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 언약적 사랑, 비움의 사랑/ 미하엘 벨커/ 케노시스 창조이론
1.소위 “낭만적 사랑”과 실재의 궁극적 본성인 사랑에 관한 관점을 얻을 때의 문제점
사랑이 창조적 힘이며 “실재의 궁극적 본성”과 연관된다는 것은 21세기 서구 산업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와 닿지 않지만 사랑없이 배우자의 결혼이나 가족이 더불어 사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술과 더불어 사랑이 노동과 착취, 국가의 규제, 기술발달 등의 사회적인 특징들에 대항하는 방어작인이 되거나 예술로 승화시킬 희망은 실패로 끝났다. “사랑의 열정은 사랑에 관련된 일련의 증거를 기대하고 그것을 확인한다고 해서 해소될 수 업는 병리 현상이다.” 그럼에도 낯선 긴장이 끊임없는 실망이라는 정상적인 상태 및 “사랑”에 몰려 있는 매우 높은 기대치들로 남아 있다. 여기서 긴장은 대중음악과 오락물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를 제공한다.
“낭만적 사랑”이라 불리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감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의사소통 안에 있는 “사랑”에 관한 이 문화적 집착에 사로잡히곤 했다. 기독교 신학은 “사랑”을 조명하고 성찰하면서도 이 “관계”,“상호성”, “나-너-공동체”에 관한 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즉시 드러난 몇몇 차이점 중에는 “에로스와 아가페”처럼 “고전적인” 개념이 된 사례도 있고, 최근에는 자기 지시(self-reference)와 자기부인(selflessness) 사이에 있는 복잡한 관계가 사고의 중심을 차지했다. 제시된 제안은 다소 모호하거나 수사학적이다. “아주 위대한 자기 지시 가운데 여전히 더 위대한 자기부인이 있다.”
낭만적 “사랑의 관계”에 대해 집중하면서 엄청난 축소 지향성이 나타나 종교적 관점에서 본 사랑의 개념은 물론 가족간 사랑의 관계라는 구조적인 풍성함조차도 생략되었다는 사실조차 모호해졌다. 방향성에 무능하다는 점은, 아마도 최근 서구 산업국가들이 동반자 관계에만 중점을 두는 에토스-동성 동반자들의 결혼에 관한 논의들-에 대항하여 가족관계에 근거하는 에토스에 특권을 부여하려는 시도에 대해 어려움을 일으키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사랑”에 관해 드러난 것들이 매우 드물고 빈약한 데도, 사람의 관계 사이에 일어나는 애정 관계를 다루는 패러다임에 관한 연구가 집중되는 현상이 계속되었다. 이 책을 낳은 모임에서 다룬 주제인 “사랑과 실재의 궁극적 본성; 우주론, 자유, 그리고 비움의 신학”은 이 사상에 심취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제안으로 간주할 수 있다.
적어도 저자는 이 주제를 종교적 원천을 기반으로 사랑의 능력에 대한 깊은 이해를 회복하자는 제안으로 읽고 싶어하며, 개인 및 가족관계의 맥락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저자는 “나와 너”라는 관계성의 한계 안에서 사회적·문화적, 그리고 심지어 우주적으로 사랑을 행할 능력인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한 추상적인 펼치지는 않으려 한다.
2.창조의 능력인 사랑이 성서 전통의 기초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한 논의들
먼저 수많은 “사랑”의 “관계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모세 오경부터 아가서에 이르기까지 가족이나 인격 대 인격 간의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언급하며, 그 중에는 낭만적인 사랑의 형태도 있지만 일반적인 형태의 이웃사랑, 타인사랑, 원수사랑, 그리고 사회관계 형성을 주제화한 “형제” 사랑 또는 우애가 훨씬 더 많다.
“하나님을 사랑함”이란 개념을 다루는 하나님 이름, 말씀, 정의, 교훈 계명, 율법 등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주목하는 이러한 “관계”는 어두움이나 불의에 대한 사랑과 같은 형태와 내용들이 풍성하게 남아 있으므로 더 세밀하게 다뤄야한다.
성서 전통속에 매우 다양한 “사랑의 관계들” 외에도 하나님을 사랑함이라는 개념이 계명을 존중함과 “계명에 집중함”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음” 같은 개념들과 오랜 세월에 걸쳐서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놀랍다. “하나님을 사랑함” 개념과 하나님의 의도와 질서에 따라 행동함 사이의 관계는 예수와 창조주의 관계에서 명확해지며 요한문헌(요14:31)에서 상세히 드러난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함”이란 개념은 명백히 그 의도를 받아들이고 추구함을 의미한다.
창조세계와 선한 질서와 번영에 관한 하나님의 관심은 이웃사랑뿐 아니라 이방인, 원수사랑을 통해 최고, 최상으로 완전하게 수행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을 사랑함을 단순히 일대 일 상호 관계로이해할 수 없다는 진술이야말로 하나님을 성취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다. 따라서 소위 “사랑에 관한 이중 계명”은 서로 다른 두 기본 관계의 결합이 아니라, 확고하게 연결된 하나의 계명으로 간주해야 한다.
