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 02 반야심경과 금강경
견성콘서트 5부 - 반야심경과 금강경(1: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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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제가 홍익학당 대표이자 네이버 카페 홍익선원 대표로 있는 윤홍식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경전은요 반야심경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주 잘 아시는 거지만 그 이름 원 이름 그대로 읽으면요. 그 자료 보시죠.
[1.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 ‘공空’ 사상으로 대표되는 600권의 대반야경을 260자로 요약한 것.
* 마하(摩訶, Maha) : 크다. 반야(般若, 프라즈나prajna) : 지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마하 그러면 지금 쓰는 용어죠. 마하 하면요 크다 입니다. 엄청 크다. 그래서 마하는요 대, 큰 대(大)자로 번역이 됩니다. 그래서 큰 반야바라밀다에 대한 심경. 아까 제가 간단하게 소개해 드렸지만 보십시오. 요 심(心)은요 한문에서 이 심은 이 마음 우리 마음도 심인데요. 단순히 심장만을 의미하지 않아요. 처음에는 심장을 그려놓은 겁니다. 이게 이렇게 해서 피 그려놓고 정맥 동맥 그려놓은 거예요. 원래. 근데 이놈이 이제 뭔 의미가 됐냐면 인체에서 심장이 제일 핵심이죠. 반야심경이라는 얘기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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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다에 관한 여러 경전, 이 경전이 몇 권이 있냐면 600권이 있어요. 반야부가 600권인데 600권 경전이 너무 길잖아요. 그 반야부 600권의 경전의 핵심을요 핵심만 하나 요약해놓은 경을 써놓은 겁니다. 여기 글이 써있지만 600권 반야바라밀다에 관계된 반야경을 대반야경이라고 하죠. 그거를 260자로 축약해 놓은 겁니다. 그래놓고 이름을 심경(心經)이라고 한 겁니다. 핵심이 되는 경이다. 반야바라밀다의 핵심이 되는 경이다. 그래서 이 대반야경에는요 우리가 잘 아는 금강경도 반야부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몇 페이지죠? 제가 오늘 금강반야경까지 간단하게 좀 다뤘으면 해서 넣어놓은 이유가 시간 봐서 조절할 텐데요. 7페이지 보시면 금강반야바라밀경이에요.
[2.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 인도에서 150~200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공空’사상의 기초가 되는 반야경전. 현장玄奘이 번역한 대반야경 600권 중 제577권의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과 같음.]
우리가 흔히 금강경이라고 알고 있는 금강경의 원 이름은요. 금강반야바라밀경입니다. 그래서 이게 그 밑에 설명 있죠. 인도에서 한 150년에서 200년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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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을 거로 추정된다는 거는요 명확한 지금 확실한 증거는 없는 겁니다. 그때쯤에 성립됐을 거라고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 그런 경인데 반야부라고 하는 건요 보십시오. 공을 중시하는 경입니다. 반야부라고 하는 건요 결국 만법이 공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텅 비었다. 근데 이제 왜 이 텅 비었다는 의미가요 초기불교, 그러니까 지금 대승에서 소승이라고 부르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간에 이 공에 대한 입장이 좀 달라요. 그건 제가 이제 조금 이따 소개해 드리고 일단 반야부라는 거는 공을 중시한다는데 보십시오. 반야부는 대승이죠. 대승 중에서도 가장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소승불교 초기불교들을 소승이라고 공격하고 아주 부정하고 시작해요. 그러니까 반야부라고 하는 건 대승의 가장 핵심입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도 공을 얘기하거든요. 그럼 이 두 개가 전혀 다른 입장이라는 걸 아시겠죠. 같은 공을 얘기하는데 그게 종파가 찢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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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지금 반야에서 공을 다뤄야 할 정도로 이 대승에서 주장하는 공이 소승 공과 다르다 정도만 일단 아시고요. 금강이라는 건 다이아입니다. 다이아 반야바라밀경이라는 게 지금 반야바라밀이랑요 반야바라밀다는 같습니다. 음역하는 과정에서요 다가 붙고 안 붙고 하는데 원음이 원 인도 산스크리트어 말이 그 앞에 나오죠.
[* 바라밀婆羅蜜ㆍ바라밀다波羅蜜多 :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를 음역한 것으로, 완전한 상태ㆍ궁극의 상태를 의미함. ‘도피안度彼岸’으로 번역되기도 함.
* 반야바라밀다 : 6바라밀 중의 하나로 ‘공성空性’(아공我空ㆍ법공法空[제법본공諸法本空]의 2가지 공성)에 대한 지혜.] 파라미타(Paramita)라고 한다고요. 파라미타를 번역하다가요 반야바라밀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바라밀다라고 번역되기도 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같은 얘기예요. 금강반야바라밀경이랑 이거는요 다이아와 같은. 왜 다이아라고 비유를 드냐면 다이아는요 뭐든지 끊어버리고 제일 단단하죠. 그러니까 반야바라밀만 우리가 잡으면요. 나머지 번뇌들은요 잡철이에요. 그냥 가서 이렇게 부셔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야바라밀이 온갖 번뇌와 무지와 아집을 부숴버리는 반야바라밀이라는 겁니다. 금강 같은 반야바라밀경 요게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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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인데 대반야경 600권 중에 577권에 있는 능단(能斷) 능히 끊어버린다는 말이 더 붙어 있죠. 능단 금강분. 다이아로 다 끊어버린다. 뭐든지 끊어버린다, 번뇌를. 걸리면 다 작살내는 겁니다. 이 반야바라밀에 걸리면요 우리의 무지와 아집이라는 탐진치라고 하는 거 있죠. 무지와 아집 두 개로 줄이면요. 세 개로 얘기하면 탐욕, 분노 뭐죠? 어리석음인데 이게 다 날아갑니다. 이 중에 탐진치 중에 치가 무지고요. 탐욕과 분노는 아집이에요. 내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거거든요. 그래서 두 개로 말하면 무지 아집인데 이것만 박살내면요. 우리는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사실은. 그것 때문에 우리가 안 되는 거거든요. 그거 부숴버리는 금강분이랑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금강경은 대반야경의 하나인데 반야심경은요 대반야경 600권 전체를 요약해서 반야바라밀의 핵심이 되는 경이다. 이렇게 지금 정리해 놓은 겁니다. 지금 구분되시죠. 이렇게 금강경이랑 연계도 아실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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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의 뜻도 아실 겁니다. 자 이렇게 하고 시작할게요. 반야바라밀은 뭘까요? 근데 제가 지난 몇 번의 견성 콘서트에 걸쳐서 제가 주장하는 게 있죠. 우리가 대승불교 하려면 우리의 텅 빈 참나를 찾아야 되지만 이 참나 안에요, 제가 이렇게 그림을 그려 드렸습니다, 참나 안에 참나는 체(體)예요. 이 안에 뭔가 상(相)이 있다는 겁니다, 모양이. 아무것도 없질 않아요. 우리 참나는요 참나는요 아주 좋은 어떤 성질을 갖고 있어요. 그 성질이 상이에요. 이런 눈에 보이는 오감의 상이 아니고요. 우리 안에 아주 좋은 공덕(功德)의 상이 있어요. 이걸 공덕상이라고 합니다. 아주 좋은 기질이 있다는 거예요. 좋은 성질이. 뭐냐면 사랑 정의 이런 거 있잖아요. 우리 안에 참나 안에는 좋은 성질이 들어있다. 그래서 이거를 뭐라고 하냐면요. 이런 참나를요 이걸 분명히 체는 공(空)이잖아요. 체는 공입니다. 그래서 이거를 뭐라고 표현하냐면 불가에서 구(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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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一切) 일체의 묘(妙) 신묘한 상(相)을 갖춘 공(空) 그럽니다. 구는 갖출 구(具)자거든요. 구일체묘상공(具一切妙相空) 일체의 좋은 것들을 다 갖추고 있는 공입니다. 그냥 공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 대승의 핵심입니다. 이 체(體)는 공하지만 상(相)은 공하지가 않아요. 여기(相)는 불공(不空)이에요. 그래서 공과 불공을 다 주장해요. 대승기신론을 보면 우리의 한마음은 공한 측면이 있고 불공의 측면이 있다. 공하다는 건요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거고 불공이라는 건 거기를 건드리면 온갖 자비와 지혜와 그런 뭐죠, 보시와 계율과 이게 다 나옵니다. 온갖 좋은 것들이 다 나와요. 그래서 우리 참나를 텅 비게만 알면요 이러면 이제 소승에 빠지는 겁니다. 우리 참나가 텅 비다고만 알면 텅 빈 참나를 내가 붙들면 나도 텅 비어지겠죠. 그래서 텅 빈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 탐진치가 다 꺼진다는 것이 열반이라고 얘기할 때 소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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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예요. 아무것도 없다는 말도 없겠지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이게 대승의 입장은 다릅니다. 대승에서 말하는 공은요 그냥 공이 아니라 건들면 우주가 다 튀어나오는 공이에요. 텅 비어 있지만 우주를 만들어내는 공이에요. 그래서 이거를 대승기신론에서 일심(一心)이라고 합니다. 이 한마음 신기한 한마음 일심삼덕(一心三德), 크게 일심은 세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일심 안에 이게 6개지만 또 줄이면 세 가지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거는 세 가지로 말할 때는요 주로 ①법신, 체(體)는 법신이라고 부르고요. 그 형상은 ②반야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③해탈. 텅 비어 있으면서도 그 안에 엄청난 지혜가 들어있어서 해탈은요 무슨 짓을 하든지 자유자재하게 한다는 겁니다. 대충 제가 말씀드렸는데 이런 엄청난 공(空)을 얻어야 된다는 게 대승의 입장이에요. 그래서 이 대승의 공을 얻으신 분은요 현상계 어디 던져놔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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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바라밀을 통해서 현상계를 자유자재로 굴려요.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진흙에 물들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중생을 깨닫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야 공을 얻었다라고 말을 해요. 완전히 다르죠. 초기경에는 이런 말이 없습니다. 부처님은요 어떻게든 출가하라 그랬어요. 출가하라. 실제로 지금 소승불교에서 아라한은 출가 안 하면 아라한이 불가능합니다. 아나함과(阿那含果)까지는 재가에서 가능해요. 아라한과(阿羅漢果)는 출가를 해야 돼요. 그래서 정글 안에 들어가야만 가능합니다. 이 입장과 이 사람들은 달라요. 진짜 이 공을 얻은 사람은요 절에 머물러 있지 않고 환속(還俗)을 해서 나와 버려요, 실제로. 원효(元曉, 617~686) 스님은 환속해서 나왔습니다. 경허(鏡虛, 1849-1912) 스님 환속해서 나왔어요. 진묵(震默, 1562-1633) 스님은요 거의 선비처럼 사셨어요, 스님인데도. 우리나라 제일 3대 고승인데 이 3대 고승이 한 행적은 마지막에 다 절을 버리고 나왔어요. 지금 이거를 파계로 봐야 돼요. 만약에 소승 입장에서 보면 원효 스님, 경허 스님, 진묵스님은요 파계입니다. 진묵 스님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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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어머니 묘 잘 써놓고요. 날마다 찾아가서 성묘 드리고 했어요. 효행의 제일 으뜸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고기도 드시고 술도 드시고 다 하셨어요. 그럼 이분은 지금 초기불교로 아라한도 안 돼요, 초기불교 개념으로 보면. 원효 스님도 마지막에 아들을 하나 낳아서 내가 신라에 도움을 줘야겠다 해서요. 아들을 하나 설총(薛聰, 655~?)을 낳고 실제 도움을 줬죠. 설총을 낳고 말년에 거지들과 거지들 속에 들어가서 우리가 지금 각설이 타령을 원효 스님이 지었다고 전해 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전해오기를 거지들한테 노래 가르쳐주고 나무아미불만 외면 극락간다고 가르쳐줬어요. 지금 원효 스님이 가르쳐준 것도요 정토교를 가르쳐줬어요. 아미타불만 외라. 왜냐하면 그렇게 동냥해서 먹고 사시는 분들이 힘드신 분이 언제 수행을 해요? 그러니까 가장 쉬운 방편을 가르쳐줬어요. “아미타불만 외라. 그러면 극락간다.” 그러다 보니 공을 안다. 이걸 자꾸 주장하시는 거예요. 경허스님도 마지막에 파계하시고 나오셔서 수염 다 기르시고요 신의주 쪽에서 훈장하시다 돌아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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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제자들도 안 만나주고요. 그럼 이런 행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대승불교에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절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다는 걸 아세요. 