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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스토리 스크랩 Miuccia Prada(미우치아 프라다)
아휘 추천 0 조회 67 11.02.28 17: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미싱쏭이 소개하는...

열두번째 디자이너

Miuccia Prada |미우치아 프라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 매 시즌 프라다의 컬렉션이 전세계 패션피플들의 쇼핑품목 1순위에 오를 정도로 트렌드 감각이 뛰어난 그녀가 정치학 박사 출신이며 한 때 여배우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식으로 디자인 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 그녀에겐 타고난 특별한 기질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프라다의 집안은 할아버지때부터 고급 가죽제품을 생산하는 패밀리 비즈니스를 운영해왔다. 프라다가 28살이 되던 1978년, 그녀는 어머니의 독촉으로 하는 수 없이 사업을 물려받았다.

가죽 제품에 식상한 그녀는 1985년 정교하게 짠 블랙 나일론 백을 선보였는데, 그녀의 예상대로 이 제품은 순식간에 전세계 패션 애호가들의 필수품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나일론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소매가가 4~50만원 이상 나가자 다른 나라에서 밀매업이 활성화되었고 이에 진품의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또한 슈퍼모델들과 패션 에디터들이 필수 아이템으로 꼽혀 더 이상의 홍보가 필요 없을 정도로 나일론 백의 인기는 식을 줄 몰았다.

나일론 백의 신화를 바탕으로 1989년에 그녀 이름의 기성복 컬렉션을 발표했다. 약간의 포인트를 준 간결한 디자인은 지나치게 감각적인 다른 브랜드와 대조를 보였다. 그녀를 경외하는 어느 패션 저널리스트는 프라다의 의상을 '특권을 박탈당한 유니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프라다의 성공적인 런칭에 이어 1992년에는 세컨트 라인 미우미우(미우치아의 닉네임)를 선보였다. 미우미우는 내추럴 패브릭과 자유로운 컬러믹스의 히피 룩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깔끔하고도 스타일리시한 디자인, 뛰어난 품질의 재료, 정교한 재단 기술로 인해 프라다는 1993년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어워드의 패션 디자이너 위원회에 추천되기도 했다.

 

Miuccia Prada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90년대식 패션의 창조자

현대적인 우아하고 견고함을 지닌 일명 '나일론 백'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이탈리아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 화려하고 변덕스럽기로 소문난 할리우드 스타로부터 슈퍼모델, 패션기자들을 비롯한 열정적인 팬을 확보한 그녀는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90년대식 패션을 창조해낸 주인공이다.

 
단번에 시선을 끄는 화려함도 없고 여성임을 무기(?)삼는 섹시함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멀리서 보면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상당히 아름답다. 이것이 현대적인 여성을 위한 프라다 스타일이다.

1978년 그 유명한 나일론 백을 세상에 내놓은 프라다는 원래는 '평범한 여성'을 대상으로 출발했다. 그후 그녀의 단순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눈여겨 본 패션기자들에 의해 우선적으로 인정을 받은 프라다는 현재 까다롭기로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는 물론 린다 에반젤리스타, 크리스티 털링턴 같은 슈퍼모델들이 가장 사랑하는 브랜드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유럽 디자이너로서는 샤넬이 수상한 이후 오랜만에 오스카상 패션 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한 프라다. 환상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인 디자인에 프라다 자신도 놀랄 만큼 패션의 최첨단을 걷는 여성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현대 여성들이 원하는 단순함, 세련됨, 여성스러움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골고루 지닌 데 그 비결이 있다. 70, 80년대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진출이 가져다준 여성상은 파워풀하고 다소 과시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여성은 더이상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를 옷으로 내세울 필요가 없어졌고 단순히 자신들의 '취향'에 의해 옷을 고르고 스타일을 결정했다. 이때 현대적인 우아함을 갖춘 실용적인 디자인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빅히트를 친 아이템은 낙하산 나일론으로 만든 로고가 없는 검정 백팩. 그 뒤를 이어 선보인 무릎 길이의 스커트, 광택있는 에나멜 가죽 숄더백, 그리고 실용적인 검정, 네이비 수트 등은 계속적으로 인기를 끌며 프라다 스타일을 구축해 나갔다. 그녀는 나일론을 90년대의 고급스럽고 실용적인 소재로 부각시켰으며, 호마이카 프린트 셔츠와 소매없는 드레스는 유명 인사들에게 인기를 끌며 유럽의 모든 패션 거리에서 복제되는 최고의 아이템으로 만들었다.