하나님과 맺는 사랑의 관계는 단순히 “동기를 부여하는 도덕적 능력”도 아니며, 단순한 상호 대칭을 추구하는 사랑의 관계를 벗어나려는 자극의 연속 아니다. “너희가 만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눅6:32,눅6:33;마5:46-47)와 요한문헌(요일4:12-20)에서, 보이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보이지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관련 지을 때,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은 그저 “추상적인 상호성”을 의미하지않으며, 인간은 “신비적으로” 그 안에 참여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하나님이 더불어 사랑하시고 더울어 사랑받기 원하시는 사랑은 인간에게서 드러난다. 이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정체성과 능력이 알려지게 된다. 창조주는 사랑의 관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적 능력을 부여하시며, 같은 맥락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친밀하게되고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에 참여하게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에 참여함을 묘사하며(롬5:5) 동시에 쉽게 파악되지 않는 과정-자신을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위한 사랑에 사로잡히고 깊이 새겨지게하는 사람들 안에서 나타나는 성장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서술한다. 인간은 인간을 변혁시키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맺은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 점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복합적으로 맺는 사랑의 관계가 신비한 관계속으로 빠질 조짐을 보이면서도 살아있는 사랑의 관계는 전혀 신비한 연합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추상적인 평등에 기초하여 그들의 인격적 감정을 서로 교감하는 사랑,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낭만적 사랑이 분명 아니다. 하나님과 맺는 살아있는 사랑의 관계는 피조물 가운데서 사랑의 형태들을 형성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참여하게 하며, 성장과정을 자유롭게 한다.
다른 신약성서 전통에서도 이 성장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정체성과 진리에 참여함을 서술한다.(고후5:14-17, 골2:2ff, 엡3:11,17ff)
3. 언약적 사랑과 비움의 사랑
폴킹혼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언약적 형태의 사랑을 “강제적 측면, 계시적인 측면, 그리고 변혁적인 측면”으로 구분하면서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를 인용한다. 언약적 사랑은 인간에게 큰 위엄을 부여한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개념으로서 인간은 창조세계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추구할 뿐 아니라 세계의 안녕에 관한 하나님의 관심을 맡아 추구할 위엄을 갖추고 있다.
언약적 형태의 사랑은 사랑의 무게, 즉 사랑이 가진 소통하며 창조하는 능력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철저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도전이지 짐처러 보일 수 있다. 언약적 형태는 마치 하나님의 사랑이 가진 보편성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면, 누가 언약적 사랑의 기초 위헤서 이 모든 것을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낭만적인 사랑이란 용어로 표현되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피한다 해도, 언약적 개념은 우리가 실현하기에 버거운 살아 있는 율법으로 전환되는 위협이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반복해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비움의 사랑은 언약적 사랑의 위엄있는 무게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움의 사랑은 하나님의 의도를 돌 보거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계를 변혁시키도록 도울 잠재성도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사랑으로 의존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비움의 사랑을 통해 혼돈과 상실과 죄의 수렁에서 그들을 해방하기 위해, 오실 하나님의 통치에서 그들과 함께하시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이 제정되는 것을 누리는 데까지 이르도록 그들을 고귀하게 만드시기 위해 피조물에게 무조건 의존하신다.
이 비움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은 실제로 피조물의 개별성과 깊이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시며 피조물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드러내시는데, 그것은 피조물 자신의 계획에 적합하게 위해서만 아니다. 이 관심은 단지 변덕스러운 존재와의 변덕스러운 접촉에 대한 변덕스러운 갈망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배제하고 가리려하는 피조물과 만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그 결과 피조물은 마침내 “지복을 고유하고 참으로 창조적인 자유자라는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관한 열렬한 관심,타자 스스로 자유롭게 자신을 드려내게 만드는 데 관한 열렬한 관심, 타자의 삶을 펼치기 위해 길을 닦으려는 데 관한 열렬한 관심, 이 모두는 비움의 사랑이 가진 특징이다. 이 사랑은 내가 “언약적 약속”과 “언약적 도전”이라고 부르고자하는 요소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타자를 향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움의 사랑은 새 창조에서 새로운 삶을 위해 타자를 얻으려는 새로운 언약적 관계성을 추구한다.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삶과 창조 세계에 대한 그분의 계획들에 친숙하고록 도와주는 지침이 된다. 조건없이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은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되며 새로운 창조 세계의 구성원으로 회복도록 하신다
요한일서보다 이런 의도를 더 자세히 서술하는 신약성서의 본문은 없다. 사랑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참조, 요일 3장)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4:7) 요한1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삶과 “새 생명”과 더불어 사랑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삶을 연결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에 머문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는 새 창조를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참조, 요일3:14)
이 전체 과정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일대 일 사건이 아니며, 사랑을 드러내고 창조 세계를 옛 것에서 새것으로 변혁시키려는 것은 창조 세계의 나머지에 가장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한 공동체 안에서 믿음, 사랑, 소망이 고양되기를 원하는 바울의 불타는 즐거움을 향유하고 종말론적인 성취를 기대하고 그것을 향해 자라가는 공동체이다. 로마서 8장의 발전과 성장은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한 중요성을 지니는 것만이 아닌 하나님의 비움의 사랑 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삶은 모든 창조 세계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안전히 드러나는 상황을 기대한다는 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롬8:19)이다.
하나님의 비움의 사랑은 창조 세계에 하나님의 비움의 사랑 자체와 새 생명의 능력을 조건 없이 공유하도록 내어주시며, 자주 우리를 하나님과 풍성한 계시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비움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 능력을 드러냈고, 성령의 사역으로 피조물에 주어졌으며, 인간을 창조적 사랑으로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현존을 담지한 자들이 되게 하고, 새 창조물로서 성육신을 담지하게 한다.
질문1. “낭만적 사랑”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로미어와 줄리엣’이라는 작품은 문학과 연극 등 예술방면에 낭만적 사랑에 대한 강한 영감을 선물하였다고 본다면, 저자는 “낭만적 사랑”이 가족중심의 대가족사회에서 산업중심의 도시사회로 변화되는 시대적인 이데올로기로 보고 있지는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