苟齋文集 鄭載星 (1863~1941) 聚五(취오) 苟齋(구재) 晋陽(진양) 거주지 : 茶田(다전)
苟齋文集卷之七 / 書 / 與灆溪書院士林
伏惟榴炎僉體萬重
老先生遺集 工幾斷手不無賴於賢勞而事體重大勉加訂正期之盡美是區區之望也 生等頃旣忝末議而有未及仰佈者顧鄙鄕之
道山院卽老先生平日講道之所也
風韻之藹爾儀文之秩然可以次於本院而不幸廢爲鞠茂然鄕人士猶撫迹興慕齗斷如昨日事今
印本之不槪及於斯院文字者 是幷其迹而 泯沒之也其爲鄙鄕之厚憾當復如何就
集中而請額侑享等編 苟無其例則已旣有其例則豈以斯院之述作而不可倂入也是述之存否雖不足以輕重於
本集而顧鄙鄕則泯沒故實可謂有後生也耶此生等之不能無言而且彝誠之所慕乎老先生則遠邇一也如或諉之以後時則生等固不能無咎然斯文之重大而毋拘蚤晩曲盡物議僉執事其有以自任也玆繕
寫疏及侑文以送
幸毋憚煩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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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諒加例附俾光旣廢之院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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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두집(一蠹集) 一蠹先生遺集卷之二 附錄 褒贈祀典 정여창(鄭汝昌) 1635 a015_472c
溪。後配柳西崖,盧蘇齋,鄭愚伏。肅廟二年丙辰。賜額道南。鄭愚伏集 毅宗烈皇帝崇禎三十二年 孝宗大王十年 己亥。居昌士林。追慕先生及寒暄兩先生。建書院于山際洞。配鄭桐溪。顯廟朝。賜額道山。景賢錄 崇禎五十七年 肅宗大王十年 甲子。關北士林。追慕先生之德。建書院于 번역문 이미지
2 일두집(一蠹集) 一蠹先生續集卷之二 附錄 道山書院 顯廟壬寅 賜額祭文。[李殷相製進。] 이은상(李殷相) 1635 a015_510d
3 일두집(一蠹集) 一蠹先生續集卷之二 附錄 道山書院請額疏 顯宗己亥 [鄭必達] 정필달(鄭必達) 1635 a015_525b
4 일두집(一蠹集) 一蠹先生續集卷之二 附錄 道山書院請額疏 顯宗己亥 [鄭必達] 정필달(鄭必達) 1635 a015_525b
先正聚講之所。乃臣等所居鄕吾道山之山際洞。卽其地也。當成廟甲寅。時鄭汝昌宰於安陰。金宏弼家於陜川。以茲山爲兩地之中。且有水石之勝。五六載之間。屢與約會。徜徉信宿。從容晤語。阻面不至旬日。猶恐其或相離也。今於文獻公實紀觀之。則可見矣。噫。古今如許其寥闊。而兩先正 번역문 이미지
5 일두집(一蠹集) 一蠹先生續集卷之二 附錄 道山書院春秋享祝文[金千鎰] 김천일(金千鎰) 1635 a015_52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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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遺集卷之二 / 附錄 / 褒贈祀典
毅宗烈皇帝崇禎三十二年 孝宗大王十年 己亥。居昌士林。追慕先生及寒暄兩先生。建書院于山際洞。配鄭桐溪。顯廟朝。賜額道山。景賢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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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續集卷之二 / 附錄 / 道山書院 顯廟壬寅 賜額祭文。[李殷相製進。]
