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p216~p271 발제에서는 저자 강신주를 통해 베르그송(1859-1941), 벤야민(1892-1930), 리오타르(1924-1998), 좀바르트(1863-1931), 바타유(1897-1962), 드보르(1931-1994), 왕충(27-100), 왕간(1483-1540), 노자(-571~?)의 사상 한 조각을 만난다. 그리고 그 조각 속에서 발제자의 질문을 던져본다.
'베르그송'에서 저자는 웃음을 "경직된 것과 기성적인 것, 그리고 기계적이고 무반성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들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저항"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우리는 웃음으로 저항할 수 있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웃음의 저항을 한국 고전에서는 '해학'이라고, 그리스 고전에서는 '희극(코메디)'이라고 하는데, 요즘 한국 사회에서 해학과 희극을 찾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벤야민'에서 '아우라'를 이야기 한다. 아우라는 나 자신이 지금 여기 현장과 직면할 때 살아 숨쉬는 듯한 매혹의 느낌이다. 저자는 모나리자 관람을 예로 들고 있는데, 모나리자 진품을 루브르 박물관에서 관람할 때 느껴지는 아우라는 수많은 모조품 모나리자에서는 느낄 수 없다고 하였다. 만일 모나리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루브르박물관 간다면 모조품과 차이를 느낄 수 있을까?
'리오타르'에서는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이야기 한다. 모던은 새로움이고 포스트모던은 새로움을 다시 새롭게 하는 "발생중에 있는 모더니즘"이라고 한다. 저자는 "포스트모던을 추구하는 산업자본과 소비사회가 새로움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다가 더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 인간이 초래하고 감당해야 할 기후변화 환경위기와 어떻게 연관이 될까?
'좀바르트'에서는 자본주의 발전에 '사치의 힘'을 이야기 한다. 사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명예욕, 성욕, 권력욕을 자극하여 산업자본주의로 표방되는 거대한 사치의 세계가 열렸다고 한다. 사치는 무한할 수 없으며 종말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조만간 멸종을 맞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일까?
'바타유'에서는 과잉된 에너지의 처리문제를 다룬다. 바티유는 나눔을 통한 평화스러운 에너지 배출을 제안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발발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앞서 라오타르, 좀바르트에서 얘기한 산업자본주의에서 '나눔'을 통한 과잉에너지 처리가 가능할 것인가?
'드보르'에서는 여가시간마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비판한다. 대중매체에 사로잡혀 소비욕망으로 여가시간을 낭비하면서 "노동의 결과에 굴복하고 있다"고 말한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6일동안 만물을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일을 주셨다고 한다. 안식일은 6일동안 창조된 공간을 거룩하게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가시간은 6일동안 창조한 노동의 결과를 자본가에게 갖다 받치는 굴복의 시간이다. 노동자가 진정한 안식일을 경험하려면 여가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왕충'에서 '회자정리'와 '진인사대천명'을 이야기한다. 모든 만남은 우발적(회자정리)이며, 나의 의도로 무엇인가를 관철시키려고 할 때도(진인사) 그 결과는 우발적(대천명)이라고 한다. 만남에 집착하지 않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삶은 가능할 것인가?
'왕간'에서는 "소통과 공감은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나 의식으로부터 달성될 수 없으며 오직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 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인간의 자연본성이 오염된 문명사회에서 소통과 공감은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노자'에서는 유비와 조자룡의 일화를 예로들어 노자의 통치술인 '현덕'을 소개한다. 현은 검을 현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덕은 득과 심위 결합으로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유비의 자인 현덕은 드러나지 않게 마음을 얻는 고도의 통치술이다. 그러나 저자는 말미에 고도의 통치술도 인간을 통찰 할 수 있는 눈이 없으면 자멸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유비는 조자룡이라는 인물을 볼 줄 알았기 때문에 현덕이 가치를 발휘한 것이다. 인간을 통찰할 수 있는 눈은 어떻게 가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