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2章 탕아(蕩兒)와 광인(狂人)이라는 패배자들 ① 쾌활야화루는 다섯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화려하며 신비로운 장소는 일컬어 극락전(極樂殿)이었다. 극락전에서 십야(十夜) 정도 머물고자 한다면 족히 삼천 냥은 써야 한다. 하되 극락전에 드는 자는 누구도 그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곳에 인간이, 특히 한 명의 남아 대장부가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이 머물러 있기에……! 반각 후. 목야성은 어느 대기실로 들어섰다. 발목까지 잠기는 황금빛 융단으로 가득 덮인 곳이다. 방 안의 집기는 대부분 자단목(紫檀木) 가구로 되어 있어 은은한 향기가 넘실거린다. 더욱이 방 귀퉁이에는 제단(祭壇) 비슷한 형태의 목탁(木卓)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 황금으로 만든 두꺼비 모양의 향로(香爐)가 놓여 있는 바, 향로에서 타오르는 향이 있다. 일컬어 용뇌향(龍腦香)이라는 향기는 자단목 향기와 더불어 더욱 후각을 강렬히 자극했다. 목야성을 대기실로 안내한 인물은 비취색 궁장을 걸친 십팔 세 정도의 미녀였다. 막 피어나는 장미 봉우리 같은 몸매가 다분히 육감적인 여인! 취록(翠綠)이라는 이름의 시녀! 그녀는 목야성이 방 안의 화려한 장식에 다분히 주눅이 들었으리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사실 목야성은 특별한 장신구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의 옷차림은 다분히 수수한 편이라 얼핏 본다면 궁벽하게 생활하는 서생쯤으로 보일 정도였다. '아마도 머리털 나고 이런 화려천지엔 처음이겠지?' 취록은 목야성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개성적인 용모로군. 상당히 잘생긴 얼굴이기는 하나, 주제넘게 냉정하군. 칫! 가진 게 하나도 없는 주제에 이런 데는 왜 온단 말인가?' 취록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리며 입술을 떼었다. "한상 나으리는 취침 중이십니다. 지난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도박을 하시느라 기상이 유난히 늦으신 거지요." "……!" 목야성은 취록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뒷짐을 지고 방 벽에 걸려 있는 송하와불도(松下臥佛圖)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건방지기는… 한상 나으리의 손님만 아니라면 혼쭐냈을 텐데…….' 취록은 볼멘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연락이 올 겁니다." "기다리라고? 후후… 그럴 시간이 없다. 가서 한상을 깨워라!" "누구도 그분의 늦잠을 깨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라면 깨울 수 있다." "아……?" "무조건 깨워라!" 목야성은 말하는 내내 뒷짐을 지고 수묵화(水墨 )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 곳에 출입하는 사람은 강호의 기라성 같은 거물들이다. 취록은 수없이 많은 공자대부들을 영접한 바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거만하고 독선적이다. 그러나 누구도 목야성처럼 거만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떠한 곳에서도 일각 이상은 기다리지 않아. 일각이라는 시간을 짧다고 여기고 낭비해 버리는 사람이 많지만, 그 시간 안에 천하대세가 바뀔 수도 있는 그런 긴 시간이기도 하지." "……!" 취록은 아연해하며 속으로 비웃음을 흘릴 뿐이다. '쥐뿔도 없는 낙척서생 주제에 천하의 거물 행세를 하기는…….' "그나저나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취록이 그렇게 말하고 신형을 틀 때였다. "심부름을 시켜 미안하군. 작은 것이긴 하지만 네게 주겠다." 목야성은 뒷짐 진 손을 풀어 품속으로 갖고 갔다. 최록이 의아해하며 빤히 볼 때, 목야성은 품안에서 봉황이 수놓아진 금낭(金囊) 하나를 꺼냈다. 목야성은 금낭을 열어 안에 든 돌 조각을 하나 꺼냈다. "가져라. 네 것이다." 목야성이 취록에게 건네는 것은 은은한 녹색(綠色)이 번뜩거리는 돌이었다. '이… 이것은……?' 취록은 신비한 돌 조각을 건네 받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그 때였다. "취록! 어서 큰절을 올려라. 네 손에 쥐어진 것은 묘안주(猫眼珠)라는 보배이다.그것을 판다면 네가 삼 년 내내 벌어 모을 수 있는 돈의 두 배 되는 은자를 한 번에 거머쥘 수 있다." 은방울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어 향기롭고 감미로운 사과 향기가 넘실거리며 다가들었다. 병풍 뒤쪽에서 나타나는 묘령의 은의미녀(銀衣美女)가 있다. 이제 나이 스물한두 살 정도 되었을까? 눈같이 흰 피부가 유독 고결해 보인다. 보통 창굴의 기녀들은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다분히 천박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은의미녀는 가히 대갓집의 처자 같은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잔설(殘雪)! 그녀는 쾌활야화루의 특급기녀였다. 그녀와 하룻밤을 지내고자 한다면 천 냥을 써야 한다. 