象賢崇德。王政所先。表異忠節。風敎所關。廟焉而享。人用矜式。多士所懷。嘉號宜錫。言念文獻。篤志力行。沈潛義理。踐履高明。奮乎絶學。爲世儒宗。文敬輩出。志合道同。硏窮五經。發揮微言。大明體用。功巨斯文。至如文簡。守道抗節。雖遇塵霧。惟懷霜雪。一生忠直。千古罕覿。相繼挺生。惟國之光。風聲所及。聳動多方。眷彼南土。有嚴斯宇。合堂腏食。籩豆楚楚。模範于士。藏脩是資。顧予嗣服。恨不同時。諸生來籲。特允其請。菁莪有育。棫樸斯盛。爰揭懸額。于以妥靈。嗟我章甫。瞻此儀形。茲遣禮官。式陳泂酌。不昧者存。庶幾來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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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川先生文集(송천선생문집)金千鎰(1622 ~ 1696)松川先生文集卷之三祝文松川先生文集(송천선생문집)金千鎰(1622 ~ 1696)松川先生文集卷之三祝文道山書院改正文獻公常享文道山書院改正文獻公常享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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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續集卷之二 / 附錄 / 道山書院請額疏 顯宗己亥 [鄭必達]
伏以塵泥賤臣。沐浴菁化。待文之興未幾。而若喪之慟遽至。攀髥莫及。號天無所。日月幾何。山陵已過。謳歌所屬。文敎當先。建白未遑於曩日。修擧方勤於初政。臣等苟有所請。失今不言。則無以彰先王大有爲之志。而成殿下不愆忘之德。故是敢纓冠裹足。不憚遠來。而叫呼於悲疚之下。伏惟聖明。察其志而採其請焉。臣等謹按國朝褒祀之典。在昔中廟朝丁丑。先正臣文正公趙光祖啓於經筵曰。士習變化之道。豈無其方。如金宏弼,鄭汝昌褒奬。則可以扶植斯文矣。是年八月。臣鄭光弼獻議鄭汝昌,金宏弼。學術醇正。踐履篤實。世所罕出。例贈未足褒異。禮曹請以講道之所。置立祠宇。春秋仲月。官爲致祭。金宏弼。家在玄風。鄭汝昌。家在咸陽。各其境內。掛榜知委。使學者知國家褒賢重道之意。臣等伏惟兩先正道學之正。爲東方百世之宗師。則先儒旣言之矣。固非後學所可容易形容其萬一。而當時褒奬之典。亦可謂至此而無以加矣。然而臣等之所不能無慨然者。當聖旨之初降。而二鄕人士。無有以先師講道之地。仰復四聰。使致祭之所。止於家廟而已。厥後玄風道東,咸陽蘫溪二書院之建。皆於所居之鄕。例爲創設。而又實非兩先正臣相聚講道之所。竟使祖宗優崇褒異之盛意。不得盡行於當時。則斯文之不幸。聖朝之欠典。無有大於此者。夫所謂兩先正聚講之所。乃臣等所居鄕吾道山之山際洞。卽其地也。當成廟甲寅。時鄭汝昌宰於安陰。金宏弼家於陜川。以茲山爲兩地之中。且有水石之勝。五六載之間。屢與約會。徜徉信宿。從容晤語。阻面不至旬日。猶恐其或相離也。今於文獻公實紀觀之。則可見矣。噫。古今如許其寥闊。而兩先正之生同一時焉。山川如許其渟峙。而兩先正之會同一地焉。則天之作斯境以待斯人者。固非偶然。而況其留連從頌之暇。許多議論。有功於來學者。又可旣耶。自二先正旣去之後。山若增而高。水若增而潔。東西之行過於是者。莫不竦然起敬起慕。則欲求置祠之所。舍此其誰。而窮鄕僻遠。旣不聞聖旨於當時事。故荏苒遷就。又未免湮沒於此日者。雖斯境之不幸。而亦旣有待而然歟。噫。公論之在天地。百年乃定。自弘治以至于今。蓋百有餘年。而適値我先王大振作之日。於是天之所慳。地之所祕。前聖之所未發。後學之所嘗斷斷者。翕然相聚以定。乃於其山之側。而得一地焉。將以爲俎豆矜式之所。且先儒臣文簡公鄭蘊精忠大節。日月乎天地。梯航乎截壑。茲我邦亦其游息之地。故附享之議。人無異辭。功役旣始。未及上達。而先王遽棄群臣矣。嗚呼痛哉。嗚呼痛哉。臣等伏見殿下丕承前烈。思弘大業。至於崇德象賢之擧。靡不盡心。況先朝之所命兩先正臣之所俎豆百歲而以俟今日者。殿下烏得以辭其責乎。伏乞聖明。深惟師道之尊與夫時會之不可失。亟賜兪音。保其營就。光之寵額。使鄕邦可祭之地。不至於埋沒而後已則所繼者先王志也。所行者殿下事也。豈特一山一郡之榮而已哉。不勝瞻天祈懇之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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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續集卷之二 / 附錄 / 道山書院春秋享祝文[金千鎰]
道合朱呂。地同婺陽。一祠幷享。千古茲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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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川先生文集(송천선생문집)金千鎰(1622 ~ 1696) 松川先生文集卷之三 祝文 / 道山書院改正文獻公常享文