그래서 누가 더 낫냐 안 낫냐가 아니고요 지금 원효 스님을 이해하시려면 이 관점을 취하지 않으면 이해하실 수 없다는 얘기를 드리는 겁니다. 대승의 관점으로 산 도인들을 이해하시려면요 대승의 관점으로 봐주셔야 돼요. 그 핵심이 지금 반야심경에서 이 얘기를 합니다. 이 공을 아는 게 반야죠. 지혜예요. 반야라는 건 지혜입니다. 보세요. 공 사상으로 대표되는 게 대반야경인데요. 보십시오. 반야라는 건요. 산스크리트 말로 프라즈나인데 지혜를 의미해요. 그 반야바라밀이라는 거는 바라밀 이제 제 강의 동영상 강의 들으셨던 분 아시겠지만 바라밀이라고 하는 건요 그걸 완성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도피안이라고도 번역하는 건요 피안(彼岸)으로 건너갔다 할 때 피안이 저 세상이 아니고요 깨달음의 세계로 건너갔다는 걸 의미한다는 거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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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미타(波羅密多)라는 건요. 보시바라밀이면요 보시를 하는데 궁극의 보시를 해버린다는 겁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 나오는 보시를 한다는 겁니다.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는 보시를 한다는 겁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건요 지혜를 닦는데 흠이 있는 지혜가 아니라 궁극의 지혜라는 겁니다. 그 궁극의 지혜는 뭘까요? 이걸(공) 아는 겁니다. 다른 거 하나도 없어요. 우리 안에 있는 텅 빈 참나를 찾아서 그 텅 빈 참나 안에 이런 육바라밀의 상(相)이 갖춰져 있다는 걸 아는 겁니다. 이걸 알려면요. 보십시오. 본인이 이 해탈이라는 의미가 소승에서는 이 삼계를 떠나는 걸 해탈이라고 한다면 대승에서 해탈은 그게 아니에요. 내가 술을 먹고 고기를 먹어도 거기에 걸리지 않는 걸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게 탐진치로 나한테 작용하지 않아요. 그래서 진묵 스님은 술 드시고 고기를 잡수시니까 “아 스님이 왜 고기를 잡수십니까?” 하니까 바로 똥을 누니까 고기가 살아서 나가서 물에서 헤엄쳐버려요. 그런 전설들이 내려와요. 이게 말하는 게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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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되면 해탈이에요. 그래서 이게요 텅 빈 건 하나님의 본체고 기독교랑 같습니다. 반야는 전지고요. 해탈은 전능이에요. 이 정도 능력이 안 되면 대승보살로서 중생 구제를 할 수가 없어요. 딱 산속에서 깨어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출가해서 정글 안에 들어가야만 아라한이 가능합니다. 그분이 시장에 나오면 아라한이 깨져요, 아라한 상태가. 이게 지금 소승불교의 입장이에요. 그런데 대승에서는 그게 아니에요. 시장에 나와서 오히려 장사도 하고 뭐도 하고 다 하는데 그분은 이미 해탈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대표적인 대승경이 유마경(維摩經)인데 유마경은요. 대재벌 아들이고 대재벌이에요, 당시. 대재벌로서 결혼, 처자식 다 두고 다 하는데 부처님 10대 제자가 가서 다 당하고 미륵보살한테 가서 병문안 하라니까 미륵보살(彌勒菩薩)도 나도 까였다고 못 가겠다고 하고 문수보살(文殊菩薩)도 안 가겠다는 걸 부처님이 명령하니까 겨우 가요. 그래서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아프다는데 병문안 가라 할 때 그게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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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처럼 구성돼 있어요. 10대 제자가 다 자기 까인 얘기를 해요. 내가 좌선하고 있는데 어느 제자 하나가 산에서 딱 좌선하고 있으니까요 유마거사가,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어디 재벌입니다, 재벌이 지나가다가 “진짜 좌선이 뭔지 아냐? 앉아 있다고 좌선이 되냐? 진짜 좌선은 번뇌를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드는 거다.” 또 이런 얘기를 해요. “진짜 좌선은 멸진정에 들어있으면서도 중생, 현상계에서 자유자재하게 움직이는 거다.” 소승하고 전혀 다른 얘기를 해요. 그래서 10대 제자를 다 등장시켜서 이렇게 한 방씩 먹이는 이유가 그건 지어낸 얘기죠, 유마거사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그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소승에서 벗어나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소승의 열반으로는 중생을 구제시킬 수 없다. 이런 강렬한 어떤 반발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초기 불경에 대한 신심 깊으신 분이 만일 유마경 보시면요 흥분하실 겁니다. 수보리 보살은요 해공제일(解空第一,) 공(空)을 제일 잘 이해했다는 수보리를 등장시켜서요. 그 수보리를요 유마거사가요 막 때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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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같이 하면은, 너같이 공을 이해하면은 삼악도에 떨어진다” 그래요. 지금 소 대승이 엄청나게 부딪히는지 아시겠죠. “너같이 수행, 공을 이해하고 있다면 삼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아라한들인데요, 그분들은. 아라한은요 한문으로 응공(應供)이라고 그래서 응당 공양 받을 만한 분이에요. 그런데 이 말을 해요. “너한테 공양한 사람도 삼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초기불교 지금 초기불교 읽으시는 신심 깊으신 분들이 남방불교분들이 그 유마경을 보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선정이 깨지실 걸요. 올라오실 걸요. 그 정도로 지금 소승과 대승이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다는 걸 이해하셔야 됩니다. 지금 그걸 반야심경에서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이 얼마나 다른 공인지? 지금 이미 다른 공이라는 건 제가 설명 다 드렸고요. 지우면 안 되는데 자국이 잘 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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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걸로 써버렸나요? 요걸로 써야 되는데. 뭐 이 정도면 보이시죠. 이제 아주 재미있는 게 들어갑니다. 이 추리소설 보듯이 보세요. 이게 여기서 하나하나 우리가 힌트를 찾아내 가지고요. 소 대승이 어떻게 갈리는지를 하나하나 추적해 들어갈 겁니다. 여러분이 아주 잘 아시는 반야심경 가지고요. 이제 1-1 보시면 관자재보살부터 이제 셉니다. 이게 지금 잘 대충 읽으시니까 그러지 관자재보살이라는 게 이제 관세음보살이거든요. 관세음보살의 더 올바른 번역어입니다, 관자재보살이. 그래서 관세음보살이라고 번역하는 거에 대해서요. 당시에 비판이 있고 그랬어요. 인도 말이 그게 아니거든요. 밑에 보시면 나오죠. [*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아래를 굽어보시는 자재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shvara, Ava[아래]+lokita[보다]+ishvara[하느님ㆍ자재신] 힌두교의 시바ㆍ비슈누에 대응되는 자재신(천수경 참조), 아미타불의 화신(이마에 아미타불이 새겨짐), 32응신應身(능엄경)ㆍ33응신(법화경)을 나타내 중생을 구제함. 부처는 ‘체體’이며 보살은 ‘용用’을 의미함. ‘무루無漏의 보살’임.] 인도 말이 원래 관자재보살이요. 아발로키테스바라 이렇게 되거든요. 아바(Ava)가 아래고요. 로키타(lokita)가 보다고 이슈바라(ishvara)가 하느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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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재보살를요 요즘 이렇게 응용해서 이렇게 풉니다. 관(觀), 관하라. 자재(自在), 나한테 있는. 자재라는 뜻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원래. 한문에서 자재 그러시면요. 이건 자유자재(自由自在)라는 뜻이에요. 나한테 있는 이런 뜻이 아니고요 자유자재. 그래서 나한테 있는 보살을 봐라, 뭐 참나를 찾아라 이 정도로 지금 많이 푸세요. 관자재라는 건요 보십시오. 이제 볼 관(觀)자고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그러면요. 보살을 더 풀면요. 보리살타(菩提薩埵)입니다. 보리와 살타가 우리 한글이랑 비슷해요. 보다 있잖아요. 보디 하면 뭔가를 보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산스크리트어로. 깨치다예요,. 보디가. 보디를 지금 보리라고 번역하는 겁니다. 그래서 본 사람을 붓다라고 하고요. 보디, 붓디 이렇게 같은 뜻입니다. 뭔가 지성, 정확히 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보디, 본 사람이 붓다예요. 깨달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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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覺者)라고 번역하죠, 그래서. 그래서 깨달았다는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깨달은, 살타는 중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깨달음과 중생이 만나면요 “깨닫고자 공부하는 중생”이라는 의미도 가능하겠죠. 원래는 그 의미였어요. 소승불교에도 보살이 나옵니다. 부처님이 부처되기 전을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부처님의 전생들은 보살들이에요. 그래서 보살이 덕을 닦아서 부처가 됐다. 그러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이라 이거는요 유루(有漏)의 중생이에요. 한문으로 있을 유(有)자예요. 샐 루(漏)자 씁니다. 비가 세다는 뜻인데 이게 번뇌라는 뜻이에요. 뭔가 새는 게 있다. 유루의 중생이고요 깨닫고자 닦는 중생은 아직 부족하잖아요. 그런데 관세음보살은 그런 보살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면 관세음보살이 부처가 안 되시죠. 문수보살(文殊菩薩)이요 부처가 안 돼요, 계속. 지장보살(地藏菩薩)도 부처가 안 돼요. 왜냐하면 그분들은요 초기불교에 원래 없는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깨닫기 전이 보살이라는 개념은요 석가모니의 전생에만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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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을 그렇게 접근하시면 안 돼요. 관세음보살이 아미타불 아래에 있으니까 아직 부처보다 아래인가 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돼요. 왜냐면요 원래 관세음 신앙은 독자적인 신앙이었어요, 아미타 신앙이랑. 나중에 불보살(佛菩薩) 이렇게 해서 체용(體用) 관계로 합쳐진 겁니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 같은 보살은요 무루의 보살이라 그래요. 없을 무(無)자입니다. 이거 뭐냐면요 이분은요 깨달아서 중생을 구제하고 있는 분을 보살이라고 하는 겁니다. 현상계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이때는 번역을요 “깨달은 중생”이라고 해야 돼요. 이미 깨달은 중생. 그래서 한편으론 깨달았기 때문에 공 상태고, 한편으로는 양다리를 걸치는 겁니다. 한쪽으로는요 이분은 늘 공이에요. 한쪽으로는 늘 중생한테 손을 써서 도와줘요. 이분을 보살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이름이 양족존(兩足尊), 양다리 존귀하신 분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요게 이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계셔서 그래요. 이건 대승 개념입니다. 한쪽은 공하시고요 늘, 한쪽은 늘 현상계에 모습을 나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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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게 초기불교에는 안 맞는 얘기죠. 아라한만 해도 3계에서 포착이 안 돼요, 삼계를 떠난 분이 아라한이기 때문에. 삼계 내에서 생각 감정 오감을 다 버리신 분이에요. 왜냐하면 아함경(阿含經)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생각 감정 오감이라고 제가 번역할게요. 색수상행식인데 “생각 감정 오감이 다 악마다”라고 돼 있어요. 그걸 버려야만 해탈합니다. 대승은 안 그래요. 생각 감정 오감이 없으면 중생을 구제할 수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이 중생성을 받아들여요. 깨달음으로 다가 아니다. 깨달은 중생이어야만 중생을 구제해 줄 수도 있다 해서 관세음보살을 더 높이 치고요 이제. 석가모니불보다 관세음보살 높이 치고. 부처 중에 최고의 부처로 누구라 그래요? 지금 우리나라 조계종 가서 여쭤보세요. 아미타불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를 얘기 안 하고요. 아미타불을 얘기해요. 왜냐하면 똑같은 개념이에요. 중생, 세상을 떠나지 않으시고, 극락세계를 만들어 놓으시고, 현상계 안에서 중생들을 계속 구제하고 계신 부처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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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에 드시지 않았어요. 이해되십니까? 욕계, 욕망의 세계가 있고 색계, 색계는 색깔이 있어요. 무색계는 순수한 생각의 세계입니다. 여기는 생각의 세계예요. 이렇게 쳐보세요. 이건 색깔의 세계고 생각의 세계고 이거는 색깔 플러스 욕망이죠. 플러스 생각까지 다 있죠. 요 색계가 욕망까지 있으면 욕계고 색깔 플러스 생각이죠. 색깔이 아직 있으면 색계고 색깔이 없으면 무색계예요. 