특히 '95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선보인 무릎 길이 스커트는 패션계에 새바람을 몰고왔다. 미국에서는 '프라다의 뉴 라인(New Line)'으로 환호를 받기도 한 니렝스 스커트는 여성미의 극치를 드러내주는 디자인이다.

"무릎 길이 선은 가장 전형적인 여성미를 드러내주는 디자인입니다. 여성스러움을 되찾고 싶은 욕구가 여성들의 마음에 싹틀 때 맞아 떨어지는 패턴이죠."

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패션계에서 소위 말하는 '유행 경향'과는 전혀 관계없는 룩을 선보이며 이탈리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프라다. 남들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안티 룩'의 거장으로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그녀는 자신은 단순한 '제조업자'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솔직한 여성이다. 데생이나 재봉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시인하는 그녀가 하는 일은 '분위기를 창조해내는 것'. 단순하고도 클래식한 형태에서 순수한 본능에 따라 창작 작업을 한다. 틀림없는 취향으로 확실하게 취사 선택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진 프라다는 룩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상생활에서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을 만들 뿐이다.

프라다는 또한 다른 디자이너와는 달리 너무 개성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한다. 오히려 옷이 스스로 얘기하게 놔두는 것을 좋아한다. "프라다가 성공한 이유는 그것이 소리지르지 않고 속삭이기 때문이죠.

 


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죠."

디자이너 자신의 '개성'보다는 입는 사람에게 '캐릭터'를 부여하는 재능. 이것이 바로 그녀를 독보적인 존재로 만드는 요인이다.

 

가장 현대적인 소재로 탈바꿈한 나일론

 

우아하면서도 지적인 부르주아, 밀라노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과격한 페미니스트로 정치에 대한 열정과 패션에 대한 관심을 조화시킬 수 없었던 미우치아. 정치 전단을 나눠줄 때도 쿠레주의 옷을 입고 있었던 그녀는 28세가 되던 해에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마리오 프라다(Mario Parda)는 1931년 최고급 가죽가방을 주문생산하는 사업가로 부유한 밀라노 사람들을 위해 트렁크와 수트케이스를 제작했다.(당시 프라다를 구입하려면 하인들을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부자여야만 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여행가방은 한사람이 들기엔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1975년 마리오가 세상을 떠난후 미우치아의 어머니인 루이자 프라다가 회사를 물려 받았는데 70년대 후반 그녀가 은퇴했을 때 프라다는 단지 고급가방을 만드는 여러 기업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정치학을 전공한 좌익 경향의 학생으로서 그녀는 스스로의 그런 귀족적인 취향을 인정할 수 없었다. 가업을 잇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부르주아적인 일이고 지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여성의 일이었기에 심적 갈등을 겪었던 그녀는 곧 비즈니스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78년에 선보인 튀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돋보이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의 나일론 백이 첫 번째 도전. 일상적인 나일론에 대한 생각을 뒤집어놓은 새롭고 독특한 소재로서의 나일론을 생각해낸 그녀의 아이디어는 집요했다.

"오랫동안 머리 속에 있는 나일론을 찾아 헤맸는데 19세기에 설립된 군용물품 공장에서 드디어 발견했지요. 지금 그 공장은 문을 닫았는데, 그 공장에서 쓰던 기계들을 구입해 나일론을 생산했습니다. 방수 포코노(Pocono) 나일론은 조직이 가늘어서 촉감은 실크 같으면서도 아주 질긴 소재예요. 모두들 포코노를 모방하려 하지만 우리 품질을 따라잡을 순 없죠."

그러나 그녀의 첫 번째 모험은 실패로 끝났다. 적어도 처음엔 그렇게 보였다. 나일론 백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은 냉담했고 생산을 중단하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그녀는 밀고 나갔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4,5년을 기다리니까 폭발적인 인기 품목이 되더군요. 그제서야 여성들은 나일론 백이 가진 현대적인 요소를 알아챈 거죠. 가볍고 튼튼하고 밤낮없이 언제나 들고 다닐 수 있는 가방이니까요."