놀라운 것은 천 냥을 낸다고 해서 무조건 잔설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잔설은 남자를 골라서 밤을 허락한다. 하기에 무수한 풍류남아들이 잔설을 노리고 있으나, 정작 잔설의 손목을 잡아 본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게 실상이다. '흐음, 한상이 여자 보는 눈은 있군.' 목야성은 잔설의 아름다움에 다분히 경탄했다. 그러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잔설은 잔설대로 자신을 보고도 무표정하기만 한 목야성에 대해 흠칫하는 눈치였다. '악양 일대의 청년거두에 대해선 모르는 게 하나도 없거늘… 이 자는 처음이다. 대체 누구이기에……?'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때 방 안에 쎄쎄(謝謝)하는 목소리가 거듭 들려 왔다. 묘안석이라는 말에 일대 감격한 취록이 연발하는 소리였다. ② 잔설은 목야성에게 앉기를 권했다. 쪼르르……! 이어 은으로 만든 술병을 기울여 은배 가득히 핏빛 술을 조심스럽게 따랐다. 술 향기는 방 안의 모든 향기를 단숨에 압도했다. "드십시오" "좋은 향기로군. 천울혈(天鬱血)의 향기. 일컬어 십일취(十日醉)라는……!" 목야성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잔을 쳐들었다. '대단한 식견이로군. 천울혈주(天鬱血酒)는 귀하디귀한 술도 한 잔 마셔 본 사람이 드문 판이거늘, 향기만 맡고 알아보다니……!' 잔설은 또다시 목야성의 식견에 경탄했다. 그녀는 눈길을 들어 눈앞의 사내를 자세히 살폈다. '용모로 따지자면 한상 공자만 못하다. 그런데 묘한 매력이 있다. 차갑고도 깊은… 오연(傲然)하고 냉정함으로 사람을 흥분케 하는 야릇한 매력이…….' 잔설이 거듭 감탄할 때였다. "프핫핫… 천하의 대고독아(大孤獨兒)가 이 음습한 벌레굴에 들어오시다니… 서쪽에서 해가 뜰 일이로다. 프핫핫핫……!" 돌연 맑고 힘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어 성큼성큼 걸어 방 안으로 접어드는 자가 하나 있다. 전신을 자줏빛 도는 장포로 휘어 감고 있는 자!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었고, 황금빛 나는 머리끈으로 긴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매고 있는 모습이 우아하고 화려해 보이는 자였다. 그의 살결은 벽안백인(碧眼白人)의 그것 마냥 희었다. 더욱이 지난밤 마신 술기운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탓에 뺨에 홍조가 떠오르고 있다. 우뚝하고 날카롭게 선 콧날, 피를 바른 듯 짙붉고 아름다운 입매, 봉목(鳳目)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초롱초롱한 눈매……. 만약에 그가 여인의 옷을 걸친다면 일세기녀인 잔설보다 훨씬 아름다운 또 한 명의 미녀를 보게 될 것이다. 전신 가득히 퇴폐와 관능을 흩뿌리는 자! 그는 목야성이 잔을 쳐드는 것을 바라보며 다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프핫핫… 세상이 거꾸로 도는군. 천하에서 가장 고독하고 청결하신 목 나으리께서 창굴에 오시어 강호제일의 음마(淫魔)를 기다리시다니… 프핫핫… 실로 황송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로다. 끄윽!" 그는 아직 취기가 사라지지 않은 듯 트림을 해 댄다. 늘씬하게 빠진 육(六) 척(尺) 사(四) 촌(寸))의 체구, 송옥(宋玉)을 능가하는 완벽한 용모. 그는 가히 강호제일의 미남자라고 불리어 부끄럽지 않은 그러한 자였다. 바로 그 사내가 문제의 인물, 한상이라는 자였다. 한상은 휘청거리며 다가서다 다짜고짜 잔설의 목덜미를 팔로 휘어 감았다. "잔설, 오늘따라 네 입술이 유독 붉구나." 그는 짐승처럼 거칠게 말하며 제 입술로 잔설의 도톰한 입술을 찍어 눌렀다. "으음……!" 갑자기 당한 일에 잔설은 사지를 발버둥쳤다. 그렇다고 해서 한상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한상은 잔설의 달콤한 입술에 거친 이빨 자국을 남긴 다음에야 얼굴을 떼어 냈다. "네 입술은 달게 익은 포도다. 후후… 너에겐 두 개의 과일이 있지. 하나는 입술의 포도, 또 하나는 가슴의 복숭아. 자, 포도 맛을 보았으니 이제는 복숭아 맛을 볼까." 한상은 다짜고짜 오른손을 잔설의 옷섶 사이에 찔러 넣었다. "부… 부끄럽습니다." 잔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한상의 손은 이미 잔설의 풍만한 가슴에 닿았다. 한상은 희고 매끄러운 젖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세게 주물럭거리면서 목야성을 바라봤다. 아예 눈앞의 목야성은 상관없다는 행동이었다. "크크… 보기 역겹겠지만 이해하슈, 가주 어르신네. 이 한상이라는 놈은 본래 여자를 앞에 두고 점잖을 빼지 못하는 탕아인지라……!" 한상의 손놀림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 바람에 잔설의 오른쪽 젖가슴이 툭 옷 밖으로 비어져 나오고 말았다. 희고 풍만한 젖가슴이 황촉의 불빛에 더욱 희게 번들거린다. "하아……!" 짧은 순간의 애무였다. 하되 잔설은 성적(性的)인 극치를 느끼는지 눈까풀을 파르르 떨며 가쁜 비음을 토해 냈다. 한상은 지저분한 작태를 보임으로 목야성의 비위를 건드릴 작정인 듯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목야성은 묵묵히 술을 음미할 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젠장! 거만하기는……!' 목야성과 한상! 두 사람 사이는 지극히 특이한 주종관계(主從關係)라고 할 수 있다. 목야성은 한상을 가신(家臣)으로 거느리기 위해 이제까지 팔십만 냥에 가까운 거금을 지불했다. 