여기 삼계를 초월하면요 여기에 이제 열반이 있다고 이렇게 초기불교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극락세계는 색깔이 있거든요. 이해되십니까? 현상계 안에 센터를 만들어 놓고 중생들을 계속 구제하고 계시면서 거기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불보살 개념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이거는 대승에 와서 나타난 개념이에요. 소승에서는 저분들을 자리매길 데가 없어요. 삼계를 벗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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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만 해도 삼계를 떠나버렸는데. 이해가 되시죠? 초기불교에서 여기 색계에 사는 성자들은요 아라한은 없어요. 아나함까지만 여기 살아요. 아나함은 아직 해탈을 못했기 때문에. 근데 아나함 이후 아라한이 될 때 삼계에서 사라져요, 그분은. 그래서 부처님한테 누가 물어요? “그분들은 없어진 거냐? 어떻게 된 거냐?” “말할 수 없다. 없다고도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런 상태에 들어가셔야 해탈이라고 하는데 여기 오면 달라집니다. 자, 그래서 관자재보살이라는 건요 힌두어로 볼 때 무슨 의미냐면 우주를 관찰, 위에서 꿰뚫어보시는데 하나님같이 꿰뚫어보시는 보살이에요. 하나님이라는 뜻이에요. 관자재(觀自在)라는 이슈바라는 하나님한테만 붙입니다, 인도에서. 그래서 관자재라고 했을 때는요 우주를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에요. 자재신, 자재신이라 그래요. 그래서 보살이라는 거는 한쪽으로는 이미 깨달으셨지만 중생을 위해서 계속 중생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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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니시는 분인데, 보세요. 관세음보살이 여기 계시면서, 그러니까 지금 이 색계라고, 경전에는 색계라고 안 나와요. 삼계를 초월해 관세음이 계신다고 하지만 우리가 추적해 보면 분명히 그 세계는 색깔이 있기 때문에 색계라고밖에 할 수가 없어요. 거기서 전 우주를 돌아다니시면서 32가지, 경전마다 좀 다릅니다, 33가지 응신(應身) 모습을 나타내서요 여자로도 나타나고 남자로도 나타나고 해가지고 중생을 실제 손을 써서 구제해 주시는 분이 관자재보살이에요. 그래서 제가, 뒤에 보세요. 이게 관자재보살은 아닙니다. 맨 위에가 누굴까요? 시바신이에요. 맨 위가 시바신이고요. 옆에가 비슈누신이에요. 시바신 보시면 특징이 있나요? 시바신, 호랑이 깔고 있죠. 그리고 그 영화 아바타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바타처럼요 시바신은 온몸이 파래요. 왜 그러냐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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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을 먹었어요. 중생들을 위해서 독을 자신이 대신 먹었어요. 그래서 파래졌어요. 그래서 특히 목이 파라신 분 이렇게 하면요 시바입니다. 호랑이 가죽옷을 입으신 분 하면 시바예요. 그리고요 옆에 이거 비슈누인데요. 보십시오. 한손으로는요 곤봉을 들고 있어요. 지금 이쪽 손 저 보이시죠. 제가 이렇게 들고 있으면 이게 곤봉입니다. 그리고 이쪽 손으로는요 차크라를 돌리고 있어요. 차크라를 이렇게 쇠 모양으로 된 바퀴를 돌리고 있고요. 그 아래 손으로 손이 4개 달렸죠. 한손으로는 연꽃을 들고 있어요. 한쪽 손으로는 시바랑 같이 이렇게 소라 같은 걸 들고 있는데. 이게 재밌는 게요. 천수경(千手經)에, 천수경에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셨던 분 계시면 아시겠지만 관세음보살한테 바치는 그게 찬양문입니다. 거기 뭐라는 표현이 나오냐면요. 곤봉을 드신 이여. 지금 번역을 안 하고 음으로만 읽으니까 아무도 몰랐어요. 조사를 해봤더니 곤봉을 드신 이여, 호랑이 가죽을 입으신 이여, 목이 파라신 이여, 차크라를 돌리시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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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을 들고 계신 이여. 비슈누 시바신의 이름들이 잔뜩 적혀 있어요. 지금 신묘장구대다라니에.. 그래서 지금 조사해 본 결과 관세음보살은 시바나 비슈누에 대응하기 위해서 대항하기 위해서 불교에서 만든 인물로 나와요. 현재 조사로는 실존 인물로 보고 접근하지 않으니까요, 학자들이. 지금 학자들 입장은요. 시바와 비슈누에 대항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이름에 관자재가 붙은 것도 이해가 되시죠? 하나님, 인도에서는 하나님한테나 붙이는 이름인데 보살한테 붙였어요. 그래서 제가 이 얘기를 왜 드리냐면 그 밑에 보시면 이게 최초의 불상들입니다. 간다라에서 나온. 우리가 지금 관세음 하면 되게 여성적인 모습을 기억하시죠? 이분이 관세음은 아니에요. 미륵보살인데 관세음도 다 이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이게 미륵 반가사유상의 원형입니다. 이게 아시아에 오면서 되게 여성적으로 변했다는 거 아시겠죠? 인도는요. 시바신도 그렇고요. 강한 수컷 있죠. 완벽한 몸매를 갖춘 그리고요. 장신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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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에서 나온 붓다상도 옷 하나 거친 것밖에 없어요. 근데 보살에 오면요. 왕족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계급으로 치면 크샤트리아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보살은. 왜냐하면요. 중생의 임금 노릇도 하고 뭐도 하면서 중생을 계도해야 되기 때문에 되게 현실적인 파워풀한 모습으로 그립니다. 근데 이게 아시아 쪽으로 건너오면서요 그런 파워풀한 어떤 군주적인 모습에서 여성적인 모습으로 바뀌어요. 자비가 강조되면서 여기서는 지금 자유자재하다는 권력이 강조됐다면, 이쪽으로 오면서 되게 자애로운 분으로 모습을 매김하면서 여성화되는데. 보십시오. 여기에도 콧수염 다 있으시죠. 보살들이 이 콧수염이요 지금 우리나라 절에 가보세요. 아무리 여성스러운 관세음이지만 여기 살짝 콧수염이 있으세요. 턱수염 있으시고. 간다라 미술이요. 그대로 이렇게 변형된 겁니다, 오면서. 반가사유상은요 아주 여성적인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하고요. 이 말씀 왜 드리냐면 원래의 보살 개념을 접근하시라는 겁니다. 원래의 보살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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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비슈누에 맞먹는 하느님 같은 존재예요. 우주를 꿰뚫어보시고요 자기가 필요하면 어디든 가서 바로 손을 써요. 그리고요 아미타불보살의 양대 좌우 보살들이 있는데 좌우 보살들이요 똑같이 생겼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관을 쓰고 있어요. 이렇게 있죠. 그래서 이제 화려합니다. 여기 쇠붙이들 금, 막 걸려 있는데 여기에 부처님이 앉아 있으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요. 여기에 약병이 그려져 있으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입니다. 이게 아미타 좌우 협시보살(夾侍菩薩) 옆에서 모시는 보살들이에요. 원래는 관세음보살이 하느님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도 하느님이에요. 그런데 나중에 불보살에서는 불(佛)이 본체(本體)고 보살(菩薩)이 용(用)이라고 본 겁니다. 작용할 때는 보살의 모습이고 중생의 모습이고 본신은 부처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개를 합쳐요. 그래서 관세음 머리 이마 위에 관 위에 부처님이 있는데 이 부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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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부처예요. 관세음은 아미타부처의 화신이라는 겁니다. 움직이면 관세음이고요 가만히 있으면 아미타예요. 체용(體用) 관계로 변해요. 그러니까 이미 저분은요 깨달아야 할 보살이 아니고요. 이해되시죠? 깨달은 보살이에요. 그래서 지금 티벳 대승불교다 보니까 달라이 라마를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 부르는 이유가요 우리가 생각하면 보살이면 부처 아래구나 이렇게 보시면 큰일 납니다. 그분 티벳에서는 알아요, 부처라는 걸. 그래서 문수보살이나 관세음보살 다 부처로 봅니다. 그래서 서열 넘버1이 지금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달라이 라마고요. 서열 넘버2가 아미타불의 화신인 판첸 라마예요. 좀 이상하죠, 우리 시각으로 보면. 보살이 지금 넘버1이고 부처가 넘버2인. 근데 티벳 개념에서는 다 부처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개념 하나 보시고, 지금 관자재보살이요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 깔려는 겁니다. 보십시오. 관자재가 누구한테 얘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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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붓다한테 얘기하죠. 사리자. 반야심경 보신 분 아시죠. 사리자한테 얘기해요. 금강경은요, 보십시오. 금강경은요 해공제일, 공을 제일 잘 이해한 10대 제자 중에 수보리 보살이에요. 금강경은요. 수보리 보살한테 얘기를 하면서 새로운 공을 가르쳐주는 얘기고요. 반야심경은요? 사리자를 불러 지혜 제일이라는 10대 제자 중에 사리자를 불러다가 관자재보살이 뭐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너가 아는 개념을 버려라”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유마경이랑 똑같아요, 기본 구조는. 이해되십니까? 보십시오. [1-1.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 ‘오온’이 모두 ‘텅 비었음’(空ㆍ청정ㆍ열반)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통ㆍ재앙을 넘어갔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반야바라밀을 깊이 행하실 때 즉 이 얘기는요. 궁극의 지혜로 우주를 관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분이 관해야 될 게. 어렵지 않아요. 관을 자유자재로 하신다는 이분이 관하는 건요 보십시오. 공(空)일뿐입니다. 공을 잘 이해하는 게 지금 반야예요. 그런데 소승과 대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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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갈리는지 대승의 입장에서 제가 용어로, 대승의 용어로 써볼게요. 대승은 이런 주장을 합니다. “소승은 아공은 안다. 하지만 법공을 모른다.” 이게 설명하기 편해서 제가 이걸 드는 겁니다. 또 소승불교 쪽에서는 아 좀 너무 섭섭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너무 도식화시켰다. 근데 이렇게 설명이 쉬워요, 이렇게 해야. 소승은요. 공을 얘기할 때 이걸 얘기해요. 무아, 무아를 얘기해요. 뭐냐면 나라고 할 게 없더라라는 얘기를 합니다, 내 손이 나인가 봤더니. 자 이 얘기를 합니다. 여기서 나라고 지금 소승에서 지목되는 게 다섯 가지죠. 제가 그 오온(五蘊)이라고 2페이지 위에 오온 있죠. 오온 보시면 돼요. [* 오온五蘊 : ① 색色(표상) ② 수受(느낌) ③ 상想(생각) ④ 행行(의지) ⑤식識(식별)]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익숙하신가요. 오온 정도는 아시죠. 오온, 다섯 꾸러미입니다. 온은요 덩어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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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덩어리. 색(色) 색은요 보십시오. 이렇게 해보세요. 색 색깔인데 제가 표상이라고 번역한 거는요 결국 뭐냐하면 우리 마음에 들어왔을 때 색이거든요. 이해되시죠? 불교는 기본적으로 바라보는 나의 입장에서 관찰합니다, 우주를. 그러니까 나랑 분리된 객관적인 색, 이런 의미로 쓰시지 말고 지금 여러분 눈에 보이는 거 있죠. 여러분 마음 안에 들어있는 표상이에요, 그게. 표상이란 말은요 여러분 마음에 어떤 상이 지금 화면이 하나 떴다는 겁니다. 그렇죠. 요 펜 보세요. 이거는요 제 눈에 보이는 표상이에요, 제가 보고 있는 펜은. 여러분이 보는 건 여러분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이런 시각에서 접근하셔야 돼요. 요 펜은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겁니다. 왜냐? 과학적으로도요 요 펜의 빛이 가서 여러분 뇌에서 재해석돼서 보이는 홀로그램입니다, 지금 여러분 눈에 보이는 거는. 요게 그대로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뇌로. 이게 다 전기신호로 바뀌어서 뇌에서 입체로 재구성해서 보시는 거예요. 요 구성하다가 잘못되면요 뷰티플 마인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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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만 사람이 하나 여기 제 눈에만 보이는 사람도 있고 그래요. 이 구성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렇죠. 뷰티풀 마인드 보면 남들이 못 보는 사람을 꼭 봐요. 자기 눈엔 보여요,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지금 마음 안에 들어온 겁니다, 요 펜이. 이걸 제가 색깔이라고 번역을 안 하고 표상이라고 한 게 이거예요.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색깔이에요. 그쵸. 여기까지 인정하시죠. 그다음에 수(受) 느낌이에요, 느낌. 상(想) 생각, 행(行) 의지, 식(識) 식별이에요. 의식. 여러분의 의식이요. 마지막에 최종 판단을 해요. 저게 뭐다. 