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홍일표(사물어사전)
1) 비누는 목련과이며 수생식물이다. 그에게 필요한 양식은 약간의 물이다. 물만 있으면 비누는 끝없이 꽃을 피운다.
2)비누는 생산의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 매 순간 소멸의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한다. 생성과 소멸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3) 존재에 대한 미련도 집착도 없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신을 벗어 몸 밖으로 훌훌 날려버린다.
4) 비누는 언제나 물가까이에 거처를 마련한다. 물은 비누가 가장 좋아하는 상선(上)이요 마음이 서로 통하는 지음(知音)이다.
3-1) 부단한 탈각을 통해 존재를 지워나가는 비누는 한 순간 존재의 동작을 멈춘다. 전격적으로 소멸의 장으로 진입한 것이다. 눈앞에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던 비누는 어디에도 없다. 유산도, 유언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모자'를 보고 '보아뱀 속의 코끼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비누를 호명하면 그는 곱고 유려한 목련의 어조로 답을 할 것이다.
비누/장석주(철학자의 사물들)
어떤 밤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에 너무 짧다. 끝과 사라짐, 사물들의 종말이거나 주체의 소멸에 대한 사유들, 사라짐과 소멸에 대한 상념으로 밤을 지새고 새벽을 맞는다.(중략)
비누는 닳아져서 사라지는 사물이다. 비누의 주성분은 고급 지방산의 알칼리 금속염으
로 물에 잘 녹고 거품이 일어나 미끈미끈하다. 비누거품의 세정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비누는 주로 몸이나 옷의 때와 얼룩을 씻어내는 데 쓴다. 세면대 근처의 플라스틱 비눗갑 속에 비누가 얌전하게 들어 있다. 비누는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사물에
비해 하찮은 것이다. 비누의 하찮음은 비누가 어디에나 지천으로 널려 있기에 벌어지는 사태이다. 오늘 아침 비누를 비벼 거품을 잔뜩 내서 손을 씻다가 불현듯 마음에 하나의 물음이 떠오른다. 왜 모든 것은 사라지는가? 사물은 어느 순간 그 효용을 다하고 소실점 너머로 사라진다. 사라짐은 고갈이고 소멸이다. 비누는 한없이 닳아지는 것, 닳아지다가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대표한다. 비누의 참다운 매혹은 그 덧없는 사라짐에서 나타난다. 비누가 영구불변하는 사물이었다면, 그사라지지 않는 비누란 얼마나 끔찍한가!
여성시인은 문드러진 비누와 그 비누를 담고 있는 비눗갑 관계의 하찮음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다.
비눗갑 속에 담긴 문드러진 비누의 몰골을 볼 때면
지금 그 비눗감이 느끼고 있을 슬픔을 알 것 같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대부분의 새 비눗갑들에
처음 얹혀지는 비누는 탄탄한 비누여서
보기에 따라서는 비누가 비눗갑 안에 담긴 것이 아니라
비눗갑의 숨통을 누르고 앉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마치 몸에 잘 맞는 아내를 얻은 듯 그때 비눗갑은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가?
그러나 뭇사람의 손때가 묻고 물만 닿아도 녹아나는
비눗갑이 일찍이 상상해본 적이 없는 비누의 허약한 체질은
얼마나 비눗갑을 놀라게 하고 실망에 빠지게 했을 것인가?
나날이 작아지는 비누들 나날이 풀어지는 관념의 물컹한 살집들
오, 가엾은 비눗갑들이여, 그들은 비누에 대해
얼마나 순진한 기대와 어리석은 집념을 품고 있었던가?
한 개의 비누만을 담았던 비눗갑이란 이 세상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더러, 젊거나 어린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망가지는 비눗갑은 유감스럽지만 흙 속 깊이 버려지곤 한다
경험이 많은 비눗갑들이여, 온갖 비누치레에 닿아빠지고 몸을 더럽힌
그럼에도 오래 건재하는 비눗갑들이여, 그때쯤이면 평안할 수 있는 건지.