하되 그가 한상에게 시킨 일은 단 하나도 없다. 그는 과거 강호일쾌(江湖一快)로 불린 바 있다. 그의 나이 이제 이십구 세(歲). 그는 이십대 초반만 하더라도 십(十) 초(招) 대적할 상대를 만나지 못해 고독히 유랑해야만 했던 풍운의 승부사(勝負師)였다. 그러나 그의 사문(師門)과 가문(家門)이 마도방파에 의해 무참히 붕괴되었을 때, 한상은 복수를 택하기보다도 피를 택했다. 그 날 이후 그는 무림사에서 철저히 매장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술과 여자가 없이는 하루도 보내지 못하는 희대의 탕아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으음, 나으리! 이런 경우라는 것은……." 잔설의 숨소리가 더욱 가빠진다. 몸짓은 다분히 저항적이다. 하되 그녀는 보다 격렬하고 자극적인 애무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정신은 타인의 이목을 의식하되 육체는 뜨거워지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랄까? "후후… 자고로 계집이란 정신적으로 다스려선 소용이 없소. 계집이란 육체로서 길들여야 하는 것이오." 한상은 킥킥거리며 잔설을 바짝 끌어안았다. 그 사이 목야성은 한 잔의 술을 더 비웠다. 연후 비단 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고 몸을 일으켰다. "한상, 난 그만 가겠다." 목야성은 무표정히 말한 다음에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문고리를 막 잡을 때였다. 한상은 잔설을 방바닥에 쓰러뜨리며 크게 소리쳤다. "가시는 건 좋은데 은자나 꺼내 놓고 가시오." "……." "크크… 가진 돈이 다 떨어졌소. 잔설에게 화대 한 번 못 주고 도리어 돈을 받고 있으니, 사내 체면이 말이 아니라서!" "용돈이 필요하느냐, 한상?" 목야성은 나직이 말한 다음 손을 품에 넣었다. 그는 전표(錢票) 열 장을 꺼내 공탁 위에 올려놓은 후 문을 열었다. 전표는 각 천(千) 냥(兩) 액면짜리이다. 그렇다면 목야성이 꺼내 놓은 전표는 도합 일만 냥짜리 전표가 된다. 그것뿐이었다. 목야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고, 한상은 잔설의 육체 속으로 탐닉해 들어가기를 계속했다. 이윽고 뜨거운 이물질이 몸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을 때, 잔설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며 물었다. "아흑! 누… 누구인지요?" "빌어먹을! 내 영혼 줄을 움켜쥐고 있는 자다." "영혼 줄이오?" "오만한 놈! 나이답지 않게 그릇이 너무 커. 그리고 너무 건방져! 감히 나 한상을 칠 년 내내 감동시키다니! 크크… 천하가 날 비웃고 포기하거늘, 어이해 네놈이 날 안다고… 내 검이 녹슬지 않았다고 여긴단 말이냐?" 오늘따라 한상은 유독 격렬했다. 하기에 잔설은 세 번씩이나 혼절 직전 상태로 자지러져야만 했다. ③ 부용방(芙蓉房)! 그 곳은 이름과는 달리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부패가 넘실거리는 곳이다. 부용방은 악양에서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었다. 부용방에 기거하고 있는 자들은 대략 오백여 명 정도인데, 하나같이 옷차림이 지저분하고 눈빛이 흐리다. 더욱이 피부빛이 밀랍처럼 창백하거니와, 검고 푸른 반점(半點)이 번져 있어 보기에도 흉칙스럽다. 대거(大巨)! 그는 칠 년이 넘게 부용방에 머물러 있다. 그는 태생이 꼽추인데다가 지극히 볼품없는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초라한 몰골을 하고 아부고(阿芙膏)를 뻐끔뻐끔 빨아 대며 누워 있었다. 그의 초점 없는 시선은 방 천장에 쳐진 거미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한 대거의 모습은 폐인 중에서도 으뜸갈 만한 그러한 모습이다. 그는 목야성이 바로 앞에 와서 빤히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 멍한 표정에 멍한 눈빛이다. 이제 나이 삼십대 초반에 불과하거늘, 머리는 이미 반백(半白)이었다. 또한 눈에서 진물까지 흘러내린다. 걸치고 있는 옷은 누더기이고, 이가 스물스물 기어 다니는 데에도 가려운 줄을 모르는 듯 잡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마약(痲藥) 중독자(中毒者)의 모습! 이 세상에 하등의 쓸모가 없는 폐인이며, 현실 도피자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목야성은 일각 정도 대거 앞에 서 있었다. 대거는 그 동안 그에게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아부고의 독한 환각 기운에 취해 있는 자. 그는 생을 백일몽(白日夢)으로 띄워 보낸 지 어언 칠 년째였다. 당시 그는 천하일뇌(天下一腦)로 불리는 강호신동(江湖神童)이었으며, 학림(學林)의 대아성이던 귀곡(鬼谷)의 수제자였다. 귀곡은 녹림여마궁(綠林女魔宮)인 옥환야차궁(玉幻夜叉宮)과의 오랜 갈등 가운데 삼천 명의 강호고수에게 포위되는 위기에 처해졌다. 귀곡 문하 칠십사유(七十四儒)는 하나같이 서서 죽기를 각오하고 기문둔갑진세(奇門遁甲陣勢) 안에 머물렀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단 한 사람만은 달랐다. 그는 비굴하게 기어 나갔다. 옥환야차궁주에게 스물아홉 번 절을 하고, 백 장을 개처럼 엉금엉금 기어 일천 무사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나가는 항복의 표시를 한 이후에야 지렁이보다 못한 목숨을 구원받았다. 