저게 뭐다. 이게 의식이에요. 오감의 의식도 있고 오감이라는 그런 식도 있고 여러분의 생각을 결정하는 의식도 있고요. 이 5가지가 여러분 마음 안에 있습니다. 자, 보세요. “나라는 게 있을 것 같냐?”라고 부처님이 초기 불경에 나, “나라는 게 있을 것 같냐? 나를 이루는 것들을 쪼개서 분석해 보면 이 다섯 가지다.” 표상 그렇죠.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내 몸뚱이도요 제 오감 정보에 들어온 표상에 불과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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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상, 나의 느낌,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 나의 생각 나의 의지, 나의 의식을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안식(眼識) 시각, 맛, 그렇죠. 청각. 다 쪼개놓고 보면요 “거기 영원한 나라고 할 게 있냐?”라고 해서 아(我)를 부정해버려요. “무아, 아는 공하다.” 여기까지 나가요. 여기까지는 초기불교를 설명해 주는데 대승은 어디까지 갈까요? 하나 더 가요. “법이 공하다”라는 얘기를 해요. 아(我)가 공한 건 물론이고 아가 공한 에고가 공하다는 겁니다, 이거는. 이건 에고예요. 작은 자아라는 게, 내가 나라고 생각하던 게 사실은 영원한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제가 쉬운 말로 하면 생각 감정 오감이 있는데 내 생각 내 감정 내 오감 아무리 들춰봐도 없는 거예요. 다 무상하지 영원하다고 할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공을 체득하는데 대승불교는 하나 더 나가요. 이게 법(法)입니다. 색수상행식이라는 게 법이에요. 요 자체도 공하다라고 날려버리는 거예요. “색깔은 있을 것 같냐?” 이겁니다. 이해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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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묶어서 나라고 생각하던 그거를 해체했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대승은 더 나아가가서 이것 있을 것 같냐? 소리는 있을 것 같냐? 내 생각은 있을 것 같냐? 이겁니다. 당신의 의식은 따로 그게 별도로 존재하는 어떤 물건일 것 같냐? 싹 공하다라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여기까지 가야 대승이에요. 그래서 반야바라밀이라는 건요 대승에서 말한 반야바라밀은 여기까지 꿰뚫어 본 게 공이에요. 즉 내 눈앞에 보이는 요 펜이요 공하다는 거를 실감나게 아시면 반야바라밀이에요. 소승은 이거 생각 안 해요. 내가 여기에 대해서 느끼는 탐진치만 없애려고 하지 나라고 집착했던 그것만 없애요. 이거는 표상인데 왜 내가 나라고 생각할까? 내 것이라고 생각할까? 그것만 없애면 아공만 아는데 대승은요 요놈 자체가 공하다라고 보는 겁니다. 요 펜이 공하다. 공할까요? 안 공하시죠? 문제는, 제 소리, 제 소리가 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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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이 지금 공할까요? 여러분의 느낌이 텅 비어 있나요? 실제 그렇게 느껴지시나요? 그게 실제 그렇게 보이시는 게 반야바라밀입니다.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있다는 게 그게 다 공해 보이는 거예요. 머리를 써서 “공하다 공하다 공하다” 해서 그게 아니고요. “공하네. 진짜 공하네.” 요게 반야바라밀입니다. “진짜 없네” 이런 느낌이 드실까요? 어떻게 해야 들까요? 이걸 이해 못하시면요 반야바라밀을 아무리 읽어도요 남의 얘기입니다. 공하다는데. 만약에 누가 저한테 그럴 거예요. 나는 우주가 공하다. 그럼 제가 가서 그분의 뒤통수를 딱 때리면 “이것도 공하냐?”라고 했을 때 “아, 공하다”라고 인지할 수 있으면 제가 인정. “아, 아시네.” 버럭 하시면 공이고 뭐고 다 날아가면요 반야바라밀이 약한 거죠. 즉 우리가 쉽게 “생사는 하나다, 나는.” 근데 제가 농담으로 드리는 거지만 그럼 그런 분들이 전쟁터 나가셔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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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생사가 둘로 느껴지기 때문에 겁나서 못 나가겠다. 생사가 하나인 분이 전쟁터 나가야 겁 없이 잘 싸우시겠죠. 우리 같은 사람이 전쟁터 나가면 이러고 쏴요. 누가 맞는지 동료가 맞는지 모르고. 생사가 하나다는 게요 진짜 그 현장에서 공하다라고 느낄 수 있냐는 겁니다. 그게 반야바라밀이에요. 그래도 공하다. 그러실 수 있는 게 개념만으로는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말씀드린 그게. 근데 어렵지 않아요. 제가 항상 어려운 얘기는 안 하잖아요. 쉽다는 겁니다. 이게 약장사 같지만. 자, 이름을 모르세요. 제가 항상 제 CD 들으신 분 아실 거예요. 모르시죠? 성함 모르시죠? 이름만 잠시 놓습니다. 성함 모르시죠? 성함 모르시죠? 잠깐만 상상해 보세요. 내가 내 이름 모르고 있다고. 존재는 하세요. 모르시죠? 성함 모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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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게 공 상태인데요. 지금 공을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제 에고만 안 세우고 있으면 공이에요. 제 의식 자체를 말하는 거예요, 공은. 텅 비어 있거든요. 제가 거기에요 나라는 이름을 세우면 내 것이 생겨서 쪼개져요. 안 쪼개고 갖고 계세요. 나만 느끼세요. 그때 지금 제 소리와 제 모습이요 여러분과 둘로 보이시나요? 나다 남이다가 있으세요? 소리가 들리고 보이고 하는 게 그 참나, 고요한 공하고 둘이세요? 둘이 아니죠. 이해되십니까? 색즉시공은요 이겁니다. 저 보이는 저 카메라와 저가 둘이라는 생각을 내려놓는 겁니다. 그러면 저것도 그대로 제 공의 나툼이에요. 공의 작용일 뿐이에요. 공은요 죽은 물건이 아니에요. 공은 수상행식을 만들어내요. 수상행식을 펼쳐내서 이 수상행식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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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요 엄청난 지혜와 자비를 표현하는 게 공이에요. 공을 죽은 물건으로 보니까 자꾸 수상행식이 악마다. 아함경에 이런 게 있어요. “색수상행식이 악마다.” 그럼 저거 잘라내야겠죠. “아, 내가 또 상을 봤네. 또 내가 느낌을 감정을 가져버렸네. 내가 또 뭐 의지를 먹어버렸네. 생각을 해버렸네.” 이거랑 매일 싸우실 거예요? 반야심경은, 대승은요 싸우지 마라는 경입니다. 소승은요 싸워서 그거를 버리라는 경이고요. 대승은 그 자체가 본래 재료가 청정하다는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번뇌도요 그 자체 재료는 청정하다는 겁니다. 공이라는 겁니다. 대승에서 공은요 청정열반(淸淨涅槃)이라는 의미로 푸셔야 돼요. 소승에서 공은요 무상하다는 뜻입니다. 대승에서 공은 의미가 틀려요. 제법무아(諸法無我) 그러면 말은 비슷해요. 제법공(諸法空)이랑 제법무아랑. 소승에서 제법무아 그러면요 일체 현상계는 무상하다는 정도의 의미예요. 제법본공(諸法本空) 이렇게 하면요 이거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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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하다는 얘기고 열반이라는 얘기입니다. 즉 여러분 눈에 보이시는 추잡스러운 거, 고운 거 다 니르바나 상태라는 겁니다, 애초에. 재료가 청정하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 재료를 보고 이상한 망상을 품었기 때문에 그게 추하다라고 생각을 이뤘지 본 재료 자체는 청정하다는 거예요. 괴롭다 슬프다 이런 거는요 그 재료도 청정해요. 다만 제가 이런 비유 드려요. 여러분한테 제가 재료를 똑같이 드려도요 여러분의 어떤 그림은 이쁠 거고요. 어떤 분의 그림은 막 사람들이 뭐라고 막 욕을 할지도 몰라요. 그렇죠. 재료는 청정하죠. 색즉시공은요 여러분이 보시는 어떤 추잡스러운 색깔도 투영해서 보느냐에 따라서 추하다고도 할 수 있고 이쁘다고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걸 이룰 수 있는 실천법으로 가장 쉽습니다. 나누지 마세요. 저 보세요. 제 주먹 보세요. 이게 제 주먹인지 여러분 주먹인지 모르고 그냥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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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내려놓으시고 보세요. 제 주먹도 여러분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해하세요? 제 주먹은 제 주먹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보시는 제 주먹은 여러분의 참나의 작용입니다. 여러분 안에요 깨어서 알아차리는 자가 있기 때문에 이게 보이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에. 제 주먹도 공입니다. 이해되세요? 이 느낌 이해하세요? 안 어렵죠. 이거 이 느낌만 아시고 보세요. 요게 반야바라밀입니다. 이게 반야바라밀이에요. 다른 거 아닙니다.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하고 오온을 봤더니 텅 비었더라는 겁니다. 나랑 둘이 아니더라는 거예요. 요게 선문답에 그대로 쓰여요. 선문답에서요 “부처가 뭡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잣나무를 딱 봤는데 저게 몇 년 산 잣나무고 뭐고 뭐고 하면요 도를 못 얻어요. 잣나무와 나를요 둘이 아니게 딱 보면요 그 순간 잣나무가 내 마음의 작용일 뿐이고, 잣나무는 결국에 이 모든 건요 공일뿐이라는 걸 알아요. 공은 내 의식입니다. 순수의식이요. 모른다 했을 때 존재하는 그 의식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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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온이 텅 비었더라는 거예요. 즉 이 얘기는요 “오온도 결국에 내 참나의 작용이더라”고 봅니다. 이론적으로요 어렵지 않아요. 여러분의 내면에 참나는 공인데 그게 한번 작용을 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돼요. 그런데 보십시오. 마음이라는 건 수상행식(受想行識)입니다. 수상행식이 돼요. 그런데 색(色)은 뭘까요? 색은 다른 곳에 있나요? 마음에 떠오르는 상이 색이에요. 결국 내 마음이나 내 색이나 다 공하다는 얘기는요 그게 공의 입장에서 보면요 이놈들이 다 하나예요. 나랑 둘이 아니에요. 그런데 공을 모르고요 내 마음에서 보면 나랑 내 마음과 이 색이라는 건요 영원히 둘이에요. 이건 주관이고 이거는 객관이에요. 지금 그렇죠. 저랑 여러분 분리돼 있죠. 이게 여러분 마음으로 보셔서 그래요. 공으로 보세요. 모른다 하고 보세요. 둘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나 내 마음에 떠오르는 상이나 색깔이나 소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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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공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예요. 우리가 꿈속에서는요, 보세요, 꿈속에서는 꿈에 나오는 건물하고 나랑 둘이죠. 그래서 꿈에서 오는 그 적들하고 싸우고 신나게 해요. 깨고 나서 보면 뭔가요? 그거 다 내 마음이었죠. 꿈에서 깨어나듯이 지금 깨어나세요. 지금 꿈에서 깨듯이 깨어나시는 비법입니다. 매트릭스 보시면 네오 깨어나죠. 깨어나면 다른 세계가 펼쳐지듯이 여러분이 지금 “모른다” 하시고 그 순수의식으로 보시면요 생각 감정 오감이 다 하나세요. 둘이 아니라는 통의식 상태에 들어갈 겁니다. 이 느낌을 모르시면서 반야심경을 아무리 읽으셔도 그건 남의 얘기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결론이 “그래도 색이 공이라는 걸 못 받아들이겠다.”가 될 겁니다. 깨어서 보세요. 제 소리 제 목소리, 제 모습도 다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겁니다. 이게 없다는 게 아니라 여러분 마음에 비친 그거는요 촉감과 소리와 색깔과 냄새는요 다 여러분 마음의 작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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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여러분 마음은요 여러분의 참나에 기대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도 공이라는 거예요. 이게 공이면요 마음도 공이고 색도 공이겠죠. 재료가 다 똑같은데. 공을 빚어서 노는 거죠, 우리가. 그러니까 내 공이요. 내 마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해서 그거랑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대승은 “번뇌가 즉 보리다.” 이 말을 하는 이유가요 “번뇌를 겪다보면 죽겠으니까 깨닫고 싶으실 거다. 그래서 번뇌가 보리다.” 이건 대승을 잘 이해 못하신 거예요. 대승을 되게 평면적으로 이해하신 거예요. 좀 더 심도 있게 이해하시면요 “번뇌 자체가 본래 보리”라는 겁니다. “그게 본래 청정하다”는 거예요. 나를 지금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이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청정한 것들이라는 거예요. 왜냐? 제가요 어떤 사람 만나서 죽겠어요. 근데 그 사람을,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만나서 좋아죽겠대요. 저는 싫어 죽겠는데. 그럼 이 번뇌성은 어디서 오냐는 거죠. 재료는 청정하다는 거예요. 내가 그거를 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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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세운 무지랑 아집이 날 힘들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공이라는 걸 알고 나면 무지랑 아집이 떨어져요. 