道合朱呂地同婺陽一祠竝享千古玆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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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헌집 제11권 / 행장(行狀) / 상산 김공 행록〔商山金公行錄〕
공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휘는 기수(基洙)이며 자는 치원(致源)이고 호는 백후(栢後)이니 대개 ‘뒤에 시든다’는 것에서 말을 취하였다. 본관은 상산(商山)이니, 시조는 고려 시대 시중(侍中)을 지낸 수(需)이다. 정정공(貞靖公) 식(湜)과 청평공(淸平公) 희일(希逸)을 지나 조선조에 이르면 휘 상견(尙堅)이 있었으니 호는 매오(梅塢)로 형 영계(𤃡溪) 익견(益堅)과 함께 동계(桐溪) 정 선생(鄭先生)을 사사하여 사류들에게 추중을 받았다. 상견이 낳은 진사를 지낸 휘 두병(斗柄)은 훌륭한 문장과 행실이 있었다. 두병이 낳은 휘 윤서(允緖)는 무신년(1728, 영조4)에 의사(義士) 윤상거(尹商擧)와 함께 창의하여 역적을 토벌하였으니 이분이 공에게 5대 조부가 된다. 고조부의 휘는 우태(遇兌)이고 증조부의 휘는 용운(龍運)이며 조부의 휘는 달흥(達興)이고 아버지의 휘는 귀찬(龜璨)이다.
어머니는 현풍 곽씨(玄風郭氏)인 경(璥)의 따님이며 부사(府使)를 지낸 정후(禎垕)의 손녀이니, 여사(女士)의 훌륭한 행실이 있었다.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진사를 지낸 기한(基漢)이고 둘째는 기부(基溥)이며 막내는 기연(基淵)이고 공은 셋째 아들이다.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가 일찍이 네 아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지런히 독서하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너의 집안 명성을 실추시키지 마라.”라고 하니, 모두가 어머니의 명령을 잘 받들어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더욱 총명하고 특출하여 겨우 말을 배울 때 간지(干支)와 방위 그리고 숫자를 알았다. 책을 읽게 되자 문득 글뜻을 깨달았으며, 찌를 두드리며 책을 낭랑하게 읽는데 기상(氣象)이 좀스럽지 않았기에 보는 사람들이 큰 그릇으로 기약하였다. 어머니의 명령을 받들어 정재(定齋) 유 선생(柳先生)에게 배웠다. 선친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어머니에게 극진히 하여 밤낮으로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시절에 따라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가슴에 품고와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께서 늙고 병들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혹 부축해주거나 등에 업었다. 어머니상을 당하자 장례와 제례 등을 하나하나 정재 선생에게 품의하여 결정하였다.
백형과 중형 섬기기를 엄부 섬기듯이 하여 정성과 공경이 극진하였다. 또 고아가 된 동생의 두 아이〔조카〕를 어루만지기를 자기 자식과 같이 하여 모두 성취할 수 있게 하였다. 종형(宗兄) 기로(基老)를 따라 밤낮으로 각고의 노력을 하여 어떤 책이든 읽지 않음이 없었으며, 책을 읽으면 가슴 중에 간직하지 않음이 없었다. 표현하여 시문을 지으면 마치 장강대하가 바람을 만나 물결이 일어나는 듯하였으니, 무릇 학교와 서원 그리고 서당의 상량문이나 기문의 글들은 공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 많았다.