귀곡은 그 날 강호사에서 사라졌다. 그를 제외한 모든 유사(儒士)들이 독공(毒功)에 당해 초개처럼 쓰러졌다. 그는 너무나도 비굴하게 살아남았기에, 강호인들은 그를 천하제일비(天下第一卑)라 부르며 철저히 조롱했다. 그 날 이후, 그는 하루라도 마약이 없이는 지내지 못하는 그러한 폐인이 되고 말았다. 천뇌서생(天腦書生) 진대거(陳大巨)! 그는 그러한 자였다. 누구도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백도계 협사는 당장에 철검을 뽑아 그의 심장에 구멍을 만들려 할 것이다. '대거, 저 흐릿한 눈동자 뒤에는 내가 암기하고 있는 만 권의 서적을 능가하는 방대한 지식이 감추어져 있다.' 목야성은 대거와 만난 그 날을 기억했다. 그는 아편(阿片)을 야매하는 가게 앞에서 가게 점원에게 매를 맞고 있었다. 당시 목야성이 그를 위해 많은 돈을 쓰고 수하로 거두어들인 이유는 하나뿐, 천뇌서생 진대거가 맞으면 맞을수록 웃음을 헤프게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 웃음은 목야성의 가슴 깊은 곳을 묘하게 자극했다.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여하튼 그 날 이후 대거는 한상과 마찬가지로 매달 은자 삼천 냥씩을 지불받았다. 그 돈으로 그가 한 일은 마약을 사는 일에 불과했다. 무릇 마약에 빠지는 자라면 마약의 양이 점차적으로 증가하기 마련이다. 이제 진대거는 보통 사람이 열흘 사용하는 분량을 단 한 번에 사용하고도 부족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눈빛이 아예 먹장구름과 같은 암울함에 젖어 있는 것이다. 몽롱한 아부고 향연이 흐르는 관제묘(關帝廟) 안. 목야성은 먼 하늘에서 작렬하는 폭죽 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벌렸다. "대거, 돈은 모자라지 않는가?" "……!" 진대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목야성은 그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은 바 없다. 그는 실어증(失語症)에 걸리기라도 한 양 칠 년 내내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목야성은 대거의 백치 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어쩌면 난 투자에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한상은 천하의 탕아에 지나지 않고, 대거는 아편쟁이에 불과할지도… 하되 난 아직도 한상은 강호제일의 쾌검사(快劍士)이고, 대거는 천하제일의 병법가(兵法家)라고 믿고 있으니…….' 문득 목야성은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받아 오르는 묘한 불신감에 휘말렸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특유의 도량으로 강하게 억눌렀다. 인간을 의심하기는 쉽다. 모든 인간은 인간을 의심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되 진심으로 한 인간을 믿기는 힘든 일이다. 목야성의 뛰어남은 거기에 있다. "대거, 난 이제 돌아가야 한다. 상인에게 있어 일각이라는 시간은 지극히 소중한 시간이지. 돈은 낭비할 수 있어도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목야성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어스름히 부서져 내리는 잔월의 흰빛 속으로 천천히 접어들었다. 대거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직후이다. 번쩍-! 홀연 비 쏟아지기 직전의 하늘처럼 암울히 가라앉아 있던 대거의 눈에서 기광(奇光)이 뿜어진다. "……!" 저녁 하늘 제일 먼저 떠오르는 천랑성(天狼星)의 빛이 이러할까? 그것은 일개 아편쟁이가 도저히 지을 수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귀곡이 불타던 그 날, 맹세를 했었다. 이십 년 간은 백치(白痴)로 살겠노라고… 그런데 저 냉막한 소년거상(少年巨商)으로 인해 나의 맹세가 깨어지게 될지도…….' 기광은 착각과도 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어 대거의 눈빛은 다시 흐려졌다. 그는 또다시 아부고 향연에 빠져들었다. 과거 장주(莊周)가 꿈을 꾼 바 있다. 꿈 속에서 그는 나비가 되어 군화(群花) 위를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는 꿈에서 깨어나다시피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의 꿈을 꾸는 것인지(胡蝶夢)……. 달빛이 흥건하다. 모든 애잔한 달빛에 파묻힌다. 이 밤, 달빛에서 탈출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④ 구구 중양의 밤이다. 중양절(重陽節)은 청명절(淸明節 : 사월 오 일경), 한식절(寒食節)이나 원소절(原宵節 : 음력 일월 십사 일)에 버금가는 대명절이다. 중양절에는 오래된 전통 예식이 있다. 높은 산(山)에 올라 고향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의식! 그러한 의식을 일컬어 등고(登高)라 한다. 펑- 퍼퍼퍼펑-! 폭죽(爆竹)이 허공에서 요란히 터지고 있다. 폭죽은 높이 떠오르지 못하고 야트막한 하늘 가장자리에서 작렬하며 불씨를 떨어뜨린다. 유시(酉時) 말(末). 목야성은 고독하고 조용한 서재에서 어쩔 수 없이 끌려 나와야만 했다. 그것은 연회(宴會) 때문이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수륙대상행의 총표파자 대리가 아니던가?