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해 여름
최 순 태
전)대구광역시 공무원
2018 문학예술 수필부문 신인상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문학예술가협회 회원
오류문학회 회원
상록수필문학회 회원
대구수필가협회 회원
달구벌수필문학회 회원
e-mail : stchoi96@hanmail.net
1987년 7월 어느 날 유난히 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대한의 남아로서 군복무를 시작하기 위해 김천시내의 어느 초등학교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내 위의 형님들은 군대생활을 모두 마쳤고, 막내인 내 차례가 된 것이다.
형제 가운데 제일 어리석고 소극적인 아들을 전송하기 위해 부모님이 동행하였다. 요즈음은 장정들이 자진 입대하는 추세이나, 그 당시에는 일정한 장소에 입영 장정들을 집합시켜 역에서 기차를 태워 훈련소로 이동시켰다.
김천역에서 나를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비쳤다. “얘야! 훈련 잘 이겨내고 씩씩하게 돌아와야 한다.”라고 어머니가 당부하셨다.
나는 “엄마 아무 걱정하지 마”라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이윽고 장정들을 태운 열차가 김천에서 완전히 멀어질 무렵 고향 산천과 가족들을 떠난다는 생각에 눈물이 솟구쳤다. 바로 옆자리의 이웃동네 초등학교 동기가 나를 위로하며 “넌 잘 할 거야”하고 말해 주었다.
한참을 달려 우리들은 논산 제2훈련소 인근의 역에 도착하였다. 기차에서 내린 순간 기차 내의 분위기와 달리 싸늘한 기운이 뇌리를 감쌌다. 조교들은 군기를 세운다며 오리걸음으로 위병소를 통과시켰다. 비로소 진정한 군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신체검사가 시작되었고, 통과된 장정들은 훈련에 돌입되었다. 이제까지 내가 지내던 사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제식훈련부터 각개전투까지 훈련을 하는 중간에 군인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군인의 길, 직속상관 관등성명, 군사훈련 등에 대한 필기시험을 치러야 했다. 나는 처음에 내가 왜 이러한 것들을 암기해야 할까 회의감이 들어 공부를 소홀히 하여 기준 점수에 미달하여 얼 차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마음먹고 공부하여 드디어 좋은 점수를 받게 되었다. 다른 훈련병들이 놀라는 표정이었으나, 30연대의 조교는 “너는 충분히 할 수 있어”라며 나를 격려하였다. 삼복더위가 훈련소에 들이닥쳤다. 거의 40도를 육박하는 살인적인 더위였다. 교관과 조교들은 훈련할 때 온도계와 소금, 물을 준비하여 제공하고, 더우면 그늘에 가서 쉬게 했다. 교관들은 훈련병을 야외 풀장으로 안내하여 더위를 식히도록 배려했다.
밤이 되면 훈련병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나와 같이 입대했던 가수인 김민식 훈련병을 불러내어 그의 대표곡 “나의 사람아”를 부르게 했다. “해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달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당신 없이는 견딜 수 없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로 시작되는 가사와 그의 노래는 우리 훈련병들의 고단함을 위로해 주었다.
약 5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퇴소하자마자 장병들은 각자 자대로 배치되기 시작했다. 나는 기차를 타고 서울 용산역에 도착한 후 열차를 갈아타고 강원도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내가 전방으로 가서 복무하게 되나보다.” 춘천에 위치한 103보충대에 도착한 장병들은 또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군용 60트럭과 배를 타고 가는 병사도 있었다.
나를 비롯한 몇 명은 고속버스를 타고 춘천 남쪽 어느 곳으로 이동하였다. 강원도 홍천이었다.“아 여기가 내가 3년 동안 지낼 곳이구나.”나는 열심히 하자고 마음을 다졌다. 당초 나는 주특기가 통신병과였으나, 보병대대로 배속되었다. 훈련소와 거의 흡사한 훈련이 반복되었다. 기상 나팔소리는 나를 성가시게 하였고, 휴식을 알리는 음악은 즐거웠다. 밤에 울리는 취침나팔 소리에 가만히 눈감고 고향의 부모님을 그리워했다.
보병대대에서 훈련에 열중하던 어느 날 연대본부로부터 통신대로 전출하라는 발령장을 받고 그곳으로 배속되었다. 유선병과 주특기를 찾아서 근무하게 된 것이다. 비록 통신업무가 처음이라 서툴기는 했지만 일명 “삐삐”선을 감아놓은 무거운 방차통을 등에 둘러메고 열심히 일했다.