- 이선영, <오, 가엾은 비눗갑들>
우선 비누는 닳아 없어지는 성질을 가졌다. 그에 반해 비눗갑은 훨씬 견고하다. 시인은 비눗갑의 관점을 취한 채 비누를 객체화하고 비누의 닳아 문드러지는 허약한 체질을 부각시킨다. 뭇사람의 손길을 타면서 비누는 점점 작아지는데, 시인은
그런 비누에 대해 “나날이 풀어지는 관념의 물컹한 살집들"이라고 한다. 비누갑은 오래 쓰면 때가 끼고 더러워지지만 닳거나 문드러지지는 않는다. 물론 이마저도 한시적인 것이겠지만. 아주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때쯤 비눗갑이 주체에 대한 일종의 은유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을 테다.
나는 닳아 뭉툭해지다가 나중에는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비누를 통해 사물들의 끝과 소멸에 대해 생각한다. 이 닳아 없어짐이 비누의 죽음이다. 사물은 죽는다! 사라지는 사물의 끝. 사물의 죽음은 멜랑콜리하다. 그것이 씁쓸하면서도 달콤하고 애틋한 것은 그 사라짐이 현재의 영혼들을 어느덧 옛날의 영혼으로 만들어버리는 까닭이다. 덧없이 다가오는 일요일 밤은 어딘지 아쉽고 쓸쓸하며, 바닷가에서 보낸 여름휴가가 끝날 무렵 돌아가기 위해 배낭에 짐들을 챙길 때 가슴을 파고드는 달콤한 우울함을 떠올려보라.계절의 끝, 한 해의 끝, 연극의 끝, 사랑의 끝들도 그렇다. 끝에는 달콤하고 슬픈 마음들이 고인다. 모든 끝은 그저 끝이 아니라 다른 새로운 것의 시작과 맞물린다.어둠에 감싸인 새벽은 밤의 끝이면서 하루를 여는 시작이다.
(중략)
끝과 사라짐이 슬픈 것은 끝이 지나가는 현재이고, 마음은 항상 미래를 향하여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끝에서 경험하는 것은 "딸애들처럼 웃자라서,/내 팔을 빠져나가는 날들.”(데렉 윌컷)이다. 그 사라진 날들, 잃어버린 시간들의 덧없음이라니! 소년들은 사춘기를 끝내고 성인의 일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영원할 것 같던 소년의 순진무구, 그리고 소년의 비밀과 자유와 반항들은 성인의 시기로 접어듦과 함께 끝난다. 성인의 책임과 의무들이 그것을 질식시킨다.
(중략)
실제로 주체-의지의 자유의 재현의 기관으로서의 주체, 또한 권력의 지식의, 역사의 주체-는 사라진다. 그러나 주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양이가 자신의 미소를 허공에 떠돌도록 남겨 두었듯, 자기 뒤에 자신의 유령을 자신의 나르시스적 복사판을 남긴다. 주체는 사라진다. 널리 분산되어 있고 유동적이고 실체가 없는 어떤 주체성, 즉 모든 것을 둘러싸고 모든 것을 육체와 분리된 공허한 의식의 거대한 공명판으로 바꾸어 버리는 허깨비에 못 이겨 사라진다.
