「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대학자로서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576년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 해에 유명한 「평설(平說)」을 지었다. 1595년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다시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장현광을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장현광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 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어서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 만에 돌아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08년「주역도설(周易圖說)」을 지었고, 1621년(광해군 13)「경위설(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했고, 이어서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후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謝恩)했고, 이어서 사헌부대사헌·부호군,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장현광은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학문세계와 저서
장현광은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서는 이황(李滉)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다. 장현광은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인 것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했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사단(四端)이 칠정(七情)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장현광의 철학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과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여헌집』·『성리설(性理說)』·『역학도설(易學圖說)』·『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同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鶴洞 李光俊 1531~1609영천(永川)성균관전적 예천군수 강원도관찰사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준수(俊秀), 호는 학동(鶴洞). 증좌통례 이종림(李宗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이세헌(李世憲)이다. 아버지는 이여해(李汝諧)이며, 어머니는 일선김씨(一善金氏)로 사직(司直) 김형손(金亨孫)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성균관의 유생으로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시작으로 경주·안동 교수를 거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형조정랑·예천군수 등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청송부사가 되고, 사성(司成)이 되어 성균관의 제생들의 학문 풍토를 바로잡는 데 앞장섰으며, 이어 내자시정(內資寺正)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초 닥쳐올 전쟁의 기문을 예상한 조정에서 이광준을 강릉부사로 보냈는데, 이광준은 많은 전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듬해 새로운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물러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1599년(선조 32) 판결사를 거쳐, 충주목사가 되었다. 1602년(선조 35) 형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그 뒤에는 벼슬에 뜻이 없어 구봉령(具鳳齡)과 덕의(德義)를 강론하며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