에르메스, 루이비통, 구찌 같은 디자인이 가방의 고전으로 절대적이던 때 지금까지의 여성 모드와는 상관없는 안티모드(Antimode)적인 디자인의 핸드백을 만들어낸 사람은 미우치아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프라다 백'이 가방의 고전으로 통한다.

진정한 모험이 시작된 80년대 기업인 파트리지오 베르텔리(Patrizio Bertelli)를 만나서부터이다. 프라다 왕국을 건설한 동업자이자 남편인 베르텔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비꼬는 성격을 가진 이탈리아 태생의 악세사리 제조업자였다. 그들이 무역박람회에 참석했을 때 프라다는 그를 필사적으로 찾아내서 자신이 만든 가방을 모방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결과는 베르텔리가 그 제품을 생산하게 되었다.

미우치아의 뛰어난 패션감각과 생산성, 시장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가진 베르텔리의 결합은 지금의 프라다를 만드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선천적인 디자인 감각으로 이론적이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디자인하는 미우치아의 잠재력을 흔들어 깨운 것도 그였고, 현재까지도 최고의 비평가 역할을 하고 있는것도 바로 그다. 바르텔리의 끈질긴 권유로 1985년부터 구두를 만들기 시작한 프라다.
그러나 결정적인 찬스는 여성복을 선보인 1988년에 다가왔다.

디자이너로서 정식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어릴 적부터 옷 입기를 즐겼던 그녀가 새롭게 도전한 의상 디자인은 또 다른 세계를 열어 주었다.

"옷에 대한 애착이 없는 날은 지독한 병에 걸려있다고 봐도 좋을 만큼 옷 입는 것을 좋아했어요. 패션사에도 관심이 많았고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도 있었구요.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이브 생 로랑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우리가 옷을 사고 입는 행위는 몸을 적당히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신과 자기 표현의 욕구 때문이잖아요? 나는 컬렉션을 준비할 때마다 항상 패션의 즐거움, 변화의 기쁨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프라다의 디자인에서 소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녀만의 독특한 디자인 세계를 보여주며 숱한 모방품을 낳았던 우아하면서도 현대적인 색상의 표현에 있어서 소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옷감은 나의 정열이에요. 옷감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정확히 알고 있었죠. 어렸을 때부터 멎진 옷감들을 보고 자랐으니까요. 심플한 단색이나 무채색 디자인을 원할 때는 무엇보다도 옷감이 제일 중요해요. 화려한 천 말고 진짜 천. 한번은 나일론을 다른 천들과 혼합해서 사용했는데, 밝으면서도 더욱 현대적인 색채를 얻을 수 있었죠."

부부가 창작과 제조를 맡은 프라다는 제조 전과정에 있어서 엄격한 품질검사를 거친다. 핸드백과 구두, 의류를 디자인하고 생산하는 데 필요한 단일 운영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에 의해 모든 샘플들은 디자인에서 완성단계 이르는 전과정을 플로렌스 근처의 투스카니에서 거치게 되었다. 그녀 스스로 '강박관념'이라고 표현할 만큼 품질에 대한 엄격하고도 까다로운 기준은 프라다의 두 번째 성공 요인이다.

패션계의 화려함을 등진 수줍은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매력적이거나 너무 빈틈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는다.

"인터뷰는 제게 작품의 주제를 생각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래서 수줍음을 타게 되고 사람들을 피하게 되나 봅니다."

미우치아는 그러한 모든 것들이 혼란을 가져다 준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을 매우 개인적인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그녀는 패션계의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거대한 대중적인 이미지를 갖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다른 디자이너들처럼 유명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 생활의 현실성을 빼앗아가기 때문이죠. 저는 옷을 디자인하는 가정주부지 슈퍼스타가 아니거든요."

제트기로 날아다니는 다른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프라다와 베르텔리는 그들의 사적인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조용히 보낸다. 결코 사회적인 은둔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패션에 가장 민감하고 빠른 지역에 자주 가지도 않는다. 대신에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친구들과 함께 밀라노에 있는 집에서 함께 지내거나, 보트를 타고 바다에 나가기도 하고, 단지 아이들과 시골길을 거닐면서 긴장을 풀기도 한다.