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 년 후, 그는 명실상부한 수륙대상행의 총표파자가 된다. 그 지위는 그의 부친이 이십사 년 간 누렸던 지위이기도 하다. 목야성은 사해팔황에서 모여든 대장로들과 더불어 연회석상의 술잔을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목비룡의 병세가 극심한 상태인지라 화려하고 성대한 연회는 금지되고 있다. 오늘의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같이 가공할 부(富)를 가지고 있다는 것. 산동(山東) 제남부(濟南府)의 금우공(金愚公)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제남의 우공표행(愚公 行)에 머물고 있는 바, 산동 일대의 모든 은장표행(銀莊 行)이 그에게 장악되어 있다. 산동 일원에서 상행위(商行爲)를 하고자 한다면 그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 그의 부는 측량하기 힘들 지경으로 금우공 자신도 자신의 금은자가 얼마 정도인가 알지 못한다고 했던가? 쥐눈처럼 반짝거리는 오 척 단구를 지닌 인물! 금포노인 금우공은 구장로(九長老) 중 아홉 번째이다. 요지금부(瑤池禁府)의 요지선모(瑤池仙母)! 그녀는 천잠사의(天蠶絲衣)를 걸치고 있기에 멀리서 보더라도 흰빛이 서기처럼 신비롭게 떠오른다. 천잠사의는 천오백만 냥의 거금을 소유하고 있는 요지선모가 부리는 유일한 사치이다. 그녀는 늘 적족(赤足 : 맨발)이고 죽장(竹杖)에 노구를 의지한 채 채소밭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철저한 채식주의자인 요지선랑인지라 하루의 식사값으로 드는 돈은 구리돈 오(五) 문(文) 어치나 될까? 초라하고 옹색한 노파에 불과한 요지선랑. 그녀는 남칠성(南七省)의 이백여 거대한 약재상(藥材商)의 연합체인 천첩약맹(千帖藥盟)의 맹주였다. 그리고 그녀는 삼십사 년 전에 수륙구장로 가운데 서열 팔(八) 위(位)로 입적한 바 있다. 그녀가 제팔장로로 들어온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천하의상 목비룡을 존경하기 때문! 또 하나는 수륙대상행과 적이 될 경우 자신이 이룩한 거대 기업이 하루 아침에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제칠장로는 궁선(窮仙)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요지선랑보다도 옹색한 차림을 하고 있는 인물로서, 이제까지 지붕이 달린 집을 가져 본 바 없다. 그는 늘 처마 밑이나 나무 밑에서 산다. 그가 지니고 있는 보물이라면 육십 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썩은 거적 한 장에 불과하였다. 하되 그는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조직망을 자랑한다는 궁가방(窮家 )의 팔결제자(八結弟子)였고, 만천하 포목상(布木商) 가운데 칠 할은 그의 통제하에 운영되고 있다. 그와 목비룡의 관계는 실로 밀접하여, 과거 목비룡의 청년 시절 목비룡은 강호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궁선 휘하에서 삼 년 간 생활한 바 있을 정도라 했다. 그는 목야성이 담담히 앉아 있는 것을 보며 다분히 실망한 눈빛을 흘렸다. 어디 그뿐이랴? 거의 모든 사람이 목야성에 대해 다분히 실망하고 있다.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고 하던데, 그게 아니던가?' '아, 저런 약골이 어찌 천하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총표파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을까? 자고로 거상은 배포로 인간과 돈을 경영해야 하거늘, 나약하기 이를 데 없으니…….' 그러한 생각은 궁선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관북목장주(關北牧場主) 북풍천마(北風天馬)! 제육장로의 지위에 올라 있는 그만 하더라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장로의 지위에 오른 것은 목비룡의 인품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목비룡은 자상한 미소와 해박한 견해, 그리고 자신의 이권보다 타인의 이권을 더 생각해 주는 대인의 기질로 북풍천마를 사로잡았다. 하기에 관북제일의 대영호인 북풍천마는 흔쾌히 수륙대상행의 구대장로 가운데 육장로가 되기를 자청했던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목야성을 바라보다 내심 실망의 끌탕을 했다. '끌끌끌… 어쩌면 이제 수륙대상행과 연을 끊을 때가 되었을지도…….' 육지거룡(陸地巨龍) 뇌국주(雷國柱)! 소소전옹(笑笑錢翁) 상관장청(上官長靑)! 산서(山西)의 재신(財神) 소리를 듣는 파의취상(破衣醉商) 추건천(秋乾天)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늘 목야성을 관찰하고 있는 제이장로인 신산수라(神算首羅)는 장로들의 그러한 속마음을 읽고 우려하는 표정이었다. '아, 내가 알기에 소가주의 천품은 중원제일이라 할 수 있다. 소가주는 가히 불세출한 대영웅이 될 만한 근골천품(筋骨天品)이고, 뛰어난 지혜를 지니고 있거늘… 너무나도 병약무인하게 자라왔기에 그만 사도(邪道)에 빠지고 말았다.' 신산수라는 입 안이 마르는지 자꾸 술을 마셨다. '어쩌면 천하구상의 연합체는 소가주의 무능함으로 인해 파국을 맞이하게 될지도…….'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목야성을 바라보았다. 목야성의 표정은 냉막하고 오만했다. 그는 맨 상석(上席)에 비스듬히 앉아 어딘가를 오시하고 있다.