그래서 반야바라밀은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이유가 반야바라밀만 유지하시면 여러분과 제가 둘이 아니라는 그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시면요 어떤 번뇌도 거기에는 붙지를 못해요. 그 상태로 살아가시면 매일매일 번뇌가 떨어져 나갈 겁니다, 하루하루. 이게 점수(漸修)예요. 돈오(頓悟)는요 이 공을 깨닫는 게 돈오고요 점수는 그 상태로 살아가시는 거. 그래서 그 안에 공 안에 들어있는 무진장의 그런 공덕들을 매일매일 해봐요. 보세요. 보시바라밀, 내 에고의 마음으로 지나갈 때는 내가 가진 재산이 아까워서 가난한 사람한테 안 줬는데 한 생각 돌려서 공으로 봤더니 그 가난한 사람을요 돈이 내 돈이 아까웠는데 잠시만 멈추고 그 사람과 내가 둘이 아닌 마음으로 봤더니 주겠죠. 그것도 아마 흔쾌히 줄 거예요, 의심 없이. 그러고 가요. 이게 보시바라밀입니다. 이게 점수법이에요. 참나를 깨치신 뒤에는 참나와 함께 살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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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가 어떻게 하자고 하는지 그걸 따라서 하시는 거예요, 그 안목대로. 그럼 그게 반야바라밀의 실천이 되고 그러면 무지랑 아집이 떨어져 나가는데 이 공을 가로막는 게 무지랑 아집인데요. 이걸 막는 게 무지인데요. 제가 이렇게 자주 얘기해서 많이 아실 텐데 아집은요 심리적 장애물입니다. 심리적으로요 내 욕심 때문에 하기 싫은 거예요. 지적인 장애물이에요, 무지는. 지적으로요 모르겠어요. 내가 잘 몰라서, 이 공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아서 무지랑 아집이 여러분을 이 어두운 기운이 막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무지랑 아집도 그 재료는요 청정하겠죠. 이것까지 이해하셔야 돼요. 무명이 본래 없어요. 제가 그 재료를 빚어서 좀 안 예쁜 그림을 만든 것뿐입니다. 재료는 청정해요. 피카소나 저나 똑같은 재료를 썼는데 그분 그림하고 제 그림이 차이가 나는 것뿐이에요. 재료를 잘 쓰면 끝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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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도 재료랑 싸우지 않는 겁니다. 번뇌가 인다. 성욕, 식욕, 명예욕, 권력욕. 그게 본래 청정하다는 입장이 대승이에요. 조금 아시겠습니까? 근데 말로만 청정하다는 건 아무 소용없습니다. 말로 청정하다고 할 때는요 말로만 하시면요 마음 안에서 이게 음양이 있기 때문에 반대급부가 올라올 거예요. “뭐가 청정하다는 거야?”가 꼭 올라올 겁니다. 공에서 말을 해야만 군말이 없이 따라요. 그래서 바라밀이라는 게 보시할 때 바라밀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바라밀로 보시를 하면 깨끗한데 안 그러고 보시를 하면 줄 때도 궁시렁궁시렁, 떠나는 순간까지도 이게 마음이 안 나요. 주고 나서도 또 속이 시끄러워요, 계속. 근데 공을 아시는 분은 줄 때도 흔쾌히 주고, 억울하다 아깝다는 생각이 드시더라도 또 공으로 날려버리겠죠. “너 그 생각도 청정하다. 잠시 이게 그림이 안 예쁘게 그려졌을 뿐이지 너도 청정하다.” 요게 반야바라밀입니다. 이거 못 당해요. 아무것도 못 당해요. 그래서 관자재보살과 아미타불 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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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드렸고요. 자, 끝났죠. 오온이 모두 텅 비어 있음을 보고 나서 일체의 고통 재앙을 넘어서 버렸다. 무지랑 아집을 넘어가 버립니다. 무지랑 아집 때문에 우리가 고통스러워요. 내 거 챙기는 마음 때문에 아집 때문에 고통스럽고요. 지금 이 공이라는 게 선명히 모르겠어서 괴로워요. 제가 이 얘기를 드리는데도요 “뭐가 공이라는 거야?” 하면 괴로울 거고요. 이게 무지 때문에 괴로운 거고요. “공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내 걸 주기 싫은데.” 그러면 아집 때문에 괴로우신 겁니다. 요게, 보십시오. 탐진치(貪瞋痴)입니다. 무지는 치(痴)고요. 아집은 탐진(貪嗔)의 근원이에요. 즉 내 것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더 갖고 싶은 마음, 탐욕이 일어나고 못 가졌을 때 화가 나요. 진(嗔). 성낼 수 있죠. 진(嗔) 이해되시죠? 2절로 갈게요. [1-2. 사리자여, ‘표상’(色)이 ‘텅 빔’(空ㆍ청정ㆍ열반)과 다르지 않으며, 텅 빔이 표상과 다르지 않다. 표상이 바로 텅 빔이며, 텅 빔이 바로 표상이다. ‘느낌’(受)ㆍ‘생각’(想)ㆍ‘의지’(行)ㆍ‘식별’(識)이 또한 이와 같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그러니까 그 지금 대화의 대상이 사리자입니다. 사리자야 표상이 텅 빔과 다르지 않으며 텅 빔이 표상과 다르지 않다. 즉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단순하게 “색을 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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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라”라고만 얘기했으면요 소승식으로 색즉시공만 얘기했을 겁니다. 그런데 다시 이 말을 하죠. 혹시 오해할까 봐. “공이 곧 색이다.” 즉 청정한 열반이 그대로 색깔로 나타난다. 이해되시죠. 사리자야, 그래서 느낌 생각 의지 식별도 또한 이와 같다. 말을 생략한 겁니다. 실제로 말하면 이겁니다. 보세요. 색(色)이 곧 공(空)이고 공(空)이 곧 색(色)이다. 여기서 나간 거다. 색(色)이 곧 수(受)고 수(受)가 곧 공이고 공이 곧 느낌이다. 이건 생략한다는 겁니다. 나머지는 똑같다라고 했으니까요. 상(想)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상이다. 의지가 곧 공이고 공이 곧 의지로 표현된다. 우리의 오감과 의식이 다 생각이 여기서 나가고 그거 자체가 이미 청정하다. 저 얘기는요 무서운 얘기를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열반에 들어도, 여러분이 철저하게 공을 얻었더라도 여러분은 결국 뭘 하실 거라는 얘기입니까? 색과 수상행식을 통해 여러분을 표현하실 거라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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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부처의 보신(報身) 화신(化身)관이에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현상계에서 절대 떠나실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현상계 안에 부처님의 모습, 부처님의 색깔, 부처님의 몸뚱이를 드러내시고요, 부처님의 자비의 마음을 드러내실 거고, 부처님의 지혜로운 지혜를 드러내실 거고, 부처님의 큰 원과 큰 실천력을 드러내실 거고, 부처님의 식은요 지혜로 바뀌어요. 이게 유식학의 주장인데요. 식(識)은 갖다가 분별심을 의미해요. 분별심은요 그대로 전식득지(轉識得智) 그래서 지혜로 바뀌어요. 요 지혜를 좀 이따 설명드릴게요. 어떤 지혜가 있는지. 사종지혜(四種知慧)가 있어요. 오감이 바뀌고 에고가 다 바뀌어요. 오감도 오식이 하나고요, 우리의 의식이 하나고, 에고 의식이 하나고, 무의식이 하나예요. 요 네 가지 식이 다 바뀌어요, 지혜로. 끝내주겠죠. 색수상행식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게 대승입니다. 다르죠. 색수상행식이 악마라는 얘기를 부처님 입에서 하게 하는 게 아함경인데 색수상행식이 그대로 하나도 버릴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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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 그게 다 공에서 나온 거니까. 공에서 나온 걸 여러분 안 나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에고가 만든 게 아닌데요, 저건. 공에서 올라온 거지. 만법이요 우주가 그대로 공에서 나온 거지 우리가 만든 게 아닌데요, 욕심으로. 욕심으로 만든 것만 잡는 거지, 무지랑 아집으로 일으킨 망상만 잡지 여러분은요 현상계는 그대로 긍정하셔야 돼요. 그리고 나랑 둘로 보지 마세요. 요게 대승입니다. [1-3. 사리자여, 모든 법法의 ‘텅 빈 형상’(空相)이 생겨나지도 않으며 사라지지도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으며 청정해지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으며 줄어들지도 않는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모든 법의 텅 빈 상, 텅 빈 형상, 공이라는 상은요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고 청정해지지도 않고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죠.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여러분 여기서 여기까지 보셔야 돼요. 여러분 이 공은요 여러분이 만든 것도 아니고 없앨 수도 없어요.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태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요 죽을 수도 없어요. 이 우주는요. 이 공의 나툼이기 때문에 이 우주가 끝없이 순환하는 건 공이 있기 때문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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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얘기냐 하면 공은요, 공이 영원하다는 얘기는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도 영원하다는 얘기입니다. 이 현상계도 영원해요. 절대계가 영원하면요 현상계도 영원해요. 대승은 정말 이상한 생각을 한 겁니다. 초기불교랑 엄청 다르다는 거 아셔야 돼요. 이거를요 막 섞어서 얘기하니까 지금 다 혼동이 옵니다. 대승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그래도 부처님 얘긴데” 하고 부처님 얘기를 좀 섞어버리면 이상한 얘기가 돼버려요. 제가 그 색수상행식이 악마다. 이거를 대승불교, 대승불교 선사들이 이런 말을 해요. 제가 들으면 왜 이렇게 좀 계파를 좀 일정하게 나가시지 이렇게 섞으시면 공부하기 힘들잖아요. 잘 가다가 갑자기 “색수상행식이 악마다” 해버리면 대승불교에서는 안 맞는 얘기잖아요. 이런 혼동이 온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래서 늘지도 줄지도 않고 이 공이 영원하기 때문에, 보세요, “절대계가 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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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니 우리의 현상계도 영원하다” 이거를요 이게 원효 스님의 가장 주장입니다. 진속불이(眞俗不二) 진이 니르바나 세계고요 속이 현상계예요. 진속불이라는 건요 니르바나랑 현상계랑 둘이 아니다. 딱 하나다. 이게 색즉시공(色卽是空) 수즉시공(受卽是空) 상즉시공(想卽是空) 행즉시공(行卽是空), 식즉시공(識卽是空)이랑 같은 얘기입니다. 니르바나랑 현상계는 딱 하나다. 절대 니르바나만 있지 않아요. 우주에서 현상계도 같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가 존재하면요 현상계 안에 부처도 같이 있어요. 그게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문수보살이고 이래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이게 소승식으로 이걸 이해하려고 하면요 안 돼요. 안 맞아요. 애초에 다른 걸로 보세요, 그냥. 그 누가 낫다를 떠나서 그냥 다르게 보세요. 반야심경이 지금 그 얘기를 합니다. 사리자 불러다가 소승에서 제일 지혜롭다는 사람, 사리자는요 사리붓다는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고요 부처님 대신 설법을 한 사람이에요. 부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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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을 맡겼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을 불러다가 지금 관자재보살이라는 부처님 때는 있지도 않았던 보살이 나와서 공격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지 마시라. 사리자야. 사리자가 제일 강조했겠죠. 색수상행식이 다 저걸 내려놔야 우린 열반이다. 그런 거 아니다.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 거 아니다. 보세요. [1-4. 이 때문에 ‘텅 빔’ 가운데에는, ‘표상’(色)이 없으며 ‘느낌’(受)ㆍ‘생각’ (想)ㆍ‘의지’(行)ㆍ‘식별’(識)이 없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텅 빈 가운데에는 표상이 없으며. 근데 이 때문에 진짜 이 텅 빈 거 가지고 보면요 상도 상이 아니고 색도 색이 아니에요. 다 공이에요, 사실은. 그러니까 이 공 안에서는 느낌 생각 의지 식별 이런 게 다 없다. 텅 비어 있다. 자, 그것만 없냐면요. 보세요. 밑에 그 오온에 대해서 제가 써놨죠. 각각 변화하는 거. 그거 보이시나요? 색수상행식이 좋은 걸로 변하는 거요. 보세요. 색수상행식이 다 좋은 걸로 변해요. 여래의 몸, 여래의 몸으로 변하고요. 여래의 감정, 여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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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의 행동, 여래의 지혜로 변하는데 지혜가요 네 가지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전오식(前五識)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하는 오식(五識)이 있고요. 육식(六識) 우리의 의식입니다. 이거는 5식을 종합하는 작용을 하죠. 우리 생각이요. 지금 여러분이 지금 머리 굴리시는 게 6식입니다. 7식은요 여러분 안에 있는 에고예요. 그걸 다 나라고 묶어주고 있는 의식이에요. 여러분이 보고 듣고 말하고 하는 걸 다 “나”라고 잡아줘요. 여러분의 어떤 그 뭐랄까요? 우리가 사이버 세계로 들어가면 여러분의 기본 아이디 같은 거예요, 에고는. 