일에 대한 열정 외에도 부부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미술이다. 밀라노에 미술 재단을 설립한 이들은 1년에 두 번, 컬렉션을 여는 장소에서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또한 그녀는 사생활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자기자신이나 가정생활이 대중에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프라다를 완전히 베일을 걷어내지 않은 듯한 신비한 여성으로 남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사진 찍는 것을 허락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저는 아주 부끄러워하는 편이어서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비밀을 좋아하기 때문에 중립을 지키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 문제죠.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를 원하지는 않아요. 저는 작품을 통해 제 생각을 표현하길 원해요. 작품을 통해 제가 누군지 알 수 있게 말이죠."

프라다는 디자이너의 삶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생활과 호기심 어린 시선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생에서 더 중요한 일을 해야한다고 늘 생각한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프라다의 평등주의적인 본성의 한 측면이다. 가족의 사업에 참여하기 전에 수년 동안 페미니즘부분에서 서열이 급상승하던 이탈리아 좌파의 실제 당원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을 사랑했던 그녀는 "제가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사물을 보기때문에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었죠. 저는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러한 본성은 저보다 더 강했으니까요."라고 말한다.

어떤 곳에서든 프라다는 패션에 대한 사랑으로 소비자와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입장을 둘다 만족시킬 수 있었다.

"사람들이 한 남자, 한 여자, 혹은 친구들이나 사회를 위해 옷을 입는다면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법에는 다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패션은 그리 바보 같은 짓이 아니죠".

프라다 자신이 디자이너로서 가정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을 이루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그녀는 그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일, 가족, 행복을 조화시키는 것입니다"

 

세컨 라인에서 남성복까지

1988년 여성복 프레타 포르테를 시작으로 '컬트'적인 위치를 확보하며 성공 일로를 달리고 있는 프라다. 그녀의 옷에서는 내면의 자질이 느껴진다. 아주 은밀하고 개인적인 자질이... 이러한 내적 자질은 여성 디자이너의 성공 여부를 가름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가끔 디자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나라면 과연 이 옷을 사겠는가?' 스스로 반문한다. 그러면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다.

그녀가 가진 또 다른 재능은 사물을 보는 남다른 시각이다. 이러한 다소 엉뚱하고 유머가 담긴 아이디어는 1993년 선보인 세컨 라인 '미우미우'에서 그 빛을 발한다. 가장자리 옷단을 없애고 벨트를 넓히거나 신발의 모양을 바꾸었을 뿐인데 패션계의 판도가 달라졌다.


"나에게는 두 가지 취향이 있어요. 아주 우아하거나 아주 나쁜 취향이지요. 미우미우는 나쁜 취향쪽이에요."

미우치아의 이탈리아 애칭을 딴 미우미우의 이미지는 우아해지고 싶은 욕망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어리고 순진한 소녀, 무엇이 좋은지 몰라서 더 섹시한 소녀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보급 라인은 아닙니다. 그냥 세컨 라인입니다. 세컨 라인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급 라인은 값도 저렴하고 메인 라인을 복제하는 것에 가깝지만 미우미우는 다르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1995년 시작한 남성복도 순식간에 패션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현대적인 단순함, 그러면서도 조용한 세련됨 등 여성복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소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 남자들이 평범하게 옷을 입은 것을 좋아합니다. 평범하면서도 세련된 것, 프라다의 장점은 오피스에서도 입을 수 있는 옷이란 점이죠.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보면 아방가르드적인 분위기를 낼 수도 있구요."

패션에 관한 한 프라다의 추진력은 늦춰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와 바르텔리는 계획한 모든 일을 끝내면 곧바로 새로운 모험을 다시 계획한다.

'97 가을/겨울 시즌 첫 선을 보인 란제리 라인 '프라다 인티모'에 이어 이미 윤곽을 잡아놓은 프라다 화장품과 향수는 1998년 봄에 선보일 예정이며, 홈 컬렉션도 1999년 런칭했다.

다른 업체들의 인기는 치맛단처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지만 프라다는 지금까지 상승가도를 달리며 전세계 곳곳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디자이너 위상이 막강한 동양권을 겨냥하고 있다. 국내에도 이미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프라다가 7월중 런칭, 여성복과 남성복, 그리고 그녀의 성공 기반이 된 가방, 신발 등의 악세사리를 선보인다. 한국에서도 또다시 프라다 열풍이 몰아칠 것인가? 기대가 자못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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