일찍부터 과거시험을 공부하여 성대하게 명망이 있었지만 누차 대과에 낙방하였다. 마침 서울의 귀한 사람이 함께 공부하자고 함에 공이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말하기를 “차라리 상좌를 비워놓고 궁한 귀신을 맞이할지언정, 길이 허리 굽혀 달관(達官)에게 절하지 않겠네.〔寧虛上座延窮鬼 不以長腰拜達官〕”라고 하였다. 《장릉지(莊陵誌)》를 읽고 느낌이 있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살아서 사지를 만나는 것이 죽음보다 어려우니, 정충을 바쳐 사육신이 되었네.〔生逢死地難於死 輸與貞忠作六臣〕”라고 하였다. 무릇 여러 역사서에 종묘 사직의 존망과 열사들이 목숨을 바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애초에 여러 번 반복하여 읽으며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난번 병인년(1866, 고종3)에 강화도가 방어에 실패하자 군사를 불러 모으는 왕명이 있었다. 공이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서양 오랑캐가 창궐하는데, 조정에서 애달프게 여기는 교지가 있었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마땅히 자신이 만나는 처지에 따라 자신의 떳떳한 분수를 다해야 할 것이니, 어찌 직책의 유무를 논할 것인가. 나아가면 의병을 창도하여 일으켜 끓는 물과 타오르는 불로 달려갈 것이고, 물러나면 관아를 도우고 지역을 방어해야 한다.”라고 하고서, 장차 분발하여 모병에 응하려 하였으나 얼마 후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평소에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여 장엄하고 공경하는 모습으로 스스로 견지하였다. 연상(硏桑)의 계교(計較)와 천포(泉布 돈) 미염(米塩 쌀과 소금) 등의 일을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매양 마음이 회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시주로 창화하며 천고의 역사를 자유롭게 담론하였다. 후생들을 인도함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같이 하였다. 남전(藍田) 고사에 의거하여 계(契)를 만들고 사창(社倉)을 설립하였다.
도산(道山)과 용천(龍泉) 사이에 강회소를 설치하여 유교 문풍과 문물을 원근에 일으켰다.
본래부터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지역 내의 명승지에 그윽한 곳을 찾고 진경(眞景)을 채록하여 글로 짓자마자 문득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었다. 동문(同門)의 벗인 신암(愼庵) 이만각(李晩慤)이 항상 당대의 호걸스러운 선비라고 일컬었다. 순조 무인년(1818, 순조18) 6월 10일에 가야산 아래 부산리(釜山里) 집에서 태어나 고종 계유년(1873, 고종10) 9월 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였다. 그 다음해 4월에 견암(見巖) 을좌(乙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는데, 문상 온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마을 앞에 있었던 두 그루의 잣나무는 공이 애호하는 것이었는데, 한 그루는 공이 병든 해에 고사하였고 한 그루는 공이 돌아가신 뒤에 고사하였으니 기이한 일이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인 광옥(光玉)의 따님인데, 공이 일생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의 내조에 힘입은 것이라고 말하더라. 2남을 두었으니, 우현(友鉉)과 덕현(德鉉)이다.
아! 내가 일찍 공과 교유해보니 공에게 지기(志氣)의 탁월함과 자품의 고매함은 보통사람보다 매우 뛰어난 점이 있었으나, 효우(孝友)로 인격을 성취하고 문학으로 내실을 채웠으며, 마음을 견지함은 견고하고 의리를 파악함은 분명하였다. 가령 공이 도유(都兪)의 세상에 태어나 조정의 신하가 되었다면, 문장은 보불(黼黻)을 꾸밀 수 있었을 것이고 이름은 역사책에 드리울 수 있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사나운 시대의 운수를 만나 자기 분수에 맞추어 유유자적하였다. 만년의 공부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이미 터득하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으나, 하늘이 수명을 연장해주지 않았다.
애석하구나! 공의 맏아들 우현(友鉉)이 공이 지은 여러 편의 시문을 수습하고 바야흐로 출간하여 후세에 전하려고 하는데, 행록이 없다는 이유로 늙고 피폐한 나에게 그것을 부탁하였다. 평소의 계분을 추념해보니 차마 한마디 말없이 넘어갈 수가 없어서,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서술해 후대 집필자가 채택하는 것에 대비한다.