그러니까 이거는 절대 안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 8식, 여러분이 한 모든 업보가요 무의식에 저장돼요.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건데요. 육식은 우리의 기본적인 의식이고 요건 오감입니다. 보세요. 여러분이 오감과 의식으로 한 일이, 에고성을 가지고, 그대로 다 무의식에 저장이 됐다가 여기서 업보로 또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럼 이게 다 청정해져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8식은요 보세요. 거기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돼 있죠. 한글 틀렸습니다. 대원경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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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가 아니고요. 대원경지, 크고 원만한 거울이라는 뜻입니다. 광명한 거울처럼 변해버려요. 보세요. 여러분 안에 무의식 안에요 때가 다 때가 지워지니까 큰 거울처럼 광명한 반야의 지혜로 변해버려요. 이 대원경지. 그다음에 에고는요 나와 남을 가르는 식이었는데 지혜로 바뀌면 평등성지(平等性智) 평등해져요. 나와 남을 똑같이 여기는 지혜로 바뀌어요. 그다음에 의식은요 여러분의 의식은 뭘 생각해도 그렇게 기발하지 않죠. 묘관찰지(妙觀察智) 관찰을 귀신같이 해내는 지혜로 바뀌어요. 마지막 오감은요 부처님의 이 깨달은 이의 오감은요 아미타불이 자기 몸을 만들어서 나오겠죠. 지구에 올 때요 몸을 하나 만들어서 와서요 그냥 중생 구제하고 가버려요. 성소작지(成所作智)입니다. 성, 이룰 성(成)자, 바 소(所), 지을 작(作)자는요 짓고자 하는 바를요 그냥 만들어버리는 지혜예요. 오감에, 여러분 눈에 오감을 조정하는 지혜예요. 보십시오. 성 이울 성(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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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버립니다. 뭘? 소(所)는 뭐뭐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작(作) 짓고자 하는 것을요 완성시켜버리는 지혜가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요 오고 싶으면 그냥 몸 만들어서 우주 어느 28천, 38천을 뚫고 다니세요. 관세음보살이 몸을 만들어서 중생을 구제해주고 사라져버려요. 이해되시죠. 이런 엄청난 일, 지금 제 부처의 모습으로 누가 왔다면 그분이 하는 모든 건 성소작지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만들어서 해요. 근데 그분은 에고성도 희박하고요. 에고가 아주 없진 않아요. 자, 에고를 죽이는 수행을 보통 많이 얘기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얘기하는 겁니다. 에고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거지 죽이는 게 아니에요. 7식을요 승화시키는 거고 6식도 죽이는 게 아니라 승화시켜요. 5감도 승화시켜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5감은요 우리보다 청정하겠죠. 그걸 성소작지라 그래요.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시는 것, 5감에서 안 걸리는. 여기까지 보시면 색수상행식에서 자유를 얻는 분이 부처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게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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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이에요. [1-5. (‘텅 빔’ 가운데에는)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의식(意)이 없으며(육근六根), 색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촉감(觸)ㆍ개념(法)이 없으며(육경六境), 안계(眼界) 내지 의식계(意識界)도 없다(육식六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그 텅 빔 가운데는 눈 귀 코 혀 몸 의식이 없다. 지금 이게 아주 무모한 얘기인 게,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면요. 뭐 지금 부처님이 해놓으신 얘기 다 부정하고 있는 겁니다. 초기 불경의 제일 대표적인 개념들이에요. 지금 색수상행식으로 오온이 있다는 거, 오온만 있지 나라고 하는 건 없다는 거, 이게 아공, 아공의 초기불교였는데 그거를 법공까지 가서 부정했고요. 자 보십시오. 오감이요. 보세요. 눈 귀 뭐 있죠? 코 혀 몸뚱이 촉감, 촉감. 촉각 미각 후각 청각 시각이죠. 시각 이렇게 해서 이게 뭘 만나죠? 눈은요 색깔을 보겠죠. 색. 귀는요? 소리, 코는요? 냄새, 혀는 맛, 몸은 촉감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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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요? 의식이 하나 더 있죠. 우리의 의식은 개념을 만나요. 우리 생각의 대상들. 그러면 이 의식도요, 보세요, 여기가 지금 눈에 해당되는 것처럼 의근(意根)이 있고요. 우리 마음이라는 게 있고 지금 의식이라고 했는데 마음이겠죠. 마음이 있고 개념이 있는데 눈이 있는데 안식(眼識)이라는 게 있어요. 눈에 관련된 식별 능력. 그러면 귀는요? 이식(耳識) 코는 비식(鼻識) 한문으로요. 혀는 미식(味識), 몸은 이제 신식(身識)이 있어요. 그러면 이 의식과 요 기관과 이 경계가 만나면 18계가 되겠죠. 이게, 부처님이 우주엔 이거밖에 없다고 그랬어요. 이 개념도 재밌죠. 초기불교도 재밌어요. 이 우주는 우리가 여러 개 있는 줄 알았어요. 우주가 끝이 없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은 저 18개 빼고는 없다는 거예요, 우주에. 제가 그걸 다시 요즘 말로 하는 게 생각 감정 오감 빼고 우주에 없다는 겁니다. 안드로메다 가도요. 생각 감정 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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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있는 것만 보지 우리가 그 밖에 있는 거 못 봐요. 여러분 눈에 들어온 거, 귀에 들어온 거, 코 들어온 거, 혀에 들어온 거, 느껴지는 거, 생각 가능한 거 이거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게 현상계예요. 여러분 현상계를요 나를 빼고 보지 마시고, 불교는요 내 마음으로 봐요. 내 마음에 인지되는 건 저거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이 자체도요 초기불교에서 “이게 다 현상계다” 했는데 지금 대승불교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것도 청정하다.” 지금 이거를 초기불교에서는 현상계라고 해서 니르바나에 못 들어간 세계로 봤는데, 진속불이(眞俗不二)니까. 지금 무슨 얘기를 하십니까? 텅 빈 가운데는 그것도 없다. 이 얘기는 다르게 이해하셔야 돼요. 청정하다라고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공하다. 이 자체도 본래 청정하다. 그다음이에요. 18계를 날렸어요. 그다음에요. 그다음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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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십니까? 부처님이요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말 어렵죠. 이게 무상 한문으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입니다. 위가 없는 최고의 바른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이렇게 하죠, 줄여서. 무상정등각 최고의 깨달음. 그럼 이게 뭐냐라고 만약에 초기불교 연구하신 분한테 물어보세요. 부처님이 깨달았던 최고의 지혜는 뭐냐? 그러면요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12연기(十二緣起) 그럽니다. 특히 12연기가 부처님이 제일 중시한 겁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초기경을 보면 “내가 깨달았다. 십이연기를 깨달았다.” 이럽니다. “이걸 알고 내가 모든 번뇌를 멈췄다.” 12연기를 아는 게요 누진통(漏盡通)과 관련돼 있어요. “모든 번뇌를 끊었다. 나는 이제 해탈했다.” 그럼 대승불교는 이거 건들까요? 안 건들까요? 지금 대충 짐작가시죠? 이게 지금 아주 힘들어져요. 이거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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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낸 게 아닙니다. 저를 의심하지 마세요. 제가 이거 아무리 아무리 양호하게 전해드리려고 해도 지금 이게 반야심경에서 이 말을 써놨기 때문에 그럽니다. 보세요. 이 중에 12연기를 날려버립니다. [1-6. (‘텅 빔’ 가운데에는) ‘무명無明’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다. 그리고 ‘노사老死’도 없고 ‘노사가 다함’도 없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텅 빈 가운데는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한 것도 없고 노사도 없고 노사가 다한 것도 없다. 자 옆에 12연기 보이시죠? [* 12연기(유전문流轉門/ 환멸문還滅門) → 무명無明의 12연기(유루有漏) ① 무명無明(무지ㆍ아집, 탐진치貪瞋痴) ② 행行 / ③ 식識 ④ 명색名色 ⑤ 육입六入 ⑥ 촉觸 ⑦ 수受 / ⑧ 애愛 ⑨ 취取 ⑩ 유有 / ⑪ 생生 ⑫ 노사老死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1~2 전생/ 3~10 현생/ 11~12 내생, 1~2ㆍ8~10 인因/ 3~7ㆍ11~12 과果)] 왜 이걸 건들게 될까요? 보세요. 그냥 부처님이 한 거니까 건든다 이게 아닙니다. 이유가 있어요. 아까 그 18계를 부정한 거는요 현상계랑 절대계를 둘로 볼까 봐 부정한 거죠. 12연기는 왜 그랬을지 한번 보세요. 12연기 거기 뭐라고 돼 있습니까? 무명(無明)에서 시작하죠. 무명이 어두움이죠. 여러분이요 전생부터 어떤 이 무명은요 탐진치예요. 여러분이 그동안 품어온 어떤 어두운 것들, 지적 장애, 심리적 장애입니다. 그게 이제 작용을 해요. 행(行)은 작용이에요. 그래서 여기가 이제 전생(前生)으로 봅니다, 보통. 여기서 식(識)이 나와요. 여러분의 어떤, 여러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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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생겨요. 여러분의 딱 수준의 의식. 이해되시죠. 여러분 수준의 의식이 결정됩니다. 여기 아까 5 6 7식 8식이 결정돼요. 초기불교에서는 7 8식 얘기는 안 하니까 5식과 6식이 결정돼요, 기본적으로. 여러분의 오감 의식과 보고 듣고 하는 능력과 이제 생각하는 능력이 생겨요. 그러면 엄마 뱃속에서 좀 더 자라요. 명색(名色). 이거 좀 이해 잘 안 되시죠? 이름하고 색깔이라고만. 요 이름은요 정신현상을 구분해 말하고요. 색(色)은요 물질현상을 대표해요. 물질은 시각(視覺) 보이는 게 제일 대표고요. 정신은요 명(名)이 개념 잡는 겁니다. 우리 생각이 말로 생각을 하는 거죠. 이름을 가지고. 그래서 제일 대표적인 걸 명(名) 그럽니다. 즉 엄마 뱃속에서요 정신과 몸뚱이가 점점 익어가요. 좀 더 익으면 뭐가 되죠? 육입(六入)이라는 게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아까 했죠. 눈 귀 코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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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몸뚱이 생각 이게 다 결성돼서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 엄마 뱃속에 태어나면 육입이 딱 돼요. 오감을 딱 갖고 태어났어요. 그다음 딱 첫 번째로 뭔 일이 있을까요? 딱 태어나서 세상을 보겠죠. 세상과 접촉이 일어나요. 여러분은 눈 귀 코 입이 있기 때문에 색깔을 보고 혀를 엄마를 만져보고 젖의 맛을 보고 막 이렇게 하나씩 일어나겠죠. 즉 촉(觸)이 일어나요. 이해되시죠? 촉(觸)이 일어나면요? 지금 여기 더 가면 안 되지? 괜찮아. 촉이 일어나면 뭐가 일어나죠? 수(受) 느낌을 가져요. 좋다. 느낌 세 가지입니다. 좋다 싫다 그냥 그렇다. 별 맛 없다. 좋다 싫다 별거 없다. 이 세 가지가 갈려요. 그다음에요. 좋다가 더 커지면 뭐가 될까요? 또 또 하고 싶다, 그거. 갈애(渴愛)가 생겨요. 갈망이. 그러면 취(取). 거기에 대한 집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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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져서 취합니다, 그걸. 그렇죠. 그럼 업(業)이 지어진 거죠. 여기서 이 수(受)까지가 또 하나 한 번 간절이에요. 취에서 유(有) 업을 지어버려요. 여기까지가 또 한 간절이에요. 그러면 뭐가 생길까요? 생(生), 노사(老死) 또 다음 생이에요. 다음 생이 또 일어나요. 전생 현생 내생이 지금 3세가 같이 있습니다. 이게 3세 인과론이고요. 거기에 3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하는 게 이겁니다. 보세요. 이중적인 인과작용이 지금 꼬여 있다. 보세요. 무명(無明)이 원인(原因)이죠. 그걸로 인해서 제가 촉수(觸受)까지가 과(果)예요. 여기까지 과가 일어나요, 결과가. 다시 내가 이제 하는 짓에 의해서, 그렇죠, 애취유(愛取有)까지 돼 있죠. 애취유까지 가고,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또 원인이 지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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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이. 그다음이 결과예요. 이 두 가지 인과가 있다는 겁니다. 3세양중인과론이라고 그래요. 뭐냐면요? 전생에 내가 한 짓 때문에 이번 생에 이런 몸뚱이 이런 걸 갖고 이런 환경에 태어나겠죠. 그러니까 태어나고 보니까 접촉이, 내 의지로 일어난 게 아닙니다, 그냥 접촉이 돼요. 그래서 어떤 느낌까지 갖는 게 하나의 결과예요. 그런데요. 여기에 대해서요 제가 좋다고 하고 집착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겠죠. 