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대전의 창 밖이었다. 창 밖의 하늘이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다분히 오만하고 건방지기에 모든 사람들은 눈길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 모든 사람들이 대화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다분히 어색한 분위기! 아직 연회는 정식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이유는 태대장로(太大長老)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해(四海)의 해상상권(海上商權)을 거머쥐고 있는 인물이다. 과거 그는 육지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목비룡과 더불어 십 년 간 상쟁(商爭)을 한 바가 있었다. 그 싸움은 백만 대군끼리의 싸움보다 처절했다. 대해왕(大海王)이라 불리우는 사해용왕(四海龍王) 금무외(金武畏)! 최후의 일전마저 다 투입하여 수륙대상행을 제압코자 했다. 그러나 그가 어찌 목비룡의 부를 꺾을 수 있으랴? 사해용왕의 이천만 냥 재산은 공중분해의 위기에 몰렸다. 당시 그는 칠백만 냥으로 결제를 해야만 했으며, 그가 갖고 있는 자금은 채 오십만 냥도 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상인에게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신용을 깡그리 상실할 수밖에 없는 그런 위기에 몰린 것이다. 그 때 그에게 증서 한 장 없이 거금 칠백만 냥을 대부해 준 자가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 사해용왕과 상쟁을 벌였던 목비룡이었다. - 대체 무엇을 믿고 나에게 거금을 빌려 주는 것이오? 나는 그대와 상쟁을 하느라 파산 직전이거늘? 아무 말 없이 일단 쓰시오. 진 쪽이 나였다면 아마도 금 대인께서 나에게 거금을 빌려 주었을 것이오. 난 운이 좋아 이겼을 뿐이외다. 아다시피 상인의 세계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게 아니겠소? 목비룡은 특유의 미소 가운데 그렇게 말했다. 고집불통에 독선적이기 역시 천하제일이던 금무외는 인생 최초로 세상에 자기보다 배포가 두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보름 후 수륙대상행의 태대장로로 들어왔고, 그 날부터 수륙대상행은 하나의 제국만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금무외가 지니고 있는 부는 측량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다. 그는 재기에 성공하였고, 일취월장 성장하기를 거듭했다. 그는 매달 은자 백만 냥을 악양에 보낸다. 하되 그것은 그가 취득하는 이익의 십분지일도 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부는 이미 목가의 부를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연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금무외가 당도하지 않은 탓이었다. 사실 구장로가 한꺼번에 모인다는 것은 실로 희귀한 일이다. 구장로는 목가(牧家)를 중심으로 모이기는 하였으되, 각자 경쟁자 사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그러한 처지이다. 만에 하나, 수륙대상행의 비밀 결사가 와해된다면 그들 아홉은 즉시 적이 될 것이다. 더불어 상대의 기업을 허물어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하게 되리라. 그게 바로 상인(商人)의 세계이다. 화상(華商)! 그들은 중원의 어떠한 집단보다 집요하고 가공하다. 사실 대륙을 진실로 움직이는 자들은 상인들이라 할 수 있다. 상인의 세력이 방대해질 경우에는 왕조(王朝)마저 움직인다. 역대 제왕들이 영토를 넓히기 위해 만리장벌을 단행하는 배후에는 상인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기 십상이다. 신산수라는 태대장로를 제외한 여덟의 장로를 흘낏 둘러본다. '여기 모인 아홉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총표파자가 되지 못하오, 소가주!' 신산수라는 또 목이 타는 듯 한 잔 술을 비운다. 그는 장로들 가운데 목야성에 대한 총애가 가장 큰 사람이다. 그는 목야성이 냉막하고 오만한 표정 가운데 창 밖만 바라보기보다는, 노장로들에게 공손한 인사말을 하며 친교(親交)를 돈독히 하기를 바랬다. 하되 목야성은 안하무인,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다. '어찌하여 저렇듯 철부지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신산수라는 다른 거상들을 힐끗 살폈다. 초라한 옷차림을 한 사람도 있고, 제왕보다 화려한 차림을 한 사람도 있다. 묘한 것은 모든 사람이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웃음이라는 것! 그렇다. 여기 모인 사람은 거의 다 웃음으로 진솔한 표정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상인이란 흑백도(黑白道)를 가리지 않는 집단이다. 상인은 의(義)를 추구하지 않고 이(利)를 추구한다. 목비룡이 추앙받는 이유는 의를 추구하면서도 천하제일의 거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거상의 특징은 소리장도(笑裏藏刀), 다시 말해서 웃음 뒤에 예리한 칼날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야성은 그들 앞에 표정을 감추어야 함에도 이 연회가 귀찮고 지겹다는 표정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스스로 상도종사(商道宗師)가 되고자 야망을 품고 있다. 