이러한 호사를 시기라도 하는 듯 나와 함께 전입해온 병사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애꿎은 나까지 연대책임을 지고 방출되어 다시 보병대대로 가게 되었다. 속이 상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 대대에 배치된 나는 ROTC출신 소대장 밑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성악을 전공한 성악가였는데 가끔 병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소대장님은 소대원들을 한없이 편하게 대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위문품으로 사과 1박스가 들어왔다. 소대장님은 소대 노래자랑대회를 개최하여 1등은 사과 6개, 5등은 사과 반쪽을 주겠다고 하였다. 어차피 사과 숫자가 부족하여 골고루 배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히 심사위원장은 소대장님이었고, 나는 분대원의 열화 같은 요청에 의해 노래를 불러 사과 6개를 차지하여 같이 나누어 먹은 기억이 있다. 이러한 꿈같은 생활도 뜻하지 않게 끝나고 말았다. 우리 대대가 신병훈련소가 되는 바람에 일부 교관과 조교요원을 제외하고는 다른 연대로 떠나게 되었다. 그동안 정들었던 전우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대대장님은 환송식에서 “내 자식들을 떠나보내니 상당히 아쉽다. 우리 모두 울자”며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었다. 타 연대로 전입하니 한동안 적응하기 어려웠다. 1년에 약 2/3 이상을 텐트에서 야영하며 훈련하느라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훈련을 하면서 귀한 견과류인 잣을 실컷 먹는 기쁨을 누렸다. 훈련 장소가 잣나무 숲을 통과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잣나무에서 떨어지는 잣송이를 주어서 반합에 담아 놓고 잣 열매를 수시로 까서 먹었다.
홍천지방은 대관령 서쪽인 영서지방에 속했다. 전형적인 푄현상으로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은 영하30도가 넘는 추위가 계속되었다. 고된 훈련 속에서도 마음이 통한 전우와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내 자신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 고달픔을 잊기 위해서였다.
이 때 만난 서울 출신의 김 상병은 기타도 치고 노래도 잘 불렀다. 훈련이 끝나고 휴식 시간이면 둘이 만나 노래를 부르며 재미있게 보냈다. 김 상병은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소대원들에게 공개하여 잠시나마 훈련에 지친 병사들을 즐겁게 했다.
1979년 10월 중순 대간첩작전을 수행하고 귀대하던 중 춘천을 지날 때 각 가정과 도로변에 조기가 게양된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지금이 현충일도 아닌데 웬 조기인가? 궁금하였다. 필시 국가에 변고가 있음을 짐작하였다.
자대 복귀 후 대대장님이 부대원들을 집합시켜 한 말씀에서 대통령의 서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통령 유고 후 병사들은 군화를 신고 취침하는 비상대기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군대생활이 막바지로 향할 즈음 중대본부 행정병이 나를 한미연합훈련인 팀 스피리트 훈련에 파견할 통역사병 후보로 추천하였다. 사단 본부에서 일정한 시험을 거쳐 어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원주의 캠프 롱에서 파견된 미군 하사관과 한국군 교관으로부터 간단한 영어회화와 군사영어 등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때 중대본부에서 내가 말년 휴가를 가야하는데 교육중이라 물어본다고 하며 나의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군대 생활 중 이러한 어학연수 기회가 흔치 않아서 휴가를 포기하고 교육에 열중하였다. 결과적으로 최종적으로 통역사병으로 뽑히지는 않았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나는 병기를 반납하고 모든 훈련에서 열외가 되었다. 그때부터 보병생활 중 가지 못했던 외출도 하게 되었다. 전역일이 가까워지자 소대원과 의무복무 소대장까지 부러워하는 분위기였다.
나 혼자만 대대에서 제대했으므로 대대장실에서 전역신고를 하였다. 신고 후 소대원들의 헹가래를 받으며 위병소를 나서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대 밖에서 만난 주민 중 어느 분이 ”오늘은 개구리가 한 마리네“라고 말했다. 예비군복이 얼룩무늬였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홍천 버스터미널을 거쳐 서울역으로 가서 곧장 대구50사단으로 향하였다. 본인의 주소지 인근 사단에서 제대증을 받기 때문이었다. 대구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김천 고향집으로 가서 잠자고 그 다음날 증서를 받아도 되었으나, 마침 대구에 고종사촌 형님이 계셔서 하룻밤 신세지기로 하였다.
대구역에서 전화를 하니 고모의 큰형님이 전화를 받았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빈방이 있으면 자도 되겠냐고 물으니 좋다고 하였다. 형님 집에 도착하니 고종사촌 여동생도 왔다. 형님은“벌써 3년이 지났구나. 빠르네.”라고 말했다. 군복무 하는 군인은 하루가 몇 달 같이 여기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다음날 50사단에 도착하니 같이 입대했던 친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우리는 반가움에 서로를 부둥켜 않고 그동안의 군대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대증을 손에 쥐고 곧장 내 고향 김천 배천마을로 향했다. 동네 입구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아이고! 우리아들 군대 잘 마치고 왔네. 수고했다”며 반가워했다. 나는 긴장이 풀려 잠을 아버지께 우선 잠을 자야겠다고 말하고 잠을 청하였으나,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생활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3년여 동안의 군대생활은 참으로 뜻깊은 나날이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견뎌낼 수 있는 자신감과 인내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만 해도 사회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지금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군 생활을 생각하며 이겨내려고 스스로 다짐한다. 가끔 군가를 부르기도 한다. 군가를 부르면 큰아들은 핀잔을 주기도 한다. 남자들의 군대생활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2023. 09. 11)
이 시대의 진정한 효자
최 순 태
그와 나의 만남은 내가 대구광역시 도시철도 건설 본부에서 대구시 본청 재난관리과로 전입하던 2003년 무렵이었다. 그 때 나는 재난관리과 산하 재난상황실로 발령받아 근무하였다. 재난상황실은 대구시 관내에서 발생하는 화재, 교통사고 등 각종 재난상황을 신속하게 해당 부서로 전파하여 처리하는 매우 중요한 부서이다.