여기에서 또 새로운 원인을 지어서 또 결과를 받는 겁니다. 다음 생을 또 예약해요. 여기서 제가 또 잔뜩 무명을 저질러 놓으면 다음 생이 또 예약된다는 겁니다. 자, 이게 왜 대승에서는 이게 안 맞을까요? 지금 이제 추리하시겠습니까? 대승불교 입장에서 이걸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시겠어요? 생사를 미워하고 있죠. 생사를 미워하고 있죠. 생의 시작은 무명이라고 보고 있죠. 우리가 윤회한다는 걸요 어두운 걸로 봐요. 무명으로 보고 있고 무명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보세요, 무명이 없어진다는 게 뭐냐면요? 이게 옆에 12연기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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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문(流轉門)이라고 돼 있는 게 흘러서 이렇게 흐르는 문(門)이에요. 이렇게 계속 흘러가면 유전문이고요. 환멸문(還滅門)은요? 만약에 무명(無明)을 끊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행(行)이 사라지겠죠. 이런 식입니다. 보세요. 다시 태어나고(生) 싶지 않으면 업(業)을 안 지으면 돼요. 업을 안 지으려면 뭔가를 취(取)하지 않으면 돼요. 취하지 않으려면 갈망(愛)을 안 하면 돼요. 위엣 것이 끊어지면 아래 것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이렇게 툭툭 끊어가는 게 환멸문이에요. 이렇게 딱딱 끊어서 결국 다 끊어가면 어디로 갈까요? 무명도 마지막에 끊고 열반(涅槃)에 듭니다. 그럼 그분은 다시는 생사(生死)가 없다는 이론에 도달해요. 이게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주장하신 거고 “다시는 나는 집을 짓지 않으리라”고 강조하셨던 건데, 대승불교 입장에서 볼 때는 진속(眞俗)이 둘이 아닌데 “현상계 난 버리고 이제 진(眞)으로 들어갔다”라는 게 말이 안 되니까 이걸 무명의 연기로 보고, 이걸 자체를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한 것도 없다”라고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이해되세요? 이 얘기는 다르게 얘기해 드릴게요. 무명(無明)이라는 게 본래 청정하다는 겁니다. 행도 청정하고 다 청정해요. 만약 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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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하게 살면요 그래서 제가 그려본 겁니다. [* 명明의 12연기(무루無漏) → 7지 보살(방편지方便地, 본연삼매ㆍ6바라밀)이상. ① 명明(대원경지大圓鏡智) ② 행行(여실행如實行ㆍ원願) / ③ 식識(4종 지혜) ④ 명색名色(불심佛心ㆍ여래색신) ⑤ 육입六入(부사의업不思義業) ⑥ 촉觸(정념正念) ⑦ 수受(선열禪悅ㆍ자비심)/ ⑧ 애愛(무탐無貪) ⑨ 취取(무주無住) ⑩ 유有(선한 과보) / ⑪ 생生 ⑫ 노사(윤회를 통한 중생구제)] 명(明)의 연기를 설명 드릴게요. 대승의 입장을 제가 대변해본 겁니다. 명의 연기도 상상할 수 있어요. 무루의 연기, 번뇌성이 없는 연기를 그려보면요. 부처는 어떻게 연기할까요? 무명에서 연기하지 않겠죠. 근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부처도 몸을 갖고 의지를 갖고 다 갖고 할 수 있다고요. 보세요. 이게 광명이고요. 여기서는 그러면 대원 또 대원경지라고 돼 있네요. 자꾸. 대원경지 밝은 거울 같은 마음을 품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워서, 식이 지혜로 바뀌었죠. 네 가지 지혜를 품고요. 이런 정신과 물질은요 여래 어떤 여래의 마음 여래의 몸뚱이가 돼서, 태어나서 육입은요 육입을 통해서 아까 그런, 뭐죠, 불가사의한 업을 지어요. 부처가 짓는 업은 불가사의 업이라 그래요, 대승기신론에서. 청정한 업을 지어요, 중생을 돕겠다는. 나를 위한 업이 아니기 때문에 부사의업(不思義業)이라고 그럽니다. 불가사의업, 신묘한 업을 지어서, 촉(觸), 대상과 접촉했을 때 깨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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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正念), 딱 깨어 있어요. 이 수(受) 그래서 이 느낌도요 이기적인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 자비심이 들어요. 아까 수는 자비심으로 바뀝니다. 애(愛)는요 갈망을 안 해요. 무탐(無貪), 탐하지 않습니다. 현상계 취(取), 무주(無住), 집착하지 않아요. 유(有) 선업만 지어요. 업을 안 짓지 않아요. 모든 중생한테 이로운 업만 지어요. 그러면 그 뒤에 생노사(生老死)는요 또 다른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또 오는 겁니다. 긍정적인 생과 노사가 돼요. 이렇게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지금 대승불교에서 꿈꾸는 연기예요. 그래서 소승의 연기, 그러니까 이거는 좀 센 얘기입니다. 부처님이 제일 내가 깨달았다고 한 얘기를 “없다”라고 지금 반야심경이 하고 있다는 거를 보셔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대승하고 소승을요 영원히 구분을 못합니다. 막 혼재돼서 이해하시면 안 돼요. 그래서 1-7이요. [1-7. (‘텅 빔’ 가운데에는) ‘고통’(苦)도 없고, ‘고통의 원인’(集)도 없고, ‘고통의 소멸’(滅, 열반)도 없고, ‘고통의 소멸의 방법’(道, 팔정도八正道)도 없다. (‘텅 빔’ 가운데에는) ‘지혜’(智)도 없고, 또한 ‘얻음’(得)도 없으니, ‘얻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이제는 사성제(四聖諦)를 부정합니다. 사성제 잘 아시죠. 고(苦) 집(集) 그다음요 멸(滅) 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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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것도요 왜 부정해야 될까요? 현상계는 고통이다. 고통의 원인입니다. 그 원인은 집착이 아닙니다. 모을 집(集)자라는 건요 무지랑 아집이 모여서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원인이 모여서 고통이 생겼다. 그걸 멸해버리면, 그 원인을 멸해버리면 니르바나입니다. 여기서 끝나요, 원래. 이게 니르바나예요. 도는요 도를 통해서 멸할 수 있다는 겁니다. 멸이 목적입니다, 팔정도만 잘 지키면. 도는 팔정도예요. 사성제 안에 팔정도는 들어있는 겁니다, 원래. 사성제나 팔정도는 같은 겁니다. 즉 그런데 대승은 어떤 입장일까요? 고통이 없다, 애초에. 고통이 청정하다. 번뇌가 보리다. 무지 아집이 본래 청정하다. 니르바나도 청정하다. 팔정도도 본래 공이다. 공이 작용한 거지 조금도 다른 게 없다는 겁니다. 공이 작용했는데 중생을, 남을 위한 그림이 그려지느냐? 나만 좋은 그림을 그려지느냐? 요 차이만 구분합니다. 즉 이쪽이면 이쪽으로 돌려라. 이게 보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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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료는 청정하다. 여러분 괴로우실 때요 괴로워 죽겠다는 그 마음을 보시고 깨어나 계시면 이 마음이 여러분을 괴롭히지 못합니다. 똑같은 괴로움인데 “이게 청정해.” 이게 본래 공이라는 걸 알고 보시면요 여러분한테 조금도 타격을 못 끼칩니다, 고가 본래 청정하다는 걸 아셨기 때문에. 이게 반야바라밀이에요. 소승은 안 그래요. 이 고(苦)랑 싸웁니다. 이 고가 일어날 때마다 내가 깨어나서 물리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위빠사나라는 게 그런 거예요. 끝없이 “너는 고야 너는 무상한 거야.” 계속 내려놔서 다시는 이 현상계에 내 몸을 안 섞어야, 절대계에 들어가야 끝납니다. 이게 아라한이에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고집멸도가 본래 없다. 이게 1-7절이고요. 그래서 결론이 납니다. 결론이 이거예요. 무상정등정각이라고 하지만 부처님이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다. 뭔가 지혜를 얻은 게 애초에 없다. 부처님은요 이걸 12연기랑 사성제 팔정도로 12연기라는 걸 깨달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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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이거 자체도 사실 텅 비어 있다. 뭔가 깨달았다는 것도 원래 공하다. 그렇게 되니까 1-8. [1-8. ‘보리살타’(보살)는 ‘반야바라밀다’(공성에 대한 지혜)에 의지하니 마음에 조금도 걸림이 없으며, 마음에 조금도 걸림이 없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으며, 본말이 뒤집힌 망상(전도망상顚倒夢想,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 무지ㆍ아집)에서 멀리 떠나서 ‘궁극의 열반’에 들어간다. 菩提薩埵 依般若波羅密多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故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얻은 것이 없기 때문에 뭔가 깨달았다고 할 게 없기 때문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에 의지한다. 이게 반야바라밀에서만 오거든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난 이 자체로 공하면요, 보세요, 여러분이요 미래를 생각하고 수행하시는 게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 깨어 계시면서 이 현상계랑 나를 둘로 보지 않고요 내 안에 있는 좋은 공덕인 육바라밀 펴시면 그게 다예요. 얻겠다는 생각도 하지 마시고 과거도 돌아보지 마시고 그렇게 살아가시는 겁니다. 천지가 그냥 그렇게 살아가듯이 성인도 그렇게 살아가요. 이게, 이분은 이미 열반에 드신 분이에요. 작용을 계속하고 있지만. 요게 대승의 제일 핵심 개념이에요. 진속불이(眞俗不二)랑 같이 핵심 개념이 이거죠. 무주열반(無住涅槃)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글로 쓸게요. 아까 소승의 열반은요 절대계에 들어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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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이라면, 무주열반은요 거기에 머무르지 않은 열반이에요. 현상계 속에 있으면서도 이미 열반이라는 걸 얘기합니다. 왜냐? 현상계 자체가 원래 텅 비어 있어 청정하니까. 그래서 그러므로 마음에 조금도 걸림이 없고 마음에 조금도 걸리는 게 없기 때문에 두려울 게 없고 본말이 뒤집힌, 전도망상(顚倒夢想)이라 그러죠, 본말이 뒤집힌 생각이 없다. 즉 본말이 뒤집혔다는 건요 참나를 놓치고 나와 에고에 집착하는 거, 에고와 내 것에 집착하는 겁니다. 여기서 멀리 떠나서 궁극의 열반에 든다. 이 궁극의 열반을 이걸로 보지 마시라는 거죠. 지금 12연기니 뭐니 모든 걸 부정한 그 자체가 청정하다는 열반이기 때문에 이 궁극의 열반이 무주열반이에요. 궁극의 무주열반에 든다. [1-9. 삼세의 여러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최고의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셨다.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故 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3세의 모든 부처들도 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해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이 진정한 무상정등각이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12연기 깨닫고 사성제 깨달은 게 정등정각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세죠. 제 얘기 아닙니다, 이거 제가 풀어드리는 거지. 오해하지 마세요. 산스크리트어의 ‘아눗타라 사미아크 삼보디’(anuttara-samyak-sambod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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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이제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縟多羅三貘三菩提)가 되죠. 이게 무상정등정각이고요. 자, 그런데 여기까지 하고 또 친절해요. 이렇게 말하면 혹시 모를까 봐 공부하시는 방편을 못 잡을까 봐 주문 하나 가르쳐주고 끝냅니다. [1-9.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이 가장 신령한 주문이며, 가장 광명한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최고의 주문이라는 것을 알라.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이게 불교들은 꼭 주문 하나 줘요. 이거라도 외우시라는 겁니다. 외우시다가 공을 깨달으시라고요. 반야바라밀 주(呪)가 제일 센데 가장 광명하고 가장 높고 무등등주(無等等呪)라는 게 우리나라 무등산이 있죠.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겁니다. 최고라는 거예요. 무등등주라는 건요 무등이랑 동등한 주문이라는 거는 최고의 주문이라는 겁니다. [1-10. 능히 일체의 고통ㆍ재앙을 제거하여, 진실하여 허망함이 없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니, 이제 주문을 설하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이다.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능히 일체 고통과 재앙을 다 벗을 수 있다. 사실은 반야바라밀을 해야 벗어나는데 이 주문 외다 보면 반야바라밀을 알 것이다. 이 정도로 보시면 돼요. 가르쳐줄게 하고 얘기하는 게 우리 잘 아시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 가떼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바하(가세! 가세! 깨달음으로 가세! 깨달음으로 모두들 가세! 깨달을 지어다!)
* ‘아제’(갈체褐諦, kate)는 “가세!”, ‘바라아제’는 “깨달음으로 가세!”, ‘상’은 ‘단체, 모두’, ‘보디’(Bodhi)는 ‘도道’나 ‘지혜’, ‘깨달음’, ‘사바하’(娑波訶, spaha)는 원만한 성취를 기원.]