총표파자에게 허점이 생긴다면 즉시 마각을 드러내어 수륙대상행에 위해를 가한다. 소가주가 그걸 아셔야 하는데…….' 띠잉- 딩-! 연회석장에는 가냘픈 칠현금(七絃琴)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십장생(十長生)이 수놓아진 크고 넓은 병풍(屛風)이 서 있고, 그 뒤에 두 명의 귀머거리 악사(樂士)가 칠현금과 옥소(玉簫)를 불고 있는 모습이 있다. 일부러 귀머거리 악사를 선택한 이유는, 연회석장에서 어떠한 대화가 오가든 기밀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여하튼 주흥(酒興)이 무르익는다. 도합 아홉 명이 이 안에 있다.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내일 새벽부터 천하상권이 달라지고, 자금의 이동에 변화가 생긴다. 이들이 백도(白道)를 택한다면 백도는 즉시 번창하게 된다. 또한 이들이 백도를 포기한다면, 백도는 자금 부족으로 허덕일 수밖에 없으며 천하대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대역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들이 흑도를 선택한다면, 그 때부터 모든 강호사(江湖史)는 다시 작성될 수밖에 없으리라. 자시(子時) 즈음. 목야성은 노년들과의 연회가 지겨운 듯 아무 말 없이 자음자작하다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덟 명의 노장로는 목야성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자못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목야성은 좌중을 둘러보며 빙그레 웃었다. "고명하신 장로 분들과 더불어 연회를 개최하게 되어 무상의 영광이외다." "……." "……." 목야성이 이어서 어떤 말을 할지 모두 궁금하다는 표정들이었다. 촤르륵-! 목야성은 화려한 황금색 섭선(攝扇)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는 입술을 떼었다. "아무래도 흥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 듯해 한 가지 준비를 했소이다." 실로 냉오한 목소리! 연회석의 의자를 점령하고 있는 각 사람들은 일주(一州)를 지배하고 있는 상계의 거물들이다. 그러나 목야성은 그들에 대해 존모지념(尊慕之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표면화하지 않았다. 그가 손을 쳐들며 섭선을 활짝 펼쳤다. 촤륵-! 부채가 활짝 펼치어지며 부채 표면에 그려진 그림이 선명히 드러났다. 일컬어 설중한매도(雪中寒梅圖)가 그것이다. 그 직후이다. 그르릉- 그릉-! 가벼운 기관음(機關音)과 함께 이제껏 벽이었던 동쪽 석벽이 쩌억 갈라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깊은 공간(空間)이 보이는 바, 공간에서부터 한 무리의 인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숫자는 대략 삼십육(三十六) 인(人) 정도나 될까? 십팔(十八) 남(男) 십팔(十八) 녀(女), 열여덟 명은 동자(童子)이고 열여덟 명은 미희(美姬)였다. 동자들은 남색과 자색, 그리고 은색의 화려한 옷을 걸쳤다. 미희들은 그보다 훨씬 호화찬란한 일곱 가지 빛깔의 칠채무복(七彩舞服)을 걸쳤다. 동자들은 바구니 가득 금전 은자를 담아 갖고 들어서며 연회석 바닥에 금전과 은자를 흩뿌렸다. 무녀들은 커다란 꽃바구니를 가슴에 담고 들어오며 교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꽃을 한 줌씩 쥐어 허공에 산화(散花)시킨다. 촤라라랑- 화르르-! 비처럼 퍼부어지는 꽃(花), 우박처럼 뿌려지는 금은자……. 은근하고 고아하던 흥취는 일거에 깨어지고, 대신 화려하고 번잡한 흥취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띵- 디디디- 띵-! 벽 위에서 나타난 공간에서는 여러가지 악기의 신명나는 고조가 격한 파도가 되어 들려 왔다. 금은자를 던지던 동자들은 품안에서 칠채의 천을 꺼내어 빙글빙글 돌리면서 곡예를 시작했다. "으음……!" "어처구니없군." 노장로들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표정이 되어 목야성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노여운 표정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이렇듯 천박한 가무(歌舞)가 아니었다. 이들은 천하대세에 대해 진지한 토의를 하고자 불원천리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하되 목야성은 그들의 눈빛에 실린 진의(眞意)를 아는지 모르는지, 건방지고 우쭐한 표정을 거듭 지을 뿐이다. 이어 그는 다시 한 번 부채를 펼쳤다가 접었다. 촤륵-! 또다시 부채 표면의 한매가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였다. 휙- 휘익-! 열여덟 명의 무녀(舞女)들은 빙 둘러 산화군무(散花群舞)를 추어 대다가는 갑자기 꽃바구니를 공중에 집어던졌다. 바구니 가득한 꽃은 황국(黃菊)이었다. 바구니가 던져지며 누런 국화꽃이 폭우처럼 퍼부어져 연회석 모든 자리를 뒤덮기 시작했다. 직후 무녀들은 같은 곡조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더욱 경쾌하고 원활한 동작으로 춤사위를 거듭했다. 너울너울……! 