-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끝과 사라짐은 실재가 가진 에너지의 영점, 가치의 영점에 이르는 것이다. 제도, 가치, 개인들이 사라진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빈자리는 공허가 채운다. 공허는 위대하다. 그것은 공허가 모든 실재의 확고한 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공기와 바람이 비둘기의 비행에 본질적인 만큼 공허도 인생에서 본질적이다. "(장 보드리야르가 대화로부터 추방된 자들>(파리, 2005)에서 인용한 칸트의 말)
비누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비누를 쓰던 사람도 언젠가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짐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차라리 삶의 총체적 완성이다. 삶은 죽음에 닿아 비로소 둥글어진다. 인생의 끝은 꿈과 희망을 버렸을 때 불길한 파열음과 함께 들이닥친다. 꿈과 희망을 버린 사람에게서는 분발의 욕구에 더해지는 생동감, 도약의 환희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날기를 그친 새와 같다. 어린 시절 대나무숲에서 날기를 그친 채 할딱거리는 새를 본 적이 있다. 이튿날 아침 다시 숲에 갔을 때 새는 죽어서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사라짐은 달리 생각될 수 있다. 즉, 독특한 사건으로, 그리고 특수한 욕구의 대상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 욕구란 더 이상 거기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으로, 결코 부정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라짐은 우리 없는 세상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 하는 욕구일 수 있다." (장보드리야르, 앞의 책)
닳아지는 비누는 사라짐을 연기한다. 사라짐은 존재가 겪는 독특한 사건으로 사물과 존재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끝과 사라짐을 슬퍼하지만은 말자. 사물과 존재와 현실은 거품들 속에서 닳아 없어지는 비누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순간부터 종말을 향해 내달리는 것들이 아닌가? 왜 아니겠는
가? 종말은 삭막한 노동의 의무에서 해방이고 자유이다. 그래서 끝과 사라짐이 품고 있는 무성無性은 은총이고 평안이다. 끝과 사라짐의 은총과 평안을 끝끝내 모르는 사람은 아직 미성숙한
사람이다.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끝이 주는 미덕들, 그 달콤함과 휴식을 제 것으로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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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사물의 철학] 비누-처녀 엄마(virgin mother)
'알칼리(alkali)'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염기성 물질'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화학적으로는 물에 잘 녹고 '산'을 중화시킨다. 초등학교 시절 과학 시간에 처음 배웠을 이 말은 연원이 오래된 아라비아어다. '알(al)'은 '물질'을, '칼리(kali)'는 '재'를 뜻한다. 쉽게 말해 '알칼리'는 물질이 타고 남은 '재'라는 뜻이다. '재'의 성분으로 만들어져 출현한 사물이 있다. 놀랍게도 다 타버린 재로 만든 이 사물은 미용에 쓰인다. 바로 '비누'다. 최초의 '비누'는 아라비아 사람들이 염소의 지방과 타고 남은 나무 재를 혼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이 지역에서는 비누를 '알칼리'라는 용어로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했단다. 그래서 빨래 등에 쓰인 비눗물을 '양잿물'이라고 하는데, 이는 서양에서 온 비눗물이라는 뜻이다.
비눗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잿물' 또는 '양잿물'의 역설은 다 타버린 '재'나 재의 성분이 더러운 물질을 다시 깨끗하게 재생하는 데 쓰인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피부는 물론이고 섬유의 오염을, 오히려 다 타버린 물질 그것을 본래대로 회복시킨다. 흔히 모든 것이 파괴된 상태를 비유하여 '잿더미'라고 한다. '잿더미'는 일종의 재생불능 상태, 완전한 파괴로 인한 회복 불가능의 상태를 뜻하지만, '비누'는 그 잿더미가 발휘하는 '미(美)'의 회복능력과 재생능력을 보여준다. 그것을 우리는 무용한 것의 유용성이라고,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일컬어 '성모 마리아'라고 부르는데, 영어로는 '처녀 엄마(virgin mother)'라고 쓴다. 이 말은 단어 그 자체로 문학적 역설을 품고 있다. '처녀가 어떻게 엄마가 되느냐' 하는 원초적 물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다. 자립할 수 없는 갓난아기를 위해 온갖 힘들고 '오염된' 수고를 다 해야 하는 게 엄마라는 자리다. 그래서 엄마는 예뻐질 수가 없는 자리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는 존재만이 순결한 '성모·처녀(virgin)'가 된다. 생명을 탄생시키고 기르고 보호하는 순결한 힘은 이 '낮고 더럽혀진 자리'에서 나온다. '처녀 엄마'는 저 자신은 '재'의 몸으로 다른 사물의 표면을 깨끗하게 재생시키고 회복시키는 '비누'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