이게 이제 원래 인도말로요 그거 아시면 좋은 게 한문을 읽어보세요. 원래 음대로 제가 읽어볼게요. 한문의 원음대로 우리 지금 아제아제가 사실 잘못돼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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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게 틀리다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읽으셔도 돼요. 근데 지금 한문이랑 원래 인도어랑 맞춰보면요 이렇게 음역을 달았던 사람들의 원래 의도는 알 수 있습니다. 보세요. 갈체갈체예요. 원래 갈(褐)자입니다. 이게 아 자가 아니고 “갈체갈체 파라갈체 파라승갈체(褐諦褐諦 波羅褐諦 波羅僧褐諦)”, 이게 이게 보리라고 치면요, “보리 사바하(菩提 娑婆訶)”입니다 . 지금 인도말이랑 같죠. “가떼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바하.” 이게 인도 말이거든요. 그래서 음역을 했는데 이상하게 아무튼 우리나라에 와서 아제아제 바라아제라고 읽게 됐습니다. 그냥 이것도 알아두세요. 이렇게 읽으셔도 돼요. 주문이 꼭 그 발음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근데 한문을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를 아시려면 원음을 읽어보시면 비슷하죠. 똑같죠. 이게 우리말로 또 가세예요. 갈체(褐諦)가 가세 가세입니다. 가세 가세. 파라(波羅)가 바라밀다입니다. 아까 그 바라밀이랑 똑같아요. 저 세계로 가세 예요.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이승 저승이 아니고요. 깨달음의 세계로 가세. 파라승갈체(波羅僧褐諦) 승(僧)은 무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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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승가를 얘기하니까 우리 모두 가세 그리 가세. 보리 사바하(菩提 娑婆訶) 깨달을지어다 사바하, 사바하는요 그렇게 되라는 겁니다.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겁니다. 보리 사바하. 깨달을지어다. 반야바라밀경까지 조금 5분만 더 하고 좀 쉴게요. 금강반야바라밀이 지금 제가 왜 이렇게 뒤에 조금이라도 붙여놨냐면 반야바라밀경이 많은 것 같지만 32품이 있는데 핵심은 되게 간단하고 반야심경이랑 똑같아요. 반야심경이 그걸 요약해 놓은 거니까요. 이해되시죠. 2-1 보면요. [2-1.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쪽 소매를 벗어 오른쪽 어깨에 메고 땅에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며 공경하게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희유하신 세존ㆍ여래께서 여러 보살들을 잘 보호하고 기억해주시고, 여러 보살들에게 잘 부촉해주십니다. 세존이시여, 선한 남자ㆍ선한 여인이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발보리심發菩提心), 응당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며 머물러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겠습니까?” 時長老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右膝著地 合掌恭敬而白佛言 希有世尊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2-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이거는 별 내용은 없는데 애초에 질문이 왜 이루어졌는가를 보시라고 제가 넣어놨습니다. 수보리입니다. 이때는 해공제일(解空第一)이에요. 옆에 보시면 그 위에 있죠. [* 수보리(須菩提, Subhuti, 선현善現)는 10대 제자 중 ‘해공제일解空第一’.] 해가 이해할 해(解)자입니다. 공을 제일 잘 이해한 제자였어요. 근데 그 그 제자 앉혀놓고 지금 대승의 공을 얘기하는 겁니다. 새로운 공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근데 여기서는요 그래도 석가모니가 가르치는 식으로 돼 있거든요. 그래서 이게요. 그래서 이게 대승경전 중에 제일 초기경인 걸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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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과 대승이 아직 분화되기 전의 작품으로 봐요. 확실하게, 그러니까 소승 내에서 뭔가 다른 이제 내용이 붙여질 때 그래서 왜냐하면 근데 대승이 아닌 건 아니에요. 대승 사상은 들어있어요. 그런데 이 경전 형식 자체가 좀 더 소승적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소승인들한테 더 맞게 만들어져 있어요. 전형적인 아함경 형식을 갖추고 있어요. 근데 실제 대승경은요 보세요. 대승경으로 가면요 석가모니 등장을 잘 안 시켜요. 유마경은 유마거사가 하는데 석가모니는 조연이고요. 화엄경은요 비로자나불이 와서 바로 가르쳐요. 그러니까 기존에 없던 부처들을 등장시켜서 설명을 해요. 이해되시죠. 왜냐하면 석가모니랑 다른 얘기를 해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석가모니를 등장시키기 미안하잖아요. 다른 부처들을 대거 등장시켜요. 능가경(楞伽經)인가 가면은요 나오는데 이진구불(離塵垢佛)이라는 전혀 어디서 모르는 부처가 나와서 스리랑카에서 강의한 게 능가경이에요. 이해되시죠. 전혀 다른 분들이 나와서 강의를 해요. 왜냐하면 석가모니를 갖다가 이제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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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건드리면서 풀려고요. 무량수경(無量壽經)은 아미타불이 와서 강의를 해버려요. 지장경(地藏經)은 지장보살이 강의를 해버리고 이게 확 달라지죠. 이게 대승의 이제 맛입니다. 근데 금강경은요 전형적인 석가모니 소승경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좀 초기 거다라고 보는 거고요. 수보리가 뭘 물어보냐면요. 세존 여래께서 여러 보살들을 잘 보호하고 기억해 주시고 잘 도와주시는데 우리가 무상정등정각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냈다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내 마음을 다스릴까요? 이걸 물어본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금강경이 펼쳐집니다. 보세요. 2-2 보면. [2-2. “그리고 수보리여, 보살은 응당 ‘법法’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른바 ‘색깔’(色)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 ‘개념’(法)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은당 이와 같이 ‘형상’(相)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왜 그런가? 만약 보살이 ‘형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행하면,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復次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應如是布施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4-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이제 다 이제 이해되실 거예요. 이제 이거 아시면요. 보세요.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법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해야 된다. 색수상행식에 걸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색깔, 내가 뭐 많이 줬네 뭘 줬네 남한테 어떤 기분으로 줬네 이런 걸 다 내려놓고 줄 수 있어야 된다. 청정하게 줘야 된다. 법에 걸리지 않는 보시를 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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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에 집착함이 없이 줘야 된다. 소리에 냄새에 맛에 촉감에 개념에 하나도 걸리지 않고 줘야 된다. 궁시렁대면서 주지 마라는 겁니다. 줘놓고 또 내가 줬다는 거, 상을 갖고 있지 마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 그렇게 형상에 집착 안 하고 줄 때 그게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무량 복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요 그냥 이렇게 우주가 공인 줄 알고 하는 보시가 최고라는 겁니다. 내가 남한테 많이 줬다고 하는 보시가 최고가 아니고요 반야바라밀을 하면서 주는 사람이 최고라는 겁니다. 반야바라밀을 강조하려고 한 겁니다. 2-3은요. [2-3.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대저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만약 ‘일체의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안다면 ‘여래’를 보게 될 것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則見如來 (5-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몸뚱이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볼 수 없습니다. 몸뚱이가 여래가 아닙니다.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왜냐하면요 몸뚱이는요 몸뚱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뚱이도 본래 텅 비었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몸뚱이에 집착한 사람은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즉 일체의 형상은 허망하니 이게 제일 유명한 금강경의 구절이죠.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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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모든 형상은 허망하니 그 형상이 형상이 아닌 줄 안다면 여래를 볼 것이다. 이 말은 뭘까요? 형상도 본래 청정하다는 걸 알면 여래를 본다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반야심경이랑 똑같아요. 보세요. 이제 실습 드릴게요. 이게 형상입니다.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처럼 한번 보세요. 어떻게 보셔야 됩니까? 이름 세우지 마시고 그냥 보세요. 이름도 잊어버리시고 보세요. 그럼 이게 형상입니까? 여러분과 밖에 있는 형상입니까? 여러분 마음 밖에 별도로 있는. 그게 망상입니다. 여러분 마음 밖에요 여기 별도로 있다는 게 망상이에요. 무지고 그게 아집이에요. 그것만 내려놓으시면요 여러분과 요건 아무 벽이 없어집니다. 전도망상을 내려놓고 반야바라밀로 보시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좀 느낌 오시죠. 이 느낌입니다. 이거 녹화해서 올릴 거니까요 또 보시고 또 보시고 하세요. 혹시 지금 잘 이해가 안 되시면. 자 이게 지금 금강경 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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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2-5 보면요. [2-5. “이 때문에 수보리여, 여러 보살ㆍ큰보살들은 응당 이와 같이 ‘청정심’을 내는 것이다. 응당 ‘색깔’(色)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응당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 ‘개념’(法)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응당 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是故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 (10-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수보리야 여러 보살들이 응당 이와 같이 청정심을 낸다. 어떻게 내냐면요 색깔에 집착 안 하고, 색깔에 집착해서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즉 소리 냄새 맛 촉감 개념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응당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야 된다. 이게 유명한 구절이죠.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조금도 이런 거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라 이 뜻입니다. 별거 아니죠. 번역해 놓으면 별거 아닙니다. 그냥 이런 데 집착하지 마라는 겁니다. 보세요. 고집멸도에 집착하지 마라. 12연기에 집착하지 마라. 오온에 집착하지 말고 텅 비어서 그게 모두 내 마음에서 지어진 거라고 보고 그 마음도 결국은 텅 비었다라고 보고 살아가시면요. 보세요. 우리 마음이 공이라는 건 바다를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오온들은요 파도예요. 바다가 파도를 미워할까요? 파도가 바닷물이랑 똑같은 재료인데요. 여러분 안에 떠오른 모든 생각 감정 오감, 심지어 보이는 요 모습, 추한 모습, 이쁜 모습 뭐든지 그 모든 게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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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안에 떠오른 파도라고 보시면요 둘이 아니에요. 여러분은 늘 바다로 존재하실 수만 있다면 그게 문제가 안 돼요. 근데 여러분이요 바다라고 생각을 안 하시면 문제가 돼요. 그 파도들이 다 충돌이 납니다. 바다라는 걸 아시는 게 여러분이 이름을 내려놓으시는 거예요. 그럼 공이 되시거든요. 그럼 안 싸워요. 그게 다 공이라는 걸 아세요. 안 어렵죠. 그래서 결론이 보세요. 2-6도 똑같죠, 반야심경이랑. [2-6.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최고의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신 것은 얻은 바가 없습니까?” (부처님)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나는 ‘최고의 올바른 깨달음’에 있어 아주 작은 법도 얻은 바가 없다. 그래서 ‘최고의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須菩提白佛言 世尊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爲無所得耶 如是如是 須菩提 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乃至無有少法可得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22-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그 무상정등각을 얻었다는 얻으신 바가 있습니까? 반야심경 읽으셨으면 알겠죠. 얻은 게 없다. 얻은 게 없기 때문에 무상정등각이다. 텅 비어 있는데 뭘 얻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마지막 2-8에요. [2-8.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꿈ㆍ환상ㆍ물거품ㆍ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다. 응당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32-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몽환포영(夢幻泡影)과 같다. 몽(夢)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응당 이처럼 보라. 이때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보세요. 환상이나 그림자라니까요 “현상계는 본래 없구나” 하면요. 또 여기에 집착합니다. “현상계는 별거 아니구나” 이게 아닙니다. 현상계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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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계라는 바다에 떠오른 파도와 같다는 겁니다. 즉 절대계에 완전히 의존해있는 한 덩어리라는 얘기를 합니다. 하나인데 작용만 그렇게 다르게 한다. 왜냐? 능가경이 바로 이 얘기를 합니다. [* 능가경 스리랑카에서 과거불인 이진구불離塵垢佛의 설법. 대혜여, 여러 ‘환상의 일’(幻事)은 망령된 미혹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환상’은 여러 과오와 악을 낳지 않는다. 여러 ‘환상의 일’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대저 ‘환상의 일’은 그 ‘밝은 주문’을 따라 일어나니, 스스로 분별하는 지나친 ‘습기의 힘’(習力)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환상의 일’은 과오와 악을 낳지 않는다. 대혜여, 망령된 미혹은 오직 어리석은 범부가 마음으로 집착한 것일 뿐 여러 성자는 그렇지 않다. 또한 대혜여, 모든 법法은 환상처럼 없는 것이 아니다. 서로 비슷한 부분이 있는 까닭에 “일체의 법이 환상과 같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대혜여 여러 환상이라고, 환상이라고 해서 그게 미혹한 게 아니다. 환상은 절대 악을 만들지 않는다. 환상은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환상은요 보십시오. 환상은 습기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이 환상은, 보세요, 모든 법은 환상처럼 없는 게 아니라 환상이랑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얘기고 그래서 환상과 같다고 할 뿐이다. 환상은요, 보세요, 마술사가 방금 예를 든 게요. 마술사가 어떤 홀로그램을 만들어내요. 마술사가요 어떤 이제 그 구슬 같은 거 있잖아요. 그걸 조작해서 이상한 그 영상을 만드는 경우가 있었나 봐요, 예전에는. 요즘 같으면 홀로그램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홀로그램을 쏘는, 레이저를 쏘는 기계가 있겠죠. 거기서 빛을 쏘는 거랑 홀로그램이 둘이 아니겠죠. 그래서 우리가 이걸 환상이라고 하는 거지 이게 없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절대계에서 쏘는 홀로그램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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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계가. 근데 그것도 그 자체로 이미 실존한다는 겁니다. 두 개가 똑같이 같이 있다는 겁니다. 환상이라고 하니까 혹시 이걸 없는 거라고 이해하실까 봐 능가경에서 절대 그런 거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즉 석가모니는요 절대계의 공을 갖고 계시면서 현상계에서 부처는요 환영으로써 색수상행식을 펼쳐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색깔도 만들어내고 자비도 만들어내고 오감도 만들 수 있어야 됩니다. 이해되시죠. 여기까지 마칠게요.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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