무녀들의 춤사위는 무속적(巫俗的)인 춤이고, 실로 관능적(官能的)인 춤이다. 무녀들은 몸을 급회전시키는 가운데 상의(上衣)를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그 덕에 무녀들이 속옷으로 걸치고 있는 희디흰 나삼(羅衫)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얇은 나삼은 속살을 모조리 감추기에는 부족했다. 안력이 예리한 자라면 희디흰 나삼 뒤에서 도발의 순간을 노리고 발돋움하고 있는 풍만한 육봉(肉峰)의 울렁거림을 낱낱이 볼 수 있으리라. 아니 이 곳에 모인 자치고 고수 아닌 자는 거의 없다. 비록 상인들일 망정 일신을 지킬 한 가닥의 절예는 모두 지닌 자들! 하기에 그들은 무녀들의 옷자락 너머 육봉이 출렁대는 모습을 모두 확연히 볼 수 있었다. 절로 낯이 뜨거워지는 장면이었다. 삘릴리……! 급박해지는 피리 소리. "흐응… 흐으……!" 관능의 극치를 돌파하는 콧노래의 합창(合唱)들. 계속 퍼부어지는 황국의 빗줄기……. 그런 가운데 목야성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핫핫… 일컬어 야차초혼무(夜叉招魂舞)이외다. 본시 무녀들은 실오라기 하나 남김없이 옷을 벗어야 하지요. 그리고 동남(童男)들과 더불어 교접(交接)을 해야 하오나, 점잖으신 장로들께서 그런 장면까지 보기를 바라지 않으실 듯해 생략했소이다. 그건 몹시 서운한 일입니다만… 하하하핫……!" 목야성의 방약무도한 웃음소리! 그것은 모든 사람의 이마에 내 천(川)자 주름살을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늘이 무심하군. 수륙대상행에 저런 말종을 내리시다니……!' 강호거상들이 진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할 때였다. 돌연 또 한 줄기의 창노한 음성이 들려 왔다. "프핫핫핫… 기왕 춤을 시작한 이상, 모조리 벗기라구. 하여간 오늘의 연회가 이토록 흥미진진한 것인 줄 알았더라면 지각하지 않고 진작 당도하는 것을……!" 이어 연회장으로 선뜻 접어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얼핏 보면 십 세 소년(少年)이었다. 키를 아무리 크게 봐줘도 사(四) 척(尺) 오(五) 촌(寸)쯤이나 되어 보인다. 백발(白髮)이기는 하되 완연한 동안(童顔)을 지닌 자! 특징이라면 전신이 금모(金毛)로 가득 뒤덮여 있다는 것이랄까? 사 척 단신에 사해를 장악한 부도상옹(不到商翁)! 그는 수없이 많은 상쟁 가운데 쓰러지기를 거듭했다. 하되 그는 쓰러질 때마다 일어났고, 쓰러지기 전보다 더욱 거대한 일을 해냈다. 하기에 그는 나이 칠십사 세에 이른 오늘에 이르러 목가의 부를 오히려 능가하는 거대무비한 부를 이룩하고 해중천자(海中天子)로 발돋음할 수 있었다. 사해용왕(四海龍王) 금무외! 그렇다. 수륙대상행의 태대장로인 그가 칠 년(年) 만에 처음으로 공식 연회석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목야성도 그와는 초면(初面)이었다. 그 역시 또한 목야성을 본 바 오늘이 두 번째이다. 첫 번째 보았을 때, 목야성은 갓 돌을 맞이한 갓난아이에 불과했다. 하기에 목야성으로서는 금무외를 기억할 수 없다. '저 자가 대해를 장악한 자인가? 그리고 저 난쟁이의 재산만은 나의 가문의 재산으로도 간과하지 못할 진정한 거부인가?' 목야성이 이리저리 금무외를 살필 때였다. 금무외는 다른 장로들과 달리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무녀들을 향해 금 하나를 던졌다. "프하핫… 정말 잘 추는구나, 잘 추어! 그 대가로 내 이걸 너희들에게 주마!" 휙-! 금무외는 무녀들을 향해 금갑 하나를 던졌다. 금갑은 허공에서 뚜껑이 열렸고, 순간 영롱하기 이를 데 없는 묵광(墨光)이 번쩍거렸다. 이어 금갑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진귀하기 이를 데 없는 심해(深海)의 흑진주(黑珍珠) 수십 알이었다. "크핫핫… 사실 목가의 전통은 고리타분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새로운 주인으로 인해 경천동지할 변혁을 맞이했군. 실로 좋은 발전이로다. 자고로 연회는 흥취가 있어야 하는 법! 집 안에 병자(病者)가 하나 있다고 해서 모두 늙은 개처럼 꼬리를 말고 주눅들어 지내서야 어찌 사람이 산다 할 수 있으랴?" 금무외가 득의해 소리칠 때였다. 홀연 목야성의 귓속으로 모기 소리처럼 가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소주! 금무외는 늘 총표파자의 자리를 노리는 자이니,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의어전성(意語轉聲)에 의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신산수라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 나온 목소리였다. 그는 혹시 목야성이 금무외를 좋게 생각할까 우려한 나머지, 그러한 경고의 말을 건네 온 것이다. 사실 금무외의 재산은 다른 여덟 거상의 재산을 다 합한 것 이상이었다. 상권의 단일세력으로 목가와 겨룰 수 있는 세력은 금무외의 해상세력이 유일하다. 하기에 목가가 금무외의 대해상가(大海商家)와 연합을 유지하는 경우에는 어떠한 세력의 저항도 쉽게 막아 낼 수 있다. 솔직히 말해, 오늘 밤 연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목야성과 금무외가 처음으로 대면(對面)을 한다는 데 있다. '사해용왕… 일컬어 부도상옹……!' 목야성은 금무외가 흑진주를 뿌리며 건방지게 웃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 그만이 알 수 있는 미소가 번져 났다. '후훗… 배짱이 마음에 드는군.'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