[주-D001] 호는 …… 취하였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하였다.[주-D002] 윤상거(尹商擧) : ?~1728.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이상(而相)으로 거창에 거주하였다.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이 일어나 청주가 함락되고 정희량(鄭希亮)이 또한 안음(安陰 안의(安義))에서 일어나 이인좌를 도와 형세가 중대하게 되었다. 이에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 500여 명을 모집하여 진주 영장 이석복(李碩馥)의 군사를 도와 적의 수뇌들을 죽이고 마침내 난을 평정하였으나, 자신도 병세가 심하여 죽었다. 1890년(고종27)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주-D003] 무신년에 …… 토벌하였으니 : 무신년(1728)에 경종(景宗) 사후 정권에서 배제된 노론의 거두 김일경(金一經)의 잔당인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 등이 공모하여 영조 즉위 후 실세한 소론의 호응을 얻어 밀풍군(密豐君) 탄(坦)을 추대하여 왕통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김윤서는 거창에서 반란한 정희량을 토벌하였다.[주-D004] 장릉지(莊陵誌) : 권화(權和), 박경여(朴慶餘) 등이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왕위 피탈 후에 전개된 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장릉은 단종의 능호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주-D005] 병인년에 …… 실패하자 : 1866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병인양요를 말한다.[주-D006] 연상(硏桑)의 계교(計較) : 돈을 벌 계획을 말한다. 연상은 계연(計硏)과 상홍양(桑弘羊)의 병칭이다. 계연은 춘추 시대 월(越)나라의 경제가(經濟家)인데,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한 뒤에 이를 복수할 생각을 품고는 범려(范蠡)와 계연을 등용하자, 계연이 월나라를 경제적으로 부강시킬 계책을 진달하니, 구천이 그 계책을 써서 나라를 부강하게 해 마침내 오나라에 복수를 하였다. 상홍양(桑弘羊)은 한(漢)나라 때 치속도위(治粟都尉)가 되어 염철법(鹽鐵法)을 평준화하여 국용(國用)을 이롭게 하였는데, 뒤에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면서 상관걸(上官桀)과 더불어 모반을 꾀하였다가 죽임을 당했다. 《史記 卷129 貨殖列傳》[주-D007] 남전(藍田) 고사 : 남전 여씨(藍田呂氏) 향약을 말한다. 남전(藍田)은 중국 서안부(西安府)에 있는 현의 이름인데 송(宋)나라 때 여씨(呂氏) 4형제가 살면서 일가친척은 물론 향리 전체를 교화하기 위해 처음으로 향약(鄕約)을 마련하여 시행하였던 곳이다. 여씨 4형제는 대충(大忠), 대방(大防), 대균(大勻), 대림(大臨)이었으며, 향약의 규약은 크게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敎), 환난상휼(患難相恤)의 네 가지이다.[주-D008]
도산(道山) : 도산서원(道山書院)을 말하는 듯하다. 도산서원은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에 있었다. 1661년(현종2)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정온(鄭蘊), 이언적(李彦迪)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2년(현종3) ‘도산(道山)’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先賢配享)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6)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고 현재는 서원터만 남아 있다.[주-D009] 용천(龍泉) :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은 용천정사(龍泉精舍)를 말한다. 거창군 가북면 용산동에 있다.[주-D010] 이만각(李晩慤) : 1815~1874.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근휴(謹休), 호는 신암(愼庵)ㆍ암후(巖后)이다. 외숙 유치명(柳致明)에게 배웠다. 《퇴계전서(退溪全書)》 중에서 긴요한 종지(宗旨)만을 발췌하여 《계서약선(溪書約選)》을 편집하였고, 고증학에도 밝아 용학의목(庸學疑目)인 《암후유기(巖后類記)》를 남겼다. 저서로 《신암문집》이 있다.[주-D011] 고종 : 원문에는 철묘(哲廟)로 되어 있으나, 연대가 맞지 않아 고쳤다.[주-D012] 도유(都兪) : 도(都)는 왕의 의견에 찬탄할 때 신하가 내는 탄미의 소리이고, 유(兪)는 신하가 제시한 의견에 왕의 환영 내지 허락의 뜻을 나타낼 때 내는 소리이다. 곧 군신간에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태평성대를 말한다.[주-D013] 보불(黼黻) : 옛날 임금의 대례복(大禮服)에 놓은 수를 말한다. 보(黼)는 도끼 모양의 흑백색 수이고, 불(黻)은 아자(亞字) 모양의 흑청색(黑靑色) 수이니, 보불은 일반적으로 왕정(王政)을 돕는 귀한 인재를 비유한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