그러나 사흘에 한 번씩 밤에 철야근무를 하면서 근무하는 열악한 환경에다 간이침대에서 가면상태로 일하느라 직원들이 일하기를 꺼려하는 기피부서였다. 나는 그곳에서 3년간 근무하며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끔직한 사고로 기록되는 대참사인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화재사건 사고대책반에서 일했다. 지하철 참사로 인한 사망자의 유가족과 부상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분들의 사후대책을 마련하느라 전력을 다하였다.
재난상황실은 재난관리과에서 일정 인원을 지원받아 상황담당자와 같이 재난상황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와 밤을 함께하며 그간 살아온 이야기와 참사대책반의 애로사항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나는 동년배이고 고향도 같은 경상북도여서 서로 친밀감이 있었다. 시청의 인사이동으로 잠시 떨어져 있었으나, 가끔 술을 나누며 수시로 교통하였다.
사람의 인연은 지속되는 것인가 보다. 공직생활의 마지막을 다시 도시철도 건설 본부에서 보낼 때 우리는 다시 만났다. 같이 일하면서 그가 중증치매로 투병중인 노모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들이 없으면 스스로 거동도 할 수 없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인사부서에 특별히 부탁하여 본인의 자택과 가까운 근무지를 택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점심시간에는 집에 계신 어머니께 식사를 차려 드리는 등 정성이 대단하였다.
어머니가 치매로 판정받자 형님과 여동생들 등 가족들은 일단 요양원에 모친을 모셨단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그는 노모를 혼자 방치할 수 없다며 본인의 집에서 모시기로 하였다. 요즈음 자식들이 가정을 꾸리고 직장문제로 타지에서 생활하는 경향으로 볼 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어머니를 모시느라 60대 중반인 본인은 결혼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식사준비를 위해 요리학원에 등록하여 요리를 배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하는 내내 긍정적인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고 동료들과 유대관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려고 치매에 관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여 사회복지사1.2급, 상담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하였다.
나 자신도 막내아들로서 노모를 잘 모시지 못하여 항상 죄송한 마음이 있었다. 그의 희생은 감히 내가 따라잡을 수 없었고, 지금은 볼 수 없는 어머니에게 항상 미안한 감정을 가진다.
이렇게 효심이 갸륵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도 한 가지 달성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공무원으로 입문하여 일반 공무원의 꽃으로 불리는 사무관 승진을 위하여 무던히 노력하였으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끝내 무산되었다.
당시 실망한 그는 만취하여 나에게 한없는 넋두리를 하였다.
역시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자세한 탈락 이유는 모르나, 그의 나이가 원인이 된 것 같다. 군인들처럼 퇴직하기 전 일정기간 한 직급 승진시켜 주면 탈이라도 나는 것일까!
나의 어머니가 97세 일기로 돌아가신 2년 전 어느 날 그가 대구에서 멀리 김천까지 달려와 진심어린 조의를 표한 일은 잊을 수 없다.
그는 치매노인 자족모임 회장을 맡아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유행되기 전에 1년에 한 번 하모니카공연과 흘러간 옛 노래 등으로 위로공연을 하였고, 그 자리에 어머니를 손수 모시고 갔다. 이 행사에 내가 참가하기를 권유하였으나, 내가 하는 성악이 노인들을 흡족하게 하지 못할 것 같아 고사하였다. 행사에 참여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대구광역시 공무원으로 정년퇴직 후에도 여전히 그는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신다. 아들이지만 여자인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궂은일을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투병중인 어머니를 모시면서 겪은 체험담을 글로 작성하여 수기 공모에 출품하여 상은 받은 이야기를 읽어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자상하던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기억을 상실하고 성격도 포악해 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그는 치매노인의 가족들에 대한 상담과 주간보호 알선도 하고 있었다.
자식은 어머니가 아파도 계속 본인 곁에 남아 있어 주기를 희망하나, 이러한 소망도 실현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올해 설날을 지나고 얼마 안돼서 나는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여 본인이 24시간 주보호자로서 병원에서 대기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이후 며칠 동안 소식이 없다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서둘러 빈소를 찾아가 조문하였다. 영정 사진에서 그의 어머니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들, 딸 중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그는 무척 상심하면서 어머니가 5년만 더 살아 계셨으면 좋으련만 이라며 아쉬워 하였다.
자식은 효도를 하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 법이다. 이제까지 진정으로 효도를 다한 그는 자식으로서 할 도리를 다 하였고, 이 시대의 진정한 효자였다. 앞으로 그의 앞날에 항상 행운이 함께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2023. 09. 11)
|
첫댓글 남자는 군 생활을 마치고도 만나면 군대 이야기를 신나게 하지요. 그때는 고생스러웠는데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